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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808. 묵상글 (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 자기 십자가는 자기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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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808.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8.08 03:15
- 자기 십자가는 자기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많이 듣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듣기 싫은 말씀입니다.
제 십자가를 지라고 합니다.
그러나 지기 싫습니다.
제 십자가는 자기가 져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제 십자가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것이 좋아하는 것이면 남의 것도 나의 것이라고 할 텐데
싫어하는 것이기에 제 십자가인데도 남의 것이라고 합니다.
교묘한 바꿔치기입니다.
얼마나 교묘한지 자신도 속습니다.
골치를 썩이는 아들, 그것 내 십자가입니다.
말썽을 부리는 형제, 그것 내 십자가입니다.
골치를 썩이는 아들, 옆집 여자의 십자가입니까?
말썽을 부리는 형제, 갈멜 수사의 십자가입니까?
그런데도 내가 져야 할 십자가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무거운 걸 지고 어떻게 당신을 따라가느냐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에게 주어진 책임,
지금 내가 처한 상황,
내게 주어진 모든 것,
그것 다 나의 십자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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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808.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까?
“성인들처럼,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어제는 입추였고 더위도 한풀 꺾인 듯 합니다. 새벽 산책때 마다 선선하며 가을 풀벌레 노래소리도 들리고 배 열매들도 예쁘게 커가니 가을이 성큼 가까워진 느낌입니다. 폭우와 폭염 속에서, 누가 봐주지 않아도,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커가는 배열매 형제들이 자랑스럽고 예뻐 어제는 그 사진을 많은 지인들과 나눴습니다.
어느 분은 과일도 꽃처럼 예쁘다고 감탄했습니다. 봄꽃 향기도 좋지만 가을열매 향기는 더욱 은은하고 편안해 좋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님을 따라 잘 익어가는 성소의 열매도 그러할 것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삶의 목표와 방향, 삶의 길과 희망입니다. 삶의 목표를, 방향을, 길을, 희망을 잃어 방황이요 혼란이요 표류입니다. 옛 현자의 말씀입니다.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할 일을 깨달았다면 거친 내일 앞에서 당당해질 수 있다.”<다산>
“하늘이(문왕의) 글을 없애려 한다면 내가 이 글에 참여할 수 없을 것이다. 하늘이(문왕의) 글을 없애지 않을 것이니, 광 땅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하겠는가?”<논어>
이렇게 갈 길이, 갈 방향이 주어지면 거칠 것이 없습니다. 우보천리의 자세로 제대로의 주님 방향따라 주어진 성소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날마다 묻는 자가 수도자라 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물음은 예나 이제나 절실하게 와닿는 물음입니다. 바로 오늘 신명기에서 모세가 부르심을 받은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오늘, 주님께서 위로는 하늘에서, 아래로는 땅에서 하느님이시며, 다른 하느님이 없음을 분명히 알고 너희 마음에 새겨 두어라. 너희는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분의 규정과 계명들을 지켜라.”
바로 오늘 예수님은 우리가 살아야 구체적 삶의 지침을 주십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라는 질문은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까? 로 구체화됩니다. 명품인생, 명품신자, 명품성인이 되는 길은 이길 하나뿐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당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지만 시공을 초월하여 모든 주님의 제자들에게 예외없이 해당되는 생명의 길이자 지혜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우리가 따라야 할 길이자 방향임이 분명해졌습니다. 참으로 한결같이 예수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할 때 자발적 기쁨으로 이기적인 자신을 버리고, 제 책임의 십자가, 제 운명의 십자가를 지고 항구히 예수님을 따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일이 우리의 구원에 얼마나 결정적인지 보여줍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수 있겠느냐?”
정말 참삶의 길은, 참으로 목숨을 얻는 길은 단 하나!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길뿐입니다. 세상을 얻은들 제 목숨을 잃으면 그 세상 무슨 소용이 있겠는지요? 얼마나 많은 이들이 무지의 어둠속에서 제 목숨을 구하려고 제 목숨을 잃는 역설적 어리석은 삶을 살고 있는지요? 생명의 길인줄 알았는데 죽음의 길을 말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속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그러니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행실”이 바로 심판의 잣대가, 구원의 잣대가 됨을 깨닫습니다. 바로 주님의 제자직의 모범이 오늘 기념하는 성 도미니코 사제는 물론 무수한 성인성녀들입니다.
오늘 8월8일은 성 도미니코 수도회의 창립자인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입니다. 성인의 삶에 대해 잠시 살펴봅니다. 성인은 사제가 된 이후 이단들이 횡행하는 현실을 개탄하고 하느님 말씀을 전하며 살기로 결심합니다. 말로만 하는 설교는 힘이 없음을 깨닫고 모든 것을 버리고 가난하게 순례하며 몸소 실천한 복음을 전하는 설교를 택합니다.
성인은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이들과 설교자수도회를 인준 받고, 회원들과 함께 유럽 곳곳을 돌며 하느님 말씀을 전합니다. 공동체 회원들은 기도는 물론 연구, 교육, 설교에 헌신하였고, 수도회의 성무일도를 유지했지만 수도승들의 전통적인 방식보다 더 단순한 형태로 노래했습니다. 도미니코는 짧고 조정의 여지가 있는 아우구스티누스 규칙을 선택했습니다.
이 구성원들은 복음 전파에 있어 관상을 통해 결실을 맺는 훈련된 수도자들이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와는 달리 성 도미니코는 훌륭한 조직가이자 공동 책임의 선구자이었고, 성 도미니꼬 수도회는 수도생활의 중요한 부분인 육체노동을 공식적으로 폐지한 최초의 수도회이기도 했습니다. 성인은 두세번이나 주교로 선임되었지만 그때마다 거절했으니 주교직을 갖기보다 형제들과 함께 가난하게 살기를 바랬기 때문입니다.
특히 성인은 어려울 때 마다 성모님께 전구를 청했고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 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여 묵주기도의 전통을 교회안에 널리 전파하였습니다. 이런 전통에 힘입어 수도회는 설립초기부터 성 대 알벨토, 성 토마스 아퀴나스같은 대신학자를 배출했습니다. 성인은 1220년 블로냐에서 설교자회의 첫 번째 총회를 마치고 이듬해 1221년 블로냐의 수도원에서 향년 51세, 100% 삶을 연소시킨후 선종합니다. 성인이 자신의 죽음을 지켜보는 제자들에게 주신 마지막 유언입니다.
“형제들이여! 서로 사랑하라, 겸손하라, 청빈을 자발적으로 실천함으로써 영적인 보화를 만들어 가도록 하라.”
당시 유럽에는 60여개의 수도원과 수녀원과 더불어 500여명의 수도자들이 있었습니다. 성인은 1234년 그레고리오 9세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천문학자와 설교자들의 수호성인이 되었습니다.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의 성인에 대한 언급입니다.
“나는 전심전력으로 사도적 생활 양식을 따라간 사람을 알았습니다. 그 사람이 천국에서 사도들의 영광을 함께 누리고 있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치 않습니다.”
참으로 시종여일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충실히 따랐던 성 도미니코 사제였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십자가의 길>에 충실하도록 도와주십니다. 끝으로 늘 반복해도 늘 새로운 좌우명 고백 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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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808.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일종의 ‘제자모집광고’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오늘날 ‘성소자모집광고’를 이렇게 낸다면, 누가 따라 나설는지 모르겠습니다. “누가 나를 따르려면”으로 시작되는 이 ‘모집공고’는 수난의 길을 함께 가려는 자를 제자로 모집하는 광고입니다. 그러면서도 이 ‘모집공고’는 제한이 없습니다. “누구든지”라고 표현되어, ‘원하기면 하면 누구나’ 따라 나설 수가 있으니, 곧 그가 이방인이든 죄인이든 노예든 자유인이든 남자든 여자든 병자든 어린이든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길입니다.
이 말씀은 먼저 우리에게 “진정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조건을 두 가지로 제시합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오늘은 그 중에서, 두 번째 조건인 ‘제 십자가를 지고’에 대해서만 보고자 합니다.
‘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단지 고통을 받아들여 짊어지는 것만은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죄인을 못 박는 사형도구이기에, ‘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곧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곧 ‘죄를 지고 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자신의 허약함과 무력함을 품고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본보기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사실, 우리는 십자가, 곧 어떤 어려움이나 고통, 자신의 나약함이나 무능력을 만나면, 그것을 제거하고 해결하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결코 그 십자가를 제거하지도 해결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또 우리는 십자가를 피하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결코 그것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참고 견디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결코 그것을 참고 견디지도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건너 띠거나 초월하고 싶어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결코 십자가를 건너 뛰거나 초월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와 타협하거나 무관심하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결코 그것과 타협하지도 무관심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기꺼이 흔연하게 품으시고, 그 속에서 사랑을 이루셨습니다. 바로 그것을 통하여 사랑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고통을 당하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함께 사랑하고, 고통 속에서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사랑은 우리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있고, 우리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는 바로 그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그러니,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비록 죄와 허약함과 고통 중에 있다하더라도, 그것을 벗어나기보다 바로 그 속에서 사랑하라고, 바로 그 속에서 사랑하는 법을 배우라고 요청하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마태 16,24)
주님!
제 자신을 따르지 않고,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제 자신을 붙잡고 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붙잡고 가게 하소서!
아니, 당신께 붙들려 가게 하소서.
가고 싶은 데로 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제시한 길을 가며,
당신을 앞서가는 것이 아니라 뒤따르게 하소서!
무엇을 하든, 오직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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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808.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며칠 전 교구 사제 모임이 있어 코네티컷에 다녀왔습니다. 그곳 신부님 사제관에서 참 인상적인 장면을 보았습니다. 신부님께서 화초를 정성껏 키우고 계셨는데, 알고 보니 교우들이 키우기 어렵다고 맡긴 화초들이라고 합니다. 신부님은 그 화초들을 하나하나 살피며, 어떤 건 햇볕이 더 필요하고 어떤 건 그늘을 좋아하는지, 물은 얼마나 줘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제관 입구에는 하얗고 노란 야생화가 피어 있었습니다. 그 꽃을 보니 저도 모르게 마음이 환해졌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공동체도 이렇게 돌보는 거구나.” 화초를 돌보듯 교우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살피며 함께하려는 신부님의 마음이 본당을 따뜻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같은 본당이라도 사목자의 태도에 따라 분위기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음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신부님의 그 모습에서 저는 ‘착한 목자’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오늘 독서 말씀에서도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온갖 시험과 기적, 전쟁과 강한 손으로 이스라엘을 다른 민족 가운데서 데려오셨다”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이 없다면 하실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그분의 규정과 계명을 지켜라.”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너희와 자손이 잘살고, 오래도록 그 땅에 머무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은 단순합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시니 너희도 거룩하게 되어라.” 그리고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여라.” 이 말씀 안에 우리의 삶의 방향이 들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이 말씀은 쉽지 않습니다. 누구도 십자가를 지고 싶어 하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길에서 세 번이나 넘어지셨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셨고, 그 길 끝에 부활의 영광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목숨’은 단순한 생명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 다시 말해 차원이 다른 삶을 말씀하십니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어 하늘을 날듯,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런 생명을 약속하십니다. 저는 예전 본당 마당의 대추나무가 생각났습니다. 그 나무는 작은 열매, 부실한 열매는 스스로 떨어뜨렸습니다. 그래야만 알찬 열매를 맺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 앞에 좋은 열매를 드리기 위해서, 우리는 불필요한 욕심, 자존심, 미움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생각해 봅니다. 나무가 뿌리가 없으면 가뭄에도, 바람에도 쓰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집이 기둥 없이 서 있을 수 없듯, 공동체에도 뿌리와 기둥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런 분들이 바로 봉사자이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저는 늘 생각합니다. 제가 드러나는 ‘꽃’이라면, 봉사자분들은 땅속에서 조용히 양분을 찾아주는 ‘뿌리’와 같습니다. 그 뿌리가 튼튼해야 꽃도 건강하게 피울 수 있습니다. 더운 여름 날씨에 시원한 소나기처럼, 봉사자 여러분이 계시기에 공동체가 숨 쉴 수 있습니다. 오늘 성 도미니코 사제를 기리는 날입니다. 도미니코 성인은 참된 가르침과 사랑으로 교회를 이끌었던 분입니다. 그분의 삶처럼, 우리도 진리 안에서 사랑을 실천하고, 서로를 돌보며, 함께 십자가를 지는 공동체가 되면 좋겠습니다. 화초를 사랑으로 키우던 신부님처럼, 대추나무처럼 불필요한 것을 버릴 줄 아는 지혜로, 나무의 뿌리처럼 공동체를 지탱하는 믿음으로 우리 모두,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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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808.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선생이요 현자이신 예수님!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8월 7일 목요일- 서른한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지혜의 선생님
예수님은 카리스마 넘치는 치유자셨고 전통적인 지혜를 가르치는 선생님이셨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종교 역사 학자 다이앤 버틀러 배스(Dian Buttler Bass)는 예수님이 "선생" 혹은 "랍비"(스승)라 불리신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살펴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부르지만 그분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은 그분을 주로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신약성서에서 예수님을 직접 지칭하는 겨우는 90여 회 정도이며, 그중 대략 60회는 그분을 "선생님"이나 "랍비", "위대하신 분" 혹은 "스승"(영국 문화에서는 학교의 스승)이라고 지칭합니다. 복음서들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언덕에서, 호숫가에서, 들판에서, 모닥불 옆에서, 만찬 때에, 혼인 예식 때에, 그리고 도시 한가운데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분은 개인들과 제자들은 물론이고 큰 무리와 작은 무리, 그리고 친구와 원수까지도 가르치셨습니다....
"선생님"으로 번역되는 단어는 전형적으로 "랍비"나 "라뿌니"라는 직책에 사용되는 단어였는데, 이 단어는 1세기에 꽤나 새로운 칭호이었고, 심지어 혁명적이기까지 한 칭호였습니다. "랍비"라는 말은 오늘날 알려진 것과는 달리 유대교 성직자를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히브리 사람들의 성경(구약)에는 이 칭호가 전혀 나오지 않았습니다. 과연 이 칭호는 예수님 때에 영적인 권위를 지니는 가르침을 주는 이 - 즉 현자, 이야기꾼, 율법을 통찰력 있게 해석하는 이, 특별히 지혜로운 원로 - 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초세기에 랍비가 되기 위해서는 히브리 경전과 전통, 해설서들에 새로운 접근법을 제시해 주는 선생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슬픈 일이지만, 그리스도인들과 유다인들 모두 예수님께서 랍비로서 얼마나 전적으로 혁신적이고 도전적인 분이셨는지를 죄다 잊어 버렸습니다.
성경 학자 에이미-질 리바인(Amy-Jill Levine)은 예수님께서 랍비로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에 대해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토라(모세 오경)를 (어느 정도) 체계적으로 이해하거나 실천과 기도를 통해 일상생활을 성화하는 계획을 세우는 데 시간을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문제가 제기되거나 질문을 받으실 때마다 그 문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서재에서 토라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연구하거나 그 말씀을 최선을 다해 실천하는 법을 연구하는 데 집중했던 랍비라기보다는 카리스마 넘치는 선생이요 치유자, 그리고 전통적인 지혜를 가르치는 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1]
배스는 유대인 계보 안에서 지혜의 선생으로서의 예수님의 역할에 대해 강조하여 말합니다:
예수님은 선생으로서 모세를 거슬러 말씀하지 않으시고 또 다른 유대교 선생들을 폄훼하지도 않으십니다. 그분은 율법에 대한 당신의 해석을 제시하시고, 당신을 따르는 이들이 놀라워할 정도로 그들이 알고 있는 상식과는 다른 통찰력을 주는 가르침을 주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선생으로서의 예수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 우리가 그분을 신성을 지니신 분으로 여긴다 해도 - 당시 선생들은, 심지어 높은 권위를 지닌 선생들조차도, 오랫동안 이어온 공동체적 해석의 틀 안에서 가르쳤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사실은 예수님 당신 자신도 알고 계셨을 겁니다. 예수님은 다른 이들의 말을 인용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유대교 전통에 대한 대안적이면서도 종종은 혁신적인 해석을 제시하시며 그 내용을 새롭게 펼치시며 그 의미를 확장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랍비로서 주목할 만한 분이셨고 도전적이고도 독창적이신 분이셨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여전히 설득력이 있어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그리스도교를 넘어 사람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들은 다른 가르침들을 깎아내리지 않고도 그 자체로 아름다운 가르침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들의 스승이라고 주장하는 분을 진정으로 따른다면 이 세상은 더욱 정의롭고 사랑이 넘치는 곳이 될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예수 기도에 대한 여러 묵상 글들과 예수 기도가 다른 이들에게 미친 영향에 관한 글들을 즐겨 읽었습니다. 지혜의 연도요 - 때로는 간절한 희망의 부르짖음로서 이 기도를 바칠 때 저는 우리가 하나로 일치되어 있다는 생각에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저는 이 기도 끝에 제게 위안이 되는 구절 하나를 덧붙여 바쳐왔습니다. 저는 "예수님, 당신의 사랑으로 저를 구원하소서!"라는 말로 이 기도를 마무리합니다.
—Greg H.
References
[1] Amy-Jill Levine, The Misunderstood Jew: The Church and the Scandal of the Jewish Jesus (HarperSanFrancisco, 2006), 132.
Diana Butler Bass, Freeing Jesus: Rediscovering Jesus as Friend, Teacher, Savior, Lord, Way, and Presence (HarperOne, 2021), 29, 30, 41–42.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Mishal Ibrahim, untitled (detail), 2022,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예수님은 일상의 변모해 주는 진리 안에서 지혜를 발견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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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붙잡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깨어 의식하는 순간, 거짓 자아로부터의 해방이 시작됩니다!~
"목숨을 얻기 위해서 목숨을 잃어야 한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참으로 살아가는 길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시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목숨을 버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참으로 가치 있는 삶,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마저도 과감히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우리에게 권고해 주시는 것이겠지요?!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선택하라고 권고하십니다.
여기서 버려야 할 '자신'이란 거짓 자아 혹은 다른 존재와 자신을 분리하려는 자아를 의미하는 것이고, 지어야 할 '십자가'란 이 거짓 자아를 버리고자 할 때 오는 아픔이나 고통, 슬픔 등 부정적인 것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모든 부정적인 감정에서 자유롭고자 하는 의지 혹은 지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십자가는 부정적인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니라 매우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십자가는 에고의 집착에서 벗어나기 위한 선택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에고는 붙잡는 것을 좋아합니다. 붙잡아야 '자신'이 존재한다고 느끼는가 봅니다. 그래서 우리의 거짓 자아는 지금, 이 순간의 은총을 느끼지 못하고 부정적인 현실(이것도 에고가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현실일 뿐...)에 갇혀 있고자 합니다. 그래서 집착하는 것은 무엇이나 놓지 않으려고 합니다. 사람도, 감정도, 기억도, 그리고 심지어는 고통과 슬픔 등 부정적인 것들마저도 붙들고자 합니다. 이 모든 것을 놓는 순간 에고는 불안해합니다. 에고에게 '이 모든 것'을 놓는 것이 바로 '죽음'인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목숨을 잃어야 목숨을 얻는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에고라는 집을 튼튼하게 쌓아왔다면 이제는 이 집을 허물어야 한다고 리처드 로어 신부는 말합니다. 여기서부터 삶의 진정한 의미를 향한 발걸음이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이 에고라는 집도 한 때는 필요하기까지 한지 모른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에고에게 익숙해진 삶의 패턴, 생각과 판단 이성작용의 패턴 등을 허물 때 에고는 고통과 두려움을 느끼지만, 여기서부터 '참 나'의 자유가 실현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그 무엇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의식함입니다. '내'가 붙들고 있다는 것을 의식할 때 그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를 알게 되고, 그것을 놓아야 자유로울 수 있다는 사실, 이 진정한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며, 여기서 붙들고 있는 것들을 내려놓을 용기를 갖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흘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흐르지 않고 고이면 썩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가짜 자아, 거짓 나, 분리된 자아는 이 흐름을 막고자 안간힘을 씁니다.
잡고자 안간힘을 써도 붙잡을 수 없는 것들을 붙잡으려 하니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누군가가 말한 '옳은 것', '옳은 말'을 붙잡으려 하고, 자기가 원칙이라고 여기는 것을 붙잡으려 하고, 심지어는 사람마저도 나에게 절대적인 것처럼 붙잡으려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영원에서부터 시작해서 영원까지 '사랑'의 물로 흐르듯이 우리 삶도 흐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붙잡으면 고이고 썩습니다.
우리가 자주 쓰는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가 그런 거겠지요?! 하지만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만약에 그것이 사랑에 기반을 둔 것이라면 그 사랑의 모습이 바뀔지는 몰라도 계속해서 사랑으로 흐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이것도 붙잡지 말아야 합니다. 심지어는 우리가 긍정적인 것이라고 여기는 것마저도요!
붙잡지 않으려는 의식을 하기 시작하면 삶의 국면이 바뀌기 시작할 것입니다. 점점 더 참된 자신 안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자유로운 의식 안에서 붙잡는 것을 멈추게 되면 무언가가 텅 빈 것처럼 느껴질지 모르지만, 그 순간 바로 그 안에 깊은 평온이 자리한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는 일"은 순간적으로는 잃고 비워지는 것처럼 느껴질지 몰라도 지긋이 그 안에 머물고자 한다면 결국은 비워지고 잃는 것처럼 느끼는 것은 "에고"의 생각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이것이 사실은 자유와 평화의 채워짐이고 "참 나"의 드러남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거짓 자아가 습관적으로 붙잡고 있는 것을 의식하는 것이 참으로 필요합니다.
또 붙잡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는 순간 우리는 벌써 시작한 것입니다. "시작이 반이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반을 놓아 버린 셈입니다.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는 삶을 벌써 반 선택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붙잡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깨어 의식하는 순간, 우리의 거짓 자아로부터의 해방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자유로워지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정도에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스승이요 주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의 십자가를 응시하면서 말입니다. 여기에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참된 사랑의 해방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자비의 기도]를 바칠 때마다 '내' 공로가 아닌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공로에 의탁하여 성부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는 것이 얼마나 황송한 일인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이 기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해방하는 사랑, 구원하는 고통이 지닌 의미를 다시, 또다시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고요!....
"영원하신 아버지, 저희가 지은 죄와 온 세상의 죄를 보속하는 마음으로,
지극히 사랑하는 당신 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 영혼과 신성을 바치나이다!
예수님의 수난을 보시고 저희와 온 세상에 자비를 베푸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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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808.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마태 16,26)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는 말을, 물음에 대한 답이라고 보면, 자기 목숨을 무엇과 바꾸는 사람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죄를 짓고 나서 자기 재산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먹이기 위해 가진 것을 모두 버린 사람이 그런 이입니다. 그는 그런 식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나 단순한 서술문으로 보면, 이 말은 사람에게는 죽음을 면하게 해 줄, 생명 대신 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뜻하는 말이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1베드 1,19) 우리 모두를 되찾아 오셨습니다. “값을 치르고"(1코린 6,20) 우리를 속량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은이나 금처럼 없어질 물건으로 그리된 것이 아니라, 흠 없고 티 없는 어린양 같으신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그리된 것입니다”(1베드 1,18-19).
-오리게네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설교 21
세가지 탄생
우리의 탄생, 하느님의 탄생, 하느님 자녀인 우리의 탄생
평화로운 침묵이 온 세상을 덮고 밤이 달려서 한고비에 다다랐을 때(지혜 18,14).
돌파는 신성과 합일하고자 하는, 곧 이름 없는 하느님과 하나가 되고자 하는 우리의 갈망에서 태어난다.
지성은 결코 쉬는 법이 없습니다. 지성이 열망하는 하느님은 성령 하느님도 아니고 아들 하느님도 아닙니다. 지성은 아들에게서 달아날 따름입니다. 지성은 하느님이 하느님으로 머무르는 한 그런 하느님을 바라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그런 하느님은 이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이 수천 개가 될지라도. 지성은 여전히 그것들 너머로 뚫고 나갈 것입니다. 지성은 이름 없는 하느님을 바랍니다. 지성은 이름을 가지고 있는 하느님보다 더 고귀한 것, 더 나은 것을 바랍니다. 지성은 아버지 하느님만을 바랍니다. 필립보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주님,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저희가 흡족하겠습니다." 지성은 선의 정수이신 그분만을 바랍니다. 지성은 선의 핵이신 그분만을 바랍니다. 지성은 선의 뿌리이자 줄기이신 그분만을 바랍니다. 거기에서만 그분은 아버지가 되십니다.(443)
✝️ 금요일 성인의 날✝️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아우구스티노
프로바에게 보낸 편지 130
이 비유에 이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말한다.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생선을 달라는 자식에게 뱀을 줄 아버지가 어디 있으며, 달걀을 달라는 자식에게 전갈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하더라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안다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얼마나 더 구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루카 11,9–13)
이 말씀 안에서 바오로 사도께서는 세 가지 덕행을 회화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고 계십니다.
믿음은 생선을 통해 표현되며, 이는 이 시대의 흐름 속에서도 자신을 잘 지켜내는 존재로서, 세례에 사용되는 물과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이에 대비되는 뱀은 독을 품은 교활한 존재로, 사람들을 꾀어 하느님을 믿지 못하게 만듭니다.
희망은 달걀로 상징되는데, 그 안에는 아직 병아리가 없지만 생명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그 생명을 아직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희망할 수는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로마 8,24)
여기에 대비되는 전갈은 꼬리 끝에 침과 독을 지닌 무서운 존재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는 사람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에 놓인 것을 향해 달려갑니다.
전갈은 그 꼬리의 침으로 인해, 뒤를 돌아보는 이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기에 주의가 필요합니다.
사랑은 빵으로 표현됩니다. 사랑은 믿음과 희망을 뛰어넘는 최고의 덕이며, 여러 음식 중에서도 빵이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음식이듯, 사랑은 단연 으뜸입니다.
이에 대비되는 돌은 단단하고 굳은 마음을 의미하며, 사랑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 비유 안에 담긴 상징들은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겠지만, 핵심은 분명합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시며, 그런 분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청하라, 찾아라, 두드려라.”(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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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808.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떤 분이 하느님의 불의를 말하면서, 하늘을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왜 저의 기도를 안 들어 주세요?”
“왜 저렇게 나쁜 놈들은 벌하지 않으세요?”
“저는 이렇게 열심히 사는데, 왜 이런 시련을 주세요?”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이어지는 불평불만에 하느님께서 이렇게 응답하셨다고 합니다.
“그래, 네가 하느님 해라.”
하느님께서 알아서 살기 좋은 낙원을 만들어주시면 참 좋겠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공부도 해야 하고, 열심히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나보다 더 노력도 하지 않는데도 떵떵거리며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정말로 불합리하고 불공정한 것 같지 않습니까?
정의롭지 못하다는 우리의 생각은 우리의 시선과 하느님의 시선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지금의 삶이 영원히 유지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만,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에 대해서만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시선은 주님과 달리 바로 코 앞의 일에만 맞춰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시선을 따라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삶에 대해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자기중심적인 욕심과 이기심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대신 제 십자가를 지라고 하십니다.
이 세상 안에서 얻게 되는 고통이나 시련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뜻을 따르면서 겪는 고통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희생과 사랑, 자기 부정의 여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목숨을 구할 수 있다고 합니다. 단지 생물학적 생명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마태 16,27)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지금의 우리 행실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면서 겪게 되는 아픔과 시련에 시선을 맞춰서 불평불만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면서 주님의 시선에 눈을 맞추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나를 따르라’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명언: 용서는 과거를 변화시킬 수 없다. 그러나 미래를 넓혀준다(파울 뵈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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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808.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윤식 [big-llight]
■ 설교와 종교 교육을 담당하는 도미니코 수도회를 세운 성인
도미니코 성인은 1170년 8월 8일 에스파냐의 칼레루에가에서 태어났다.
그는 신앙심 깊은 어머니에게 가정과 신앙 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했다.
1196년경 사제품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 후 성인은 프랑스 남부를 여행하면서
그곳의 알비파 이단으로 인해 교회가 겪고 있는 고통을 목격하며
교회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깨닫고는 가톨릭의 진리를 설교하는 데 전념했다.
그리하여 도미니코 성인은 호노리오 3세 교황에게 ‘설교자들의 수도회’라는 이름으로
도미니코 수도회의 설립을 공식 승인받았다.
의전 수도회의 영향을 받은 그는 수도 생활과 사목 활동을 적절하게 조화시킨 영성 생활을 실천했다.
또 수도자들이 청빈, 정결, 순명의 세 가지의 서원을 하고 관상 생활을 지향하도록 했다.
그리고 수도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충실히 설교 준비를 하도록 교육에 힘쓰며,
참회와 금욕 생활을 실천하면서 탁발 제도도 허용했다.
성인이 설립한 설교자회는 교회와 교황과 신앙의 진리에 충실한 하느님 중심적이며,
그리스도론적이고 사제적인 영성생활을 실천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신심 운동에서 자연스럽게
성모님에 대한 신심을 도출해 묵주기도의 전통을 가톨릭교회에 전파했다.
또 설교를 통한 영혼 구원이란 목적을 이루고자 수도자들은 최선을 다해 공부해야 했다.
이러한 정신에 따라, 도미니코 수도회는 설립 초기에
이미 성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위대한 신학자들을 배출했다.
그는 1220년에 볼로냐에서 설교자회의 첫 번째 총회를 마치고,
그 이듬해인 1221년 8월 6일 그곳 수도원에서 선종했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을 지켜보던 제자들에게
“서로서로 형제들 간에 사랑하라, 겸손하라, 청빈을 자발적으로 실천함으로써
영적인 보화를 만들어가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 무렵 이미 60여 개의 수도회가 설립되었고 500여명의 수도자가 있었다.
그는 1234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고,
천문학자와 설교자의 수호성인으로 공경 받고 있다.
여러 문헌은 성인이 성덕과 업적을 전하면서,
특히 알비파 이단으로 황폐해진 지역에서 겸손한 설교 봉사자로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고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설교자회를 창설한 성 도미니코가 8월 6일 선종했으나
8월 8일에 전례 안에서 기념한다고 기록하였다.
실제로 성 도미니코는 뛰어난 언변으로 당대 교회에 큰 어려움을 안긴 알비파 이단을 대적했다.
성모신심의 향상을 위해 묵주기도를 대중화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렇게 성인은 예수님을 따르는 길을 일깨웠다.
‘어떤 이가 예수님께,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버려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성 도미니코 수도회는 보통 검은색과 흰색의 수도복을 입고 이마에 별이 붙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성인의 어머니께서 꿈에 이마에 별을 달고 있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신의 아기를 보았다는 이야기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동정 성모님에게 묵주를 받는 도미니코 성인의 모습도 자주 등장하는데,
이 역시 평소 어려울 때 마리아께 전구를 청하던 성인에게,
어느 날 성모님이 나타나셔서 묵주를 주시며 묵주 기도를 널리 전파하라는 것에서 유래한다고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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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808.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윤식 [big-llight]
■ 영원한 생명인 십자가 지는 삶에 평화의 기쁨이 /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이른 아침 동이 트기 전, 캄캄한 하늘을 보자.
밤이 없이 어떻게 아침이 올 수 있겠는가?
죽음 없는 부활이 어디?
부활하신 주님을 고백하는 우리 믿음도
여러 모습으로 다가오는 죽음을 받아들이기에 가능하다.
삶 안에서 가끔 맞닥뜨리게 되는 죽음의 그 순간에,
기꺼이 우리도 그분과 함께 죽을 수 있는 은총과 용기를 주시어
‘부활에 참여’할 수 있도록 주님께 간청하자.
이렇게 분명히 예수님을 따르면 목숨을 얻는단다.
당연히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나.
그분은 ‘온 세상을 얻고도 죽은 목숨이 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라며
희망의 말씀까지 분명하고도 엄히 해 주셨다.
“과연 사람이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가 있냐?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의 행실대로 갚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있는 이들 가운데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오는 것을 볼 이가 더러 있다.”
사실 하느님을 위해서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모든 희생마저 그저 감당해야만 할 우리이다.
이것이 자신이 져야만 하는 그 십자가가 아니겠는가?
예수님은 누구이실까?
시몬 베드로는 ‘그분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시다.’라고 무심중 고백했다.
이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라며, 영과의 그 부활을 수차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 때문에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나.
이 예수님이 우리 죄를 구하시고자 손수 십자가 지시고 골고타에 오르시어 돌아가셨다.
그리고 사흗날에 되살아나신 게다.
우리는 과연 예수님을 어떻게 따를지를 깊게 따져봐야만 할게다.
나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늘 다른 이에게 베풀고 이웃 앞세우고는 목숨마저 버리라셨다.
그러시면서 온 세상을 얻어도 제 목숨마저 잃어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으니 아예 ‘자신을 버리라.’라고 하신다.
그렇지만 그분을 막상 따르기로 다짐한 우리지만,
어쩜 살다보니까 손해가 너무 막심해 보인단다.
여하튼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버리라면서 당신 자신도 송두리째 비우셨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자녀들이 행복하기를 바라신다.
자신을 버리라는 것은 바로 ‘당신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이는,
‘그날이 오면’ 당신 부활에 참여할 것이기에.
이제 우리는 우리처럼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드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고
같은 공동체의 일원으로 믿음의 삶을 살아간다.
우리를 위한 그분의 사랑은 표징과 기적뿐만 보이신 게 아니라,
우리를 위해 그 엄청난 고통을 겪고 죽기까지 하신 그분께서는 당신의 그 십자가를 직접 보여주셨다.
그분께서는 오직 사랑에 일치하는 십자가 지짐을 알리셨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과거 수많은 순교자들은 하느님을 위해 육신의 생명을 기꺼이 바쳤다.
그 결과 그들은 늘 우리 마음에 계신다.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었기에.
반면 이 세상에서의 생명만을 유지하려는 이들은 비록 육신의 생명은 유지했지만,
우리에게서는 죽은 이들로 남아 있을 뿐이다.
어떤 삶을 선택할지는 우리 각자의 몫일게다.
우리가 고난과 가시밭길로 영원한 생명의 길을 택한다면,
내면에는 평화의 기쁨이 가득 차리라.
그리고 그 삶의 참 가치를 깨닫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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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추가 안내 자료입니다
250809. 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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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808.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서하
[슬로우 묵상] 목숨 - 성 도미니꼬 사제 기념일
성 도니미꼬 사제 기념일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마태 16.25)
움켜쥐는 삶 vs 내어주는 삶
오늘은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가난과 순명을 기쁘게 살았던 도미니코 성인은,
자기 목숨을 지키기보다
그리스도를 위해 내어주는 삶이 참된 생명을 낳는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움켜쥐는 삶과 내어주는 삶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왜 움켜쥐려고 하는가.
“살아남아야 한다.”는 말을 직장에서 많이 듣는데요,
생존본능을 자극하는 말입니다.
이 말에는 두려움이 담겨 있습니다.
사라질까 봐, 잊힐까 봐, 실패할까 봐
어떻게든 붙들고, 증명하고, 살아남으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반대의 말씀을 하십니다.
살고자 하면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목숨은 무엇일까?
숨이 끊어지고 심장이 멈추면 목숨을 잃는 것일까?
‘목숨’이란, 생명이 아니라 ‘자아’의 방식
복음서의 ‘목숨(ψυχ?, 푸쉬케)’은
단순한 숨이나 심장이 아닙니다.
이 말은 ‘자아’ 곧 '‘나'라는 존재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을 뜻합니다.
그러니 이 구절을 이렇게도 읽을 수 있습니다.
“자기 자아를 붙들려는 자는 자아를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를 내려놓는 자는
진정한 자기를 얻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존재의 근원을 되찾으라 하십니다.
외적 성취와 평가로 자신을 규정하는 삶에서,
하느님 안에 신뢰하며 자기 존재를 내어주는 삶으로.
그 길이 바로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길입니다.
십자가는 벌이 아니라 ‘존재의 길’
이런 맥락에서 자신을 버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거짓 자아에서 자유로워지는 초대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단지 고통이나 희생의 상징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고유한 존재의 길이라는 걸 깨닫습니다.
남들과 비교하지 않고,
다른 이의 삶을 흉내 내지 않으며,
나만의 존재의 무게를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나의 존재
세상은 끊임없이 묻습니다.
“무엇을 성취했는가?”
“얼마나 인정받았는가?”
“너는 무엇이 되었는가?”
하지만 하느님은 묻습니다.
“너는 누구로 존재하고 있는가?”
“너의 생명을 무엇과 바꾸려 하느냐?”
그리고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미 존재 그 자체로 소중하고, 사랑받고 있으며,
하느님의 숨결로 살아 있는 존재라고.
‘잃음’에서 시작되는 참된 생명
진정한 삶은 붙들고 싸워 얻는 것이 아니라,
놓아주고 비워낸 자리에 성령께서 자리하실 때 얻는 것입니다.
주님 때문에 나의 자아를 ‘잃을’ 때,
우리는 비로소 '참된 나'를 발견합니다.
그때 우리는 세상의 시선에 흔들리지 않고,
성공과 실패에 요동치지 않고,
하느님 안에서 자유롭게 호흡합니다.
잃음의 순간,
우리는 죽는 것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일상에서 내어주며 살기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움켜쥐지 않고
내어주며 살 수 있을까요?
나를 증명하려는 욕구가 일어날 때
잠시 멈추고 "하느님께서 이미 나를 사랑하신다"고 되뇌어 보기
다른 사람의 성공을 보며 비교하고 싶을 때,
그 순간을 알아차리고
"각자에게 주어진 고유한 길이 있다"고 받아들이기
SNS에서 나를 포장하려는 마음이 들 때,
있는 그대로의 일상을 나누어 보기
실수나 실패 앞에서 자신을 혹독하게 비난하는 대신,
"이 또한 성장의 과정"이라고 받아들이기
매일 저녁, 오늘 내가 무엇을 움켜쥐려 했는지,
무엇을 내려놓았는지 돌아보기
이러한 작은 실천들이 쌓여갈 때,
우리는 점차 움켜쥐는 삶에서 내어주는 삶으로 변화되지 않을까요..
주님,
오늘도 무엇인가를 붙들고 살아남으려 애쓰는 제게
놓아줄 용기를 주소서.
제가 저 자신을 증명하려 하지 말고
주님 안에서 이미 사랑받는 존재임을 믿게 하소서.
세상의 기준이 아닌
주님의 눈으로 저를 바라보며
오늘 주어진 고유한 길을
기쁘게 걸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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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808.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올라오지 아니함
http://www.ofmkorea.org/ofmhomily
위 “작은형제회 홈페이지– 나눔방– 말씀 나눔.” 리스트에서 ‘김명겸요한’으로 들어가세요.
게재가 안되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오전 시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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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808.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태 16,24-28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성당에서 거의 살다시피 할 정도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위해 최선을 다했으니 그에게는 고통과 시련이 닥쳐오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다는 건 수많은 경험을 통해 알고 있지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정의롭게 산 사람도 당연히 고통과 시련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건 그가 저지른 잘못 때문이 아니라, 이 세상이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아직 하느님의 뜻과 섭리가 온전히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뜻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하느님 자녀답게 살기 위해 할 도리를 다하는 과정에서, 예기치 않은 고통과 시련을 겪기도 하고 미움 받거나 배척 당하기도 하지요. 우리는 하느님을 더 많이 사랑하는 이들이 그분 뜻을 더 잘 따르기 위해 겪는 그 모든 일들을 ‘십자가’라고 부릅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고통과 시련 없이 행복만 있는 ‘꽃길’을 걷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남들에게 버림받고 고통 속에 신음하는 예수님을 찾아내는 일입니다. 그분과 같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그분께서 걸으시는 길을 묵묵히 함께 걷는 것입니다. 그 길의 끝까지 다다라야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문’이 나온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손을 잡고 함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 참된 기쁨과 행복,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서는 ‘비움’과 ‘따름’이라는 두 가지를 반드시 실천해야 한다는 겁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자기 생명과 존재를 가볍게 여기거나 함부로 다룬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이라는 선물은, 그분께서 창조하신 ‘나’라는 존재는 너무나 소중하고 귀하기에 그런 식으로 대해서는 안되지요. 자신을 버린다는 건 나로 하여금 주님을 따르는 것을 가로막는 나의 주관, 신념, 편견, 욕심, 고집 등을 비워내고 주님께서 원하시는대로 철저히 따른다는 뜻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내 뜻과 바람에 하느님 말씀을 억지로 끼워맞추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여 하느님께서 자기가 원하는대로 이뤄주셔야 하는 명분과 이유를 만들려는 것이지요. 그러나 내가 아무리 고집 부리고 떼를 써봐야 결국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대로 됩니다. 그분은 내가 원하는대로 이뤄주시는 분이 아니라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제대로, 온전히 믿기 위해서는 먼저 나라는 자아를 내 안에서 깨끗이 비워내야만 하는 겁니다.
한편, ‘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단지 주님 뜻을 따르기 위해 고통과 시련을 억지로 참고 견딘다는 뜻이 아닙니다. 억지로 참고 견디며 의미없이 흘려버리는 시간은 나를 변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당신 뜻을 마지못해, 억지로 받아들이고 따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면 그의 허물과 단점까지 기꺼이 끌어안듯이, 주님을 향한 참되고 깊은 사랑으로 그분을 따르는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과 고통마저 기쁘게 끌어안기를 바라시는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 ‘지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원문이 어머니가 아기를 가슴에 품어안듯 ‘가장 소중한 것을 가슴에 품다’라는 뜻이라는 점도 그런 예수님의 바람과 일맥상통하지요.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고통을 없애주시거나 대신 해결해주시는 방식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고통을 받으시고 고통 속에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식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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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2025 08 09. 02:23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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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4309
8월8일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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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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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서울대교구 최지웅 임마누엘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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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릇된 신심과 이단 앞에 강력한 철퇴 같았던 도미니코 사제!>
최근 시성된 성인 성녀들 가운데 초스피드로 그 과정을 거친 분이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입니다. 2005년 선종하셨는데, 불과 9년 후인 2014년에 성인품이 올랐습니다.
또 다른 한 분을 꼽자면 마더 데레사 수녀님입니다. 그분은 1997년 돌아가셨고, 2016년 시성되셨으니, 19년만입니다.
예상컨대 최근 세상을 떠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초단기간, 7-8년 안에 시성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살아 생전 이미 탁월한 성성을 드러내셨으니,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는 도미니코 사제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분 성덕의 탁월성이 얼마나 출중했었던지, 세상을 떠난 후, 불과 13년만에 시성되었습니다.
저희 수도회 창립자 돈보스코의 시복시성 과정을 통해서 잘 알게 되었습니다. 성인이 되는 과정은 정말이지 길고도 지루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성인 후보자가 지닌 성덕의 보편성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시성시복의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되어야 합니다. 지역이나 단체에서 시성 청원 작업을 시작하고, 자료를 수집해서, 교황청 시복시성청으로 보냅니다.
주도면밀한 검토가 이루어지고, 겨우 하느님의 종이라는 칭호를 얻습니다. 그 후, 가경자, 즉 보편적 존경이 가능한 인물로 올라갑니다. 이어서 복자, 성인의 단계를 밟습니다.
어떤 후보자는 가경자 상태에서 몇십 년 몇백 년을 머무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복자까지 겨우겨우 올라갔는데, 성인품이 계속 미뤄지기도 합니다. 몇십년 몇백년이 걸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도미니코 사제가 13년만에 초스피드로 성인품에 오르셨다는 것은, 이미 살아계실 때, 성인으로서의 확고한 모습을 세상 앞에 보여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상에 머물 때부터 그분은 이미 ‘살아있는 성인’이라는 칭호를 들었습니다. 과정은 큰 의미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도미니코 사제가 지상에 머물던 순간, 우리 가톨릭 교회는 다양한 위기와 도전 앞에 서 있었습니다. 교도권의 추락, 이단의 출현, 신심의 약화...이런 어려운 시기 하느님께서는 도미니코 사제라는 선물을 교회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교회와 양떼가 겪고 있는 고통과 환란을 결코 나 몰라라하시지 않습니다. 눈여겨보시고, 예의주시하시고, 안타까워하시다가, 해결사랄까, 위로자를 보내주시는데, 바로 도미니코 사제를 비롯한 수많은 성인성녀들입니다. 우리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구체적 사랑의 표현이 성인인 것입니다.
알비파를 비롯한 여러 이단들이 창궐하던 시대, 도미니코 사제는 끊임없이 하느님께 여쭈었습니다. 이토록 어려운 시대,하느님께 위로와 기쁨을 드릴수 있는 바가 무엇인지 고뇌를 거듭했습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자신의 길을 찾았습니다. 설교 전문 수도회 설립!
도미니코 사제를 중심으로 양질의 교육으로 잘 준비된 설교수도자들은 이단의 척결과 회개를 위한 주님의 군사로 빛나는 활약을 시작했습니다.
도미니코 사제와 수도자들 당대 교우들이 그릇된 신심이나 이단에 빠지지 않도록 잘 준비된 명쾌한 설교를 통해 흔들리던 교회의 중심을 굳건히 서게 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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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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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나는 죄인입니다” 좀 그만했으면….>
+찬미 예수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신앙의 가장 중심에 있는, 그러나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역설 하나를 우리 앞에 놓아두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잘 안 죽는 것 같습니다. 고해성사 들어와서, “저는 큰 ~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런 분들은 계속 같은 죄를 반복합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죄인이라고 정의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죽어야만 합니다. 이는 너무나 당연한 진리이지만, 깨닫기까지는 정말 힘이 듭니다.
‘농구 황제’라 불리는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마이클 조던. 그의 개인기는 압도적이었습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듯한 플레이로 수많은 득점을 올렸고, 모두가 그를 ‘코트의 왕’이라 불렀습니다. 그의 뜻은 명확했습니다. ‘내 능력으로 경기를 지배하고, 내 손으로 팀을 승리로 이끄는 것.’ 그는 늘 자신이 영웅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의 팀 시카고 불스는 번번이 우승 문턱에서 좌절했습니다. 왕은 있었지만, 왕조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필 잭슨이라는 감독이 부임하며 ‘트라이앵글 오펜스’라는 팀 전술을 도입합니다. 이 전술의 핵심은 공을 독점하지 않고, 모든 선수가 함께 움직이며 기회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조던은 격렬하게 반발했습니다. 팀의 시스템을 위해 자신의 개인기를 죽이라는 것은, 왕에게 왕관을 내려놓으라는 말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패배 속에서, 그는 마침내 선택의 기로에 섭니다. ‘내 방식대로 계속 왕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나를 죽여 팀을 우승시킬 것인가.’ 오랜 갈등 끝에, 그는 마침내 자신의 고집을 꺾습니다. 코트의 왕이었던 그가 기꺼이 자신을 시스템의 일부로 내어주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내가 최고’라는 자기 뜻을 죽이고, ‘팀의 승리’라는 더 높은 뜻에 순명한 순간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어땠을까요? 시카고 불스는 한두 번이 아닌, 무려 여섯 번의 우승을 차지하는 전무후무한 왕조를 건설했습니다. 마이클 조던은 ‘고독한 왕’을 넘어, ‘위대한 팀의 리더’라는 더 큰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죽어야 그분이 삽니다. 그러나 나를 죽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알면 쉽습니다. 십자가는 정체성입니다. “저는 죽을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시는 분들은 어쩌면 아직 십자가를 지지 않으셨을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지금 자신이 죄인이라고 믿으면 영원히 죄인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가 죄인이 아니라고 믿게 하시기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런던의 거리에서 마약에 중독된 채 살아가는 노숙자, 제임스 보웬이 있었습니다. 세상은 그를 투명인간 취급했고, 그 자신도 스스로를 ‘쓸모없는 중독자’, ‘거리의 쓰레기’라고 여겼습니다. 그의 삶은 그저 오늘의 마약을 구할 돈을 구걸하고, 내일 아침 눈을 뜰 수 있을지 걱정하는 것의 반복이었습니다.
그랬던 어느 날 밤, 그는 자신의 허름한 거처 복도에서 상처 입은 채 웅크리고 있는 길고양이 한 마리를 발견합니다. 그 순간, 그의 안에서 무엇인가가 움직였습니다. 그는 며칠을 굶어야 할지도 모르는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고양이의 치료비를 냈습니다. 그리고 고양이에게 ‘밥(Bob)’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죠. 바로 그 순간부터, 그는 더 이상 ‘쓸모없는 노숙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밥의 보호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정체성이 바뀐 것입니다.
‘보호자’라는 새로운 정체성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었습니다. 그는 이제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밥을 먹여 살려야 했습니다. 그는 밥을 어깨에 메고 거리로 나가 버스킹을 시작했습니다. 놀랍게도, 사람들은 더 이상 그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마약 중독자’를 본 것이 아니라, ‘어깨에 고양이를 멘 특별한 남자’를 보았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바뀌자, 그 자신도 스스로를 다르게 보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마약을 끊기로 결심합니다. 지옥 같은 금단 증세 속에서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그의 곁을 조용히 지키는 밥을 보며 그는 생각했습니다. ‘나는 밥의 보호자다. 나는 무너질 수 없다.’
무엇이 제임스를 구원했습니까? 더 강력한 의지였을까요? 더 좋은 치료 프로그램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를 구원한 것은 ‘나는 누군가를 책임져야 하는 소중한 존재’라는 새로운 정체성이었습니다. ‘노숙자’라는 낡은 정체성을 죽이고, ‘보호자’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믿었을 때, 그의 삶은 구원받은 것입니다. 로마서 6장 6절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옛 인간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죄의 지배를 받는 이 몸이 소멸하여,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게 되었음을 우리는 압니다.”
‘소멸할 것이다’가 아니라, ‘소멸하였다’입니다. ‘종노릇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가 아니라, ‘하지 않게 되었다’입니다. 우리의 옛 자아, 죄에 종노릇하던 나는 2천 년 전 골고타 언덕에서 예수님과 함께 이미 사형선고를 받고 죽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세례의 신비입니다. 세례는 죄를 씻는 세탁기가 아니라, 옛 자아를 장사 지내는 장례식입니다. 그리고 그 무덤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존재로 태어났습니다.
걷기 위해 걷는 아기는 없습니다. 아기는 그저 이미 걷고 있는 엄마, 아빠를 봅니다. 그리고 그 작은 머릿속으로, 그 온 존재로 믿습니다. ‘아, 걷는 것이 정상이구나. 나도 저렇게 걷는 존재구나.’ 그 믿음이 아기의 첫걸음을 떼게 합니다. 넘어지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걷는 존재가 되어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의 영적 정체성은 여러분이 노력해서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것을 믿음으로 받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넘어지는 나에게 집중하지 마십시오. 나를 일으켜 세우시고 이미 온전하게 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래서 오늘, 여러분께 아주 작지만 강력한 영적 실천 하나를 제안합니다. 마음속에서 ‘아, 나는 정말 어쩔 수 없는 죄인이구나’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 그 생각을 알아차리고 잠시 멈추십시오. 그리고 그 자책의 언어 대신, 믿음의 언어로 이렇게 선포해 보십시오. “주님, 저의 옛사람은 당신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믿습니다. 이제 제 안에 사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당신은 죄가 없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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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며칠 전 교구 사제 모임이 있어 코네티컷에 다녀왔습니다. 그곳 신부님 사제관에서 참 인상적인 장면을 보았습니다. 신부님께서 화초를 정성껏 키우고 계셨는데, 알고 보니 교우들이 키우기 어렵다고 맡긴 화초들이라고 합니다. 신부님은 그 화초들을 하나하나 살피며, 어떤 건 햇볕이 더 필요하고 어떤 건 그늘을 좋아하는지, 물은 얼마나 줘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제관 입구에는 하얗고 노란 야생화가 피어 있었습니다. 그 꽃을 보니 저도 모르게 마음이 환해졌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공동체도 이렇게 돌보는 거구나.” 화초를 돌보듯 교우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살피며 함께하려는 신부님의 마음이 본당을 따뜻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같은 본당이라도 사목자의 태도에 따라 분위기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음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신부님의 그 모습에서 저는 ‘착한 목자’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오늘 독서 말씀에서도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온갖 시험과 기적, 전쟁과 강한 손으로 이스라엘을 다른 민족 가운데서 데려오셨다”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이 없다면 하실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그분의 규정과 계명을 지켜라.”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너희와 자손이 잘살고, 오래도록 그 땅에 머무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은 단순합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시니 너희도 거룩하게 되어라.” 그리고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여라.” 이 말씀 안에 우리의 삶의 방향이 들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이 말씀은 쉽지 않습니다. 누구도 십자가를 지고 싶어 하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길에서 세 번이나 넘어지셨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셨고, 그 길 끝에 부활의 영광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목숨’은 단순한 생명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 다시 말해 차원이 다른 삶을 말씀하십니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어 하늘을 날듯,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런 생명을 약속하십니다. 저는 예전 본당 마당의 대추나무가 생각났습니다. 그 나무는 작은 열매, 부실한 열매는 스스로 떨어뜨렸습니다. 그래야만 알찬 열매를 맺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 앞에 좋은 열매를 드리기 위해서, 우리는 불필요한 욕심, 자존심, 미움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생각해 봅니다. 나무가 뿌리가 없으면 가뭄에도, 바람에도 쓰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집이 기둥 없이 서 있을 수 없듯, 공동체에도 뿌리와 기둥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런 분들이 바로 봉사자이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저는 늘 생각합니다. 제가 드러나는 ‘꽃’이라면, 봉사자분들은 땅속에서 조용히 양분을 찾아주는 ‘뿌리’와 같습니다. 그 뿌리가 튼튼해야 꽃도 건강하게 피울 수 있습니다. 더운 여름 날씨에 시원한 소나기처럼, 봉사자 여러분이 계시기에 공동체가 숨 쉴 수 있습니다. 오늘 성 도미니코 사제를 기리는 날입니다. 도미니코 성인은 참된 가르침과 사랑으로 교회를 이끌었던 분입니다. 그분의 삶처럼, 우리도 진리 안에서 사랑을 실천하고, 서로를 돌보며, 함께 십자가를 지는 공동체가 되면 좋겠습니다. 화초를 사랑으로 키우던 신부님처럼, 대추나무처럼 불필요한 것을 버릴 줄 아는 지혜로, 나무의 뿌리처럼 공동체를 지탱하는 믿음으로 우리 모두,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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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에게는 저마다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 눈에는 대단한 영광처럼 보일지라도, 적어도 그에게만은 피하고 싶은 십자가일 수 있습니다. 모든 이가 인정하는 영광의 십자가라면 내심 뿌듯한 마음으로 기꺼이 지겠지만, 속내 모르는 이들의 질투 어린 시선을 받으면서까지 짊어져야 하는 십자가는 말 못 할 고통을 낳기도 합니다.
자연스럽게 주님께 여쭙게 됩니다, 이것이 ‘제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인지. 그러고는 주님께 용기를 청합니다, 이 길을 기쁘게 걸을 수 있게 해 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다른 사람의 십자가가 아니라 자신의 십자가를 지라고. 다른 사람의 십자가를 바라보다가 자신의 십자가를 팽개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고.
십자가는 무엇보다 나와 하느님의 관계입니다. 다른 이를 의식하는 한 십자가는 빛을 잃고 맙니다. 다른 이가 인정하는 십자가만을 고집한다면 그것은 한낱 자신만의 영광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 십자가를 이해하고, 주님께서 나를 지켜보시듯 말없이 나의 등을 도닥이며 격려해 주는 소중한 벗들을 떠올립니다. 벗들의 십자가를 보며 그들의 외로움과 괴로움을, 그들의 아름다운 결단을 나 또한 소중히 여기고 보듬으려고 노력합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시듯이.
저마다 짊어진 십자가는 달라도 서로 이해할 때, 우리는 하나가 됩니다. 내가 나의 십자가로 힘들어하는 바로 그 순간이 어쩌면 나의 십자가와 벗들의 십자가와 주님의 십자가가 하나가 되는 아름다운 시간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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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6,24-28: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꾸겠느냐?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24절)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강요가 아니고, 억지로 시키는 것도 아니다. 각자의 선택이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25절) 목숨을 얻는 것과 목숨을 잃는 것은 구원과 멸망과 같다. 예수님은 “사람이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26절) 하느님의 뜻과 반대되는 악한 삶을 살면 파멸을 맞게 되며 그것은 되돌릴 수 없다. 이것이 목숨을 잃는 것이며 멸망이다.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26절) 사람에게는 죽음을 면하게 해줄, 생명 대신 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렇게 구원을 위해서 아무것도 내줄 것이 없는 우리를 위해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1베드 1,19) “값을 치르고”(1코린 6,20) 우리를 구원하셨다.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어주신 그분을 우리는 어떻게 따르는가?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 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27절)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오신다는 것은 아버지의 영광과 아드님의 영광이 같다는 것이다. 이 영광은 하느님의 영광이며, 하나의 영광이다. 아드님이 하느님의 영광에 싸여 있듯이 우리도 그 영광에 참여하게 해주실 것이다. 영광에 참여하기 전에 그분은 심판관으로서 심판과 엄격한 판결에 대해 말씀하셨다. “여기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28절) 우리는 이제 선택만이 남아있다. 십자가의 선택이다. 신앙생활은 끊임없이 십자가를 선택하는 일의 연속이다. 계속되는 자신과 싸움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 따르기를 원하지 않는 나 자신을 끊고, 버리고, 죽이는 삶을 통하여 주님께 나아가며, 주님의 영광에 함께 참여하리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죽음을 맛보셨고, 신앙인들에게도 이미 죽음의 맛을 보여주셨다. 말씀에 행동이 따른 것이다. 그분을 본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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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 한 걸음 뒤>
마태오 16,24-28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당신 한 걸음 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제 길
내려는
당신
한 걸음 앞
아니요
여러 길
힐끗거리는
당신
한 걸음 옆
아니요
참길
따르는
당신
한 걸음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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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십자가 지는 일을 너무 거창하게만 생각할 것은 아닙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마태 16,24-28)
1) 예수님께서 처음에 사도들을 부르셨을 때,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루카 5,11) 사도들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린 것은,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진”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당신을 따른 사도들에게 당신의 통치권에 참여할 수 있게 하겠다는 약속과 영원한 생명을 주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그 말씀을 받아 예수님께 물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그리고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마태 19,27-29)
성직자나 수도자가 아닌 신앙인이 사도들과 같은 수준의 ‘버림’을 실천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다는 마음으로, 또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라면 어떤 어려움도 감내할 수 있다는 각오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진” 것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신앙인들이 일상적인 신앙생활에서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일”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2) 우리는 십자가를 너무 거창하게 생각할 때가 많은데, 크고 무겁든지 작고 가볍든지 간에, 신앙생활에서 겪는 어려움들은 모두 십자가입니다. 신앙인이기 때문에 하고 싶은 일들을 하지 않고 참는 것도, 하기 싫은 일이라도 기꺼이 하는 것도 모두 다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폭염 경보가 내려져 있는 무더운 여름날에, 주일을 지키기 위해서 그 더위를 참고 견디면서 성당에 가는 것도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3)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는, “현세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입니다.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는, “예수님께서 구원과 생명을 주신다는 것을 믿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현세적인 것들에 대한 욕심과 미련을 버리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라는 말씀은, “이 세상의 것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에 아무런 소용이 없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인간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부정하는 말씀은 아니고, 하느님 뜻에도 합당하지 않고, 공동선의 실현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 ‘나쁜 권력’과 ‘사랑 없는 부유함’ 같은 것들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사실 인간 세상에도 선한 것들과 진실한 것들과 아름다운 것들이 많이 있는데, 학문과 예술 같은 것들처럼 하느님 뜻에 합당하고,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을 것들이 분명히 있고, 그것들이 현세적인 것들이라고 해도, 우리의 영혼 구원에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라는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면, 인간은 먼지처럼 허무하게 사라지는 존재일 뿐이다.”라는 뜻입니다.
4)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산상설교에 있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라는 말씀과 ‘뜻이 같은 말씀’입니다.
여기서 ‘행실’은 ‘삶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신앙인은 ‘믿는 사람’이 아니라 ‘믿는 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여기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라는 말씀은, 표현만 보면, 사도들 가운데에 하나라도 살아 있는 동안에 당신의 재림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씀인데, 지금까지 재림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해석할 수는 없고, 정확한 해석이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래도 스테파노 순교자처럼 죽기 전에 ‘하느님 오른쪽에 계시는 예수님’을 뵙고, 자신의 신앙이 옳았음을 확신하면서(사도 7,55-56) 세상을 떠나는 경우를 가리키는 말씀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여러 가지 체험을 통해서 자신의 신앙과 신앙생활이 헛일이 아니었음을, 또 예수님의 말씀들과 가르침들이 생생한 현실이고 진리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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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십자가를 사랑하라>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성당에서 살다시피 한 신자가 있습니다. 그에게는 고통이 없을까요? 그에게도 시련과 고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가 하느님의 뜻과 정의와 양심에 따라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시련을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은 그의 잘못보다는 이 세상이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로 그것을 십자가라고 부릅니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서 받는 고통, 인간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 받는 고통,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누군가의 허물에 대한 보속을 위해, 더 많이 사랑하기 위해서 받는 고통 등을 말합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어떠한 고통이나 결함이 없는 행복만이 있는 삶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고통 안에서 버림받은 예수님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수난과 고통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신 예수님과 함께 걷는 것입니다. 온갖 조롱과 모욕을 감당하시고 세 번이나 무참히 넘어지셨던 그 십자가의 길을 내가 걷는 것입니다. 다른 누군가의 십자가를 대신 지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께서 먼저 걸어가셨던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죽인다는 말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자기의 견해, 주장, 생각, 바람들을 접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내 생각이나 바람에 하느님의 말씀을 꿰어맞추고 합리화시키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 뜻을 관철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진다는 것, 나를 죽인다는 것은 그분에게 나를 맞춘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을 알고 자신에 대하여 더이상 집착하지 않고 더 큰 것을 위해, 보다 작은 것을 포기하는 행위입니다. 요한 비안네 성인은 “십자가는 하느님이 당신의 사랑스런 자녀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십자가는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이며, 천당의 문을 여는 열쇠이기도 합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주장이 커가는 세상입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의 이익을 끊어버리겠다는 단호한 의지와 결심이 더욱 요구됩니다. 하느님의 뜻이라면 그 어떤 것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비록 인간적인 시련과 고통, 고달픔을 감당해야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부활이라는 참 생명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생명을 얻으면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하느님의 사랑인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 ‘지상의 행복을 추구하지도 않고 자신만의 생각에 고집을 부리지도 않으며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지도 않고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도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미 오래전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삶은 여전히 우리의 모범으로 기억되고 주님을 향한 그의 사랑은 앞으로도 기억될 것이며 믿는 이들의 가슴에 살아있을 것입니다. 결국 자신 안에 예수님의 진리와 생명을 품고 살면 죽어도 살아있는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살아있어도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십자가를 지십시오! 그러면 마지막 날에 그 십자가가 나를 져줄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입니다.”(마태16,27)
“ 십자가를 사랑하십시오! 내가 십자가를 사랑하면 십자가도 나를 사랑할 것이며, 천상의 하느님께로 나를 이끌어 줄 것입니다.”(성녀 빌리아르)
“당신이 제에게 바라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시오. 저는 저의 뜻을 버리고 당신의 뜻에 저를 맞추겠습니다.”(성 알퐁소)
유다인들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은 지혜를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할 따름입니다."(1코린1,22)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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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홍태 베다 신부님]
<자기 십자가를 지자>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들으신 바와 같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가르치신다. 그런데 이 말씀은 어제 복음에서 들으신 대로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이 가시려고 하는 수난의 길에 대하여 “주님 그래서는 안 됩니다”(마태 16,22)하고 행동에 뒤이어 나온 말씀이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즉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유익만 챙기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마태 16,23) 그런 이기적인 삶에서 벗어나 어떤 일이 있더라도 오직 주님의 뜻을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주님의 뜻, 주님이 보시기에 옳다고 판단되면 그 십자가가 심지어 목숨을 버리는 일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왜 꼭 그래야만 하는가? 다들 자신의 유익만 우선적으로 챙기려고 하는 세상, 앞에서는 국가를 위하고 자신이야말로 가장 깨끗한 척 하면서 뒤로는 온갖 부정부패를 저지르는 이런 혼탁한 세상에서 십자가를 지는 행위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어떤 사람이 서인도 제도를 여행하고 있을 때였다. 기선 갑판에서 한 아이가 개를 데리고 놀고 있었다. 공을 던지면 개가 그 공을 물어 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이가 공을 잘못 던져 공은 바다로 굴러 떨어졌고, 개도 공을 따라 바다로 뛰어든 것이다. 아이의 아버지는 얼른 선장에게 달려가 배를 돌이킬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선장은 이를 거절했다. 개 한 마리 때문에 커다란 배의 항로를 변경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자 아이의 아버지가 물 속에 뛰어들었다. 그제서야 선장도 할 수 없이 배를 돌이켰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왜 목숨을 버리는 일이라 하더라도 십자가를 져야하는 지에 대한 물음에 힌트를 제공해 준다. 겨우 개 한 마리가 빠진 일이, 아버지가 십자가를 짐으로써 이제는 사람이 빠진 일로 의미와 사건의 중요도가 증대되었으며, 이는 결국 거대한 기선의 항로까지 변경시키는 결과로 연결되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후에도 이 세상에 여전히 구원이 멀게만 느껴지는 것도, 우리 일상의 온갖 부조리함을 겨우 개 한 마리 빠진 일 정도로 하찮게 여기고 아무도 십자가를 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혹자는 또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렇게 타인을 위하고 세상을 위하는 십자가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겪어야 하는 일상의 십자가는 너무나 많다고. 예수님께 있어서 십자가는 돌아가실 때 짊어지셨던 그 십자가 단 한 번 뿐이셨지만, 우리는 늘 삶의 무게로 고민해야 하고 남 몰래 울어야 하며,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어디 하소연할 데조차 없어 가슴만 치며 살아가야 하는 등 우리가 겪는 십자가는 셀 수도 없이 많다고. 그렇게 거의 매일 쏟아져 들어오는 십자가들을 어떻게 한결같이 짊어지고 주님의 뒤를 따를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러면 정말 예수님의 십자가는 단 한 번 뿐이었는가? 아니면 예수님도 우리 이상으로 많은 일상의 십자가들과 맞닥뜨리면서도 그것들을 짊어지고 한결같이 하느님의 뒤를 따르셨는지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성서는 예수께서도 얼마나 많은 십자가와 만나셨는지를 잘 보도해 주고 있다:
예수님도 그 부모들과 함께 나자렛 벽촌에서 궁핍하게 생활하셨지만 한결같이 성부의 뜻에 따라 사셨으며(마태 2,23), 광야에서 기도하실 때 세 번이나 악마의 유혹을 받으셨지만 이를 단호히 거부함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우선적으로 선택하셨으며(마태 4,1-11),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기 위해 이사야 예언자가 53,4절에서 말한 대로 “그분은 우리의 허약함을 맡아 주시고 우리의 병고를 짊어지셨”으며, 지금의 우리야 따뜻한 집이라도 있지만 당시의 예수께서는 “머리 둘 곳조차 없다”(마태 8,20)고 말씀하실 정도로 가난의 십자가를 받아들이셨으며, 군중들의 몰이해(마르 5,17)와 바리사이와 율사들의 시기와 모함(마태 9,11와 루카 5,30)이라는 십자가도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위해 받아들이셨다.
더더구나 제자 중 한 사람인 유다에게 배반을 당하고(마태 26,21), 베드로마저 당신을 세 번이나 부인한 사실(마태 26,69-75)은 당신을 참으로 힘들고 슬프게 한 십자가였을 것이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십자가상 죽음의 길을 앞두고도 게세마니에서 연거푸 세 번이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라고 기도하셨던 그 기도는 예수님이 얼마나 한결같이 당신 생애의 모든 십자가를 아버지의 뜻을 따라 짊어지셨는가를 알 수 있게 한다.
이처럼 예수님의 일생은 곧 십자가의 연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거부하지 않고 한결같이 하느님의 뜻을 따라 짊어지셨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사신 예수님이셨기에 “나는 부활이다”(요한 11,25)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이 당신의 삶이 생전에 이미 부활의 삶이 될 수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크리스챤은 그런 예수님을 본받아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뒤따르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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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고난회 서현승 베드로 신부님]
<사제직과 십자가>
적어도 신학생 시절엔 십자가를 지고 열심히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노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름대로 포기한 것도 많았고, 그래서 하느님께 변명할 말도 많았습니다. 몇 년 전, 어느 선배 신부님과 대화를 하다가 그분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속으로 적잖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이랬습니다. “나는 성인이 되고 싶습니다.”
분명 신학생 시절엔 나도 그랬었는데, 왜 그 말이 그렇게도 낯설게 들렸을까요? 시간이 지나고, 그동안의 노력들이 나 자신을 변화시키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면서부터 서서히 포기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선배 신부님의 그 말씀을 듣던 무렵엔 성인이 되는 일은 아예 꿈도 꾸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순간 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과 그분의 순수한 열정에 대한 부러움을 동시에 느끼며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사제직을 지망한 이유가 바로 이 일을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그리고 신자들이 그런 노력을 포기하고 있을 때, 체념하지 않도록 용기를 불어 넣어주어야 할 사람이 사제가 아니던가?
그렇습니다. 나약한 자신에 대해 포기하지 않는 것, 그리고 내 삶이 아무리 부끄러워도 신자들이 거룩함을 향해 정진하도록 권고하는 일이야말로, 사제로서 오늘 내가 지고 가야 하는 십자가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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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떤 분이 하느님의 불의를 말하면서, 하늘을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왜 저의 기도를 안 들어 주세요?”
“왜 저렇게 나쁜 놈들은 벌하지 않으세요?”
“저는 이렇게 열심히 사는데, 왜 이런 시련을 주세요?”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이어지는 불평불만에 하느님께서 이렇게 응답하셨다고 합니다.
“그래, 네가 하느님 해라.”
하느님께서 알아서 살기 좋은 낙원을 만들어주시면 참 좋겠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공부도 해야 하고, 열심히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나보다 더 노력도 하지 않는데도 떵떵거리며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정말로 불합리하고 불공정한 것 같지 않습니까?
정의롭지 못하다는 우리의 생각은 우리의 시선과 하느님의 시선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지금의 삶이 영원히 유지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만,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에 대해서만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시선은 주님과 달리 바로 코 앞의 일에만 맞춰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시선을 따라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삶에 대해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자기중심적인 욕심과 이기심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대신 제 십자가를 지라고 하십니다.
이 세상 안에서 얻게 되는 고통이나 시련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뜻을 따르면서 겪는 고통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희생과 사랑, 자기 부정의 여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목숨을 구할 수 있다고 합니다. 단지 생물학적 생명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마태 16,27)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지금의 우리 행실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면서 겪게 되는 아픔과 시련에 시선을 맞춰서 불평불만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면서 주님의 시선에 눈을 맞추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나를 따르라’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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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마태오. 16,24)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사람보다 용감한 사람은 없습니다. 잃을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따르려면 우리는 ‘자신을 버리고’ 비워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세상에서 살지만 현실의 이해관계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은 현실에서 충실하게 살지만 집착을 하지 않습니다. 무엇이든지 집착을 할 때 우리는 주님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종살이를 하게 됩니다.
집착하는 ‘자신을 버려야’ 우리는 십자가를 기쁘게 질 수 있게 됩니다. 무엇이든지 집착을 하면 할수록, 주님을 멀리하게 됩니다. 물질적이나 심리적, 혹은 정서적으로나 무엇이든지 집착하는 만큼 우리는 십자가를 거부하게 됩니다.
고통의 십자가를 질 수 있는 힘은 우리가 집착에서 자유로운 만큼 얻게 됩니다. 집착하는 ‘자신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야 우리는 세상을 이기게 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목숨마저 버리시며’ 집착하지 않으셨기에,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데에서 오는 세상의 온갖 고통과 심지어 죽음의 십자가마저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랑과 진리를 위해 집착에서 벗어나 ‘자신을 버리기로’ 주님과 약속한 사람입니다. 만약에 ‘자신을 버리지 않고’ 주님을 따르려고 한다면, 우리는 십자가의 고통에 눌려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주님께 진정으로 가까이 가기를 원한다면, 모든 집착을 우리는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가난과 겸손의 삶으로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을 때, 비로소 우리는 온전히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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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제 십자가를 진다’는 것>
오늘 복음은 일종의 ‘제자 모집 광고’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오늘날 ‘성소자 모집 광고’를 이렇게 낸다면 누가 따라 나설는지 모르겠습니다.
“누가 나를 따르려면”으로 시작되는 이 ‘모집 공고’는 수난의 길을 함께 가려는 자를 제자로 모집하는 광고입니다.
그러면서도 이 ‘모집 공고’는 제한이 없습니다.“누구든지”라고 표현되어, ‘원하기면 하면 누구나’ 따라 나설 수가 있으니, 곧 그가 이방인이든 죄인이든 노예든 자유인이든 남자든 여자든 병자든 어린이든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길입니다. 이 말씀은 먼저 우리에게 '진정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조건을 두 가지로 제시합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오늘은 그 중에서 두 번째 조건인 ‘제 십자가를 지고’에 대해서만 보고자 합니다. ‘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단지 고통을 받아들여 짊어지는 것만은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죄인을 못 박는 사형도구이기에, ‘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곧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곧 ‘죄를 지고 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자신의 허약함과 무력함을 품고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본보기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사실 우리는 십자가, 곧 어떤 어려움이나 고통, 자신의 나약함이나 무능력을 만나면, 그것을 제거하고 해결하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결코 그 십자가를 제거하지도 해결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피하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결코 그것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참고 견디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결코 그것을 참고 견디지도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건너뛰거나 초월하고 싶어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결코 십자가를 건너 뛰거나 초월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와 타협하거나 무관심하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결코 그것과 타협하지도 무관심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기꺼이 흔연하게 품으시고, 그 속에서 사랑을 이루셨습니다. 바로 그것을 통하여 사랑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고통을 당하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함께 사랑하고, 고통 속에서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사랑은 우리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있고, 우리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는 바로 그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그러니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비록 죄와 허약함과 고통 중에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벗어나기보다 바로 그 속에서 사랑하라고, 바로 그 속에서 사랑하는 법을 배우라고 요청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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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마태 16,24)
주님!
제 자신을 따르지 않고,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제 자신을 붙잡고 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붙잡고 가게 하소서!
아니, 당신께 붙들려 가게 하소서.
가고 싶은 데로 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제시한 길을 가며, 당신을 앞서가는 것이 아니라 뒤따르게 하소서!
무엇을 하든, 오직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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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까?>
- “성인들처럼,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
어제는 입추였고 더위도 한풀 꺾인 듯 합니다. 새벽 산책때 마다 선선하며 가을 풀벌레 노래소리도 들리고 배 열매들도 예쁘게 커가니 가을이 성큼 가까워진 느낌입니다. 폭우와 폭염 속에서, 누가 봐주지 않아도,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커가는 배열매 형제들이 자랑스럽고 예뻐 어제는 그 사진을 많은 지인들과 나눴습니다.
어느 분은 과일도 꽃처럼 예쁘다고 감탄했습니다.
봄꽃 향기도 좋지만 가을열매 향기는 더욱 은은하고 편안해 좋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님을 따라 잘 익어가는 성소의 열매도 그러할 것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삶의 목표와 방향, 삶의 길과 희망입니다. 삶의 목표를, 방향을, 길을, 희망을 잃어 방황이요 혼란이요 표류입니다. 옛 현자의 말씀입니다.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할 일을 깨달았다면 거친 내일 앞에서 당당해질 수 있다.”<다산>
“하늘이(문왕의) 글을 없애려 한다면 내가 이 글에 참여할 수 없을 것이다. 하늘이(문왕의) 글을 없애지 않을 것이니, 광 땅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하겠는가?”<논어>
이렇게 갈 길이, 갈 방향이 주어지면 거칠 것이 없습니다. 우보천리의 자세로 제대로의 주님 방향따라 주어진 성소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날마다 묻는 자가 수도자라 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물음은 예나 이제나 절실하게 와닿는 물음입니다. 바로 오늘 신명기에서 모세가 부르심을 받은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오늘, 주님께서 위로는 하늘에서, 아래로는 땅에서 하느님이시며, 다른 하느님이 없음을 분명히 알고 너희 마음에 새겨 두어라. 너희는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분의 규정과 계명들을 지켜라.”
바로 오늘 예수님은 우리가 살아야 구체적 삶의 지침을 주십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라는 질문은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까? 로 구체화됩니다. 명품인생, 명품신자, 명품성인이 되는 길은 이길 하나뿐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당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지만 시공을 초월하여 모든 주님의 제자들에게 예외없이 해당되는 생명의 길이자 지혜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우리가 따라야 할 길이자 방향임이 분명해졌습니다. 참으로 한결같이 예수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할 때 자발적 기쁨으로 이기적인 자신을 버리고, 제 책임의 십자가, 제 운명의 십자가를 지고 항구히 예수님을 따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일이 우리의 구원에 얼마나 결정적인지 보여줍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수 있겠느냐?”
정말 참삶의 길은, 참으로 목숨을 얻는 길은 단 하나!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길뿐입니다. 세상을 얻은들 제 목숨을 잃으면 그 세상 무슨 소용이 있겠는지요? 얼마나 많은 이들이 무지의 어둠속에서 제 목숨을 구하려고 제 목숨을 잃는 역설적 어리석은 삶을 살고 있는지요? 생명의 길인줄 알았는데 죽음의 길을 말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속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그러니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행실”이 바로 심판의 잣대가, 구원의 잣대가 됨을 깨닫습니다.
바로 주님의 제자직의 모범이 오늘 기념하는 성 도미니코 사제는 물론 무수한 성인성녀들입니다.
오늘 8월8일은 성 도미니코 수도회의 창립자인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입니다. 성인의 삶에 대해 잠시 살펴봅니다. 성인은 사제가 된 이후 이단들이 횡행하는 현실을 개탄하고 하느님 말씀을 전하며 살기로 결심합니다. 말로만 하는 설교는 힘이 없음을 깨닫고 모든 것을 버리고 가난하게 순례하며 몸소 실천한 복음을 전하는 설교를 택합니다.
성인은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이들과 설교자수도회를 인준 받고, 회원들과 함께 유럽 곳곳을 돌며 하느님 말씀을 전합니다. 공동체 회원들은 기도는 물론 연구, 교육, 설교에 헌신하였고, 수도회의 성무일도를 유지했지만 수도승들의 전통적인 방식보다 더 단순한 형태로 노래했습니다. 도미니코는 짧고 조정의 여지가 있는 아우구스티누스 규칙을 선택했습니다.
이 구성원들은 복음 전파에 있어 관상을 통해 결실을 맺는 훈련된 수도자들이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와는 달리 성 도미니코는 훌륭한 조직가이자 공동 책임의 선구자이었고, 성 도미니꼬 수도회는 수도생활의 중요한 부분인 육체노동을 공식적으로 폐지한 최초의 수도회이기도 했습니다. 성인은 두세번이나 주교로 선임되었지만 그때마다 거절했으니 주교직을 갖기보다 형제들과 함께 가난하게 살기를 바랬기 때문입니다.
특히 성인은 어려울 때 마다 성모님께 전구를 청했고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 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여 묵주기도의 전통을 교회안에 널리 전파하였습니다. 이런 전통에 힘입어 수도회는 설립초기부터 성 대 알벨토, 성 토마스 아퀴나스같은 대신학자를 배출했습니다. 성인은 1220년 블로냐에서 설교자회의 첫 번째 총회를 마치고 이듬해 1221년 블로냐의 수도원에서 향년 51세, 100% 삶을 연소시킨후 선종합니다. 성인이 자신의 죽음을 지켜보는 제자들에게 주신 마지막 유언입니다.
“형제들이여! 서로 사랑하라, 겸손하라, 청빈을 자발적으로 실천함으로써 영적인 보화를 만들어 가도록 하라.”
당시 유럽에는 60여개의 수도원과 수녀원과 더불어 500여명의 수도자들이 있었습니다. 성인은 1234년 그레고리오 9세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천문학자와 설교자들의 수호성인이 되었습니다.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의 성인에 대한 언급입니다.
“나는 전심전력으로 사도적 생활 양식을 따라간 사람을 알았습니다. 그 사람이 천국에서 사도들의 영광을 함께 누리고 있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치 않습니다.”
참으로 시종여일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충실히 따랐던 성 도미니코 사제였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십자가의 길>에 충실하도록 도와주십니다. 끝으로 늘 반복해도 늘 새로운 좌우명 고백 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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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자기 십자가는 자기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많이 듣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듣기 싫은 말씀입니다.
제 십자가를 지라고 합니다. 그러나 지기 싫습니다.
제 십자가는 자기가 져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제 십자가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것이 좋아하는 것이면 남의 것도 나의 것이라고 할 텐데 싫어하는 것이기에 제 십자가인데도 남의 것이라고 합니다.
교묘한 바꿔치기입니다. 얼마나 교묘한지 자신도 속습니다.
골치를 썩이는 아들, 그것 내 십자가입니다. 말썽을 부리는 형제, 그것 내 십자가입니다.
골치를 썩이는 아들, 옆집 여자의 십자가입니까? 말썽을 부리는 형제, 갈멜 수사의 십자가입니까?
그런데도 내가 져야 할 십자가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무거운 걸 지고 어떻게 당신을 따라가느냐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에게 주어진 책임, 지금 내가 처한 상황, 내게 주어진 모든 것, 그것 다 나의 십자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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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16,24)
<제 십자가!>
오늘 복음(마태16,24-28)은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가야 하는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믿는 이들의 신앙 여정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여정입니다. 우리가 입으로 "아멘, 아멘!" 하는 것은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삶 전체를 믿는다.'는 고백이며, '삶의 자리에서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로 예수님을 드러내겠다.'는 고백, 곧 '복음이 되겠다.'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그 너머에 부활이 있다.'는 고백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성 도미니코 사제'는, 설교자회(도미니코 수도회)를 창설하신 분이신데, 프란치스칸들의 '또 하나의 사부'로 알려져 있는 분이십니다. 스페인에서 태어나셔서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같은 시대 때 활동했고, 성 프란치스코처럼 탁발(빌어먹음)의 삶을 사시면서, 설교로 복음을 전했던 성인이십니다.
인간은 죽지 않고 살고 싶어합니다. 영과 육이 건강한 삶을 살려고 애를 씁니다. 고통을 두려워하고,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고통과 죽음을 믿음과 신앙으로 극복합니다. 죽음을 이기이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이고, 죽음의 다리 저 너머에서 영원히 죽지 않고 사는 것이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 궁극적인 목적지를 바라보면서, 지금 여기에서 나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려고 애를 씁니다.
크고 작은 나의 십자가들이 있습니다. 믿음 안에서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 나 자신의 부족함과 나약함, 그리고 허물과 죄들이 바로 지금 여기에서 내가 짊어져야 할 '제 십자가들'이 아닌지?
하지만 언제나 우리의 죄보다 더 큰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를 향해 있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입니다. 이 큰 자비와 사랑을 굳게 믿고 예수님의 뒤를 다시 잘 따라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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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 24)
무언가 중요한 것을
여전히 놓치고 사는
우리들이다.
중요한 것은
십자가를 지는
우리의
실천이다.
자아라는
환상에서
벗어나는 길이
십자가를 지는
일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다름아닌
우리의 십자가를
우리가 지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는 일이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다.
은총 대신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우리에게 주신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현주소가
여실히 드러난다.
십자가를 받아
들여야 한다.
대충과 그냥으로는
십자가를 질 수 없다.
자아의 집착이 아닌
자아의 죽음이 바로
참된 십자가인 것이다.
주님과 우리의
공통분모는
십자가에 있다.
진심을 드러내는
삶 자체가 십자가이다.
십자가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우리들 관계이다.
자신만을 위하고
자신만을 섬기는
죄와 어리석음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우리들을 구원하는
것은 십자가이다.
자신을 버리는 것이
참된 사랑이며
십자가의 방식이다.
하느님의
구원 방식이
바로
십자가이다.
십자가에
구원이 있음을
믿는다.
자기 파괴가 아니라
이기적인 자기버림이다.
십자가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이다.
함께 지고
함께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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