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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제작사의 역사와 현황
시트로엥(Citroen)사는 최초에는 기어를 만들던 회사였다. 1913년 설립된 시트로엥은 기어를 만들면서 톱니를 '세브론(갈매기 문양) 형태로 만들었고 1916년 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하며 이 모양을 시트로엥의 엠블렘에 사용하였다. 50~60년대 년산 20~30만대 규모로 확대, 60년대말 년산 40~50만대에 도달 하였으며, 1974년 푸조사에 합병되었고, 1976년 이들의 지수회사인 P.S.A. 푸조-시트로엥을 설립한후 1980년 지금의 명칭인 푸조 P.A.로 변경하였다.
시트로엥은 강한 개성으로 프랑스의 자존심을 대변한다. FWD차 개발과 생산에 있어서 가장 긴 역사를 가진 자동차 메이커 중 하나로 1976년 푸조와 함께 PSA그룹으로 새롭게 태어나면서부터 재정, 기술, 산업협력의 이점을 십분 활용하고 있다. 현재 PSA그룹은 VW, 피아트 그룹에 이어 유럽 제3위의 자동차 그룹이다. 앙드레 시트로엥이 1919년 시트로엥 타입A를 세상에 첫선 보인 이후 지금까지 첨단 기술과 시대를 앞선 날렵한 디자인, 그리고 뛰어난 성능으로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금세기 최고의 장인 베르토네의 디자인이 살아 숨쉬는 시트로엥은 상황에 따라 고품격 세단에서 첨단 스포츠카로 변신할 수 있는 다양성까지 갖추고 있다. 한 마디로 시트로엥은 경제적이면서도 멋스러우며 성능 또한 뛰어나다.
시트로엥하면 기묘한 디자인과 하이드로릭 메커니즘을 판매하는 메이커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우수한 디자인과 첨단 기술력을 자랑한다. 넓은 실내와 쾌적성 중심의 컨셉트는 첫 모델이후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으며 또 그것은 안락감과 모험심을 내포하고 있다. 과거 시트로엥에 대해 네가티브적 인상을 가졌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푸조 그룹과 합병되면서부터, 예를 들어 쟌티아 모델 이후부터는 확실히 신뢰성이 향상되었다. 그것은 플랫폼을 비롯해 파워 트레인 등 주요 콤포넌트를 푸조와 공용하는 것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푸조와는 다른 시트로엥만의 무언가가 있다. 그건 바로 디자인이다. 디자인에 있어서 만큼은 변함없는 독자만의 테이스트를 갖고 있다.
1. 프랑스 대통령이 좋아했던 차
롤스로이스나 벤츠 같은 고급차도 아닌 대중차에 가까우면서도 프랑스 대통령 드골의 차였던 시트로엥에는 과연 어떤 매력이 있는 걸까? 한 마디로 시트로엥은 경제적이면서도 멋스럽고, 성능이 뛰어나다. 또한 시트로엥은 항상 색다르다. 새 모델이 나올 때마다 사람들은 그 파격적인 모습에 깜짝깜짝 놀란다. 스포츠 카를 제외한 일반 승용차 중에서 시트로엥 만큼 개성 있는 스타일을 가진 차는 없다. 늘씬하고 매끄러운 곡선으로 된 시트로엥은 옆모습이 특히 아름답다. 뒷바퀴를 최대한 뒤쪽으로 밀어붙여 다른 차보다 앞바퀴와 뒷바퀴 사이가 길고, 차 크기에 비해 실내가 무척 넓다.
앙드레 시트로엥(Andre Citroen 1878~1935)은 가난한 네덜란드 출신의 보석공의 아들로 1878년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파리의 명문 국립공과대학을 졸업한 뒤 '모르'라는 자동차회사에 취직하면서 자동차 제작의 꿈을 키우게 된다. 이 회사에서 주임기사가 된 후 미국의 포드자동차 공장을 견학하고 포드의 추종자가 됐으며 이어 영국, 독일 등의 자동차공장을 돌아보며 자동차에 대한 견문을 넓혔다. 스스로 자신의 사업을 일으킨 것은 1913년 그가 35세가 되어서다. 어느 날 길을 걷던 중 우연히 톱니기어의 작동을 보고 그 정확함과 적은 소음에 놀란 그는 곧바로 톱니바퀴 생산권을 따내 V자형 톱니를 가진 기어를 제작했는데,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온 시트로엥사의 더블 쉬브론의 엠블램은 바로 이 V자모양의 톱니바퀴를 도안한 것이기도 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포병 장교로 근무하면서 프랑스군이 포탄 부족으로 애를 먹는 것을 보고 포드의 대량생산 방식을 도입해 하루 5만개의 포탄을 생산해 큰돈을 벌었다. 그러던 중 드디어 1919년 배기량 400cc와 1,400cc의 엔진을 얹은 자동차를 개발했다. 그리고 이 두 대의 자동차 중 1,327cc 엔진을 얹은 모델을 보완해 4기통 18마력의 시트로엥 타입A를 내놓았다. 이 차는 주위의 우려와는 달리 주문이 밀렸고 값싸고 예쁘장했으며 또 시트로엥 특유의 사업적 명성이 작용해 보름만에 1만6천대, 한 달만에 3만대의 주문이 들어와 예상을 뒤엎었다.
1921년에는 새 모델 B2를 내놓았고 다음해에는 탱크바퀴형의 고무제 캐터필러로 뒷바퀴를 개조한 B2를 몰고 세계 최초로 사하라 사막을 횡단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다시 2년 후에는 8대의 B2로 조직된 탐험대가 아프리카 북쪽 알제리에서 남단 케이프타운까지 종단하는데 성공, 주가를 크게 높였다. 여기에서 자신을 얻는 그는 1922년에는 유럽의 자동차 대중화를 앞당긴 5CV타입C를 내놓았다. 이 차는 배기량 856cc의 작은 엔진으로 시속 60km를 자랑하는 우수한 성능과 멋진 스타일, 그리고 황금색 휠과 차체에 검은 색의 팬더를 가진 차로 명성을 떨쳤다. 1925년에는 프랑스 최초로 순강철제 시트로엥 B12를 만들어 코끼리를 차 지붕 위에 태워 큰 히트를 쳤다.
유럽최초로 대량생산방식을 도입한 것은 물론이고 획기적 수법을 자동차제조에 투입했던 앙드레 시트로엥은 하드면 이외의 부분에도 많은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겼다. 그것을 대표하는 것이 광고전략이다. 1922년 파리살롱 개막일에 비행기를 사용해 하늘에 'CITROEN'이라는 글씨를 그려 사람들의 넋을 잃게 만들었다. 지상에는 시트로엥의 이름이 찍혀있는 길 안내판 15만개를 만들어 프랑스 전국에 세웠고 '시트로엥'이라는 월간지도 15만부씩 만들어 뿌렸다. 또 1925년에는 지상 300m 높이의 에펠탑에 25만개의 전구와 90km의 전선을 이용해 파리의 밤하늘에 시트로엥을 선전했다. 그 문구는 '시트로엥, 잘 생각해서 결정하십시오.'였다. 이런 기발한 아이디어로 1930년대 들어서면서 르노와 푸조를 제치고 프랑스 제1위의 자동차 생산공장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1934년에 만들어 낸 것이 그 유명한 전륜구동방식의 '트락숑 아방 7CV'였다. 32마력 4기통 1,303cc는 최고속도 95km/h로, 리터당 11km를 갈 수 있는 성능으로 앙드레의 도박은 또 성공을 거두었다.
하나의 모델이 찬란한 불빛을 받으며 이 세상에 태어나 어떤 것은 슬프게도 아주 짧은 생명으로 사라져 버리기도 한다. 반면 오랫동안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긴 수명을 이어가는 것도 또한 적지 않다. 이처럼 긴 수명을 유지한 차로서 떠오르는 모델은 VW 비틀과 로버 미니가 있다. 또 시트로엥 2CV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세계의 모터리제이션은 여태까지 없었던 발전을 이루었다. 즉, 자동차가 폭발적인 증가를 보인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러한 정세를 가능하게 한 것은 자동차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열강들이 우수한 대중차를 전쟁 전, 또는 전시 때부터 조용히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서독의 폴크스바겐은 전후 독일의 기적적인 경제부흥을 이룩한 원동력이 되는 당시의 대표적인 국민차이며 많은 양산 메이커는 거기서 본받아 대중차 제작을 본격화했다. RR(Rear engine, Rear drive) 방식을 채용하여 전쟁 전까지는 극히 일부의 고급차 이외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4륜 독립현가방식을 취해 주행성 및 승차감의 향상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이 하나의 정석이 되었다. 이때부터 RR방식은 유행처럼 번졌다.
자동차의 세계에서도 다른 모든 인간 활동의 분야와도 같이 기술 및 스타일링의 유행이 자동차의 모습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폴크스바겐 비틀의 영향만큼 자동차의 모습을 크게 좌우한 예는 드물다. 폴크스바겐은 또 구동방식뿐만이 아니라 대중차의 개념 그 자체에 영향을 미쳤다. '경량화를 하면서 실내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보디형상을 구형에 가깝게 할 것' 이것은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의 보디 설계 기본이념이었다. 이것은 그 후 세계 각국의 자동차에 반영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세계적인 유행 속에서 폴크스바겐식 발상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차를 만든 메이커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전쟁 전부터 전통을 유지해 온 서독의 DKW, 스웨덴의 사브(SAAB) 등은 전륜구동방식(FF)이며 이것들은 폴크스바겐이나 르노, 피아트 등에 비하면 생산대수도 적고 따라서 전체적인 영향력도 그다지 크지도 않았다. 그러나 폴크스바겐과 대조적이면서도 전후 세계의 자동차사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긴 모델이 있다. 그것이 바로 시트로엥이 만든 자동차이다.
오늘날의 자동차시장은 국제화가 극도로 진행되고 있다. 어느 자동차 생산국도 자국시장뿐만 아니라 세계의 어느 시장에도 적합할 수 있는 차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상식이 되어 있다. 그러나 시트로엥이 만든 모델의 최대의 특징은 어디까지나 프랑스인이 만든 프랑스만의 자동차로서 기획, 설계되었고 거기다가 그 완성도의 훌륭함에 세계의 자동차시장에서 독특한 인기를 얻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프랑스인의 기지와 독특한 감성 없이는 절대 태어날 수 없었던 차다.
앙드레 시트로엥이 자동차업계에 진출한 것은 프랑스의 대 메이커로서는 가장 늦은 제1차 세계대전 후인 1919년의 일이다. 시트로엥이 자신의 차를 만들면서 제일 먼저 참고로 한 것은 미국의 헨리 포드였다. 물론 이것은 시트로엥에 한정된 것은 아니다. 당시 양산차 제작을 목표로 한 사람은 누구든지 포드의 방법을 배우려 했다. 포르쉐도 포드를 참고로 공장을 세웠다. 시트로엥은 '프랑스의 포드'가 되려고 했다. 그 때문에 천재적이라고 할 수 있는 기상 천외한 선전광고를 실시하였으며 제작하는 차도 양산방향으로 설계했다. 예를 들어 T형 포드까지도 스포크 휠이었는데 시트로엥이 최초로 생산했던 '타입A'에서는 사상 처음으로 스틸 디스크 휠을 채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 발명은 1914년 같은 프랑스의 미쉐린사가 완성했던 것이다. 그것을 바탕으로 시트로엥은 그의 생애 최대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는 모델을 만들었다. 그것은 1934년에 데뷔하여 프랑스에서 일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트락숑 아방(TCV)이라는 모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앙드레 자신은 경영상의 무리가 있어 회사를 떠나게 되고 그것이 그에게는 큰 충격으로 작용했든지 그 이듬해 세상을 떠나고 마는 비운을 겪는다.
그로 인해 경영 위기를 맞이한 시트로엥사는 한때 미국의 GM에 흡수될지도 모르는 상황에까지 처했었으나 다행히 프랑스 민족자본계인 미쉐린사가 인수하게 된다. 하지만 시트로엥 최대의 걸작 트락숑 아방은 샹송의 가사에 들어갈 만큼 인기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일대 걸작이 되었고 그로 인해 시트로엥사의 경영은 안정상태로 돌아섰다. 하나의 모델이 찬란한 불빛을 받으며 이 세상에 태어나 어떤 것은 슬프게도 아주 짧은 생명으로 사라져 버리기도 한다. 반면 오랫동안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긴 수명을 이어가는 것도 또한 적지 않다. 이처럼 긴 수명을 유지하는 차로서 먼저 떠오르는 것은 폭스바겐 비틀이다. 그러나 비틀과는 대조적이면서도 롱런을 계속한 차가 또 있다. 그것이 바로 앞에서도 여러 번 언급한 시트로엥 2CV이다.
1936년 당시 시트로엥사를 대표하는 사람은 삐에르 블랑제였다. 여름 어느 날 블랑제는 휴가로 프랑스 중부 어느 마을에 와 있었다. 마을은 마침 시장이 열린 날이어서 손으로 밀어서 움직이는 짐마차들로 복잡했다. 그때 그는 문득 '이런 차를 정말 값싸고 효율이 높은 자동차로 바꿀 수 있다면 어떨까? 소형이지만 스포츠성은 별로 필요없다' 즉, 기계를 설치하여 말을 대신하는 실용위주의 자동차를 생각한 것이다.
프랑스라는 나라는 결코 '예술의 나라'만은 아니다. 물론 그런 면은 파리 등의 대도시에는 짙게 드리워져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농민의 나라인 것이다. 땅과 함께 살면서 보리와 감자를 심고 소의 젖을 짜서 스스로 버터나 치즈를 만드는 농민의 나라이다. 오늘날에도 그런 성격은 변함이 없다. 예를 들어 EC의 농업문제도 프랑스만은 항상 독자적인 주장을 갖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블랑제가 생각한 것은 프랑스의 '땅위의 함대'라고 할 수 있는 농민을 위한 차였다. 물론 당시의 농민에게 말은 교통 및 운송수단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말의 사육문제가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과 거의 같은 비용으로 탈 수 있고 거의 고장도 없으면서 최소한의 요구를 채울 수 있는 차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구체화하는 일은 할 수 있는 듯하면서도 상당히 어려운 것이었다. 헨리 포드만이 T형 포드로 그것을 실현시켰다. 따라서 T형 포드가 광대한 국토를 배경으로 한 미국의 농민의 발이 되었듯 이 차도 프랑스의 T형이 되는 것이 아니면 안 되는 것이었다.
블랑제가 시트로엥의 이런 헨리 포드에 도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 어떤지는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그러한 최저한의 차가 생기면 그것은 시트로엥의 명성을 유지시켜 주는 것은 물론이다. 파리에 돌아온 블랑제는 즉시 이 계획의 실현에 전력했다. 그는 설계담당직원들에게 꽤나 어려운 조건을 주고 그것을 엄수하도록 명령했다. 그 첫 번째는 '달걀테스트'였다. 즉, 바구니에 들어 있는 달걀을 시트에 싣고 시골의 비포장도로를 65㎞/ h로 달리게 해도 달걀이 하나도 깨져서는 안 된다는 조건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모자 테스트'였다. 블랑제는 꽤 키가 큰 남자였으나 모자를 쓴 채로(당시 프랑스에서는 모자를 항상 쓰는 것이 관습이었다) 편하게 차내에 들어갔다 나왔다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이 두 가지가 2CV의 설계에 기본적인 조건이 되었다. 즉 외형의 크기에 비해 넓은 실내공간을 가지고 혁신적인 서스펜션 시스템에 의하여 아주 부드러운 승차감을 가지는 것이 그것이다.
시트로엥 2CV는 프랑스 농민을 대상으로 설계되었음은 이미 언급했으며 그것은 '달걀 테스트'에 반영되고 있다. 그리고 '모자 테스트'는 오히려 도시적인 쾌적함을 추구하려는 것이었다. 바로 여기에 이 2CV가 보다 넓은 층에 어필할 수 있는 요소가 있는 것이다. 농민은 원래 지극히 검소한 생활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점을 배려하면서도 말의 사육비를 크게 초과하지 않도록 가능한 한 작은 엔진을 탑재하도록 했다. 그러면서도 충분한 성능을 발휘하여 신뢰성도 높은 것이어야 한다. 그 당시로서는 불가능이라고 할 정도의 어려운 조건이었다.
그 엔진은 수평대향 2기통, 보어×스트로크는 62×62mm의 스퀘어 타입으로 배기량 375cc에 8ps였다. 주목할 것은 이 프로토 타입의 엔진은 수냉식이었으며 아웃보드엔진으로 끈을 잡아 당겨 시동하도록 되어있었다. 최초 프로토 타입의 보디는 단조로운 인상이 강했다. 캐빈 뒤쪽은 평평한 짐받이로 되어 있고 이것들은 강판을 조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후에 혁신적인 서스펜션 시스템의 테스트에서 충분한 기능을 발휘했다. 1939년 5월에 300대의 프로토 타입이 완성된다. 이들의 보디 스타일은 최초의 프로토 타입에 비하면 상당히 세련된 것으로 그 중에는 알루미늄 보디도 있었다. 그리고 헤드라이트는 모두가 왼쪽에 하나가 있을 뿐이었는데 당시 프랑스의 도로교통법에는 그것이 허락되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있었던 끈을 당기는 스타터는 성능은 좋았으나 여성 드라이버를 고려해 전기 시동장치로 교체되었다.
이들 프로토 타입은 같은 해 가을 파리살롱에 발표될 예정이었으나 l939년 9월 1 일 나찌 독일이 침공,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어 2CV계획은 보류되고 말았다. 그러나 전쟁의 종료와 함께 2CV계획은 더 한층 열의를 가지고 부활됐다. 이런 종류의 경제차가 전후의 모터리제이션에 가장 적합한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했기 때문이다. 전후의 2CV 보디라인은 1939년의 프로토 타입과 거의 동일했는데 헤드램프가 하나 더 추가되고 윈도우도 종래보다 커졌다. 서스펜션도 한층 개량되고 엔진의 배기량은 동일하면서 공랭식으로 변경되었다. 전쟁 뒤는 어느 나라나 물자부족의 상태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시트로엥은 엔진은 물론이고 서스펜션 시스템에도 최상의 재질을 사용하여 그 내구성을 증대시키려는 노력을 했다. 그 대신 보디는 가능한 한 간단하고 값싸게 만들었다. 꾸밈없이 기능적이며 미운 오리새끼라고 불리면서 어딘가 해학적인 매력이 풍부한 보디, 그것은 프랑스인의 고도의 기지와 재치 없이는 결코 불가능한 스타일링이라고 해도 좋다.
그러나 그런 '미운'면의 뒤에는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참신한 아이디어가 숨겨져 있었다. 그 헤드램프는 차내에서 노브(Knob) 하나로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었다. 캔버스 탑은 뒤쪽에서 접을 수 있고 오픈된 상태의 주행도 즐길 수 있었다. 시트도 언뜻 보면 섬세하지 않은 것이었으나 바짝 당겨진 강성 밴드 위에 쿠션을 얹은 것으로 느낌이 좋고 앞뒤 모두 쉽게 빼낼 수도 있었다. 대시보드에 있는 계기는 스피드미터 뿐이지만 이것으로 또한 와이퍼까지 작동하게 돼 있었다. 그래서 스피드가 빨라지면 와이퍼의 움직임도 빨라지고 정지하면 와이퍼도 멈추는 구조다. 섀시의 구조도 아주 독특했다. 플랫폼 프레임의 좌우 양끝에 제로로 코일스프링을 넣은 홈이 있고, 그 전후 양끝에서 뻗은 로드가 앞뒤의 바퀴에 연결되어 있었다. 이 사상 최초의 전후연결 독립 현가 시스템은 소위 '콜롬부스의 달걀'적 발상인데 간단하면서도 효율이 높아 실로 '달걀테스트'에 훌륭하게 합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트로엥 2CV는 1948년 파리살롱에 TPV(Toute Petite Voiture: '매우 작은 차'라는 프랑스어) 2CV가 발표되었고 과거 트락숑 아방과 같이 즉시 히트작이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프랑스 서민의 발뿐 아니라 세계의 명차로 무려 40여 년 동안 생산되어오다 1988년 2월 프랑스공장에서는 생산을 중지했고 포르투갈 공장에서 명맥을 유지하다 1990년 7월에 포르투갈제 2CV도 결국 단종 되었다. 비틀, 미니 등과 함께 수명이 가장 긴 차의 하나로서 자동차역사에 하나의 굵은 획을 그었다.
1955년 10월 4일 제42회 파리 살롱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D19는 미래 자동차 같은 스타일과 그 내면에 탑재되어있는 독창적 메커니즘으로 전시장에 방문한 관람객들을 놀라게 했다. 발표 당일만 1만2천 건에 달하는 주문이 밀려들었고 저널리스트들은 "시대보다 10년은 앞선 자동차다"라고 대서특필했다. 3,125mm의 긴 휠 베이스 위에 탑재된 보디는 전장이 4,800mm, 전폭이 1,800mm, 전고가 1,470mm로 스타일은 자동차라고 하기보다는 우주선을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독특한 섀시구조 외에 가장 획기적이었던 것이 하이드로릭 시스템이다. 이것은 1개의 유압 펌프에서 송출된 오일 압력에 의해 작동하는 서스펜션, 기아박스, 브레이크, 스티어링 관련 시스템이다. 또 이 모델은 전륜에 디스크 브레이크를 사용했는데 이것은 시판차로는 세계 최초였다. 일반적 메커니즘의 4기통 1911cc의 파워 유닛은 최고 출력 75HP/4500rpm으로 눈에 띌 정도의 수치는 아니었지만 140Km/h의 탑 스피드를 냈다. 이후 종래의 DS방식의 파워 스티어링에는 고속시 직진안정성이 불안하다는 결론을 내린 기술진은 새로운 스티어링 시스템을 내놓았다. 속도를 올리면 어시스트양이 감소해서 무거워지고 강제적으로 직진위치를 찾아주는 기능까지 적용했다. 사내에서는 이것을 Diravi(Direction a Rappel Asservi)라 불렀다.
60년대 들어서는 신 모델S라는 코드네임이 달린 프로토 타입에 DS의 플랫폼 섀시에 경합금제 보디를 탑재했다. 엔진은 초기에는 DS엔진을 사용했지만 후기에 5단 기어박스와의 조합으로 최고 속도 202Km/h로 시트로엥 처음으로 200Km/h를 초과해 설계자들은 자신의 목표를 달성한다. 그러나 1965년 자사의 엔진개발능력이 그저 그렇다고 느낀 경영진은 마세라티 엔진을 사용한 GT카(코드네임 SM) 생산을 발표한다. SM 프로토 타입 제1호를 1967년 완성, 215Km/h의 최고 속도를 기록하고 다음해에는 220Km/h를 달성했다. 그리고 2년 후 SM은 1970년 제네바 쇼에 정식 데뷔했다.
피아트가 시트로엥과의 업무협력 종료를 발표하고 여기에 오일 쇼크로 큰 타격을 입고 자력으로 자동차를 계속 생산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 시트로엥은 푸조와의 기업 그룹을 결성하게 되고 마세라티의 고성능 유닛을 필요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푸조로 인해 결국 1975년 5월 마세라티와의 관계를 청산한다. 자동적으로 다음해 시트로엥의 카탈로그에서 SM은 자라져갔다. 6년간의 생산대수는 1만2천9백2십대였고 그중 최후의 135대는 F-1 레이싱카 컨스트럭터 리제의 손에 들어갔다.
1970년대 SM, GS에 이어 또 하나의 뉴 모델을 발표하는데 이 모델이 DS의 대를 잇는 미들급 살롱 CX이다. 개발을 시작한 것은 1966년말로 DS를 발표한지 11년 후의 일이다.
DS와 같은 수준의 실내와 트렁크를 갖으며, 보디는 보다 낮게 그리고 최고속은 월등히 빠르면서 노이즈 레벨을 낮춘다는 컨셉이었다. 1974년, 파리 살롱에 1985cc와 2175cc의 두 종류를 선보이는데 각각 102HP/rpm, 112HP/5500rpm이었다. 4단 기어박스를 결합 2.0이 174Km/h, 다음해 발매한 2.2가 179Km/h의 최고 속도를 냈다. CX는 GS에 이어 유럽 '1975 올해의 차'에 선정된다. 1973년 6월, 1968년이래 협력관계였던 피아트는 시트로엥과의 협력관계에 종지부를 찍는 발표했는데 그 이유는 막대한 투자와 양사의 라인 업 통합을 진행하던 피아트와는 달리 시트로엥은 독립성을 계속 주장한 것이 원인이었다. 또 시트로엥과 합병회사를 설립해 로터리 엔진의 공동개발과 생산을 하던 NSU가 1969년에 최대 라이벌 VW 산하로 들어간 것에 대한 시트로엥에 대한 불만 때문이다. 결국 피아트는 갖고 있던 지분을 미쉐린에 넘겨버린다.
같은 해 10월, 이번에는 오일 쇼크가 왔다. 시트로엥은 다음해 발표 예정인 CX 때문에 대폭적인 설비투자가 필요하게 되었지만 자력으로 회사를 일으킬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은 악화되었다. 미쉐린은 그저 정부의 원조만 구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던 중 1974년 6월 24일, 프랑스 정부의 중개로 푸조와 시트로엥이 기업 그룹을 형성한다고 발표한다. 양사의 브랜드, 라인 업, 판매안은 독자성을 확보하고 그 이외의 것에서는 협력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다. 이 그룹의 주도권은 확실히 푸조에 있었다. 사실 2년 후 4월에 푸조는 시트로엥 주식 89.95% 취득했고 그 직후 푸조 SA는 오토 모빌 푸조와 오토 모빌 시트로엥의 두 회사의 조직을 개편한다. 이로 인해 시트로엥은 푸조 그룹의 일원으로 재출발하게 된다.
합병 후 최초의 뉴 모델은, 시트로엥이 정식으로 푸조 그룹의 일원이 된 1976년 파리 살롱에 등장한 LN이다. LN은 독자의 파워 유닛을 제외한 대부분이 3년 전 발표한 푸조 104 쿠페와 같은 것이다. 시트로엥을 자신의 손에 넣게 된 푸조는 적은 예산으로 경제적인 신형차를 빠르게 시장에 투입해야 한다고 판단, 푸조의 생산설비를 대폭 활용한 모델에 열을 올린다. GS, GSA와 CX 사이에 미들 클래스가 1982년 9월 BX라는 이름으로 데뷔한다. BX는 푸조의 생산설비를 활용했다는 점에 있어서 LN, LNA와 변함없지만 하이드로뉴메틱 서스펜션을 시작해 독자의 기술을 갖고 있다는 점이 달랐다. 한편 시트로엥은 엑스테리어 디자인을 처음으로 너무나도 유명한 이탈리아의 디자이너 카롯제리아, 베르토네 등 외부에 맡겼다는 것이다. 실질적으로 디자인을 담당한 것은 당시 베르토네 아래 있었던 마르첼로 칸디니였다. 1982년에서 1994년 단종 될 때까지 그레이드명의 변경과 외장의 변경을 거쳐 모두 9개의 파워 유닛, 24차종의 수를 자랑했으나 후속 모델 쟌티아의 등장으로 17차종으로 줄어든 뒤 현역에서 은퇴했다.
현행 시트로엥의 라인 업 중 최상급의 위치에 있는 모델은 1989년 5월 발표한 XM이다. XM은 구조적으로 한 단계 아래 차종인 BX의 최대 장점만을 잇고 있다. 모노 콕 보디, 베르토네의 손을 거친 직선적 조형의 5도어 헤치 백 스타일로 하이드로릭 시스템을 조합한 프런트 맥퍼슨 스트럿과 리어 트레일링 암의 서스펜션, 같은 유압을 이용한 4륜 디스크 브레이크와 파워 스티어링 어시스트 그리고 푸조제 파워 유닛 등이 그 구체적인 부분이다. 현재 프랑스에서는 22차종을 판매하고 있다. 시트로엥 XM은 개성적인 스타일과 고차원적 주행 안정성을 갖춰 전문가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CX이후 유럽 '1990 올해의 차'로 선정되기도 했다. 첫 발표이후 상당한 시간이 지났지만 다른 메이커에서는 볼 수 없는 시트로엥만의 디자인이 돋보이는 차종이다.
1996년 BX의 후속 모델이라 하는 쟌티아를 제네바 오토 살롱에 발표했다. 쟌티아는 5도어 헤치 백 보디의 유연하면서도 역동적인 스타일은 유럽의 매스컴과 대중들에게 찬사를 받았다. 그리고 XM의 하이드랙티브를 개량한 하이드랙티브 II시스템을 상급 모델에 장착하고 있다. 시트로엥의 아이텐티티를 확실하게 계승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한 사람이 여러 사람의 몫을 해내는 것, 바로 1990년대 시트로엥이 지향하는 길인 것이다.
2. 생산차종
현재 생산중인 모델은 XM, Xantia, Evasion, Berlingo, Saxo, Xsara, Xsara Picasso 등이다.
3. 사업내용
푸조 S.A.는 푸조와 시트로에의 지주회사로 그 산하에 자동차사업을 총괄하는 Automobiles Peugeot과 Automobiles Citroen이 있으며 비자동차사업으로 자전거, 2륜차 엔진, 운송, 금융, 서비스가 있다. 프랑스 자동차그룹인 푸조-시트로엥(PSA)은 오는 2002년까지 자동차 생산 대수의 3/4을 새로 건설되는 공장에서 생산할 계획이다. PSA그룹은 리오 데 자네이로 지역에 6억달러 규모의 공장을 지을 예정이다. 오는 2000년쯤 가동개시에 들어갈 이 신규공장은 년간 10만대의 푸조와 시트로엥을 생산할 능력을 갖추게 된다. 이 그룹은 자체 생산하는 자동차 대수의 상당 비율을 유럽외의 지역에 판매할 전략을 세워 놓고 있다. 현재 16%인 이 비율을 몇 년 후에는 25%로 끌어올릴 계획이다.
최근 이 그룹은 획기적인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자동차 공장수를 현재의 7개에서 3개로 줄일 것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결국에는 모두 하루 1,000대 생산능력을 갖춘 6개의 공장을 운영하여 푸조와 시트로엥 브랜드 자동차 생산에 특화할 예정이다. 한편, 앞으로 수개월 내에 프랑스 멀하우스의 공장은 푸조 106의 생산을 중단하고 대신 신모델인 푸조 205를 생산할 계획인데 모델 106의 생산을 파리 근처의 공장으로 옮긴다. 또 미국시장에는 우선 순위를 두지 않고 있으나 현재 3.5%에 머물고 있는 독일시장의 점유율을 높이는데 관심을 두고 있다. 이를 위해 독일시장에 적합한 자사의 신모델을 생산할 계획이다.
4. 국내 사업내용
시트로엥은 1995년 서울 모터쇼부터 본격적으로 국내에 소개되었다. 현재는 종합건설 시공전문업체 삼환까뮤 자동차 사업부가 1994년 5월부터 쟌티아와 사라를 각각 3천6백8십만원, 2천8백6십만원에 수입판매하고 있다.
5. 신기술 적용 사례
(1) '모노코크' 라는 차체와 전륜구동(FWD)은 세계 최초로 적용
'모노코크' 의 원리는 달걀과 비슷하다. 100g 이 넘는 무게를 떠 받칠 수 있다. 달걀은 가로로 놓이면 쉽게 깨지지만, 세로로 놓이면 아무리 무거운 물건을 얹어도 잘 깨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 둥근 구조의 장점을 따온 것이 바로 '모노코크' 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트로엥은 시속 60Km 로 달리다가 정면 충돌해도 실내가 전혀 찌그러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오늘날 많이 사용하고 있는 앞바퀴 굴림차를 세계 최초로 본격적으로 만든 것도 시트로엥이었다. 그 이전까지는 대부분 뒷바퀴 굴림차였다. 앞바퀴 굴림차는 스피드가 뛰어나고, 커브길에서 운전하기가 편하다는 장점이 있다. 그리고 오늘날 많이 사용하고 있는 앞바퀴 굴림차(전륜구동:FWD)를 세계 최초로 본격적으로 만든 것도 시트로엥이었다. 그 이전까지는 대부분 뒷바퀴 굴림차였다. 앞바퀴 굴림차는 스피드가 뛰어나고, 커브길에서 운전하기가 편하다는 큰 장점이 있다.
(2) '하이드로릭' 시스템
시트로엥을 대표하는 기술은 하이드로뉴메틱 서스펜션을 메인으로 하는 하이드로릭 시스템이다. 1954년 트락숑 15-Six에 시험적으로 적용한 후, 다음해 발표한 DS19에서 본격적으로 실용화한 이 기술은 이후 현재까지 시트로엥의 중, 대형 클래스 모델에서 계승 발전된 시스템으로 시트로엥사의 아이덴티티의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하이드로릭 시스템은 결코 복잡한 메커니즘은 아니다. 간단히 말해서 보통 자동차에 장착되어 있는 쇽 업소버, 파워 스티어링, 브레이크 오일을 한 개의 펌프로 집중 제어하는 것뿐이다. 이 펌프에서 각 부분으로 전달하기 위한 긴 오일라인이 필요하다는 약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사용하는 오일이 한 종류밖에 없고 오일 보충도 한 곳에서만 하기 때문에 심플한 메커니즘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재래식 서스펜션의 단점은 바로 승차감과 접지력을 동시에 충족시키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승차감이 좋으려면 서스펜션이 부드럽고 유연해야하지만 반대로 쾌속주행 또는 스포티한 드라이빙을 즐기기 위해서는 서스펜션이 차량의 진동을 제어하여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딱딱해야 한다. 이처럼 재래식 서스펜션은 승차감과 접지력 모두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것이 용이하지 않다. 이런 단점을 극복해 도로와 주행 상황에 알맞게 적응시켜 주는 장치가 시트로엥의 하이드로뉴메틱 서스펜션이다.
하이드로뉴메틱 서스펜션(Hydro-pneumatic Suspension)의 하이드로뉴메틱이란 Hydro(물)+Pneumatique(공기)의 이름에서 따왔다. 하이드로뉴메틱 서스펜션은 재래식 서스펜션의 기계식 스프링을 기체와 액체의 2가지 유체로 대체한다. 금속제 구속에 질소가스를 채우고 LHM이라 불리는 녹색의 광물성 오일을 이용하는 것으로, 질소 가스는 압축 가능하여 서스펜션에 탄력을 주는 부위를 구성하며 오일(LHM)은 비압축성으로 이것이 바퀴의 진동을 스프링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펌프로는 오일을 공급하거나 배출하면서 오일의 양을 계속해서 조정함으로써 각 바퀴의 서스펜션 높이를 유지하도록 한다. 시트로엥의 하이드랙티브 서스펜션(Hydractive Suspension)은 항공기의 랜딩기어 시스템에서 착안해서 일반 스트링기어에 비해 작동의 폭을 무한화한 시스템이다.
이 기술은 전자제어에 의해 스프링 레이트를 변화시켜주는 것으로 Hydro + Active에서 유래한 것이다. 스포츠 또는 컴포트형식 중 어느 한 형식으로만 고정된 재래식 강철 서스펜션과는 반대로 자동적으로 가스량을 조정함으로써 서스펜션의 상태를 주행조건에 맞게 적응시킬 수 있다. 인공지능 서스펜션이라고 부르는 이 시스템은 온 보드 컴퓨터가 자동차의 주행 상태를 감시하는 5개의 센서(스티어링 휠의 각도와 회전속도 감시센서, 액셀레이터 페달의 운동속도 감시센서, 브레이크 회로 내의 압력 측정센서, 차체의 진동속도와 진폭 측정센서, 차량속도 감시센서)로부터의 정보를 취합하여 필요시 순간적(0.05초)으로 노말모드와 스포츠모드 사이를 자동적으로 전환시켜 적절히 반응하기 때문에 운전자는 그 반응을 거의 느낄 수 없고 유연하고 부드러운 승차감을 제공한다. 물론 노말모드에서 스포츠모드로의 변경을 운전자가 스스로 통제할 수도 있다.
이 하이드랙티브 서스펜션은 4단계로 차체높이를 조절할 수 있다. 승객수나 하중에 관계없이 일정한 차체 높이를 유지시켜주는 셀프 레벨링(Self Leveling) 기능을 갖고 있어 직진 성능이 뛰어나 앞바퀴의 돌발적 펑크에도 주행선을 유지시켜준다. 안정감이 뛰어나 뒷바퀴 1개를 탈착하고도 50Km/h로 지그재그 운행이 가능하다.
하이드랙티브 II 서스펜션(Hydractive II Suspension) 시스템은 하이드로뉴메틱 서스펜션보다 발전된 형태이며 쟌티아 VSX, XM에 기본장착되어 있다. 사실상 하이드로뉴메틱 + 전자동식 서스펜션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도로 및 주행상태에 알맞게 서스펜션을 적응시키는 시스템으로 소프트와 하드모드가 있다.
리어 셀프 스티어링 액슬(Rear Self Steering Axle)은 자동차가 코너링시 뒷차축이 회전해 앞바퀴의 터닝라인을 따르게 되어있어 고속 코너링시의 안전성을 높여 굽은 길에서 원심력에 의해 후방차축의 방향이 약간 바뀔 수 있도록 지지대가 변경될 수 있도록 설계한 시스템이다. 뒷바퀴는 재래식 후방차축에서 일어나는 현상과는 반대로 앞바퀴와 동일한 방향으로 회전한다. 이 자율조종 후방차축이 재래식 차축 보유차량보다 이론적으로 훨씬 더 큰 반경으로 회전하므로 차량은 더욱 빠르고 안정적으로 코너를 돌 수 있다. 재래식 서스펜션 보유차량은 앞바퀴와 반대방향으로 회전하는 뒷바퀴 때문에 생기는 롤링현상이 나타나는데 자율조종 후방차축 보유차량은 이런 롤링현상이 없다. 또한 앞바퀴와 동일한 방향으로 회전함으로써 뒷바퀴는 상당히 조종력이 증대되어 앞바퀴의 회전능률을 향상시킨다.
차량의 증대된 안전성과 코너에서의 개선된 접지력의 결과로 승차감이 보존되고, 반대로 매우 효과적으로 선회하는 후방차축의 자유로운 움직임은 도로상의 어떠한 굴곡도 소화해낸다. 근래에 들어 뒷바퀴의 코너링이 유리하다는 장점 때문에 포 휠 스티어링 시스템(Four Wheel Steering System)을 권고하고 있는 추세이기도 하다. 시트로엥의 하이드로릭 시스템은 스티어링과도 밀첩하게 관련되어있다. 속도 감응 스티어링 장치가 있어서 저속에서는 핸들 감각이 가볍고 고속에서는 무거워지도록 되어있다. 주행시 운전자는 별로 차이를 느낄 수 없으나, 불필요한 동작 때문에 갑자기 주행선을 벗어나는 사고를 방지한다는 점은 타사 장치와 크게 다르지는 않다. 하지만 고압 펌프에서 생산한 축적된 압력을 이용하는 파워 스티어링이기 때문에 엔진 정지시에도 한동안 핸들을 움직여 자동차를 조종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시스템의 또 다른 장점이다.
시트로엥의 ABS브레이크 시스템(Anti Lock Brake System)은 특히 고압 펌프의 지원을 받기 때문에 다른 차량들에 비해 훨씬 강력한 제동효과를 얻어낼 수 있다. 역시 엔진 정지시에도 축적된 압력을 이용하기 때문에 무려 100회나 브레이크를 작용시킬 수 있다.
결론적으로 앞에서 장황하게 설명한 이 하이드로릭 시스템은 쉽게 말해서 도로조건에 따라 최저지상고와 승차감까지 조절할 수 있는 장치다. 핸들링시 후륜바퀴가 전륜과는 반대 각도로 조절되어 최소회전반경이 적고 헤드램프까지 함께 따라 움직이는 능률적인 시스템이다. 고품격 리무진의 안락한 주행과 유럽 자동차 특유의 고속 주행성능으로 스포츠카의 느낌을 동시에 만끽할 수 있는 시트로엥만의 최첨단 기술이다.
6. 독특한 시트로엥의 마케팅
(1) 세계 최초로 사하라 사막을 횡단
어느날, 앙드레 시트로엥은 이런생각을 했다. '자동차 회사 중에서 제일 늦게 생긴 우리 회사가 푸조나 르노 같은 회사를 앞지르려면 광고를 기발하게 해야 해. 차만 잘 만들면 뭐 하나, 광고를 잘 해야지. 시트로엥을 몰고 사하라 사막을 횡단하면 어떨까?' 그렇게 해서 이 배짱 두둑한 젊은이는 1921년에 정말로 새로 나온 모델 B2를 몰고 세계 최초로 사하라 사막에 도전했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자신이 생긴 앙드레는 2년 뒤 B2 탐험대를 조직했다. B2 탐험대는 아프리카의 제일 북쪽 알제리에서 제일 남쪽 케이프타운, 그러니까 아프리카를 끝에서 끝까지 차로 탐험하는 신기록을 세웠다. 사하라 사막과 아프리카 횡단에 이어 기상 천외한 광고가 계속되었다. 유명한 것 중의 하나가 코끼리를 차 지붕에 태운 사건이다.
1925년에 나온 시트로엥 B12 는 순 강철로 된 차였는데, B12 가 얼마나 튼튼한지를 증명하기 위해 시트로엥은 집채만한 코끼리 한 마리를 구해다가 차 지붕에 얹고 시내를 돌아다닌 것이다. 1922년 가을 어느 날에는 파리 하늘에 난데없이 비행기 한 대가 나타났다. 당시만 해도 비행기는 신기하기만 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비행기가 어디론가 날아갈 생각도 않고 파란 하늘에서 곡예를 부리는 것이었다. 건물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뛰쳐나와 이 광경을 정신 없이 지켜 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비행기 뒤 꽁무니에서 연기가 뿜어 나오는 것이 아닌가! 잠시후, '시트로엥' 이라는 글자가 하늘에 선명하게 새겨졌다. 그뿐이 아니다. 시트로엥은 높이가 300m 나 되는 프랑스 파리의 유명한 에펠 탑까지도 광고에 이용했다. 전구 25만개 개와 전선 90Km 를 써서 에펠탑에 '시트로엥' 이라고 쓴 커다란 네온 사인을 매단 것이다. 르노와 푸조를 앞서기 위하여 시트로엥이 자동차 홍보에 기울인 노력은 대단했다. 앙드레 회장은 매월 '시트로엥' 이라는 잡지를 15만 부나 찍어 전 프랑스에 뿌렸을 뿐만 아니라, 유명한 사람들을 공장에 초대해서 견학시키고 잘 대접해서 돌려 보냈다. 또 아이들을 초대해서 시트로엥 미니 자동차를 일일이 선물하기도 했다. 기사거리가 없을까 날마다 고민하던 신문 기자들은 저마다 이 사건을 크게 다루었고, 그에 따라 시트로엥은 갈수록 유명해 졌다.
(2) 시트로엥은 자동차 역사상 처음으로 애프터 서비스를 실시하였다
시트로엥은 자동차 역사상 처음으로 애프터 서비스를 실시했다. 값싸고 편하고 예쁜데다 서비스도 만점인 시트로엥을 사람들이 좋아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꼴찌에서 시작한 시트로엥은 1930년에 드디어 프랑스 제일의 자동차 회사로 올라섰다. 1930년 한 해 동안 르노가 판 차는 6만 대, 푸조는 5만 대였던 반면, 시트로엥은 무려 8만 대나 되었다.
(3) 르노의 책략에 넘어간 시트로엥
트락숑 아방과 뒤를 이어 나온 11CV 가 큰 성공을 거두자, 르노 자동차의 회장 루이 르노는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했다. '그 따위 신출내기가 우리 르노를 앞서다니' 르노는 원래 교활한 사람이었다. 그는 시트로엥을 초대해서 새로 지은 르노 공장을 직접 안내했다.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신의 초현대식 공장을 자랑했음은 물론이다. 시트로엥은 부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돌아가서 르노 공장에 못지않는 최신식 공장을 세워야겠어.' 시트로엥은 돌아오자마자 세느 강변에 있는 자신의 낡은 공장을 당장 허물어 버렸다. 그리고는 사원들을 들볶아 석 달 만에 새 공장을 지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공장 내부는 검정과 하얀색의 타일로 깔끔하게 꾸며져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병원 수술실처럼 깨끗하다고 하여 사람들은 그 공장을 '앙드레의 수술실' 이라고 놀렸다고 한다. 공장은 완성되었으나, 회사는 그만 파산할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트락숑 아방을 개발하느라 들어간 연구비도 엄청난데, 무리하게 공장을 짓느라고 회사의 돈이 바닥이 난 것이다. 게다다 앙드레 시트로엥은 남한테 돈 빌리기를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시트로엥은 부도를 막아 보려고 버둥거렸지만, 결국 회사는 타이어 회사 미쉐린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앙드레 시트로엥은 평생에 걸쳐 이루어 놓은 회사가 남의 손에 넘어가자, 홧병으로 시름 시름 앓다가 1935년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4) 시트로엥의 모터스포츠
시트로엥은 독창적인 메커니즘과 디자인을 적용해 열광적 팬이 많은 시트로엥은 마니아 지향의 이미지가 강한 브랜드다. 하지만 시트로엥과 모터 스포츠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저을 수밖에 없다. 확실하게 이 메이커에서 생산한 자동차에는 순수한 스포츠카는 단 한 대도 없고 또 FF방식에다 롱 휠 베이스와 서킷트를 주행하기에는 최고로 불리한 형태와 메커니즘을 갖고 있다. 그러나 랠리를 얘기하면 다르다. 1934년 등장한 트락숑 아방의 FWD에 적용한 것과 같은 저중심과 주파성, 조종안정성의 높은 수준은 랠리에서는 커다란 메리트가 된다. 그래서 개인 참가자들은 이 대형 전륜구동차를 몰고 랠리 필드에 도전하면서 시트로엥 모터 스포츠의 역사는 시작된다.
시트로엥과 모터 스포츠, 그 모험과 도전정신은 창시자 앙드레 시트로엥 자신이 직접 아프리카와 중앙아시아를 향해 모험여행을 시작하면서부터이다. 1921년에 시트로엥 타입A와 B2를 베이스로 한 하프 트럭, 즉 보통의 타입A, B2와 같았지만 후륜에 군용차량처럼 케터필러를 장착한 차량으로 사하라 사막을 횡단하는 프로젝트를 실천에 옮겼는데, 시트로엥은 사하라 사막을 횡단한 최초의 자동차가 되었다. 또 시트로엥의 모험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아프리카 대륙을 종단해 최종적으로 마다카스카르섬에 도착한다는 계획을 세워 성공했는데 총주행거리가 20,000Km에 달했다.
그리고 유럽인에게 아프리카이상으로 미지의 세계였던 중앙아시아를 횡단하는 모험에 다시 도전한다. 지중해면의 베이루트에서 출발하는 파밀그룹과 중국의 천진을 기점으로 하는 차이나그룹으로 나누어 도전에 나섰으나 표고가 5000m에 달하는 파밀고원에서의 차량문제, 그리고 중국지역의 내란과 동료의 죽음으로 모험을 중단한다. 그러나 이런 실패 뒤에도 시트로엥의 어드벤쳐 스토리는 계속된다. 캐나다 북부의 북극권에서 C6을 베이스로한 하프 트럭 15대로, 영하 40도씨에 달하는 극한 지역 1,000Km를 18일간에 주파해서 무사히 환한다. 북부 캐나다에는 '시트로엥 피크'라고 하는 지역이 존재하는데 이것은 그때 모험대가 명명한 지명을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도전과 모험은 물론 영리적 목적은 아니었다. 자신이 방문하는 지역의 생태와 문화를 체험하고 그것을 필름에 담아 기록해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시트로엥 자동차의 사명인 '공간과 시간을 정복한다'를 구현화했고, 자동차가 사회와 문화에 커다란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세계의 자동차 메이커 중에서 이처럼 문화적 위업을 달성한 예는 찾아보기 힘들다. 앙드레 시트로엥이 시작한 모험과 도전은 일반 개인들에 의해 랠리로의 도전으로 이어진다.
(5) 차종별 랠리 활약상
트락숑 아방이 본격적으로 랠리에서 활약하기 시작한 것은 전후 1950년대가 지나서부터이다. 주 전력이 된 차종은 15-Six로, 프랑스 국내의 리용 랠리에서 그해 클래스 우승을 획득했다. 다음해에는 같은 레벨의 이벤트에서 종합우승을 차지했고 1953년에는 몬테카를로에서 3위, 다른 동급 랠리에서 2위를 차지하는 등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리고 이 트락숑 아방에 대를 이어 1955년 DS19가 발표되면서 참전차종도 점차 넓어지기 시작한다.
1959년 몬테카를로 랠리에서 ID19가 톱으로 골인하면서 승리에 자신감을 얻은 시트로엥은 더욱 더 적극적으로 랠리에 참전해 여러 대회에서 종합우승을 하고, 1963년 몬테카를로 랠리에서 종합 2위, 아크로폴리스에서 2위를 차지해 상을 휩쓴다. DS21로 1966년 몬테카를로에서 2번째 종합우승을 차지, 다음해 플라워 랠리 우승, 아크로폴리스 랠리 2위 등 계속해서 좋은 성적을 낸다.
그러나 그 때 포르쉐와 알피누의 파워 머신이 대두되기 시작한다. 그래서 시트로엥은 모로코와 같은 스피드보다도 내구성을 중시하는 이벤트에 활도의 장을 옮기기 위해 보디 전장, 휠 베이스를 대폭 단축해 2도어화하고 차고를 낮춘 총중량 850Kg의 프로토 타입을 제작 실전에 투입한다. 이 DS 쿠페의 데뷔전은 1969년 모로코 랠리와 다음해 같은 대회에서 노멀 보디를 합해 1~3, 5, 6위를 독점했다. 그후에도 1972년 2위, 73년 2~4위, 그리고 75년 4위에 입상한다.
1970년대 전반에는 시판형과는 달리 당초부터 3.0리터 270마력을 가진 랠리사양 SM이 1971년 모로코 랠리에 데뷔해 출전한 4대중 3대가 종합 1, 3, 4위를 선점해 그 실력을 과시했다. 다음해 DS와 같이 전장, 훌베이스를 대폭 개조한 프로토 타입이 TAP(포르투갈)에서 3위, 4밸브, 인젝션화에 의해 340마력의 파워를 갖고 다음해에 완주차 8대 가운데 6위로 골인했다. CX도 랠리 도전했는데 1976년 코트디브와르 챌린지에 이어 세네갈에서 1978년 1~3위, 1979년 우승, 1980년 모로코에서 1~3위 등의 성적을 거두었다.
1980년대 들어 국제 랠리의 세계은 양분된다. FIA와 FISA가 그룹 1~9의 대를 이어 그룹A~E로 새로운 카테고리를 설정하고, WRC는 그룹B가 된다. 1982년에 시트로엥 최초 그룹B 머신은 1360cc에서 93마력의 스포츠 버전 비사 1,000대를 한정으로 발매했고 이것을 베이스로 그룹B 모델 '트로피' 200대만 제작, WRC와 프랑스 국내 랠리의 하나로 원 메이크 컵을 제정했다. 다음해 구동방식을 파트 타임식 4WD화한 비사를 역시 200대만 한정 생산했는데 이 2대의 그룹B는 1982년 포르투갈에서 5위, 1984년 스웨덴에서 9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시트로엥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이번에는 종합우승을 목표로 1985년 11월에 BX보디에 전후의 오버 펜더, 대형 리어 윙 등을 장착한 박력 넘치는 머신을 제작한다. 파워 유닛은 2141cc 직렬 4기통 SOHC에 터보 차져를 장착해 380마력의 최고 출력을 발휘하는 풀 타임 4WD머신이다. 이 BX4CT는 규정의 200대를 제작해 그룹B에 도전, 1986년 1월 몬테카를로 랠리에 대뷔했고 계속해서 스웨덴에서 종합 6위에 입상했다. 그후 AX를 베이스로하는 머신으로 1990년 주요 활동무대였던 유럽에서 WRC 이벤트에 참전하기 시작해 지금까지 각종 랠리에서 수많은 종합우승을 차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