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에 의한 평화
스위스(Swiss)를 상징(象徵)하는 단어 중 하나가 영세중립(永世中立, neutral country)입니다.
스위스는 1815년 빈(Vienna) 회의(會議)에서 영세중립을 보장(保藏)받은 후 지금까지 유럽에서 있었던 수많은 이합집산(離合集散)과 전쟁(戰爭)에도 불구(不久)하고 독립(獨立)을 지켜왔습니다.
그런데 종종 이와 관련(關聯)해 오해(誤解)를 사는 부분이 있습니다.
영세중립을 보장받았기에 외세(外勢)가 공격(攻擊)하지 않을 것이고,
만일 그런 경우가 있다면 주변(周邊)에서 달려와 도와 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스위스는 영세중립으로 유명한 나라입니다
하지만 현실(現實)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제1차 대전 당시에 벨기에(Belgique)도 영세중립국이었지만 단지 파리(Pari's)로 가는 길목에 있다는 이유로 독일(獨逸)의 침공(侵攻)을 받았습니다.
이를 명분(名分)으로 영국(英國)이 참전(參戰)했지만 엄밀히 말해 벨기에를 돕는 목적이 아니라 독일의 패권(覇權)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런 사례처럼 스스로 지킬 힘이 없다면 영세중립은 유지(維持)하기 힘듭니다.
즉, 스스로 지킬 힘이 있어야 합니다.
영세중립국 스위스 ‘군사력에 관한 7가지 진실’
중립주의(中立主義)는 1803∼1815년 사이 벌어진 나폴레옹 전쟁(Napoleonic Wars, 1803년~1815년) 당시 스위스가 주변 열강(列强)에 지배(支配)되지 않고 자국(自國)의 독립(獨立)을 지키기 위해 선택(選擇)한 것이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 신질서(新秩序)를 위해 열린 비엔나회의에서 이런 내용(內用)이 승인(承認)되면서 영세중립국(永世中立國)인 스위스가 탄생했다.
스위스는 영세중립국이라는 이미지(Image) 때문에 평화(平和)로운 이미지가 강하다.
하지만 스위스의 문화(文化)와 비즈니스는 군사력(軍事力)과 깊은 연관성(聯關性)이 있다고 한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인 필립 토마스(Philip I. Thomas)가 스위스 군사력에 관한 7가지 알려지지 않은 진실(眞實)을 정리해 눈길을 끈다.
먼저 스위스는 징병제(徵兵制)다. 남자는 병역 의무(兵役義務)가 있다. 현역 군인(現役軍人)이 아닌 예비역(豫備役)으로 30년 동안 소속(所屬)되어야 한다.
이들을 모두 합하면 스위스 국민 중 10%는 군인이 되는 셈이다.
세계은행(世界銀行)에 따르면 스위스 인구는 2012년 기준 799만명이다. 이 가운데 80만명은 군인이라는 얘기다.
또 비즈니스(business)에도 군부(軍部)는 깊숙하게 관여(關與)하고 있다.
주요 스위스 은행 행장(銀行行長)은 스위스 군 고관 출신(高官出身)인 경우가 많다.
다음은 국경(國境) 다리와 터널(Turnel)은 군대(軍隊)가 갑작스러운 통보(通報)를 하고 스위스 국외(國外)에서의 접근 자체(接近自體)를 원천 봉쇄(源泉封鎖)할 수 있다는 것.
스위스는 이를 위해 모든 터널과 교량(橋梁)에 철거(撤去)를 위한 방법을 고안(考案)해서 넣도록 했다.
또 스위스 예비역 군인(豫備役軍人)은 유사시 동원령(有事時動員令)이 떨어지면 48시간 안에 언제든 군대에 동원될 수 있다.
모든 스위스 군인은 소총을 집에 보관(保管)하고 있지만 2007년 이후부터는 예비역 군인의 탄약(彈藥)은 국가(國家)가 관리(管理)하고 유사시 배포(配布)하도록 바꿨다.
네 번째는 스위스가 영세중립국이 된 이후 500년 동안 장군(將軍),
최고사령관(最高司令官)은 4명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최고사령관은 뭔가 비상사태(非常事態)에만 특별히 임명(任命)되는 직책(職責)이기 때문이다.
스위스의 마지막 최고사령관이었던 앙리 기잔(Henri Guisan, 1874년 10월 21일~1960년 4월 8일) 최고사령관은 제2차세계대전 당시 스위스의 무장 중립 노선(武裝中立路線)을 관철(觀徹)시켜 나치독일이나 연합군(聯合軍) 어디에도 가세(加勢)하지 않는 방침(方針)을 정하고 전시(戰時) 중 스위스를 지켜내 지금까지 국민적 영웅(國民的英雄)으로 남아있다.
다음은 스위스 용병(用兵)이다.
스위스 용병은 지금까지 수많은 전쟁에서 전과(戰果)를 올려왔다. 스위스은행 대부분은 전쟁에서 얻은 자금(資金)에서 시작(始作)됐다.
스위스 용병의 흔적(痕迹)은 지금도 바티칸(Vatican)의 경호(警護)를 스위스 위병(衛兵) 135명이 담당(擔當)하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섯 번째는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이다. 아인슈타인은 1901년 스위스 시민(市民)이 됐지만 정맥륙(靜脈瘤)와 평발 등의 이유로 군 복무(軍服務)를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마지막은 핵 대피소(核待避所)다.
스위스는 핵공격을 당해서 전 국민이 대피하는 데 필요한 충분한 핵 대피소를 보유(保有)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핵 대피소인 소넨베르크(Sonnenberg↑) 터널도 이곳에 있다. 관련 내용 원문은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전자신문인터넷 테크홀릭팀
이원영 IT칼럼니스트 techholic@etnews.com
↑벨기에를 침공한 독일을 조롱한 신문 삽화(揷畵),
↑벨기에의 학살을 묘사하는 삽화
넓게 보면 1914년 9월부터 1918년 11월까지,
독일 제국이 벨기에를 가혹(苛酷)하게 수탈(收奪)하였던 점령 통치 방식(占領痛治方式)을 일컫는 말이지만,
좁게 보면 1914년 8월 당시 독일 제국군이 벨기에를 점령하면서 벨기에의 여러 도시들에서 민간인 힉살(民間人虐殺)을 저지른 사건들을 통틀어서 말하는 사건이다.
아르메니아(Armania) 학살과 함께 1차 세계대전 당시 동맹국(同盟國)이 저지른 대표적(代表的)인 전쟁범죄(戰爭犯罪)였다.
그래서 무장중립(武裝中立)이 주요 정책(主要定策)일 만큼 스위스는 국방력 구축(國防力構築)에 그 어느 나라보다 열심입니다.
상비군(常備軍) 숫자가 적은 편도 아니고 동원 체계(動員體系)도 훌륭하며 최신 무기(最新武器)의 도입(導入)에도 적극적(積極的)입니다.
중화기(重火器)는 수입(輸入)하지만 소화기(消火器)는 자체 생산(自體生産)하기도 하는데 자타(自他)가 당대 최고의 정확도(正確度)를 가진 소총(小銃)으로 평가(平家)하는데 주저(躊躇)하지 않는 K31(Karabiner Model 1931) 소총도 스위스의 그러한 의지(意志)를 상징(象徵)하는 무기 중 하나입니다.
↑뛰어난 정확도를 자랑하는 스위스의 K31 소총
제식 부호(制式符號)에서 알 수 있듯이 K31은 카빈(Carbine)입니다.
원래 카빈은 총신(銃身)을 단축(短縮)한 기병용 총(騎兵用總)을 의미(意味)하지만 1930년대 이후 일선 전투 부대로써 기병의 역할(役割)이 현격(懸隔)히 줄어들고 기술(技術)의 개발로 총신을 단축했음에도 정확도(正確度)나 사거리(射距離)도 약화(弱化)되지 않아 카빈은 독일의 Kar98k처럼 보병용(步兵用)으로 사용(使用)되었습니다.
따라서 제2차 대전 직전(直前)부터 사용된 카빈은 일반 소총이라 보아도 무방(無妨)합니다.
↑K31 총구에 모의 총류탄을 부착하고 훈련 중인 스위스군 병사
K31은 1931년에 개발되었고 전운(戰運)이 감돌기 시작하던 1933년부터 양산(量産)에 들어갔기에 동 시대에 주력(主力)으로 사용 된 여타 국가의 주력 볼트액션(bolt action) 소총들과 비교(比較)한다면 상당히 최신식(最新式)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혀 새롭게 제작(製作)된 소총이 아니라 그 기술적 기반(技術的基盤)은 1889년 개발되어 20세기 중반까지 스위스군이 제식 화기로 사용한 슈미트-루빈(Schmidt?Rubin) 소총에서 찾을 수 있을 만큼 오래되었습니
다.
↑기반이 되었던 슈미트-루빈 소총
19세기 말 현역 군인(現役軍人)이던 루빈(Eduard Alexander Rubin, 1846년 7월 17일~1920년 7월 6일)은 스위스의 기계 엔지니어로서 1882년 풀 메탈자켓 총알을 발명한 것으로 가장 유명하다)은 탄두(彈頭)를 동(銅)으로 감싼 최초의 동갑탄(銅甲彈)인 7.5×53.5mm 탄(彈)을 개발(開發)했습니다.
관통력(貫通力)이 향상(向上)되었고 기존 철갑탄(鐵甲彈)보다 부식(腐蝕)에 강해 장기 보관(長期保管)에 편리했습니다.
탄자직경(彈自直徑)은 7.77mm여서 많이 사용하는 7.62mm 구경(口徑) 탄과도 쉽게 호환(互換)이 되었습니다. 같은 시기에 역시 현역 군인이던 슈미트(Rudolf Schmidt)는 이를 기반(基盤)으로 하는 총의 개발에 착수(着手)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