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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8: 20-22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노아께서 취한 제 의식을 보면 아담 때부터 하나님의 특별계시로 그런 내용이 제시되어서 전수되어 왔다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가인의 오류가 여기서 제삼 발견되는데 주께서 제시하신 진리대로 준행 하지 않은 것으로 추론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노아는 여호와께서 정하시고 제시하신 방식대로 번제를 드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의식을 내용과 함께 받으시고 노아에게 하나님의 정하신 뜻을 전하십니다. 이것이 노아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 곧 노아 언약이 나옵니다,
1. 본문 20절은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입니다.
노아가 자기의 순종에 대하여 많은 증거를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지금은 감사하는 본보기를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제사가 처음부터 이 목적을 위하여 시작되었다는 사실과 인간은 반드시 그런 생활로 자신들을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축하고 그분에게 감사를 드리는 생활에 습관화시켜야 된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말만으로 순수하게 고백하고 심지어는 마음 속만으로도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께는 만족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나태성이 얼마나 많은 자극제를 요구하고 있는가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조상들이 공식적으로 하나님에게 대한 자기들의 경건성을 이 제사로 공언하여 알렸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제사를 드리는 것은 절대로 불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외에도 그들은 언제나 자기들의 목전에 상징을 지니고 있었으니 그것으로 자기들이야말로 하나님께 직접 접근할 수가 없으며 오직 중재자를 통하여 갈 수 있다는 사실을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의 현현(顯現)은 이와 같이 고대의 그림자를 완전히 제거해 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제정하고 계신 그런 도움을 주는 것들을 참고해 봅시다. 더욱이 우리가 거룩한 조상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하려고 이 제사를 이용했다고 말할 때에 우리는 단지 한 가지만을 가리키며 말한 것입니다. 노아의 이 제물은 화목 제물이었으며 첫 열매를 드리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런 방법으로도 질문이 나올 수도 있으니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는 명령도 받지 않은 노아가 과연 무슨 충동으로 그 제물을 드리게 되었을까 하는 말입니다. 거기에 대하여 이렇게 대답합니다. 비록 모세가 하나님이 그것을 하라 명하셨다는 것을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에서 판단되고 있으며 심지어는 문맥 전체에서 어떤 판단이 내려지고 있습니다.
즉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고 있었으며 그렇게 하나님의 명령에만 의존하고 있는 가운데서 그는 이 예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또한 이 제사야말로 하나님께서 의심 없이 받으실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전에 말했지만 모든 종류의 동물들은 각각 별도로 보존되었으며 그렇게 하신 것이 무슨 목적이 있었는가를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제물을 바칠 제사장이 될 거룩한 노아에게 하나님이 이 계획을 알리시지 않고 이렇게 별도로 분리시켜서 보존했다면 쓸데없는 일입니다.
그밖에도 모세는 말하기를 그 제물들은 정결한 동물들 가운데서 골라내었다고 합니다. 노아가 자신의 능력으로 이렇게 구별하는 것을 고안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선택에 달려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이 없이는 아무 것도 수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바로 그 후에 모세는 추가해서 말하기를 그 제물의 냄새가 하나님에 의하여 흠향(歆饗)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일반적인 규칙이 준수되어야 했으니 믿음의 향기도 풍기지 않은 모든 종교적인 의식들은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악취만 풍기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노아의 제단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맙시다 그리고 그 제물들이 무미건조하게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동일한 말씀이 소금으로 그의 제물에 쳐져야 했던 것입니다.
2. 본문 21절 초두에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모세는 그 제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진정되신 것을 환기 시켜주고 있습니다.
안식의 향취를 맡으시고 하나님께서 마음이 만족하신 것을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마치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그 제물이 올바르게 잘 드려졌다고 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은 만족하셨다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고기 내장이나 고기들이라는 불결한 것으로 만족하셨다고 추측하는 것보다 더 모호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모세는 그의 일반적인 방법대로 하나님을 인간의 성품이나 특성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자신을 무지한 사람들의 역량에 적응시키려는 목적으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제물을 드리는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님에게 감사하는 갸륵한 행위라고 추측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는 그 일의 목적을 관심에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외적인 형식에만 국한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노아가 자기의 생명과 동물의 생명을 오직 하나님의 긍휼로 받은 선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외에 다른 무엇을 그 자신에게 제안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것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 경건성이 하나님 앞에서 향긋하고 달콤한 향기를 맡게 된 것입니다. 그 사실은 성경에 있는 대로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시116:12-13) 라고 한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3. 본문 21절 중반에
“그 중심에 이르시되”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바로 이것이니 하나님이 이후부터는 이 땅을 저주하지 않으시겠다고 작정하신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표현 형식은 굉장한 비중을 갖고 있습니다. 비록 하나님이 자신이 공개적으로 직접 말씀하신 것을 전혀 철회하시지는 않았지만 그분의 의중에 어떤 것에 대하여 확고하게 고정시키신 사실을 우리가 들을 때에 보다 깊은 충동을 받게 됩니다. 어떤 방법으로도 이런 종류의 내적인 명령은 절대로 피조물들에게 좌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체적인 것을 요약하면 하나님은 이 세상을 더 이상 홍수로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분명하게 결심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 하리니’ 라는 표현은 단지 일반적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인간의 죄로 인하여 이 땅이 부패된 이래로 이 땅이 얼마나 많은 기름짐을 상실했는지를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날마다 이 땅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저주를 받고 있다는 사실도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조금 후에 가서 그분 자신에게 설명하고 계시니 말씀하시기를 ‘모든 생물을 감하지 아니하리니’ 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모든 종류의 보복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세상을 멸망시키고 인간과 남은 동물들에게 파멸을 가져다 주는 것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다시 생각해 보면 마치 이 땅이 이후에는 절대로 홍수로 멸망되지 않을 것이라는 약정으로 이 땅을 다시 회복시키시겠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그분의 백성이 한번 포로로 잡혀감으로 만족하실 것이라고 선포하실 때에(사54:9) 그분은 그 포로생활을 노아의 홍수와 비교하고 계십니다. 그것으로 세상은 오직 한번만 엄습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결심하신 것입니다. 여기서는 끝 날에 있을 심판을 충분히 예시하셨습니다.
4. 본문 21절 끝에 있는 말씀은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입니다.
이 후론은 일치하지 않고 있습니다.
만약 인간의 사악함이 너무 지독하게 계속되어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킨다면 이 세상에 파멸이 내리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전에 세상의 허물이 극도에 달했기 때문에 파멸되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선포하신 것과 상치되게 행하실 분은 절대로 아닌 듯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분의 의도를 보다 깊이 심사숙고하는 것이 타당한 것으로 제시되고 있으니 그것은 인간 사회가 이 땅을 점유하고 살게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사람들이 그들의 황폐함에 대하여 처벌을 받는다면 매일 홍수의 재난이 그치지 않고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선언하기를 두 번째 세계에 형벌을 내리실 때에 단지 형벌로만 괴롭혀서 이 땅의 외부적인 모양을 그대로 보존하려는 것이며 하나님이 이 땅을 장식해 놓으신 모든 피조물들을 깨끗이 쓸어버리지는 않으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은 심판을 끝 날로 미루신다는 뜻입니다.
정말로 우리들은 하나님의 공의롭고 특별한 심판에서 그토록 심사숙고한 배려를 하셨으며 그렇게 하여 이 세상이 그 자체의 완전함을 지니고 지탱되고 있으며 자연도 아직까지 그 본래의 과정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은 여기서 세상 끝 날까지 인간의 성품이 어떻게 될지라도 모든 인류의 전체가 그들의 타락과 죄악성 때문에 확실히 정죄 아래에 있다는 것을 천명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그 선고는 단지 부패된 도덕성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성이 내적인 죄악이라고 언급되고 있으며 거기서 나는 것은 오직 악한 것만이 솟아나고 있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구절의 잘못된 번역이 과연 언제 기어들어 왔는가에 상당히 궁금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 생각이 악으로 기울어진다는 표현이 언제 삽입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단지 가능성이 있는 것은 인간의 부패에 관하여 지나치게 철학적으로 논쟁하는 자들에 의하여 이곳이 말씀이 오역되지 않았나 하는 것밖에 모르겠습니다. 인간이 마귀의 노예로서 죄에 복종해야 된다는 것은 그들에게 어려운 것으로 보인 듯합니다 그러므로 완화시키는 방법으로 그들은 인간이 악한 것으로 향하는 성벽을 지니고 있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의 재판장이 하늘에서 이 세상자체가 악하다고 불호령을 내리실 때 전혀 대처할 수 없는 그분의 진노를 과연 무엇으로 진정시킬 수 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인간들은 그들이 아담에게서 태어난 한 타락한 존재들이며 피조물들이라는 사실과 그러므로 그들이 그리스도의 새로운 창조를 받기까지는 오직 죄악된 사상만을 잉태할 수밖에 없으며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으로 지음을 받기 전에는 타락한 성품이며 죄악에 찬 사상이 가득 찰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여호와가 바로 인간의 마음이 타락되었다는 것과 전적으로 죄에 감염되어 있는 것을 선언하고 계시다는 것에 대하여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생각들이 거기에서 나오는 것들은 악하다고 선언하고 계십니다. 만약 그 원천 자체에 그런 결점이 있다면 인간의 모든 감정들은 악한 것이며 그의 행위들도 역시 똑같은 오염으로 덮여 있기 때문에 악하다는 것은 자연적인 귀결입니다.
그 모든 것들은 필연적으로 본래에 지니고 있는 냄새를 풍기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단지 인간들이 때때로 악한 생각을 한다고 말씀하신 것뿐만 아니라 또한 언어도 역시 예외가 되지 않고 제 멋대로 하며 그것은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아는 것과 같이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육신적인 사람이나 하나님을 모독하는 사람들이 때로는 관용과 관대한 면에서는 누구보다도 월등하고 의도하는 것들이 겉으로는 존경받을 만한 일을 하며 덕망 있는 사실을 제시하는 증거도 제시한다고 하여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반증하는 증거는 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경멸하는 마음으로 부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모든 혀들은 한결같은 사악으로 감염되어 있을 뿐입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그들의 모든 사고는 의로운 목적을 향하여는 전혀 기울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 근거하여 정말로 그들이 구부러지고 왜곡된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선고받게 되는 것입니다. 덕이라는 색채로 우리를 즐겁게 하는 그 모든 것들이 그런 사람들 속에 있으며 그것들은 마치 술통 속의 냄새로 완전히 부패된 술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 자신 안에 있는 바로 그 성품의 감정들은 건전한 것이나 원죄로 인하여 부패된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불규칙성 때문에 본래의 성품에서 이탈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예를 들면 결혼한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을 들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자녀들에 대한 부모들의 사랑을 가리킬 수도 있으며 그런 종류의 여러 가지 예를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라고 첨가된 말은 인간들이 날 때부터 악하다는 사실을 더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다음의 사실을 제시하려고 하는 것이니 그들의 사고가 형성되기 시작하는 나이가 되면 즉시로 마음이 급격하게 부패되어 버린다는 사실입니다.
철학자들은 여기서 하나님께서 자연에다 전가시키고 계시는 것을 습관화함으로 자신들의 무리를 폭로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의 사실을 생각해 봐도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으니 우리가 우리 자신들에게 즐거운 일이나 아첨하는 일에 탐닉한 나머지 죄의 전염성이 얼마나 치명적이라는 사실과 우리의 모든 감성에 어떤 타락성이 침투해 있는지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에 묵종(從)해야 될 것이며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이 철저하게 죄의 노예가 되어서 인간은 절대로 건전한 것이나 정직한 것을 내놓을 수가 없다고 선언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최초의 인간의 잘못으로 죄가 기원된 것에 대하여 절대로 그 책임을 하나님에게 돌려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최초의 인간의 결점으로 창조의 질서가 전복된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인간이 이런 구속을 구실로 하여 절대로 죄의식과 정죄에서 감면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악으로 무작정 돌진하고 있지만 어떤 외래적인 위력에 의하여 억지로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오직 그들의 마음의 직접적인 성향에 의하여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에 절대로 핑계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자진해서 죄를 짓고 있는 것이므로 핑계가 불가능합니다.
5. 본문 22절은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입니다.
이 말씀으로 세상이 다시 한번 완전하게 회복되었습니다. 이 땅위에 너무나도 엄청난 혼돈과 무질서가 팽배하고 있어서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어떤 쇄신책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베드로는 홍수로 멸망된 옛 시대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벧전3:6). 더욱이 홍수는 자연의 질서를 단절시켜 버렸던 것입니다. 태양과 달의 공전이 중단되었으며 겨울과 여름의 차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여호와께서는 이 모든 것들이 그들의 정기(精氣)를 회복하여 다시 제 기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 그분이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잘못되게 일년을 여섯 부분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거기에 근거하여 모세는 여름을 겨울과 대조적으로 둠으로 1년을 통속적인 방법으로 둘로 나누고 있습니다. 그리고 추위와 더위라는 말로 그는 이미 언급된 기간들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심음과 거둠과’ 라는 말로 그는 이미 언급된 기간들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심음과 거둠과’ 라는 말로 그는 정상적인 전체 분위기의 기온으로부터 인간에게 흘러 넘치는 유리한 점들을 시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이 한결같은 평온한 기온이 매년마다 터득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반대한다면 우리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세상의 질서는 우리들의 사악들로 인하여 정말로 흐트러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여러 가지 작용들이나 동작들이 불규칙하게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때로는 태양이 그 원래의 열을 발하지 않기 때문에 서리가 내려야 될 곳에 눈이나 우박 같은 것이 내리게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공기가 여러 가지 요인들로 말미암아 충동을 받게 되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세상이 그와 같이 항구적인 계절의 일치성을 유지할 만큼 규칙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자연의 질서는 지금까지도 지배하고 있어서 겨울과 여름이 매년마다 되풀이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적으로 밤과 낮이 이어지는 것도 알 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름과 겨울철에는 땅이 열매를 맺게 되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더욱이 ‘땅이 있는’ 이라는 표현은 ‘땅이 있을 동안’ 을 그는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의 배려를 의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