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월13일 [연중 제10주간 화요일]
마태오 5,13-16
소금이 제맛을 잃는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빛과 소금이라고 하십니다. 이미 빛과 소금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빛과 소금은 나의 빛과 짠맛으로 무언가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영향을 주는 일이 ‘착한 행실’, 곧 ‘사랑의 실천’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도 하십니다.
“그러나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짠맛을 잃은 소금이 있을까요? 짜지 않은 소금이 있을까요? 그런데도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이 어제의 ‘행복 선언’에 이어진다는 것에 착안해야 합니다.
맛을 잃은 소금이란 행복을 잃은 그리스도인을 말합니다.
그리고 행복이란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얻는 자존감의 상승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례 때부터 이미 빛과 소금입니다. 하느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성령으로 생기고 자랍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입니다.
곧 행복입니다.
행복을 잃은 사람은 맛을 잃은 소금입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착한 행실을 보여주려 해도 주님을 찬미하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뤽 벡송이 감독한 ‘레옹’(1994)은 매우 다른 두 캐릭터, 즉 고독하고 감정이 없는 암살자 레옹(장 르노)과 마틸다(나탈리 포트만) 사이의 깊고 특이한 관계에 관한 영화입니다.
여기서 매우 상징적인 소재가 등장하는데, 레옹이 즐겨 마시는 우유와 화분입니다.
우유는 아직 레옹이 정신적으로는 어른이 되지 못했음을 의미하고, 화분은 그 이유가 땅에 뿌리박지 못한 식물과 같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레옹은 어렸을 때 살인을 저지르고 더는 성장하지 못한 화분에 심어진 아이와 같은 킬러입니다.
아이와 같은 레옹에게 가족을 잃은 마틸다가 도움을 요청합니다. 마틸다는 어린애입니다.
처음에 레옹은 마틸다를 꺼렸지만, 그녀를 받아들이고 복수를 원하는 그녀에게 살인 방법도 알려줍니다.
하지만 어렸을 때 살인하면 더는 성장하지 못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마틸다는 레옹의 말을 듣지 않고 원수를 죽이러 가고 그 과정에서 마틸다를 구하기 위해 레옹은 자기 목숨을 내어놓아야 했습니다.
마틸다는 레옹에게 오히려 식물은 화분이 아니라 땅에 뿌리박고 살아야 한다고 말해줍니다.
오히려 정신적으로는 마틸다가 레옹에게 영향을 준 것입니다.
레옹은 글도 읽을 줄 모르지만, 마틸다는 읽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더 큰 사람에게서 성장한다는 것을 압니다.
레옹은 오히려 마틸다에게 사랑을 배우고 희생을 배웠습니다.
마틸다는 레옹으로 상징되는 화분을 땅에 심습니다.
마틸다는 자신이 땅에 심어져야 거기에서 영양분을 얻고 자랄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레옹은 아닙니다.
성장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지 못했습니다.
화분은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자라지 못합니다. 그러나 땅에 심어진 식물은 저절로 자랍니다.
누군가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려면 화분에 심어진 식물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누군가의 도움만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땅에 심어진 식물은 크게 자라서 누군가의 그늘이 되어줄 수 있습니다.
화분에 심어진 사람이 맛을 잃은 소금입니다.
누구도 짜게 할 수 없습니다.
누구에게도 자신과 같은 존재가 되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마리나 채프먼은 원숭이들에게 길러졌습니다.
원숭이들은 자신들의 정체성만큼 마리나를 키웠습니다.
그가 사냥꾼들에게 발견되었을 때 그녀는 사창가의 몸 파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이는 그들의 수준이 그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다음엔 사랑 가득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을 통해 결혼하고 가정을 꾸렸습니다.
내가 어느 땅에 심어지느냐에 따라 제맛을 내느냐, 그렇지 못하느냐가 정해집니다.
내가 뿌리박고 있는 땅이 하느님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를 그리스도로 만드는, 내 안에 그리스도를 잉태하게 하는 성령을 흡수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다가가는 사람만이 새로운 정체성을 얻고 주님을 찬미하게 됩니다.
하느님께 심어진 소금은 제맛을 잃지 않습니다. 그 맛이 곧 자기 정체성에 대한 믿음입니다.
교리서는 말합니다.
“(사제는 누구입니까. 그는)…. 하느님이 될 것이고 다른 이를 하느님이 되게 할 것입니다.”(CCC, 1589)
내가 하느님께 뿌리를 박고 있다면 내 안에 하느님이 계신 것을 먼저 믿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처럼 되어감에 행복할 것입니다. 이 맛을 잃으면 화분에 심어진 식물입니다.
누구에게도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먼저 내가 하느님이 되었음을 믿읍시다.
식물은 땅과 하나입니다.
이 믿음만이 내가 소금이되 짠맛을 잃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6월13일 [연중 제10주간 화요일]
마태오 5,13-16
어떻게 해서든 무너지지 말아야 합니다!
어촌에 살아보니 굴 껍데기로 인한 괴로움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굴은 어촌 주민들의 큰 소득원이지만 손질하고 남은 폐기물 껍질의 양이 엄청납니다.
동물 사료라든지, 시멘트 비슷하게 만들어 해양 블록 제작 재료로 활용도 되지만, 비용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러나 워낙 양이 많은 관계로, 여기저기 쌓아놓거나 방치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보기도 흉할뿐더러 악취도 만만치 않습니다.
쓸모없는 존재들의 끝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합니다.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굴 껍데기를 바라보며 나는 과연 쓸모있는 존재인가?
돌아보게 됩니다.
소금이 제맛을 잃었다는 것을 인간에게 비유하면, 겉은 멀쩡한데, 내면이 텅 비어있거나 부실한 상태를 의미하겠습니다.
겉으로는 살아 숨쉬고, 말도 하고, 먹기도 하지만, 영혼이나 정신, 하느님이나 영적인 측면들이 사라져버린 존재, 그러니 살아있지만,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 없는 좀비 같은 존재가 아닐까요?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 아름다운 세상에 소풍을 보내주시면서, 참 많은 달란트와 가능성, 자질과 역량을 우리에게 부여해주셨는데, 얼마나 하느님께 되돌려드리고 있는지, 이웃과 세상을 위해 얼마나 소용이 되고 있는지?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 앞에 얼마나 쓸모 있는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보고 또 돌아봐야겠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짠맛을 잃어버린 쓸모없는 소금, 다 까먹고 버린 폐각처럼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지금 우리의 시대,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가 생명경시 풍조입니다.
경제에만 치중하다 보니 소외된 계층에 대한 인권은 뒷전입니다.
오로지 한 목표를 향해 내 살길만 챙기는 데 혈안이 되다 보니 뒤처진 이웃들의 고통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이런 시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중차대한 과제 하나는 생명 운동입니다.
그 어떤 생명이든 모두가 하느님의 작품으로 차별 없이 대우받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생명의 숨결이 이미 다 빠져나간 존재,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순식간에 부패하고 순식간에 소멸의 단계로 넘어가더군요.
결국 가장 소중한 것은 생명입니다.
특히 관심을 기울여야 할 생명은 꺼져가는 희미한 생명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무너지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어둠이 깊어도, 아무리 상처가 심해도 상관없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일어서려고 몇 번이고 나를 일으켜 세울 때, 우리도 모르는 사이 하느님 자비의 손길이 살포시 우리 어깨 위에 내려앉을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0주간 화요일>
(2023. 6. 13. 화)(마태 5,13-16)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세상의 소금과 빛>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3-16).”
예수님의 ‘산상설교’는 당신의 제자들(신앙인들)만을 대상으로 하신 설교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군중을) 대상으로 하신 설교입니다(마태 7,28).
<제자(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하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라는 말씀과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고 있는 신앙인들에게는 “신앙인답게 살아라.” 라는 명령이고,
아직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복음을 믿고 받아들여서 하느님과 세상 사람들과 자기 자신에게 쓸모 있는 존재가 되어라.” 라는 ‘부르심’, 또는 권고입니다.
<이 말씀은, “신앙인들은 세상에 꼭 필요한 존재다.”라는 뜻의 말씀이 아닙니다.>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이라는 말씀은, 신앙인들에게는 “신앙인이 신앙인답게 살지 않으면”이라는 뜻이 되고, 아직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면”이라는 뜻이 됩니다.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라는 말씀은, 표현만 보면 ‘불가능한 일이다.’ 라는 말씀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아니고, “신앙인답게 살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 또는 “복음을 거부한 채로 구원받을 수는 없다.”로 해석됩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루카 1,37).
따라서 하느님은 ‘제 맛을 잃은 소금’도 다시 짜게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렇지만 인간 쪽에서도 믿고, 회개하고, 부르심에 온전히 응답하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여기서 ‘쓸모가 없다.’ 라는 말은, “구원받을 자격을 얻지 못한다.” 라는 뜻이고, ‘밖에 버려진다.’ 라는 말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아무 쓸모가 없으니” 라는 말씀과 “밖에 버려져” 라는 말씀은, 사실상 ‘뜻이 같은’ 말씀입니다.
쓸모없으니까 밖에 버려지는 것이고, 밖에 버려지니까 쓸모없게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구원받을 자격을 얻지 못하니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고,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니까 구원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신앙인답게 살지 않으면, 또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 버려질 것이라는 경고 말씀이기도 합니다.
<반대로, 신앙인답게 제대로 살면, 이 세상에서도,
또 하느님 나라에서도 대단히 쓸모 있는 ‘귀한 존재’가 될 것이라는 격려 말씀이기도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라는 말씀은, 신앙인들에게는 “세상의 등불이 되어라.” 라는 명령이고, 아직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내가 주는 빛을 받아라.” 라고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라는 말씀은, 신앙인들에게는 “자신의 신앙을 감추지 마라.” 라는 명령이고, 아직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내가 주는 ‘구원의 빛’을 외면하지 마라.” 라고 타이르시는 말씀입니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전쟁 때 피난처로 삼을 수 있는 고을을 뜻합니다.
여기서는 ‘영원한 안식처’인 하느님 나라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의 빛’은 ‘영원한 안식처’로 우리를 인도하는 빛입니다.
그 빛만 잘 따라가면 영원한 안식과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교회와 신앙인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는 일은, 바로 그 ‘영원한 안식처’를 알려 주고, 안내해 주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과 안식과 평화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다음에나 얻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어서 그곳에서 완성됩니다.
교회와 신앙인 공동체도 지금 여기에서부터 세상 사람들에게 안식처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이사 56,7).
<누구든지, 신앙인이 아닌 사람이라도, 교회에서 참된 안식과 평화를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라는 말씀은,
“세상의 모든 사람을 비추어서 인도하여라.” 라는 뜻인데, 가장 먼저 비추어야 할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이 먼저 올바른 길을 잘 걸어가고 있어야
다른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루카 6,39).
<‘아리마태아 요셉’과 ‘니코데모’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뒤에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게 해 달라고 빌라도에게 청하였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유다인들이 두려워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
빌라도가 허락하자 그가 가서 그분의 시신을 거두었다.
언젠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도 몰약과 침향을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왔다(요한 19,38-39).”
요셉과 니코데모는 유대인들의 박해가 무서워서 신앙인이라는 것을 숨기고(자신의 등불을 감추고) 살았지만, 예수님의 죽음 때에는 오히려 신앙을 드러내면서 예수님의 장례를 행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등불로 세상 사람들 앞을 비춘 것과 같습니다.
적극적으로 나섰어야 할 사도들마저도 모두 달아나서 숨어 있었던 당시의 상황에서, 그 두 사람의 행동은 모든 신앙인들에게 모범이 되는 행동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