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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무친(四顧無親)인 스티브잡스의 스탠포드대 졸업축사가 전하는 사생관(死生觀)
우리 같은 70대 뿐만 아니라 젊은이에게도 삶에 매너리즘에 빠지거나 절망이 엄습할 때 스티브 잡스의 연설 내용이 그와 같은 일부분 생각을 변화 시킬 수 있다고 느껴져 내가 내 스타일대로 번역해서 지인들에게 전송해봅니다. 많은 도움이 되셨으면 합니다. 번역은 여러 갈래로 다르지만 나의 입장에서 바라본 스티브의 내면을 느껴본 내용입니다. 나의 20~30대의 사고와 스티브잡스의 동시대의 사고가 이렇게 천양지차가 난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스티브 잡스는 항상 배고픔을 느끼며 바보스럽게도 우직하게 살아왔고 나는 배고픔을 탈출하려 노력했고 우직하기보다는 기회주의이거나 이기적인 삶을 살아왔다는 차이 같습니다. 이런 차이는 환경이 지배하는 것 같습니다. 노년에 이런 글을 접해보는 것도 삶에 많은 느낌을 받는 것 같기에 공유하고자합니다. - 율 천
<스티브 잡스의 스탠포드 대학 졸업 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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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am honored to be with you today at your commencement from one of the finest universities in the world.
나는 지금 영광스럽게도 오늘 세계에서 명문대학의 하나인 이곳에서 여러분들의 졸업식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I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Truth be told, this is the closest I've ever gotten to a college graduation.
나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기에 사실 이 졸업식이 가장 가까이에서 참여하게 된 졸업식이 됩니다.
Today I want to tell you three stories from my life. That's it. No big deal. Just three stories.
오늘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내 인생에 세 가지 이야기 입니다. 그것은 대단한 것도 아닌 그냥 세 개의 나의 이야기입니다.
The first story is about connecting the dots.
첫 번째 이야기는 인생의 계기라는 전환점들의 연결성에 관한 것입니다.
I dropped out of Reed College after the first 6 months, but then stayed around as a drop-in for another 18 months or so before I really quit.
나는 대학을 중도 포기했습니다. 리드 칼리지대학 다니는 것을 그것도 6개월 만에 말입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18개월 정도 청강생으로 머물다 그 후 정말로 그만 뒀습니다.
So why did I drop out?
근데 왜 내가 대학을 포기 했을까요?
It started before I was born. My biological mother was a young, unwed college graduate student, and she decided to put me up for adoption.
포기의 출발은 제가 태어나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나의 친어머니는 그 당시 젊었고 미혼모인 대학원생이었습니다. 친어머니는 나를 입양시키기 위해 서류에 올리기로 결심했습니다.
She felt very strongly that I should be adopted by college graduates, so everything was all set for me to be adopted at birth by a lawyer and his wife.
친어머니가 강열하게 원했던 것은 제가 대학 졸업생에게 입양되는 것이었고 그렇게 해서 제가 태어날 때 변호사 가정에게 입양될 수 있도록 준비를 마친 상태였습니다.
Except that when I popped out they decided at the last minute that they really wanted a girl.
다만 예상치 못한 것은 제가 태어나기 직전에 그 변호사 부부가 딸을 원한다고 말한 것이었습니다.
So my parents, who were on a waiting list, got a call in the middle of the night asking:
대기자 명단을 기다리던 양부모는 한밤중에 물어보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We have an unexpected baby boy; do you want him?“
“기대하지 않은 남자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입양을 원하십니까?”
"
They said: "Of course.“
“물론입니다.”
My biological mother found out later that my mo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and that my fa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high school.
나의 친어머니는 뒤늦게 알아냈습니다. 그것은 양어머니는 대학을 졸업하지 않았고 그리고 양아버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입니다.
She refused to sign the final adoption papers.
친어머니는 마지막 입양동의서에 사인을 거절했습니다.
She only relented a few months later when my parents promised that I would someday go to college.
친어머니가 가까스로 동의한 것은 몇 달 후였고 그땐 나의 양부모가 훗날 나를 대학에 가게 하겠다고 약속했던 그때였던 것입니다.
And 17 years later I did go to college.
17년 후, 저는 대학에 가게 되었습니다.
But I naively chose a college that was almost as expensive as Stanford,
그러나 순진하게도 선택한 대학은 거의 스탠포드와 같은 값비싼 대학이었습니다.
and all of my working-class parents' savings were being spent on my college tuition.
노동계층의 양부모들의 저축한 돈 대부분이 나의 대학 등록금으로 소비되어야 했습니다.
After six months, I couldn't see the value in it.
그 후 6개월이 지나자 나는 대학이라는 자체가 그 가치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I had no idea what I wanted to do with my life and no idea how college was going to help me figure it out.
나는 내 인생에서 뭘 하고 싶었는지 알 수가 없었고 그리고 대학교육이 나에게 어떻게 도움이 될 것인지 그것을 알아낼 방법도 없었습니다.
And here I was spending all of the money my parents had saved their entire life.
그리고 여기서 내가 이미 학비로 소비하고 있는 돈의 모두는 나의 양부모가 온 생애 동안 모아둔 돈이었습니다.
So I decided to drop out and trust that it would all work out OK.
그래서 나는 자퇴를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믿었습니다. 모든 일들이 잘 처리될 것이라고요.
It was pretty scary at the time, but looking back it was one of the best decisions I ever made.
그런 행위가 그 당시에는 정말 무서웠습니다. 그러나 뒤돌아보면 그것은 내가 해본 중에서 가장 최고의 결정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The minute I dropped out I could stop taking the required classes that didn't interest me, and begin dropping in on the ones that looked interesting.
자퇴를 하자마자 나는 나에게 흥미 없는 필수과목의 수강을 중지할 수 있었고 흥미롭게 보이는 과목들에 대한 수강을 시작할 수가 있었습니다.
It wasn't all romantic. I didn't have a dorm room, so I slept on the floor in friends' rooms,
그것은 모두가 낭만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기숙사 방이 없어서 나는 친구 방 마룻바닥에 잠을 잤고
I returned coke bottles for the 5¢ deposits to buy food with,
나는 5센트 하는 콜라병을 반환해서 그것으로 먹을 것을 사기도 했습니다.
and I would walk the 7 miles across town every Sunday night to get one good meal a week at the Hare Krishna temple.
그리고 나는 일요일 밤마다 읍내를 가로질러 7마일을 걷곤 했습니다. 그래서 헤어크리슈나 사원에서 매주 한 끼의 좋은 음식을 얻었습니다.
I loved it. And much of what I stumbled into by following my curiosity and intuition turned out to be priceless later on.
나는 정말 좋았습니다. 나의 호기심과 직관만으로 흘러 들어가서 내가 발견하게 된 많은 것들이 후에 정말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귀중한 것들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Let me give you one example:
내가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Reed College at that time offered perhaps the best calligraphy instruction in the country.
당시에 리드칼리지는 나라에서 최고의 서체 교육을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Throughout the campus every poster, every label on every drawer, was beautifully hand calligraphed.
대학 캠퍼스의 모든 포스터, 모든 책장위의 라벨들은 정말 아름다운 필체로 적혀있었습니다.
Because I had dropped out and didn't have to take the normal classes,
나는 자퇴했었기 때문에 정규과정을 들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I decided to take a calligraphy class to learn how to do this.
내가 결정한 것은 서체수업을 받는 것이고 그래서 이렇게 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었습니다.
I learned about serif and san serif typefaces, about varying the amount of space between different letter combinations, about what makes great typography great.
나는 세리프와 산 세리프 활자체를 배웠습니다. 다른 문자들의 조합하는 사이사이에 공간크기의 다양성에 대해서도 배웠고, 멋진 활자체를 어떻게 멋지게 만드는지도 배웠습니다.
It was beautiful, historical, artistically subtle in a way that science can't capture, and I found it fascinating.
그 일은 이름다웠고 역사적이며 예술적으로 섬세하여 과학적인 방법으로는 따라잡을 수가 없어서 나는 그 일을 환상적이라고 느꼈습니다.
None of this had even a hope of any practical application in my life.
그러나 이중 어느 것들도 제 남은 인생에서 쓰일 일이 있을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습니다.
But ten years later, when we were designing the first Macintosh computer, it all came back to me.
그러나 10년 후 우리가 처음으로 매칸토시 컴퓨터를 디자인 했을 때 그 모든 것들이 나에게 돌아왔습니다.
And we designed it all into the Mac. It was the first computer with beautiful typography.
그 모든 것을 매칸토시 컴퓨터에 디자인 했을 때 그 컴퓨터는 아름다운 서체를 가진 최초의 컴퓨터였습니다.
If I had never dropped in on that single course in college,
만일 내가 대학에서 하나의 서체교육에 관심을 두지 않았더라면
the Mac would have never had multiple typefaces or proportionally spaced fonts.
맥카토시는 복수서체나 균형 잡힌 비율적으로 글꼴을 결코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And since Windows just copied the Mac, its likely that no personal computer would have them.
그리고 또한 윈도우는 그냥 맥칸토시를 복사한 것일 뿐이기 때문에 결국 어떠한 개인 컴퓨터도 그런 아름다운서체를 가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If I had never dropped out, I would have never dropped in on this calligraphy class,
만일 내가 자퇴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서체수업을 듣지 못했을 것이고
and personal computers might not have the wonderful typography that they do.
그리고 개인 컴퓨터들이 원더풀한 서체도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Of course it was impossible to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when I was in college.
물론 내가 대학에 있을 때는 미래를 향한 순간의 계기들을 연결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But it was very, very clear looking backwards ten years later.
그러나 그것은 대단했고 아주 선명하게 과거의 일들이 바라본 것은 10년이 지난 뒤였습니다.
Again,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다시 말하자면 여러분은 미래를 향한 계기(점)들을 연결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단지 그런 계기들을 지난 과거로만 연결할 수 있습니다.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그러기에 여러분은 믿어야합니다. 그런 계기들이 어떤 방법으로든 여러분의 미래를 연결될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You have to trust in something - your gut, destiny, life, karma, whatever.
여러분은 무엇이든지 신념을 가져야합니다. 배짱이라든지, 운명, 인생, 업, 등 무엇이든지 말입니다.
This approach has never let me down, and i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in my life.
이러한 접근들은 결코 나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 인생에 변화를 주었습니다.
My second story is about love and loss.
두 번 째는 사랑과 상실감입니다.
I was lucky I found what I loved to do early in life.
내가 행운아인 이유는 제가 인생에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일찍 알아냈기 때문입니다.
Woz and I started Apple in my parents garage when I was 20.
워즈와 나는 나의 양부모 차고지에서 애플을 시작할 때 나는 20세였습니다.
We worked hard, and in 10 years Apple had grown from just the two of us in a garage into a $2 billion company with over 4000 employees.
우리들은 열심히 일을 했고 10년 후 애플은 차고지에서 단 우리 둘에서 부터 4000명의 고용인들과 함께 2십억 달러의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We had just released our finest creation - the Macintosh - a year earlier, and I had just turned 30. And then I got fired.
우리는 최상의 작품인 매칸토시라는 컴퓨터를 일 년 일찍 출시했습니다. 그리고 막 30세에 해고 되었습니다.
How can you get fired from a company you started?
당신이 시작한 회사에서 어떻게 해고를 당할 수 있냐고요?
Well, as Apple grew we hired someone who I thought was very talented to run the company with me,
글세요. 애플이 성장하면서 나와 같이 회사를 운영할 대단히 유능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을 고용했습니다.
and for the first year or so things went well.
처음 일 년은 그러한 일들이 양호하게 굴러갔습니다.
But then our visions of the future began to diverge and eventually we had a falling out.
그러나 곧 우리들의 미래에 대한 저희 비전은 서로 많이 달랐고 우리들은 결국 떨어져나갔습니다.
When we did, our Board of Directors sided with him. So at 30 I was out. And very publicly out.
우리가 그렇게 사이가 안 좋았을 때 우리 이사회는 그의 편이었습니다. 그래서 30에 나는 회사를 쫓겨났고 아주 공식적으로 퇴출되었습니다.
What had been the focus of my entire adult life was gone, and it was devastating.
내가 온전한 성인의 인생으로 포커스를 맞춰왔던 모든 것들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참담했습니다.
I really didn't know what to do for a few months.
나는 정말 몇 달 동안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I felt that I had let the previous generation of entrepreneurs down - that I had dropped the baton as it was being passed to me.
나는 이전세대의 기업인들을 실망시켰다고 느꼈습니다. 그것이 나에서 패스되어야 할 상황에서 내게 넘겨진 바톤을 떨어뜨린 것만 같았습니다.
I met with David Packard and Bob Noyce and tried to apologize for screwing up so badly.
나는 데이비드 패커드와 밥노이지를 만나서 나쁘게 꼬인 것에 대해서 사과하려고 노력했습니다.
I was a very public failure, and I even thought about running away from the valley.
나는 공적으로 실패자였고 나는 실리콘 밸리에서 멀리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But something slowly began to dawn on me ?
그러나 무엇인가가 천천히 나에게서 서광이 비치기 시작 했습니다.
I still loved what I did. The turn of events at Apple had not changed that one bit.
나는 내가 했던 것을 아직도 사랑했고 애플 사건들로 인한 변화로는 초심이 조금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I had been rejected, but I was still in love. And so I decided to start over.
나는 퇴출되었지만 나는 아직도 일을 사랑하고 있었고 그래서 나는 다시 출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I didn't see it then, but it turned out that getting fired from Apple was the best thing that could have ever happened to me.
나는 그 당시는 몰랐지만. 그러나 애플에서 해고당한 것이 나에게서 이제까지 일어났던 것 중에 가장 좋은 일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The heaviness of being successful was replaced by the lightness of being a beginner again, less sure about everything.
성공이라는 중압감은 모든 것에 대한 확신은 덜하지만 다시 초심의 상태로 가볍게 다시 대체되었습니다.
It freed me to enter one of the most creative periods of my life.
그것은 내 인생의 가장 창조적인 시간으로 진입하는데 나를 거리낌이 없게 했습니다.
During the next five years, I started a company named NeXT, another company named Pixar,and fell in love with an amazing woman who would become my wife.
이 후 5년 동안 나는 하나의 회사를 출발시켰습니다. 이름 하여 넥스트이고 또 다른 회사이름은 픽사이며 그리고 내 아내가 된 우아한 여인과 사랑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Pixar went on to create the worlds first computer animated feature film, Toy Story, and is now the most successful animation studio in the world.
픽사는 세계 최초의 컴퓨터 애니메이션 영화 토이스토리를 제작했고 그리고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애니메이션 스튜디오가 되었습니다.
In a remarkable turn of events, Apple bought NeXT, I retuned to Apple, and the technology we developed at NeXT is at the heart of Apple's current renaissance.
사건의 놀라운 변화는 애플이 넥스트를 샀다는 것입니다. 나는 애플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넥스트에서 우리가 개발한 기술은 애플의 현재의 부흥의 중심에 있습니다.
And Laurene and I have a wonderful family together.
그리고 로렌과 나는 다 같이 행복한 가정을 갖고 있습니다.
I'm pretty sure none of this would have happened if I hadn't been fired from Apple.
나는 정말 확신합니다. 만일에 내가 애플에서 해고되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라는 것입니다.
It was awful tasting medicine, but I guess the patient needed it.
그것은 엄청 쓰디쓴 약이었지만 환자에게는 필요했다고 생각합니다.
Sometimes life hits you in the head with a brick. Don't lose faith.
때때로 삶은 벽돌로 머리를 때릴지라도 믿음을 잃지 마십시오.
I'm convinced that the only thing that kept me going was that I loved what I did.
내가 확신하고 있는 것은 단 한 가지 나를 계속 가도록한 것은 내가 했던 일을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And that is as true for your work as it is for your lovers.
여러분들이 사랑하는 일들을 찾으십시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야하듯 일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Your work is going to fill a large part of your life,
여러분의 일은 여러분의 인생에서 대부분을 차지할 것입니다.
and the only way to be truly satisfied is to do what you believe is great work.
그리고 정말 만족하는 한 가지 방법은 여러분이 믿기에 정말 위대한 일을 하는 겁니다.
And the only way to do great work is to love what you do.
위대한 일을 하는 유일한 방법은 여러분이 하는 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If you haven't found it yet, keep looking. Don't settle. As with all matters of the heart, you'll know when you find it.
만일 여러분이 아직도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계속 둘러보십시오. 안주하지 마십시오. 당신 마음의 모든 것들과 함께 여러분이 사랑하는 것을 발견할 때 여러분은 알게 될 것입니다.
And, like any great relationship, it just gets better and better as the years roll on.
그러면 어느 위대한 인연처럼 그 일은 해가 갈수록 점점 좋아집니다.
So keep looking until you find it. Don't settle.
그 일을 발견 할 때 까지 계속 둘러보십시오. 안주하지 마십시오.
My third story is about death.
세 번 째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When I was 17, I read a quote that went something like:
17살 때, 다음과 같이 쓰여 졌던 인용문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If you live each day as if it was your last, someday you'll most certainly be right.“
만일 여러분이 매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언젠가는 여러분은 가장 확실히 바르게 되어 있을 것입니다.
It made an impression on me, and since then, for the past 33 years! ,
그것은 나에게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때 이래로 과거 33년 동안 말입니다.
I have looked in the mirror every morning and asked myself:
난 매일아침 거울 속을 바라보았고 그리고 내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If today were the last day of my life, would I want to do what I am about to do today?“
만일 오늘이 내 삶의 마지막 날이라면 내가 오늘 할 일을 하고 싶어 할까?
And whenever the answer has been "No" for too many days in a row, I know I need to change something.
그리면 언제든지 답변은 “아니오.” 라고 수많은 날 동안 연속적으로 해왔습니다. 나는 무엇인가 변화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압니다.
Remembering that I'll be dead soon is the most important tool I've ever encountered to help me make the big choices in life.
내가 곧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을 상기한다는 것은 내 인생에서 커다란 선택을 하는 데 도움에 맞닥뜨리게 되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됩니다.
Because almost everything ?
왜냐하면 거의 모든 것 때문이라고요?
all external expectations, all pride, all fear of embarrassment or failure -
모든 외적인 기대 모든 자부심 모든 실패에 대한 두려움의 공포
these things just fall away in the face of death, leaving only what is truly important.
이런 것들은 죽음의 면전에서는 떨어져 나갈 뿐입니다. 진실로 중요한 것을 남겨둔 채로
Remembering that you are going to die is the best way I know to avoid the trap of thinking you have something to lose.
여러분이 죽게 될 것이라고 상기하는 것은 내가 아는 한 여러분이 무엇인가를 잃게 된다는 생각의 함정을 피하게 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You are already naked. There is no reason not to follow your heart.
여러분은 지금 발가벗겨져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따라가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About a year ago I was diagnosed with cancer.
약 1년 전에 나는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I had a scan at 7:30 in the morning, and it clearly showed a tumor on my pancreas.
아침 7시 반에 검사를 했습니다. 나의 췌장에 종양이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I didn't even know what a pancreas was.
나는 췌장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했습니다.
The doctors told me this was almost certainly a type of cancer that is incurable, and that I should expect to live no longer than three to six months.
의사들은 나에게 말하기를 이 종양은 거의 확실하게 암이고 치료불가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길어봐야 3개월에서 6개월 이상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My doctor advised me to go home and get my affairs in order, which is doctor's code for prepare to die.
나의 의사는 나에게 집에 가서 순서대로 일을 정리하라고 충고했습니다. 그것은 죽음을 준비하라는 의사의 암호입니다.
It means to try to tell your kids everything you thought you'd have the next 10 years to tell them in just a few months.
그것은 당신이 생각했던 모든 것을 아이들에게 말하라는 뜻이었고 아이들에게 앞으로 10년간 할 말을 단 몇 개월 사이에 해야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It means to make sure everything is buttoned up so that it will be as easy as possible for your family.
그것은 모든 것을 빈틈없이 정리해서 당신 가족을 가능한 한 편하게 하라는 뜻이었습니다.
It means to say your goodbyes.
그것은 당신의 작별인사를 말한다는 뜻이었습니다.
I lived with that diagnosis all day.
나는 하루 종일 진단상태로 살았습니다. (나는 불치병 판정을 받았습니다)
Later that evening I had a biopsy, where they stuck an endoscope down my throat,
그날 저녁에 나는 조직검사를 했습니다. 내시경을 나의 목구멍 깊숙이 쑤셔 넣었습니다.
through my stomach and into my intestines, put a needle into my pancreas and got a few cells from the tumor.
나의 위장을 통해서 창자 속으로 통과했습니다. 한 개의 바늘도 췌장 속으로 넣어져 종양에서 약간의 세포를 채취했습니다.
I was sedated, but my wife, who was there, told me that when they viewed the cells under a microscope
나는 마취 상태이었는데 그러나 그 자리에 있던 아내가 나에게 말해주었습니다. 현미경으로 세포를 분석한 결과
the doctors started crying because it turned out to be a very rare form of pancreatic cancer that is curable with surgery.
의사들은 탄성하기 시작한 이유는 그것은 수술로 완치될 수 있는 아주 희귀한 췌장암 상태로 판명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I had the surgery and I'm fine now.
난는 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좋아졌습니다.
This was the closest I've been to facing death, and I hope its the closest I get for a few more decades.
이것은 내가 죽음에 맞닥뜨려온 가장 가까이 경험한 것으로서 요 몇 수 십 년 동안 내가 경험한 죽음에서 가장 최초로 가까웠던 것으로 남게 되길 희망 합니다. (앞으로 이런 경험이 없길 바랍니다)
Having lived through it, I can now say this to you with a bit more certainty than when death was a useful but purely intellectual concept:
이런 경험을 해보니 이전에 죽음이라는 것이 그냥 머리로만 유용한 것이라고 알고 있었을 때 보다 확실하게 여러분에게 말을 해줄 수 있습니다.
No one wants to die. Even people who want to go to heaven don't want to die to get there.
어느 누구도 죽음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 가고 싶은 사람조차도 하늘에 가기 위해 죽음을 원하지 않습니다.
And yet death is the destination we all share. No one has ever escaped it.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종착역이며 우리 모두에게 공평합니다.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습니다.
And that is as it should be, because Death is very likely the single best invention of Life.
그것은 그렇게 되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인생에서 가장 단순한 최상의 발명이기 때문입니다.
It is Life's change agent. It clears out the old to make way for the new.
그것은 삶의 변환의 인자입니다. 그것은 새로 태어나는 사람을 위한 방법으로 늙은 사람들을 깨끗이 정리합니다.
Right now the new is you, but someday not too long from now, you will gradually become the old and be cleared away.
바로 새로운 사람들이란 여러분입니다. 그러나 훗날 지금부터 멀지않은 장래에 여러분은 점진적으로 노인이가 되고 그리고 깨끗하게 정리될 것입니다.
Sorry to be so dramatic, but it is quite true.
너무 극단적으로 들렸다면 죄송하지만, 그것은 사실입니다.
Your time is limited, so don't waste it living someone else's life.
여러분의 시간은 제한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삶에 당신의 시간을 낭비하지마세요.
Don't be trapped by dogma - which is living with the results of other people's thinking.
도그마에 빠지지 마세요. 다른 사람들의 생각의 결과로 살아가게 되는 도그마에 빠지지 마세요.
Don't let the noise of other's opinions drown out your own inner voice.
다른 사람들의 의견의 잡음으로 여러분의 내면의 소리를 안 들리게 하지 마십시오.
And most important, have the courage to follow your heart and intuition.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마음과 직관을 따라가는 용기를 갖는 것입니다.
They somehow already know what you truly want to become. Everything else is secondary.
마음과 직관은 어떻든 이미 여러분이 진실로 무엇이 되고 싶은지 알고 있습니다. 그 밖의 모든 것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When I was young, there was an amazing publication called The Whole Earth Catalog, which was one of the bibles of my generation.
내가 젊었을 때 지구백과라는 놀랄만한 출판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세대의 바이블의 하나였습니다.
It was created by a fellow named Stewart Brand not far from here in Menlo Park, and he brought it to life with his poetic touch.
그 책은 스튜어트브랜드라는 이름의 친구가 출판한 책인데 멘로팍인 여기서 멀지않고 그리고 그는 시적인 감각으로 생생하게 그 책에다 삶을 불어넣었습니다.
This was in the late 1960's, before personal computers and desktop publishing, so it was all made with typewriters, scissors, and polaroid cameras.
이것은 1960년대 후반으로 pc와 데스크탑 출판이 있기 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타이프라이터와 가위와 그리고 프로라이드 카메라로 만들어졌습니다.
It was sort of like Google in paperback form, 35 years before Google came along:
그것은 종이형태로 구글 같은 종류입니다. 구글이 따라 나오기 전 35년 전일입니다.
it was idealistic, and overflowing with neat tools and great notions.
그것은 이상적이고 깔끔한 도구와 위대한 개념으로 흘러넘쳐났습니다.
Stewart and his team put out several issues of The Whole Earth Catalog, and then when it had run its course, they put out a final issue.
스튜어트와 그의 팀들은 지구백과의 여러 편들을 출간했습니다. 그리고 그땐 그것의 과정을 밟아왔을 때에는 그들은 최종 호를 출간했습니다.
It was the mid-1970s, and I was your age.
그것은 70년대 중반이었고 내가 여러분들의 나이 때 이었습니다.
On the back cover of their final issue was a photograph of an early morning country road,
그것의 최종 호 뒷 표지에는 이른 아침 시골길의 사진이 있었습니다.
the kind you might find yourself hitchhiking on if you were so adventurous.
여러분이 그런 모험심이 있다면 여러분 자신들의 히치하이킹을 발견할 수도 있는 그런 종류의 사진입니다.
Beneath it were the words: "Stay Hungry. Stay Foolish.“
그 사진 밑에는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 “배고 푼 상태로 우직한 상태로 유지하라 ”
It was their farewell message as they signed off. Stay Hungry. Stay Foolish.
그것은 글을 끝내면서 한 고별 메시지였습니다. 배고 푼 상태로 우직한 상태로 유지하라
And I have always wished that for myself. And now, as you graduate to begin anew, I wish that for you.
그리고 나는 항상 나 자신을 위해서 기원해 왔습니다. 지금도 그렇고요 여러분은 새로운 시작을 위해 졸업하는 것처럼 나도 여러분을 위해 기원하겠습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배고품과 함께 우직함과 함께
Thank you all very much.
대단히 감사합니다.
* 이 영문 번역은 영문학자가 아닌 내가 손수 실행했습니다.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양해 해 주시기 바랍니다. 글의 내용이 좋아 인생에 참고가 될 것 같아 공유하고자 합니다.
2019년 7월 2일 밤 12시
번역 - 율 천 이 권행
첫댓글 좋은 축사입니다.저랑 갑장인데 췌장암으로 요절했으니 안타깝습니다.
멋찌심나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