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 장군 척준경(拓俊京)(고려인종조.?~1144)을 아십니까?
-조선 최강의 용감무쌍
척준경(?~1144)은 곡주(황해도곡산)출신으로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척위경의 아들이다.
젊었을때 무뢰배들하고 어울렸으나 나중에 무술연마에 열중했다함.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실제로 나오는 내용 >
척준경이 추밀원에서 9년간 일해 정식관직을 얻는 해(고려숙종.1104년) 1월, 동여진의
오라수가 기병으로 정주성으로 쳐들어가게 했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문하시랑평장사 임간을
동북면행영병마사로 삼아 이를 진압하라 명을 내린다. 이때 척준경도 임간을 따라 출전하게 된다.
#그의 행적 첫번째.
2월에 임간은 군사를 이끌고 여진족을 쳤으나 급한나머지 훈련도 제대로 안된 군사를 출격시킨것으로
인해 대패하였다. 고려군의 패배로 정주성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은 이때,
척준경이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척준경은 임간에게 무기와 갑옷입힌 말(介馬)을 달라고 하였다. 이를 받은 척준경은 홀혈단신으로
여진기병대를 향해 돌진했다. 그는 여진기병대를 헤치고 적장 1명을 베어 죽였고 포로인 준민, 덕린과 함께
각각 1명씩 쏘아 죽이니 적군이 위축되었다. 척준경이 물러나려 하자 여진기병 100여명이 뒤를 쫒았는데
이때 추격하는 적장 1명을 사살하였다. 적은 성을 칠 엄두를 못내었다. 이일로 척준경은 천우위 녹사라는
정8품의 정식관직에 오르게 되었고 여진토벌대장인 임간과 황유현,송충,왕공윤,조규등은 패전등을 이유로
파면되었다.
*척준경 1명 vs 여진족 최소 1만여명,추격대100명
#그의 행적 두번째.
숙종이후 예종이 즉위한지 2년뒤(1107년) 12월. 예종은 윤관, 오연총에게 군사 17만여명을 주어
대대적인 여진정벌을 명했다.
정벌군은 총 17만의 대군이었는데, 척준경은 윤관휘하의 본군에 소속되었다. 고려군은 정평성과
보음성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북쪽으로 진격하여 석성(함흥지역)의 여진족과 맞닥드렸다.
윤관은 석성공격을 명했으나 여진족의 방어도 만만치 않아 한걸음도 나아갈수 없었다.
이때 윤관은 척준경을 불러 장군 이관진과 함께 성을 공략하라 명한다.
척준경은 자신이 받은 은혜를 갚는 기회로 여기고 방패를 들고 홀로 석성의 성벽을 올라
추장 서너명을 베어죽였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윤관은 본대를 이끌고 좌군과 함께
석성을 함락시켰다. 이날 정벌군 전부대는 여진족을 크게 격파하여 수급1만개를 얻었고
동여진의 요을대와 휘하 3230명의 항복을 받아내는 성과를 얻었다.
척준경은 공으로 능라 30필을 받았다.
*척준경 홀로 오직 검과 방패만 들고 적들의 성을 기어 올라가 적장을 모두 죽이고 성문을 열어줌
#그의 행적 세번째.
1108년(예종 3년), 윤관은 오연총과 함께 정병 8000여명을 데리고 가한촌(加漢村) 병목의 작은 길로
나가니, 여진의 군사들이 풀숲 사이에 매복하고 있다가 윤관의 군사가 이르는 것을 기다려서
이를 급히 공격하여, 고려군이 모두 무너지고 다만 10여 명이 남았다.
이때 오연총이 화살을 맞아 형세가 위태로움을 척준경에게 알렸는데, 척준경은 급히 용사 10여명을
거느리고 윤관을 구하려 하였다. 그러자 아우인 척준신이 말렸으나 척준경은 크게 꾸짖은뒤 윤관을
둘러싼 적군을 향해 돌격했다. 순식간에 적군 10여명을 죽이고 윤관을
구출한 찰나, 최홍정과 이관진이 이끄는 지원군이 나타나 적들은 포위를 풀고 달아났다.
윤관은 영주성으로 돌아와 척준경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부자의 예(父子之禮)를 내렸고,
제를 받들어 합문지후로 승급했다.
*그 유명한 척준경및 용사들 10여명 vs 여진족 50000여명
#그의 행적 네번째.
이후 적이 기, 보병 2만을 이끌고 영주성 남쪽에서 성을 공격하려 하였다. 이에 윤관은 임언과 말하여
방어에 치중하고자 했으나 척준경이 이에 반대하여 적과 싸우고자 하였다.
척준경의 용맹을 믿은 윤관은 결사대를 주어 적을 치게하였다. 성밖으로 나간 척준경은
순식간에 적군 19명의 머리를 베었고 적은 패하여 북쪽으로 달아났다. 이를 성벽위 누대에서 본
윤관 등이 누대에서 내려와 이를 맞이하여 손을 잡고 서로 절을 하였다.
윤관ㆍ오연총은 이에 제장들을 거느리고 중성대도독부로 모였다. 이때, 권지승선 왕자지(王字之)가
공험성(公險城. 함북 회령)으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도독부에 오다가 갑자기 오랑캐의 추장 사현(史現)의
군사를 만나 이와 싸우다가 패하여 타고 있던 말을 잃었다. 이를 들은 척준경이 곧 날랜 군사를 이끌고 가서
왕자지를 구하여 적을 패퇴시켜, 오랑캐의 갑옷 입힌 말을 빼앗아 가지고 돌아왔다.
*척준경 용사들 10여명 vs 여진족 최소2만여명.+인질구출
#그의 행적 다섯번째.
2월, 여진족이 반격이 거세졌다. 그들은 수만의 군사를 이끌고 웅주성을 포위하였는데 이에 고려군사들이
겁을 먹고 있었다. 최홍정이 군사들을 타이르고 격려하니, 잃었던 전의를 가지게 되었다.
곧 4문을 열고 일제히 나가 공격하여 크게 이겼는데, 사로잡고 벤 것이 80급, 병거(兵車) 50여 량,
중거(中車) 2백 량, 말 40필을 노획하였고, 그 외에도 노획한 무기는 이루 다 셀 수 없었다.
이때 척준경은 성 안에 있었는데, 상황이 위급함을 듣고 군사의 해진 옷을 입고 밤에 줄에 매달려
성을 내려가, 정주로 돌아가서 군사를 정돈하고 통태진을 통과하여 야등포로부터 길주에 이르러
적을 맞아 싸워 크게 부수니, 성 안의 사람들이 감격하여 울었다.
공을 인정받은 척준경은 행영병마판관에 올랐다. 당시 정3품인 왕자지와 함께 8월엔 함주와 영주,
9월엔 사지령에서 여진족을 대파하여 총 수급 60개를 얻었고 3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에 예종은 1109년 5월에 준경의 아버지, 척위경을 궁으로 불러 준경의 공을 치하하고
술과 고기, 은한덩이, 멥쌀 10석을 하사하였다.
*갑옷도 제대로 갖춰입지않은 척준경 1인 vs 여진족 수만여명. 이때 척준경이 자신의 군사 력은 성을
지키도록 하고 단신으로 싸워 적장을 베었다.
그 외에도 숱하게 공적을 세우고 중앙 요직 문하시중(門下侍中) 까지 승진하였으나
오랜 정치싸움뒤
묘청의 등장과 오랜 평화기간으로 무관인 척준경이 설 자리가 없어지자, 결국 1127년 3월에 신하들의
모함과 입김으로 인종은 그를 암타도로 유배를 보낸다.
그러나 준경을 좋아한 인종은 4월에 유배지를 고향인 곡주로 바꿔주고, 1130년엔 친인척들을 한곳에
모여 살게 해주었고, 준경의 처자들을 복권시켜주었다. 1144년 드디어 척준경 본인을 복권시켰으나,
복권된지 몇일후 준경은 그의 고향 곡주에서 생을 마감한다.
또한 인종은 19년후 준경의 자손들에게도 관직을 주었다.
그후 얼마뒤 인종도 세상을 떠났다.
우리 최강 용장(勇將)의 이름을 기억합시다. 고려의 척준경!
첫댓글 읽고갑니다...의병이라 해야겠네요...척준경
정치의 모함과 질투는 언제나 사라질려나 그 먼옛날부터도 있었으니...
고질병이 된겐가...그런생각을 하며 글 읽었습니다..
잘읽엇습니다
모랐덧 역사를 알게되어 고맙습니다 좋은글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