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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태사 일주문. 일주문을 들어서 좀 더 걸어가면 입구가 있고, 그 안에 경내가 펼쳐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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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태사에 들어서니 스님이 주위의 몇몇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계셨다. 합장을 하고 들어서며, 종이컵에 든 커피를 다 마셔서 혹시 주위에 휴지통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의외로 그 스님이 화를 내며 절에 휴지를 버리러 왔느냐고 하셨다. 갑작스런 호령에 조금 무안했으나, 왠지 모르게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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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태사 오층석탑. 전형적인 고려시대 양식을 따르고 있다. 기단부의 복원모습이 매우 아쉽다.(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27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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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에서 몇 보 앞으로 나서서 좌편에 보면 오층석탑이 있다. 전형적인 고려양식을 따른 석탑이다. 우동(隅棟 : 낙수면과 낙수면 사이의 각)이 살짝 휘어져 있으며, 그 우동을 따라 전각(轉角)도 살그머니 구부러져 있다. 다만 정면에서 봤을 시, 낙수면(落水面 : 옥개석 위의 빗물이 흘러내리게 한 부분)의 좌편이 우편에 비해 곡선의 비례가 약간 맞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개태사 오층석탑은 복원 상에서 약간 아쉽다. 1층 탑신석과 기단부는 유실되어 근래에 들어서 새로 복원한 것으로 보이는데, 1층 기단부에는 우주와 면석의 구분을 하지 않았고, 기단부는 갑석과 면석, 우주, 탱주의 표현이 생략되어 있었다.
이왕 복원을 하려면 그러한 탑의 부분적 표현에도 일정한 신경을 쓰는 게 좋지 않았을까? 유실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복원을 한 것은 좋으나, 어느 정도 기본은 지키는 것이 문화재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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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태사의 용화대보궁. 미륵을 모신 전각을 용화전이라고 하는데, 당내엔 아미타 석불입상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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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화대보궁(龍華大寶宮)이란, 미륵을 모셔놓는 전각인 용화전(龍華殿)을 말한다. 그런데 개태사 용화대보궁 당내엔 아미타석불입상이 있다. 아미타불을 모셔놓은 법당을 극락전, 미타전, 무량수전 등으로 부른다고 알고 있으나, 미륵은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하여 용화세계를 이룬다고 하여 용화전에 봉안된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아미타를 모셔놓고 용화전을 높여 용화대보궁이라……. 아직 내가 공부가 많이 모자라서 그 깊은 뜻을 잘 모르는 것인가란 생각을 하며 되돌아본다.
사실 전각과 봉안 불상의 명칭이 틀린 경우는 더러 있다고 한다. 아마 논산지역은 미륵신앙이 팽배한 곳이기에 이런 명칭이 붙지 않았나 싶다. 논산의 관촉사 은진미륵이나 송불암미륵불, 그리고 근처 부여 대조사의 석조미륵입상 등이 그 일례이다. 이곳 개태사도 그러한 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용화대보궁의 아래쪽엔 석등 및 여러 석조물의 부재가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일부러 한쪽에 배치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이러한 부재에도 조금의 관리가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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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태사 아미타석불입상. 좌우에 협시보살을 모시고 있다.(보물 제21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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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태사 석불입상은 보물 제219호로 지정된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창건 당시에 조성된 것으로 추측되는 고려시대의 석불로서 체구가 우람하고, 다른 불상처럼 환하게 웃는 얼굴이 아닌, 조금 굳어 있어서 돌과 잘 어울리는 조금 딱딱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소발이 단조로운 느낌을 주고, 편단우견(偏袒右肩 : 법의를 오른쪽에 걸치고, 왼쪽 어깨를 드러낸 모습)을 한 모습이 인상적인데, 이는 좌우 협시보살도 마찬가지이다. 상대방에 대한 공경의 예법이라고는 하나, 도리어 상대방에 대한 압박감이 느껴진다.
크고 둥근 얼굴의 아래에는 삼도가 뚜렷하다. 시무외여원인을 하고 있는데, 왼손은 흡사 살짝 주먹을 쥔 것 같다. 얼굴과 비교했을 때, 그 크기가 매우 큰 게 특징적이다. 옷자락은 굵고 두꺼운 선으로 간결하게 표현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느낌이 무거우면서 우람한 거구의 부처이다.
보살도 여래처럼 선이 굵다. 보관이 여래상과 같이 소발로 보이기도 하는데, 그 모습이 투구와 비슷하다. 굳어있는 그 표정 때문인지 위엄이 느껴지며, 화려하면서 정제된, 그리고 조금 투박한 천의가 인상적이다.
한국 역사의 쟁쟁한 영웅들이 자웅을 겨루던 후삼국시대 말기, 그 마지막 전투가 백전노장 왕건과 야심에 가득 찬 신검왕의 일리천전투이며, 일리천전투에서 후백제군이 예상하지 못하였던, 그들의 살아있는 전설인 진훤(견훤)이 고려에 있자, 후백제의 군사들을 어쩔 줄 몰라 하였다.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야심이 가득 찬 신검과 그들과 항상 적진을 누비며 승리에 환호하게 하였던 살아있는 전설인 진훤 중 후백제의 군사들은 후자를 택하였고, 이는 후백제의 종언을 말하는 것이었다.
후백제가 고려에 패주하여, 결국 황산에서 항복을 하니, 이 황산이 지금의 논산시 연산이다. 황산은 백제에 가혹한 땅이었던가, 불과 300년 전에 이 황산에서 계백장군이 피눈물을 흘렸는데, 또다시 태어난 백제가 멸망하는 곳도 황산이었다.
이곳에 왕건은 승리감에 도취해, 그리고 후백제의 잔여 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또한 삼한의 통일을 축하하며 세운 곳이 이곳 개태사이다. 개태사의 석불입상도 개국 당시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는데, 그래서일까? 왠지 무겁게 느껴진 것은 바로 그러한 백제에 대한 억제의 심경이 담아있기 때문이 아닐는지….
그러나 이곳 개태사에는 지금 무엇이 남아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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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태사 정법궁. 혹은 창운각이라고도 한다. 부처, 단군, 관우를 모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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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화대보궁에서 나와 몇 보 앞으로 간 후에 좌측을 보면 정법궁(창운각)이라는 건물이 있다. 푸른색 기와를 이어서 만든 팔작지붕의 건물인데, 이 건물은 은근히 야릇하게 느껴진다. 정법궁 속에는 단군, 부처, 그리고 관우가 있는데, 가운데가 부처, 좌편이 관우, 그리고 우편이 단군이다.
부처의 좌대에는 남북통일세계평화(南北統一世界平和)라고 적혀있다. 그리고 우편에는 국조단황상제(國祖檀皇上帝)라는 글귀가 적힌 연등이 걸려있으며, 그 앞에 단군 영정이 있다. 이는 전국에 있는 여러 단군 영정 중 하나로, 백의를 걸치고 있으며, 그 옆에는 천부경이 쓰여 있다.
재미있는 것은 좌편의 관운장의 초상이다. 청룡언월도를 들고 긴 수염을 쓸고 있는 모습이 영락없는 관운장인데, 관운장의 초상 옆에는 철로 된 갈퀴와 큰칼, 그리고 작은 칼이 있다. 무구(巫具)로 보이는데, 이러한 물건이 왜 이곳에 들어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이곳의 관리는 생각보다 미흡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벽에도 갈라진 틈이 여럿 보였으며, 바닥도 부실한지 걸어다니니 삐거덕 하는 소리가 들렸다. 다른 절에는 없는 건물이지만, 이에 대한 관리가 부실하고, 여러 사상이 한곳에 모인 것은 좋으나, 정리되지 않았다라는 느낌을 받는 이유는 왜일까? 개태사 측에서도 이곳에 대한 어느 정도의 정리가 필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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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태사 철확. 철로 된 가마솥으로 그 크기가 굉장히 크다.(충청남도민속자료 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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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태사에서 놀란 것 중 하나가 거대한 철확이었다. 철확이란 큰 솥을 말하는데, 창건 당시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 정도 크기면 한번 밥을 하면 몇백 명이 먹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그만큼 개태사가 웅장하였고, 그 기세가 대단하였음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개태사는 과거를 잃어버렸다. 고려의 호국사찰로서의 위용은 잃어버리고, 조선시대 이후로 폐사되어 근래에 와서 복구되었다고는 하나, 과거의 영광과는 거리가 멀다. 호국의 염원인지 몰라도 정법궁이 있으나, 그에 대한 관리는 부실하고, 관제묘, 혹은 관성묘에 있을만한 관우상이 단군상과 같이 있는 것은 이색적이면서도 어색하다.
동자석불이 있는 우주각은 육모지붕이며, 그 속의 동자석불(주로 나한으로 본다)은 여러 겹의 방석 위에 앉아있다. 그리고 그 뒤엔 탱화가 하나 걸려있다.
우주각과 철확 사이 앞에는 항아리를 엎어 놓거나, 북 같이 생긴 석조물 3개 위에 석불이 하나 있다. 눈을 감고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는 석불은 살짝 귀여우면서도 서민적이고 수수하다. 공경하며 절을 하고 싶기보다는 왠지 한번쯤 석불의 머리를 가볍게 쓸고 지나가고프다.
우리는 절에서 나와 좌편의 논으로 걸어나갔다. 개태사의 실제 위치는 현재의 이곳이 아니라 그 옆이기 때문이고, 지금은 논밭이 펼쳐져 있지만, 그 위에는 수많은 유물들이 산포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천천히 걸어나가면서 보니 주위에 수많은 토기편, 자기편, 그리고 와편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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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태사지에서 수습한 어골문이 타날된 암키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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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많이 보이던 와편은 어골문의 타날 된 것들이었다. 어골문이란 물고기의 뼈와 비슷하게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서, 주로 고려시대부터 많이 보인다. 조선시대에도 물론 존재하였으나, 개태사가 아무래도 고려시대 때 번창한 절이어서인지 어골무늬 기왓조각이 발에 챌 정도였다.
위의 기와는 어골문인데, 우측의 선은 선명한데, 좌측의 선은 그렇지 않다. 물손질을 하면서 지워진 것이라 생각된다. 암키와인데, 이 기와가 수키와와 맞물려서 지붕을 이는 것이다.
격자문이 타날 된 기왓조각도 보였는데, 격자문이란 네모난 모양의 문양이 나타는 기와를 말한다. 이 격자무늬 기왓조각도 도처에서 발견되었는데, 개중에서는 사격자문이라고 하여, 마름모꼴로 된 격자무늬 기왓조각도 종종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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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산 개태사지에서 수습한 명문기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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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살피다 보니 의외의 성과를 얻게 되었다. 바로 명문기와 조각 하나를 발견한 것이다. 그런데 한자가 쉬운 듯하면서도 무슨 글자인지 알기 힘들었다. 2글자로 보이기도 하고, 3글자로 보이기도 한다.
이에 대해서 후에 이래저래 알아봤는데, 아직 명확한 결론은 내리지 못하였다. 우선 나로선 제일 위의 十자 위에 삐침이 있는 것 같아서 千자가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들지만, 그 삐침이 희미하고, 한 글자로 볼 경우 그 차지하는 칸이 너무 작다는 점이 껄끄럽다.
그 아래의 글자는 불(佛)의 이체자가 확실하다. 사람 인(亻)과 사사 사(厶)자가 합쳐진 형태다. 즉 위의 글씨를 합친다면 천불(千佛)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문제는 그 아래의 글자이다. 언 듯 보면 主자로 보이나, 갓머리(宀)가 있다는 점에서 主로 보기엔 어렵다. 奎의 이체자로 볼 수도 있는데, 그럴싸하기도 하나 부수가 하나 더 많으며, 규(奎)가 별자리 이름이기에 佛자 두에 쓰인다고 보기에는 어색한 면이 있다.
이를 가지고 世定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었다. 세상 세(世)자의 이체자로서 앞서 말한 첫 번째와 두 번째 글씨를 합친 것으로 보며, 그 아래의 것을 정할 정(定)자의 이체자로 보는 견해이다. 세정(世定)이란 세간정려(世間靜慮), 혹은 세간정(世間定)이라고도 하는데, 해탈도론(解脫道論)의 선(禪)수행법, 즉 선정(禪定)으로 세간에서 생활하면서 수행하는 관법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체자사전을 살펴보아도 비슷한 이체자는 있으나 딱 부러지게 세정이라고 보기엔 어려운 면이 있다. 그리고 두 번째 글자가 佛자가 확실하다고 본다면 세정이라고 보는 견해가 반드시 옳다고 하기가 힘들다.
아직 공부가 많이 부족해서 이게 무엇인지 잘 모르겠으나 좀 더 자문을 얻어가고 이체자사전을 찾아보면 머지않아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파상문이 시문된 토기편도 발견되었다. 파상문이란 물결무늬를 말하는데, 위의 유물은 구연부의 일부로 추정하며, 가로로 그은 선 사이에 물결무늬 3개가 그려져 있다.
청자편도 여러 점 발견하였는데, 개중에는 저부도 있었다. 그리고 한 청자조각은 그 빛이 아직도 잘 남아 있어서, 이곳에서 고급청자를 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위의 마을에서도 걸어다니다 보니 백자의 조각이 여러 점 보였다. 조선후기의 것으로 보이는 위의 백자편은 굽이 달린 접시로서 대량 생산의 흔적이 남아있다. 자기 내부의 가운데와 굽 아랫부분에 모래가 묻어 있는데, 이는 비슷한 형태의 백자를 여러 점 포개어 가마에 넣고 굽고, 그 후에 이를 떼어냈기에 그러한 흔적이 남는 것이다. 조선 후기에 이러한 백자는 많이 발견되며, 얼마 전에 시굴조사에 참여한 가마터에서는 이런 백자가 대량으로 발견되었었는데, 2∼3층으로 포개진 것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는 5∼6층이 넘게 포개진 백자도 있었다.
마을의 산에 올라서서 개태사를 바라보니 왠지 쓸쓸하게 느껴졌다. 절은 작아 보이고 논밭만 넓게 펼쳐져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과거의 영광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다행히도 2011년까지 이쪽의 토지를 매입하고, 그때부터 개태사지 발굴복원사업을 시작한다고 하니,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하겠다. 물론 발굴조사가 끝나고 복원을 한다고 할지라도 고려시대의 모습을 그래도 살릴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그러나 잃어버린 영광을 그런 식으로라도 복원하려는 노력이 있고, 이를 통하여 더욱 후세에게 선인들의 삶의 자취를 더 진하게 느낄 수 있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개태사는 아쉬움이 많은 절이다. 대찰의 위용을 찾을 수 있을지, 그리고 찾는다고 하더라도 과거처럼 부흥할지는 모르는 노릇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문화재에 좀 더 깊은 관심을 두고 과거에 손을 뻗는다면 선인들의 향취를 느끼는 것도 크게 어렵진 않을 것이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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