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시작입니다.1,1-10
1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가 된 바오로가
에페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사는 신자들에게 인사합니다.
2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4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5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6 그리하여 사랑하시는 아드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풍성한 은총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8 하느님께서는 이 은총을 우리에게 넘치도록 베푸셨습니다.
당신의 지혜와 통찰력을 다하시어,
9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세우신 당신 선의에 따라
우리에게 당신 뜻의 신비를 알려 주셨습니다.
10 그것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아벨의 피부터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예언자들의 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47-54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47 “너희는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
48 이렇게 너희 조상들은 예언자들을 죽이고
너희는 그들의 무덤을 만들고 있으니,
조상들이 저지른 소행을 너희가 증언하고 또 동조하는 것이다.
49 그래서 하느님의 지혜도,
‘내가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낼 터인데,
그들은 이들 가운데에서 더러는 죽이고
더러는 박해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50 그러니 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다.
51 아벨의 피부터, 제단과 성소 사이에서 죽어 간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52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53 예수님께서 그 집을 나오시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독한 앙심을 품고
많은 질문으로 그분을 몰아대기 시작하였다.
54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그분을 옭아매려고 노렸던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인생(人生)은 무엇일까요? 고인이 되신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님은 강의 중에 ‘하숙생’을 불렀습니다. 하숙생의 가사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말자 미련일랑 두지말자/ 인생은 나그네 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흘러서간다/ 인생은 벌거숭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가/ 강물이 흘러가듯 여울져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말자 미련일랑 두지말자/ 인생은 벌거숭이/ 강물이 흘러가듯/ 소리 없이 흘러서 간다’ 노래의 가사에 심오한 뜻이 있습니다.
나그네는 짐을 많이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나그네는 욕심을 낼 필요가 없습니다. 곧 떠나기 때문입니다. 나그네는 헤어짐에 슬퍼할 필요도 없고, 의견이 다르다고 화낼 필요도 없습니다. 어차피 곧 떠나기 때문입니다. 나그네는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피곤한 몸을 의탁할 쉼터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나그네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 수 있다면 마음을 비우고 겸손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도 인생에 관한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대구로 가는 기차에서 이런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삶은 계란 있어요.’ 인생은 계란과 비슷한 점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계란은 둥글게 생겼습니다. ‘둥글게 둥글게’라는 동요가 있듯이 인생은 둥글게 사는 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남의 눈에 있는 작은 티를 보기 전에 먼저 자기 눈에 있는 들보를 보라고 하셨습니다. 욱하는 성질 때문에 큰일을 망치는 경우를 봅니다.
조금만 참고, 조금만 기다리고, 조금만 양보하면 오해는 이해로 바뀌고, 원망은 용서로 바뀌기 마련입니다. 계란은 깨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소중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을 닮은 소중한 존재입니다. 하느님 앞에 자유인도, 노예도, 유대인도, 그리스인도 모두 하나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길가의 돌로도 아브라함에게 하신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소중한 생명을 귀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계란은 노른자가 있습니다. 인생에 노른자는 성공, 명예, 권력이 아닙니다. 인생의 노른자는 믿음, 희망, 사랑입니다.
오늘 독서는 바오로 사도가 에페소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의 시작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는 다 계획이 있으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계획을 따르고, 그리스도 예수를 믿으면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로봇으로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계획에 따르는 것도, 하느님의 계획을 따르지 않는 것도 우리의 선택에 맡겨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계획을 따르지 않고, 남도 따르지 못하게 막아버리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야단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파와 율법 학자들의 위선과 가식을 말씀하십니다. 겉은 화려하지만 내면은 비어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생명의 양식으로 삼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렇게 행동합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들은 독한 앙심을 품고 많은 질문으로 그분을 몰아대기 시작하였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그분을 옭아매려고 노렸다.” 시기와 질투가 가득한 사람은 본인도 진리를 보지 못하지만, 남들도 진리를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