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나의 일동상고 은사이시며 현재 수도권 S대학에서 정년을 마치고 동 대학 명예교수로 계신
정찬명 선생님의 고희 기념 출판기념회 "슬픔이 내리던 어제"에 아내와 같이 참석하여 정말 오랜만에
사모님을 뵙고 정정하신 모습에 기뻤으며, 기념회 내내 몇번이고 눈물을 삼켰는데, 짓궂은 아내는
이쯤이면 눈물이 나왔을 것으로 생각하고 내 얼굴을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슬픔이 내리던 어제"는 선생님에게 바치는 선생님의 두아들의 마음이 담긴책이며, 나의 모교 일동상고가
배경이된 1976년 MBC 제3교실에서 방영된 실화 드라마의 제목이었습니다. 주인공은 당연히 그학교의
학생이었던 나의 중고교 후배 최모양을 대상으로 한 정선생님의 사랑담긴 도움의 이야기를 주제로 하여
멋스런 일동 상고의 교정이 전국에 방영되었습니다. 또한 나의 이야기 이기도 합니다.
70년대 중반의 "제3교실"은 지금 모 방송국의 "꽃보다 남자" 던가(나는 잘 안보고 말만 들었으므로)
그 이상의 시청률을 보이던 프로그램이었으며 당시 영내 군생활 중이던 나는 TV 체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보게되었으며, 우리 학교의 아름다운 교정과 드라마에 나온 선생님의 이름을 보고 눈물을 훔쳤으나,
당시 어려운 우리 후배 이야기 그리고 우리 담임선생님 이야기로만 스쳐 지나갔었습니다.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선생님이 육군일병으로 강원도 화천 화전민 촌에서 동네 아이들과 어른들을
모아 한글을 가리키며 문맹퇴치운동에 앞장서고 그 열정이 그 마을에 분교를 만드는 과정, 그 당시 아홉살
제자였던 나와 동갑의 제자의 축하 인사, 금곡고등학교 교사시절 장학회를 만들어 어려운 학생들을 도왔으며
그 제자들의 모임 회장이 참석하여 하는 축하 인삿말들을 들으며 나는 몇번이고 눈물을 훔쳤습니다.
그랬습니다. 나는 정찬명 선생님으로 부터 그 많은 사랑을 받고도 모른듯 지나다가 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선생님을 뵈온게 1978년의 일입이다. 영등포에서 근무하던 나는 지금은 고인인된 나의 고교동창생 백모군이
나의 사무실 인접에서 철공소를 하여 자주 찾아 술을 마시곤 하였는데 어느 늦은날 전화가 왔습니다.
"정찬명 선생님이 너를 찾으신다" 사무실로 와라~
철없던 나는 선생님을 보고 싶지않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가 나에게 사정을 했습니다. 그랫습니다.
철없이 방황하던 고2 시절 나도 그도 학교 다니기를 거부했고 결국 그는 퇴학이라는 엄청난 철퇴를 맞았으나
나는 살아나 학교를 졸업했습니다. 퇴학을 당한 그가 그 선생님을 만나 나를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내가 고교 졸업무렵의 안좋은기억, 아니지 나의 오해때문이었습니다.
어쨌든 나의 발걸음은 친구의 사무실을 찾았고 그 친구의 공장 한켠의 족발과 소주가 차려진 사무실에.........
엉거주춤 인사를 하는 나를 발견한 선생님쎄서는 나를 꽉안아 주셨습니다. "그래 군생활에 얼마나 고생이
많으냐"며 눈물 까지 보이시는 선생님...그러나 그때까지도 나는 감동을 받지 못했습니다. 몇잔이고 술을
권해드리며 선생님께 단도직입적으로 여쭈었습니다.
"선생님 저를 그때 왜 자르지 않으셨어요" 잠시 생각에 잠기셨던 선생님은 "이놈아 니 형편에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으면 어떻게 행세하냐" "너는 언제가 될 놈 인 줄 알았다" ....참으로 이 말에 나는 눈물이 확
밀리는걸 어쩔수가 없었습니다. 옆에 있던 백군도 울고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퇴학을 당한 친구기 때문에
선생님에 대한 원망 만 가질 줄 알았습니다.
술을 더 사다가 마시며 이야기를 나눌때 선생님께서는 내가 어디 어디에서 어떻게 생활 하는 지를 줄줄이
외우고 계셨고 그럴수록 나의 부끄러움은 더해만 갔습니다. 그랬습니다. 저는 고교 졸업할 무렵 자매회사
취업문제가 발생 했을 때 그 같이 큰 회사에 나 같은 겁쟁이가 버티지 못할 것이란 것을 잘 알고 다른 학생을
추천했던 선생님의 넓은 마음을 모르고 나의 자격증만 믿고 선생님에 대한 오해만 키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 2006년 3월 25일 내가 군생활을 만 30년 하던날 기념식에 선생님을 초청 했을 때 선생님께서는
기념사까지 준비를 해오셨습니다. 나에 대한 장황한 보태기 칭찬을 포함해서 내가 잊었던 나의 어린 시절을
기억해 내신 선생님 때문에 나는 또 울어야 했습니다. 지금까지 잊혀져 왔고 그자리에 참석한 나와 나의 아내
그리고 중고교 동창생들도 잘 몰랐던 이야기였습니다.
"나는 이 제자가 이유없이 학교에 안나오기에 찾아서 가정 방문을 몇차례 했으나 만날수가 없었고 어렵게
물어 물어 찾아 갔을 때 깡마른 체구에 허허벌판에서 윗옷을 벗은 채 물집이 잡힌 등허리에 땀을 흘리며
돈을 벌기 위해 잔디를 뜨고 있는 제자를 보고 눈물이 났다"는 말씀 부분에서 그 기억을 까맣게 잊었던 나도
내 아내도 나의 딸과 아들도도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랬었습니다. 너무도 가난하여 중학교까지는 장학금으로 고등학교도 우수학생으로 입학하여 겨우 1년은
버텼으나 고교에 진학한 후 7남매의 장남으로 어려운 살림에 학업을 계속 한다는 것은 사치였고, 사춘기
시절에 방황을 부채질 하였으며 장남으로써 가족에 대한 의무도 앞서서 학교를 그만 두려 했을 때 선생님
께서 방문을 하시어 아마도 같은 말씀으로 학교에 나오기를 격려하셨던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렇게 선생님의 격려와 2학기분의 공납금이 선생님의 주머니에서 나와 나는 학교에 계속 다녔으며 억지로
정말 억지로 졸업을 하고 사회에 발을 딛었던 것입니다. 그 제자는 그렇게 선생님의 사랑을 모르고 몇년이
흘렀지만 알고 보니 선생님을 많이도 닮아가고 있었습니다. 동네 아이들 모아서 태권도 가르치고 공부
가르치고, 선생님이 늦으나마 대학 강단에 서시는 모습을 보고 다시 대학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선생님과는 다시 그렇게 인연이 다아 늘 가까이 계시기에 따뜻한 식사 대접은 변변히 못해도 전화도 드리고 찾아
뵙기도 하다가 지난 년초에는 대학강단에 서고 싶은 욕심에 또 선생님을 찾아 갔습니다. 어떻게 하면 대학에
강의를 할 수 있을 까요? 선생님께서는 많은 용기를 주시고 방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선생님도 60이 다되신
나이에 박사 학위를 받으신 이야기를 하시며 "너는 될것이다" 라고 용기를주셨습니다.
어제 행사를 마치고 나오며 인사를 드리며 "선생님 감사의 축사는 제가 했었어야 했는데요" 하자 "그러게"
하시는 선생님의 눈에는 또 인자함이 가득하셨고 아내의 인사를 받으시고는 "이 친구 꼭 교수 될겁니다"
하며 저에 대한 믿음을 또 표시 하셨습니다. 정말 저는 제 인생에 참된 스승을 만나서 행복한 사람입니다.
선생님 늘 건강하시고 제자에게 주신 사랑 만큼 더 행복하실것이라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아~이러면 안되는데...눈 앞이 흐려져 모니터의 글자가 안보이네요. 그동안 누구의 도움없이 내 힘으로 이 세상을 살오온 듯 자만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지네요. 어디선가 나 모르게 나를 위해 기도하고 도움을 준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텐데...정말 순수하신(맹물) 분의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부럽습니다. 그리고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나릉 위해 기도하고 도와준 많은 님들이 있어서 오늘의 내가 있는것 같습니다.
장문의 글이 귀절 귀절마다 삶의 때가 묻어납니다..........잘 살아오셨고 저에게 또 다른 경각심을 불어넣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스승에 그 제자로 선생님의 바람처럼 맹물님께도 꼭 더 좋은 미래가 있을겁니다..
살면서 사람 한 분만 잘 만나도 인생이 바뀌는 것을 종종봅니다. 참 존경스런 섬생님에 훌륭한 제자입니다. 그래서 난 교사로서 참으로 중책감을 느낍니다, 어리면 어린대로..... 올해 우리반에 외증조모랑 함께 사는 소년가장 같은 남자애가 있습니다. 완전히 정서불안에 ADHD 증세를 보이는...... 그래서 남아서 개인지도 들어갔습니다. 사람 만들어 보려고... 몰래해야 되는데...
요즘 저는 양주시에서 실시하는 카운슬러 대학에 다니고 있는데 ADHD 그거 정말 장난 아니더라구요..가정과 학교가 너무 힘들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