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heep follow him, because they recognize his voice.
말씀의 초대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주님이시며 메시아이시라고 선포한다. 그는 유다인들과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으라고 가르친다. 베드로의 말을 듣고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점점 늘어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며, 사람들에게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본보기를 보여 주신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영혼의 목자이며 보호자가 되시어 우리와 함께 계신다(제2독서). 예수님께서 양들의 문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생명을 얻고 하느님 나라로 인도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나셨던 팔레스티나는 우리나라 경상도 정도 크기의 작은 나라입니다. 해안 지역을 빼고는 대부분 지역의 기후가 건조하고 메마른 나라입니다. 당시 내륙 지방의 갈릴래아 지역과 요르단 강 주변을 빼고는 올리브를 가꾸고 양 떼를 기르며 목축업을 할 수 있는 산록 지대였습니다. 팔레스티나 지역의 기후는 우기와 건기로 나누어지는데, 특히 건기가 되면 목자들이 양들을 데리고 멀리 풀밭을 찾아다녀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날이 저물면 임시 양 우리에 들어가 다른 양 떼들과 섞여 밤을 지내게 됩니다. 그래서 밤이면 종종 도둑들이 양 우리를 넘고 들어와 양들을 해치고 훔쳐서 달아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아침이 되면 목자들은 각자 자기의 양들을 하나하나 불러내어 다시 풀밭으로 데려갑니다. 목자들이 양 떼를 그냥 몰고 다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양들 하나하나에 목자들이 지어 준 고유한 이름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목자가 이름을 부르면 그 목소리를 정확히 알아듣고 소리를 내며 주인을 따라 나선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목자와 양들의 풍경을 보시며 사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무리가 마치 양들처럼 느껴지셨을 것입니다. 어디로 갈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을 바라보시며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다.”(마르 6,34)라고 하셨지요. 그래서 몸소 우리 인생길을 이끄시는 목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이른 아침 목자를 따라 나서는 양들처럼, 우리는 오늘도 신나게 주님을 따라나서는 것입니다. 그분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분께서 이끄시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착한 목자이신 그분께서 오늘도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
오늘 복음의 목자는 착한 분입니다. 당당한 분입니다. 그러기에 양 우리에 들어갈 때 문으로 들어갑니다. 그러한 목자는 문제가 생기면 바로 부딪쳐 해결합니다. 잔머리를 쓰거나 계책을 꾸미지 않습니다.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지” 않는 것이지요. 평범한 말이지만 마음에 와 닿습니다. 그만큼 착하고 당당한 목자가 드문 까닭입니다. 성직자만이 목자는 아닙니다. 부모와 선생님과 모든 장상(長上)이 다 목자입니다. 그러기에 목자는 많습니다. 그러나 착한 목자는 드뭅니다. 정확한 목자는 많아도 정에 끌리는 목자는 적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간다고 하셨습니다. 꾸짖는 목소리는 아닐 겁니다. 따지는 목소리도 아닐 겁니다. 애정이 담긴 따뜻한 목소리였을 겁니다. 믿음 역시 위에서 내려옵니다. 물이 흘러내리듯 아랫사람에게 전달됩니다. 목자가 양들을 믿으면 양들은 즐겁게 따라갑니다. 그렇지만 목자가 의심하면 양들은 불안한 눈길로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인 역시 누구나 목자가 될 수 있습니다. 맡겨진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운명적으로 맺어진 자신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요? 착하고 당당한 관계인지요? 따뜻하고 믿음을 나누는 관계인지요? 아니라면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교훈입니다.
신자들에게는 OO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박용식 신부-
오늘 성소주일 복음 말씀은 예수님과 사람을 목자와 양에 비유합니다. 목자는 양을 먹여 주고 늑대에게서 보호해 주고, 밤에는 우리에 넣어 밤새도록 지켜줍니다. 목자는 양을 돌보는 사람으로서 양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절대적 존재입니다.
양은 무기가 없는 동물입니다. 다른 동물들은 침입하는 적에 대항하는 무기를 갖고 있습니다. 무기가 없으면 도망치거나 숨는 재주라도 있습니다. 호랑이와 독수리는 강한 무기를 갖고 있고, 토끼나 다람쥐는 숨거나 도망치는 재주가 있습니다. 느림보 거북이도 딱딱한 껍질의 보호막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양에게는 적에게 대항할만한 무기도, 자신을 보호하는 방패도, 도망치거나 숨는 재주도 없습니다. 오히려 털이 꼬불꼬불해서 나무에 걸리면 잡히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양은 보호자가 절대로 필요합니다.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위해 목자가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온 산천을 찾아다니는 이유는 그 양을 구하지 않으면 제 혼자 힘으로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양은 목자 없이 혼자 힘으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신자들은 양이고 예수님은 목자입니다. 양에게 무기가 없듯이 신앙과 구원에 있어서 신자들에게는 무기가 없습니다. 신자들은 목자인 예수님이 보호해 주지 않으면 언제 늑대에게 물려갈지, 언제 낭떠러지에 떨어질지 모를 정도로 약합니다. 그래서 목자이신 예수님이 부활 승천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당신을 대신해 양들을 돌볼 목자를 뽑으셨습니다. 그 목자들이 바로 오늘의 사제들입니다. 예수님 시대 목자는 예수님 자신이셨지만 지금 시대 목자는 예수님이 뽑으신 사제들입니다. 양에게 목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듯이 지금 시대 신자들에겐 사제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1986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성소주일 담화에서 "예수께서는 사제들 없이는 교회를 원치 않으셨다. 사제들이 없다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 즉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성찬과 그분의 용서가 없다는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신자는 사제 없이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사제가 세례성사를 줘야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 자녀가 됩니다. 사제가 세례성사를 줌으로써 신자를 하느님 자녀로 태어나게 했기에 사제를 '아버지'(father, 神父)라고 부릅니다. 아버지 없이 자녀가 태어날 수도, 양육될 수도 없는 것처럼 사람들은 사제 없이 신자가 되기도 어렵고, 신자생활을 하기도 어려운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성사로써 모든 죄가 용서됐어도 살아가면서 또 죄를 지으면 다시 용서받아야 되는데 이때도 사제가 있어야 고해성사를 볼 수 있습니다. 또 사제가 있어야 미사를 드릴 수 있고, 미사 때 축성된 예수님 몸을 받아 모실 수 있습니다. 이 밖에 하느님 은총을 받는 모든 성사생활은 오로지 사제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사제가 없으면 신자들은 제대로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사제를 통해 하느님 자녀가 되고, 하느님 은총을 받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제를 통해 구원을 받습니다. 사제 없이 하느님 자녀가 돼 구원받기란 아주 어렵거나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신 예수님처럼 그 대리자인 사제들은 신자들을 위해 목숨까지 바쳐야 합니다. 그리고 신자들은 사제가 있기에 신앙생활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에 고마워해야 합니다. 또 자녀들이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주신 아버지에게 효도해야 하듯이 신자들은 영적 생명을 낳아주고 길러주는 사제들에게 영적으로 효도해야합니다. 인간적 단점이 있다고 해서 부모의 공로가 없어지지 않듯이, 인간적 단점이 있다고 해서 영적 아버지인 사제의 공로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성소주일을 맞아 신자들은 진심어린 마음으로 사제를 아버지로 공경하고 사랑하며 존경하도록 힘쓰십시오. 사제의 인간적 약점에서 오는 작은 실수를 탓하고 비난하기보다 사랑으로 덮어주고 감싸주십시오. 또한 말과 행동으로 사제의 사목활동에 적극 협조하십시오. 사제를 당신 대리자로 뽑으신 주님께서 틀림없이 은총으로 보상하시리라 믿습니다.
성소자들에게 바치는 기도
-최인각신부-
거룩한 부르심
오늘 주님께서는 “나는 양들의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양들로 여기시어, 당신의 푸른 목장으로 초대하십니다. 구원의 푸른 목장에서 그분의 음성을 들으며 풀을 뜯고 있는 나 자신을 생각하면 행복이 밀려옵니다.
오늘은 주님의 목장에서 행복하게 노닐며 기쁘게 풀을 뜯는 양들에게 목자의 사랑과 보살핌을 충분히 받도록 봉사할 젊은이를 초대하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성소주일입니다. 오늘 성소주일을 지내면서 제가 며칠 전 신학생들에게 했던 훈화 내용 일부(더 큰 열정과 야망을 갖고 사제직에 임할 마음을 갖자)를 여러분에게도 소개하고자 합니다.
“… 5월 아름다운 성모님의 달, 신록의 계절을 맞으며 여러분과 함께 ‘젊음과 열정’ ‘야망과 도전의식’에 대하여 이야기 나누고 싶습니다. 며칠 전 피겨 여왕 김연아(스텔라)의 경기를 보며, 김연아 선수가 피겨 여왕의 자리에 오른 것은 그만의 열정과 야망과 도전의식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봅니다. 또 한 분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바로 요한 바오로 2세입니다. 우리 민족을 특별히 사랑하셨던 교황님은 많은 성무활동을 하시며 인류, 특히 젊은이들에게 감동과 기쁨을 주셨습니다. 저는 요한 바오로 2세의 시복식이 있던 날, 그분에 관한 영화를 보았습니다. 카롤 보이티아 신학생이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면서 ‘주님, 이제부터 하느님 당신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하겠습니다’라고 했던 기도가 계속 제 머릿속에 맴돕니다. 독일군이 폴란드를 점령하여, 신앙의 자유를 박탈하고 인권을 무시하며, 자유를 제한하던 시대에 분연히 일어나 사제직의 삶을 결정하고 주님께 자신을 봉헌하며 바친 한 신학생의 기도였지만, 이미 교황으로 준비된 이의 열정적 마음이며, 기도였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신학생들에게 그런 젊음과 열정, 야망과 도전의식이 있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김연아 선수와 요한 바오로 2세와 같이 열정적인 삶을 산다면, 우리는 ‘성인 신학생’, ‘성인 신부’라는 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우리 신학생들의 젊음과 열정, 야망과 도전 의식은 ‘거룩함’이 아닌가 합니다. 적당한 타협이 아닌, 과감한 투신이 포함된 거룩함의 정진 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생의 기쁨, 진리를 전해주기 위해 자신의 온 존재를 십자가 위에서 살라 바치셨습니다.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이들에게 보복하지 않고, 지극히 크고 넓은 마음으로 용서와 자비를 베풀며, 구원의 거룩한 희생 제사를 바치셨습니다. 스승이시며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가기 위해 그 뜻을 받들고 시작한 우리 사제직의 성소! 정말 뜨거운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용맹정진하는 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아닌가 합니다. 여러분이 신학교에 입학할 때, 다짐했던 거룩한 용맹정진의 마음을 기억하며, 주어진 삶을 여한 없이 살아봅시다.
막 피어나는 푸른 나뭇잎보다 더 푸르게, 진한 라일락 꽃향기보다 더욱 진하게, 아름답게 피어오르는 철쭉과 장미보다 더욱 아름답게,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나비보다 더 자유롭게, 우리가 생각했던 거룩함보다 더욱 거룩하게, 이글이글 타오르는 태양보다 더 뜨겁고 밝게 거룩한 빛을 내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거룩함의 승리가 여러분의 것이 되게 해 달라고. 그리고 우주의 모든 피조물도 감동하는 천주의 사제가 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 우리 신학생들이 하느님 당신을 향한 열정을 뜨겁게 갖도록 도와주시고, 온 세계를 끌어안으며 정의와 사랑을 실천할 큰 힘을 주시며, 북극과 남극의 추위를 녹일만한 뜨거운 가슴을 주소서. 주님, 또한 사랑을 실천하는 마더 데레사의 섬세함도 주시며, 천 년이 지났음에도 변하지 않는 아우구스티노 성인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적이며 신학적인 통찰력을 내려주소서. 어떠한 고통과 번민 속에서도 용감히 일어나 당신의 빛을 전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어둠과 죽음을 이기고 승리한 많은 순교자와 성인 성녀들처럼 빛나게 하소서. 그리하여 마침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소서….”
우리 신학생들이 잘못 살고 있기 때문에 이런 훈화와 기도를 한 것이 아니라, 더욱 훌륭한 신학생으로서 사제직에 한 걸음 더 나아가도록 격려하기 위해 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충실히 따르고자 하는 성소자들을 위하여 함께 기도합시다. 그들이 훗날에 우리의 영혼을 하느님께 인도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저희의 목자이신 주님만을 알아뵙고 희망하며 그 목소리를 따라가게 하소서.
세밀한 독서?(Lectio) 유목민이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착한 목자’ 비유는 양들과의 관계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합니다. 목자는 이스라엘 직종 가운데 하나로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누구에게나 맡겨지지는 않았습니다. 유목민은 안정된 한 장소에서만 가축을 돌보는 것이 아니기에 양 떼를 지키는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사람만이 목자의 권위와 직분을 부여받았습니다.?(창세 37,?16; 1사무 17,?34 참조) 그러므로 참된 목자는 어떤 위험이나 재난을 만났을 때 양 떼를 버려두고 가는 일이 없으며, 이는 목자로서의 자긍심이기도 합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미풍을 배경으로 일찍이 구약성경의 저자들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지도자와 백성의 관계를 ‘목자와 양’?으로 표상해 왔습니다.?(시편 77,?21; 이사 63,?11; 에제 34,?1???16 참조) 이렇듯 예수님께서도 당신을 따르는 이들과의 결속 관계를 목자와 양들?(요한 10,?1???5), 양들의 문?(7???10절), 착한 목자?(11???18절)?로 표현하십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며 “문으로 들어가는 양들의 목자”?와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들어가는 도둑이나 강도”?를 구별합니다.?(1???2절) 도둑이나 강도는 양들을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지만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10절) 오십니다. 이로써 참 목자와 거짓 목자가 극명하게 드러나기에,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줄 뿐 아니라 양들은 그 목소리를 알기에 따라갑니다.”?(3절) 그러나 “낯선 사람은 따르지 않고 오히려 피해 달아납니다. 낯선 사람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5절) 이처럼 ‘목자와 양의 관계’?는 일차적으로 ‘알아듣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우리는 흔히 이름만 알아도 그 사람을 안다고 하지만, ‘안다’?는 것은 단순히 외적인 것에 달려 있지 않으며 전인적 신뢰와 온전한 이해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목자는 자기 양들이 다른 양들과 섞여 있다 해도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모으고 이끄십니다. 또한 목자가 앞장서서 갈 때 양들이 그를 따라가는 것은 그분이 누구인지를 알고 그분의 말씀과 그 뜻을 이해하며 신뢰하기 때문입니다.?(3???4절) 그 따름은 단순한 동행이 아니라 추종입니다. 그러므로 목자와 양의 이차적 관계는 ‘추종?’으로 이어집니다. ‘추종자’?들은 그들의 자유의지와 욕망을 접고 주님과 운명을 함께하며 가르침과 뜻을 따릅니다. 오직 그분을 믿고 따라가는 이들이 바라고 희망하는 것은 “죽음을 겪으시는 그분을 닮아, 그분과 그분 부활의 힘을 알고 그분 고난에 동참하는 법을 알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어떻게든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필리 3,?10???11)?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바리사이들이 예수님 말씀의 뜻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영적인 장님이기 때문입니다.?(요한 9,?39; 10,?6 참조) 예수님은 그분을 믿고 따르는 이들을 구원으로 이끄는 유일한 목자로서 구원의 통로인 “문”?(루카 10,?7.?9)?이며,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길”?(14, 4????6)?이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통하여 들어갈 때만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10,?9)?이며,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10절) 될 것입니다. 이는 양들이 생명의 목초를 얻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죽음을 이기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됨을 의미합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해 친히 선정하신 착한 목자로서 우리의 종말론적 구원자이심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묵상?(Meditatio)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요한 10,?3ㄴ) 제가 주님을 밝히 알고 목소리를 배워 익힐 때, 비로소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게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저를 알고 계시고 이름을 불러주시기에 제가 당신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었음을 미처 몰랐습니다. 주님은 제가 찾아가서 만나는 문이 아니라 불러주실 때 이르는 문이셨습니다.
기도?(Oratio)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저의 한평생 모든 날에 호의와 자애만이 저를 따르리니 저는 일생토록 주님의 집에 사오리다.?(시편 23,?1.?6)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부족하다” -허성신부-
예수께서는 당신을 착한 목자라고 하시면서 당신의 양을 하나 하나 이름을 부르시면서 불러내어 인도하시는 까닭에 양들은 다른 사람은 따르지 않고 당신만을 따른다고 말씀하신다. 당신은 품꾼들과는 다르게 이리가 양들을 공격해올 경우에는 목숨을 걸고 이리를 격퇴시킨다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이러한 내용의 성서구절이 나오는 부활 제4주일을 예전에는 착한 목자 주일로 불렀고, 예수님을 닮은 선한 성직자 수도자가 많이 배출되도록 기도하면서 청소년들이 주님의 부르심에 많이 응답하도록 하기 위해 각 수도원과 신학교를 개방하고 여러가지 행사를 하는 성소주일로 정하고 있다.
교우들은 지식과 명석한 두뇌를 가진 목자보다는 누구나 차별없이 보듬어 주고 감싸주는 따뜻한 가슴을 지닌 목자를 선호한다. 그렇기에 인사이동 때가 가까워지면 우리 본당에 어느 분이 오시게 될까가 최대의 관심사가 되고 열심하고 사랑이 많은 분을 맞게 되면 우리본당은 축복을 받았다고 하고 그렇지 못하면 벌받았다고들 하지 않는가?
자식을 낳아 키우는 부모님의 사랑을 보면 당신의 양떼에게 쏟으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가를 연상할 수 있다. 부모들은 자기 자식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하고싶고 무엇이든지 다 주고 싶고 어떤 때는 무모한 짓 까지도 서슴치 않는다. 사랑이 지극하면 수고도 모르고 더러운줄도 모른다. 엄마들은 다른집 아기들의 똥은 더럽다고 하면서도 자기 자식의 똥기저귀는 마구 주물러 빨지 않는가? 다른집 아기들이 밥을 먹다 흘리면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자기 아기 입언저리에 붙어있는 코와 침이 묻어있는 음식물은 떼어먹지 않는가?
자식이 성장하여 독립할 때까지 부모님들의 사랑과 정성과 수고와 투자는 엄청난 것이지만 부모님들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며 보람마저 느끼고 있지 않은가? 사랑이 크면 수지타산을 할 줄 모른다. 100마리의 양을 키우던 목자가 한마리의 양을 잃었을 때 아흔아홉마리의 양을 버려둔채 찾는다는 보장도 없는 상태에서 길잃은 한마리 양을 찾으러 간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짓인가. 다행히도 그 양을 찾았기에 망정이지 찾지도 못하고 게다가 길에 방치해 놓은 아흔아홉마리의 양떼마저 누가 몰고 갔더라면 어찌할뻔했나.
내가 잘 아는 어느 자매가 키우던 애완견이 새끼를 배었는데 너무 늙어서 새끼를 낳다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의료보험 혜택도 못받는 개를 가축병원에 입원시켜 제왕절개 수술을 해 새끼를 분만시키고 완치될 때까지 병원에 입원시키고 매일 병문안을 가는 것을 보았다. 아마도 그 병원에 들어간 돈으로 애완견을 샀더라면 그보다 더 예쁜 개를 여러마리 살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사제가 되기전에 얼마동안 양계를 해본적이 있는데 양계를 하다보니 내가 키우는 닭들에게 애정이 가게되고 애정이 가다보니 닭똥을 막 주물러도 더럽지도 않고 냄새도 역하지 않았다. 사랑의 힘은 그렇게도 위대한 것이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분은 돈도 없고 권력도 없는 체구도 왜소하고 쭈글쭈글한 할머니에 불과했지만 그 작은 가슴속에 엄청난 사랑을 지녔던 까닭에 인도의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어머니의 사랑으로 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분을 인도 국민의 어머니로 부르게 되었고 그분이 돌아가시자 인도 정부는 국장을 치러드리지 않았던가. 아이들은 잘 놀다가도 아프거나 배가 고프거나 무슨 문제가 생기면 엄마를 부르거나 찾아간다. 그러면 모든 문제들이 해결된다. 우리도 어느누구나 그렇게 부담없이 자연스럽게 찾아가서 응석도 부리고 때로는 울기도 하고 생떼도 쓸 수 있는 부모 역할을 하는 선한 목자들이 많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물질의 풍요속에서 환락문화에 젖어있는 젊은이들은 결혼을 아예 기피하거나, 하더라도 자녀를 하나나 둘만 낳으려는 풍조에 빠져 인성교육이나 신앙에서 점점 멀어져가고 있을 뿐 아니라 하나 또는 둘뿐인 자녀를 성직자나 수도자로 봉헌하기를 더욱 꺼리는 관계로 신학교나 수도원을 지망하는 비율이 해마다 감소하고 있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부족하다고 한탄하시면서 추수 주인에게 일꾼을 보내달라고 기도하기를 당부하신 우리의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뜻을 받들어 열심히 기도하면서 성소계발에 힘을 기울여야 되겠고 하느님께서도 당신의 외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셨고 아브라함도 외아들인 이사악을 하느님께 봉헌했으니 우리의 외아들이나 외동딸을 주님의 목장에서 일하도록 하느님께 봉헌들 하시기 바란다.
어떤 계기로 사제가 될 생각을 하셨나요? -이기양신부-
"신부님! 신부님은 어떤 계기로 신부가 되려고 결심하셨나요?" 제가 자주 듣는 질문 중 하나입니다. 그 때마다 저는 "「천국의 열쇠」(A.J.크로닌)를 읽고 신부가 되려고 결심했습니다"하고 답하곤 합니다.
첫 영성체조차도 재수를 하면서(정신없이 놀다가 예식시간을 놓쳐 다음해에야 첫 영성체를 받았음) 부모님의 강요에 의해 억지로 신앙생활을 하던 제게 우연치 않게 천주교 서적을 탐독하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특히 중학교 2학년 시절에 읽었던 「천국의 열쇠」는 사제의 꿈을 시작하는 직접적 동기가 되었지요. 소신학교(신학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는 프란치스 치셤 신부와 같은 사제 상을 마음 깊이 간직하며 구체적으로 사제 상을 키워가게 되었습니다.
주인공 프란치스 치셤은 다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양친을 모두 잃고 고아가 되는 불우한 소년기를 거치면서도 깨끗한 마음과 아름다운 영혼을 지닌 청년으로 성장합니다. 실연의 아픔을 겪은 후 사제의 길로 들어서지만, 사제가 된 후에도 자유분방한 성격과 신자들과의 격의 없는 관계로 완고한 주임신부와 갈등을 겪게 되고 그의 장점을 잘 아는 교장신부 권유로 중국에 선교사로 파견되지요.
무료 진료소를 여는 것으로 시작해, 페스트가 마을을 덮쳤을 때는 자신의 생명을 내던져 사람들을 구하고, 내전과 기근에는 지혜와 용기로 대처하던 치셤 신부는 특히 아이들을 사랑하여 버려진 아이들을 데려와 따뜻하게 보살피고, 어렵게 지은 성당이 홍수로 인해 폐허로 변했을 때도, '다 없어져버린 것 위에 다시 세우는 것이 인생'이라며 희망을 잃지 않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한편, 치셤 신부와 한 고향 출신이며 신학교 동창생인 안셀모 밀리는 출중한 외모와, 뛰어난 언변, 천부적 사교수완을 발휘해 교회 내에서 출세를 거듭합니다. 중국에 간 이후 단 한 번도 그곳을 벗어나지 못한 치셤 신부에게 밀리의 주교 임명 소식이 전해졌을 때, 그는 '패배자라도 하느님을 소유하고 있는 한, 세상 전부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고향 본당신부로 돌아온 치셤 신부는 신자들에게서 경외심에 이르는 애정을 받지만, 밀리 주교에게는 부적절한 사람으로 보여져 주교의 비서인 슬리스 신부에 의해 행적을 조사받게 됩니다. 그러나 치셤은 조용히 말합니다. "나는 내 인생의 평판을 하느님께 맡기겠소."
「천국의 열쇠」가 계기가 돼 신부될 꿈을 꾸게 됐다는 내 이야기를 듣고 어느 자매가 단숨에 책을 읽고 와서는 "신부님! 신부님은 치셤 신부보다는 안셀모 밀리 신부 같아요!"하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던 기억도 생생합니다.
본당 신부로서 살다보면 어떤 때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보다는 행정적인 것에 더 치우쳐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합니다. 물론 신부의 삶이 신자들 생각처럼 기도와 신자들을 만나는 거룩한 것으로만 짜여진 것이 아니라는 현실을 고려하더라도 일이 사랑의 실천보다 우선이 아님을 잊지 않으려고 늘 노력합니다.
오늘은 성소주일입니다. 성소란? 하느님의 부르심을 말하며 특별히 사제직에로의 부르심을 받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기도하고 후원하는 주일입니다. 우리시대에 사제로 산다는 것은 고난의 길을 의미하기도합니다. 왜냐면 사제의 삶은 가난, 순명, 정결의 삶으로 특징지어지는데 그것은 인간의 욕망을 역행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가능한 길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이 있고 은총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뽑혀 하느님의 대리자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부족한 인간이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신자들의 기도와 믿음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삶이기도 합니다.
훌륭한 사제가 있어야 성소자들이 끊이지 않고 대를 잇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신자들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것은 그것이 신부 혼자의 힘만으로는 부족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의 기도와 믿음 속에 사제는 성화되고 그 사제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투영될 때 성소의 싹은 움트고 자라납니다.
사제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격려해주시기 바랍니다................◆
목자와 문 그리고 도둑과 강도 -서공석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목자에 또 목장의 문에 비유해서 설명합니다. 먼저 예수님은 목자이십니다. 도둑이나 강도가 하는 행동과는 전혀 다릅니다. 도둑이나 강도는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딴 데로 넘어 들어갑니다.” 그러나 “양 치는 목자는 문으로 버젓이 들어갑니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목자는 자기 양들을 하나하나 불러내어 밖으로 데리고 나갑니다...목자는 앞장 서 갑니다. 양떼는...그를 뒤따라갑니다.” 목자와 양들의 애정 어린 관계를 말해주는 목가(牧歌)적인 장면입니다. 초기 교회가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해 가진 신뢰와 친근감을 담아서 서술한 장면입니다.
목자라는 단어는 유목민이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친숙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목자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성가로 잘 부르는 ‘야훼는 나의 목자’라는 시편(23)이 있습니다. 푸른 풀밭으로 또 물가로 나를 이끌어주시기에 아쉬울 것이 없다는 노래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신뢰를 노래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이 예수님을 목자라고 부르는 것은 그분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부터 시작된 일입니다.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던 하느님의 생명이 예수님 안에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문이라는 또 하나의 단어로 예수님을 설명합니다.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누구든지 나를 거쳐서 들어오면 안전할뿐더러 마음대로 드나들며 좋은 풀을 먹을 수 있다.” 이 문이라는 단어도 목자라는 단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양들을 좋은 풀밭으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또 말합니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습니다.” 이 복음은 목자와 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표현하고자 합니다. 생명을 주는 예수님은 요한복음서 전체 안에 흐르는 주제입니다. “아들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3,15)는 말씀이 있고,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1,4)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앞서가는 목자로서 또 우리가 통과해야 하는 문으로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분이십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통해 들어가면 생명이 있습니다. 오늘의 복음서가 우리에게 하는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생명이 있는데 무슨 생명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물을 수 있습니다. 같은 요한복음서는 그 3장에서 니코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온 이야기를 합니다. 그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고, 예수님은 그에게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는 “위로부터 새로 나야 한다”(3,3)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니코데모는 질문합니다.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새로 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요한복음서는 이 대화로써 말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신앙인이 누리는 생명은 이 세상 생명체들 안에 있는 그런 자연 생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을 아버지로 한 생명 안에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위로부터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생명체와는 다른 실천을 하는 하느님 생명 안에 태어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생명은 옛날 팔레스티나 베짜다 못에서 병자를 낫게 한 생명입니다(5,1-9),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율사와 바리사이들이 율법의 이름으로 돌로 치려할 때, 그들의 손에서 그를 살려내고 그에게 용서를 선포한 생명입니다(8,1-11). 그 생명은 제자들의 발을 종과 같이 엎드려서 씻은 섬김의 생명입니다(13, 1-17). 그 생명은 십자가에서 스스로를 내어 주고 쏟으면서 실천한 사랑의 생명입니다(19,30). 그 생명은 자기 한 사람 살기에 급급해서 자기 주변 사람들을 외면하는 생명이 아닙니다. 그 생명은 자기 한 사람 잘 되고 잘 살겠다고 주변 사람들을 밀쳐내고, 음해하고 기득권자에게 아부하는 생명이 아닙니다. 자기 주변이 잘 살게 하기 위해 자기 스스로를 내어주는 생명입니다. 굶주리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고, 우는 사람을 위로하는 생명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그 생명이 하느님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다시 태어난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 생명을 모범적으로 살아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릅니다. 예수님은 그 생명의 실천에 있어서 앞장 서 가신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하나 그런 실천에로 불러내는 목자이십니다. 그 생명에 들어가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문입니다. 우리는 성서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을 배웁니다. 그분이 우리를 좋은 풀밭으로, 생명의 풀밭으로 인도하신다고 믿고 따릅니다.
오늘 복음이 예수님을 목자와 문이라고 설명하기 위해 대조해 보이는 것이 “도둑과 강도”라는 표상입니다. 그들은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딴 데로 넘어 들어갑니다...양을 훔쳐다가 죽여서 없앱니다.” 요한복음서가 도둑과 강도라고 말할 때는 일차적으로 예수님이 맞서서 비판하신 그 시대 유대교의 실세들을 지칭합니다. 특히 후에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율사들과 제관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지 못하고, 그분을 통해 하느님에게로 나갈 것을 거부하였으며, 그분을 소외시키고 제거해버린 이들입니다. 오늘의 복음은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지 못한다고 지적합니다.
그 시대 유대교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오늘 예수님의 일을 왜곡하는 도둑과 강도의 행위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보여 주신 하느님의 생명과 전혀 다른 일을 가르치는 말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에게 기도하여 재물을 얻고, 많이 바치면 많이 받는다는 말들이 있습니다. 걸핏하면 기적 났다고 떠들면서 마치 신앙은 기적을 얻어내는 수단인 양 사람들을 오도하는 행위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에게 순종하라고 말하면서 자기의 뜻을 따르도록 강요하는 행위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목자이신 예수님, 문이신 예수님과 무관한 일들입니다.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이라는 문을 통해서 들어오지 않고 딴 데로 넘어 들어온 이들입니다. 잘 살아야 하겠다는 인간의 자기 보존 욕구를 자극하여 재물을 빼앗고,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에는 빼앗음과 죽음이 있습니다.
가톨릭교회가 오늘을 성소주일로 정한 것은 교회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목자로, 예수님을 문으로 명심하고 살라는 뜻입니다. 생명의 풀밭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아서 하느님의 생명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도 그분의 뒤를 따라 그분을 통해서 그 생명에로 나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평신도 가정이 성소의 온상이다 -유영봉신부-
사도 바오로는 "들어야 믿을 수 있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이 있어야들을 수 있다."(로마10,17) 고 하셨다. 그러므로 자신의 전 존재를 투신하여 복음 선포할 성소자가 없으면 교회는 생명력을 잃게 마련이다. 부르심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지만 응답은 인간이 하는 것이다. 성(聖)가정이야말로 성소(聖召)의 온상이다.
1. 성소 주일의 의미
우리는 교황님의 선종을 계기로 한 사람의 위대한 목자가 온 인류와 역사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지를 잘 보았다. 넓게 보면 모든 신앙인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오늘 교회가 성소주일을 지내는 목적은 하느님의 도구로 교회에 몸바쳐 헌신할 사제성소와 수도성소를 더욱 풍성하게 하려는데 있다. 하느님은 당신의 구원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아브라함과 모세와 예언자들을 부르셨고, 또 마리아와 사도들을 부르셨듯이, 오늘도 교회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부르신다. "구원의 역사는 하느님의 부르심과 인간의 응답으로 엮어지는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일찍이 다산(茶山) 정약용은 박해를 받아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백성을 다스리는 '치민(治民)의 도리(道理)'를 집대성하여 목민심서(牧民心書)를 썼다. 정치를 목민(牧民)이라고 표현한 것이 예사롭지가 않다. 봉사하는 자세로 국민을 섬기며 다스리는 목자다운 지도자가 없을 때 그 국가의 장래는 암담할 수밖에 없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할' 교회의 사명은 이 일을 위해 몸바쳐 투신할 일꾼들을 필요로 한다. 진리의 말씀을 세상에 전하며 증거할 사람이 없을 때, 교회는 세상의 빛이 될 수 없다. 일찍이 사도 바오로는 "들어야 믿을 수 있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이 있어야 들을 수 있다."(로마1017)고 하셨다. 전 존재를 바쳐 헌신할 일꾼들이 없을 때, 교회의 생명력도 시들어버릴 수밖에 없다.
2. 교회가 무기력해지면 세상은 더욱 어두워진다
제1독서에서 사도 베드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이 예수를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주님이 되게 하셨다."(사도2,26)고 외치신다. 우리 사회는 그동안 문민정부, 국민의정부, 그리고 참여정부라는 이미지를 내세우며 개혁을 부르짖었지만, 힘을 가진 자들, 권력의 최 상층부가 국민을 위한 개혁보다는 자기들의 세를 확장하기 위한 '우리편 봐주기'로 일관하는 세태가 만연하고 있다. 그래서 '투명성 지수'에 있어서는 세계 최하위권에 머물러 있는 것이 현실이다.
도덕불감증에 사로잡힌 이 사회에 참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죽어야 산다"는 참된 그리스도교적 봉사의 진리를 되살려야 한다. "너희들이 죽인 예수는 살아있다."고 외치는 베드로의 말씀은 우리를 통해 세상에 울려 퍼져야 한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 바로 우리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살려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을 행하다가 고통을 당하면서도 참으면 하느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여러분은 바로 그렇게 살라고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을 위해서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본보기를 남겨주셨습니다."(1베드2,20-21) 하신 제2독서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하겠다. 스스로 개혁되려는 의지 없이 국민을 개혁의 대상으로 몰아붙이는 개혁, 비전도 확신도 없이 국민을 실험의 대상으로 여기는 개혁은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 이러한 세상을 바꾸고 변화시키기 위해 교회는 참으로 짠맛을 잃지 않아야 하고 빛을 발해야 한다. 교회가 생명력을 잃으면 세상은 더욱 어두워질 수밖에 없다. 교회의 생명력은 말씀을 전하고 증거하는 데에 투신할 성소자들의 증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임을 깨닫자.
3. 평신도 가정은 성소의 온상이다
선종하신 요한 바오로 2세는 모든 신자들의 자긍심을 일깨워 주셨다. 특별히 성소(聖召)를 사는 성직자와 수도자들에게는 자긍심과 함께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부끄러움도 느끼게 해 주셨다. 참으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성소자는 어디서 나오는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며 그 진리를 증거 할 성소자는 모두 평신도 가정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물론 하느님께서 먼저 부르시지만, 인간의 응답 없이는 수도자도 성직자도 될 수 없다. 모든 평신도들은 이점을 깊이 명심해야 한다. 복음의 정신을 사는 거룩한 신자 가정이 없을 때 성소는 고갈 될 수밖에 없음을 잊지 말자. 신자들은 세상과 교회에 봉사하는 넓은 마음을 지니고 그리스도의 큰 삶을 따라 나서도록 자녀들을 격려해야 한다. 자녀들이 성소의 길을 걷도록 부모들이 협조하지 않을 때, 언젠가는 불안과 가책 속에서 고백성사도 못 받고 성체도 모시지 못한 채로 임종을 맞아야 될지도 모른다. 모두 이기적인 자세로 자신을 위한 작은 행복만을 찾는다면, 누가 임종을 맞이하는 환자에게로 달려 갈 것인가?
모든 신자들은 수도자와 성직자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성소 육성을 위해 큰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우리들의 의무임을 명심하자. "주님, 저희에게 성인 사제를 많이 보내주소서." 아멘.
행복한 목자 착한 목자 -양승국신부-
성소주일에 걸맞게 오늘 복음은 '착한 목자'에 대한 복음입니다. 착한 목자란 양 한마리 한 마리를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 양들을 극진히 사랑하기에 양들도 그 사랑을 알고 신뢰하는 사람, 결국 양들을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인도하는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존재 그 자체로 세상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목자, 고통과 번민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 구원의 향기를 퍼트리는 목자, 실의에 빠져 고통받고 있는 양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주는 목자, 그래서 삶의 이정표를 잃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다시금 새 출발 할 수 있는 용기를 주는 그런 목자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주변에는 착한 목자들이 많이 계십니다. 온종일 오로지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을 위해 헌신합니다. 그런 착한 목자와 함께 길을 걸어가는 신자들 얼굴에서는 행복이 묻어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는 착한 목자가 한분 계십니다. 이탈리아 국적의 김하종 빈첸시오 신부님으로 성남에서 노숙인들을 위한 무료급식소를 운영하고 계십니다.
언젠가 불황의 여파로 무료급식소 운영에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신부님을 찾아뵌 적이 있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노숙인들을 위한 저녁식사를 직접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앞치마를 두르신 신부님께서는 환한 얼굴로 바삐 움직이고 계셨습니다. 칼놀림이나 간보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신부님 표정을 통해, 신부님 말씀을 들으면서 착한 목자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가끔 신선한 야채를 사서, 갓 구운 빵을 가져다가 노숙인들에게 원없이 퍼주는 꿈을 꿉니다."
"안나의 집은 비록 가건물이지만 이곳에서 수백명이 한끼 식사를 해결합니다. 노숙인들은 모두 고귀한 존재들입니다. 한시적으로 그들이 인간의 존엄성을 잃고 거리에서 방황하고 있지만 그들은 누구 못지않게 중요하고 가치 있는 생명입니다."
"안나의 집에는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와서 일하는데 저는 그들에게 정말 성의있게 이 일에 참여할 것을 부탁합니다.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준비하는 식단처럼 풍요롭지 않더라도 청결하고 정성스럽게 해야만 한다고 '잔소리'를 합니다. 밥을 먹기 위해서 늘어선 긴 행렬, 그들 중에 내 절친한 친구 예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외국인이 아니라 같은 인간으로서 활동하는 겁니다. 그리고 제 성당은 바로 여기 안나의 집이에요. 제가 평생 섬길 사람은 여기 버림받고 가난한 이들이고요."
지금 하고 계시는 일만 해도 힘에 벅찰 텐데, 신부님은 아직도 많은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단기 계획, 중장기 계획까지 다 세워놓으시고 한가지 한가지 실천하고 계십니다. 무료급식소 외에도 노숙인 자활을 돕기 위한 프로그램 운영, 노숙청소년들을 위한 그룹홈, 무료진료 활동, 상담서비스 등.
점점 늘어만 가는 노숙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 시선이 상당히 엇갈리기도 합니다. '무료급식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 일이다. 아무리 노력해 봐야 원점이다. 괜히 노숙인들에게 의존심만 키워주고 안 하느니 못하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그렇게 생각할 일만도 아닙니다. 얼마나 견디기가 힘들었으면 집을 뛰쳐나왔겠습니까? 나름대로 한번 일어서려고 다들 얼마나 각고의 노력을 했겠습니까? 하다 하다 도저히 안 되겠으니 거리로 나오게 된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가고픈 생각도 굴뚝같을 것입니다. 몇달 이곳저곳을 전전하다 보니 수중에 가진 돈도 다 떨어지고, 더 이상 어찌해 볼 도리가 없게 된 분들이 노숙인들입니다.
그분들에게 따뜻한 밥 한끼 제공하는 것은 너무나도 인간적인 일이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신다 하더라고 분명히 하셨을 일입니다. 존경하는 노숙인들의 천사 김하종 신부님께서 운영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계신답니다. 내일 당장이라도 안나의 집(031-757-6336)을 찾아가 쌀 한포대라도 전해드려야겠습니다. 한번 찾아뵙고 감사하다고 인사라도 드려야 하겠습니다.
측은한 마음 -박영식신부-
죽음의 그늘진 골짜기를 간다 해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나이다.
오늘은 좋은 목자이신 예수님을 본받아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 헌신할 더 많은 사제를 보내 주시도록 하느님께 열심히 기도하는 ‘성소 주일’입니다.
구약성서에서 하느님의 백성은 양 떼로, 지도자는 목자로 소개됩니다(이사 63,11; 에제 34,1-10 참조). 특히 에제키엘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향하여 “양을 돌보아야 할 몸으로 제 몸만 돌보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아! 너희가 젖이나 짜 먹고 양털을 깎아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먹으면서 양을 돌볼 생각은 않는구나”(에제 34,2-3)라고 질책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목자를 도둑이며 강도로 규정하십니다. 직접적으로는 믿음의 눈이 없기 때문에(요한 9,39 참조)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알아보지 못하는(요한 8,43.47 참조) 바리사이들을 가리켜 하신 말씀입니다. 바리사이들은 부정한 것에서 ‘구별된 사람’을 뜻하며 정결과 부정의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의 유다 백성보다 훨씬 높은 기준을 가지고 있으면서 사람들에게 엄격한 실천을 강요했습니다. 고통을 죄의 벌로 이해하며 안식일에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을 죄악시하였습니다. 그들은 곤경에 직면한 사람의 아픔을 외면했습니다. 남이야 고통을 받든 말든 나와 상관 없다는 태도였습니다. 그들은 법을 앞세워 안식일에는 병도 고치지 못하게 했습니다(마태 12,9-14 참조). 안식일에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예수님을 하느님으로부터 온 사람이 아니라고 단정하며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요한 9,13-16 참조).
그러나 예수님은 법보다 사람을 먼저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픈 사람을 보면 측은한 마음을 가지시고 병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마태 14,14 참조). 예수님은 힘들고 지친 사람들의 안식처이셨습니다. 사람을 살리시는 예수님은 결국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희생되셨습니다. 구약의 목자들은 양들을 잡아먹었으나, 예수님은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욕을 당하시면서도 모욕으로 갚지 않으셨으며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위협하지 않으시고 정의대로 심판하시는 분에게 모든 것을 다 맡기셨습니다”(1베드 2,23).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분을 우리의 주님이 되게 하셨고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양들의 문’이시며 좋은 목자이십니다. 양들은 그분의 목소리를 알고 그분의 뒤를 따라갑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본보기를 따라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다른 사람을 단죄하거나 보복할 권한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겨 드리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정의대로 심판해 주시기를 겸손되이 빌어야 합니다.
오늘 나는 누구를 따르고 있습니까? 행여 달콤한 말로 유혹하여 죽음의 길로 이끄는 거짓 목자를 따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떤 계기로 사제가 될 생각을 하셨나요? -이기양신부-
신부님! 신부님은 어떤 계기로 신부가 되려고 결심하셨나요?" 제가 자주 듣는 질문 중 하나입니다. 그 때마다 저는 "「천국의 열쇠」(A.J.크로닌)를 읽고 신부가 되려고 결심했습니다"하고 답하곤 합니다. 첫 영성체조차도 재수를 하면서(정신없이 놀다가 예식시간을 놓쳐 다음해에야 첫 영성체를 받았음) 부모님의 강요에 의해 억지로 신앙생활을 하던 제게 우연치 않게 천주교 서적을 탐독하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특히 중학교 2학년 시절에 읽었던 「천국의 열쇠」는 사제의 꿈을 시작하는 직접적 동기가 되었지요. 소신학교(신학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는 프란치스 치셤 신부와 같은 사제 상을 마음 깊이 간직하며 구체적으로 사제 상을 키워가게 되었습니다. 주인공 프란치스 치셤은 다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양친을 모두 잃고 고아가 되는 불우한 소년기를 거치면서도 깨끗한 마음과 아름다운 영혼을 지닌 청년으로 성장합니다. 실연의 아픔을 겪은 후 사제의 길로 들어서지만, 사제가 된 후에도 자유분방한 성격과 신자들과의 격의 없는 관계로 완고한 주임신부와 갈등을 겪게 되고 그의 장점을 잘 아는 교장신부 권유로 중국에 선교사로 파견되지요. 무료 진료소를 여는 것으로 시작해, 페스트가 마을을 덮쳤을 때는 자신의 생명을 내던져 사람들을 구하고, 내전과 기근에는 지혜와 용기로 대처하던 치셤 신부는 특히 아이들을 사랑하여 버려진 아이들을 데려와 따뜻하게 보살피고, 어렵게 지은 성당이 홍수로 인해 폐허로 변했을 때도, '다 없어져버린 것 위에 다시 세우는 것이 인생'이라며 희망을 잃지 않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한편, 치셤 신부와 한 고향 출신이며 신학교 동창생인 안셀모 밀리는 출중한 외모와, 뛰어난 언변, 천부적 사교수완을 발휘해 교회 내에서 출세를 거듭합니다. 중국에 간 이후 단 한 번도 그곳을 벗어나지 못한 치셤 신부에게 밀리의 주교 임명 소식이 전해졌을 때, 그는 '패배자라도 하느님을 소유하고 있는 한, 세상 전부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고향 본당신부로 돌아온 치셤 신부는 신자들에게서 경외심에 이르는 애정을 받지만, 밀리 주교에게는 부적절한 사람으로 보여져 주교의 비서인 슬리스 신부에 의해 행적을 조사받게 됩니다. 그러나 치셤은 조용히 말합니다. "나는 내 인생의 평판을 하느님께 맡기겠소." 「천국의 열쇠」가 계기가 돼 신부될 꿈을 꾸게 됐다는 내 이야기를 듣고 어느 자매가 단숨에 책을 읽고 와서는 "신부님! 신부님은 치셤 신부보다는 안셀모 밀리 신부 같아요!"하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던 기억도 생생합니다. 본당 신부로서 살다보면 어떤 때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보다는 행정적인 것에 더 치우쳐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합니다. 물론 신부의 삶이 신자들 생각처럼 기도와 신자들을 만나는 거룩한 것으로만 짜여진 것이 아니라는 현실을 고려하더라도 일이 사랑의 실천보다 우선이 아님을 잊지 않으려고 늘 노력합니다. 오늘은 성소주일입니다. 성소란? 하느님의 부르심을 말하며 특별히 사제직에로의 부르심을 받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기도하고 후원하는 주일입니다. 우리시대에 사제로 산다는 것은 고난의 길을 의미하기도합니다. 왜냐면 사제의 삶은 가난, 순명, 정결의 삶으로 특징지어지는데 그것은 인간의 욕망을 역행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가능한 길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이 있고 은총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뽑혀 하느님의 대리자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부족한 인간이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신자들의 기도와 믿음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삶이기도 합니다. 훌륭한 사제가 있어야 성소자들이 끊이지 않고 대를 잇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신자들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것은 그것이 신부 혼자의 힘만으로는 부족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의 기도와 믿음 속에 사제는 성화되고 그 사제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투영될 때 성소의 싹은 움트고 자라납니다. 사제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격려해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안병철신부-
유목민이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양을 치는 일은 일상적인 삶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일상적인 삶의 요소들을 가르침을 위한 소재로 삼으십니다. 물론 청중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지요. 착한 목자에 관한 가르침은 요한 복음서 안에서는 유일하게 비유의 형태를 띤 것으로써 다양하고도 풍부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세우실 교회를, 양들이 안전하게 머물 수 있도록 울타리를 쳐 놓은 목장으로 소개하십니다. 그와 동시에 당신 자신을 양들이 드나드는 문으로 소개하십니다. 그러므로 목장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한편 예수님은 양들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양들도 그들의 목자이신 예수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따라갑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양들의 합법적인 목자이십니다.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께로부터 부름을 받고 그분의 자녀가 된 자들입니다. 합법적인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사람 하나하나를 각자의 이름을 불러 푸른 풀밭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당신의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으시는 분으로서 양들의 생명을 지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피로서 당신을 믿는 모든 이들을 구원해 주십니다. 시편의 말씀을 떠올려 봅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시편 8,5)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착한 목자이신 그분의 양 우리 안에서 그분께서 이끄시는 대로의 삶을 살아갈 때만이 행복과 기쁨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를 지켜 주시고 보살펴 주시는 착한 목자이신 주님을 향해 다음과 같은 기도를 바치며 그에 걸맞게 살려는 노력을 해 나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저희의 삶을 주관하시는 주님, 오늘 저희의 길에서 험한 산이 옮겨지기를 기도하지 않습니다. 다만 저희에게 고갯길을 올라갈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 저희가 가는 길에서 부딪히는 돌이 저절로 굴려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넘어지게 하는 돌을 오히려 발판으로 만들어 가게 해 주십시오. 넓은 길, 평탄한 길을 원하지 않습니다. 다만 좁고 험한 길이라도 주님과 함께 가도록 더욱 깊은 믿음을 주십시오. 넓고 푸른 또 다른 인생의 초원이 주어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지금의 양 우리가 행복의 보금자리임을 깨달을 수 있도록 지혜와 용기를 주십시오. 착한 목자이신 주님, 보살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진정 당신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조건 없이 당신을 따를 수 있도록 그리하여 당신으로 인해 행복한 자녀로 살아갈 수 있도록 감사하며 살게 해 주십시오.
어디서 행복을 찾을 것입니까? 우리를 지켜 주기 위해 마련해 주신 양 우리를 떠나서도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오만과 교만을 아직도 마음 안에 남겨 두시렵니까?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조욱현신부-
오늘은 착한 목자의 형상이 주제이다. 유다인들은 이 목자의 형상에서 안정과 번영, 위험으로부터의 보호, 생활의 친교, 친근한 애정 등의 의미를 느낀다. 목자라는 개념은 그들의 아버지 같은 느낌을 갖는 말이 된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묘사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목자라는 상징적 개념을 사용한다. 또한 사랑과 더불어 힘과 용기의 사상도 있다. 이것을 우리는 오늘의 화답송으로 노래하는 시편 22의 내용에 나타나고 있다.
제2독서: 1베드 2,20-25 : 목자이신 그분께로 돌아왔습니다
제2독서의 목자는 자기 양들을 위해 죽임을 당하고 그럼으로써 ‘길을 잃은’ 양들까지도 구원하실 보다 큰 능력을 갖게되는 목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목자가 이제는 하느님께와 같이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예수께서 여러 번 당신을 목자에 비유함으로써 끊임없이 ‘이스라엘의 목자’(시편 79,2; 에제 34,1; 예레 23,1-3 등)로 묘사되고 있는 하느님과 같으신 분임을 드러내시기 때문이다. 이 목자라는 명칭을 통하여 당신의 메시아적 신분을 드러내신다.
복음: 요한 10,1-10 :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요한복음 10장은 예수님의 메시아적 신분이 드러나는 내용을 담고있으며, 수난기(13장)가 시작되기 전에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최고의 절정의 순간을 맞고있음을 의미한다. 하여간 여기서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목자에 비유하신다. 예수께서는 팔레스티나 지방의 수많은 양우리에서 있는 일을 말씀하신다. 목자들은 한 양우리에다 여럿이 한데 어울려 각자 자기 양들을 집어넣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양들은 자기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래서 목자가 부르면 그들은 목자를 따라 나서고, 다른 양들은 자기 주인이 오기를 기다릴 것이다. ‘문지기’ 역시 목자들을 잘 알기 때문에 그들이 ‘문’으로 자유롭게 들어가도록 한다. 그러나 ‘도둑들’은 ‘딴 데로’ 몰래 들어가 양들을 훔친다. 잡히지 않은 양들은 그들을 피해 달아난다. “그들의 음성이 귀에 익지 않기 때문이다”(5절). 이것은 ‘참 목자’와 ‘도둑’과 ‘강도’ 사이의 차이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예수께서는 자신들을 스스로 목자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도둑에 불과했던 사람들을 향해 말씀하고 계시다. 그렇다면 누가 ‘문’으로 양우리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이고, 양들을 ‘죽여 없애려고’하는 ‘도둑’이며 ‘강도’인가? 이것은 참으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유다인들’이라고 지칭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인 바리사이파 사람들, 사제들을 겨냥한 말씀이다. 그들은 ‘눈이 잘 보인다’고 하지만, ‘눈이 먼’ 사람들로서(9,4041), 스스로도 보지 못하고 아는 체 하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보지 못한다. 안다고 하는 것이 하느님의 말씀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결정적으로 전해지는 순간부터 그 의미를 상실한다. 오히려 폭력으로 그리스도를 없애려 한다.
“도둑은 다만 양을 훔쳐다가 죽여서 없애려고 온다”(10절). 그러나 양떼뿐만 아니라 그보다 앞서 목자까지도 없애려 한다. 그래야 양떼를 흩어지게 하기가 쉽기 때문이다(마태 26,31). 이것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이 다가왔다는 것이 드러나고, 이 때문에 모든 양떼가 “더 풍성한 생명을”(10절) 얻게 되리라는 사실이 나타나고 있다. 예수께서는 당신만이 참되고 유일한 목자이심을 주장하신다.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양들이 드나드는 문”(7-9절)이라고 하시고 “누구든지 나를 거쳐서 들어와야 안전할 것이다”(9절)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항상 주님이 모범으로 보여주신 진리와 사랑의 요구를 존중하고 따름으로써 진정으로 형제들에게 봉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도둑’과는 달리 ‘목자’가 반드시 통과해야할 ‘문’이시며, 또한 참된 목자가 베푸는 희생적 사랑의 봉사를 잘 보여주신다. 즉 예수께서는 참 목자이시며 동시에 당신이 교회의 선익을 위해 태어날 무수한 ‘목자’들이 반드시 통과해야할 증명의 ‘문’이시다.
이것이 오늘 성소주일의 의미이다. 오늘날 세계도처에서 주님을 따라 주님을 닮으려 준비된 많은 젊은이들이 있다. 그러나 한편 주님을 따라 자신의 생명을 바치기까지 실천해야할 그 봉사는 그들에게 두려움을 줄 수 있다. 때문에 많은 젊은이들이 이상은 높지만 주저하는 그 마음에 용기를 주십사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참된 목자는 항상 그분뿐이시며 주님은 당신이 부르시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형제들 가운데서 떳떳하게 당신을 드러낼 수 있는 힘도 주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 아야 한다.
또한 오늘, 모든 사제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할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참으로 그리스도를 세상에 증거하는데, 참된 목자의 모습으로 그들에게 참으로 봉사하는, 그리고 모든 교우들의 영적인 이익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 일할 수 있는 목자들이 될 수 있도록,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자들이 되도록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참 자유 허락하신 목자 그리스도 -배광하신부-
양들을 샅샅이 아시는 분
양들을 잘 돌보는 착한 목자는 우선 양들의 특성을 잘 이해합니다. 어떤 양은 어디가 아픈지, 무슨 풀을 특히 좋아 하는지, 추위에 강하고 약한 양인지, 털은 언제 깎아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착한 목자임을 밝히시며 양들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이름까지도 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심지어 우리들의 머리카락 숫자까지 다 세어 두셨다고 하셨습니다(마태 10, 30 참조). 진정 우리는 주님의 양떼이고 주님은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목소리에 신뢰를 가지고 따라가면 됩니다.
그런데 현실의 삶은 여러 유혹으로 우리의 믿음을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가정의 여러 불화와 시련이 신앙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며, 여러 그릇된 사상이라든가 이단이 판을 치는 세상 위험에 우리들은 늘 노출되어 있습니다.
성실한 신앙의 토대 위에 착한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르려는 양떼들에게는 여간 혼란스런 세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실로 얼마나 많은 양떼들이 착한 목자를 떠나 멸망의 길로 이끄는 도둑의 소굴로 들어갔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도둑들의 의도를 밝히시면서 당신의 목자 된 사명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문으로 들어와 생명을 얻으라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 7; 10).
세상에 넘쳐나는 것이 사이비 종교입니다. 그곳 종교의 교주들은 거의 한결같은 모습을 보입니다. 그것은 양떼들을 착취하는 것입니다(훔치고). 그리고 착한 양떼들의 가정을 파탄으로 만들어 가족 구성원이 화목하게 살 수 없도록 만듭니다(죽이고). 끝내는 양떼들을 멸망으로 끌어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위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공포감을 조성합니다. 그리하여 ‘저주’ ‘심판’ ‘징벌’ 등의 단어를 가장 많이 사용합니다. 자주 엄포와 으름장을 놓으면서 신도들을 옭아매고 인간의 가장 소중한 자유의지를 억압하는 그들은 분명 도둑이며 강도입니다.
그러나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누구보다도 자유를 사셨던 분이셨고, 자유를 주신 분이셨습니다. 인간의 자유가 억압으로 신음할 때, 당신은 분연히 일어나시어 대항하시고 우리에게 참된 자유와 신앙을 일깨워 주신 착한 목자이셨습니다.
들어가야 할 문
봉쇄 수도원의 높은 담과 교도소의 높은 담의 차이는 이렇습니다. 수도원의 담은 바깥사람들이 쉽게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요, 교도소의 담은 안에 있는 사람들이 바깥으로 쉽게 나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나 쉽게 들어올 수 있는 문이십니다. 그리고 나가지 못하도록 붙들어 두시기 위하여 강제적인 힘을 쓰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문으로 들어 와야 영원한 생명을 보장 받는다고 하십니다.
문은 열려있을 때 의미가 있습니다. 문은 안과 밖을 연결시켜 줍니다. 닫아걸고 있는 문은 분명 그 안에 살고 있는 주인의 어두운 면을 보여 줍니다. 바깥에 있는 이들이 보아서는 안 될 온갖 악한 소유물이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열 수 없게 만든 것입니다.
밝은 광명의 삶은 문을 닫아걸고 있을 수 없습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두 팔을 벌리고 활짝 열려있는 생명의 문이십니다. 그 문으로 들어가 그분 보호의 울타리 안에서 살아갈 때 그곳이 진정 자유가 넘치는 생명의 낙원인 것입니다.
그 같은 생명의 문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교회 역사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신앙인들이 세상이 주는 안락한 삶의 유혹을 끊고 생명의 문을 선택하였습니다. 세상 것들을 끊고 생명의 문을 선택한 이들은 결국 모든 것을 잃은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체험한 생명의 기쁨을 다른 이들과 나누고자 하였습니다. 넘치는 기쁨을 혼자 간직하기에는 터질듯 한 심장의 박동을 누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목자의 뒤를 따르는 삶인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오늘 부활 제4주일을 ‘착한목자주일, 성소주일’로 지내며 세상의 많은 젊은이들이 착한 목자이신 주님의 거룩한 음성에 귀 기울여 응답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특별히 사제 성소와 수도 성소의 부르심에 응답해 줄 것을 청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결코 당신 혼자 구원사업을 행하지 않으십니다. 그 옛날 열두 사도들을 뽑으셨듯이 오늘도 당신의 일꾼들을 부르십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팔과 다리, 당신의 마음을 헤아리는 음성이 되어줄 것을 호소하고 계십니다. 생명의 문으로 들어와 그 생명의 기쁨을 체험한 제2, 제3의 착한 목자, 자신을 투신할 목자를 찾고 계십니다.
성소
-오상선신부-
오늘은 성소, 거룩한 부르심을 기념하고 집중 조명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오늘 전국의 신학교나 수도원들은 많은 젊은이들과 어린이들의 방문을 받고 행사도 합니다. 이참에 저의 성소의 여정을 되돌아봅니다. 제 성소의 못자리는 시골 공소 신부님 사제관이었습니다. 그때 은퇴하고 오신 신부님께는 뒷바라지 하시는 동정녀 누님이 계셨지만 누님조차도 여자라 사제관에 들어가실 수 없으셨기에 저는 사제관 청소도 하고 식사나 빨래 심부름도 하였습니다. 학교 갔다가도, 그리고 놀다가도 때가 되면 사제관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하느님의 사람이 아닌 신부님의 사람, 신부님처럼 되어야 할 사람으로 운명 지어졌습니다. 다른 한 분은 저의 누나입니다. 누나는 할아버지 신부님이 얼마 계시다가 다른 곳으로 가신 후 매일 저를 10리 떨어진 본당으로 미사를 데리고 다니며 성인전을 들려주었고 신부되라고 하셨지요. 그러니 저는 언제, 어떤 동기로 성소를 결심하였는지 도저히 알 수 없고 가랑비에 옷 젖듯이 그렇게 사제는 저의 운명이 되었습니다.
다음으로 저를 성소로 이끈 것은 프란치스코였습니다. 프란치스코가 누군지, 수도자가 뭔지도 모르고 그저 사제되려 수도원 들어온 저에게 프란치스코가 등장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 전기도 변변히 없던 때 선배로부터 들은 몇 가지 얘기만 듣고도 저는 프란치스코에게 완전히 홀려버렸습니다. 예수님조차도 제쳐놓을 정도로 프란치스코는 저를 완전히 사로잡았고 저는 프란치스코 따라 하기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너무도 프란치스코와 먼 존재였습니다. 몇 년을 기를 쓰고 따라 하려 했지만 가당치도 않은 저만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프란치스코 때문에 수도생활을 포기하였습니다. 밖에 나가 살며 프란치스코라는 우상을 지워버리자 그때 예수님께서 복음을 통하여 저에게 주님으로 비로소 오셨습니다. 그래서 다시 수도원으로 돌아와 수련을 받았습니다.
다음으로 저를 부른 것은 세상이었습니다. 저의 문제가 해결되자 세상이 눈에 뜨이기 시작했고 세상이 무엇을 나에게 필요로 하는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하도록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셨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결핵환자들을 위해서 뛰었고 후원회도 세웠습니다. 버스 안내양들을 위한 야학활동도 하였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순회 소 공동체 운동도 하였으며 공장 노동자로도 일하였습니다. 그리고 민주화 운동, 정의 평화 운동에도 적극 가담하였습니다. 이런 성소와 사명감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북한 주민과 탈북자나 장애자를 위한 활동을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의 부르심과 소명은 역시 형제들을 위한 봉사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저에게 은총을 주셔서 밖의 일을 열심히 하면서도 형제들을 가장 사랑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만큼 형제들을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환속하는 많은 형제들 때문에 실망감과 좌절감을 맛봐야 했습니다. 성소의 위기는 아니었지만 인생의 위기를 이때 겪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무력해졌을 때 하느님께서 저를 다시 부르셨습니다. 사제로 부르신 것도, 프란치스코에게 부르신 것도, 세상에로 부르신 것도, 형제들 봉사에로 부르신 것도 아닌, 바로 당신께로 부르셨습니다. 이때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다른 부르심이 다 쓸데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주님의 부르심은 저를 당신께로 부르신 것이라는 점입니다. 당신과 함께 있자고 저를 부르신 것입니다. 당신과 함께 있는 것으로 충분하고 만족한, 그래서 진정 가장 행복한 同居에로 부르신 것입니다.
제 마지막 날 다시 성소에 대한 회고를 한다면 이때를 다음과 같이 회고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모욕을 당하시면서도 모욕으로 갚지 않으시고,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위협하지 않으시고, 의롭게 심판하시는 분께 당신 자신을 맡기셨으며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당신의 상처로 우리의 병을 치유하시는 모범을 보이셨지만 모범은 따르지 않고 행복한 同居에만 안주하였다고 회고할 것입니다.
문이신 그리스도
-김찬선신부-
이태리에서 공부를 할 때 건축하는 친구들을 둔 덕분에 최신 건축사조에 대한 이야기들을 귀동냥할 때가 많았다. 어느 건축가는 집 안에 문이 없는 공간 개념을 도입하여 방문이고 화장실 문이고 문이란 문은 하나도 달지 않는 집을 설계하여 화제라고들 하였다.
문은 공간을 구분 짓는 역할을 한다. 때론 그 때문에 개방성보다는 폐쇄성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프라이버시와 내면성, 은밀성을 드러내 주는 상징이기도 하다. 하늘나라는 폐쇄성의 상징이기보다는 이러한 내면성, 신비성의 상징이기에 문이란 개념이 필요하다.
절에 가보면 절이 시작되기 좀 멀찍이 일주문이라는 게 있다. 이 문을 들어서면서부터 공간 개념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벌써 속세와는 다른 상징적인 공간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주는 문이다.
우리 크리스천에게 있어 이 일주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그분 자신이 바로 문이시다. 우리와 하늘나라를 연결시켜주는 문이다. 그 문을 거치지 않고서는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그런 문이다. 그 문은 보통문이 아니다. 파리의 개선문보다 남대문과 동대문, 독립기념관의 그 문보다 더욱더 안전하고 막강한 방화문이시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하늘나라를 그리워하는 영혼이라면 이 문을 늘 찾아야 한다.
수도원 생활에서 문을 여닫을 때 조심하여 소리를 내지 않도록 하는 것이 기본 교육 중에 포함되어 있다. 물론 침묵을 유지하여 다른 사람의 잠심생활에 방해되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이 현실적인 이유이겠지만 바로 <문이신 그리스도>를 늘 의식하라는 이야기도 된다.
우리 인생은 수없는 문(관문)을 통과하는 여정이다. 내 방에 들어오기 위해서도 나는 대문을 거쳐, 현관문을 거쳐, 봉쇄구역 문을 거쳐 방문을 거쳐 내실 문을 거쳐야 한다. 그리고 곳곳에 여러 다른 문들이 있다. 내 방 안에만도 창문이 또 몇 개인가? 이러한 문을 통해 우리는 엄청난 우주적 공간을 살포시 내다볼 뿐이다. 이러한 문을 통해 우리는 바로 그 하느님 나라를 쬐끔씩 내다볼 뿐이다. 이 문이 그냥 들어오고 나오는 문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는 문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할 때 그 문은 바로 예수가 된다. 예수는 바로 문을 통해서 만날 수 있게 된다.
그분을 만나러 멀리 갈 필요가 없다. 방 안에 앉아서도 창문을 통해 하늘나라를 내다 볼 수만 있다면 그곳에 바로 예수께서 계신 것이다. 오늘 비온 후 창문으로 내다보이는 정원은 더없이 싱그럽다. 메마름과 답답함은 더 이상 보이지 않고 하늘나라의 모습을 잉태하고 있다. 바로 이 문에서 예수님은 나와 함께 하고 계신다.
오늘 문을 지날 때마다 또 문을 통해 사물을 바라볼 때마다 문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그리고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 하늘나라를 잠시 엿보자. 그 싱그러움을...
The sheep follow him, because they recognize his voice.
말씀의 초대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주님이시며 메시아이시라고 선포한다. 그는 유다인들과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으라고 가르친다. 베드로의 말을 듣고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점점 늘어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며, 사람들에게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본보기를 보여 주신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영혼의 목자이며 보호자가 되시어 우리와 함께 계신다(제2독서). 예수님께서 양들의 문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생명을 얻고 하느님 나라로 인도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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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나셨던 팔레스티나는 우리나라 경상도 정도 크기의 작은 나라입니다. 해안 지역을 빼고는 대부분 지역의 기후가 건조하고 메마른 나라입니다. 당시 내륙 지방의 갈릴래아 지역과 요르단 강 주변을 빼고는 올리브를 가꾸고 양 떼를 기르며 목축업을 할 수 있는 산록 지대였습니다. 팔레스티나 지역의 기후는 우기와 건기로 나누어지는데, 특히 건기가 되면 목자들이 양들을 데리고 멀리 풀밭을 찾아다녀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날이 저물면 임시 양 우리에 들어가 다른 양 떼들과 섞여 밤을 지내게 됩니다. 그래서 밤이면 종종 도둑들이 양 우리를 넘고 들어와 양들을 해치고 훔쳐서 달아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아침이 되면 목자들은 각자 자기의 양들을 하나하나 불러내어 다시 풀밭으로 데려갑니다. 목자들이 양 떼를 그냥 몰고 다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양들 하나하나에 목자들이 지어 준 고유한 이름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목자가 이름을 부르면 그 목소리를 정확히 알아듣고 소리를 내며 주인을 따라 나선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목자와 양들의 풍경을 보시며 사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무리가 마치 양들처럼 느껴지셨을 것입니다. 어디로 갈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을 바라보시며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다.”(마르 6,34)라고 하셨지요. 그래서 몸소 우리 인생길을 이끄시는 목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이른 아침 목자를 따라 나서는 양들처럼, 우리는 오늘도 신나게 주님을 따라나서는 것입니다. 그분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분께서 이끄시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착한 목자이신 그분께서 오늘도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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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의 목자는 착한 분입니다. 당당한 분입니다. 그러기에 양 우리에 들어갈 때 문으로 들어갑니다. 그러한 목자는 문제가 생기면 바로 부딪쳐 해결합니다. 잔머리를 쓰거나 계책을 꾸미지 않습니다.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지” 않는 것이지요. 평범한 말이지만 마음에 와 닿습니다. 그만큼 착하고 당당한 목자가 드문 까닭입니다. 성직자만이 목자는 아닙니다. 부모와 선생님과 모든 장상(長上)이 다 목자입니다. 그러기에 목자는 많습니다. 그러나 착한 목자는 드뭅니다. 정확한 목자는 많아도 정에 끌리는 목자는 적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간다고 하셨습니다. 꾸짖는 목소리는 아닐 겁니다. 따지는 목소리도 아닐 겁니다. 애정이 담긴 따뜻한 목소리였을 겁니다. 믿음 역시 위에서 내려옵니다. 물이 흘러내리듯 아랫사람에게 전달됩니다. 목자가 양들을 믿으면 양들은 즐겁게 따라갑니다. 그렇지만 목자가 의심하면 양들은 불안한 눈길로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인 역시 누구나 목자가 될 수 있습니다. 맡겨진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운명적으로 맺어진 자신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요? 착하고 당당한 관계인지요? 따뜻하고 믿음을 나누는 관계인지요? 아니라면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교훈입니다.
신자들에게는 OO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박용식 신부-
오늘 성소주일 복음 말씀은 예수님과 사람을 목자와 양에 비유합니다. 목자는 양을 먹여 주고 늑대에게서 보호해 주고, 밤에는 우리에 넣어 밤새도록 지켜줍니다. 목자는 양을 돌보는 사람으로서 양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절대적 존재입니다.
양은 무기가 없는 동물입니다. 다른 동물들은 침입하는 적에 대항하는 무기를 갖고 있습니다. 무기가 없으면 도망치거나 숨는 재주라도 있습니다. 호랑이와 독수리는 강한 무기를 갖고 있고, 토끼나 다람쥐는 숨거나 도망치는 재주가 있습니다. 느림보 거북이도 딱딱한 껍질의 보호막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양에게는 적에게 대항할만한 무기도, 자신을 보호하는 방패도, 도망치거나 숨는 재주도 없습니다. 오히려 털이 꼬불꼬불해서 나무에 걸리면 잡히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양은 보호자가 절대로 필요합니다.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위해 목자가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온 산천을 찾아다니는 이유는 그 양을 구하지 않으면 제 혼자 힘으로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양은 목자 없이 혼자 힘으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신자들은 양이고 예수님은 목자입니다. 양에게 무기가 없듯이 신앙과 구원에 있어서 신자들에게는 무기가 없습니다. 신자들은 목자인 예수님이 보호해 주지 않으면 언제 늑대에게 물려갈지, 언제 낭떠러지에 떨어질지 모를 정도로 약합니다. 그래서 목자이신 예수님이 부활 승천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당신을 대신해 양들을 돌볼 목자를 뽑으셨습니다. 그 목자들이 바로 오늘의 사제들입니다. 예수님 시대 목자는 예수님 자신이셨지만 지금 시대 목자는 예수님이 뽑으신 사제들입니다. 양에게 목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듯이 지금 시대 신자들에겐 사제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1986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성소주일 담화에서 "예수께서는 사제들 없이는 교회를 원치 않으셨다. 사제들이 없다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 즉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성찬과 그분의 용서가 없다는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신자는 사제 없이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사제가 세례성사를 줘야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 자녀가 됩니다. 사제가 세례성사를 줌으로써 신자를 하느님 자녀로 태어나게 했기에 사제를 '아버지'(father, 神父)라고 부릅니다. 아버지 없이 자녀가 태어날 수도, 양육될 수도 없는 것처럼 사람들은 사제 없이 신자가 되기도 어렵고, 신자생활을 하기도 어려운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성사로써 모든 죄가 용서됐어도 살아가면서 또 죄를 지으면 다시 용서받아야 되는데 이때도 사제가 있어야 고해성사를 볼 수 있습니다. 또 사제가 있어야 미사를 드릴 수 있고, 미사 때 축성된 예수님 몸을 받아 모실 수 있습니다. 이 밖에 하느님 은총을 받는 모든 성사생활은 오로지 사제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사제가 없으면 신자들은 제대로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사제를 통해 하느님 자녀가 되고, 하느님 은총을 받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제를 통해 구원을 받습니다. 사제 없이 하느님 자녀가 돼 구원받기란 아주 어렵거나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신 예수님처럼 그 대리자인 사제들은 신자들을 위해 목숨까지 바쳐야 합니다. 그리고 신자들은 사제가 있기에 신앙생활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에 고마워해야 합니다. 또 자녀들이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주신 아버지에게 효도해야 하듯이 신자들은 영적 생명을 낳아주고 길러주는 사제들에게 영적으로 효도해야합니다. 인간적 단점이 있다고 해서 부모의 공로가 없어지지 않듯이, 인간적 단점이 있다고 해서 영적 아버지인 사제의 공로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성소주일을 맞아 신자들은 진심어린 마음으로 사제를 아버지로 공경하고 사랑하며 존경하도록 힘쓰십시오. 사제의 인간적 약점에서 오는 작은 실수를 탓하고 비난하기보다 사랑으로 덮어주고 감싸주십시오. 또한 말과 행동으로 사제의 사목활동에 적극 협조하십시오. 사제를 당신 대리자로 뽑으신 주님께서 틀림없이 은총으로 보상하시리라 믿습니다.
성소자들에게 바치는 기도
-최인각신부-
거룩한 부르심
오늘 주님께서는 “나는 양들의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양들로 여기시어, 당신의 푸른 목장으로 초대하십니다. 구원의 푸른 목장에서 그분의 음성을 들으며 풀을 뜯고 있는 나 자신을 생각하면 행복이 밀려옵니다.
오늘은 주님의 목장에서 행복하게 노닐며 기쁘게 풀을 뜯는 양들에게 목자의 사랑과 보살핌을 충분히 받도록 봉사할 젊은이를 초대하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성소주일입니다. 오늘 성소주일을 지내면서 제가 며칠 전 신학생들에게 했던 훈화 내용 일부(더 큰 열정과 야망을 갖고 사제직에 임할 마음을 갖자)를 여러분에게도 소개하고자 합니다.
“… 5월 아름다운 성모님의 달, 신록의 계절을 맞으며 여러분과 함께 ‘젊음과 열정’ ‘야망과 도전의식’에 대하여 이야기 나누고 싶습니다. 며칠 전 피겨 여왕 김연아(스텔라)의 경기를 보며, 김연아 선수가 피겨 여왕의 자리에 오른 것은 그만의 열정과 야망과 도전의식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봅니다. 또 한 분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바로 요한 바오로 2세입니다. 우리 민족을 특별히 사랑하셨던 교황님은 많은 성무활동을 하시며 인류, 특히 젊은이들에게 감동과 기쁨을 주셨습니다. 저는 요한 바오로 2세의 시복식이 있던 날, 그분에 관한 영화를 보았습니다. 카롤 보이티아 신학생이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면서 ‘주님, 이제부터 하느님 당신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하겠습니다’라고 했던 기도가 계속 제 머릿속에 맴돕니다. 독일군이 폴란드를 점령하여, 신앙의 자유를 박탈하고 인권을 무시하며, 자유를 제한하던 시대에 분연히 일어나 사제직의 삶을 결정하고 주님께 자신을 봉헌하며 바친 한 신학생의 기도였지만, 이미 교황으로 준비된 이의 열정적 마음이며, 기도였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신학생들에게 그런 젊음과 열정, 야망과 도전의식이 있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김연아 선수와 요한 바오로 2세와 같이 열정적인 삶을 산다면, 우리는 ‘성인 신학생’, ‘성인 신부’라는 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우리 신학생들의 젊음과 열정, 야망과 도전 의식은 ‘거룩함’이 아닌가 합니다. 적당한 타협이 아닌, 과감한 투신이 포함된 거룩함의 정진 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생의 기쁨, 진리를 전해주기 위해 자신의 온 존재를 십자가 위에서 살라 바치셨습니다.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이들에게 보복하지 않고, 지극히 크고 넓은 마음으로 용서와 자비를 베풀며, 구원의 거룩한 희생 제사를 바치셨습니다. 스승이시며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가기 위해 그 뜻을 받들고 시작한 우리 사제직의 성소! 정말 뜨거운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용맹정진하는 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아닌가 합니다. 여러분이 신학교에 입학할 때, 다짐했던 거룩한 용맹정진의 마음을 기억하며, 주어진 삶을 여한 없이 살아봅시다.
막 피어나는 푸른 나뭇잎보다 더 푸르게, 진한 라일락 꽃향기보다 더욱 진하게, 아름답게 피어오르는 철쭉과 장미보다 더욱 아름답게,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나비보다 더 자유롭게, 우리가 생각했던 거룩함보다 더욱 거룩하게, 이글이글 타오르는 태양보다 더 뜨겁고 밝게 거룩한 빛을 내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거룩함의 승리가 여러분의 것이 되게 해 달라고. 그리고 우주의 모든 피조물도 감동하는 천주의 사제가 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 우리 신학생들이 하느님 당신을 향한 열정을 뜨겁게 갖도록 도와주시고, 온 세계를 끌어안으며 정의와 사랑을 실천할 큰 힘을 주시며, 북극과 남극의 추위를 녹일만한 뜨거운 가슴을 주소서. 주님, 또한 사랑을 실천하는 마더 데레사의 섬세함도 주시며, 천 년이 지났음에도 변하지 않는 아우구스티노 성인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적이며 신학적인 통찰력을 내려주소서. 어떠한 고통과 번민 속에서도 용감히 일어나 당신의 빛을 전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어둠과 죽음을 이기고 승리한 많은 순교자와 성인 성녀들처럼 빛나게 하소서. 그리하여 마침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소서….”
우리 신학생들이 잘못 살고 있기 때문에 이런 훈화와 기도를 한 것이 아니라, 더욱 훌륭한 신학생으로서 사제직에 한 걸음 더 나아가도록 격려하기 위해 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충실히 따르고자 하는 성소자들을 위하여 함께 기도합시다. 그들이 훗날에 우리의 영혼을 하느님께 인도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저희의 목자이신 주님만을 알아뵙고 희망하며 그 목소리를 따라가게 하소서.
세밀한 독서?(Lectio) 유목민이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착한 목자’ 비유는 양들과의 관계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합니다. 목자는 이스라엘 직종 가운데 하나로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누구에게나 맡겨지지는 않았습니다. 유목민은 안정된 한 장소에서만 가축을 돌보는 것이 아니기에 양 떼를 지키는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사람만이 목자의 권위와 직분을 부여받았습니다.?(창세 37,?16; 1사무 17,?34 참조) 그러므로 참된 목자는 어떤 위험이나 재난을 만났을 때 양 떼를 버려두고 가는 일이 없으며, 이는 목자로서의 자긍심이기도 합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미풍을 배경으로 일찍이 구약성경의 저자들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지도자와 백성의 관계를 ‘목자와 양’?으로 표상해 왔습니다.?(시편 77,?21; 이사 63,?11; 에제 34,?1???16 참조) 이렇듯 예수님께서도 당신을 따르는 이들과의 결속 관계를 목자와 양들?(요한 10,?1???5), 양들의 문?(7???10절), 착한 목자?(11???18절)?로 표현하십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며 “문으로 들어가는 양들의 목자”?와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들어가는 도둑이나 강도”?를 구별합니다.?(1???2절) 도둑이나 강도는 양들을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지만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10절) 오십니다. 이로써 참 목자와 거짓 목자가 극명하게 드러나기에,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줄 뿐 아니라 양들은 그 목소리를 알기에 따라갑니다.”?(3절) 그러나 “낯선 사람은 따르지 않고 오히려 피해 달아납니다. 낯선 사람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5절) 이처럼 ‘목자와 양의 관계’?는 일차적으로 ‘알아듣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우리는 흔히 이름만 알아도 그 사람을 안다고 하지만, ‘안다’?는 것은 단순히 외적인 것에 달려 있지 않으며 전인적 신뢰와 온전한 이해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목자는 자기 양들이 다른 양들과 섞여 있다 해도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모으고 이끄십니다. 또한 목자가 앞장서서 갈 때 양들이 그를 따라가는 것은 그분이 누구인지를 알고 그분의 말씀과 그 뜻을 이해하며 신뢰하기 때문입니다.?(3???4절) 그 따름은 단순한 동행이 아니라 추종입니다. 그러므로 목자와 양의 이차적 관계는 ‘추종?’으로 이어집니다. ‘추종자’?들은 그들의 자유의지와 욕망을 접고 주님과 운명을 함께하며 가르침과 뜻을 따릅니다. 오직 그분을 믿고 따라가는 이들이 바라고 희망하는 것은 “죽음을 겪으시는 그분을 닮아, 그분과 그분 부활의 힘을 알고 그분 고난에 동참하는 법을 알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어떻게든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필리 3,?10???11)?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바리사이들이 예수님 말씀의 뜻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영적인 장님이기 때문입니다.?(요한 9,?39; 10,?6 참조) 예수님은 그분을 믿고 따르는 이들을 구원으로 이끄는 유일한 목자로서 구원의 통로인 “문”?(루카 10,?7.?9)?이며,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길”?(14, 4????6)?이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통하여 들어갈 때만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10,?9)?이며,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10절) 될 것입니다. 이는 양들이 생명의 목초를 얻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죽음을 이기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됨을 의미합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해 친히 선정하신 착한 목자로서 우리의 종말론적 구원자이심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묵상?(Meditatio)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요한 10,?3ㄴ) 제가 주님을 밝히 알고 목소리를 배워 익힐 때, 비로소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게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저를 알고 계시고 이름을 불러주시기에 제가 당신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었음을 미처 몰랐습니다. 주님은 제가 찾아가서 만나는 문이 아니라 불러주실 때 이르는 문이셨습니다.
기도?(Oratio)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저의 한평생 모든 날에 호의와 자애만이 저를 따르리니 저는 일생토록 주님의 집에 사오리다.?(시편 23,?1.?6)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부족하다” -허성신부-
예수께서는 당신을 착한 목자라고 하시면서 당신의 양을 하나 하나 이름을 부르시면서 불러내어 인도하시는 까닭에 양들은 다른 사람은 따르지 않고 당신만을 따른다고 말씀하신다. 당신은 품꾼들과는 다르게 이리가 양들을 공격해올 경우에는 목숨을 걸고 이리를 격퇴시킨다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이러한 내용의 성서구절이 나오는 부활 제4주일을 예전에는 착한 목자 주일로 불렀고, 예수님을 닮은 선한 성직자 수도자가 많이 배출되도록 기도하면서 청소년들이 주님의 부르심에 많이 응답하도록 하기 위해 각 수도원과 신학교를 개방하고 여러가지 행사를 하는 성소주일로 정하고 있다.
교우들은 지식과 명석한 두뇌를 가진 목자보다는 누구나 차별없이 보듬어 주고 감싸주는 따뜻한 가슴을 지닌 목자를 선호한다. 그렇기에 인사이동 때가 가까워지면 우리 본당에 어느 분이 오시게 될까가 최대의 관심사가 되고 열심하고 사랑이 많은 분을 맞게 되면 우리본당은 축복을 받았다고 하고 그렇지 못하면 벌받았다고들 하지 않는가?
자식을 낳아 키우는 부모님의 사랑을 보면 당신의 양떼에게 쏟으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가를 연상할 수 있다. 부모들은 자기 자식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하고싶고 무엇이든지 다 주고 싶고 어떤 때는 무모한 짓 까지도 서슴치 않는다. 사랑이 지극하면 수고도 모르고 더러운줄도 모른다. 엄마들은 다른집 아기들의 똥은 더럽다고 하면서도 자기 자식의 똥기저귀는 마구 주물러 빨지 않는가? 다른집 아기들이 밥을 먹다 흘리면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자기 아기 입언저리에 붙어있는 코와 침이 묻어있는 음식물은 떼어먹지 않는가?
자식이 성장하여 독립할 때까지 부모님들의 사랑과 정성과 수고와 투자는 엄청난 것이지만 부모님들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며 보람마저 느끼고 있지 않은가? 사랑이 크면 수지타산을 할 줄 모른다. 100마리의 양을 키우던 목자가 한마리의 양을 잃었을 때 아흔아홉마리의 양을 버려둔채 찾는다는 보장도 없는 상태에서 길잃은 한마리 양을 찾으러 간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짓인가. 다행히도 그 양을 찾았기에 망정이지 찾지도 못하고 게다가 길에 방치해 놓은 아흔아홉마리의 양떼마저 누가 몰고 갔더라면 어찌할뻔했나.
내가 잘 아는 어느 자매가 키우던 애완견이 새끼를 배었는데 너무 늙어서 새끼를 낳다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의료보험 혜택도 못받는 개를 가축병원에 입원시켜 제왕절개 수술을 해 새끼를 분만시키고 완치될 때까지 병원에 입원시키고 매일 병문안을 가는 것을 보았다. 아마도 그 병원에 들어간 돈으로 애완견을 샀더라면 그보다 더 예쁜 개를 여러마리 살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사제가 되기전에 얼마동안 양계를 해본적이 있는데 양계를 하다보니 내가 키우는 닭들에게 애정이 가게되고 애정이 가다보니 닭똥을 막 주물러도 더럽지도 않고 냄새도 역하지 않았다. 사랑의 힘은 그렇게도 위대한 것이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분은 돈도 없고 권력도 없는 체구도 왜소하고 쭈글쭈글한 할머니에 불과했지만 그 작은 가슴속에 엄청난 사랑을 지녔던 까닭에 인도의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어머니의 사랑으로 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분을 인도 국민의 어머니로 부르게 되었고 그분이 돌아가시자 인도 정부는 국장을 치러드리지 않았던가. 아이들은 잘 놀다가도 아프거나 배가 고프거나 무슨 문제가 생기면 엄마를 부르거나 찾아간다. 그러면 모든 문제들이 해결된다. 우리도 어느누구나 그렇게 부담없이 자연스럽게 찾아가서 응석도 부리고 때로는 울기도 하고 생떼도 쓸 수 있는 부모 역할을 하는 선한 목자들이 많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물질의 풍요속에서 환락문화에 젖어있는 젊은이들은 결혼을 아예 기피하거나, 하더라도 자녀를 하나나 둘만 낳으려는 풍조에 빠져 인성교육이나 신앙에서 점점 멀어져가고 있을 뿐 아니라 하나 또는 둘뿐인 자녀를 성직자나 수도자로 봉헌하기를 더욱 꺼리는 관계로 신학교나 수도원을 지망하는 비율이 해마다 감소하고 있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부족하다고 한탄하시면서 추수 주인에게 일꾼을 보내달라고 기도하기를 당부하신 우리의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뜻을 받들어 열심히 기도하면서 성소계발에 힘을 기울여야 되겠고 하느님께서도 당신의 외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셨고 아브라함도 외아들인 이사악을 하느님께 봉헌했으니 우리의 외아들이나 외동딸을 주님의 목장에서 일하도록 하느님께 봉헌들 하시기 바란다.
어떤 계기로 사제가 될 생각을 하셨나요? -이기양신부-
"신부님! 신부님은 어떤 계기로 신부가 되려고 결심하셨나요?" 제가 자주 듣는 질문 중 하나입니다. 그 때마다 저는 "「천국의 열쇠」(A.J.크로닌)를 읽고 신부가 되려고 결심했습니다"하고 답하곤 합니다.
첫 영성체조차도 재수를 하면서(정신없이 놀다가 예식시간을 놓쳐 다음해에야 첫 영성체를 받았음) 부모님의 강요에 의해 억지로 신앙생활을 하던 제게 우연치 않게 천주교 서적을 탐독하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특히 중학교 2학년 시절에 읽었던 「천국의 열쇠」는 사제의 꿈을 시작하는 직접적 동기가 되었지요. 소신학교(신학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는 프란치스 치셤 신부와 같은 사제 상을 마음 깊이 간직하며 구체적으로 사제 상을 키워가게 되었습니다.
주인공 프란치스 치셤은 다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양친을 모두 잃고 고아가 되는 불우한 소년기를 거치면서도 깨끗한 마음과 아름다운 영혼을 지닌 청년으로 성장합니다. 실연의 아픔을 겪은 후 사제의 길로 들어서지만, 사제가 된 후에도 자유분방한 성격과 신자들과의 격의 없는 관계로 완고한 주임신부와 갈등을 겪게 되고 그의 장점을 잘 아는 교장신부 권유로 중국에 선교사로 파견되지요.
무료 진료소를 여는 것으로 시작해, 페스트가 마을을 덮쳤을 때는 자신의 생명을 내던져 사람들을 구하고, 내전과 기근에는 지혜와 용기로 대처하던 치셤 신부는 특히 아이들을 사랑하여 버려진 아이들을 데려와 따뜻하게 보살피고, 어렵게 지은 성당이 홍수로 인해 폐허로 변했을 때도, '다 없어져버린 것 위에 다시 세우는 것이 인생'이라며 희망을 잃지 않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한편, 치셤 신부와 한 고향 출신이며 신학교 동창생인 안셀모 밀리는 출중한 외모와, 뛰어난 언변, 천부적 사교수완을 발휘해 교회 내에서 출세를 거듭합니다. 중국에 간 이후 단 한 번도 그곳을 벗어나지 못한 치셤 신부에게 밀리의 주교 임명 소식이 전해졌을 때, 그는 '패배자라도 하느님을 소유하고 있는 한, 세상 전부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고향 본당신부로 돌아온 치셤 신부는 신자들에게서 경외심에 이르는 애정을 받지만, 밀리 주교에게는 부적절한 사람으로 보여져 주교의 비서인 슬리스 신부에 의해 행적을 조사받게 됩니다. 그러나 치셤은 조용히 말합니다. "나는 내 인생의 평판을 하느님께 맡기겠소."
「천국의 열쇠」가 계기가 돼 신부될 꿈을 꾸게 됐다는 내 이야기를 듣고 어느 자매가 단숨에 책을 읽고 와서는 "신부님! 신부님은 치셤 신부보다는 안셀모 밀리 신부 같아요!"하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던 기억도 생생합니다.
본당 신부로서 살다보면 어떤 때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보다는 행정적인 것에 더 치우쳐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합니다. 물론 신부의 삶이 신자들 생각처럼 기도와 신자들을 만나는 거룩한 것으로만 짜여진 것이 아니라는 현실을 고려하더라도 일이 사랑의 실천보다 우선이 아님을 잊지 않으려고 늘 노력합니다.
오늘은 성소주일입니다. 성소란? 하느님의 부르심을 말하며 특별히 사제직에로의 부르심을 받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기도하고 후원하는 주일입니다. 우리시대에 사제로 산다는 것은 고난의 길을 의미하기도합니다. 왜냐면 사제의 삶은 가난, 순명, 정결의 삶으로 특징지어지는데 그것은 인간의 욕망을 역행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가능한 길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이 있고 은총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뽑혀 하느님의 대리자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부족한 인간이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신자들의 기도와 믿음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삶이기도 합니다.
훌륭한 사제가 있어야 성소자들이 끊이지 않고 대를 잇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신자들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것은 그것이 신부 혼자의 힘만으로는 부족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의 기도와 믿음 속에 사제는 성화되고 그 사제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투영될 때 성소의 싹은 움트고 자라납니다.
사제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격려해주시기 바랍니다................◆
목자와 문 그리고 도둑과 강도 -서공석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목자에 또 목장의 문에 비유해서 설명합니다. 먼저 예수님은 목자이십니다. 도둑이나 강도가 하는 행동과는 전혀 다릅니다. 도둑이나 강도는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딴 데로 넘어 들어갑니다.” 그러나 “양 치는 목자는 문으로 버젓이 들어갑니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목자는 자기 양들을 하나하나 불러내어 밖으로 데리고 나갑니다...목자는 앞장 서 갑니다. 양떼는...그를 뒤따라갑니다.” 목자와 양들의 애정 어린 관계를 말해주는 목가(牧歌)적인 장면입니다. 초기 교회가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해 가진 신뢰와 친근감을 담아서 서술한 장면입니다.
목자라는 단어는 유목민이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친숙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목자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성가로 잘 부르는 ‘야훼는 나의 목자’라는 시편(23)이 있습니다. 푸른 풀밭으로 또 물가로 나를 이끌어주시기에 아쉬울 것이 없다는 노래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신뢰를 노래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이 예수님을 목자라고 부르는 것은 그분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부터 시작된 일입니다.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던 하느님의 생명이 예수님 안에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문이라는 또 하나의 단어로 예수님을 설명합니다.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누구든지 나를 거쳐서 들어오면 안전할뿐더러 마음대로 드나들며 좋은 풀을 먹을 수 있다.” 이 문이라는 단어도 목자라는 단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양들을 좋은 풀밭으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또 말합니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습니다.” 이 복음은 목자와 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표현하고자 합니다. 생명을 주는 예수님은 요한복음서 전체 안에 흐르는 주제입니다. “아들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3,15)는 말씀이 있고,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1,4)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앞서가는 목자로서 또 우리가 통과해야 하는 문으로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분이십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통해 들어가면 생명이 있습니다. 오늘의 복음서가 우리에게 하는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생명이 있는데 무슨 생명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물을 수 있습니다. 같은 요한복음서는 그 3장에서 니코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온 이야기를 합니다. 그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고, 예수님은 그에게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는 “위로부터 새로 나야 한다”(3,3)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니코데모는 질문합니다.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새로 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요한복음서는 이 대화로써 말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신앙인이 누리는 생명은 이 세상 생명체들 안에 있는 그런 자연 생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을 아버지로 한 생명 안에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위로부터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생명체와는 다른 실천을 하는 하느님 생명 안에 태어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생명은 옛날 팔레스티나 베짜다 못에서 병자를 낫게 한 생명입니다(5,1-9),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율사와 바리사이들이 율법의 이름으로 돌로 치려할 때, 그들의 손에서 그를 살려내고 그에게 용서를 선포한 생명입니다(8,1-11). 그 생명은 제자들의 발을 종과 같이 엎드려서 씻은 섬김의 생명입니다(13, 1-17). 그 생명은 십자가에서 스스로를 내어 주고 쏟으면서 실천한 사랑의 생명입니다(19,30). 그 생명은 자기 한 사람 살기에 급급해서 자기 주변 사람들을 외면하는 생명이 아닙니다. 그 생명은 자기 한 사람 잘 되고 잘 살겠다고 주변 사람들을 밀쳐내고, 음해하고 기득권자에게 아부하는 생명이 아닙니다. 자기 주변이 잘 살게 하기 위해 자기 스스로를 내어주는 생명입니다. 굶주리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고, 우는 사람을 위로하는 생명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그 생명이 하느님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다시 태어난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 생명을 모범적으로 살아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릅니다. 예수님은 그 생명의 실천에 있어서 앞장 서 가신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하나 그런 실천에로 불러내는 목자이십니다. 그 생명에 들어가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문입니다. 우리는 성서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을 배웁니다. 그분이 우리를 좋은 풀밭으로, 생명의 풀밭으로 인도하신다고 믿고 따릅니다.
오늘 복음이 예수님을 목자와 문이라고 설명하기 위해 대조해 보이는 것이 “도둑과 강도”라는 표상입니다. 그들은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딴 데로 넘어 들어갑니다...양을 훔쳐다가 죽여서 없앱니다.” 요한복음서가 도둑과 강도라고 말할 때는 일차적으로 예수님이 맞서서 비판하신 그 시대 유대교의 실세들을 지칭합니다. 특히 후에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율사들과 제관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지 못하고, 그분을 통해 하느님에게로 나갈 것을 거부하였으며, 그분을 소외시키고 제거해버린 이들입니다. 오늘의 복음은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지 못한다고 지적합니다.
그 시대 유대교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오늘 예수님의 일을 왜곡하는 도둑과 강도의 행위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보여 주신 하느님의 생명과 전혀 다른 일을 가르치는 말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에게 기도하여 재물을 얻고, 많이 바치면 많이 받는다는 말들이 있습니다. 걸핏하면 기적 났다고 떠들면서 마치 신앙은 기적을 얻어내는 수단인 양 사람들을 오도하는 행위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에게 순종하라고 말하면서 자기의 뜻을 따르도록 강요하는 행위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목자이신 예수님, 문이신 예수님과 무관한 일들입니다.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이라는 문을 통해서 들어오지 않고 딴 데로 넘어 들어온 이들입니다. 잘 살아야 하겠다는 인간의 자기 보존 욕구를 자극하여 재물을 빼앗고,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에는 빼앗음과 죽음이 있습니다.
가톨릭교회가 오늘을 성소주일로 정한 것은 교회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목자로, 예수님을 문으로 명심하고 살라는 뜻입니다. 생명의 풀밭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아서 하느님의 생명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도 그분의 뒤를 따라 그분을 통해서 그 생명에로 나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평신도 가정이 성소의 온상이다 -유영봉신부-
사도 바오로는 "들어야 믿을 수 있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이 있어야들을 수 있다."(로마10,17) 고 하셨다. 그러므로 자신의 전 존재를 투신하여 복음 선포할 성소자가 없으면 교회는 생명력을 잃게 마련이다. 부르심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지만 응답은 인간이 하는 것이다. 성(聖)가정이야말로 성소(聖召)의 온상이다.
1. 성소 주일의 의미
우리는 교황님의 선종을 계기로 한 사람의 위대한 목자가 온 인류와 역사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지를 잘 보았다. 넓게 보면 모든 신앙인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오늘 교회가 성소주일을 지내는 목적은 하느님의 도구로 교회에 몸바쳐 헌신할 사제성소와 수도성소를 더욱 풍성하게 하려는데 있다. 하느님은 당신의 구원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아브라함과 모세와 예언자들을 부르셨고, 또 마리아와 사도들을 부르셨듯이, 오늘도 교회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부르신다. "구원의 역사는 하느님의 부르심과 인간의 응답으로 엮어지는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일찍이 다산(茶山) 정약용은 박해를 받아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백성을 다스리는 '치민(治民)의 도리(道理)'를 집대성하여 목민심서(牧民心書)를 썼다. 정치를 목민(牧民)이라고 표현한 것이 예사롭지가 않다. 봉사하는 자세로 국민을 섬기며 다스리는 목자다운 지도자가 없을 때 그 국가의 장래는 암담할 수밖에 없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할' 교회의 사명은 이 일을 위해 몸바쳐 투신할 일꾼들을 필요로 한다. 진리의 말씀을 세상에 전하며 증거할 사람이 없을 때, 교회는 세상의 빛이 될 수 없다. 일찍이 사도 바오로는 "들어야 믿을 수 있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이 있어야 들을 수 있다."(로마1017)고 하셨다. 전 존재를 바쳐 헌신할 일꾼들이 없을 때, 교회의 생명력도 시들어버릴 수밖에 없다.
2. 교회가 무기력해지면 세상은 더욱 어두워진다
제1독서에서 사도 베드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이 예수를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주님이 되게 하셨다."(사도2,26)고 외치신다. 우리 사회는 그동안 문민정부, 국민의정부, 그리고 참여정부라는 이미지를 내세우며 개혁을 부르짖었지만, 힘을 가진 자들, 권력의 최 상층부가 국민을 위한 개혁보다는 자기들의 세를 확장하기 위한 '우리편 봐주기'로 일관하는 세태가 만연하고 있다. 그래서 '투명성 지수'에 있어서는 세계 최하위권에 머물러 있는 것이 현실이다.
도덕불감증에 사로잡힌 이 사회에 참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죽어야 산다"는 참된 그리스도교적 봉사의 진리를 되살려야 한다. "너희들이 죽인 예수는 살아있다."고 외치는 베드로의 말씀은 우리를 통해 세상에 울려 퍼져야 한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 바로 우리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살려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을 행하다가 고통을 당하면서도 참으면 하느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여러분은 바로 그렇게 살라고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을 위해서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본보기를 남겨주셨습니다."(1베드2,20-21) 하신 제2독서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하겠다. 스스로 개혁되려는 의지 없이 국민을 개혁의 대상으로 몰아붙이는 개혁, 비전도 확신도 없이 국민을 실험의 대상으로 여기는 개혁은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 이러한 세상을 바꾸고 변화시키기 위해 교회는 참으로 짠맛을 잃지 않아야 하고 빛을 발해야 한다. 교회가 생명력을 잃으면 세상은 더욱 어두워질 수밖에 없다. 교회의 생명력은 말씀을 전하고 증거하는 데에 투신할 성소자들의 증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임을 깨닫자.
3. 평신도 가정은 성소의 온상이다
선종하신 요한 바오로 2세는 모든 신자들의 자긍심을 일깨워 주셨다. 특별히 성소(聖召)를 사는 성직자와 수도자들에게는 자긍심과 함께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부끄러움도 느끼게 해 주셨다. 참으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성소자는 어디서 나오는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며 그 진리를 증거 할 성소자는 모두 평신도 가정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물론 하느님께서 먼저 부르시지만, 인간의 응답 없이는 수도자도 성직자도 될 수 없다. 모든 평신도들은 이점을 깊이 명심해야 한다. 복음의 정신을 사는 거룩한 신자 가정이 없을 때 성소는 고갈 될 수밖에 없음을 잊지 말자. 신자들은 세상과 교회에 봉사하는 넓은 마음을 지니고 그리스도의 큰 삶을 따라 나서도록 자녀들을 격려해야 한다. 자녀들이 성소의 길을 걷도록 부모들이 협조하지 않을 때, 언젠가는 불안과 가책 속에서 고백성사도 못 받고 성체도 모시지 못한 채로 임종을 맞아야 될지도 모른다. 모두 이기적인 자세로 자신을 위한 작은 행복만을 찾는다면, 누가 임종을 맞이하는 환자에게로 달려 갈 것인가?
모든 신자들은 수도자와 성직자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성소 육성을 위해 큰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우리들의 의무임을 명심하자. "주님, 저희에게 성인 사제를 많이 보내주소서." 아멘.
행복한 목자 착한 목자 -양승국신부-
성소주일에 걸맞게 오늘 복음은 '착한 목자'에 대한 복음입니다. 착한 목자란 양 한마리 한 마리를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 양들을 극진히 사랑하기에 양들도 그 사랑을 알고 신뢰하는 사람, 결국 양들을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인도하는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존재 그 자체로 세상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목자, 고통과 번민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 구원의 향기를 퍼트리는 목자, 실의에 빠져 고통받고 있는 양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주는 목자, 그래서 삶의 이정표를 잃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다시금 새 출발 할 수 있는 용기를 주는 그런 목자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주변에는 착한 목자들이 많이 계십니다. 온종일 오로지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을 위해 헌신합니다. 그런 착한 목자와 함께 길을 걸어가는 신자들 얼굴에서는 행복이 묻어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는 착한 목자가 한분 계십니다. 이탈리아 국적의 김하종 빈첸시오 신부님으로 성남에서 노숙인들을 위한 무료급식소를 운영하고 계십니다.
언젠가 불황의 여파로 무료급식소 운영에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신부님을 찾아뵌 적이 있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노숙인들을 위한 저녁식사를 직접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앞치마를 두르신 신부님께서는 환한 얼굴로 바삐 움직이고 계셨습니다. 칼놀림이나 간보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신부님 표정을 통해, 신부님 말씀을 들으면서 착한 목자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가끔 신선한 야채를 사서, 갓 구운 빵을 가져다가 노숙인들에게 원없이 퍼주는 꿈을 꿉니다."
"안나의 집은 비록 가건물이지만 이곳에서 수백명이 한끼 식사를 해결합니다. 노숙인들은 모두 고귀한 존재들입니다. 한시적으로 그들이 인간의 존엄성을 잃고 거리에서 방황하고 있지만 그들은 누구 못지않게 중요하고 가치 있는 생명입니다."
"안나의 집에는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와서 일하는데 저는 그들에게 정말 성의있게 이 일에 참여할 것을 부탁합니다.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준비하는 식단처럼 풍요롭지 않더라도 청결하고 정성스럽게 해야만 한다고 '잔소리'를 합니다. 밥을 먹기 위해서 늘어선 긴 행렬, 그들 중에 내 절친한 친구 예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외국인이 아니라 같은 인간으로서 활동하는 겁니다. 그리고 제 성당은 바로 여기 안나의 집이에요. 제가 평생 섬길 사람은 여기 버림받고 가난한 이들이고요."
지금 하고 계시는 일만 해도 힘에 벅찰 텐데, 신부님은 아직도 많은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단기 계획, 중장기 계획까지 다 세워놓으시고 한가지 한가지 실천하고 계십니다. 무료급식소 외에도 노숙인 자활을 돕기 위한 프로그램 운영, 노숙청소년들을 위한 그룹홈, 무료진료 활동, 상담서비스 등.
점점 늘어만 가는 노숙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 시선이 상당히 엇갈리기도 합니다. '무료급식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 일이다. 아무리 노력해 봐야 원점이다. 괜히 노숙인들에게 의존심만 키워주고 안 하느니 못하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그렇게 생각할 일만도 아닙니다. 얼마나 견디기가 힘들었으면 집을 뛰쳐나왔겠습니까? 나름대로 한번 일어서려고 다들 얼마나 각고의 노력을 했겠습니까? 하다 하다 도저히 안 되겠으니 거리로 나오게 된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가고픈 생각도 굴뚝같을 것입니다. 몇달 이곳저곳을 전전하다 보니 수중에 가진 돈도 다 떨어지고, 더 이상 어찌해 볼 도리가 없게 된 분들이 노숙인들입니다.
그분들에게 따뜻한 밥 한끼 제공하는 것은 너무나도 인간적인 일이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신다 하더라고 분명히 하셨을 일입니다. 존경하는 노숙인들의 천사 김하종 신부님께서 운영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계신답니다. 내일 당장이라도 안나의 집(031-757-6336)을 찾아가 쌀 한포대라도 전해드려야겠습니다. 한번 찾아뵙고 감사하다고 인사라도 드려야 하겠습니다.
측은한 마음 -박영식신부-
죽음의 그늘진 골짜기를 간다 해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나이다.
오늘은 좋은 목자이신 예수님을 본받아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 헌신할 더 많은 사제를 보내 주시도록 하느님께 열심히 기도하는 ‘성소 주일’입니다.
구약성서에서 하느님의 백성은 양 떼로, 지도자는 목자로 소개됩니다(이사 63,11; 에제 34,1-10 참조). 특히 에제키엘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향하여 “양을 돌보아야 할 몸으로 제 몸만 돌보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아! 너희가 젖이나 짜 먹고 양털을 깎아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먹으면서 양을 돌볼 생각은 않는구나”(에제 34,2-3)라고 질책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목자를 도둑이며 강도로 규정하십니다. 직접적으로는 믿음의 눈이 없기 때문에(요한 9,39 참조)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알아보지 못하는(요한 8,43.47 참조) 바리사이들을 가리켜 하신 말씀입니다. 바리사이들은 부정한 것에서 ‘구별된 사람’을 뜻하며 정결과 부정의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의 유다 백성보다 훨씬 높은 기준을 가지고 있으면서 사람들에게 엄격한 실천을 강요했습니다. 고통을 죄의 벌로 이해하며 안식일에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을 죄악시하였습니다. 그들은 곤경에 직면한 사람의 아픔을 외면했습니다. 남이야 고통을 받든 말든 나와 상관 없다는 태도였습니다. 그들은 법을 앞세워 안식일에는 병도 고치지 못하게 했습니다(마태 12,9-14 참조). 안식일에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예수님을 하느님으로부터 온 사람이 아니라고 단정하며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요한 9,13-16 참조).
그러나 예수님은 법보다 사람을 먼저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픈 사람을 보면 측은한 마음을 가지시고 병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마태 14,14 참조). 예수님은 힘들고 지친 사람들의 안식처이셨습니다. 사람을 살리시는 예수님은 결국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희생되셨습니다. 구약의 목자들은 양들을 잡아먹었으나, 예수님은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욕을 당하시면서도 모욕으로 갚지 않으셨으며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위협하지 않으시고 정의대로 심판하시는 분에게 모든 것을 다 맡기셨습니다”(1베드 2,23).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분을 우리의 주님이 되게 하셨고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양들의 문’이시며 좋은 목자이십니다. 양들은 그분의 목소리를 알고 그분의 뒤를 따라갑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본보기를 따라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다른 사람을 단죄하거나 보복할 권한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겨 드리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정의대로 심판해 주시기를 겸손되이 빌어야 합니다.
오늘 나는 누구를 따르고 있습니까? 행여 달콤한 말로 유혹하여 죽음의 길로 이끄는 거짓 목자를 따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떤 계기로 사제가 될 생각을 하셨나요? -이기양신부-
신부님! 신부님은 어떤 계기로 신부가 되려고 결심하셨나요?" 제가 자주 듣는 질문 중 하나입니다. 그 때마다 저는 "「천국의 열쇠」(A.J.크로닌)를 읽고 신부가 되려고 결심했습니다"하고 답하곤 합니다. 첫 영성체조차도 재수를 하면서(정신없이 놀다가 예식시간을 놓쳐 다음해에야 첫 영성체를 받았음) 부모님의 강요에 의해 억지로 신앙생활을 하던 제게 우연치 않게 천주교 서적을 탐독하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특히 중학교 2학년 시절에 읽었던 「천국의 열쇠」는 사제의 꿈을 시작하는 직접적 동기가 되었지요. 소신학교(신학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는 프란치스 치셤 신부와 같은 사제 상을 마음 깊이 간직하며 구체적으로 사제 상을 키워가게 되었습니다. 주인공 프란치스 치셤은 다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양친을 모두 잃고 고아가 되는 불우한 소년기를 거치면서도 깨끗한 마음과 아름다운 영혼을 지닌 청년으로 성장합니다. 실연의 아픔을 겪은 후 사제의 길로 들어서지만, 사제가 된 후에도 자유분방한 성격과 신자들과의 격의 없는 관계로 완고한 주임신부와 갈등을 겪게 되고 그의 장점을 잘 아는 교장신부 권유로 중국에 선교사로 파견되지요. 무료 진료소를 여는 것으로 시작해, 페스트가 마을을 덮쳤을 때는 자신의 생명을 내던져 사람들을 구하고, 내전과 기근에는 지혜와 용기로 대처하던 치셤 신부는 특히 아이들을 사랑하여 버려진 아이들을 데려와 따뜻하게 보살피고, 어렵게 지은 성당이 홍수로 인해 폐허로 변했을 때도, '다 없어져버린 것 위에 다시 세우는 것이 인생'이라며 희망을 잃지 않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한편, 치셤 신부와 한 고향 출신이며 신학교 동창생인 안셀모 밀리는 출중한 외모와, 뛰어난 언변, 천부적 사교수완을 발휘해 교회 내에서 출세를 거듭합니다. 중국에 간 이후 단 한 번도 그곳을 벗어나지 못한 치셤 신부에게 밀리의 주교 임명 소식이 전해졌을 때, 그는 '패배자라도 하느님을 소유하고 있는 한, 세상 전부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고향 본당신부로 돌아온 치셤 신부는 신자들에게서 경외심에 이르는 애정을 받지만, 밀리 주교에게는 부적절한 사람으로 보여져 주교의 비서인 슬리스 신부에 의해 행적을 조사받게 됩니다. 그러나 치셤은 조용히 말합니다. "나는 내 인생의 평판을 하느님께 맡기겠소." 「천국의 열쇠」가 계기가 돼 신부될 꿈을 꾸게 됐다는 내 이야기를 듣고 어느 자매가 단숨에 책을 읽고 와서는 "신부님! 신부님은 치셤 신부보다는 안셀모 밀리 신부 같아요!"하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던 기억도 생생합니다. 본당 신부로서 살다보면 어떤 때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보다는 행정적인 것에 더 치우쳐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합니다. 물론 신부의 삶이 신자들 생각처럼 기도와 신자들을 만나는 거룩한 것으로만 짜여진 것이 아니라는 현실을 고려하더라도 일이 사랑의 실천보다 우선이 아님을 잊지 않으려고 늘 노력합니다. 오늘은 성소주일입니다. 성소란? 하느님의 부르심을 말하며 특별히 사제직에로의 부르심을 받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기도하고 후원하는 주일입니다. 우리시대에 사제로 산다는 것은 고난의 길을 의미하기도합니다. 왜냐면 사제의 삶은 가난, 순명, 정결의 삶으로 특징지어지는데 그것은 인간의 욕망을 역행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가능한 길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이 있고 은총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뽑혀 하느님의 대리자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부족한 인간이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신자들의 기도와 믿음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삶이기도 합니다. 훌륭한 사제가 있어야 성소자들이 끊이지 않고 대를 잇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신자들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것은 그것이 신부 혼자의 힘만으로는 부족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의 기도와 믿음 속에 사제는 성화되고 그 사제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투영될 때 성소의 싹은 움트고 자라납니다. 사제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격려해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안병철신부-
유목민이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양을 치는 일은 일상적인 삶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일상적인 삶의 요소들을 가르침을 위한 소재로 삼으십니다. 물론 청중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지요. 착한 목자에 관한 가르침은 요한 복음서 안에서는 유일하게 비유의 형태를 띤 것으로써 다양하고도 풍부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세우실 교회를, 양들이 안전하게 머물 수 있도록 울타리를 쳐 놓은 목장으로 소개하십니다. 그와 동시에 당신 자신을 양들이 드나드는 문으로 소개하십니다. 그러므로 목장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한편 예수님은 양들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양들도 그들의 목자이신 예수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따라갑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양들의 합법적인 목자이십니다.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께로부터 부름을 받고 그분의 자녀가 된 자들입니다. 합법적인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사람 하나하나를 각자의 이름을 불러 푸른 풀밭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당신의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으시는 분으로서 양들의 생명을 지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피로서 당신을 믿는 모든 이들을 구원해 주십니다. 시편의 말씀을 떠올려 봅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시편 8,5)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착한 목자이신 그분의 양 우리 안에서 그분께서 이끄시는 대로의 삶을 살아갈 때만이 행복과 기쁨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를 지켜 주시고 보살펴 주시는 착한 목자이신 주님을 향해 다음과 같은 기도를 바치며 그에 걸맞게 살려는 노력을 해 나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저희의 삶을 주관하시는 주님, 오늘 저희의 길에서 험한 산이 옮겨지기를 기도하지 않습니다. 다만 저희에게 고갯길을 올라갈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 저희가 가는 길에서 부딪히는 돌이 저절로 굴려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넘어지게 하는 돌을 오히려 발판으로 만들어 가게 해 주십시오. 넓은 길, 평탄한 길을 원하지 않습니다. 다만 좁고 험한 길이라도 주님과 함께 가도록 더욱 깊은 믿음을 주십시오. 넓고 푸른 또 다른 인생의 초원이 주어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지금의 양 우리가 행복의 보금자리임을 깨달을 수 있도록 지혜와 용기를 주십시오. 착한 목자이신 주님, 보살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진정 당신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조건 없이 당신을 따를 수 있도록 그리하여 당신으로 인해 행복한 자녀로 살아갈 수 있도록 감사하며 살게 해 주십시오.
어디서 행복을 찾을 것입니까? 우리를 지켜 주기 위해 마련해 주신 양 우리를 떠나서도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오만과 교만을 아직도 마음 안에 남겨 두시렵니까?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조욱현신부-
오늘은 착한 목자의 형상이 주제이다. 유다인들은 이 목자의 형상에서 안정과 번영, 위험으로부터의 보호, 생활의 친교, 친근한 애정 등의 의미를 느낀다. 목자라는 개념은 그들의 아버지 같은 느낌을 갖는 말이 된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묘사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목자라는 상징적 개념을 사용한다. 또한 사랑과 더불어 힘과 용기의 사상도 있다. 이것을 우리는 오늘의 화답송으로 노래하는 시편 22의 내용에 나타나고 있다.
제2독서: 1베드 2,20-25 : 목자이신 그분께로 돌아왔습니다
제2독서의 목자는 자기 양들을 위해 죽임을 당하고 그럼으로써 ‘길을 잃은’ 양들까지도 구원하실 보다 큰 능력을 갖게되는 목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목자가 이제는 하느님께와 같이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예수께서 여러 번 당신을 목자에 비유함으로써 끊임없이 ‘이스라엘의 목자’(시편 79,2; 에제 34,1; 예레 23,1-3 등)로 묘사되고 있는 하느님과 같으신 분임을 드러내시기 때문이다. 이 목자라는 명칭을 통하여 당신의 메시아적 신분을 드러내신다.
복음: 요한 10,1-10 :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요한복음 10장은 예수님의 메시아적 신분이 드러나는 내용을 담고있으며, 수난기(13장)가 시작되기 전에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최고의 절정의 순간을 맞고있음을 의미한다. 하여간 여기서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목자에 비유하신다. 예수께서는 팔레스티나 지방의 수많은 양우리에서 있는 일을 말씀하신다. 목자들은 한 양우리에다 여럿이 한데 어울려 각자 자기 양들을 집어넣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양들은 자기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래서 목자가 부르면 그들은 목자를 따라 나서고, 다른 양들은 자기 주인이 오기를 기다릴 것이다. ‘문지기’ 역시 목자들을 잘 알기 때문에 그들이 ‘문’으로 자유롭게 들어가도록 한다. 그러나 ‘도둑들’은 ‘딴 데로’ 몰래 들어가 양들을 훔친다. 잡히지 않은 양들은 그들을 피해 달아난다. “그들의 음성이 귀에 익지 않기 때문이다”(5절). 이것은 ‘참 목자’와 ‘도둑’과 ‘강도’ 사이의 차이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예수께서는 자신들을 스스로 목자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도둑에 불과했던 사람들을 향해 말씀하고 계시다. 그렇다면 누가 ‘문’으로 양우리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이고, 양들을 ‘죽여 없애려고’하는 ‘도둑’이며 ‘강도’인가? 이것은 참으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유다인들’이라고 지칭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인 바리사이파 사람들, 사제들을 겨냥한 말씀이다. 그들은 ‘눈이 잘 보인다’고 하지만, ‘눈이 먼’ 사람들로서(9,4041), 스스로도 보지 못하고 아는 체 하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보지 못한다. 안다고 하는 것이 하느님의 말씀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결정적으로 전해지는 순간부터 그 의미를 상실한다. 오히려 폭력으로 그리스도를 없애려 한다.
“도둑은 다만 양을 훔쳐다가 죽여서 없애려고 온다”(10절). 그러나 양떼뿐만 아니라 그보다 앞서 목자까지도 없애려 한다. 그래야 양떼를 흩어지게 하기가 쉽기 때문이다(마태 26,31). 이것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이 다가왔다는 것이 드러나고, 이 때문에 모든 양떼가 “더 풍성한 생명을”(10절) 얻게 되리라는 사실이 나타나고 있다. 예수께서는 당신만이 참되고 유일한 목자이심을 주장하신다.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양들이 드나드는 문”(7-9절)이라고 하시고 “누구든지 나를 거쳐서 들어와야 안전할 것이다”(9절)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항상 주님이 모범으로 보여주신 진리와 사랑의 요구를 존중하고 따름으로써 진정으로 형제들에게 봉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도둑’과는 달리 ‘목자’가 반드시 통과해야할 ‘문’이시며, 또한 참된 목자가 베푸는 희생적 사랑의 봉사를 잘 보여주신다. 즉 예수께서는 참 목자이시며 동시에 당신이 교회의 선익을 위해 태어날 무수한 ‘목자’들이 반드시 통과해야할 증명의 ‘문’이시다.
이것이 오늘 성소주일의 의미이다. 오늘날 세계도처에서 주님을 따라 주님을 닮으려 준비된 많은 젊은이들이 있다. 그러나 한편 주님을 따라 자신의 생명을 바치기까지 실천해야할 그 봉사는 그들에게 두려움을 줄 수 있다. 때문에 많은 젊은이들이 이상은 높지만 주저하는 그 마음에 용기를 주십사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참된 목자는 항상 그분뿐이시며 주님은 당신이 부르시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형제들 가운데서 떳떳하게 당신을 드러낼 수 있는 힘도 주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 아야 한다.
또한 오늘, 모든 사제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할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참으로 그리스도를 세상에 증거하는데, 참된 목자의 모습으로 그들에게 참으로 봉사하는, 그리고 모든 교우들의 영적인 이익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 일할 수 있는 목자들이 될 수 있도록,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자들이 되도록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참 자유 허락하신 목자 그리스도 -배광하신부-
양들을 샅샅이 아시는 분
양들을 잘 돌보는 착한 목자는 우선 양들의 특성을 잘 이해합니다. 어떤 양은 어디가 아픈지, 무슨 풀을 특히 좋아 하는지, 추위에 강하고 약한 양인지, 털은 언제 깎아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착한 목자임을 밝히시며 양들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이름까지도 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심지어 우리들의 머리카락 숫자까지 다 세어 두셨다고 하셨습니다(마태 10, 30 참조). 진정 우리는 주님의 양떼이고 주님은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목소리에 신뢰를 가지고 따라가면 됩니다.
그런데 현실의 삶은 여러 유혹으로 우리의 믿음을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가정의 여러 불화와 시련이 신앙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며, 여러 그릇된 사상이라든가 이단이 판을 치는 세상 위험에 우리들은 늘 노출되어 있습니다.
성실한 신앙의 토대 위에 착한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르려는 양떼들에게는 여간 혼란스런 세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실로 얼마나 많은 양떼들이 착한 목자를 떠나 멸망의 길로 이끄는 도둑의 소굴로 들어갔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도둑들의 의도를 밝히시면서 당신의 목자 된 사명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문으로 들어와 생명을 얻으라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 7; 10).
세상에 넘쳐나는 것이 사이비 종교입니다. 그곳 종교의 교주들은 거의 한결같은 모습을 보입니다. 그것은 양떼들을 착취하는 것입니다(훔치고). 그리고 착한 양떼들의 가정을 파탄으로 만들어 가족 구성원이 화목하게 살 수 없도록 만듭니다(죽이고). 끝내는 양떼들을 멸망으로 끌어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위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공포감을 조성합니다. 그리하여 ‘저주’ ‘심판’ ‘징벌’ 등의 단어를 가장 많이 사용합니다. 자주 엄포와 으름장을 놓으면서 신도들을 옭아매고 인간의 가장 소중한 자유의지를 억압하는 그들은 분명 도둑이며 강도입니다.
그러나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누구보다도 자유를 사셨던 분이셨고, 자유를 주신 분이셨습니다. 인간의 자유가 억압으로 신음할 때, 당신은 분연히 일어나시어 대항하시고 우리에게 참된 자유와 신앙을 일깨워 주신 착한 목자이셨습니다.
들어가야 할 문
봉쇄 수도원의 높은 담과 교도소의 높은 담의 차이는 이렇습니다. 수도원의 담은 바깥사람들이 쉽게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요, 교도소의 담은 안에 있는 사람들이 바깥으로 쉽게 나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나 쉽게 들어올 수 있는 문이십니다. 그리고 나가지 못하도록 붙들어 두시기 위하여 강제적인 힘을 쓰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문으로 들어 와야 영원한 생명을 보장 받는다고 하십니다.
문은 열려있을 때 의미가 있습니다. 문은 안과 밖을 연결시켜 줍니다. 닫아걸고 있는 문은 분명 그 안에 살고 있는 주인의 어두운 면을 보여 줍니다. 바깥에 있는 이들이 보아서는 안 될 온갖 악한 소유물이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열 수 없게 만든 것입니다.
밝은 광명의 삶은 문을 닫아걸고 있을 수 없습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두 팔을 벌리고 활짝 열려있는 생명의 문이십니다. 그 문으로 들어가 그분 보호의 울타리 안에서 살아갈 때 그곳이 진정 자유가 넘치는 생명의 낙원인 것입니다.
그 같은 생명의 문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교회 역사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신앙인들이 세상이 주는 안락한 삶의 유혹을 끊고 생명의 문을 선택하였습니다. 세상 것들을 끊고 생명의 문을 선택한 이들은 결국 모든 것을 잃은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체험한 생명의 기쁨을 다른 이들과 나누고자 하였습니다. 넘치는 기쁨을 혼자 간직하기에는 터질듯 한 심장의 박동을 누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목자의 뒤를 따르는 삶인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오늘 부활 제4주일을 ‘착한목자주일, 성소주일’로 지내며 세상의 많은 젊은이들이 착한 목자이신 주님의 거룩한 음성에 귀 기울여 응답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특별히 사제 성소와 수도 성소의 부르심에 응답해 줄 것을 청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결코 당신 혼자 구원사업을 행하지 않으십니다. 그 옛날 열두 사도들을 뽑으셨듯이 오늘도 당신의 일꾼들을 부르십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팔과 다리, 당신의 마음을 헤아리는 음성이 되어줄 것을 호소하고 계십니다. 생명의 문으로 들어와 그 생명의 기쁨을 체험한 제2, 제3의 착한 목자, 자신을 투신할 목자를 찾고 계십니다.
성소
-오상선신부-
오늘은 성소, 거룩한 부르심을 기념하고 집중 조명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오늘 전국의 신학교나 수도원들은 많은 젊은이들과 어린이들의 방문을 받고 행사도 합니다. 이참에 저의 성소의 여정을 되돌아봅니다. 제 성소의 못자리는 시골 공소 신부님 사제관이었습니다. 그때 은퇴하고 오신 신부님께는 뒷바라지 하시는 동정녀 누님이 계셨지만 누님조차도 여자라 사제관에 들어가실 수 없으셨기에 저는 사제관 청소도 하고 식사나 빨래 심부름도 하였습니다. 학교 갔다가도, 그리고 놀다가도 때가 되면 사제관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하느님의 사람이 아닌 신부님의 사람, 신부님처럼 되어야 할 사람으로 운명 지어졌습니다. 다른 한 분은 저의 누나입니다. 누나는 할아버지 신부님이 얼마 계시다가 다른 곳으로 가신 후 매일 저를 10리 떨어진 본당으로 미사를 데리고 다니며 성인전을 들려주었고 신부되라고 하셨지요. 그러니 저는 언제, 어떤 동기로 성소를 결심하였는지 도저히 알 수 없고 가랑비에 옷 젖듯이 그렇게 사제는 저의 운명이 되었습니다.
다음으로 저를 성소로 이끈 것은 프란치스코였습니다. 프란치스코가 누군지, 수도자가 뭔지도 모르고 그저 사제되려 수도원 들어온 저에게 프란치스코가 등장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 전기도 변변히 없던 때 선배로부터 들은 몇 가지 얘기만 듣고도 저는 프란치스코에게 완전히 홀려버렸습니다. 예수님조차도 제쳐놓을 정도로 프란치스코는 저를 완전히 사로잡았고 저는 프란치스코 따라 하기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너무도 프란치스코와 먼 존재였습니다. 몇 년을 기를 쓰고 따라 하려 했지만 가당치도 않은 저만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프란치스코 때문에 수도생활을 포기하였습니다. 밖에 나가 살며 프란치스코라는 우상을 지워버리자 그때 예수님께서 복음을 통하여 저에게 주님으로 비로소 오셨습니다. 그래서 다시 수도원으로 돌아와 수련을 받았습니다.
다음으로 저를 부른 것은 세상이었습니다. 저의 문제가 해결되자 세상이 눈에 뜨이기 시작했고 세상이 무엇을 나에게 필요로 하는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하도록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셨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결핵환자들을 위해서 뛰었고 후원회도 세웠습니다. 버스 안내양들을 위한 야학활동도 하였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순회 소 공동체 운동도 하였으며 공장 노동자로도 일하였습니다. 그리고 민주화 운동, 정의 평화 운동에도 적극 가담하였습니다. 이런 성소와 사명감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북한 주민과 탈북자나 장애자를 위한 활동을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의 부르심과 소명은 역시 형제들을 위한 봉사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저에게 은총을 주셔서 밖의 일을 열심히 하면서도 형제들을 가장 사랑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만큼 형제들을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환속하는 많은 형제들 때문에 실망감과 좌절감을 맛봐야 했습니다. 성소의 위기는 아니었지만 인생의 위기를 이때 겪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무력해졌을 때 하느님께서 저를 다시 부르셨습니다. 사제로 부르신 것도, 프란치스코에게 부르신 것도, 세상에로 부르신 것도, 형제들 봉사에로 부르신 것도 아닌, 바로 당신께로 부르셨습니다. 이때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다른 부르심이 다 쓸데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주님의 부르심은 저를 당신께로 부르신 것이라는 점입니다. 당신과 함께 있자고 저를 부르신 것입니다. 당신과 함께 있는 것으로 충분하고 만족한, 그래서 진정 가장 행복한 同居에로 부르신 것입니다.
제 마지막 날 다시 성소에 대한 회고를 한다면 이때를 다음과 같이 회고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모욕을 당하시면서도 모욕으로 갚지 않으시고,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위협하지 않으시고, 의롭게 심판하시는 분께 당신 자신을 맡기셨으며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당신의 상처로 우리의 병을 치유하시는 모범을 보이셨지만 모범은 따르지 않고 행복한 同居에만 안주하였다고 회고할 것입니다.
문이신 그리스도
-김찬선신부-
이태리에서 공부를 할 때 건축하는 친구들을 둔 덕분에 최신 건축사조에 대한 이야기들을 귀동냥할 때가 많았다. 어느 건축가는 집 안에 문이 없는 공간 개념을 도입하여 방문이고 화장실 문이고 문이란 문은 하나도 달지 않는 집을 설계하여 화제라고들 하였다.
문은 공간을 구분 짓는 역할을 한다. 때론 그 때문에 개방성보다는 폐쇄성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프라이버시와 내면성, 은밀성을 드러내 주는 상징이기도 하다. 하늘나라는 폐쇄성의 상징이기보다는 이러한 내면성, 신비성의 상징이기에 문이란 개념이 필요하다.
절에 가보면 절이 시작되기 좀 멀찍이 일주문이라는 게 있다. 이 문을 들어서면서부터 공간 개념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벌써 속세와는 다른 상징적인 공간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주는 문이다.
우리 크리스천에게 있어 이 일주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그분 자신이 바로 문이시다. 우리와 하늘나라를 연결시켜주는 문이다. 그 문을 거치지 않고서는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그런 문이다. 그 문은 보통문이 아니다. 파리의 개선문보다 남대문과 동대문, 독립기념관의 그 문보다 더욱더 안전하고 막강한 방화문이시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하늘나라를 그리워하는 영혼이라면 이 문을 늘 찾아야 한다.
수도원 생활에서 문을 여닫을 때 조심하여 소리를 내지 않도록 하는 것이 기본 교육 중에 포함되어 있다. 물론 침묵을 유지하여 다른 사람의 잠심생활에 방해되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이 현실적인 이유이겠지만 바로 <문이신 그리스도>를 늘 의식하라는 이야기도 된다.
우리 인생은 수없는 문(관문)을 통과하는 여정이다. 내 방에 들어오기 위해서도 나는 대문을 거쳐, 현관문을 거쳐, 봉쇄구역 문을 거쳐 방문을 거쳐 내실 문을 거쳐야 한다. 그리고 곳곳에 여러 다른 문들이 있다. 내 방 안에만도 창문이 또 몇 개인가? 이러한 문을 통해 우리는 엄청난 우주적 공간을 살포시 내다볼 뿐이다. 이러한 문을 통해 우리는 바로 그 하느님 나라를 쬐끔씩 내다볼 뿐이다. 이 문이 그냥 들어오고 나오는 문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는 문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할 때 그 문은 바로 예수가 된다. 예수는 바로 문을 통해서 만날 수 있게 된다.
그분을 만나러 멀리 갈 필요가 없다. 방 안에 앉아서도 창문을 통해 하늘나라를 내다 볼 수만 있다면 그곳에 바로 예수께서 계신 것이다. 오늘 비온 후 창문으로 내다보이는 정원은 더없이 싱그럽다. 메마름과 답답함은 더 이상 보이지 않고 하늘나라의 모습을 잉태하고 있다. 바로 이 문에서 예수님은 나와 함께 하고 계신다.
오늘 문을 지날 때마다 또 문을 통해 사물을 바라볼 때마다 문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그리고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 하늘나라를 잠시 엿보자. 그 싱그러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