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가?(시 1:1~6)
#663 하늘양식(시) 2019.12.11.(수) 임태일 목사_미국 선교사(11.8.9)
요절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편 1:3)
The person is like a tree planted by streams of water,
which yields its fruit in season
and whose leaf does not wither-
whatever they do prospers. (PSALMS, NIV)
돌도끼로 힘들게 나무하는 북미 원주민에게 한 백인이 쇠도끼를 선물했습니다.
이것을 쓰면 짧은 시간에 더 많은 나무를 할 수 있다고 이른 뒤, 한 달간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그들은 이전과 같은 분량의 나무를 하고 쉬고 있었습니다.
백인이 의아해서 물었습니다.
“아니 내가 준 도끼로 나무를 했으면 더 많이 했을 텐데 무슨 일이가요?” 원주민이 대답을
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던 참입니다.
당신이 준 도끼로 나무를 하니 훨씬 일이 잘돼 쉬는 시간이 더 많아졌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북미 원주민들은 예로부터 하늘과 땅을 비롯해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에 경외심을 가지고
살아 왔습니다.
그들은 더 많이 가지려하거나 더 많이 쌓아두려는 현대사회와 거리가 멀었습니다.
농사를 짓고 사냥을 해도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 얻으려 했을 뿐
오늘처럼 닦달을 하듯 농약을 써서 농산물을 키우고,
차고 넘쳐 또 다른 저장소가 필요할 정도로 채워 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복음을 처음 접할 때에도 이구동성으로
“예수는 마치 우리와 같은 분”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으며,
이 땅에서조차도 최소한의 양식과 의복 외에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 문득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가?”라는 물음을 던져봅니다.
아울러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3)”라는
말씀을 묵상해봅니다.
복 있는 사람은 마치 시냇가에 심긴 나무가 창조주께서 정해주신 때를 따라 열매를 맺는 것처럼,
우리에게 매순간 끊임없이 부어주시는 창조주의 은총에 눈을 뜬 사람이 아닐까 합니다.
하나님의 은총 없이는 단 하루도 살수 없다고 고백하면서,
정작 우리의 일상 속에 이미 와 있는 참된 복을 깨닫지 못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도 없을 것입니다.
신앙이란 유난스러운 게 아닙니다.
창조주의 뜻에 순복하여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눈을 뜨고서,
저 막막한 세상을 넉넉하게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이야말로
참된 신앙의 길로 나아가는 첩경인 까닭입니다.
최근에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한 것은 언제인가?
[생활영어] (조선)
A
Mike is a really interesting person.
I think he might be a genius.
마이크는 정말 훌륭한 사람이네요.
천재가 아닐까싶어요.
B
Mike?
The guy who always say off-the-wall things in meetings?
마이크요?
회의에서 항상 엉뚱한 말만 하는 사람 말이에요?
A
Yeah. Think about it-
what he says seems weird at first,
but it usually turns out to be a really creative idea.
네 생각해봐요.
그가 하는 말이 처음엔 이상해 보이는데,
아주 창의적인 아이디어라는 것이 증명되곤 하잖아요.
망국의 징조 -계속-
2.1 후금과 명의 원군, 宣川부사 김응하
누루하치가 여진족을 통일하고 후금(후에 청)을 건립하였다.
명은 후금을 정벌하기 위하여 우리나라에 원병을 청하게 되어 1만3천 군사를 편성하게 이르렀다.
임금은 마지못해 강홍립을 도원수로 삼고 3영을 편성하였는데 그중 선천부사 김응하가
중영장으로 임명되고 선천의 군병들이 그를 많이 따라 갔다.
압록강을 넘어 요동 땅, 심하 부근의 회전에서 명군과 더불어 조선의 원군도 궤멸되기에
이르렀다.
1619년 도원수 강호립을 위시한 수천 명이 후금의 포로가 되였으며 선천부사 김응하는
그 전투에서 전사 하였다.
나라에서도 그의 분전과 용명을 찬양하여 충신열사로 추재 하였으며 충열공의 시호를 내려
선천 의열사에 제정케 하였다.
이때 선천부사를 따라 출전하였던 선천 방위병 전사자는 모두 337명이라고 한다.
2.2 정묘호란과 선천군민의 용전
인조 반정이후 친명 반청정책으로 청의 태종은 1627년(인조5년) 3만의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도강 조선을 침략하였다.
개전 1주일 만에 선천과 곽산, 정주등 3군의 병사는 곽산의 능한산성에 집결하여 결사항전에
나섰으나 천여 명의 병력은 전멸, 바로 함락 되고 말았다.
이때 선천부사 기협만이 끝내 항전하다 장렬히 전사하였다.
적은 남하하여 평산에 이르렀으며 강화가 성립되고 그들의 철수회군부대가 선천군을 통과한
것이 4월 초순이었다.
이러한 후금군의 침공으로 입은 피해도 상당하려니와 그보다도 선천등지에서 수천의 금군
낙오병과 가달(부역 조선인)의 행패가 극심하였다.
더욱이 설상가상으로 가도에 주둔하고 있던 모문용 진의 명군들이 그 부근 해안지대에
무수히 나타나 약탈을 일삼으니 이지대 백성들이 모두 내륙으로 피난하였으나 굶어 죽은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2.3 淸江義士와 병자호란
당시 나의 고향 평안도 宣川에서는 어떤 상황이었나?
정묘호란이후 田世祿(담양 전씨, 18대손)은 선천읍에 성보가 없어 이러한 국난을 당함에
분연히 일어나 성의와 염려가 지극한 자는 모두 검산에 성을 쌓고자 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이극겸, 차일궤, 계유명, 김대정, 문기야, 지득남, 길경립, 田성춘 등 여러 사람이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드디어 검산성에 들어가 보전하게 되었다.
부사 민응건은 田세록을 병방군관 겸 좌영장으로 하고, 지득남을 우영장, 김여한을 전영장으로,
계숭노를 후영장, 길경립을 중군천총, 유몽남을 참모관, 차일궤, 계유명을 수성장, 田성충
그 외 제 장교로 하여금 수성케 하였다.
그 때 청의 기병이 철수해와 청강벌판에 주둔하였다.
전세록과 지득남이 출격할 것을 청하자 부사는 의아하여 여러 사람에게 물으니,
모두 대답하기를
“우리 읍은 적이 지나가는 초입로인데 우리가 약하여 그냥 보내 군왕의 치욕이 막심한데
이제 적을 보고 치지 않으면 어떻게 이 수치를 씻으며 어찌 천하 사람을 보리오“ 하였다.
부사는 이 말을 듣고 역시 분개하여 田세록을 모주로 삼고, 지득남. 길경립 등을
출성케 하여 적을 치게 하였다.
田세록이 우리 군세가 적어 기습을 가하지 않으면 승산이 없다고 하여,
지득남과 군사를 나누어 먼저 저의 후방에 매복하여 불의에 앞뒤에서 합세하니
적은 패배로 흩어져 야음을 틈타 멀리 도망쳐 달아났다.
천여 명의 경기일원의 선비부인들이 적의 포로가 되어 있었는데 적이 패하자 모두 풀려났다.
이 가운데 10여인이 군전에 이르러 사의를 표할 때
“한양으로부터 서북에 이를 때까지 수십 주를 지나왔으나 적을 치는 자가 없더니,
이제 귀공들의 힘에 의하여 다시 재생의 삶을 얻게 되었으니 그 은혜를 어찌 잊을 수
있으리오.“ 하며, ”돌아가면 반드시 조정에 알릴 리이다.”고 말했다.
조정에서는 지득남에게 첨사를 제수하고, 전세록에게는 첨정을 내렸으며,
그 외에도 수상을 하였다.
田성충에게는 사복을 겸하게 하였고, 田계립은 주부, 오준상은 수문장을 제수,
왕효길은 증첨정, 田효인, 옥명철, 이귀 역병수 겸 사복, 유몽남은 선참진무공신,
후유 정묘병자전 공수 겸 사복수문장 등 이하 각기 공에 따라 제수가자(품계 올림) 되었다.
-선천읍지 p106~115, 담양 전씨 선천파 세보 p71, 31대손 田元坤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