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현지시간) 넷플릭스에 공개된 리미티드 시리즈 '어느 남자의 완전한 삶'(A man in full, 6부작) 2편 '결정적 한 방'을 보다가 기절초풍할 대화를 들었다. 60회 생일 잔치를 성대하게 치른 다음날 애틀랜타의 부동산 재벌 찰리 크로커(대니얼스)에게 8억 달러 대출과 이자까지 갚으라고 종용하던 플래너스 뱅크의 부동산 자산관리 부서장 해리 제일(빌 캠프)이 크로커를 더 효율적으로 옥죌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며 야근하는데 은행장이 찾아온다. 마침 제일은 시가를 태우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혼자 있는 줄 알았어요."
"레드 아워백을 따라 하는 건가?"
"우리 시대 최고의 지도자 둘을 꼽으라면 레드 아워백과 커티스 르메이죠."
"(르메이) 장군 말이군."
"한번은 르메이가 상원 위원회에 나타나서 핵탄두 1만기를 공군에 지원해 달라고 했어요. 그러자 상원의원이 물었죠. '지난번에는 핵탄두 6000기면 소련을 재로 만들 수 있다고 했으면서 왜 1만기가 필요하죠?' 그러자 르메이가 답했어요. '의원님, 전 재가 춤추는 걸 보고 싶습니다.'" 성공한 사업가 크로커를 짓밟으려면 아주 제대로 짓밟아야 한다고 전의를 불태운 것이다.
레드 아워백(1917~2006)은 미국프로농구(NBA) 보스턴 셀틱스의 전설적인 감독이다. 감독이자 프로모터, 스카우트를 겸비하며 보스턴 왕조를 일군 인물이다. 문제는 커티스 르메이(1906~1990), 미국 육군 항공대 장군을 역임하고 나중에 미국 공군 장군이 돼 냉전 시대 미국 공군의 기틀을 세웠다. 별명으로 철바지 노인(Old Iron Pants), 악마(The Demon), 빅 시가(Big Cigar), 석기시대 마니아 등이 있다. 맨 뒤의 별명은 "베트남을 폭격해서 석기시대로 돌려놔야 한다"는 유명한 발언에서 붙여졌다.
신경이 마비돼 굳어버린 오른쪽 얼굴을 가리려고 시가나 파이프 담배를 자주 물었는데 시가를 물고 있는 타임지 표지 사진으로 이미지가 굳어졌다. 비행기가 처음 하늘을 비행한 시대에 가난한 이민자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군에 입대, 이후 항공기 기술이 미국 전력의 한 축으로 자리잡는 데 상당한 공적을 세웠다. 전략 폭격의 중요성을 강조해 육군 항공대가 적의 군수시설 등을 파괴하는 데 앞장섰다. 폭탄을 급히 떨어뜨린 뒤 회피 기동하던 폭격기 조종사들의 대공포 공포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본인이 직접 선두기에 올라 편대를 지휘한 일로도 유명하다.
그는 평소에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 그것은 그쪽 정부와 함께 우리와 싸우는 민중들이고, 우리는 무장한 적군하고만 싸우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소위 죄 없는 방관자를 죽이는 것을 나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고 떠벌였다. 회고록에서 일본 공습의 정당성을 역설하며 "일본은 실제로 이렇게 돼 있다. 공장이 하나 있다. 인근의 가구들은 집에서 작은 부품을 제조한다. 그걸 가내수공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스즈키 네는 64호 볼트를 제조하고, 옆집의 하루노보 가족은 64호, 65호나 63호 너트 그리고 기타 잡동사니를 만든다. 이웃에서도 똑같은 걸 제조한다. 그러면 공장에서 나온 기타가와 씨가 손수레를 끌고 정해진 순서대로 부품을 가져간다"고 했다.
한국전쟁 때도 이와 비슷한 논리로 전쟁 초기 북한의 공업 지대, 남한의 민간인 마을들을 무차별 공격하는 데 앞장섰다. 무기 공장 옆에 김씨 공장, 박씨 공장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스스럼 없이 이런 망발을 남겼다. "우리는 인구의 20%를 죽였다. 우리는 한국의 북쪽에서도, 남쪽에서도 모든 도시를 불태웠다. 우리는 100만 이상의 민간인을 죽이고 수백만 이상을 집에서 내쫓았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 결과, 1951년 경북 예천군 보문면 신성동 폭격, 충북 단양, 경기강원 지역 폭격 등은 초토화 작전의 남한 지역 확산 과정을 여실히 보여준다. 전폭기 조종사들은 흰옷을 입은 사람들, 다시 말해 움직이는 모든 것들을 쏴버렸다고 술회하곤 했다.
김일성 회고록에서는 미군 폭격으로 73개 도시가 지도에서 사라지고 평양에서는 2층 이상의 건물은 2채만 남았다고 언급했다. 북한 인구 20%가 폭격으로 죽고 북한 22개 도시가 네이팜탄 공격을 받았는데 평양 75%가 파괴되고 흥남 시가지 85%, 원산 80%, 신의주 60%, 사리원 95%가 파괴됐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북한은 미국을 철저히 증오하고 전후 군사 시설이나 중요 시설을 재건할 때 폭격을 대비해 대부분 지하로 파고들었다. 지금도 북한은 B-52 등 미군 폭격기 훈련을 가장 두려워한다. 그 만큼 미군 폭격은 북한 전체에게 트라우마를 안겨준 것이다. '한국전쟁의 기원' 저자 브루스 커밍스도 북한과 미국의 군사 갈등에서 당시 트라우마가 북한에 많이 작용했다고 주장했다.
이런 르메이가 '우리 시대 최고의 지도자'라니, 해리 제일이 얼마나 비뚤어진 세계관과 철학을 가진 인물인가 여실히 보여준 대화다. 물론 크로커도 못지 않게 비뚤어진 부동산 재벌이다. 어쩔 수 없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자꾸 떠올리게 된다.
1998년 톰 울프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 이 시리즈는 크로커를 비롯해 미국 사회를 이끄는 주류 지도자들이 하나같이 커다란 위기를 겪고 있음을 신랄하게 꼬집는다. '빅 리틀 라이즈'와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의 데이비드 E 켈리가 크리에이터라 믿음이 간다. 다소 산만하다는 감상평도 있지만 오늘날 미국의 치부를 들여다보는 짜릿함은 상당한 매력이다.
크로커의 야비한 술수에 제일의 압박은 무위로 돌아간다. 크로커에게 버러지 취급을 당한 원한에 사무쳐 제일에게 가담했던 레이먼드 핍그래스(제임스 펠프리)가 낙담하자 제일이 위로한다.
"너무 감정적으로 받아들이는군."
"안 그럴 수 있나요?"
"난 군인이야. 역사를 봐. 독일은 우리의 적이었다가 동맹국이 됐고 러시아는 적에서 친구, 다시 적이 됐지. 다 돌고 도는 거야. 이란인이나 이라크인도 마찬가지지. 크로커는 내 하루를 깨우는 원동력이었어. 쓰러뜨려야 할 대상이었지. 찰리같이 야비한 놈들은 수도 없이 많아."
"그렇게 긍정적으로 생각 안 들어요."
"해야 할 거야."
"아니요. 안할 겁니다."
핍그래스는 크로커의 전처 마사(다이앤 레인)에게 접근해 환심을 산 뒤 전 남편에게 결정적 한 방을 먹이도록 그녀를 조종한다. 그리고 파국적 결말이 기다린다. 시신마저 조그만 위트를 선사하며 막을 내리는 점이 흥미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