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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일제시대 이공계
인터넷 서점 신간 소개 코너에서
제목이 독특해서 책 소개를 읽어보고,
결국은 읽게 된 <조선이 만난 아인슈타인>이 오늘 너희들에게 이야기할 책이란다.
조선과 아인슈타인이 어울리지 않아서 책제목에 끌렸나 봐.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 이론을 발표했던 1905년,
일반상대성 이론을 발표했던 1916년
우리나라는 일제의 침략으로 고생하던 시기였으니
나라밖 소식, 특히 과학에 대한 소식은 더욱 신경 쓸 시간이 없었던 때라고 생각했거든.
일제 시대를 다룬 책들은
주로 독립 운동과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이야기와
당시 출간된 문학작품들이 대부분이었어.
그 당시의 우리나라의 과학을 다룬 책들은 본 적이 없는 것 같구나.
<조선이 만난 아인슈타인>은
구한말과 일제 시대의 이공계를 전공한 이들에 관한 이야기란다.
나라가 어려웠던 시기였지만,
과학에 대한 열의를 가진 사람이 없었을라구..
어떤 이는 과학이 발전해야 나라가 힘을 갖게 되고,
그래서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이들도 있었을 거야.
그 어느 때보다 과학을 공부하기 힘든 그 시절,
과학에 대해 누구보다 열의를 다했던 이들의 이야기가 이 책에 담겨 있단다.
지은이는 민태기라는 분인데,
누리호와 차세대 발사체 엔진 개발에 참여하고 있는 분이라고 하더구나.
순도 100% 이공계 분인데, 글도 참 재미있게 잘 쓰시더구나.
지은이 소개를 읽어 보니
아빠가 예전부터 읽으려고 리스트에 포함되어 있는 책 <판타레이>도 이 분이 쓰신 거더구나.
<판타레이>는 제목만 알고 있었거든..
이 책도 조만간 읽어봐야겠구나.
이 책에는 당시 신문, 잡지 등에 실렸던 내용들도 포함되어 있는데
재미있는 내용들도 많이 있더구나.
새롭게 알게 된 내용도 많고…
아빠가 최근에 가끔씩 읽고 있는 <한국 근대사 산책> 시리즈와
시대적 배경이 비슷하여 그 책에 나온 사람들도 많이 나오더구나.
1. 서재필의 자전거
우리나라에서 자전거를 처음 탄 사람은 누구일까?
독립신문으로 유명한 서재필이라고 하는구나.
갑신정변이 삼일천하로 미국으로 망명을 가고
그곳에 의학을 전공했다는 구나.
안타까운 일은 미국 망명을 갈 때 식구를 남겨두고 혼자 갔는데
그의 아내는 갑신정변 실패 이후 자살을 했다고 하는구나.
미국에서 생활하던 서재필은 미국인 뮤리엘을 만나 결혼하게 되었고,
그들은 1895년 함께 귀국을 했대.
그런데 그때 미국에서 타던 자전거를 가지고 귀국을 했어.
그 자전거가 우리나라의 첫 번째 자전거라고 하는구나.
서재필이 자전거를 타는 것을 본 윤치호도 타고 싶어서 미국에 자전거를 주문하여
둘이 함께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고 하는구나.
윤치호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해외직구를 한 사람인가? ㅎㅎ
귀국한 서재필은 <한국 근대사 산책>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독립신문을 출간하고 독립협회를 결정해서 활동을 했어.
독립신문에서 한글 띄어쓰기를 처음으로 시도했고…(이것도 전에 이야기해주었지?)
한글의 우수성을 논설로 신문에 실었대.
이 책에서는 당시 신문 기사를 그대로 실어주었는데,
옛말을 읽으면서 무슨 뜻인가 알아보는 재미도 있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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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3)
이처럼 <독립신문>은 가독성을 위해 한글 띄어쓰기를 채택했고, 이후 띄어쓰기가 대중화되고 정착되었다. 논설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각국에셔난 사람들이 남녀 무론하고 본국 국문을 몬저 배화능통한 후에야 외국 글을 배오난 법인데, 죠션셔난 죠션 국문은 아니 배오드래도 한문만 공부하는 까닭에 국문을 잘 아는 사람이 드물미라. 죠션 국문하고 한문하고 비교하여 보면 죠션 국문이 한문보다 얼마가 나흔 거시 무어신고 하니 첫재난 배호기가 쉰이 됴흔 글이요, 둘재난 이 글이 죠션글이니 죠션 인민들이 알어셔 백사을 한문 대신 국문으로 써야 샹하 귀쳔이 모도 보고 알아보기가 쉬흘 터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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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참, 자전거를 처음 탄 우리나라 사람은 서재필이면,
자동차를 처음 탄 우리나라 사람은 누구일까?
그 사람은 바로 동학의 3대 교주인 손병희였다구나.
이런 재미있는 상식을 알게 되는 깨알재미가 있구나.
…
서재필은 1898년 일제의 통제가 심해지면서 다시 미국으로 망명을 가서
미국에서 줄곧 생활한단다.
독립운동에서도 참여하시면 미국에서 해방 소식을 듣게 되었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하지만 이제 조선이 둘로 나뉘어진다는 소식을 접했어.
1949년 삼일절 경축사를 직접 남겼는데,
조선이 둘로 나뉘어지는 것을 가슴 아파하는 내용이 담겼고,
그 글을 읽어보면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르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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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249)
타향에서 고국의 소식을 접하던 그는 자신의 심정을 1949년 3.1절 경축사에 육성으로 남겼다. 3.1운동은 그의 인생을 결정지은 사건이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이건 서재필이기 미국에서 말하는 것이오. 나는 미국에 돌아온 뒤에 신체가 좀 강해지고, 시방 건강이 매우 좋지만은 아직도 언제 조선에 갈런지는 모르겠소이다. 내가 가든지 안 가든지 다만 부탁하는 말은 아무쪼록 조선 살게들 하시오. 합하면 조선이 살 테고, 만일 나뉘면 조선이 없어질 것이오. 조선이 없으면 남방 사람도 없어지는 것이고, 북방 사람도 없어지는 것이니 죽을 일을 할 도리가 있습니까? 살 도리를 하시오. (…)
한 집안으로 4000년을 살았는데 왜 지금 나뉘어서 두 집안이 될 까닭이 있습니까? 둘이 되면 둘이 다 약해지고 살 수가 없을 터이니, 한 배 속에 든 것과 같아서 한쪽 배가 무너지면 저쪽도 망해지는 법이오. 나는 설령 미국에 있더라도 내 정신은 조선 사람과 같이 있으니 아무쪼록 합심하고 합동해서 조선을 살게 해주시기를 나는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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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
우리나라에 아인슈타인을 처음 소개한 것은
<공우>라는 잡지였어.
<공우>는 경성공업전문학교 졸업생들 모임인 ‘공우구락부’가 발간한 잡지라고 하는구나.
이후 여러 언론에서 아인슈타인을 소개했는데,
동아일보에서는 독일로 유학 간 황진남이
여러 차례에 걸쳐 상대성이론을 소개해 주었단다.
그 중에 아인슈타인을 소개하는 도입부가 재미있어 발췌해 본다.
당시 쓰던 옛말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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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88)
베를린 유학생 황진남이 상대성이론 특집 기사는 아인슈타인이라는 인물에 대한 자세한 소개로 이어진다. 도입부가 재미있다.
“소개함니다. 물리학에서 연구하시는 아인스타인양임니다. 우리 시대 위인인 아인스타인의 사촌 누이라 하는 한 여학생이 내게 말함은 오 년 전 스위스 쭈리히(취리히) 대학에서 공부할 때다. “당신은 물론 아인스타인이 누구인지 아시오”하고 뭇난 데 대하야 아모 형편도 모르는 나는 부정사로 답하얏다. 긔가 막히여 우스면서 “이 불상한 냥반아! 용서하시오”(…)
아인스타인의 존재 여부도 모르든 나는 이 여학생의 비소를 감수하얏다.
이후로는 아인스타인과 상대성에 대한 해석적 서류도 읽어보고 또 그의 저서도 연구하야 보앗스나 (…) 책장을 넹길 때마다 츨라톤(플라톤)의 아카데미 문 앞에 설린 ‘수학에 불통하는 자에게는 허입을 금함’이라는 구절을 기억치 아니치 못하얏다. 아인스타인씨 자신도 말하기를 상대론의 진의를 이해하는 이가 현재 차세에 5인 이외에 없다 하얏다는 풍설이 잇다. 고등 수학에 정통히 못하고는 상대론의 진미를 모르고 상대론을 이해치 못하면 아인스타인 숭배도 허위라 하겟다. (…) 그런대 유태인 배척이 이러케 심한 독일이 그를 위하야 특별히 천문대를 창건한 것을 보든지, 독일을 그러케 배척하든 영국과 전국 각 학교에 독일어 교수를 금지하든 미국이 그를 초청하는 것을 보면, 심지어 독일 것이라면 열성으로 증오하는 프랑스까지 그를 초청하야 후대하는 것을 보면 그 과학적 공적이 위대함을 추상할 수 잇다. 그런데 그가 우리 동아시아에 여행하려 출발하얏다는 소식을 듣고(우리 학계에 기와 누차 명석하게 소개되얏슬 듯하다) 상대론의 원리를 소개코자 하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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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인슈타인이 일본을 방문했다는 사실도 아빠는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단다.
일본은 세계 석학들을 초대하는 이벤트를 하고 있었는데,
그때 아인슈타인을 초대했다고 하는구나.
그때가 1922년인데 아인슈타인이 아직 노벨상을 수상하기 전이래.
독일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가고 있었는데,
그 배 안에서 아인슈타인이 노벨상 수상자로 확정되었다고 하는구나.
일본에서는 그냥 과학자가 아니고,
노벨상 수상자가 온다고 난리가 났었다고 하는데…
향후 2차 세계대전에 유태인들은 학살하고 아인슈타인도 미국으로 쫓겨난 아인슈타인이
그 일본이 독일과 한편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까?
또는 당시 일본이 조선이라는 약소국을 무단 침략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일고도 방문했다면 좀 실망스럽구나.
일본에 유학 중인 조선 유학생들은 아인슈타인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나라에도 방문할 수 있도록 추진했지만 실패했다는구나.
…
당시 우리나라는 신문에 아인슈타인과 상대성 이론을 소개한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어.
1923년에는 일본 유학생들인 최윤식, 김영식, 현위건은 전국을 순회하면서
상대성 이론에 대한 강연을 했다고 하더구나.
그리고 반응도 뜨거웠대.
….
양자역학은 최규남이라는 물리학자가 소개해 주었다고 하는구나.
최규남은 학창 시절에는
야구선수로도 활약을 해서 신문에 날 정도로 유명했대.
연희전문학교를 야구 우승으로 이끈 주장이자 투수로 신문 기사에 났다는구나.
최규남은 후에 미국 유학을 가서 물리학박사가 되었어.
그런데 그의 러브스토리는 영화와 같더구나.
미국에서 유학중인 최규남은 신문을 통해서 조국의 소식을 접했는데,
신문에 실린 이화여대 교수이자 성악가인 채선엽의 기사를 읽게 되었어.
그리고 바로 채선엽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하는구나.
그렇게 둘의 연애는 시작되었고,
채선엽 부모님의 반대도 있었지만 채선엽의 오빠 등 주변에서
도와주어 결혼에 골인했다고 하는구나.
그런 채규남은 조선일보를 통해 양자역학을 소개하였다고 했어.
우리나라 과학자들도 현대 물리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있던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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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162)
1936년 2월 8일부터 15일까지 최규남은 ‘신흥 물리학의 추향’이라는 6편의 시리즈를 <조선일보>에 기고하면서 양자역학의 최신 동향을 소개한다. 그의 시각은 시리즈의 첫 문장에 잘 드러난다.
“최근 이십 년간의 물리학 발전은 실노 녯것을 보내고 새것을 맛기에 무가지감이 잇다. 나날이 발전되는 신이론은 또다시 신이론 출현의 동인이 되여 물리학사상에 보기 드문 위관을 정하게 되엿다. 일즉이 전 세계 과학에 일대 혁명적 센세이슌을 일으킨 아인스타인의 상대성이론도 어언간에 고전물리학으로 귀결되엿고 현대물리학계에 가장 새로운 이론은 “뿌라크리(드 브로이)’, ‘쉬레덴가(슈뢰딩거)’, ‘하이센벨크{아이젠베르크}’, ‘드랙(디랙)’, ‘풀랑크(플랑크)’, 여려 사람의 파동역학, 양자역학 및 양자론 등이라고 하겟다. (…) 인간의 사상사가 생긴 이래 철칙으로 미더오는 인과율도 조상지육이 되엿고 따라서 자연과학의 기초적 개념에까지 동요를 주게 되엿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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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과학자 중에 양자역학에 있어
공을 세운 사람 중에는 이태규라는 분도 있단다.
1922년 일본에서 유학을 했는데,
전공은 수학과 화학이었어.
이후에 화학에 양자역학을 도입하여 양자화학이라는 분야에서
세계에서 알아주는 석학이 되셨다고 하는구나.
해당후 1955년은 리-아이링 이론을 발표하면서,
우리나라 첫 노벨상 후보까지 되셨다고 하는구나.
음, 이런 과학자들이 있었구나.
…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깊이 관여했던 초창기 친일파 우범선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이 그 유명한 우장춘 박사란다.
우리나라 유전학계에 있어 엄청 유명한 사람이고,
그를 씨없는 수박을 개발한 사람으로 알고 있는데,
그것은 잘못 알려졌다고 하는구나.
씨 없는 수박을 소개한 것이래.
그렇다고 그의 업적이 적은 것은 아니야.
온갖 종자 개발을 통해 우리나라 식량 증진에 도움을 주었다고 하는구나.
그런데 우장춘 박사는 친일파의 아버지와 다른 길을 걸었다고 했어.
우장춘 박사의 어머니는 일본 사람으로
계속 일본에서 지내도 문제가 없었으나,
해방 후 1950년에 귀국하였다고 하는구나.
우장춘 박사가 이미 일본에서도 유명한 학자였기에
보내주지 않으려고 여러 방법을 썼으나,
우장춘 박사는 편법까지 써서 우리나라에 귀국을 했다는구나.
그리고 농업과 유전학 연구를 계속하셨다고 했어.
3. 재미있는 상식들
이 책에서는 몰랐던 재미있고 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있었다고 했잖아.
베트남의 영웅 호치민이 우리나라와 깊은 인연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어.
그런데 그것을 알려주는 지은이 민태기 님의 방식도 좋았어.
어떤 베트남 청년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짜짠, 그가 호치민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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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1919년 응우옌은 파이레 미리 도착해 활동 중인 한국 대표단의 도움을 받기 시작했다. 프랑스 당국은 응우옌이 한국 대표단과 매우 가깝게 지낸다며 심지어 응우옌과 한국인들의 대화 내용도 기록해두었다. 응우옌은 한국 대표단의 도움으로 세계 각국 언론과 인터뷰도 진행할 수 있었다. 당시 신문들은 이 한국 대표단이 ‘대한민국임시정부(Provisional Government of Republic of Korea)’에서 파견되었다고 기록한다. 나중에 응우옌이라는 이 베트남 젊은이는 이름을 ‘호치민(Ho Chi Minh)’으로 바꾸었고, 마침내 베트남을 독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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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 가면 인하대학교가 있단다.
지금은 종합대학교이지만, 오래 전에는 공과대학만 있어서
나이 드신 분들은 인하공대라고 부르는 분들도 계셔.
아빠가 학창시절도 인하대학교는 종합대학교였지만,
다른 학과보다 공학과를 더 인정해주는 듯한 느낌이었지.
그 이유가 있더구나.
인하대학교가 하와이 노동자들의 우리나라에도 MIT 공대 못지 않은 공대를 만들어달라며
기부한 돈으로 세운 학교가 바로 인하대학교였대.
인하의 ‘인’은 인천의 ‘인’이고, ‘하’는 ‘하와이’의 ‘하’라고 하는구나.
이번에 처음 알게 된 재미있는 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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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해방될 때까지 독립운동 자금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 것은 하와이 노동자들이 일당을 아껴서 모은 돈이었다. 그 총액은 1945년까지 300만 달러에 가까운 것으로 추산된다. 1954년, 이들은 미국의 MIT에 못지않은 공과대학을 설립해달라고 대한민국에 15만 달러를 기부했다. 1954년 대한민국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70달러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게 설립된 학교는 그들이 떠난 인천과 정착한 하와이의 첫 글자를 따서 ‘인하’대학교라고 이름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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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고
일제 시대에도 우리나라 과학자들은 계셨다는 것을,
어쩌면 당연했던 이야기를 새삼 알게 된 것 같구나.
그런 분들이 시대의 흐름을 잃지 않고
과학을 꾸준히 연구하셔서,
오늘날 과학 기술 분야에서 우리나라가 크게 성장을 한 것이 아닐까 싶구나.
그분들께 고마움을 느끼게 되는구나.
오늘은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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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3)
이처럼 우리 선조들은 무기력하지 않았다. 국제적으로 폭넓은 행보를 보이며 당대의 흐름과 같이했다. 과학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과학계의 가장 뜨거운 논쟁거리였던 상대성이론을 소개한 선구자가 있었고, 조선 전역을 돌며 순회강연을 했던 젊은이도 있었다. 그들은 무슨 생각으로 상대성이론을 알리는 데 그토록 열정적이었을까? 과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기에 다시는 과학에 뒤처지지 않겠다는 다짐한, 현식 극복의 역사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누구보다 뜨거운 시대를 살았으며, 그들이 소개한 과학으로 우리는 식민지에서 벗어나고, 전쟁의 잿더미에서 불과 몇십 년 만에 선진국 대열에 올라서는, 세계사에 유례없는 기적을 보여준 것이다. 이 책은 시대의 아픔과 비극을 과학으로 극복하려 했던 분들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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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책의 첫 문장: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한 장면,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서울 시내에 뿌려진 신문이다.
책의 끝 문장: 존재하는 것은 모두 선하다
책제목 : 조선이 만난 아인슈타인
지은이 : 민태기
펴낸곳 : 위즈덤하우스
페이지 : 316 page
책무게 : 465 g
펴낸날 : 2023년 08월 15일
책정가 : 18,500원
읽은날 : 2023.09.07~2023.09.10
글쓴날 : 2023.09.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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