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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子胡亂(병자호란)💢💢 💢1篇(편)💢
南漢山城(남한산성) 守禦將臺(수어장대).
날짜 日時(일시) | 1636年(년) 12月(월) 28日(일) ~ 1637年(년) 2月(월) 24日(일) |
場所(장소) | 平安道(평안도), 黃海道(황해도), 京畿道(경기도). |
結果(결과) | 淸(청)나라의 勝利(승리), 丁丑(정축)下城(하성)(三田渡(삼전도)의 屈辱(굴욕) |
交戰國(교전국).
朝鮮(조선).
淸(청)나라.
朝鮮(조선) 指揮官(지휘관).
仁祖(인조)
都元帥(도원수) 金自點(김자점)
義州府尹(의주부윤) 林慶業(임경업)
黃海兵使(황해병사) 李浣(이완)
申景瑗(신경원)
全羅兵使(전라병사) 金俊龍(김준용)
平安道(평안도)兵使(병사) 柳琳(유림)
平安道觀察使(평안도관찰사) 洪命耈(홍명구) †
慶尙左兵使(경상좌병사) 許完(허완)
淸(청) 나라指揮官(지휘관).
숭덕제)[崇德帝: 明(명) 만력(萬曆) 20년 10월 25일 (1592년 11월 28일) ~ 숭덕(崇德) 8년 8월 9일 (1643년 9월 21일)는 後金(후금)의 第(제)2代(대) 한이자, 淸(청) 帝國(제국)의 創業(창업) 君主(군주)이다. 諱(휘)는 아이신 교로 홍 타이지 (만주어 : ᠠᡳᠰᡳᠨᡤᡳᠣᡵᠣᡥᠣᠩᡨᠠᡳᠵᡳ Aisin Gioro Hong Taiji ). 廟號(묘호)는 태종(太宗, 만주어 : ᡨᠠᡳᡯᡠᠩ Taidzung )이다. 後金(후금) 年號(연호)는 천총(天聰, 만주어 : ᠠᠪᡴᠠᠰᡠᠷᡝ Abkai Sure , 蒙古語(몽골어) : ᠲᠩᠷᠢ ᠶᠢᠨ ᠰᠡᠴᠡ Tengri-yin Seče )이고,淸(청)帝國(제국) 年號(연호)는 숭덕(崇德, 만주어 : ᠸᡝᠰᠢᡥᡠᠨ
ᠡᠷᡩᡝᠮᡠᠩᡬᡝ Wesihun Erdemungge, 蒙古語(몽골어): ᠳᠡᠭᠡᠳᠦᠡᠷᠳᠡᠮᠳᠡᠢ Degedü Erdemtü)이다. 諡號(시호) 는 응천흥국홍덕창무관온인성예효경민소정융도현공문황제(應天興國弘德彰武寬溫仁聖睿孝敬敏昭定隆道顯功文皇帝), 줄여서 태종 문황제 (太宗文皇帝, 만주어 : ᡨᠠᡳᡯᡠᠩ ᡤᡝᠩᡤᡳᠶᡝᠨ ᡧᡠ
ᡥᡡᠸᠠᠩᡩᡳ Taidzung Genggiyen Šu Hūwangdi), 別號(별호)로는 태종한조종 (太宗汗祖宗, 만주어 : ᡨᠠᡳᡯᡠᠩ ᡥᠠᠨᠮᠠᡶᠠ Taidzung Han Mafa )이 있다.生前(생전) 尊號(존호)는 매우 관대하고 조화로우며 신성한 군주(弘德彰武皇帝, 만주어 : ᡤᠣᠰᡳᠨ ᠣᠨ᠋ᠴᠣ ᡥᡡᠸᠠᠯᡳᠶᠠᠰᡠᠨ ᡝᠨᡩᡠᡵᡳᠩᡤᡝ ᡥᠠᠨ Gosin Onco Hūwaliyasun Enduringge Han , 몽골어 : ᠠᠭᠤᠳᠠᠥᠷᠦᠰᠢᠶᠡᠩᠴᠢ
ᠨᠠᠶ᠋ᠢᠷᠠᠮᠳᠠᠭᠤ ᠪᠣᠭᠳᠠ ᠬᠠᠭᠠᠨ Aγuda ÖrüsiyegčiNayiramdaγu Boγda Qa'an )이다.]
아이신 교로 다이샨[(만주어 : ᠠᡳ᠌ᠰᡳᠨᡤᡳᡠ᠋ᡵᠣᡧᡠᡵᡤᠠᠴᡳ Aisin-Gioro Daišan , 한국한자: 愛新覺羅代善 애신각라 대선, 1583년 ~ 1648년 )은 淸(청) 帝國(제국)의 皇族(황족)으로 누르하치의 次男(차남)이며, 崇德帝(숭덕제)의 이복형이다.
아이신 교로 지르가랑[(만주어 : ᠠᡳᠰᡳᠨᡤᡳᠣᡵᠣᠵᡳᡵᡤᠠᠯᠠᠩ Aisin Gioro Jirgalang, 한국 한자: 愛新覺羅濟爾哈朗 애신각라 제이합랑, 1599년 11월 19일 ~ 1655년 6월 11일)은 淸(청) 帝國(제국)의 皇族(황족)이자 政治家(정치가)로 누르가치의 同生(동생) 슈르가치의 6男(남)이며 太宗(태종) 崇德帝(숭덕제)의 四寸(사촌) 同生(동생)이다.
아이신 교로 도르곤[(만주어 : ᠠᡳᠰᡳᠨ ᡤᡳᠣᡵᠣᡩᠣᡵᡤᠣᠨ, 愛新覺羅多爾袞[애신각나다이곤], 1612년 11월 17일 ~ 1650년12월 31일)은 淸(청) 帝國(제국) 初期(초기)의 皇族(황족)으로, 後金(후금)의 初代(초대) 한이자 淸(청) 帝國(제국)의 初代(초대) 皇帝(황제)인 누르가치의 14男(남)이며, 누르가치의 세 번째 正室(정실) 孝烈武皇后효열무황후) 아바하이의 所生(소생)이다. 爵位(작위)는 예친왕 (和碩睿親王, Hošoi Mergen Cin Wang)이며, 諡號(시호)는 충(忠), 正式(정식) 諡號(시호)는 예충친왕 (睿忠親王)이다.
아이신 교로 호오거[(만주어 : ᠠᡳᠰᡳᠨ ᡤᡳᠣᡵᠣᡥᠣᠣᡤᡝ AisinGioro Hooge, 1609년 ~ 1648년)은 淸(청)나라의 皇族(황족)이다. 淸(청) 帝國(제국)의 太宗(태종) 崇德帝(숭덕제)의 長子(장자)이며 順治帝(순치제)의 異腹兄(이복형)이다. 어머니는 繼妃(계비) 울아나라씨. 崇德帝(숭덕제)의 長子(장자)로 戰功(전공)을 세워 皇位(황위) 繼承者(계승자)로 內定(내정)되었으나, 배다른 叔父(숙부)이자 라이벌인 도르곤의 支持派(지지파)가 팽팽히 맞서 皇位(황위)를 繼承(계승)하지 못하였다. 도르곤의 라이벌로서 攝政職(섭정직)을 놓고 競合(경합)을 벌였으나, 結局(결국) 敗(패)하고 獄死(옥사)한다. 諡號(시호)는 숙무친왕(肅武親王)이다.
아이신 교로 요토?!
아이신 교로 도도[ 만주어 : ᠠᡳᠰᡳᠨ ᡤᡳᠣᡵᠣ ᡩᠣᡩᠣ AisinGioroodo , 중국어: 愛新覺羅 多鐸, 병음: Àixīn Juéluó Duōduó, 한자음: 애신각라 다탁, 1614년 4월 2일 ~ 1649년 4월 29일)는 淸(청) 帝國(제국)의 太祖(태조) 누르가치의 15番(번)男(남)으로 도르곤의 親同生(친동생)이다. 滿洲(만주) 정람기(正藍旗) 사람이다.
타타라 잉굴다이[(만주어 : ᡨᠠᡨᠠᡵᠠᡳᠩᡤᡡᠯᡩᠠᡳ, 중국어 간체자: 他塔喇 英俄尔岱[타탑나 영아이대],정체자: 他塔喇 英俄爾岱[타탑나 영아이대], 병음: Tatara Inggūldai, 1596년~1648년 2월 24일)는 淸(청)나라의 將帥(장수)이다. 한국어권에는 이름을 한자로 음차한 용골대(한국한자: 龍骨大)로 더 잘알려져 있다. 병자호란 당시 朝鮮(조선)에 침입하여, 南漢山城(남한산성)에 避身(피신)한 仁祖(인조)의 降伏(항복)을 받아낸 三田渡(삼전도)의 屈辱(굴욕) 事件(사건)으로 有名(유명)하다.滿洲(만주) 정백기(正白旗) 타타라 家門(가문) 出身(출신)이다.
슈무루 양구리[(만주어 : ᡧᡠᠮᡠᡵᡠᠶᠠᠩᡤᡠᡵᡳ Šumuru Yangguri, 한국한자: 舒穆禄 揚古利 서목록 양고리, 1572년 ~ 1637년 )는 後金(후금)과 淸(청) 帝國(제국)의 軍人(군인)이다. 훈춘슈무루 하라 出身(출신)이고, 滿洲(만주) 정황기(正黃旗) 사람이며, 淸(청) 帝國(제국)의 建國(건국)英雄(영웅) 中(중) 하나이다.†
마푸타?!
사르후다?!
상가희?!
경중명[耿仲明:1604년 ~ 1649년)은 明(명)나라 末期(말기)와 淸(청)나라 初期(초기)에 活動(활동)했던 將軍(장군)이다. 요동 개주(遼東 蓋州, 現在(현재)의 랴오닝성 잉커우시 가이저우시) 사람으로 字(자)는 운대(雲臺)이다. 등주 참장(登州 參將)을 歷任(역임)했으며 청초 삼번(淸初 三藩)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하다.
공유덕?!
兵力(병력).
束伍軍(속오군)(地域軍(지역군), 豫備軍(예비군) 80,000~90,000名(명) 正規軍(정규군) 54,000名(명) 水軍(수군) 30,000名(명) 總(총) 兵力(병력) 80,000名(명) ~ 174,000名(명) | 1次(차) 先鋒隊(선봉대) 300名(명) 2次(차) 先鋒隊(선봉대) 1,000名(명) 3次(차) 先鋒隊(선봉대) 3,000名(명) 左翼軍(좌익군) 12,761名(명) 本軍(본군) 15,272名(명) 後尾軍(후미군) 12,840名(명) 库图尔(쿠툴어) 2千(천) 總(총) 兵力(병력) 47,173名(명) ~ 140,000名(명) |
被害(피해) 規模(규모) | |
正確(정확)하지 않음. | 正確(정확)하지 않음. |
병자호란(丙子胡亂)은 1636年(년) 12月(월) 28日(일) ~ 1637年(년) 2月(월) 24日(일)까지 朝鮮(조선)과 淸(청)나라 사이에 벌어진 戰爭(전쟁)이다. 丙子亂(병자란), 丙亂(병란), 병자호란(丙子虜亂), 병정노란(丙丁虜亂), 滿洲(만주)의 朝鮮(조선) 侵攻(침공), 淸(청)의 朝鮮(조선) 侵攻(침공)이라고도 부른다. 淸(청) 帝國(제국)의 崇德帝(숭덕제)가 明(명)나라를 攻擊(공격)하기 以前(이전)에 背後(배후)의 安全(안전)을 確保(확보)할 目的(목적)으로 朝鮮(조선)을 侵攻(침공)하였고, 仁祖(인조)와 朝廷(조정)이 南漢山城(남한산성)에서 抗戰(항전)하였으나 淸(청)의 包圍(포위)로 因(인)한 굶주림과 추위, 王室(왕실)이 避難(피난)한 江華島(강화도)의 陷落(함락), 南漢山城(남한산성)의 包圍(포위)를 풀기 위한 勤王兵(근왕병)의 作戰(작전) 失敗(실패) 等(등)으로 말미암아 降伏(항복)하였다. East Asia(동아시아) 歷史(역사)에서는 明(명)淸(청)交替期(교체기)를 象徵(상징)하는 重要(중요)한 事件(사건)이며, 朝鮮(조선)으로서는 짧은 戰爭(전쟁) 期間(기간)에도 불구하고 戰爭(전쟁) 捕虜(포로)로 數十萬(수십만)의 百姓(백성)이 淸(청) 帝國(제국)으로 끌려가 그 社會的(사회적) 被害(피해)가 유례없이 막심하였다.
3.2 丁卯胡亂(정묘호란) 以後(이후) 兩國(양국)關係(관계).
1636年(년) 병자호란(丙子胡亂) 進行(진행) 過程(과정) 當時(당시) 朝鮮軍(조선군)이
빨리 무너지고 仁祖(인조) 임금이 전격 降伏(항복)한 理由(이유)는?
- 조선시대 역사(朝鮮時代歷史 ; chosun-Joseon dynasty)
槪要(개요).
朝鮮(조선)은 丁卯胡亂(정묘호란) 以後(이후) 後金(후금)과 兄弟(형제)의 關係(관계)를 맺었으나, 講和條約(강화조약)에 따라 明(명)과의 關係(관계)에는 變(변)함이 없었다. 홍타이지[(만주어 : ᠠᡳᠰᡳᠨ ᡳᠣᡵᠣ ᡥᠣᠩ ᡨᠠᡳᠵᡳ Aisin Gioro Hong Taiji). 廟號(묘호)는 태종(太宗, 만주어 : ᡨᠠᡳᡯᡠᠩ Taidzung )이다. 後金(후금) 年號(연호)는 천총(天聰, 만주어 : ᠠᠪᡴᠠᡳ ᠰᡠᠷᡝ Abkai Sure, 몽골어 : ᠲᠩᠷᠢ ᠶᠢᠨ ᠰᠡᠴᠡ Tengri-yin Seče)이고, 淸(청) 帝國(제국) 年號(연호)는 숭덕(崇德, 만주어 : ᠸᡝᠰᠢᡥᡠᠨ ᠡᠷᡩᡝᠮᡠᠩᡬᡝ Wesihun Erdemungge, 몽골어 : ᠳᠡᠭᠡᠳᠦ
ᠡᠷᠳᠡᠮᠳᠡᠢ Degedü Erdemtü)이다. 諡號(시호)는 응천흥국홍덕창무관온인성예효경민소정융도현공문황제(應天興國弘德彰武寬溫仁聖睿孝敬敏昭定隆道顯功文皇帝), 줄여서 태종 문황제 (太宗文皇帝, 만주어 : ᡨᠠᡳᡯᡠᠩ ᡤᡝᠩᡤᡳᠶᡝᠨ ᡧᡠ
ᡥᡡᠸᠠᠩᡩᡳ Taidzung Genggiyen Šu Hūwangdi), 別號(별호)로는 태종한조종 (太宗汗祖宗, 만주어 : ᡨᠠᡳᡯᡠᠩ ᡥᠠᠨ ᠮᠠᡶᠠ Taidzung Han Mafa )이 있다.生前(생전) 尊號(존호)는 매우 寬大(관대)하고 調和(조화)로우며 神聖(신성)한 君主(군주) (弘德彰武皇帝, 만주어 : ᡤᠣᠰᡳᠨ ᠣᠨ᠋ᠴᠣ ᡥᡡᠸᠠᠯᡳᠶᠠᠰᡠᠨ ᡝᠨᡩᡠᡵᡳᠩᡤᡝ ᡥᠠᠨ Gosin Onco Hūwaliyasun Enduringge Han, 몽골어 : ᠠᠭᠤᠳᠠ ᠥᠷᠦᠰᠢᠶᠡᠩᠴᠢ ᠨᠠᠶ᠋ᠢᠷᠠᠮᠳᠠᠭᠤ ᠣᠭᠳᠠ ᠬᠠᠭᠠᠨ Aγuda Örüsiyegči Nayiramdaγu Boγda Qa'an )이다.]가 稱帝(칭제)를 決心(결심)하고 朝鮮(조선)에 보낸 使臣(사신)은 仁祖(인조)와 接見(접견)을 못했고 ホンタイジ Hongtaiji·皇太極(홍타이지) 皇帝(황제) 卽位式(즉위식)에 參席(참석)한 朝鮮(조선) 使臣(사신)은 ホンタイジ Hongtaiji·皇太極(홍타이지)에게 拜禮(배례)를 하지 않았다. 朝鮮(조선)이 親明(친명)政策(정책)을 變更(변경)할 意思(의사)가 없음을 確因(확인)한 ホンタイジ Hongtaiji·皇太極(홍타이지)는 明(명)과의 全面戰(전면전) 前(전)에 朝鮮(조선)을 確實(확실)히 屈伏(굴복)시켜 背後(배후)의 威脅(위협)을 除去(제거)하고자 1636年(년) 12月(월) 2日(일), 12萬(만) 軍士(군사)로 朝鮮(조선)을 侵攻(침공)했다. 當時(당시), 朝鮮(조선)의 大淸(대청) 防禦戰略(방어전략)은 청야견벽(淸野堅壁)으로, 强(강)한 淸(청)의 騎兵(기병)과 直接(직접) 맞부딪치는 것을 避(피)하고 侵攻路(침공로) 周邊(주변)의 城(성)에 軍士(군사)를 集結(집결)하여 攻城戰(공성전)을 强要(강요)함으로써 戰爭(전쟁)을 長期戰(장기전)으로 이끄는 것이었다. 이 戰略(전략)은 明(명)이 아무리 弱體化(약체화) 되었더라도 이를 背後(배후)에 두고서는 長期戰(장기전)을 벌이기 어려운 淸(청)의 弱點(약점)을 노린 것으로, 有事時(유사시)에는 水軍(수군)이 弱(약)한 淸(청)의 攻勢(공세)를 避(피)할 수 있도록 江華島(강화도)에 播遷(파천)하는 計劃(계획)도 包含(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丁卯胡亂(정묘호란) 當時(당시) 仁祖(인조)가 江華島(강화도)로 播遷(파천)하는 것을 지켜본 경험이 있는 淸(청)은 朝鮮軍(조선군)이 지키고 있던 山城(산성)을 迂回(우회)해서, 漢陽(한양)으로 迅速(신속)히 南下(남하)하여 仁祖(인조)와 朝廷(조정)이 江華島(강화도)로 避難(피난)하는 길을 遮斷(차단)하였다. 烽火(봉화)를 通(통)한 緊急(긴급) 通信(통신)體系(체계)가 제대로 作動(작동)하지 않아 朝廷(조정)이 淸軍(청군)의 侵攻(침공)을 認知(인지)한 것은 12月(월) 13日(일)이었으며, 仁祖(인조)는 淸軍(청군)이 漢陽(한양)에 거의 接近(접근)한 12月(월) 14日(일)에서야 播遷(파천)에 나섰으나 江華島(강화도)로 向(향)하는 길이 이미 遮斷當(차단당)한 以後(이후)라 南漢山城(남한산성)으로 避(피)할 수 밖에 없었다.
南漢山城(남한산성)은 天惠(천혜)의 要塞(요새)로 1萬(만) 3千餘名(천여명)의 朝鮮軍(조선군)이 守城(수성)에 나서 淸軍(청군)이 이를 攻略(공략)하기는 쉽지 않았으나, 事前(사전)에 防禦(방어)를 위한 準備(준비)가 갖춰지지 않았던 터라 한 달 남짓 버틸 수 있는 軍糧(군량) 밖에 없어 長期戰(장기전)을 圖謀(도모)하기 어려웠다. 朝廷(조정)은 南漢山城(남한산성)과 江華島(강화도)가 抗戰(항전)하는 동안 全國(전국) 各地(각지)의 官軍(관군)이 集結(집결)하여 淸軍(청군)의 包圍(포위)를 풀 것을 企待(기대)하였으나, 忠淸道(충청도) 勤王兵(근왕병)의 進擊(진격)이 竹山(죽산)에서 멈추었고(12月(월) 19日(일) 12月(월) 2月(월)에서 淸軍(청군)에게 敗北(패배)하였으며 水原(수원) 光敎山(광교산) 戰鬪(전투)에서 淸軍(청군)에게 勝利(승리)를 거둔 全羅道(전라도) 勤王吏兵(근왕이병)마저 彈藥(탄약) 不足(부족)으로 退却(퇴각)함으로써 南漢山城(남한산성)의 孤立(고립)은 深化(심화)되었다. 한편, 平安道(평안도)와 黃海道(황해도)에서 청야견벽[淸野 戰術)은 周邊(주변)에 敵(적)이 使用(사용)할 만한 모든 軍需物資(군수물자)와 食糧(식량) 等(등)을 없애 敵軍(적군)을 지치게 만드는 戰術(전술)이다. 견벽청야 (堅壁淸野)라고도 한다. 防禦側(방어측)이 自發的(자발적)으로 使用(사용)하는 焦土化(초토화) 戰術(전술)이라고 할 수 있다.]戰略(전략)에 따라 守城(수성)을 準備(준비)하다 虛(허)를 찔린 朝鮮軍(조선군)은 淸軍(청군)의 뒤를 쫓아 奇男下(기남하)하였으나 12月(월) 25日(일) 多尔衮(도르곤)이 이끄는 淸(청)의 右翼軍(우익군)에게 奇襲(기습)을 當(당)하여 楊根(양근) 迷原(미원)으로 退却(퇴각)하였다. 楊根(양근) 迷原(미원)에는 約(약) 1萬(만) 7千餘名(천여명)의 朝鮮軍(조선군)이 集結(집결)하였으나 淸軍(청군)과 正面(정면)으로 對決(대결)하지 못하였다.
江華島(강화도)에는 世子嬪(세자빈)(昭顯世子(소현세자)의 婦人(부인)과 鳳林大君(봉림대군)(後日(후일) 孝宗(효종)을 비롯하여 王室(왕실)과 歷代(역대) 임금(王왕)의 神主(신주)가 避難(피난)해 있었다. 仁祖(인조)와 朝廷(조정)은 水戰(수전)의 經驗(경험)이 적은 淸軍(청군)이 江華島(강화도)를 攻掠(공략)하기 어려울 것으로 判斷(판단)하였으나, 淸軍(청군)은 明(명) 水軍(수군) 出身(출신)의 孔有德(공유덕)과 耿仲明(경중명) 等(등)을 앞세워 江華島(강화도)를 公格(공격)하였다. 弘太极(홍타이지)는 仁祖(인조)가 1月(월) 19日(일)까지 降伏(항복)하지 않자 江華島(강화도) 公格(공격)을 命令(명령)하였고, 淸軍(청군)은 1月(월) 22日(일) 새벽부터 江華島(강화도) 上陸(상륙)을 試圖(시도)하여 當日(당일) 午後(오후)에 江華山城(강화산성)을 陷落(함락)시켰다. 備蓄(비축) 食糧(식량)의 消盡(소진)으로 어려움을 겪던 仁祖(인조)와 朝廷(조정)은 1月(월) 26日(일) 江華島(강화도) 失陷(실함) 事實(사실)을 接(접)하자 抗戰(항전)意志(의지)를 喪失(상실)했고, 結局(결국) 1月(월) 30日(일)(陽曆(양력) 2月(월) 24日(일) 出城(출성)하여 三田渡(삼전도)에서 弘太极(홍타이지)에게 降伏(항복)하였다.
星山李氏 丙子胡亂 忠義[성산리씨 병자호난 충의]
戰爭(전쟁) 前(전) 朝鮮狀況(조선상황).
朝鮮(조선)은 壬辰倭亂(임진왜란) 以後(이후)의 社會復舊事業(사회복구사업), 李适(이괄)의 亂(난)으로 因(인)한 精銳兵(정예병)의 損失(손실) 等(등)으로 어려운 狀況(상황)이었다. 特(특)히 李适(이괄)의 亂(난)으로 因(인)한 1萬(만) 6,000名(명)의 北坊軍(북방군)의 損失(손실)은 매우 큰 打擊(타격)이었다. 當時(당시) 4營軍(영군)을 除外(제외)한 正規軍(정규군)은 北坊軍(북방군)이 有一(유일)했는데, 李适(이괄)의 亂(난) 때문에 7千(천) 500名(명)의 精銳兵(정예병)이 損失(손실)되었고, 數千(수천)의 束伍軍(속오군) 兵力(병력)도 被害(피해)를 입어 朝鮮軍(조선군)의 戰力(전력)이 弱(약)해져 있었다. 하지만 仁祖(인조)의 國防(국방)政策(정책)으로 因(인)해 朝鮮軍(조선군)은 1萬(만)의 訓鍊都監軍(훈련도감군), 2萬(만)의 忠隆軍(충융군), 1萬(만) 4千名(천명)의 守禦軍(수어군)을 確保(확보)하게 된다. 7千(천)의 御營軍(어영군)은 全國(전국)에 分散(분산)되어 束伍軍(속오군)에 編制(편제)되며, 束伍軍(속오군)의 戰力(전력)을 더 强化(강화)시켰다. 全國的(전국적)으로도 約(약) 9萬名(만명)이 束伍軍(속오군)이 마련되며, 3萬名(만명)의 水軍(수군)과 約(약) 600隻(척)의 戰船(전선)을 確保(확보)했다.
[丙子胡亂(병자호란)7] 淸(청) 奇兵(기병)의 進擊(진격)의 速度戰(속도전).
丙子胡乱:朝鲜的“靖康耻”,50万朝鲜人被清军押回东北充做奴隶]
[병자호란:조선적“정강치”,50만조선인피청군압회동배충주노이].
背景(배경).
女眞族(여진족)은 그들이 세운 金(금)이 蒙古(몽골)의 侵掠(침략)으로 滅亡(멸망)한 後(후) 明(명)나라 北東(북동) 地域(지역) 一帶(일대)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統一(통일)된 勢力(세력)을 形成(형성)하지 못하던 女眞族(여진족)은 明(명)과 朝鮮(조선) 兩側(양측)에 二重(이중)으로 關係(관계)하던 中(중) 爱新陀罗努尔八世(아이신 교로 누르하치)가 肅愼(숙신), 靺鞨(말갈), 女眞(여진)을 糾合(규합), 16世紀(세기) 末(말)에 이르러서는 이들을 統一(통일)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잦은 軍隊(군대) 動員(동원)과 이에 따른 經濟上(경제상) 損失(손실)은 明(명)의 國力(국력)을 衰弱(쇠약)하게 만들고 沒落(몰락)시킨 重要(중요)한 要人(요인)이 되었다.
努尔八(누르하치)가 明(명)나라와의 戰爭(전쟁)을 宣布(선포)하고 攻擊(공격)하자 守勢(수세)에 몰린 明(명)은 朝鮮(조선)에 小銃手(소총수) 7000名(명)을 支援(지원)하라고 要求(요구)하였고 努尔八(누르하치)는 派兵(파병)하지 말라고 朝鮮(조선) 朝廷(조정)에 强力(강력)히 要求(요구)했다. 當時(당시) 朝鮮(조선) 朝廷(조정)은 光海君(광해군)과 그의 卽位(즉위)를 도운 大北(대북)이 政權(정권)을 掌握(장악)하고 있었는데 이 臣僚(신료)들은 朝鮮(조선)이 國內(국내) 守備(수비)에 置重(치중)하는 것이 後方(후방) 守備(수비)라는 次元(차원)에서 有益(유익)하다며 明(명)이 한 要求(요구)에 미적지근한 態度(태도)를 보였으나 壬辰倭亂(임진왜란) 때 明(명)이 援軍(원군)을 派遣(파견)해 도운 일을 勘案(감안)하면 援兵(원병)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光海君(광해군)은 明(명)에 援軍(원군)을 보내되 싸움이 始作(시작)될 때 降伏(항복)해 朝鮮(조선)이 부득이 派兵(파병)한 실정을 說明(설명)하게끔 하였다는 野史(야사)가 있으나 이는 派兵(파병)된 人員(인원)의 80%가 戰死(전사)한 뒤에 降伏(항복)했다고 傳(전)해진다.
丙子胡亂(병자호란) - 朝鮮(조선)의 虛勢(허세).. 屈伏(굴복).. 僞善(위선)..
181部(부) East Asia(동아시아) 戰爭史(전쟁사) 丁卯胡亂(정묘호란).
丁卯胡亂(정묘호란).
1623年(년) 4月(월) 11日(일) 西人(서인)의 仁祖反正(인조반정)으로 光海君(광해군)이 廢位(폐위)하면서 朝鮮(조선)의 對外政策(대외정책)이 急旋回(급선회)하였다. 西人(서인)은 實利(실리)보다는 名分(명분)을 重視(중시)했고 臣僚(신료)들은 光海君(광해군)의 中立(중립) 對外政策(대외정책)을 旣存(기존) 親明排金(친명배금) 政策(정책)으로 바꾸어 朝鮮(조선)에 예로부터 내려오는 대로 明(명)을 잘 모시어 받들려고 했으며, 後金(후금)에서는 朝鮮(조선)에 對(대)한 强硬策(강경책)을 主張(주장)해 왔던 弘太极(홍타이)지가 卽位(즉위)하여 後金(후금)의 대조선(對朝鮮) 政策(정책)과 態度(태도)도 變(변)하였다.
後金(후금)은 明(명)나라와의 戰爭(전쟁) 탓에 交易路(교역로)가 끊겨 物資(물자) 不足(부족)에 甚(심)히 허덕여 이를 朝鮮(조선)과 하는 通交(통교)를 利用(이용)하여 打開(타개)해야 할 處地(처지)에 있었고 後方(후방)을 安定(안정)시키려고 朝鮮(조선) 가도[椵島)는 平安北道(평안북도) 鐵山郡(철산군) 鐵山邑(철산읍)(光復(광복) 當時(당시) 行政區域上(행정구역상) 백량면 가도동)에 속한 섬으로 鐵山(철산)半島(반도)에서 2 km 地點(지점)에 위치하는 섬이다.]에 駐屯(주둔)한 毛文龍(모문룡)과 敵對(적대) 政策(정책)을 펼치는 朝鮮(조선)을 征伐(정벌)할 必要性(필요성)을 强(강)하게 認識(인식)하였다. 때마침 叛亂(반란)을 일으켰다가 後金(후금)으로 달아난 李适(이괄)의 殘黨(잔당)이 光海君(광해군)은 不當(부당)하게 廢位(폐위)되었다고 呼訴(호소)하고 朝鮮(조선)의 軍勢(군세)가 弱(약)하니 속히 朝鮮(조선)을 征伐(정벌)해달라고 慫慂(종용)하였다. 弘太极(홍타이지)는 더욱 決戰(결전)할 뜻을 굳히어 李适(이괄)의 亂(난)때 後金(후금)에 投降(투항)한 한명윤의 아들, 한윤과 한택과 1619年(년) 부차전투에서 降伏(항복)한 姜弘立(강홍립)을 데리고 朝鮮(조선) 征伐(정벌)에 나섰다.
1627年(년)(仁祖(인조) 5年(년) 弘太极(홍타이지)는 光海君(광해군)을 報復(보복)한다는 名分(명분)으로 軍士(군사) 3萬(만)을 일으켜 朝鮮(조선)을 攻擊(공격)해 왔는데 이것이 丁卯胡亂(정묘호란)이다. 李适(이괄)의 亂(난)으로 말미암아 北邊(북변)의 軍士(군사) 體系(체계)가 崩壞(붕괴)된 狀態(상태)였던 朝鮮(조선)은 守勢(수세)에 몰렸고 朝鮮(조선) 朝廷(조정) 內(내)에서도 和議論(화의론)이 大勢(대세)를 이루고 後金(후금)도 오랜 期間(기간)에 걸치는 出兵(출병)이 困難(곤란)했으므로 戰爭(전쟁)은 持續(지속)되지 않았고 淸軍(청군)은 約(약) 두 달 만에 講和條約(강화조약)을 하고 撤收(철수)했다. 이로 말미암아 朝鮮(조선)은 後金(후금)과 “兄弟之盟(형제지맹)”을 하였다.
丁卯胡亂(정묘호란) 以後(이후) 兩國(양국)關係(관계).
丁卯胡亂(정묘호란) 以後(이후) 後金(후금)은 朝鮮(조선)에 여러 가지를 要求(요구)하였다. 이 要求(요구)에는 食糧(식량) 支援(지원)과 明(명) 征伐(정벌)에 使用(사용)할 병선(兵船) 提供(제공)이 包含(포함)되었고 1632年(년)(仁祖(인조) 10年(년) 朝鮮(조선)에 “兄弟之盟(형제지맹)”을 “君臣之義(군신지의)”로 바꾸기를 要求(요구)했는데 이것은 朝鮮(조선)을 臣下(신하)의 나라로 삼으려는 屈辱(굴욕)스러운 要求(요구)였다. 後金(후금)의 무리한 要求(요구)와 强壓(강압) 政策(정책)으로 朝鮮(조선) 內(내)에서는 朱子學的(주자학적) 名分論(명분론)에 立脚(입각)하여 和親(화친)하자는 論議(논의)를 排斥(배척)하자는 척화론(斥和論)이 擡頭(대두)되었고 後金(후금)과의 關係(관계)는 惡化(악화)하기 始作(시작)했다. 한편 後金(후금)의 弘太极( 타이지) 내蒙古(몽골)을 平定(평정)한 뒤 滿洲族(만주족)의 王(왕)을 일컫는 稱號(칭호)인 한(汗)을 버리고 皇帝(황제)를 稱(칭)하려 했다. 1636年(년)(仁祖(인조) 14年(년) 3月(월)에 잉굴다이(Inggūldai, 龍骨大(롱골대)와 마푸타(Mafuta, 馬福大(마복대) 等(등)을 보내어 여러 滿洲(만주)·蒙古(몽골)의 部族長(부족장)들이 弘太极(홍타이지)에게 올린 尊號(존호)의 글을 보이면서 朝鮮(조선) 朝廷(조정)도 이같이 하라고 要求(요구)하였으나 斥和論(척화론)을 좇아 仁祖(인조)는 後金(후금)의 使臣(사신)을 接見(접견)하지도 않고 國書(국서)도 받지 않았다. 물론 朝廷(조정)에서는 崔鳴吉[(崔鳴吉: 1586年(년) 10月(월) 7日(일) (陰曆(음력) 8月(월) 25日(일)~1647年(년) 6月(월) 19日(일) (陰曆(음력) 5月(월) 17日(일)은 朝鮮(조선) 中期(중기)의 文臣(문신), 性理學者(성리학자), 陽明學者(양명학자), 外交官(외교관), 政治家(정치가)이다. 本貫(본관)은 全州(전주), 字(자)는 자겸(子謙), 號(호)는 遲川(지천)·창랑(滄浪)이며, 諡號(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완성군(完城君)에 封爵(봉작)되었다가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으로 進封(진봉)되었다.]과 같이 戰爭(전쟁)을 避(피)하고 和解(화해)하거나 平和(평화)롭게 지내자는 주화론(主和論)을 主張(주장)한 者(자)도 있었지만, 大勢(대세)는 척화선전(斥和宣戰) 하는 氣運(기운)으로 기울어졌고 드디어 八道(팔도)에 선전(宣戰) 敎書(교서)를 내리어 防備(방비)를 굳게 하고 敵意(적의)를 보였다.
그해 5月(월) 皇帝(황제) 稱號(칭호)와 더불어 國號(국호)를 청(淸), 年號(연호)를 崇德(숭덕)이라 고친 淸(청) 太宗(태종) 弘太极(홍타이지)는 朝鮮(조선)의 挑戰(도전)하는 態度(태도)에 朝鮮(조선)을 遠征(원정)하려고 軍(군)을 組織(조직)할 準備(준비)를 서둘렀다.
戰爭(전쟁)의 勃發(발발).
1636年(년) 12月(월) 28日(일) 淸(청) 太宗(태종)이 이끄는 軍隊(군대) 約(약) 10萬名(만명)이 야루 우라(ᠶᠠᠯᡠ ᡠᠯᠠ Yalu Ula)를 건너 南下(남하)하자 의주부윤(義州府尹) 林慶業(임경업)은 白馬山城(백마산성)에서 淸(청)나라 軍隊(군대)의 進路(진로)를 遮斷(차단)하고 氣勢(기세)를 꺾어 놓을 萬般(만반)의 準備(준비)를 마쳐놓았다. 하지만, 仁祖(인조)를 잡는 게 目的(목적)이었던 淸(청)나라 軍(군)은 白馬山城(백마산성)을 비롯한 모든 山城(산성)을 迂廻(우회)해서 漢城(한성)을 向(향)해 신속히 進擊(진격)했고 보름도 채 지나지 않은 1月(월) 9日(일) 開城(개성)을 通過(통과)했다.
한편, 그 消息(소식)을 들은 仁祖(인조)와 朝廷(조정)은 丁卯胡亂(정묘호란) 때처럼 江華島(강화도)로 待避(대피)하려고 했으나 淸軍(청군)의 迅速(신속)한 南下(남하)로 江華島(강화도)로 가는 길이 진작 遮斷(차단)되는 바람에 1月(월) 10日(일) 南漢山城(남한산성)으로 緊急(긴급)히 待避(대피)하였고 漢城(한성)은 淸軍(청군)에 陷落(함락)되었다.
勤王兵(근왕병)의 召集(소집)과 失敗(실패).
南漢山城(남한산성)에 들어간 仁祖(인조)는 各(각) 道(도)에 잔 글씨로 써서 벌집을 만들려고 꿀벌이 분비하는 물질을 利用(이용)해 뭉친 글을 몰래 보내 勤王軍(근왕군)을 모으려고 했다. 丙子胡亂(병자호란) 當時(당시) 淸軍(청군)은 漢城(한성)과 仁祖(인조)만을 노린 電擊戰(전격전)을 展開(전개)했으므로 漢城(한성)과 그 周邊(주변)을 除外(제외)한 背後地(배후지)에는 被害(피해)가 거의 없었고 特(특)히 三南(삼남)(慶尙道(경상도), 忠淸道(충청도), 全羅道(전라도) 地方(지방)이 健在(건재)했으므로, 여기서 勤王軍(근왕군)을 編成(편성)해 山城(산성)을 包圍(포위)한 淸軍(청군)을 逆包圍(역포위)하면 戰勢(전세)를 有利(유리)하게 바꿀 수 있다고 判斷(판단)했다.
그러나 勤王軍(근왕군)을 指揮(지휘)할 責任(책임)이 있는 도원수(都元帥) 金自點(김자점)은 京畿道(경기도) 楊平(양평)에서 움직이지 않았고 各(각) 道(도)에서 올라오던 勤王軍(근왕군)은 合流(합류)하지 못한 채 淸軍(청군)의 別動隊(별동대)에게 各個擊破當(각개격파당)했고 南漢山城(남한산성)을 救援(구원)하지 못하였다.
各(각) 勤王軍(근왕군)의 動向(동향)은 다음과 같았다. 가장 먼저 12月(월) 17日(일), 江原監司(강원감사) 趙廷虎(조정호)가 勤王軍(근왕군) 約(약) 7000餘名(여명)을 組織(조직)하여 南漢山城(남한산성)으로 向(향)했다. 原州(원주) 營將(영장) 권정길이 이끄는 先鋒隊(선봉대) 1000餘名(여명)이 12月(월) 24日(일) 南漢山城(남한산성) 近處(근처)의 儉丹山ㆍ黔丹山(검단산)까지 進出(진출)하는데 成功(성공)했지만, 이튿날 淸軍(청군)의 別動隊(별동대)에게 擊破(격파)當(당)했고 士氣(사기)가 떨어진 勤王軍(근왕군)은 토붕와해(土崩瓦解)했다. 趙廷虎(조정호)는 殘餘(잔여) 軍士(군사)를 이끌고 加平(가평)으로 退却(퇴각)하여 다른 勤王軍(근왕군)과의 合流(합류)를 꾀했다.
咸鏡監司(함경감사) 閔聖徽(민성휘)는 12月(월) 27日(일) 勤王軍(근왕군) 7000餘名(여명)을 糾合(규합)하여 進軍(진군)했으나 北兵使(북병사) 徐捨申(서우신)과 咸鏡監司(함경감사) 閔聖徽(민성휘)이 指揮權(지휘권)을 놓고 말썽을 일으켜 시끄럽고 複雜(복잡)하게 다퉜다. 徐捨申(서우신)은 곧장 南漢山城(남한산성)으로 進軍(진군)하자고 主將(주장)했지만, 閔聖徽(민성휘)는 楊平(양평)의 金自點(김자점)과 合流(합류)한 後(후)에 勢力(세력)을 키우자고 主張(주장)하였다. 結局(결국) 閔聖徽(민성휘)의 意見(의견)을 좇아 咸境道(함경도) 勤王軍(근왕군)은 楊平(양평)으로 向(향)했지만, 都元帥(도원수) 金自點(김자점)은 그곳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北邊(북변)의 오랑캐와 戰鬪(전투) 經驗(경험)이 豐富(풍부)한 精銳兵(정예병)이었던 咸鏡道(함경도)의 軍士(군사)와 中央軍(중앙군)이 駐屯(주둔)하고 있었으며, 江原道(강원도) 勤王軍(근왕군)의 敗殘兵(패잔병)도 合流(합류)한 楊平(양평)의 軍勢(군세)는 2萬(만) 3千(천)에 달했지만, 金自點(김자점)은 結局(결국) 軍士(군사)를 움직이지 않아서 戰爭(전쟁)에서 전혀 影響力(영향력)을 行事(행사)하지 못했다.
忠淸監司(충청감사) 鄭世規(정세규)는 12月(월) 18日(일)에 仁祖(인조)가 잔 글씨로 써서 벌집을 만들려고 꿀벌이 분비하는 물질을 利用(이용)해 뭉쳐 몰래 보낸 글을 받았다. 鄭世規(정세규)는 卽時(즉시) 勤王軍(근왕군)을 糾合(규합), 12月(월) 25日(일) 公州(공주)를 出發(출발)하여 12月(월) 27日(일) 南漢山城(남한산성) 南(남)쪽의 險川(험천)에 當到(당도)해 화전(火箭)을 利用(이용)해 南漢山城(남한산성)에 信號(신호)했지만, 이번에도 淸軍(청군)의 別動隊(별동대)가 險川(험천) 서(西)에 있는 高地(고지)를 占領(점령) 後(후) 勤王軍(근왕군)을 邀擊(요격)했다. 勤王軍(근왕군)은 攻擊(공격)을 10餘次例(여차례) 防禦(방어)에는 成功(성공)했으나 氣力(기력)이 다했고 김홍익, 李慶徵(이경징), 李尙載(이상재)를 비롯해 指揮官(지휘관) 多數(다수)가 戰死(전사)했으므로 더는 成果(성과) 없이 退却(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險川(험천) 戰鬪(전투)는, 朝鮮軍(조선군)의 大敗(대패)로 끝나고 말았다.
淸軍(청군)이 처음 鴨綠江(압록강)을 건너 漢城(한성)으로 南下(남하)하면서 平安道(평안도)를 通過(통과)한다. 當時(당시) 平安監司(평안감사) 洪命耈(홍명구)는 淸軍(청군)의 鴨綠江(압록강) 渡河(도하) 消息(소식)을 接(접)하고 兵力(병력)을 組織(조직) 後(후) 平壤城(평양성) 북(北)에 있는 의자모산성에 들어가 淸軍(청군)을 防禦(방어)하려 했으나 淸軍(청군)이 이를 無視(무시)하고 그대로 남진(南進)하였으므로 아무것도 對處(대처)할 수 없었다. 洪命耈(홍명구)는 平安兵使(평안병사) 儒林(유림) 麾下(휘하)의 兵力(병력)을 合勢(합세), 1636年(년) 12月(월) 18日(일) 平壤(평양)을 出發(출발)해 南下(남하)했으나 鐵原(철원), 漣川(연천) 等地(등지)에 이들의 進擊(진격)을 막고자 駐屯(주둔)한 淸軍(청군)의 別動隊(별동대)에 가로막혀 더는 接近(접근)할 수 없었다. 1637年(년) 1月(월) 26日(일) 江原道(강원도) 金化(김화) 塔洞(탑동) 附近(부근)에서 淸軍(청군)과 한 戰鬪(전투)에서 洪命耈(홍명구)는 戰死(전사)했고 儒林(유림)은 高地(고지)에 駐屯(주둔)하면서 攻擊(공격)해 온 淸軍(청군)을 擊退(격퇴)에는 成功(성공)하여, 本來(본래) 目的地(목적지)였던, 南漢山城(남한산성)으로 向(향)하였으나, 이미 朝鮮(조선) 朝廷(조정)과 淸(청)의 條約(조약)이 締結(체결)된 뒤여서, 軍士(군사)를 돌려 서울(漢陽(한양)로 回軍(회군)하였다.
全羅監司(전라감사) 李時昉(이시방)은 12月(월) 20日(일) 근왕(勤王)하라고 命令(명령)받았다. 29日(일) 兵力(병력) 6000餘名(여명)을 모은 李時昉(이시방)은 全羅兵使(전라병사) 金俊龍(김준용)과 함께 全州(전주) 軍營(군영)을 出發(출발), 北上(북상)했고 이어 華嚴寺(화엄사)의 僧兵(승병) 2000餘名(여명)이 이에 合流(합류)하였다. 先鋒(선봉)을 맡은 金俊龍(김준용)은 1月(월) 4日(일) 光敎山(광교산) 附近(부근)까지 進出(진출)했으나 이틀 前(전) 忠淸道(충청도) 勤王軍(근왕군)을 擊破(격파)한 淸軍(청군)과 만났다. 1月(월) 5日(일), 金俊榮(김준영)은 淸軍(청군)의 突擊(돌격)을 막아내고 다음날은 淸軍(청군) 將帥(장수) 楊古里(양굴리)를 죽이는 等(등) 큰 戰果(전과)를 올렸으나 역시 物資(물자)가 不足(부족)하여 因(인)해 더는 進軍(진군)하지 못했고 어쩔 수 없이 水原(수원)으로 退却(퇴각)하였으며, 李時昉(이시방)이 이끄는 勤王軍(근왕군) 本隊(본대)는, 光敎山(광교산) 戰鬪(전투)를 敗北(패배)로 誤認(오인)하고 公州(공주) 方面(방면)으로 撤收(철수)하였다.
雙嶺(쌍령) 戰鬪(전투).
한편 慶尙監司(경상감사) 심연이 이끄는 慶尙道(경상도)의 勤王軍(근왕군)은 左兵使(좌병사) 許完(허완)과 右兵使(우병사) 閔栐(민영)이 이끄는 總規模(총규모) 約(약) 4萬(만)에 이르는 大規模(대규모) 兵力(병력)이었다. 束伍軍(속오군) 編制上(편제상) 總兵力(총병력) 4萬(만)이 모두 集結(집결)해 있었는지를 놓고 이론(異論)할 여지가 있지만, 許完(허완)과 閔栐(민영)이 이끄는 兵力(병력) 8000餘(여) 以上(이상)은 1637年(년) 1月(월) 3日(일) 廣州(광주)의 雙嶺(쌍령) 近處(근처)까지 進出(진출)했다. 이 兵士(병사)들을 沮止(저지)하려고 隣近(인근) 불당리에 埋伏(매복)하던 淸軍(청군)은 騎兵隊(기병대) 3百(백) 기(騎)와 칼과 창을 主(주) 武器(무기)로 삼아 最後(최후) 突擊(돌격) 段階(단계)에서 敵(적)에게 突進(돌진)하여 勝敗(승패)를 決定(결정)하는 口實(구실)을 하는 兵士(병사) 1千名(천명)으로 이루어진 小規模(소규모) 部隊(부대)였다. 朝鮮郡(조선군) 大部分(대부분)은 鳥銃(조총)으로 武裝(무장)하고 있었으나 訓練(훈련)도는 매우 낮았고 淸軍(청군) 騎兵(기병) 參百驥(3백기)가 칼을 빼어 들고 勇敢(용감)하게 突擊(돌격)하자 鳥銃(조총)으로 重武裝(중무장)한 8千餘(천여) 朝鮮郡(조선군)은 겁먹은 채 距離(거리)조차 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마구 射擊(사격)한 끝에 火藥(화약)과 화살을 모조리 消耗(소모)한다. 淸軍(청군)은 一旦(일단) 後退(후퇴)하고 나서 朝鮮軍(조선군)이 火藥(화약)을 消耗(소모)한 狀況(상황)을 確因(확인)하고 再次(재차) 突擊(돌격)을 敢行(감행)하여 許完(허완)이 이끄는 左軍(좌군)을 完璧(완벽)히 潰滅(궤멸)시키고 許完(허완)도 베어죽였다. 閔栐(민영)이 이끄는 右軍(우군)은 左軍(좌군)이 敗走(패주)하는 渦中(와중)에도 열심히 싸웠으나 火藥(화약)이 떨어져 이를 再補給(재보급)하던 途中(도중)에 火藥(화약)이 爆發(폭발)하여 軍士(군사) 數十(수십)이 그 爆發(폭발)로 말미암아 죽고 戰線(전선)이 무너졌다. 이를 틈탄 淸軍(청군) 騎兵隊(기병대)가 總突擊(총돌격)하자 右軍(우군)도 完璧(완벽)히 崩壞(붕괴)했고 閔栐(민영)도 이 渦中(와중)에 죽었다.
慶尙道(경상도) 勤王軍(근왕군)은 淸軍(청군)의 數十(수십) 배에 이르는 優越(우월)한 兵力(병력)을 제대로 活用(활용)하지도 못한 채 結局(결국) 慘敗(참패)했고 本陣(본진)을 이끌고 驪州(여주)에 陣(진)을 치고 있었던 沈演(심연)은 先鋒(선봉)部隊(부대)가 敗(패)했다는 消息(소식)을 듣고 서둘러 軍士(군사)를 돌려 조령 以南(이남)으로 撤收(철수)했다. 이렇게 八道(팔도)의 勤王軍(근왕군)이 全部(전부) 淸軍(청군)에게 擊破當(격파당)하여 南漢山城(남한산성)은 完璧(완벽)히 孤立(고립)되었고 勤王軍(근왕군)은 더 組織(조직)되지 못하였다.
江華府(강화부) 戰鬪(전투).
淸軍(청군)은 朝鮮(조선) 仁祖(인조)의 降伏(항복)을 받아내기 위해서는 王子(왕자)들을 人質(인질)로 잡는 것이 效率的(효율적)이라고 생각하였다. 當時(당시) 江華山城(강화산성)에 駐屯(주둔)한 朝鮮軍(조선군)의 數(수)는 채 몇百(백)이 되지 않았고, 江華島(강화도)守備總大將(수비총대장)인 江華檢察使(강화검찰사) 金慶徵[김경징: 1589年(년) ~ 1637年(년) 2月(월) 22日(일)은 朝鮮(조선) 後期(후기)의 武臣(무신)이다. 仁祖反正(인조반정)의 主要(주요) 人物(인물)인 김류의 아들이다. 本貫(본관)은 순천(順天)이고, 字(자)는 선응(善應)이다.
丙子胡亂(병자호란) 當時(당시) 江華島(강화도)의 防備(방비)를 맡았으나 防禦(방어)를 허술히 하다가 陷落(함락)되었다. 그는 反正功臣(반정공신)의 아들이라는 理由(이유)로 流配刑(유배형)에 處(처)해졌지만 結局(결국) 거듭된 彈劾(탄핵)으로 賜死(사사)되었다.]과 江華留守(강화유수) 兼(겸) 주사대장(舟師大將) 張紳(장신)이 指揮權(지휘권)을 놓고 다투면서 分裂(분열)되어 있었다. 1637年(년) 1月(월) 21日(일) 淸軍(청군)은 1萬(만)6千名(천명)의 軍士(군사)를 배에 태워 江華島(강화도)로 向(향)했다. 忠淸水使(충청수사) 姜晉昕(강진흔)은 水軍(수군)을 이끌고, 江華島(강화도)로 接近(접근)해오는 淸軍(청군)을 연이어 擊退(격퇴)하였다. 姜晉昕(강진흔)이 적은 數(수)의 배로 數(수)많은 배를 가진 淸軍(청군)을 힘겹게 對敵(대적)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舟師大將(주사대장)인 張紳(장신)은 姜晉昕(강진흔)을 돕지 않고 逃走(도주)하였다.
淸軍(청군)이 江華島(강화도)로 오고 있다는 것을 金績(김적)이 江華檢察使(강화검찰사) 金慶徵(김경징)에게 알렸으나, 金慶徵(김경징)은 "물이 모두 얼었는데 어떻게 淸軍(청군)이 오느냐?"라고 하며 金績(김적)에게 軍律(군율)을 물어 목을 베려까지 하였다. 金慶徵(김경징)은 甲串(갑곶)을 지키는 將帥(장수)가 金績(김적)과 같은 報告(보고)를 하자, 그제서야 軍士(군사)를 整備(정비)하고 甲串(갑곶)을 守備(수비)하려 들었다. 結局(결국), 姜晉昕(강진흔)의 忠淸水軍(충청수군)防禦線(방어선)을 뚫고 淸軍(청군)의 배가 江華島(강화도)에 上陸(상륙)하게 되었고, 淸軍(청군)은 鎭海樓(진해루)를 攻擊(공격)하여 陷落(함락)하였다. 뒤이어 江華島(강화도)에 속속 上陸(상륙)한 淸軍(청군)은 江華山城(강화산성)을 包圍(포위)하고 攻擊(공격)하기 始作(시작)했다. 金慶徵(김경징)과 江華府使(강화부사) 李敏求(이민구)는 배를 타고 江華島(강화도) 近處(근처) 섬으로 逃走(도주)하였고, 淸軍(청군)은 텅텅 빈 江華山城(강화산성)을 단숨에 陷落(함락)하였다. 많은 江華(강화) 百姓(백성)들이 淸軍(청군)에 依(의)해 殺害(살해)되었고, 몇몇 士大夫(사대부)들은 自決(자결)하기도 하는 等(등) 江華(강화) 곳곳에서는 慘劇(참극)이 벌어졌다.
1月(월) 22日(일) 江華府(강화부)를 陷落(함락)한 淸軍(청군)은 世子嬪(세자빈)과 鳳林大君(봉림대군)을 人質(인질)로 붙잡고, 仁祖(인조)에게 降伏(항복)을 要求(요구)하였다. 江華島(강화도) 陷落(함락)은 仁祖(인조)에게 큰 衝擊(충격)을 안겼고, 雙嶺(쌍령)戰鬪(전투)와 함께 仁祖(인조)가 降伏(항복)하는 決定的(결정적)인 要因(요인)이 되고 말았다. 戰亂(전란) 後(후), 朝廷(조정)에서는 江華府(강화부) 戰鬪(전투)의 責任(책임)을 묻기 始作(시작)하였고, 臣下(신하)들은 敗北(패배)의 元兇(원흉)인 金慶徵(김경징)의 목을 베기를 願(원)하였으나 仁祖(인조)는 金慶徵(김경징)과 江華府使(강화부사) 李敏求(이민구)를 歸養(귀양)보냈다. 또, 忠淸水使(충청수사) 姜晉昕(강진흔)을 歸養(귀양)보내고 張紳(장신)은 自決(자결)하게 하였다. 그러나, 金慶徵(김경징)을 賜死(사사)하라는 여론이 들끓자 그제서야 仁祖(인조)는 金慶徵(김경징)에게 賜藥(사약)을 내렸다. 또, 忠淸(충청)水軍(수군)들과 將帥(장수)들이 哀痛(애통)하게 姜晉昕(강진흔)의 억울함을 呼訴(호소)하였음에도 仁祖(인조)는 姜晉昕(강진흔)에게 江華府(강화부) 戰鬪(전투) 敗北(패배)의 責任(책임)을 물어 斬刑(참형)한 뒤 梟首(효수)하였다.
勤王兵(근왕병:임금이나 王室(왕실)에 忠誠(충성)을 다 바치는 軍人(군인)의 集結(집결).
數萬名(수만명)의 勤王兵(근왕병)이 모여들지만 淸軍(청군)이 두려워 제대로 進擊(진격)하지 못한다. 忠淸道(충청도)의 勤王兵(근왕병) 7,000名(명)은 이미 淸軍(청군)에게 擊破當(격파당)하고, 다른 鳥銃(조총)으로 武裝(무장)한 精銳軍(정예군)들도 躊躇(주저)하면서, 南漢山城(남한산성)의 救援(구원)에는 失敗(실패)한다.
淸軍(청군)은 猛烈(맹렬)한 氣勢(기세)로 南漢山城(남한산성)을 攻擊(공격)하지만, 14,000名(명)의 朝鮮(조선) 守備軍(수비군)은 잘 守備(수비)하여 낸다. 長湍防禦使(장단방어사) 李曙(이서)의 主導(주도)로, 小規模(소규모) 特攻隊(특공대)가 淸軍(청군) 數百名(수백명)을 射殺(사살)하는 戰果(전과)를 올린다. 하지만 淸軍(청군)의 埋伏(매복)으로 300名(명)이 戰死(전사)하자, 朝鮮軍(조선군)의 士氣(사기)는 떨어진다. 이들은 各種(각종) 火砲(화포)와 鳥銃(조총)을 保有(보유)하고 있었지만, 物資(물자)不足(부족)으로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孤立(고립)당한다.
金俊龍(김준룡) 將軍(장군)이 이끄는 3,700名(명)의 義兵(의병)과 官軍(관군)은 光敎山(광교산)으로 모여든다. 처음에는 大規模(대규모) 騎兵隊(기병대)에 밀리지만, 金俊龍(김준룡) 將軍(장군)의 奮戰(분전)으로, 砲手(포수)들이 一齊(일제)射擊(사격)을 始作(시작)하여, 淸軍(청군) 數千名(수천명)을 죽인다. 마지막, 撒水(살수)의 突擊(돌격)으로 淸軍(청군) 多數(다수)를 射殺(사살)하고, 朝鮮軍(조선군)은 光敎山(광교산)을 死守(사수)한다. 이날, 淸太宗(청태종)의 사위와 淸(청) 將帥(장수) 2名(명), 그리고 淸軍(청군) 10,000餘名(여명)이 戰死(전사)했다고 한다.
平安監司(평안감사) 洪命耈(홍명구)와 平安兵馬使(평안병마사) 儒林(유림)은 5,000名(명)의 官軍(관군)을 이끌고 南漢山城(남한산성)을 救援(구원)하러 떠난다. 하지만 두 指揮官(지휘관)의 意見(의견)分裂(분열)로 朝鮮(조선)의 精銳軍(정예군)이던 5,000名(명)의 軍隊(군대)는 各各(각각) 2,000名(명)과 3,000名(명)으로 나뉘고, 平安監司(평안감사) 洪命耈(홍명구)는 官軍(관군) 2,000名(명)과 合流(합류)한 義兵(의병) 300名(명)을 이끌고 塔洞(탑동)에 陣(진)을 친다. 淸(청)의 軍隊(군대)를 만나 奮戰(분전)하지만, 平安監司(평안감사) 洪命耈(홍명구)와 順安縣令(순안현령) 許輅(허노)를 包含(포함)한 朝鮮軍(조선군) 1,000名(명)이 戰死(전사)한다.
平安兵馬使(평안병마사) 儒林(유림)이 이끄는 3,000名(명)의 朝鮮(조선) 官軍(관군)은 天惠(천혜)의 要地(요지)인 白銅(백동)에 陣(진)을 치고 淸軍(청군)을 기다린다. 그들이 保有(보유)한 優秀(우수)한 火器(화기)를 살려 山中(산중)에 陣(진)을 친 그들은 淸軍(청군)과 맞 싸운다. 하지만, 戰鬪(전투) 初盤(초반), 1,000名(명)의 塔洞(탑동)戰鬪(전투) 敗殘兵(패잔병)들이 몰려들며 朝鮮軍(조선군)의 陣營(진영)이 흐트러진다. 하지만, 將軍(장군)의 奮戰(분전)으로, 그들은 1線(선) 撒水(살수)의 進擊(진격)으로 始作(시작)하여 突擊(돌격)한다. 2線(선) 死守(사수)와 3線(선) 砲手(포수)의 一齊(일제)射擊(사격)은 威力的(위력적)이었다. 마지막까지 砲(포)와 鳥銃(조총)을 쏴대며 支援(지원)한 御營廳(어영청) 所屬(소속) 砲手(포수)들이 勝利(승리)를 이끌었다. 朝鮮軍(조선군)은 淸軍(청군) 數千名(수천명)을 戰死(전사)시키며 勝利(승리)를 거두고, 朝廷(조정)에 講和(강화)消息(소식)이 들려지자, 그들은 平壤(평양)으로 돌아간다.
飢饉(기근).
三田渡碑(삼전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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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승철~금 2021-06-18 오후 7:07 ~ 양선생님 좋은 자료 참으로 잘 봤습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