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저임금 기준없어 갈등 반복… “객관적 인상률 결정체계 시급”
[최저임금 심의]
노사, 원하는 인상률 마음대로 제시… 36번 심의중 합의는 7차례 불과
임시 계산식 쓰지만 노사 모두 반발
매년 정치논리-정권성향 등에 좌우… 안정성-예측 가능 기준 만들어야
내년 최저임금을 결정하는 최저임금위원회의 첫 전원회의가 18일 파행적으로 취소되면서 최저임금 결정체계를 근본적으로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 노동계와 경영계가 합의를 통해 최저임금을 정하도록 하는 지금의 구조는 반복되는 파행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최저임금을 결정하는 객관적인 기준이나 계산법도 없어 매년 정치적 논리, 정권 성향, 여론에 좌우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사회적 갈등을 줄이면서 더 객관적이고 예측 가능한 기준을 만드는 방향으로 최저임금 결정체계를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 근거 약한 계산식에 정치까지 영향… 노사 반발
최저임금을 결정하는 명확한 기준이 없다는 점은 현 제도의 가장 큰 문제로 꼽힌다. 최저임금법에는 ‘근로자의 생계비, 유사 근로자의 임금, 노동생산성 및 소득분배율 등을 고려한다’고만 규정돼 있다. 최저임금 결정에 참여하는 근로자위원(9명), 사용자위원(9명), 공익위원(9명)이 임금 등 관련 자료를 검토하긴 하지만 이를 체계적으로 반영하는 건 아니다.
그래서 실제로는 노사 각자 ‘최초 요구안’을 제시하고 이를 수정해 나가는 방식으로 심의해 왔다. 올해 노동계는 가파른 물가 상승을 이유로 내년 최저임금 요구안을 시간당 ‘1만2000원’으로 제시했다. 올해(9620원)보다 24.7% 많다. 경영계는 ‘동결’을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양측이 약 25% 격차에서 심의를 시작하는 것이다.
때로는 경제 상황보다 정부 정책이나 기조의 영향을 더 받기도 한다. ‘최저임금 1만 원’을 공약으로 내걸었던 문재인 정부는 집권 초기인 2018년, 2019년 최저임금을 전년 대비 각각 16.4%, 10.9% 올렸다. 영세 자영업자들이 어려움을 호소하고 부작용이 커지자 2020년 인상률은 2.87%에 그쳤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까지 겹치면서 2021년 인상률은 역대 최저(1.5%)로 떨어졌다.
들쑥날쑥한 최저임금 인상률에 비판이 쏟아지자 2022년도 최저임금 심의 때부터 공익위원들은 임시로 경제지표를 반영한 계산식을 쓰기 시작했다. ‘경제성장률 전망치’에 ‘소비자물가 상승률 전망치’를 더한 뒤 ‘취업자 증가율 전망치’를 빼는 방식이다. 2023년도 최저임금 심의 때도 같은 방식을 썼다. 하지만 노동계와 경영계 모두 “근거 없는 산식”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 36번 심의 중 합의는 7번뿐… 악순환 반복
임금을 놓고 이해관계가 상충되는 노동계와 경영계가 서로 합의하게 만드는 구조도 최저임금 결정을 어렵게 한다. 1988년 최저임금이 처음 도입된 이후 지난해까지 총 36번의 심의가 진행됐다. 노동계와 경영계가 합의안을 도출하거나, 공익위원이 제시한 안에 만장일치로 찬성한 건 7차례에 불과하다. 그것도 대부분 1990년대의 일이다. 2000년 이후에는 합의가 2008년도, 2009년도 심의 때 단 두 번 있었다.
그 외에는 노사 중 한쪽이 퇴장한 상황에서 공익위원들이 표결을 진행한 ‘반쪽짜리’ 결정이 대부분이었다. 이렇게 결정된 최저임금은 노사 모두 불만을 가졌고 일선 경제 현장에서도 반발이 끊이지 않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독일, 일본 등 주요 선진국도 노사가 합의로 최저임금을 정하는 방식의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노사 관계가 비교적 안정적인 이들 국가와 노사 갈등이 극심한 한국을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또 표결권을 가진 참여자가 10명 안팎으로 적은 선진국과 달리 우리는 근로자·사용자·공익위원 총 27명이 참여하고, 객관적 기준 없이 노사가 원하는 인상률을 마음대로 제시할 수 있어 합의가 더 어렵다.
● “객관성-안정성 갖춘 인상률 결정체계 필요”
최저임금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이 반복되자 정부도 2019년 2월 최저임금 결정체계를 구간설정위원회와 결정위원회로 이원화하는 개편안을 마련했다. 노사정이 추천한 전문가들이 최저임금 상하 구간을 정하면, 그 범위 내에서 지금처럼 합의로 최저임금을 정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국회에서 입법이 지연되면서 흐지부지됐다.
전문가들은 최저임금 결정체계를 안정성과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바꾸는 논의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모호한 결정 기준을 경제지표 등으로 명확하게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박지순 고려대 노동대학원장은 “지금처럼 노사 힘의 관계나 정치적 개입이 이뤄지지 않도록 전문가 중심으로 경제성장률, 물가 등의 지표를 근거로 경제와 노동시장 상황을 고려해 결정해야 한다”고 했다. 구체적인 지표나 산식을 결정 기준으로 삼으면 지금처럼 노사 합의제를 유지해도 양측이 더 쉽게 합의를 이룰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노사가 최저임금 결정에 참여하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흥준 서울과학기술대 경영학과 교수는 “최저임금 인상률은 물가 연동 방식으로 더 전문적이고 예측 가능하게 정해야 한다”며 “노사는 인상률 자체를 결정하기보다 그 결정체계를 만드는 데 참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주애진 기자
獨, 연방 통계자료로 결정… 佛은 독립된 전문가 그룹이 주도
[최저임금 심의]
해외는 ‘최저임금 결정’ 어떻게
英, 100회 넘는 조사 등 거쳐 권고
최저임금 갈등 요인 미리 차단
서울 마포구 서부고용복지플러스센터에 2023년도 최저임금 안내문이 서 있다. 올해 최저임금은 시간당 9,620원으로 1만원 돌파를 목전에 두고 있다. 2023.4.3./뉴스1
노사관계 선진국들은 최저임금을 정할 때 경제 전반에 대한 정확한 통계와 전문가 의견을 최대한 반영해 갈등 요인을 사전에 차단하고 있다.
독일의 경우 과거 업종별로 노사가 협상을 통해 임금을 결정했다. 하지만 2015년부터 ‘국가 최저임금제’를 도입해 ‘최저임금위원회(최임위)’를 운영하고 있다. 최임위는 노사 대표위원 각각 3명, 노사 대표가 공동으로 추대한 중립위원장 1명, 표결권 없이 자문만 담당하는 학계 전문가 2명 등 총 9명이다. 한국처럼 정부 입장을 대변하는 공익위원은 없다.
독일 최임위는 연방 통계청의 직종별 임금수준 자료를 비교해 정규직 근로자의 평균 최저임금을 시급으로 환산하고, 그 금액의 51% 수준을 국가 최저임금으로 정한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우리나라 최임위는) 노사관계가 좋지 못한 상황에서 대립으로 치닫기 쉽다. 참여 인원이 많으면 진지한 분석과 논의보다 각자의 입장만 주장하며 ‘머릿수 싸움’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프랑스는 독립된 ‘전문가그룹(Groupe d′experts)’이 매년 정부와 ‘단체협상 국가위원회’에 국가재정과 경제 전반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최저임금 인상률 보고서를 제출한다. 전문가그룹은 노동·고용·경제부 장관의 추천을 받아 경제·사회 분야 전문가 5명으로 구성된다. 이들은 업무와 관련해 정부 지시를 받지 않고 비밀 준수 의무가 있다. 노동부는 사용자 대표 6명, 근로자 대표 10명 등으로 구성된 ‘국가위원회’를 소집해 전문가 보고서에 대한 노사 의견을 청취한 뒤 법정 최저임금 인상률을 결정한다.
영국은 의장 1명, 공익 2명, 사용자 측 3명, 근로자 측 3명으로 구성된 ‘저임금위원회’가 전원 합의를 통해 최저임금액 권고안을 정한다. 위원회는 매년 서면 협의, 대면 협의, 기업 현장 방문, 이해관계자 의견 청취 등 100회가 넘는 조사와 회의, 심의를 거쳐 최저임금 권고안을 정한다.
김성희 고려대 노동연구소 교수는 “영국이나 프랑스는 노사가 모두 인정하는 공신력 있는 전문가들에게 권한을 부여해 인상률을 판단하도록 한다”며 “다만 우리나라에서 어떤 결정을 하든 전문가들이 노사의 압박이나 비판을 피할 수 없어 현실적으로 잘 작동할지는 미지수”라고 말했다.
국제노동기구(ILO)는 공식 홈페이지의 ‘최저임금 정책 가이드’에서 정부와 전문가, 통계청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ILO는 “정부는 사회적 대화를 위해 가능한 모든 노력을 해야 하며, 국가의 일반적인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독립적인 전문가 그룹과 노사가 객관적인 정보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돕는 국가통계청 역시 핵심 역할을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예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