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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간을 개체로 보느냐, 아니면 사회적 산물로 보느냐에 따라서 인간에 대한 관점은 크게 달라진다. 이 책의 저자 에리히 프롬은 “개인과 사회”라는 문제에 접근하면서, 개체로서의 본연의 인간을 그 출발점으로 삼는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소유”와 “존재”의 문제에 봉착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독자들에게 그런 문제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어줄 것이다.
이 책 『소유냐 존재냐』는, 특히 프롬의 사상세계에 관한 입문서로 적절한 책이다. 저자는 전문적인 학문적 자료를 피하면서 일목요연하고 읽기 쉽도록, 그가 이전의 저술들에서 한층 엄밀하게 (때로는 장황하게) 파고들었던 사유의 과정을 이 책 안에 요약하고 있다. 나아가 새로운 시각에서 간결하면서도 압축된 형태로 자신의 고백의 다양한 단편들을 종합해놓고 있다.……아마도 미래의 학자들은 프롬을―종교전쟁 말기의 저 위대한 휴머니스트처럼―용기 있는 이념을 가지고, 우리 모두가 한층 관용을 알고 도움을 주며 욕구를 모르고 평화를 사랑하는 인간이 되도록 기여한 저 제3의 힘의 대변자의 계열에 넣어 해석할 것이다. 그리고 휴머니즘적 항거파가 뿌리내리기를 기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는 현대 사회의 소유와 존재 양식을 통해 인간의 본질적 변화와 새로운 사회 건설을 제안한다. 소유는 사용에 따라 감소하는 반면, 존재는 실천을 통해 증대하며, 인간을 성장시키고 고립된 자아의 감옥을 초극한다. 프롬은 이러한 두 양식의 차이를 분석하며, 소유와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고, 인간의 정신적 구조와 사회 경제적 구조의 상호작용을 통해 새로운 변화를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소유는 사용에 따라서 감소하는 반면, 존재는 실천을 통해서 증대한다." - 161쪽 에서
근대 산업사회는 "무제한의 생산, 절대적 자유, 무한한 행복"이라는 삶의 이상을 부르짖으며 이 위대한 약속의 실현이 곧 이루어질 것이라며 시작되었다. 그러나 오늘 이것이 가져다 주리라 믿었던 것들을 위한 요구가 '경제 성장을 위해서 무엇이 좋은가'라와 같이 정작 그 주체여야 했던 인간은 소외되고, 인간적 자질은 이에따라 자기중심주의와 이기주의, 소유욕이라는 인간자연의 충동이 아니라 사회적 제약의 산물에 휘둘리는 현실만 드러내 보이고 있을 뿐이다.
인간은 상품화라는 비인격화에 내몰리고, 자연에 대한 무참한 지배는 이제 COVID와 같은 전지구적 전염병이라는 자연의 보복으로 자유는 궁박하기 그지없는 상태에 처해있다. 경제적 동인이라 부추긴 소유와 이기심은 부의 극단적 편재로 인한 계층 갈등을 고착화시키는 탐욕과 아집의 언어가 되어 시기와 혐오, 적대만 양산할 뿐이다. 이러한 현대사회의 위기는 인간 실존에 대한 전면적인 위협이라는 인식을 요구하기에 이르고, 인류의 운명, 즉 역사상 처음으로 "인류의 육체적 생존이 인간 정신의 근본적 변화에 매달"려야 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이러한 현실에서 인간 삶의 두 가지 측면인 소유양식과 존재양식에 대한 성찰을 통해 인간 성격 구조의 근본적 변화를 위한 전제조건, 새로운 인간의 본질적 특성, 나아가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한 제언인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의 이 저작은 반 세기를 지나 그 통찰력을 빛낸다.
1. 두 실존 양식 - 소유 양식과 존재 양식
소유와 존재는 근본적으로 다른 인간 체험의 형태이다. 꽃을 뿌리째 뽑아 손 안에 드는 것과 가까이 다가가 꽃의 생명력과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바라보는 행위처럼 그 의미는 사뭇 다르다. 여기에는 죽음과 삶, 폭력과 하나되는 공존이라는 대비가 있다. 프롬은 산업사회 이후 언어 사용의 변화에서도 존재에서 소유로 이전되는 인간 행위를 언급하고 있는데, 이를테면 '나는 생각한다.'를 '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라든가, 환자가 '나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를 '나는 문제를 하나 가지고 있다.'로 표현하는 것처럼 존재의 양식이 사라지고 소유의 양식이 인간을 포획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주체적 경험을 하는 자아가 사라지고 소유한 그것으로 대치되어 버리는 것이다. 과연 나는 문제를 소유할 수 있는가? 하면 결코 그것은 소유할 수 있는 성질의 물건이 아니라는 점에 놀랄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사는 오늘의 사회가 전적으로 소유지향과 이윤추구의 사회라는 점에서 어쩌면 당연한 반영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형상은 우리네 일상, 독서, 대화, 기억, 지식, 신앙, 권위행사, 사랑에 이르기까지 소유양식에 점령된 현상들을 발견하게 된다. 독서의 경우에도 줄거리나 주인공이 죽는지 사는지와 같은 이야기 소유에 머물고 획득된 인식은 아무것도 없이 종료된다. 인간 통찰 능력의 심화나 그 감응이 삶의 새로운 변화의 동력이 되는 존재 양식의 독서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처럼 소유 양식은 지식으로부터 소외, 자아로부터의 소외만을 양산한다.
"그대의 존재가 적으면 적을수록, 그대가 그대의 삶을 덜 표출할수록,
그만큼 그대는 더 많이 소유하게 되고, 그만큼 그대의 소외된 삶은 더 커진다.... - 225쪽 에서
반면 존재 양식은 소유 양식과 같이 생동하지 않는 것, 소외 된 것,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적 경험에 의해 보증되는 자기 창조의 능동적 과정이다. 존재는 공유와 결속의 양식이다. 지식은 '가지는' 것이 아니라 파고드는 사유행위 그 자체로서 존재 양식일 때의 생명력이다. 일용품, 재산, 지식, 사상 등등의 소유에 집착할 때 이것들은 자유의 족쇄가 되고 자기 실현의 장애물이 되고만다. 존재는 흘러가는 것이며, 생산적 표출이라는 의미에서 활동 상태이다. 반면 소유는 아집과 소외와 굴종을 요구한다. 총 3부로 구성된 이 저작의 고전적 지위는 이러한 두 실존 양식의 근본적 차이에 대한 분석을 서술하는 제2부일 것이다.
2. 소유의 본질, 존재의 지혜
왜 소유에 집착하는 것일까? 아마 "가장 중요한 대상은 자신의 자아일 것이다. 자신의 육체, 이름, 사회적 지위, 소유물(지식까지), 과시하고 싶은 이미지... 이들 허구적 자질의 혼합물을 자아라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물을 자신을 확인하는 경험적 토대로 이해하고 있기에 소유는 자아 취득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그런데 이 소유는 지배 느낌의 상승, 새로운 자극의 무한 욕구이기에 타자의 경시와 무관심, 도구화, 종속화만을 요구한다. 결국 인간과 소유 대상의 관계는 살아있음의 온기, 연대감이 함께할 여지가 사라진다. 자신임을 확신하는 느낌이 사물을 소유하는 데에 의존하는 삶, 더구나 재산과 이윤 지향의 태도는 권력의 욕구, 폭력의 충동, 약탈과 탈취의 능력이 행복이라는 인식에 사로잡히게 한다.
이와달리 체험과 관계하는 존재 양식은 인간 자체를 묘사할 수 없듯이 사물처럼 술회할 수 없다. 이것은 자기를 성장시키고 흐르게 하며 고립된 자아의 감옥을 초극하는 능동적 활동이기에 그렇다. 소유와 달리 소외되지 않기에 자신의 행동을 주체로 체험하며, 살아있는 생산적 관계를 형성한다. 관계하는 대상에게 생명을 부여하며, 스피노자가 말했듯이 "행위가 본성에 일치하는 능동성"이기에 이것은 활동성, 이성, 자유, 기쁨, 자기완성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에티카』, Ⅳ,개념정의 2,3,5; 명제 40,42)
이와 같이 소유지향성은 관계에 억압과 부담, 갈등과 질투로 채워지고, 경쟁심, 적대감, 두려움으로 특징지어진다. 반면 존재 지향성은 공존의 즐김, 이성과 사랑의 힘, 창조력 등 본질적 힘이 불어난다. 이 두 양식은 죽음에 대한 인식에서조차 뚜렷한 차이를 보여준다. 육신, 자아, 재산, 실체와 같은 소유물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과 삶을 소유물로 간주하지 않는 존재 양식은 죽음에 대한 것이 아닌 삶에 대한 숙고라는 지혜로움이다. 인간 삶의 양식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새삼 중언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3. 새로운 인간과 사회
개인의 정신적 구조는 사회 경제적 구조와 상호작용의 결과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소유 양식에 얽매여 있다. 그리고 이것을 벗어나야 함 또한 잘 알고 있다. 인간 자신의 보존본능을 위협하는 현실임에도 당장의 희생보다는 아득해 보이는 재난을 택하고 있다. 인간이 지닌 치명적 수동성, 과학기술과 경제사회체제의 낙관론과 기득권은 새로운 변화를 거부하기에 그렇다. 프롬은 작심하고 근본적 변화를 도모하기 위해 이를 방해하는 난점들을 조목조목 열거하고 그를 분쇄할 정책들과 실천 방안을 제안하고 있다.
"실천과 동떨어진 통찰은 아무 실효가 없는 법이다." - 244쪽에서
인류가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케 하고, 그 원인을 인식케 하며, 원인 제거와 함께 고통 해방을 위한 새로운 생활습관을 제시한다는 단계별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발군의 통찰에 이은 그 구체 실천 내용을 개진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집중화로 수렴되지 않는 산업적 생산형태의 강구, 자유시장 경제 포기와 고도 분산화 경제로, 무제한 성장에서 선택적 성장으로, 노동에 대한 전혀다른 인식 - 정신적 충족이 효율적 동인이 되게 하는, 이를테면 공공선의 기여로 노동의 가치를 재편하는 것과 같은, 또한 최저 생계비와 같은 생존근거의 부여 등 극복되어야 할 난제를 비롯하여 인간 욕구 본질에 대한 새로운 인간과학의 투자, 관료주의적 행태들(인간의 사물화, 수치화 취급, 양적 관점의 관리 등)의 폐지 등 오늘에도 급진적인 정책을 제시하고 있다.
인간 생존에 대한 무제한적 권리 규범도 없는 인간 사회가 자신들의 애완 동물에게는 인정하는 이 기이한 세계일지라도, 이 이기심과 탐욕은 인간 천성이 아니라 "늑대들 틈에서 늑대가 되어야 한다는 보편화된 압력의 결과"라는 시각이기에 프롬은 사회적 풍조를 바꾸려는 열망과 인류 20%의 실천이 이루어진다면 인류의 세계는 '존재의 도시'로 변화할 수 있지 않겠는가라는 전망을 보이고 있다.
인간애로 가득한 프롬의 절절한, 그리고 인간 본성의 구석구석, 인간 사회 행태의 망라된 문제의식을 토대로 현대사회의 위기를 극복하자는 제언은 지금 인류 사회 모두에게 새로운 공동체적 신체를 구성하는데 필요한 각성, 깊은 울림을 전해준다. 그 어느때 보다 비상한 긴장들이 팽배해있는 오늘, 자기실현과 인간 존엄의 재수립, 인간의 유대를 포함한 정신적 가치의 새로운 정립을 제시하는 웅숭깊은 세계관은 새로운 삶의 방식, 문명 전환적 통찰의 요구인 뉴노멀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귀중한 성찰적 지식의 표본이 되어주리라는 기대도 갖게된다.
에리히 프롬과 Q의 만남과 대화
에리히 프롬은 고대와 현대의 다양한 사상적 흐름들을 두루 거쳤고, 그것을 나름대로 융합하면서 자신만의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사실상 프롬과 Q의 대화에는 프롬의 배경이 되는 사상들도 그 대화에 함께 참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사상적 배경의 광범위하지만 초점을 모으면 세 가지로 축약될 수 있다. 그것은 ⑴ 유대교를 비롯한 기독교와 불교에 대한 종교적인 전통에 대한 공부, ⑵ 프로이트(S. Frued)에 대한 연구와 정신분석가로서의 임상적인 경험, ⑶ 마르크스(K. Marx)에 기초한 사회에 대한 연구 등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유대교 신자로서 토라를 공부했었다. 특히 그는 청년 시절에 6년에 걸쳐 ‘살만 바룩 라빈코프(Salman Baruch Rabinkow)’라고 하는 인문주의적 랍비에게서 성서를 인문적으로 읽는 훈련을 받았다. 그러면서 그는 여느 유대인들과는 다른 종교적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2) 그는 신약성서와 기독교에 대해서도 잘 알았고, 청년 시기에는 불교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멕시코에 건너가서는 선불교를 접하게 되고 선불교 공부와 좌선에 몰입하게 되기도 했다. 서양에 선불교를 전파하는데 가장 탁월했던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와의 만남은 선공부에 큰 전환점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3)
또한 프롬은 기독교 신비주의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d)를 접하고 그를 열심히 공부했다. 최근 국내에도 에르하르트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데, 프롬은 그를 일찍부터 알아보았고 열심히 알린 사람 중 하나였다. 이러한 종교에 대한 공부 때문에 프롬은 보수주의자로 간주되기도 했다. 그 자신도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일원이었던 ‘허버트 마르쿠제(H. Marcuse)’는 프롬의 종교적 입장을 비판하면서 그의 종교관이 보수적이라고 공격했다.
아울러, 프롬은 일찍부터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공부했다. 저술가, 강사, 교수도 그의 직업이었지만, 프롬이 평생 꾸준하게 행한 일은 정신분석가로서의 활동이었다. 프로이트를 열심히 공부했지만, ‘카렌 호나이(K. Horney)’, ‘해리 설리반(H. S. Sullivan)’ 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정통 프로이트파를 벗어나게 된다. 프롬은 한 이론 체계가 6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면 그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프롬은 프로이트에 많은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독자적인 심리학 이론을 제시하게 된다.(4)
프롬은 또한 마르크스를 열심히 연구했다. 프롬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연구소에 가입하여 그들에게 정신분석을 소개하는 한편, 그들로부터 마르크스의 사상을 배웠다. 프랑크푸르트학파와 결별한 뒤에도 그는 계속해서 마르크스를 읽었다. 그는 마르크스의 전기와 자신의 마르크스 해석을 담은 작은 책도 출판했다.(5) 프롬은 사회 심리학적 작업을 많이 수행했는데, 그의 이름을 미국과 세계에 알린 첫 번째 단행본인 『자유로부터의 도피』(6)는 사회학과 심리학이 잘 결합된 책이었다. 그의 실질적인 마지막 책인 『소유냐 존재냐』에도 역시 사회적 차원과 심리적 차원이 잘 결합되어 있다.(7)
에리히 프롬의 Q 이해
프롬의 긴 사상적 여정은 『소유냐 존재냐』라는 책으로 집약된다. 그는 이 책에서 삶의 태도를 ‘소유양식’과 ‘존재양식’으로 나누었다. 이것은 이전에 있었던 구분, 즉 수용, 착취, 저장, 시장으로 대표되는 비생산적 유형과 사랑으로 대표되는 생산적 유형의 구분, 삶에 대한 사랑과 죽음에 대한 사랑이라는 성격유형의 구분을 종합하면서 형성된, 프롬이 도달하게 된 최종적인 구분법이다. 그는 “소유와 존재는 근본적으로 다른 인간체험의 두 가지 형태로서, 그 각 양식의 강도가 개인의 성격 및 여러 유형의 사회적 성격의 차이를 결정한다.”(8)고 주장한다. 그는 이러한 구분에 기초하여 성서도 이해한다.
에리히 프롬은 이미 『너희도 신처럼 되리라』에서 급진적 인문주의적 방식으로 구약성서를 독해했었다. 그는 『소유냐 존재냐』에서는 “존재”라는 키워드로 구약성서를 읽어나간다. 이 책에서 구약성서의 주요 모토는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떠나라, 모든 속박으로부터 너 자신을 풀어라, 존재하라!”(9)로 해석된다. 아브라함은 소유양식이 아닌 존재양식을 대표하는 인물로 부각된다. 모세에 의한 광야의 유랑생활도 마찬가지다. 무교병도 안식일도 존재양식을 의미한다. 그는 이러한 흐름이 예언자들에게까지 이어지고 결국에는 랍비 전통에까지 이르렀다고 보았다.
에리히 프롬은 신약성서 이해에 있어서 소유/존재의 구분으로 신약성서도 바라본다. 그는 존재지향에 있어서는 신약성서가 구약성서보다 더 투철하다고 본다.(10) 왜냐하면 그는 유목민이나 자유소작농에서 유래한 구약성서나 중산계급으로부터 유래한 탈무드와 달리 초기 기독교 운동은 가난한 자들로부터 유래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산상수훈이 “노예반란 성명서”였다는 ‘막스 베버(M. Weber)’의 말도 인용한다.
에리히 프롬은 Q를 “유대교로부터 분리되기 이전의 기독교 공동체에 전파되었던 복음서의 가장 오래된 대목”으로 이해하고 있다. 특히 그는 Q 이해에 있어서 슐츠(S. Schulz)의 이론에 의지하고 있다.(11) 에리히 프롬은 슐츠의 전승사적 구분, 즉 팔레스타인-시리아에 있었던 오래된 Q 공동체(ältesten Q Gemeinde)와 시리아에 있었던 새로운 Q 공동체(jüngeren Q Gemeinde)로 구분하는 슐츠의 구분을 받아들이고 있다.(12)
그는 Q복음서 역시 소유/존재의 이원적 지향과 형태 가운데서 이해한다. 그는 Q의 중심 전제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복음서에서 발견되는 중심 전제는 모름지기 인간은 모든 탐욕과 소유욕을 떨쳐 버리고 자신을 소유의 구속으로부터 완전히 해방시켜야 한다는 요청이다.”(13) 즉 에리히 프롬은 Q를 탈소유의 복음으로 이해한 것이며, Q의 핵심을 소유로부터의 해방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는 Q의 에토스를 “존재의 윤리, 공유와 결속의 윤리”로 이해한다.
그는 “오래된 Q”에 있는 메시지가 자신의 권리의 포기와 사물의 소유권에 대한 포기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다. 그는 “보물을 쌓아 두지 말라”는 Q12:33과 “가난한 자들에 대한 축복”(Q6:20)을 언급한다. 그는 이러한 말씀들이 기독교 초기 공동체가 사유재산을 단념하는 것을 지향하고 부의 축적을 경계하는 메시지들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오래된 Q가 묵시록적 표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소집단인 Q 공동체가 “거의 믿을 수 없는 극단주의”를 견지했다고 판단했다.
출처 : 에큐메니안(https://www.ecumenian.com)
프롬은 새로운 Q의 위치를 기독교 후기 단계로 잡는다. ‘새로운 Q’의 대표적인 본문은 시험이야기이다. 그는 시험 이야기에서 마귀가 소유욕과 권력욕의 소유지 향성을 공공연하게 표출하고 있다고 서술한다.(14) 그는 시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15)
“이 이야기에서 예수와 마귀는 대립적인 두 원칙을 대표한다. 마귀는 물질적 소비와 자연 및 인간을 지배하는 힘의 대표자이다. 반면, 예수는 존재의 구현이며, 소유하지 않는 것이 존재양식의 전제라는 이념의 구현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복음시대 이래 마귀의 기본 원칙을 추종해 왔다. 그러나 아무리 이 원칙들이 개가를 올린다고 해도, 예수를 비롯해서 그를 전후한 위인들이 말했던 참존재의 실현에 대한 염원을 꺼버릴 수는 없었다.”
미주
(미주 1) E. Fromm, 『소유냐 존재냐』, 차경아 역, 까치, 2013.
(미주 2) 구약성서에 대한 인문적인 해석으로는 E. Fromm, 『너희도 신처럼 되리라: 급진적 휴머니스트의 혁명적 구약읽기』, 이종훈 역, 휴, 2013 참조.
(미주 3) E. Fromm, 『사랑의 기술-선과 정신분석』, 권오석 역, 홍신문화사, 1991.
(미주 4) E. Fromm, 『인간의 마음』, 황문수 역, 문예출판사, 2002 등.
(미주 5) E. Fromm, 『마르크스 프로이트 평전』, 김진욱 역, 집문당, 2011; E. Fromm, 『에리히 프롬, 마르크스를 말하다』, 최재봉 역, 에코의 서재, 2007.
(미주 6) E. Fromm, 『자유로부터의 도피』, 원창화 역, 홍신문화사, 2006.
(미주 7) 이상, 에리히 프롬의 사상적 여정에 대해서는 박홍규, 『우리는 사랑하는가: 에리히 프롬의 생애와 사상』, 필맥, 2004 참조.
(미주 8) Fromm, 『소유냐 존재냐』, 34. 9) Ibid., 78.
(미주 10) Ibid., 86.
(미주 11) S. Schulz, Q: Die Spruchquelle der Evangelisten, Theologischer Verlag, 1972.
(미주 12) Ibid., 57-480.
(미주 13) Fromm, 『소유냐 존재냐』, 87.
(미주 14) Ibid., 90.
(미주 15) 이하 Ibid., 90-9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