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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I Love Soccer (축구동영상) 원문보기 글쓴이: 쌈영
출처 : 네이트 스포츠
원문 : 김현회 | 최강희 감독이 K리그의 전설인 이유
내 기억 속의 전북은 그리 강한 팀이 아니었다. 1994년 창단한 전북 버팔로는 가난한 구단의 아이콘이었다. 전북 버팔로 살리기 모금 운동에 직접 1천 원을 보냈던 기억도 있다. 창단 과정에서부터 진통을 겪었던 전북 버팔로는 결국 한 시즌도 제대로 마치지도 못하고 프로축구연맹에 의해 위탁 운영되는 신세가 됐다. 결국 같은 해 11월 전북 다이노스로 재탄생했지만 이때의 전북도 강팀은 아니었다. 가끔 한 번씩 사고 치는(?) 중위권 구단이었다.
전북이 서서히 강팀으로 자리 잡은 건 조윤환 감독 시절이었다. 2001년 전북 사령탑에 오른 조윤환 감독은 김도훈과 최진철, 마그노, 에드밀손, 보띠 등을 앞세워 K리그에서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하지만 전북은 기복이 심한 팀이었다. 2005년 시즌을 앞두고 의존도가 높았던 에드밀손과 마그노, 보띠 등 외국인 선수 중 보띠를 제외하고는 모두 팀을 떠나 공격력이 무척 약해졌다. 전북이 키우고 있던 남궁도를 권집과 트레이드 하는 과정에서 팬들의 불만도 커져갔다. 결국 조윤환 감독은 2005년 6월 전북이 13개 팀 중 12위까지 떨어지자 성적 부진에 책임을 지고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선수 시절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 나선 최강희 감독(밑에 줄 맨 오른쪽)의 모습.
(사진=연합뉴스)
전북에 입성한 ‘초보 감독’ 최강희
전북으로서는 위기였다. 이제 막 K리그에서 강호로 이름을 날리려던 중요한 순간에 부진한 성적으로 감독이 떠났으니 걱정이 컸다. 많은 이들은 외국인 감독을 원했고 당시 한국 축구의 흐름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전북의 선택은 의외였다. 이때까지 단 한 번도 감독을 해 본 적이 없는 최강희 국가대표팀 코치를 사령탑에 앉힌 것이다. 그는 1995년부터 수원삼성의 트레이너와 코치를 거쳐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대표팀 코치 등을 역임했지만 감독 경험은 일천했다. 모두 전북의 선택에 의아하다는 반응이었다.
마흔 여섯 살로 당시 K리그 무대에서는 무척 젊은 감독에 속했던 최강희 감독은 팀 상황을 확인하고 큰 고민에 빠졌다. 프로팀이라고는 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기 때문이다. 몇몇 선수들은 다른 팀으로 보내달라고 졸랐고 선수들은 학연과 지연, 주류와 비주류로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구단 내부에서 불평불만은 넘쳤고 몸 관리를 해야 할 선수들은 중국 음식을 배달시켜 먹을 정도로 난장판이었다. 감독으로서의 경험이 없었던 최강희 감독은 “곪아 있는 팀을 보고 정말 혼자 고민 많이 했다. 답이 없었다. 현재도 없고 미래도 없었다”고 했다.
하위권을 전전하고 있는 성적으로 가뜩이나 예민했던 팬들도 외국인 감독을 기대하다 최강희 감독이 지휘봉을 잡자 그리 반기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 같은 우려는 곧바로 현실이 되는 듯했다. 최강희 감독이 사령탑에 앉은 뒤 내리 3연패했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감독 경험이 없으니 저 모양이다”, “능력도 없는 놈이 감독으로 왔다”고 불만을 쏟아냈다. 최강희 감독은 이후 당시 상황을 이렇게 떠올렸다. “망망대해에 나 혼자 뗏목타고 서 있는 심정이었다. 아무도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부임 5개월 만에 FA컵을 들어 올렸다. FA컵 8강전에서 당시까지 5년 동안 단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는 수원을 격파하는 등 파죽지세를 이어간 전북은 결승전에서 ‘아마추어 돌풍’을 일으킨 울산현대미포조선을 1-0으로 제압하고 감격적인 FA컵 우승 트로피에 입을 맞췄다. 팀 내에서 뿔뿔이 흩어져 있던 선수단을 하나로 모았고 훈련 시스템도 체계적으로 갖춰 이뤄낸 성과였다. 매번 앞서는 경기를 하다가도 후반 들어 집중력 부족으로 패했던 전북은 패배 의식을 걷어내고 새로운 팀으로 변모했다. 우승 소감을 묻자 최강희 감독은 이런 말을 남겼다. “내년 아시아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하고 싶다.”
최강희 감독은 부임 5개월 만에 2005년 FA컵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전북의 우승 행진을
시작했다. (사진=연합뉴스)
역사적인 챔피언스리그 우승
모두가 또 한 번 놀랐다. 챔피언스리그로 개편된 후 K리그 구단이 당시까지 대회에서 우승을 한 경험도 없을뿐더러 전북현대는 구단주인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이 구속된 상황이라 대회 출전 자체를 고민할 정도로 분위기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강희 감독은 없는 살림에도 머리를 쥐어짜 선수 보강을 마쳤다. 울산에서 이천수와 최성국 등이 밀려 기회를 부여받지 못하고 부상까지 당해 벤치 신세를 졌던 김형범을 데려왔고 호남대학교를 갓 졸업한 염기훈도 영입했다. 울산에서 이기적인 플레이로 퇴출됐던 카르로스도 제칼로라는 새 이름으로 전북에 합류했다.
최강희 감독은 있는 선수들을 최대한 활용해 챔피언스리그에서 연이어 믿기지 않는 역전승을 거두며 ‘전북 극장’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냈다. 8강에서 상하이 선화와의 1차전에서 0-1로 패했던 전북은 2차전에서 4-2 완승을 거두고 극적으로 4강에 진출했고 4강에서도 울산과의 1차전에서 2-3으로 패했지만 2차전에서 4-1 대승을 올리며 거짓말처럼 결승에 올랐다. 안방에서 열린 시리아 알 카라마와의 결승 1차전에서 2-0으로 이겨 유리한 고지를 점령했던 전북은 원정 2차전에서 0-2로 끌려가며 경기를 어렵게 풀어갔지만 경기 종료 직전 제칼로가 극적인 골을 뽑아내 1,2차전 합계 3-2로 감격적인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다.
부상으로 신음하며 제대로 그라운드에 서지 못했던 김형범과 교통사고로 시즌 중반 이탈했다가 극적으로 합류한 염기훈, 최강희 감독의 조련으로 순한 양이 된 제칼로 등은 전북의 아시아 정복에 일등공신이었다. 1년 전 FA컵 우승 당시의 약속을 지킨 순간이었다. 모두가 최강희 감독을 비웃었지만 그는 보란 듯이 실력으로 보여줬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직 전북 역사에 K리그 우승은 단 한 차례도 없다. 앞으로는 K리그에서 우승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전북은 2006년 아시아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하며 아시아 최강팀으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사진=연합뉴스)
‘재활공장’과 판타스틱4
현대자동차를 배경으로 두고 있는 전북이지만 이들은 서울이나 수원처럼 막대한 자금을 쓸 형편은 아니다. 최강희 감독은 실력은 충분하지만 자신감이 떨어져 있거나 좀처럼 출장 기회를 잡지 못하는 선수들을 대거 전북으로 불러 들였다. 포항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던 최태욱을 저렴한 가격으로 영입했고 J리그에서 부진했던 조재진도 데려왔다. 이전까지 인지도가 높은 선수를 영입하지 못했던 전북은 이들의 영입으로 흥행에서도 대박을 치기 시작했다. 최강희 감독은 수원에서 잠시 뛰었던 루이스도 브라질로 복귀하자 불러들여 2008년 전북 축구 역사상 최초로 6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리고 2009년, 성남에서 이동국과 김상식을 영입했다. 이동국은 프리미어리그에서 복귀한 뒤 성남으로 이적해 별다른 활약을 펼치지 못했었고 김상식 역시 나이가 많아 구단에서 정리된 신세였다. 조재진을 감바오사카로 보내며 얻은 이적료로 대구에서 진경선과 하대성, 에닝요도 수혈했다. 앞으로도 K리그의 역사에 기억될 전북의 ‘판타스틱4’는 이렇게 완성됐다. 전북은 2009년 최강희 감독의 공언대로 처음으로 K리그 챔피언에 등극했다. 전북은 그 누구도 꺾을 수 없는 K리그 최강팀의 자리에 올라섰다. 이제 전북은 대부분 시즌에서 4개 대회 모두 우승을 노릴 정도로 욕심 많은 팀이 됐다.
선수들과 구단의 노력도 당연히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전북이 지금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최강희 감독의 공은 엄청나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패배 의식에 젖어있던 팀을 K리그와 아시아 무대의 정상권 팀으로 올려놓은 건 분명히 최강희 감독의 능력이다. 그는 한 번씩 실패를 맛본 선수들을 불러와 최고의 팀을 만들었다. 이동국의 부활까지 이끌어낸 그는 최근에는 서울에서 2군을 전전하던 공격수 심우연을 영입해 훌륭한 중앙 수비수로 탈바꿈시켰다. 심우연은 지난 시즌 K리그 라운드별 MVP 최다 수상자가 됐다.
최강희 감독은 2009년 정규리그 최종 라운드에서 승리를 거두고 1위를 확정 지은 후
양복 안에 입고 있던 유니폼을 공개했다.
그 유니폼에는 ‘김형범’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마이너 블로그(http://hungryan.tistory.com)
재미와 감동을 주는 감독
최강희 감독은 선수들의 심리를 너무도 잘 읽는다. 선수들의 마음을 흔들어 가진 실력 이상을 뽑아내는 재주가 있다. 이동국을 영입할 때는 “이동국은 무조건 부활한다”고 장담했다. 기자가 “이동국이 어떤 점을 고쳐야 하느냐”고 묻자 최강희 감독은 이렇게 답했다. “고칠 점이 없다. 우리 미드필드에는 훌륭한 선수가 많다. 그냥 이동국은 골문 앞에서 골만 넣으면 된다. 이동국의 능력을 의심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자신감이 떨어져 있던 이동국은 최강희 감독의 신뢰를 얻고 화려하게 부활했다. 조재진은 2008년 입단 기자회견에서 “최강희 감독 때문에 전북을 선택했다”고 밝혔다.
그는 팬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할 줄 아는 감독이다. 타고난 입담으로 팬들에게도 즐길거리를 충분히 제공한다. 2009 시즌이 끝난 뒤 K리그 대상 시상식에서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한 그는 “한마디는 꼭 해야할 것 같다. 포항 관계자들께는 죄송한데 파리아스 감독님께도 감사를 드린다. 왜냐하면 적절한 시기에 떠나주셨기 때문”이라고 밝혀 시상식장을 폭소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올 시즌을 앞두고 치른 K리그 개막 기자회견에서는 전남 정해성 감독에게 이런 질문을 하기도 했다. “지동원이 정말 부상이 맞나. 감독님 표정이 너무 밝아 언론에 흘린 것 아닌가 생각된다.” ‘재활공장장’이라는 별명에 대해서는 “팀에서 비싼 선수들을 안 사주니까 자연스럽게 재활공장장이 된 것”이라고 받아쳤다.
또한 감동도 선물할 줄 아는 감독이다. 2009년 정규리그 최종전에서 승리를 따내고 1위를 확정지은 뒤 최강희 감독은 서포터스석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주섬주섬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그리고 최강희 감독이 뒤를 돌자 모두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입은 유니폼 뒤에는 선명한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김형범’이라는 세 글자였다. 최강희 감독은 부상으로 시즌을 마감한 김형범의 유니폼을 양복 안에 입고 90분 내내 경기를 지휘한 것이었다. 그는 “(김)형범이도 우리와 함께 뛰는 선수라는 점을 각인시키고 싶어 그랬다”고 김형범 유니폼을 양복 속에 입은 이유를 털어놨다.
최강희 감독의 위대한 발걸음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가 만드는 역사는 현재진행형이다. (사진=연합뉴스)
대표팀도 마다한 봉동이장
최강희 감독은 올해로 7년째 전북의 지휘봉을 잡고 있다. 파리 목숨이나 다름없는 감독이라는 직업 특성상 무척 이례적인 일이다. 특히나 최강희 감독은 출신 학교가 진로를 보장하는 시대에 대학 문턱도 밟아보지 못한 고졸 출신이다. 선수의 마음을 움직이고 실패를 맛본 이들의 부활을 돕고 팬들을 감동시키고 유쾌한 입담으로 즐거움을 선사하고 숙원 사업이던 클럽하우스 준공까지 이뤄내고 아시아 정상까지 밟은 최강희 감독은 한 팀의 역사를 바꾼 위대한 감독이다. 그가 있어 K리그가 더 즐겁다.
마지막으로 2008년 당시 부진한 성적으로 팬들의 비난을 듣던 그가 구단 홈페이지에 남긴 글을 소개하려고 한다. 국가대표 감독까지 마다한 ‘봉동이장’ 최강희 감독의 진심이 담긴 글이다. “저 감독으로 많이 부족한 놈입니다. 젊었을 때 형편없는 놈이었는데 우찌우찌 하다 보니 이 자리까지 왔네요. 제가 마술은 못 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전북에 와서 하루라도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면 저 욕 먹어 마땅합니다. 코치들과 좋은 선수 영입하면 봉송 숙소 앞 호프집에서 행복해했습니다. 가장 슬픈 기억이 ‘너희들은 어차피 떠날 인간들이고 우린 남아서 전북을 지켜야 하니까’였습니다. 이건 뭥미! 저는 전북을 지키면 안 되는 겁니까. 저는 영원히 전북 감독을 하면 안 되는 겁니까. 저도 이젠 봉동 표지판만 봐도 행복해하는 그런 전북 사람이 됐습니다.”
첫댓글 완전 최고! ㅋ
이장님 하악
좋아하는 감독님
이장님?
넘 좋아요 ㅎㅎ
사랑해요
최고 ㅋㅋ
하앜하앜
진짜 최고!
남궁도 트레이드는 탁월한 선택
팀의 역사를 만들고 계심..
감독님 사랑합니다 ㅠ,ㅜ
감독님은 정말 최고 !
강희대제 ㅠㅠ K리그 미남감독 1위!!
말이필요없는 이장님 ㅜ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