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초는 옛부터 깊은 골짜기에서 홀로 고고하게 향기를 품고 있는 모습이 세속의 이욕과 공명에 초연하였던 고결한 선비의 마음과 같다고 하여 '幽谷佳人', '幽人' 또는 '香組', '君子香' 등으로 불리었다. 그리고 정절과 충성심의 상징으로 찬미되기도 하였다.
난초의 상징성은 楚나라의 시인이며 충신이었던 屈原이 난의 고결한 자태를 거울로 삼았다고 읊었듯이 이미 오래 전부터 형성되었다. 그러나 난초가 그림으로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北宋때부터였으며, 처음에는 화조화의 일부분으로 그려지다가 米 에 의해 수묵법에 의한 독립된 화제로 다루어지기 시작하였다. 미불은 서예에도 뛰어났던 당대 최고의 문인화가로 그의 난화에 대해 비평가들은 잎이 서로 교차하는데도 혼란치 않고 실로 희대의 奇品이라고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이와 같이 화조화의 배경에서 하나의 화제로 독립된 묵란을 보다 사의적으로 발전시킨 사람은 鄭思였다. 그는 南宋이 元에 망하자 평생을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면서 나라를 빼앗긴 울분을 땅을 그리지 않음으로써 뿌리가 드러난 露根蘭을 통해 토로하였다. 그의 이러한 정신과 蘭法은 一代宗師로서 후인들의 규범이 되어 오랫동안 영향을 미쳤다.
원나라 때는 松雪體로 유명한 趙孟 와 雪窓등에 의해 산뜻하고 단아한 모습의 묵란이 유행되기도 하였으며, 특히 조맹부의 부인인 管道昇의 맑고 수려한 난화는 馬守貞, 表表등의 여류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쳐 이들을 '閨秀傳神派'라 부르기도 한다.
문인화가 널리 보편화되었던 明代에 와서 묵란은 더욱 크게 성행하였고, 이러한 전통이 靑代에도 계속 이어져 보다 다양하고 개성이 넘치는 화풍으로 발전하였다. 그 중에서도 石 등의 明朝遺民畵家와 陽州八의 鄭燮 등이 특히 뛰어났었다.
우리 나라에서도 묵란은 고려 말기에 전래되어 조선 초기부터 그려지다 秋史 金正喜에 이르러 대성되었고 그 전통이 근대를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렇듯 묵란은 그 은은한 먹향기와 수려한 곡선미와 청초한 분위기를 통해 고결한 이념미가 역대의 뛰어난 문인화가들에 의해 계승, 발전되어 오면서 사군자 그림과 문인화의 발달에 중요한 구실을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사군자 그림을 배울 때 이러한 전통과 상징성을 지닌 묵란을 제일 먼저 시작하는 것은 난초의 생김새가 한자의 서체와 닮은 점이 가장 많다는 데 있다. 난엽을 그리는 것을 잎을 그린다고 하지 않고 앞을 삐친다고 하는 것도 글씨에서 삐치는 법을 쓰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김정희는, "난초를 치는 법은 隸書를 쓰는 법과 가까워서 반드시 文字香과 書卷氣가 있은 뒤에 얻을 수 있다."고 하여 이론적으로 서체훈련이 회화기술의 기초가 되고 있음을 말한 바 있다. 이 점은 묵란화가 문인묵객들이 즐겨 찾던 주제의 하나로서 시,서,화에 능한 三絶, 특히 서예에 뛰어난 사람들에 의해 주로 그려졌던 사실로도 알 수 있다.
난초의 종류는 상당히 많지만 묵란화에서는 주로 春蘭과 建蘭을 다룬다. 춘란은 草蘭, 獨頭蘭, 幽蘭이라고도 하는데, 잎의 길이가 각각 달라서 길고 짧으며 한 줄기에 한 송이의 꽃이 피는 것으로 청의 鄭板橋와 조선 말기의 김정희, 대원군 李昰應, 金應元 등이 잘 그렸다.
건란은 雄蘭, 駿河蘭, 란이라고도 했으며, 잎이 넓적하고 뻣뻣하며 곧게 올라가는데 한 줄기에 아홉 송이의 꽃이 핀다. 福建 지방이 명산지인 이 난은 청의 吳昌碩과 조선 말기의 閔泳翊이 특히 잘 그렸다.
* 참고문헌 : [고려대학교 한국화회] * |
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 합니다.
잊고 있엇는데..초등학교시절 배웠던것이 새록새록 다시 떠오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