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독립운동가 후손의 추석 차례를 지내는 모습
고인이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지내는 제사와는 달리 설과 추석 또는 음력 초하루와 보름에 지내는 제사는 “차례”로 부르고 낯에 차례를 올리며 제를 모시는 방법과 형식도 약간 다릅니다.
이 독립운동가 분께서는 만주벌판에서 독립투쟁을 하시다 박정희(당시 이름은 다카키 마사오)중위가 지휘하는 만주군부대에 같은 고향에서 친구로 자란 다른 친구독립운동가 한 분과 같이 생포가 되어 박정희중대장 앞에 끌려가 독립군이 주둔하고 있는 위치를 불라고 숫한 고문을 받다가 혀를 깨물어 된 가래침과 선혈이 뒤섞인 침을 박정희의 면상을 향하여 “탁!” 뱉고 나서 혀가 잘려 떠듬떠듬하는 목소리로 박정희를 향하여 “내가 죽어 너 같은 만고의 역적 놈을 낳은 너희 어미의 구멍은 어떻게 생겼고, 애비의 조-t 대가리는 어떻게 생겼는지 그 무덤 속에 찾아 들어가서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어미 년의 구멍에는 독사 대가리를 쑤셔 박고 애비 놈의 해골바가지에다가는 내 똥을 싸서 두 연놈의 뼈다귀를 거꾸로 세워 다시 파묻으리라!”하고는 숨을 거두셨답니다.
(필자 주 ; "t"자는 자판을 영문을 한글로 바꾼 후 “t"자 키를 누르시면 영어가 한글로 번역이 되어 원래의 글자가 나옵니다.)
화가 치밀 대로 치밀어 올라 눈깔이 뒤집힌 박정희는 일본도를 꺼내서 이미 숨이 멎은 독립운동가의 시신을 난자하고, 이번에는 옆에 받줄에 묶여 있는 또 한 분의 독립 운동가를 향하여 “너 같은 조센징은 아깝게 천황폐하께서 하사하신 일본도를 더럽힐 필요도 없이 내 손으로 때려죽이겠다!”하고 일으켜 세우기 위해 몸에 묶인 오랏줄을 풀러 주더랍니다.
그 순간 독립운동가분께서는 펄쩍 뛰어 올라 박정희의 면상에 헤딩을 하여 박정희를 쓰러트리고 박정희가 손에 쥐고 있는 일본도를 빼앗아 도망을 쳐서 구사일생 살아나셨답니다.
그 생환하신 독립운동가분께서 해방이 되어 고향을 찾아 돌아가신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에게 아버지께서 장렬하게 순국을 하시던 모습을 전해줘 그 자식들이 자신이 직접 본 것 같이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장면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 아버지를 잃은 독립운동가의 후손은 살아 돌아오신 아버지의 친구 독립운동가분을 “아버지”로 부르며 두 집안이 한 형제보다도 더 가깝게 지내며 이웃하여 살고 있었습니다.
그 생환하신 독립운동가의 평생의 한이자 죄책감이 그때 박정희의 일본도를 빼앗았을 때 자신이 또다시 잡혀 죽을지언정 박정희의 목을 따지 못한 것을 평생 후회하셨답니다.
그 뒤 형편이 어려운 생환독립운동가 분께서는 고기잡이 하는 어선에 승선하여 어부로 일을 하시다 북한에 납북이 되었었고, 거기서(평양) 만주벌판에서 같이 독립운동을 했던 옛 전우를 만났답니다.
당시는 북한이 남한보다 훨씬 잘 살았던 시절이고, 북한에서는 친일파를 싹쓸이하고 독립투쟁을 하셨던 분들을 극진하게 대우를 해 주어 그분은 부족함이 없이 잘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평양에 살고계신 독립운동가도 박정희에게 혀를 깨물어 침을 뱉고 장열하게 순국하신 독립운동가와 전우사이로 그 장렬했던 순국순간의 얘기를 잘 알고 있고, 그 후손과 납북되어간 독립운동 전우의 가족들이 남한에서 어렵게 살고 있다는 얘기를 들으시고 어떻게 준비했는지 묵직한 금반지 두 개를 남한으로 귀국하는 뱃머리에서 손에 꼭 쥐어주었답니다.
납북되어 있는 동안 평양에서는 독립운동가 였었다는 것을 알고 난 뒤로는 국빈급에 준하는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합니다.
(필자 주 : 대부분 국민들은 남한이 처음부터 북한보다 잘 산 것으로 알고 있으나, 남한의 국민소득이 북한을 앞지른 것이 1978년 즉, 박정희가 뒈지기 바로 1년 전이었습니다. 이승만과 박정희 시절 남한에서는 굶어 죽는 사람이 즐비했지만 북한에서는 최소한 굶어 죽는 사람은 없었고, 남북한 모두 정치적인 탄압으로 사람을 죽인 것은 똑 같았습니다.)
납북되었던 독립운동가 어부는 귀국과 즉시 중앙정보부지하실로 끌려갔고, 거기서 평양에서 극진한 대우를 받은 것과 금반지 두 개가 탄로나 북에서 공작금을 받아 온 간첩으로 둔갑이 되어 사형을 당하셨습니다.
독립운동가 친구 두 분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박정희에게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이 어금니가 부숴 지도록 이가 갈리고, 슬프고 분통서지는 사연을 더 이상 길게 쓸 수가 없습니다.
그 뒤 민주정부가 들어서고 간첩죄로 사형을 당하신 분은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이 되어 명예회복이 되었고, 두 분은 국립묘지 독립운동가 묘역에 옆으로 나란히 잠들어 계십니다.
물론 박정희에게 가래침을 뱉고 순국을 하신 독립운동가 분의 묘는 시신은 없고 친구 분이 귀국할 때 갖고 온 일본도에 묻어 있는 피를 비단 천에 씻어 서 유구 대신 모신 허묘입니다.
그 두 집안은 제삿날은 물론 설과 추석에 차례도 두 집안 식구가 다 같이 모여 제를 올립니다.
그 두 집안의 이번 합동 추석 차례에는 특별한 두 분이 참여를 하시게 되었습니다.
그 집안의 추석차례 상을 차린 모습을 보겠습니다.
원래 제삿날은 제상의 맨 앞에 지방(제방)을 써서 붙인 후 제사를 모시고 나서 불을 사르거나 사진이 있으면 사진을 앞에 놓고 제사를 지내고, 설이나 추석 차례에는 지방을 생략하지만 이 두 집안은 설과 추석에는 두 분이 독립운동가로 인정되어 국가로부터 받은 훈장 증을 사진 대신 앞에 놓고 차례를 지냅니다.
차례 상에 진설된 제물을 보겠습니다.
두 독립운동가 부모님 양위분, 그리고 독립운동가 양위분을 합쳐서 8접시의 송편이 맨 앞에 올라 있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제물은 일체 올리지를 않고 전신사진에서 모가지를 끊어 낸 사진 속의 수급하나가 큰 접시에 담겨 제상의 한 가운데 올려 집니다.
그 사진 속의 수급이 왜군중위복장을 하고 만주벌판에서 자랑스럽게 찍은 박정희의 수급입니다.
그런데 올 추석 차례 상에는 특별한 제물이 또 한 가지가 더 올랐습니다.
풍만한 늙은 암탉 한 마리를 산채로 털을 거의 다 벗기고 푸드덕 거리지 못하도록 양발과 양 날개와 몸뚱이를 줄로 얼기설기 엮어 큰 접시에 담아 그 옆에 올려놓았습니다.
제상에 오른 암탉은 눈만 껌벅입니다.
그 암탉은 차례가 끝나는 즉시 생환 독립운동가분께서 귀국하실 때 갖고 왔던 박정희에게서 빼앗은 일본도로 목을 따서 끓는 물에 데쳐 며칠 굶긴 개에게 던져줄 것이라고 합니다.
개가 뼈다귀 하나 남기지 말고 다 잘근잘근 씹어 먹으라고 개를 2-3일전부터 쫄쫄 굶겼답니다.
그런데 올 추석차례에는 색다른 두 분이 참여하고 계십니다.
두 분 다 부산에서 태어나시고 서울에서 활동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두 분도 독립운동을 하시다 순국을 하신 두 분의 기막힌 사연을 듣고 두 분께 예를 갖추고자 참여 한 것입니다.
한분은 “문 씨”이고, 또 한분은 “안 씨”랍니다.
차례가 끝나고 안 씨가 암탉을 꼭 부여잡고, 문 씨가 일본도로 암탉의 목을 칠 것입니다.
꼬꼬댁! - 꽥!
내년 차례 상 아니, 내년 설부터 차례 상에 암탉의 사진 속의 수급이 제물로 추가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