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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새 땅의 삶
본문 : (창 8: 20-22)
주요내용 : 새 삶론
자료출처:http://cafe.daum.net/agaser
요 약
본문은 노아가 새 땅에서 새로운 삶을 출발하는 사건으로 성도의 삶의 원리를 보여준다. 즉 성도의 삶의 원리는 말씀의 원리로 어떤 순간에도 말씀에 입각한 생활이 되어야 한다. 또 성도의 삶은 성령의 원리로 성령의 흐름에 민감해야 한다. 그리고 성도의 삶은 예배의 원리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목표로 살아야 한다. 그러니까 이 세 가지는 객관적 주관적 궁극적인 하나님의 뜻을 각각 우리에게 보여주는 셈이다.
설 명
< 복의 비결 >
☞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노아는 복을 받았다.
1. 말씀에 순종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15)
"나왔고 - 나왔더라"(18.19)
자기 판단대로 하지 않음
2. 성령의 원리
"더불어" "함께" "모든"(16-19)
전 인격 - 공동체
3. 예배의 원리
"흠향하시고 - 이르시되"(20-22)
정결한 예물 - 준비된 것
흠 없는 것 - 잘 보호함
예배 잘 드림에 그 소망이 있음
(본문)
20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21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22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창 8:20-22>
(강해)
이 시간에 "새 땅의 삶"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립니다. 오늘 말씀은 노아가 순종으로 방주생활을 끝내고 하나님께 번제로서 영광을 돌리고 복을 받는 내용입니다. 여기에 노아 언약이 나오는데 노아는 인류를 대표하여 아담에게 주신 복과 명령을 계승받고 있으며 몇 가지 더 강화되거나 보충되는 언약의 축복을 받습니다.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께서 다시는 인류를 홍수로 멸하시지 않겠다는 무지개 언약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지상을 덮은 대홍수로 창조된 한 번도 발로 밟지 아니한 땅에 첫발을 내딛고 새 삶을 시작한다는 점에서 멀게는 장차 나타날 영원한 세계이요, 가깝게는 변화된 성도의 새로운 삶의 예표입니다. 더구나 노아가 방주 뚜껑을 연 날이 정월 초하루 그러니까 1월 1일이었는데 이 날은 성막의 완성일과도 같은 날입니다. 거기다 노아의 나이 601세 그러니까 7세기 여기 7은 하나님의 시대인데 7세기가 시작되는 첫 날이요, 노아가 인류의 새 중시조가 된다는 점에서 충분한 새 시대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노아에게서 새 삶의 원리를 발견합니다. 이 원리를 알아야 할 중요한 이유는 이번에 어둠 세계에서 회개한 어느 보스가 다시 범죄하여 투옥되는 사건에서 보면서 회개한 이후 과거 자기를 따랐던 조직원들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을 풀어 가는 방법을 알지 못해서 저지른 일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처럼 새로운 생애를 출발한 성도들이 삶의 환경에 봉착하여 어떻게 살며 어떻게 문제를 헤치며 나가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그와 같은 결과가 나오기 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새 삶의 원리는 무엇일까요?
1. 성도는 말씀의 원리로 살아야 합니다.
15-17절에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 방주에서 나오고 - 모든 것을 다 이끌어 내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노아를 존경하는 것은 그는 새 인류 역사가 시작되는 마당에 인간적인 욕망을 절제하고 오로지 인내함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다는 점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모두 377일의 기간 동안 거친 파도 위에서 창문도 변변치 못한 방주 생활이 얼마나 힘들고 갑갑했겠습니까? 춥다고 개집을 비닐로 쌌더니 호흡으로 인해 개집이 물기로 가득 찬 것을 보면서 노아 방주의 형편을 상상해 봅니다.
창8:1에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육축을 권념하사" 란 구절을 참고할 때 혼자도 아니고 아내와 혈기 방장한 세 아들과 자부들과 함께, 더구나 비좁고 오랜 방주 생활로 인한 온갖 동물들의 요구 조건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도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물이 물러간 후에도 다 마르기까지 57일 동안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지기까지 인내하고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본문에 노아의 인내가 직접 간접으로 나타나고 있는 곳이 약 열 군데나 됩니다. 여기서 보여주는 새로운 삶의 원리는 말씀의 원리입니다. 어떤 상황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이 내려지기까지 가족과 동물들을 주관하며 기다린 것처럼 우리 속의 생각과 이론과 감정과 체험과 욕망을 통제하면서 말씀에 살고 말씀에 죽으면서 하나님께 온전히 순복해야 합니다.
그 무엇이라도 말씀을 앞 설 수도 대신 할 수도 없습니다. 사단이 우리 주님을 온갖 것으로 유혹해도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으로 이기셨는데 그 말씀의 유형도 여러 가지입니다. 첫 시험에서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리라 하셨고 기록된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두 번째 시험에서는 말씀 가지고 덤비자 잘 해석된 말씀으로 이기셨고, 세 번째 시험에서는 기록된 말씀에 견고히 서서 물리침으로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즉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여러 유형으로 적용하면서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기억하신 것은 우리가 주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있는 한 결코 굶거나 버림받거나 팽개침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책임지실 의무가 있고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인간이 살아가는 방법은 지극히 간단함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오직 은혜와 오직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마6:26-28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히13:5-6에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했습니다. 물론 노동의 불필요성을 뜻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큰 파도가 몰려오더라도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나아가듯 말씀에 기초하여 살고 안심하고 힘쓰고 충성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다른 것에 기준하여 살면 큰 혼란에 빠집니다. 만약 노아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이전에 방주를 나왔더라면 그는 아라랏산에서 크게 미끄러졌거나 깊은 수렁의 시험을 당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말씀을 우리의 삶의 원리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2. 성도의 삶의 원리는 성령의 원리입니다.
16절에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자부들로 더불어 방주에서 나오고" 그랬습니다.
본문에는 '더불어' 혹은 '함께' 혹은 '모든'이라는 용어가 여러 번 반복적으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혼자 나와서는 안됩니다. 사람과 짐승과 모든 생물과 함께 나와야 합니다.
이것은 신령한 의미에서 성령의 원리입니다. 엡4:3에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너무 성급하거나 단순한 사람들은 이 원리를 모르고 실패하는 수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너무 서두르지 마십시오. 가령 교회적으로 무슨 일을 할 때도 모두가 인정하고 소원하기까지 기도하고 동기부여하며 기다리면 전 교인들의 하나 되는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 때 무슨 일을 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실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큰 업적보다 자녀들이 하나되어 일하는 그 모습을 더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전능하시지만 가나 혼인집에서 하인들이 순복하는 자기의 때를 기다리셨고 그 때를 위하여 어머니는 하인들에게 당부하면서 때를 준비시켰습니다. 이처럼 우리 하나님께서는 창조와 구원과 영생이라는 큰 일을 하시는데 결코 성급하시지 않으시면서도 조금도 게으르지 않으십니다. 그 기간이 수 천년이지만 그랬기에 결코 실패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 성령의 원리는 특히 우리 인격에서 그래야 합니다. 여기 '더불어' '함께' '모두'라는 용어처럼 우리 인격이 다 다 동의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인격 안이란 우리 속에 성령의 임재를 전재한 말입니다. 거듭난 성도의 인격적 특징은 성령께서 우리 인격의 일부처럼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데도 내 중심에서 동의하지 않으면 기다리든지 중단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성도의 삶의 방식입니다. 우리 속에서 동의한 것만이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빌2:13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자녀에게 사명이 있어 자세한 안내는 해도 강제로 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스스로 자원하기까지 기다려야지 그렇지 않으면 조그만 어려움도 견디지 못하고 실패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성령 따라 충성하고 성령 따라 봉사하고 성령 따라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 성도는 이 성령의 흐름을 거스리며 살수 없습니다. 이 성령의 흐름 따라 살아갈 때 성도의 삶은 만사 형통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흐름을 거스리며 살 때는 고통이 따릅니다. 그러니까 앞의 말씀의 원리가 삶의 객관적 원리라면 이 성령의 원리는 삶의 주관적 원리입니다.
3. 성도들의 삶의 궁극적 원리는 예배의 원리입니다.
20절에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했습니다.
여기에 노아의 경건한 신앙이 나타납니다. 노아는 방주에서 나와 맨 먼저 하나님께 정결한 짐승으로 번제를 드렸습니다. 우리가 천국에서 해야 할 가장 큰 일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 '흠향하셨다'와 '그 중심에'란 용어 속에는 그 제사에 감동하여 기뻐 받으셨음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제사가 되려면 노아에게 그 비결을 배워야 합니다. 그럼 그 비결이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노아의 제사는 이미 계획되고 철저히 준비된 것이었습니다. 노아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처음부터 정결한 짐승을 일곱씩 준비하고, 일년 동안 그 비좁은 방주에서 혹시 죽거나 마르거나 병들거나 흠이라도 생길까봐 매일 같이 잘 돌보았습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준비하고 준비된 정성어린 제사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그 향기에 깊이 감동 되사 복의 말씀이 저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예배의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의 첫 사건도 예배의 사건이요, 최초의 부흥운동도 셋 자손의 예배의 회복이요, 노아도 아브라함도 이스라엘도 그들의 중심은 예배였고 그들이 십일조를 드려 레위 지파를 살린 것도 다 예배를 위해서였으며 그래서 예배에 성공하면 그들은 복을 받고 예배에 실패하면 전쟁과 기근으로 멸망했습니다. 초대교회도 예배 열심히 드리다가 성령을 받았습니다. 앞으로 개인의 희망도 교회의 희망도 세계의 희망도 예배 잘 드리는데 있다는 것이 인류 역사의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무슨 일도 좋지만 우선 예배를 잘 드리기 위해서 매일 기도하고 연습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그 때 성령이 임하고 부흥이 임하고 복이 임하고 기적이 임합니다. 그래서 부흥되는 교회는 그 만큼 기도의 맴버들이 기도를 밑받침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철저한 예배 준수와 함께 노아처럼 온갖 힘을 다해 우리 영의 제물을 준비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는 것과 다시는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겠으며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노아에게 세우신 언약일 뿐 아니라 예배자에게 주시는 생명의 언약입니다. 이처럼 예배할 때 저주도 사라집니다. 예배할 때 죽은 심령도 살아납니다. 예배할 때 영육 간에 큰복을 누립니다. 그리고 춘하추동 사계절이 계속됨 같이 예배할 때 아무도 막지 못할 성령의 법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그대로 현실화하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예배는 나아가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사는 삶의 예배로 나가야 하는데(롬12:1-2)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삶의 원리요 목적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노아 방주의 뚜껑이 열리듯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세계의 삶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 안에 성령으로 새 삶을 사십시다. 그러기 위해 말씀으로 충만하십시다. 성령으로 충만하십시다. 예배를 잘 드리십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영육 간의 형통함과 새로운 복으로 가득하게 부어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