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겨울 당시 관광 유적지로 인기가 많아지던 부여군 능산리 고분
주차할 곳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근처에 주차장 확장 공사를 시작하기로 한다. 경주도 그렇지만, 부여도 백제의 수도로서 유적 도시이기 때문에 공사전에 매장 문화재 확인 조사를 해야 한다.
1차조사결과 딱히 고려할만한 매장문화재는 발견되지 않았다. 원칙대로라면 공사를 시작해도 된다.
그러나 유물발굴을 하던 조사단이 딱 한번만 더 조사하게 해달라고 간청하였고 당시 부여 군청 문화재 관리국 기념물과장이던 노태섭 과장은 그러라며 예산도 2천만원이나 더 배정하며 2차조사를 진행했다.
그렇게 발굴이 진행되던 12월 12일, 진흙탕속에서 물을 퍼내가며 작업을 하던중, 무언가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발굴단은 이 유물이 심상치않음을 느끼고 밤이 되었으나 전등을 켜놓고 4시간동안 발굴작업을 진행하여 유물을 꺼내 올렸다.
거기서 발견된 유물은 바로 중고등학교 역사시간에도 꼭 배우는 중요한 백제유물 '백제 금동대향로'였다.
발굴 당시 발굴단과 인부들이 모두 입이 떡 벌어져 쳐다봤다고 한다.
당시 발굴단 인터뷰
"온전하게 발굴해 들어내 놓고도 사실 감상할 엄두도 못 냈습니다. 뭔가 위대한 문화유산을 내 손으로 발굴해 냈다는 자부심보다도 작업을 마치고 고개를 들어 바라본 겨울 하늘, 총총한 별들. 가슴이 얼마나 벅찬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어요."
발굴당시 모습
원래 청동은 녹이 슬어야 하지만 물속에서 운이 좋게 진공 상태로 보존되어 그 모습을 온전히 갖추고 1,300년 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전체높이 61cm로, 중국에서 흔히 발굴된 대향로는 20cm인것과 비교해 엄청난 크기이다.
금동대향로 디지털 복원도
또한 대향로에 하나하나 새겨진 연꽃, 말타는사람, 신선, 호랑이, 사자, 거북이, 원숭이는 그 세밀함이 매우 뛰어났다.
이 발굴은 한국 고고학계를 발칵 뒤집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도 대서특필하며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이름 그대로 향을 피우는 향로인데, 향을 피우면 작은 구멍 사이사이에 연기가 올라와 그 모습이 장관이라고 한다.
또한 2002년에 일본과 문화교류 전시전을 할때 학자들이 조선의 왕인 영조의 어진과 함께 해외반출을 금지하자고 주장하여 전시를 못하자 일본이 엄청 아쉬워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