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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8: 17. 교회에 말하라 18. 형통의 원리 19. 합심하여 구하면 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마 18: 17. 교회에 말하라 -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
세 번째 단계는, 만일 그가 그들의 말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말하는 것이다. 교회에 말한다는 것은 교회의 목사와 장로들에게 말하거나 또 기회가 있다면 회중 앞에서 말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네 번째 단계는, 만일 그 범죄한 자가 교회의 판단 즉 당회의 판단이나 회중의 판단도 듣지 않으면, 그를 이방인과 세리같이 여기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자와의 교제를 끊어야 한다. 그는 교인으로 여겨 사랑의 교제를 나눌 대상이 아니다. 그는 교회 밖에 있는 외인(外人)으로 간주되어야 하고 성도의 교제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1]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파라쿠세)
증인 앞에서 권면을 받아드리지 아니한 자에게는 세 번째 단계로 공동체 앞에서 확증하도록 하여야 한다.
2] 교회에 말하고
형제가 회개치 않아 개인적인 해결이 실패한 경우 마지막 조치(措置)로서 교회가 공식 개입하며 죄를 범한 그 형제를 권면하기 위해 연합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말씀이다.
'교회'란 18, 19절의 특권을 살필 때 그 당시 존재하던 유대인의 회당으로 보기보다는 아직 구체적으로 세워지지는 않았지만 지금 태동하고 있는 그리스도 교회를 가리킨다고 본다.
* 마 16: 18 -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반석)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대문이) 이기지 못하리라.
교회는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전형으로서 진리 전수의 터전이자, 모든 신앙인의 성결한 교제의 장(場)이요, 신앙 훈련과 성숙의 도장이어야 한다.
3]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이방인과 세리'는 유대 사회의 통상적인 개념으로 유대의 회당이나 기타의 모임에 들어올 수 없는 사람들, 즉 '단체 밖의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헬라어 원문은 '너에게 있어서 그가 이방인과 세리처럼 되게 하라'는 의미이다.
본문은 각 교인이 범죄한 형제에게 대한 태도를 뜻하는 것이므로, 교회가 그 사람을 이방인과 세리처럼 정죄하고 교회에서의 징계를 넘어 사회적 책벌(責罰)까지 부여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세 번에 걸친 시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 각각의 교인들은 교회 차원에서의 친교와 교류를 일절 금하고 범죄한 형제와의 더 이상의 접촉을 피하라는 말이다.
여기서도 그와의 접촉을 피하는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공동체로부터의 소외'라는 압력을 '죄지은 그 형제'에게 가함으로써 또 다시 회개와 반성의 기회를 부여하려고 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이것은 그로 하여금 교회의 목사와 장로들이나 회중 앞에서 판단 받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적 판단도 듣지 않으면 그를 이방인과 세리같이 여겨 교회적 교제를 단절해야 한다. 즉 그는 교회의 회원으로 간주하여 사랑의 교제를 나눌 대상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는 교회 밖에 속한 외인(外人)으로 간주되어 성도의 교제에서 제외될 것이다.
마 18: 18. 만사 형통의 원리 -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
이 말씀은 교회적 권징의 효력을 말씀하신 것이다.
매는 것은 권징의 시행 즉 교회적 벌을 주는 것이요 푸는 것은 해벌(解罰) 즉 교회적 벌을 거두는 것을 가리킨다.
교회적 벌은 권계(권면과 책망), 성찬식 참여 금지, 제명 출교 등이 있다. 권징은 비록 지상교회에서 시행되는 것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인정되는 것이며 효력을 가진다.
교회에서 시행된 정당한 권징은 하나님 앞에서 효력이 있다. 물론, 한 교회에서 시행된 정당한 권징은 다른 교회에서도 효력이 있다.
1]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이것은 교회적 권징을 의미한다. 매는 것은 권징의 시행이요 푸는 것은 해벌(解罰)을 가리키는 줄 안다.
이 권징은 비록 땅에서, 즉 지상교회 안에서 시행되는 것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인정된다.
참된 교회적 권징은 곧 하나님의 인정하시는 권징이다. 이 말씀은 단순히 일반적 교훈일 뿐만 아니라, 일차적으로 교회적 권징에 관한 말씀인 것 같다.
땅에서 합심한 교회적 회의와 결정은 주의 임재 속에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다.
마 18: 19. 땅에서 합심하여 구하면 -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
이 말씀은 문맥적으로 교회적 권징에 관련하여 주신 말씀이라고 본다.
그것은 두세 사람이라도 바른 판단과 합심된 소원은 효력이 있다는 말씀이다.
지교회의 당회(목사와 장로들의 회)가 결정한 권징이나 회중이 결정한 권징, 또 노회나 총회가 결정한 권징은 만일 그것이 성경적으로, 양심적으로, 이성적으로 정당성을 가진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받으시는 효력 있는 권징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또한 합심기도의 일반적 교훈이기도 하다고 본다.
성도들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을 기도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그것을 이루게 하실 것이다. 개인의 기도도 힘이 있지만, 두세 사람이 합심하여 드리는 기도는 더욱 힘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기도를 잘 들어주실 것이다.
1]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두 사람'이란 예수의 제자 된 자로서, 연합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수(數)라는 뜻이다.
'합심'이란 헬라어 '심포네오'가 '교향악'(Symphony)이란 말의 어원이란 점에서도 추측해 볼 수 있듯이 '함께 어우러져 멋진 조화를 연출해 낸다.'는 의미이다. 여기서는 단순히 '마음의 일치, 조화'를 뜻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두 사람의 일치는 물론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예수께서는 이처럼 완전한 일치를 이룬 자들에게 각 개인에게 임제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적으로 임재 하신다.
이 땅에서 겸손한 두 영혼의 일치된 기도는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교회의 간구로 받아들이시고 교회가 지닌 특권(18절)에 합당하게 응답해 주시는 것이다(F. R. Fay).
* 마 16: 19 -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2]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프리지크(Preisigke)에 의하면 '구하다'의 뜻인 동사 '아이테오'(*)는 '어떤 권리를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도 사용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본문의 구절은 두 사람이 합심하여 주님께 간구하는 모든 것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된다.
이는 18절에서 거론된 형제의 범죄 내용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합심 속에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으로서의 성령께서 함께 계셔서 그들의 원하는 바를 하나님의 뜻에 일치되게 하신다.
마 18: 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
주께서는 특히 두세 사람이 그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그들 중에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우리가 혼자 있을 때도 주께서 우리와 함께하시지만, 두세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모일 때에 주께서는 더욱 우리와 함께하실 것이다.
1]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내 이름으로'라는 의미의 헬라어 '에이스 토 에몬오노마'(*)의 문자적인 뜻은 '내 이름과 관련해서', '내 이름 안에서'이다.
따라서 본 구절은
(1)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 2, 3인이 모인 것.
(2) 2, 3인이 모여 예수의 가르침과 뜻을 서로 나누는 것.
(3) 예수를 사랑하며 연합하기를 열망하여 예수를 자기 소원과 신앙의 궁긍적 대상으로 삼기를 원하는 자들이 모인 것.
등으로 해석될 수 있다.
2]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이 말은 '두 사람 사이에 토라(율법)의 말씀이 이야기 되는 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그곳에 함께 있다'는 유대 랍비의 속담집(Aboth 3: 3)에서처럼 그리스도인 2, 3인이 예수의 말씀을 서로 나누거나 그의 이름으로 기도드리는 곳은 그 장소가 어디든지 예수께서 영으로 임재하시겠다고 하는 의미이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조금 있으면 제자들의 곁을 떠나실 것이 암시되어 있는 말이기도 하다.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당신의 이름으로 연합한 무리들을 향하여 구체적이고도 실제적으로 영원히 임재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 마 28: 20 -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는 예수의 영원한 현존성과 편재성 및 무변성을 나타내주고 있다.
이 말씀은 교회적 권징에 관련하여 주신 말씀이라고 보인다. 그것은 두세 사람이라도 바른 판단과 합심된 소원은 효력이 있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또한 합심기도의 일반적 교훈이기도 하다고 본다. 성도들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을 기도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그것을 이루게 하실 것이다.
주 예수께서는 두세 사람이 그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그들 중에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절대다수의 군중 못지않게 개인과 소수의 사람들에게도 관심을 가지셨다. 잃은 양의 비
유나(눅 15: 4) 드라크마의 비유(눅 15: 8)는 이를 잘 증명해 준다.
핵심은 그 개인이나 극소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냐? 아니냐?가 문제이다. 많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닐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무관심하신 반면 그들이 극소수일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일 때는 깊은 관심을 가지셨다.
본문은 그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이제 이러한 본문을 통해서 주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교훈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
(1) 주님의 일은 합심해서 하는 것이다.
'너희 중에 두 사람이 합심하여'.
① 사람은 더불어 사는 존재다.
인간은 태초부터 더불어 사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 창 2: 18 -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그런데 이러한 창조와 삶의 원리는 인간의 범죄와 함께 깨어졌다.
* 창 3: 12 -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그리하여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로 태어났으면서도 서로 '돕는 자'로서 세상을 살아가지 못하고 서로 헐뜯고 불화하며 살아가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이러한 반목과 불화를 제거하는 데 있다. 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불화 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의 불화도 제거하셨다.
본문의 이 말씀은 '더불어 함께 사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이제는 더 이상 불화해서는 안 될 것을 명백히 밝히시는 말씀이다. 이것은 특히 세상에 본이 되어야 할 성도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더불어 사는 존재로서의 성도들이 서로 합심하여 주님의 사업을 이루어갈 때 주님께서는 그 일을 기뻐하시며 그 일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다.
② 주님은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원하는 것을 이루신다.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원하는 목적이 아니면 우리의 마음이 합해질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합심하여
구하면 하나님께서 이루시리라'는 말씀은 곧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선히 여기고 바라는 것을 하나님께서도 선히 여기시며, 그것을 이루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이다.
민주주의 원리는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물론 다수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다수가 선한 목적으로 하나가 되었을 때는 그것은 곧 선한 일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최고의 방법이다.
(2)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것이 중요하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친교를 도모하기 위한 사교적 모임, 정의를 도모하기 위한 공의의 모임, 사회사업을 위한 봉사적 모임 등 세상에는 수많은 모임이 있다.
그러나 거기에 아무리 위대하고 선한 사람들만이 모였고, 또 그 모임의 목적하는 바가 의롭다고 하여도 그 모임은 세속적이고 소비적인 모임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그 모임의 성격과 내용이 단순히 인간들만을 위하고 그 모임의 주인도 인간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는 그렇지 않다. 비록 사회적으로 비천하고 죄악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모였을지라도 그 모임은 거룩한 모임, 창조적인 모임이라 할 수 있다. 거기에는 다른 이유가 없다.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심지어 어머니와 음행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을 '성도'라고 불렀다.
* 고전 5: 1-2 – 1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 도다. 2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 고전 1: 2 -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거룩한 자들이 모이면'이라거나 '선을 도모하는 자들이 모이면'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내 이름으로 모이면'이라고 하신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것이 그처럼 중요하다.
(3) 하나님께 구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무엇이든지 구하면'. 더불어 함께 주님의 사업을 도모하는 것은 중요하다. 또한 그러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이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모인 후에 무엇을 하느냐?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인 후에 하는 일에 따라서 모임의 순수한 동기가 살아날 수 있고 변질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모인 후에 '무슨 선한 일을 하면'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선한 계획을 세우면'이라고도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구하면'이라고 하심으로써 모여서 할 일은 기도라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왜 기도하라고 하셨을까?
기도는 우리가 할 수 없는 그것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다. 모든 하나님의 사업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만 진행되고 성취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나서게 되면 하나님은 일하실 수 없고 그 활동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기도하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항복시키는 것으로 '나는 할 수 없으니 하나님께서 하십시요'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때문에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도와주실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본문에서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
3] 합심 기도 / 박종순 목사
본문은 용서할 것과 힘을 합해 기도할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 교훈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용서하라
마태복음 18: 21 이하를 보면 어떤 임금에게 1만달란트 빚을 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1만달란트는 현 시가로 3조정도에 해당하는 큰 돈입니다. 빌려간 돈을 갚을 때가 되었지만 갚을 힘이 없었습니다. 이에 임금은 아내도 팔고 자식도 팔고 집도 팔고 가진것도 그리고 네 몸도 팔아서 갚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땅에 엎드려 조금만 참아 주시면 곧 갚겠다고 통사정을 했습니다. 그러자 왕은 그를 불쌍히 여겨 1만 달란트를 탕감해 주었습니다. 상환을 연기한 것도 아니고 탕감해 준 것입니다.
탕감받은 그 사람이 기뻐뛰며 밖으로 나와 집으로 가는 길에 100데나리온을 빌려간 친구를 만났습니다. 100데나리온은 500만원 정도되는 돈입니다.
마태복음 18: 28 이하를 보면 멱살을 잡고 왜 빚을 갚지 않느냐라며 다그쳤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는 조금만 참아주면 반드시 갚겠다며 통사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게 한두번이냐, 감히 누구 돈을 떼먹으려느냐며 사기죄로 고소한 후 옥에 가두어버렸습니다. 이를 지켜 본 그의 친구들이 사실 전모를 왕에게 알렸습니다.
화가 난 왕이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친구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면서 크게 분노하고 빚을 다 갚도록 하고 그를 감옥에 집어넣도록 명령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35절에서는 “너희가 각각 중심에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같이 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주님의 대답은 “일곱번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였습니다.
유대인들의 수 개념상 일곱은 완전수입니다. 서양사람들은 행운의 수라해서 럭키세븐이라고 합니다. 일곱 번 용서한다는 것은 원인말소, 즉 없던일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다 70번 곱하면 490번을 없던 일로 하라는 것입니다. 용서란 할수록 좋고 많이 할수록 더 좋다는 것입니다.
본문 15절 이하를 보면 용서의 방법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15절을 보면 일차적으로 단둘이 만나 권고하라고 했습니다. 들추거나 드러내지 말고 타이르고 권고하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단계는 권고를 받아 들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을때는 두세사람의 증인 앞에서 권고하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거짓말이나 딴소리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는 교회가 공적으로, 법대로 다루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그때는 가치없는 사람으로 취급하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종합하면 할 수 있는데까지 최선의 노력을 다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바로 죄인취급하거나 범죄자로 다루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18절을 보면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셨습니다. 매듭짓거나 묶지말고 풀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두 가지 뜻이 들어있습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을 묶고 속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이크 줄도 철사줄로 꽉 조여 묶어 놓으면 음 전달에 방해가 된다고 합니다. 나무도 철사줄로 묶어 놓으면 자라지 못합니다. 혈관도 묶어 놓으면 혈액이 순환하지 못합니다. 여자들 긴머리도 365일 24시간 묶어 놓으면 모발이 손상된다고 합니다. 국가도 38선으로 반세기 넘도록 묶어 놓은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람의 마음도 예외가 아닙니다. 두겹 세겹 울타리 치고 이중삼중으로 마음의 문을 닫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봄이 오면 창문을 열고 먼지를 털고 대청소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봄이 오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가도 커튼을 닫고 창문도 대문도 열지 않는 집이 있다면 빈집이거나 사람접촉을 피하는 집이거나 문제가 있는 집일 것입니다.
필경 무슨 사연이 있는 집일 것입니다. 너무 헤프게 자기 속내를 드러내고 떠벌리는 것도 잘못이지만 마음의 문을 두껍게 닫고 감추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마음의 문을 열지 않으면 예수님 영접하기도 어렵습니다. 창세기 8: 13을 보면 “육백일년 정월초하루 지면에 물이 걷힌지라 노아가 방주 뚜껑을 제치고 본즉 지면에 물이 걷혔더니”라고 했고 19절을 보면 “방주에서 나왔더라”고 했습니다. 방주에 들어가 있던 노아의 8식구가 홍수가 끝나자 방주 뚜껑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는 것입니다.
문을 열지 않으면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못합니다. 자신의 감정, 자신의 마음, 자신의 생각을 얽어매지 맙시다. 인생을 살다보면 상처를 받을 수도 있고 상한 감정을 지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나를 속박하게 하면 안됩니다.
빨리 푸는 것이 좋습니다. 요즈음은 스트레스나 우울증으로 표현합니다만 화병이라는게 있습니다. 이것은 분노나 화를 마음속에 오랫동안 쌓아두고 담아둠으로 오는 심리적 질환입니다. 그런데 그 화가 온몸과 정신을 망가뜨린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어디서 누구에게 어떤 일로 상처를 입었든지 자신을 속박하지 맙시다. 화를 품지 맙시다. 화를 내면 위액분비가 중단되고 혈압이 상승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웃고 즐기면 위액분비가 원활해지고 혈액순환도 정상화된다고 합니다.
우리 시대는 화낼 일이 많습니다. 속상한 일도 많고 억울한 일도 많습니다. 어떤 사람이 26세에 모회사에 입사했습니다. 입사당시만해도 규모가 작은 회사였는데 외판영업사원으로 시작해 만30년간 죽을둥 살둥 혼신을 다해 일했습니다.
회사도 중소기업으로 컸습니다. 회사와 가정 밖에는 모른채 일했습니다. 그런데 구조조정이라며 명퇴를 해야 했습니다. 절망, 분노, 배신, 허탈, 허무, 나쁜감정이 모조리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모자라던 단잠이 사라지고 매일 밤을 뜬눈으로 지새는 불면증 환자가 되었고 한 공기밥도 소화를 시키지 못하는 위 무력증 환자가 되었고 온종일 한쪽 골이 쑤시고 아파 견딜수 없는 편두통 환자가 되었고 뼈마디가 다 저리고 아픈 관절염 환자가 되었습니다.
원인은 절망과 분노가 자신을 얽어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사람에게 자신을 해방시키라고 했습니다. 속박을 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분노와 절망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들어 미소짓고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말씀은 안하시지만 그 미소속에 담겨있는 위로와 평안을 받아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지금 새벽기도 교인이 되었고 하나둘 셋 넷 지병들이 아쉽다며 그 사람곁을 떠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다른 사람을 얽매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웃으면 다른 사람도 웃고 내가 울면 다른 사람도 따라 우는 것이 인간관계입니다. 특히 가족관계나 부부관계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상한감정 때문에 다른 사람을 괴롭히고 다른 사람에게 화를 풀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부끼리 싸우고 교회와서 화풀이한다든지 자동차에 화를 푼다든지 죄없는 애들한테 소리를 지르는 경우가 있을수 있습니다.
북경에서 한국 사람보다 한국말을 잘하는 중국 사람을 만났습니다. 김일성대학에서 유학했고 한국에서 7년 이상 유학하고 교수가 된 중국인이었습니다. 그의 부인도 한국 모대학에서 한국속담을 연구해 박사가 된 엘리트 교수입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사람 얼굴만 보아도 그 사람이 기독교인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얼굴표정이 벌써 다르다는 것입니다. 평화롭고 미소가 깃들고 안정되어 보인다고 합니다.
거울 앞에서 각자의 얼굴을 들여다 보십시요. 두 가지 얼굴이 투영될 것입니다. 예수님 닮은 얼굴이 있을 것이고 마귀닮은 얼굴이 있을 것입니다. 부부는 성격도 음식도 취미도 얼굴도 닮는다고 합니다. 주님마주바라보고 살면서 예수님 닮은 사람 됩시다.
2. 합심하여 기도하라
19절을 보면 “너희 중에 두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고 했고 20절을 보면 “두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용서하면 두사람 세사람이 함께 손잡고 기도할수 있지만 용서하지 않으면 기도를 할 수도 없고 응답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인삼각 경기처럼 두사람이 뜻이 맞고 호흡이 맞고 박자가 맞으면 달릴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세 걸음도 못가서 넘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2: 1-17을 보면 헤롯왕이 베드로를 체포해 옥에 가둔 사건이 있었습니다. 헤롯이 초대교회 박해를 시작하면서 야고보사도를 죽이고 두 번째로 베드로를 처형하기 위해 투옥시켰습니다. 사도행전12:5을 보면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께 합심하여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천사를 동원해 옥문을 열고 베드로를 묶었던 쇠사슬을 풀어주셨던 것입니다. 합심기도의 결과였습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빌립보 지방에서 전도하던 바울과 실라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16:25을 보면 “밤중쯤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고 했고 26절을 보면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고 했습니다.
바울과 실라의 합심기도로 지진이 일어났고 옥터가 움직였고 옥문이 열렸고 수감되어 있던 모든 사람의 수갑과 착고가 다 풀어지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개인기도도 능력이 있습니다만 합심기도는 더 큰 능력을 발휘합니다.
혼자드리는 예배도 기뻐받으십니다만 함께 모여 드리는 예배를 더욱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본문은 “합심하여 기도하라”고 했고 “두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중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놀기 위해 모이고 밥먹기 위해 모이고 구경하느라 모여도 주님은 그곳에 계십니다. 그러나 주의 이름으로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는 반드시 계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란에 29세 된 쌍둥이가 있었습니다. 29년 성인이 되기까지 두얼굴에 한몸인 채 살다가 분리수술을 했지만 둘다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장기나 혈관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둘다 살도록 수술하는 것이 어렵다고 합니다. 한집에 살면서 따로따로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 교회를 다니고 함께 찬송을 부르지만 따로따로 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합심할 수 있습니까? 모래알은 따로따로입니다. 아무런 힘도 발휘 못합니다. 그러나 태풍이 불면 모랫바람을 일으키고 무서운 파괴력을 발휘합니다. 집을 덮고 나무를 쓰러뜨립니다. 모래알을 시멘트와 섞고 물을 부으면 단단한 콩크리트가 됩니다. 낱알, 따로따로 제 각각인 거기에 예수를 믿는 믿음을 부으면 초능력이 일어납니다. 예수바람이 되면 초월적 힘이 일어납니다.
나는 작아도 예수는 크고/ 나는 힘이 없어도 예수는 초능력이고/ 나는 못해도 예수는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합심하여 모입시다! 합심하여 기도합시다! 합심하여 예배합시다!
그때 초월적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용서하고 기도합시다! 기도하고 용서합시다! 놀라운 응답이 임할 것입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형제와 함께하자
형제가 우리에게 죄를 범할 때 우리는 먼저 가서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책망하고, 만일 그 형제가 개인적 책망을 듣지 않으면,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모든 말을 확증케 하고,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말하고, 만일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겨야 한다.
둘째, 정당한 권징이 필요하다.
우리는 교회에서 시행한 정당한 권징이 하나님 앞에서 효력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무엇이든지 우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셋째, 기도하자.
우리가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을 기도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잘 들어주실 것이다.
합심 기도는 효력이 있다.
첫댓글 좋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사랑의 향기는 만리를 가고도 남습니다. 오늘도 건강과 함께
좋은 사람들과 좋은 향기로 좋은 인연 이어가는 날 되시기 기원 합니다.💖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설교 감사합니다.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