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 보니 어제 빨래한 옷들이 볕이 좋아 다 말랐다. 오늘도 날씨는 맑다. 길을 걷는 우리에게는 좋지만 가뭄이 오래되어 밭작물들이 말라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모습이 참 안쓰럽다. 내일에는 소나기 소식이 있으니 기대가 된다. 인근 식당에서 국밥으로 아침을 먹고 11코스를 출발했다. 마을길을 지나 모슬봉으로 이어진다. 숲길 사이로 경사길을 오르니 왼편으로 산방산이 우뚝 서 있다. 9코스부터는 산방산을 주위로 뱅뱅 돌고 있다. 모슬봉(표교 180m) 정상이 오르니 젊은 아가씨 둘이 쉬고 있다. 제주에 1년 살이 하러 왔고 곧 돌아간다고 한다. 중간 스탬프를 찍고 잠시 쉬었다. 앞쪽으로는 산방산 옆으로 수평선이 아득하고 왼편으로는 멀리 군데군데 부드러운 능선의 오름들이 솟아 있다. 모슬봉 뒤편으로 산길을 다 내려왔는데 태용이가 올레패스포트를 산 정상 스탬프 자리에 놓고 왔다고 한다. 아뿔사 약 1km가 넘는 산길을 다시 올라가야 한다. 나는 산 입구에 기다리고 있고 태용이만 배낭을 내려놓고 다시 올라갔다. 나무 그늘에 앉아서 오늘 코스를 보고 있는데 태용이가 내려온다. 패스포트는 정상 올레스탬프 자리 위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고 한다. 왕복 2km가 넘는데 빨리 왔다. 산길을 다람쥐처럼 달려온 셈이다. 앞으로는 쉬었던 자리를 다시 한번 살피도록 해야겠다. 모슬봉을 내려오면 보성리로 아주 넓은 밭 사이로 길이 어이진다. 남쪽으로는 모슬봉, 송악산을 보이고, 북쪽으로는 당산봉이 가까이에 있다. 저 멀리는 봉우리가 흰구름에 둘러싸인 한라산이 늠름하게 위용을 드러내고 잇다. 이곳은 제주에서 드물게 평야지역이고 토질이 좋아서 예부터 농사가 잘 되어 잘 사는 마을이었다고 한다. 넓은 밭 가운데 길을 따라 한참 걷다 보니 정난주마리아 묘소가 보인다. 정난주는 다산 적약용의 조카딸로서 백서사건으로 순교한 황사영의 아내로 바람의 땅 대정읍에 유배되어 관비로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정난주마리아는 제주가 맞이한 첫 번째 천주교인으로 당시 대정 주민들로부터 신망을 얻어 조용한 삶을 살 수 있었다고 한다. 귀양 당시 추자도에 버려두고 온 두 살배기 아들이 착한 부모를 만나 무사히 장성했음을 알았지만 끝내 만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다시 밭길을 한참 지나서 올레길은 신평무릉곶자왈로 이어진다. 곶자왈은 나무와 넝쿨 따위가 마구 엉클어져 수풀이 어우리진 곳을 제주어로 이르는 말이다. 화산이 분출할 때 점성이 높은 용암이 크고 작은 덩어리로 쪼개지면서 매우 두껍게 쌓인 곳으로 빗물이 그대로 지하로 스며들어 깨끗한 지하수를 품고 있다. 보온보습효과가 있어 열대 북방한계식물과 한대 남방한계식물이 공존하는 세계 유일의 독특한 숲이다. 곶자왈 안으로 들어서니 한낮인데도 어두컴컴하다. 좁은 길 양옆으로는 다양한 종류의 나무들과 넝쿨식물들이 어우러져 잇다. 구불구불 이어진 좁은 산책길이 약 5km나 된다. 곶자왈은 용암이 굳어 생긴 검은 바위 위로 흙이 덮이고 다시 생명이 움트기 시작해 사람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신세계라고 할 수 있는 신비롭고 아름다운 곳이다. 곶자왈을 벗어나니 다시 환하게 밝아졌다. 이어 길은 인향동 마을길을 통과해 로터리를 지나자 찻길 옆에 오늘의 목적지인 무릉외갓집이 보인다. 오늘은 모두 3만보 20km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