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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묵상 스크랩 아르케와 디아 아우토스 (요1:1~3)
a pencil 추천 0 조회 107 16.07.07 12:25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묵상본문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1:1~3)



*기도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말씀 앞에 나아와 주님을 찾습니다. 여러 가지 일에 지쳐 저의 상하고 무너진 심령, 주님이 계시지 않아 황폐하게 된 제 마음, 사람에게 의지하여 상처받은 제 영혼, 이 모든 것을 맛 본 후에야 한분 하나님, 제 아버지의 집에 늘 거하는 것이 가장 즐겁고 옳은 줄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창세 전 영광으로서 아들과 함께 하셨던 그 영원의 즐거움 안에 저도 들어가길 원합니다. 아들의 은혜 안에 들어감으로써 아들과 하나된 아버지 안에 저도 거하길 원합니다. 오직 아들의 공로만이 저를 아버지의 품으로 이끄실 통로가 됩니다. 어제의 저는 던져버리고 여기 아무 쥔 것 없는 한 영혼으로 아버지 앞에 섰사오니, 말씀 앞에 무지하고 짐승된 실존을 불쌍히 여겨주소서. 아버지의 집 문을 열어주소서. 다시아버지의 존전 앞에서 먹고 마시기를 원하나이다.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본문연구


요한복음 1:1의 태초라는 말은 헬라어 ‘아르케’의 번역인데 이 말은 천지창조의 시작점인 태초와 다르게, 창세 이전부터 존재한 영원의 때를 의미한다. 이 영원에 거하는 분이 계신데 그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요1:1). 그런 하나님과 영원의 상태를 공유하며 누리고 계시는 분이 계셨는데, 그분이 바로 ‘말씀’(로고스)이다(요1:1,2).


요한의 표현인 ‘말씀(로고스)’은 당시 헬라문화에 편만하던 로고스 개념을 차용하여 사용한 것이다. 우주론적인 실재, 즉 능력으로서 존재하지만 인격은 없다고 생각되는 어떤 우주적인 힘이나 운동력을 일컫는 말이 ‘로고스’였다.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 1장에서 “그 로고스가 실은 예수님이시다”는 주장을 하며 당시 퍼져있던 로고스의 개념 속 ‘무인격적’ 요소를 부정하고 “인격으로서 신적실체가 있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소개한다.


이 주장은 그 로고스에 의해 ‘지어진’바 된(헬,에네게토/요1:3) 피조물과 대비되어 사용된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라는 표현에서도 나타난다. 이 ‘계셨다’는 표현은 헬라어 en인데, 영어로는 was, be 등의 표현으로 기록했다. 그의 존재가 [이미 거기 계셨다] 함은, 그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밝혀주는 대목이 된다. 말씀-로고스, 그분은 이미 존재하셨다. 하나님 외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하나님의 창조를 기다리던 수많은 피조물들이 그분의 머리 안에서 계획으로만 아직 잠자고 있었던 그 때에 이미 존재하신 분이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그 ‘말씀’을 가리켜 “그가 곧 하나님”이라고 기록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처럼 창세 전 영원의 세계에서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가, 하나님과 더불어 이 세계를 창조하신 분 역시 ‘말씀’이다. 사도요한은 ‘모든 것’을 그가 지으셨다(Through him all things were made)고 기록한다. 모든 만물이 하나도 빠짐없이 그가 없이는 지어진 것이 없다(요1:3). 이 지어짐을 영어로는 made라 번역하고 있지만 원문상 의미는 조금 다르다. 지어짐에 해당하는 단어 ginomai(G1096)는 “되어지다”(become, come into being)의 뜻을 가졌다. 어떤 요소들을 조합하여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무의 상태에서 이전에 없었던 전혀 새로운 무엇인가를 창조해 낸 것이다. 이 증거가 사실이라면 세상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소유권자이심에 이의를 제기할 길이 없다. 설령 그가 피조물에게 자유의지라는 커다란 선물을 주셨다 해도, 너의 원소유권자가 누구냐는 질문에 “나 자신”이라고 대답할 논거는 없게 되는 것이다.


살펴본 바와 같이 요한복음의 첫 세 구절은 말씀(로고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기원, 능력, 주권에 대해 알 수 있다. 그는 하나님과 영원부터 ‘이미 함께 존재하셨던’ 하나님이셨고,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하신 ‘무한한 능력’을 가지셨고, 그가 만물을 창조하셨으니 곧 ‘만물이 그의 소유’이자 그의 발 아래 있음이 당연하다.


영원부터 계셨고 지금도 계신 주. 모든 영광과 권세와 능력을 가지신 주. 경배와 찬양과 복종을 드리기에 합당하신 만유의 주. 요한은 그를 가리켜 ‘말씀’이라 소개했고 그 말씀은 곧 예수님이셨다.




*본문묵상


아르케!(Arke)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의 영원. 거기에 이미 예수님이 계셨다. 그가 아직 세상에 나타나기도 전, 아직 예수라는 이스라엘식 이름을 갖기도 전, 아니 그보다 세상이란 것이 존재하기도 전에 이미 그는 계셨다. 이미 존재하신 분이셨다.


디아 아우토스!(Dia Autos)

모든 것이 그분에 의하여, 그분을 통하여 창조되었다. 만물이 그분의 것이며 그의 보살핌과 그분의 법칙 아래 있다. 그분만이 모든 만물의 소유자이시며 주인이시고 모든 행위의 집행자가 되기에 마땅하시다.


***


예수를 구원자로 믿게 된 나는 어디로 가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답은 아르케와 디아 아우토스 사이에 있다. 우리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이후, 우리의 돌아갈 본향은 아르케이다. 아르케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영원의 공간이며, 말로 정의할 수 없는 카이로스의 시간이다.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이 거하고 계신 절대타자의 자리이며 아무도 침범치 못할 홀로 높고 존귀하신 자리이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그분의 복음에 연합한 자가 가게 되는 곳이 바로 이 카이로스와 아르케가 있는 곳이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요12:32) 예수님은 십자가의 사건 이후, 자신이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로 이끌겠다고 하셨다. 이것은 자신의 죽음을 암시하신 발언으로, 이 말을 들은 이들이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우리가 배웠는데, 너는 대체 그리스도라 자칭하면서 그가 죽는다고 말하는 것이냐? 너는 대체 누구냐? 네가 말하는 그리스도란 대체 어디서 굴러 온 개념이냐?”라고 되받아친다.


여기서 예수님이 ‘내게로 이끌겠다’고 약속하신 때는 분명히 십자가 사건 이후이다. 십자가 사건은 그 자체로는 심판의 사건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언급하신 ‘땅에서 들리심’은 십자가 위의 죽음에서 끝이 아니라 무덤을 지나 마침내 부활하여 하늘보좌(아르케와 카이로스의 그곳)에 오르시는 것으로 귀결된다. 즉 예수님이 다시 하늘보좌, 만물에 속하지 않은 만물 위 그곳으로 오르시는 것까지 포함하여 ‘내가 땅에서 들리는’ 사건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에게 온 사람들을 이끄시고자 하는 자리는 만물 위 하늘의 성소, 예수님이 온전한 속죄와 부활을 이루시고 앉으신 영원한 보좌가 있는 곳으로 이끄심이다.


언제 이 일이 일어나는가? 우리는 언제 이 영광을 경험하는가? 죽어서 천국에 간다면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그것과 다른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있고 너희도 살아있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18~20)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 이후 곧 예수의 영이신 성령을 보내시겠다는 약속을 하시면서(요14:16) 이 말씀을 하셨다. 그런데 17절까지는 주체가 ‘성령’인데 18절로 넘어가면서 주체는 ‘나(예수)’로 바뀐다. 이는 주의 영이신 성령이 임하신다 함이 곧 예수님이 영으로 다시 오시는 것과 마찬가지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하나이시므로, 성경은 종종 성령을 아버지의 영, 아들의 영으로 이름한다) 즉 예수님이 다시 오시겠다 함은 재림 때를 말하심이 아니고 부활승천 이후(부활하신 신성한 육체 그대로는 하늘보좌에 계시나) 영으로는 성령을 통하여 다시 이 땅에 오신다는 약속이신 것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승천 사건 이후 성령이 이 땅에 임하시기까지 걸린 시간은 그리 오래지 않았다. 십자가 사건은 유월절이었고, 성령강림은 오순절이었으니 말이다. 불과 3개월 정도의 시간이다.


그러므로 이제 영으로 오신 예수를 세상은 더 이상 볼 수 없다. 그분이 더 이상 육체로 이 땅에 거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를 본다(요14:18). 그리고 제자들은 이제, 자신과 아들과 아버지가 서로 하나되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된다(요14:20). 이들은 이제 성령을 통하여, 예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 안에 거함으로(요14:19) 말미암아 하나님과 아들 안에 거하는 존재가 된다.


그렇다면 이 영원한 생명을 현실에서 누리는 시간은 언제인가? 요한복음 17:3은 그 시간은 영원한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하여 깊이 알아가는 시간이 곧 영생이라고 쓰고 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예수님 본인이 하신 말씀이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예수님의 이 말씀에 의하면 영생은 곧 사귐이고 관계이며 또한 제대로 앎이다. 그리고 요한복음 17장 전체를 통한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 알 수 있는 것은, 그 [사귐의 앎]을 매일 실현시켜줄 가장 적법한 수단은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신자에게 주신 “말씀”을 상고하는 것이다. 신자는 말씀을 대하는 시간을 통하여 거룩하여지며(요17:17), 세상에서 구별을 받고(요17:14), 예수가 참진리이신 것과 예수를 보내신 분이 하나님이신 줄을 받아들였으며(요17:8) 이러한 관계 속에서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창세전의 영광을 신자들에게도 주셔서(!) 하나님과 아들과 신자가 서로 온전히 하나가 되도록 하셨다(요17:22).


이 비밀이 크고 놀랍다!!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고는 누가 이루 설명하며 누가 쉽게 이해할까! 신자는 오늘도 예수의 영이신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온전히 자라가고, 그 시간들을 통하여 하나님안에 거하는 시간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그 시간에 비춰지는 것은 온전한 하나님의 영광, 창세전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가졌던 그 영광의 빛이다(요17:5,22).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크로노스의 오늘에도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는 비밀이 신자들에게 허락된 것이다. 즉 죽어서만 볼 줄 알았던 천국을 오늘 여기서 맛보며 사는 삶이 열린 것이다. 천국의 본질인, 아버지의 영광의 빛을 보면서 말이다.


이러한 삶을 사는 자가 살아가는 방식은 당연히 ‘디아 아우토스’가 된다. 만유 위에 계시는 그분께사 만유의 주인이 되심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의 계획과 뜻이 언제나 가장 선하고 옳으심을 인정하며 사는 삶이다. 패배주의에 젖어서 “그래요 주님, 저는 맨날 틀렸죠. 주님만 맨날 옳으시고요.”를 뇌까리는 삶이 아니다. 그분의 영광을 날마다 보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에 대해 저런 심정을 가질 수 있을까? 그럴 리 없다. 아버지와 아들 안에 연합한 자아가 어찌 자기 뜻대로 하기를 즐겨할 수 있단 말인가? 그분의 뜻대로 하고 싶다는 욕구가 샘솟게 된다. 마치 아들이 아버지를 사랑하여 그의 뜻 순종하기를 죽기까지 하신 것처럼, 신자 역시 그 사랑의 연합 안에 들어와 있는고로 아버지의 뜻 구하기를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된다. 하물며 자신의 본질은 그분의 피조물이 아니었던가.


*기도


아버지, 만물 위 영원의 세계. 기쁨과 환희가 있는 그곳으로 매일같이 이끄심이 예수님이 목적임을 알았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의 연합된 상태, 그 화목한 교제를 누리는 것이 곧 영생을 누리는 상태임을 알았습니다. 아버지, 이 깊은 연합을 등한시하고 아버지 안에서 누렸던 영생의 기쁨을 하찮게 여겼던 저의 못남을 자백합니다. 아버지와 함께 함만이 물줄기가 되며 생명의 본질이 됨을 다시 깨닫습니다. 아버지, 바라기는 저와 함께 했던 많은 이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이 사실을 꼭 깨닫게 되기를 바라나이다. 영원의 시간을 매일 누리는 신비를 그들도 몸과 영으로 알게 하소서. 그들의 오늘이 자발적인 디아 아우토스의 날들로 바뀌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소망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 삶에 그 일을 이루어 주소서. 매일의 삶 가운데 날마나 영원한 생명의 축제를 누리게 하시고, 아버지의 존전, 만물 위 하나님의 보좌에 능히 나아갈 수 있는 통로를 열어 주심을 믿고 나아가게 하소서. 이 은혜를 가능케 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찬양하고, 감사하고, 의지합니다. 예수의 영이여 오늘 하루도 아버지의 뜻대로 저를 사로잡아 주소서. I pray in Jesus name. Amen.


2016.7.7. Timothy Ch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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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6.07.08 11:52

    첫댓글 아멘 아멘!
    오직 진리의 영으로만 아는 아버지와 아들, 태초의 비밀..
    읽고 또 묵상하며 영원의 아버지 품에서 안식하며 기뻐하게 되네...
    주여, 태초부터 이를 알았으니, 오직 그를 통하여(디아 아우토스) 매 일상을 살기를 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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