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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무력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호르헤 비델라 독재정권에 의해 개최된 1978 월드컵은, 군부정권의 위대함을 알리고 정치적 반대파들을 찍어누르는 하나의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나라를 휘어잡은 장군들은 축구가 가진 신비스러운 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힘을 잘 이용하기만 하면, 불만 가득한 국민들도 군부의 독재와 인권 유린, 폭정 따위는 모두 망각하도록 만들 수 있다는 것을...
(호르헤 비델라 장군)
온 나라가 폭력과 암살과 고문과 테러로 얼룩진 가운데, 아르헨티나 군부가 자행한 축구의 숭고함에 대한 추악한 훼손이 서막을 올렸습니다. 바로 월드컵 조직위원장 카를로스 오마르 악티스 장군이 암살당한 것입니다. 악티스는 비델라 무리와는 달리 쿠데타에 연관되지 않았으며, 올곧고 신망높은 군 지도자였습니다. 독재자 비델라는 이러한 악티스의 명성을 도용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서도 자기 당파가 아닌 인물에게 월드컵을 온전히 맏길 수는 없었기에, 부위원장으로는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는 해군 대령 카를로스 라코스테를 임명합니다.
라코스테는 대국민 선전 효과를 위해, 국내 컬러TV 중계장비를 설치해야 한다고 악티스에게 강하게 주장합니다. 하지만 악티스는 현명한 인물이었고, 개최 예산은 한정되어 있으므로 불가능하다고 딱 잘라 말했습니다. 그리고 세계 언론을 상대로 기자회견을 열어, 컬러 중계영상은 해외 송출로만 한정할 것이라는 조직위원회의 계획을 발표하기로 합니다. 바로 그 기자회견장으로 가던 길에 악티스는 괴한에 의해 암살당하고 맙니다. 악티스는 월드컵을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려는 독재 정권에 반대하다, 조직위원장이 된 지 반 년도 못 되어 목숨을 잃은 것입니다. 결국 아르헨티나에는 컬러TV가 월드컵 덕분에 보급됩니다.
(악티스 장군의 추모비)
(조직위원장 카를로스 라코스테)
군부는 악티스의 암살을 좌익 게릴라 집단의 소행이라고 간단하게 책임을 면피한 후, 실제 암살의 주모자인 라코스테에게 조직위원회를 맡깁니다. 이 라코스테라는 인물은 조직위원장이 된 76년부터 월드컵이 끝나기까지 2년이 조금 안 되는 기간 동안 화려한(?) 활약을 선보이며, 1978년 월드컵을 완전히 아르헨티나를 위한, 군부 독재를 위한, 독재자 비델라를 위한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잠깐 시간을 건너뛰자면, 라코스테는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개최한 공로에 힘입어 가파른 성공 가도를 달려, 3년 후에는 비록 임시직이었긴 하지만 대통령직에까지 오르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국제앰네스티를 비롯한 세계 수많은 단체의 대회 개최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라코스테의 "역대 가장 순조로운 월드컵이 될 것이다."라는 떠벌림과 주앙 아벨란제 FIFA 회장의 동조 하에 전 대회 우승팀 서독과 폴란드의 개막전을 시작으로 역대 열한 번째 월드컵의 막이 오릅니다. 일상적이게도, 나라의 한 편에서는 여전히 폭압적인 인권 유린이 자행되고, 수많은 피가 뜨거운 젊은이들이 실종일지도 모르고 피살일지도 모르는 어정쩡하고 위태한 상황에 처해 있는 와중이었습니다.
1조에 속한 아르헨티나의 첫 경기 상대는 헝가리였습니다. 헝가리 국가대표팀을 이끈 전설적인 명장 라조스 바로티 감독은 투덜거리는 말투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모든 것이, 심지어 공기조차도 아르헨티나 편입니다. 주심이 아르헨티나에게 페널티 킥 두어 개는 줄 거라는 확신이 드는군요."
결과적으로 바로티 감독의 이 예언은 빗나갔습니다. 명감독이라고 꼭 뛰어난 예언가가 아니란 건 당연하죠. 하지만 주심은 아르헨티나에게 페널티 킥을 주는 대신 두 명의 헝가리 선수에게 레드카드를 보였고, 어쨌건 아르헨티나는 서전을 승리로 장식합니다.
(헝가리 바로티 감독 : "그저 웃지요 ㅎㅎㅎㅎ")
미셸 플라티니가 이끈 프랑스가 아르헨티나의 다음 상대였습니다. 이탈리아와의 첫 경기에서 패하면서 벼랑끝에 몰린 프랑스는 전반전 동안 우아하면서도 힘있게 아르헨티나를 몰아붙였습니다. 프랑스가 전체적으로 우세했던 전반전이 끝나갈 무렵 당시 라리가 최고의 포워드 마리오 켐페스가 프랑스 골대를 강타합니다. 곧 이어 쉴 틈도 없이 켐페스가 레오폴도 루케에게 날카로운 패스를 건넸고, 패스를 이어받은 루케와 이를 저지하려던 프랑스 수비수 마리우 트레소 사이에 충돌이 벌어졌습니다. 트레소가 넘어지면서 공이 팔에 닿았고, 쓰러진 트레소는 손으로 가격당한 급소를 감싸쥐고 있었습니다. 스위스인 주심은 이 모든 과정을 바로 옆에서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처구니없게도 그가 다음으로 취한 행동은 어떤 판정을 내리는 것이 아닌, 훨씬 멀리 떨어져 있던 캐나다인 부심에게로 뛰어간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부심에게 물었습니다.
"안쪽이오, 바깥쪽이오?"
어느 팀 선수의 반칙이느냐는 이미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르헨티나 선수와 상대팀 선수가 충돌하는 순간 분명히 정해진 사실 하나는 아르헨티나 선수가 반칙을 당했다는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페널티킥이냐 프리킥이냐, 그것 뿐이었죠. 자연스럽게 아르헨티나는 페널티 킥을 얻었고 다니엘 파사레야가 공을 골문에 집어넣으면서 1-0으로 앞서나갔습니다.
후반전, 플라티니와 레 블뢰의 반격은 매서웠고 결국 플라티니의 발끝에서 동점골이 터지지만, 곧이어 페널티킥을 유도해 낸 루케의 골로 아르헨티나가 다시 앞서나갑니다. 경기 종료가 10분 정도 남은 시점에서, 플라티니가 동료 디디에 식스에게 멋진 패스를 연결했고, 볼을 이어받은 식스가 골문을 향하려는 찰나에 아르헨티나 선수의 손에 붙잡혀 넘어졌습니다. 이 때도 곁에서 모든 과정을 지켜 본 주심은 넘어져 있는 식스를 한 번 쳐다보더니 몸을 돌려 걸어가 버립니다.
(플라티니 : 심판 장난해 지금?)
조별 예선 마지막 경기를 치르는 시점에서 아르헨티나와 이탈리아는 모두 2차 라운드 진출이 확정된 상태였습니다. 이 날 경기의 주심인 이스라엘 국적의 아브라함 클라인이 매수하기 어려운 심판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었다고 합니다. 판정의 도움이 배제된 아르헨티나가 그나마 얻은 찬스마저 이탈리아의 명 수문장 디노 조프에 의해 무위로 돌아가고, 아르헨티나는 대회를 통틀어 유일한, 하지만 그렇게까지 중요치 않은 패배를 겪었습니다.
당시 8팀이 겨루는 2차 라운드의 진행 방식은 8팀을 4팀씩 두 개 조로 나누고, 각 조의 1위팀끼리 결승전을 치르는 방식이었습니다. 2차 라운드에 진출한 8팀의 조편성을 실시한 결과, 어떠한 '알 수 없는' 힘에 의하여, 강력한 우승후들인 서독, 이탈리아, 네덜란드가 한꺼번에 한 조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아르헨티나는 브라질, 페루, 폴란드를 상대하게 됩니다.
라코스테와 조직위원회의 노골적인 홈팀 밀어주기가 이탈리아전 한 경기를 쉬고 다시 활동을 시작합니다. 아르헨티나의 2차 라운드 첫 경기는 폴란드전이었습니다. 켐페스가 선취골을 넣었고, 폴란드가 동점골 기회를 얻은 차에 켐페스가 가까스로 골라인 위에서 볼을 걷어냈습니다. 폴란드 선수들은 켐페스가 손으로 공을 쳐냈다고 주심을 둘러싸고 항의했지만 아무 소용 없었고, 맥빠진 폴란드 선수들은 결국 켐페스에게 쐐기골을 내주고 무너지고 맙니다.
다음 경기에서 아르헨티나는 숙적 브라질을 상대하게 되었습니다. 즉, 심판 판정을 등에 업는다 해도 상대하기 힘들 지코, 리벨리노, 토니뇨, 세레조 등 화려한 라인업에 맞서야 한다는 얘깁니다. 킥 오프 10초 후, 브라질 미드필더 주앙 바티스타가 루케에게 걷어차여 그라운드에 쓰러졌습니다. 주심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잔디 위를 노닐었구요. 후반전에도 마치 데자뷰처럼 같은 장면이 반복됩니다. 다만 이번엔 루케의 발이 아니라 리카르도 비야의 발이었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열두 명으로 열한 명을 상대하고도, 아르헨티나는 브라질을 상대로 0-0 무승부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1978 월드컵 당시 브라질 대표팀)
자, 마침내 이야기가 흐르고 흘러 월드컵 역사상 가장 추악한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2차 라운드 마지막 경기를 남겨 두고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은 1승 1무 승점 3점(당시에는 경기에서 이기면 승점이 2점)으로 동률이었지만 브라질이 골득실에서 한 점 앞서 있었습니다. 그 말인즉슨, 아르헨티나가 마지막 경기를 이기더라도 브라질에 골득실로 밀려서 결승 진출이 좌절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공들여서 여기까지 왔는데, 비델라와 라코스테에게 그런 상황은 절대 있어선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즉시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원래 같은 시간대에 경기하도록 되어 있던 브라질의 최종전과 아르헨티나의 최종전을, 간결하고 형식적인 핑계를 대어 브라질이 먼저 경기하도록 경기 시간을 조정한 일이었습니다. 이로써 아르헨티나는 자신들의 임무가 무엇인지 경기 시작 전에 명백히 알 수 있게 된 것이죠. 브라질 축구협회와 클라우디오 쿠티뉴 감독은 조직위원회 측에 강력히 항의했지만 물론 무의미했습니다.
다음으로 라코스테는 페루 측과 접촉을 시작했습니다. 페루 선수단의 고위급 임원 3명이 타겟이 되었습니다. 당시 페루는 브라질과 폴란드에게 연패하면서 탈락이 확정된 상황이었습니다. 즉 아르헨티나와의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페루는 조국의 명예와 거액의 뇌물 중 하나를 택해야 되는 입장이었죠. '월드컵 역사상 가장 추악한 순간'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페루는 후자를 택했습니다.
- 곡물 3만5천 톤
- 5천만 달러의 차관
- 가담한 선수들에게 1인당 2만 달러
- 그 외 페루 관리들에게 개별적으로 지급된 뇌물
이 해괴한 계약서에 아르헨티나와 페루 양측이 서명한 순간, 월드컵의 가치는 땅에 떨어져 버린 것입니다.
(월드컵 역사상 가장 추악했던 경기 모습)
먼저 열린 경기에서 브라질은 폴란드에 3-1로 승리했습니다. 아르헨티나가 브라질을 제치고 1위를 하려면 페루를 네 골 차 이상으로 이겨야 했습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아르헨티나의 결승 진출은 희박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날만은 그렇지 않음을 모두가, 심지어 브라질 축구팬들까지 공공연히 알고 있었습니다. 비델라 대통령은 경기 전 양 팀 선수들을 격려한다는 명분으로 페루의 라커룸을 방문하여 페루 선수들과 밀담을 나누었습니다. 아르헨티나의 명장 세사르 메노티 감독은 경기 전에 선수들끼리 전술에 대해 의논하지 말라는, 그의 감독 커리어에서 한 번도 없었고 그 후로도 없었던 괴이한 지시를 내립니다. 경기 출전선수 명단이 제출되었고 페루의 주축 선수 네 명이 엔트리에서 제외되었습니다. 페루 감독은 주전 수비수 한 명을 최전방 공격수로 기용하는 실험적인 포메이션을 구사했습니다. 경기가 시작되었고 놀랍게도 전반 초반 페루가 경기를 압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페루의 공격수들은 골문 3~4미터 앞에서 어처구니없는 슛 동작을 선보임으로써 어설픈 눈속임을 썩 잘 수행했고, 경기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아르헨티나는 페루를 6-0으로 완파하고, 브라질을 제치고 조 1위로 결승전에 진출했습니다. 브라질의 이의제기는 공허한 외침일 뿐이었습니다. FIFA의 주앙 아벨란제 회장은 모국의 영광 대신 금전적으로 맺어진 비델라 독재정권 및 라코스테 조직위원장과의 관계를 택했습니다. 훗날 라코스테는 아벨란제에 의해 FIFA 부회장으로 추대됩니다.
(아마도 브라질의 월드컵 도전 역사상 가장 불운한 감독, 클라우디오 쿠티뉴)
브라질의 쿠티뉴 감독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깨닫습니다. 이탈리아와의 3-4위 결정전에서 승리하고 난 후 인터뷰 석상에서, 쿠티뉴 감독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도덕적 챔피언이다."
그리고 감독직에서 해임당한 쿠티뉴 감독은 미국으로 건너가,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북미축구리그(NASL)의 LA아즈텍스 팀을 이끌다, 취미생활로 스쿠버다이빙 중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월드컵 이후 불과 3년 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마치 맡겨 놓은 우승컵을 찾아가려는 듯한 아르헨티나의 월드컵 도전, 그 마지막 걸림돌은 네덜란드였습니다. 요한 크루이프가 개인적 사정으로 불참하긴 했지만 요한 네스켄스, 아리에 한, 루드 크롤 등이 포진하고 있었습니다. 4년 전처럼 지구상의 그 어느 팀보다 빼어난 토탈 사커를 구사했던 네덜란드를 상대하는 만큼, 아르헨티나가 준비한 '대응책'도 그 어느 때보다 다양했습니다.
(1978년 월드컵 당시 네덜란드 대표팀)
네덜란드가 킥오프 10분 전에 라커룸에서 나와 경기장 입장 준비를 마친 반면, 아르헨티나는 예정된 킥오프 시간에서 5분을 훨씬 넘겨서야 어슬렁거리며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아르헨티나의 주장 파사레야가 등장하여 가장 먼저 한 일은 주심에게 달려가 항의하는 일이었습니다. 네덜란드의 빌리 반 데 케르호프가 목 보호를 위해 착용한 석고 보호대를 트집잡은 것입니다. 케르호프는 바로 이전 경기에서도 보호대를 착용하고 아무 문제 없이 경기에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파사레야의 이러한 행태는 20년 후 프랑스에서 그대로 재현되는데, 다만 파사레야의 신분이 선수에서 대표팀 감독으로 바뀌었다는 차이만 있었을 뿐입니다.
바로 이전 경기에서 벌인 작태가 자신들 스스로도 부끄럽던지, 아르헨티나는 대회 최고의 스타로 떠오른 켐페스의 선제골이 터지자 더 이상의 골이 나오지 않는 선에서 경기를 마치고 싶어하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물론 그러기에는 심판의 도움이 필수였겠죠. 동점골을 위해 분투하던 네덜란드 선수들에게 주심은 55번의 파울을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난관을 뚫고 네덜란드의 딕 나닝하가 경기 종료 8분 전에 동점골을 터뜨립니다. 후세의 축구 역사가들이 1978년 월드컵의 우승팀은 아르헨티나이지만 대회 최고의 팀은 네덜란드라는 평설을 내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순간이었죠. 하지만 아르헨티나의 독재자 입장에서는 단지 승리의 순간이 몇십 분 뒤로 늦춰졌을 뿐이었습니다. 후반전에 두 골을 몰아친 아르헨티나가 결국 우승컵을 차지했으니까요.
(연장전에서 결승골을 넣고 기뻐하는 대회 득점왕 마리오 켐페스)
(아르헨티나에게 우승컵을 수여하고 있는 호르헤 비델라 대통령)
(우승컵을 들고 환호하는 아르헨티나 주장 다니엘 파사레야)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자신들이 독재정권의 책략에 놀아나는 것을 원치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아르헨티나의 역사상 첫 월드컵 우승을 간절히 바라기도 했습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에스타디오 모누멘탈 경기장을 꽉 채운 7만여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혐오하는 독재자 비델라가 월드컵 우승컵을 파사레야에게 건네 주는 것을 보며 환호했습니다. 비델라는 흡족한 표정으로 그 환호에 손을 들어 답했습니다. 월드컵이 완벽하게 독재 정권의 꼭두각시로 전락한 절정의 순간이었습니다.
대회 폐막식이 끝나고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는 호화로운 축하 연회가 열렸습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아벨란제 FIFA 회장은 비델라 대통령 및 군사정권의 요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축하의 말을 전했습니다.
"세계는 아르헨티나의 진면목을 보았습니다."
1983년, 드디어 아르헨티나에 민주화의 물결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에우제니오 멘데스라는 문학가가 군부독재의 억압 하에서 목숨을 걸고 취재하고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라코스테 장군님, 누가 악티스를 죽였습니까?』라는 책을 출간했습니다. 군부의 독재자들과는 달리, 민주화된 아르헨티나에서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당선된 새로운 대통령 라울 알폰신은 라코스테의 무분별한 악행을 눈감아 주지 않았습니다. 권력을 등에 업고 축구를 마음껏 유린한 주범 라코스테는 공금횡령, 뇌물수수, 암살교사 등의 수없이 많은 혐의로 기소되어 실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본문 대부분의 내용은 창조집단 시빌구 사에서 발간한『누가 월드컵을 훔쳤나?』라는 책을 토대로 작성했습니다.)
첫댓글 ㅎㄷㄷㄷ조작된 우승인가요
이런...ㄱㄷㅎ같은...
ㄱㄷㅎ이 내가생각하는 그 ㄱㄷㅎ인가,,, 그럼 난 ㅊㅅㄱ 같은
더러운 별 하나를 가슴에 달고 뛰는 아르헨티나
이런 일이 있었구나.. ㄷㄷㄷㄷ
헐...............
이것 참.......
쿠티뉴?쿠티뉴 시니어?
좀 뜬금없지만 1939년 베를린 올림픽도 히틀러가 나치의 위용을 세계에 과시하려고 유치했다는 말 생각나네... 그래서 경기장에 흑인과 유대인을 출입금지하라고 명령했는데 올림픽 위원들이 거부해서 명령이 취소되었고, 대회 첫 메달을 딴 선수가 흑인 선수여서 히틀러가 즉석에서 시상식을 취소할 생각까지 했다고 함. 고 손기정 옹이 기록에 따르면 히틀러와 직접 대면한 최초의 한국인이라고 하는데 이 때 마라톤 금메달 시상식 때 축하 인사를 받아서 그런 거임... 암튼 스포츠가 독재자가 국민을 매혹시키는 도구로 쓰기는 가장 좋은 분야 중 하나인 건 사실. 프로야구와 K리그가 모두 전두환 정권 때 출범했으니....
차라리 이런월드컵보다는 시끌시끌한 부부젤라 남아공월드컵이 그립고 너무 좋음
ㅇㅇ이거책에서봤음 매수로 일군 우승
34년월드컵..
참고로 크루이프가 불참하게 된 이유가 아르헨티나 군부독재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알려져있지만..
실제로는 가족이 살해위협을 받아서 참가하지않았다고합니다.
아벨란제 이 인간이 축구를 상업화 시칸 장본인.....지금의 축구에서 행해지는 모든 상업화는 그가 생각해낸 아이디어 라더군요....
ㅇ예전에 어떤 잡지에서 봤는데.. 저 월드컵 시기를 맞춰 반 정부 인사를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이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고 하던데 ㅎㄷㄷ;
ㅎㄷㄷ돋네요 몰랐던 사실 알아갑니다
아르헨티나 월드컵우승의비밀 댓글점 댓글점 댓글점 댓글점 댓글점 댓글점 댓글점 댓글점 댓글점 댓글점
e
이때가 마라도나 있을대 아니죠? 마라도나는 80~90 년대 사람 이죠?
마라도나는 86년 월컵 우승ㅋ 94년 미국월컵까지 뛰신 분입죠ㅋ
최후// 메노티가 자신에 입맛에 맞은 켐페즈 쓸려고.. 마라도나는 어리다 라는 이유로 제외시킨거로 압니다. 당시 아르헨 국민들이 마라도나 뽑히길 학수고대했는데 말입죠;;
그런데 켐페스 득점왕 ㄷㄷ
진정한 매수로구만.
들어봤음
세계인의 축제라더니..
삭제된 댓글 입니다.
ㅋㅋ
헐.. 처음 알았냉.. 세계의 축제에서 최고의 낚시를 하냐.. 진정한 스포츠를 더럽힌..
저때 월드컵이 문제가 많긴한데 말이죠... 굳이 이게 아니더라도 월드컵에는 남미와 유럽간 판정싸움이 많이 있었습니다..78년 월드컵은 특히 좀 심했구요..잉글랜드의 유일한 우승이었던 66년 월드컵도 그렇고....유럽에서 유럽팀이 유리한 판정받으면 다음 남미대회에서 남미도 복수하고 뭐 이런식이었죠..
또, 별개로 이탈리아 우승4번 중에 한번은 아르헨티나 선수 5명이 주전으로 뛰고 우승하기도 했구요.. 당시에는 이중국적이 문제가 되지는 않았지만,,,
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댓글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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ㄷㄱ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