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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 엘 그레코.(1578) |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유다는 돈 몇 푼을 받기로 하고, 스승을 잡아 줍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체포되자 신변의 불안을 느낀 나머지, 스승을 모른다고 공언합니다.
그런 처신은 우리 모두가 쉽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돈 몇 푼이 소중하여 이웃을 배신하고 버립니다.
정치한다는 사람들은 국민을 위해 일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들 자신과 자기 패거리의 영달을 찾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우리는 그런 말의 이중성을 신물 나게 보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의 목적을 위해서는 배신하고, 속이고 버리는 일을 예사로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은 동족인 예수님을 그들이 미워하던 이교도 지배자인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고발합니다.
로마법에 따르면, 식민지에서는 로마 총독만이 사람을 사형에 처할 권한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반란 선동죄로 총독에게 고발합니다.
‘우리는 이자가 우리 민족을 선동한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지 못하게 막고, 자신을 메시아 곧 임금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그런 고발로 빌라도의 법정에서 예수님은 정치범이 됩니다.
식민지를 통치하는 로마 총독이 철저하게 다스려야 하는 정치적 반동세력의 주모자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총독 빌라도 앞에서 로마 제국의 충실한 신민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미워하는 예수님을 없애 버리기 위해 그들이 평소에 가졌던
민족적 자존심마저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평소에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가르치고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 지도자들이 죄인으로 판단하고,
버린 사람들과도 어울리면서 하느님이 그들을 버리지 않으신다고 가르쳤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자비와 용서에서 아무도 제외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유대교 지도자들은 하느님이 죄인을 미워하고 벌주신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의 눈에 예수님은 그들의 권위에 감히 도전하는 인물입니다.
그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그들의 권위와 그들을 높은 지위에 올려 준
유대교의 제도였습니다.
정치 지도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이 다반사로 하는 일입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맞서는 자들을 미워하고, 짓밟고 죽입니다.
미움은 남을 먼저 죽이고, 자기 자신도 영원히 죽이는 악입니다.
지금 우리가 들은 대로 이 수난사는 빌라도가 예수님을 헤로데에게 보낸 사실을 말합니다.
헤로데는 예수님을 심문하고 조롱한 다음 다시 빌라도에게 돌려보냅니다.
이어서 복음서는 말했습니다.
‘전에는 원수로 지내던 헤로데와 빌라도가 바로 그날 서로 친구가 되었다.’
헤로데는 젊었을 때 로마에 유학하였습니다.
그는 로마 황제 주변 인물들과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총독인 빌라도에게 그는 불편한 인물이었습니다.
헤로데와 빌라도는 그날 예수님을 결박하여 서로 주고받으면서 친구가 되었습니다.
예나 오늘이나, 사람들은 제3자를 함께 미워하고 짓밟으면서 쉽게 동료 의식을 갖습니다.
흔히 제3자에 대한 우리의 입방아는 우리끼리 동료 의식을 갖게 하는 계기이기도 합니다.
유대교 지도자들과 군중은 빌라도 앞에서 예수님을 버리고 바라빠를 택합니다.
바라빠는 폭동과 살인죄로 체포된 인물이었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의 권위에 도전한 예수님은 폭동과 살인을 범한 자보다 더 괘씸한 죄인입니다.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권좌에 앉으면, 자기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을 가장 미워합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하느님이 사람을 미워하고, 벌하며,
죽이는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만일 하느님이 용서하고 살리는 분이라면,
그들 안에 소용돌이치는, 미워하고 죽이는 힘을 정당화할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용서하고 살리는 하느님을 믿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 앞에서도 용서하고 살리는 실천을 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믿는 하느님도 과연 용서하고 살리는 분이신지 스스로에게 물어 보아야 합니다.
이웃을 용서하고 살리는 노력이 우리 안에 보이면,
우리도 용서하고 살리시는 하느님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을 앞두고 예수님은 하느님을 생각하십니다.
죽음 너머에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제 영을 당신 손에 맡기옵니다!’
예수님은 평소에도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아들인 당신은 아버지의 생명이 하시는 일,
곧 사랑과 용서를 실천해야 한다고 믿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평소에 사람들의 병을 고치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 기득권자들이 당신을 미워하며 죽이려는 의도를 보면서도,
당신이 아버지라 부르는 하느님의 일에서 물러서지 않으셨습니다.
섬김과 용서가 하느님의 생명이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기념하여 오늘 우리가 행하는 성찬,
곧 미사는 이 섬김과 용서를 인류 안에 살아 있게 합니다.
성찬에 참여하는 그리스도 신앙인은 섬김과 용서의 빵을 먹고,
섬김과 용서의 피,
곧 생명을 마시면서 섬김과 용서를 실천하여 하느님의 생명이 인류역사 안에
살아 움직이게 합니다.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님
침묵의 가치
예수는 말이 없었다. 굳이 말할 이유도 없었다.
그들은 이미 예수를 죽이려 했고, 죽여야만 했고,
그것으로 다시 사회는 예전처럼 조용해야 했으니까.
산헤드린(유대 최고 의결기구)에 소속되어 사회적 주류를 이뤘던 이들에게,
그리고 로마의 눈치를 보며 유다 사회의 인민에게 어떻게든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기를’ 주문했던 헤로데와 빌라도에게 예수는 그냥 불순했다.
인민에게 인기가 있었으니까, 인민들을 몰고 다녔으니까,
그래서 사회적 주류의 자리를 위태롭게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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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 루카스 크라나흐.(1538) |
예수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혁명적이었고 불순했으며 제거 대상이었다.
처녀의 뱃속에서 생겨난 것도 그렇고, 이방인의 땅으로,
죄인의 땅으로 불리던 갈릴래아에서 사회적 주류에 분노하며 살아가던 인민의 편에 선 것도
그러했다. 예수가 선포한 주님의 은혜로운 해는 가난하고 소외받고 갇힌 이들의 것이었고,
(루카 4,16 이하) 사회적 주류는 역설적이게도 소외되었다.
소외된 이가 숨죽여 입 다물어야 하는 건, 전적으로 힘이 없기 때문이다.
사회적 주류가 소외될 때는 대놓고 떠들어 대며 바락바락 소리 지른다.
죽일 거라고 소리 지를 것이며, 더 무서운 건, 소리가 소리로 끝나지 않고
진짜 죽여 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 누가 되었건, 죽일 수 있는 것이 사회적 주류의 힘이다.
예수의 죽음은 바로 이 논리에서 이해돼야 한다.
예수가 심문을 받으며 죽음을 맞닥뜨린 순간,
신랄한 고소(루카 23,10) 앞에 예수는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다.
거침없는 고소의 소리만 요란하다.
급기야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군중들의 외침에 예수의 죽음은 결정나고 만다.
(루카 23,25)
이사야 예언자의 노래가 떠오를 수밖에 없다.
“학대받고 천대받았지만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이사 53,7)
예수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도살장 앞에 끌려간 어린양이었다.
죄도 없는데 죽어야 했고,
그 죽음 앞에 입도 뻥긋하지 않은 채 스스로를 내어 바친다.
왜? 예수는 태어나면서부터 그러했으니까.
당하고 억압받고 갇히고 고통받는 이들 곁에 메시아로 오셨으니까.
예수를 통해 드러난 메시아의 시대는 침묵의 힘을 볼 수 있는 이들 안에서 구체화된다.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은 말할 게 없어서가 아님을 알아차리는 이,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현실의 비정함과 위선을 제대로 간파할 수 있는 이,
그래서 입을 다무는 것이 현실의 비겁함과 거짓을 온전히 받아 안고자 하는
연민이고 사랑이며 자비임을 깨닫는 이,
바로 그 사람 안에 하느님 나라,
에덴의 그 낙원이 실현되어 드러난다.
예수 옆에서 함께 죽어 간 두 명의 강도 중 한 명은 이런 침묵의 예수를 통해
낙원의 기쁨을 또렷이 보고 즐겼다.
예나 지금이나 사회적 주류는 외친다.
자신의 자리를 어떻게든 지켜내려고....
또한 예나 지금이나 그 소리 앞에 조용히 묵묵히 입을 다물며 살아가는
또 다른 예수는 계속된다.
죽어 가면서 낙원을 만들어 내는 또 다른 예수,
그들은 끝끝내 입을 다물 것이다.
세상이 어렵고 힘든 건, 소리가 너무 많아서다.
세상이 아직 낙원이 아닌 것은 침묵 속에 죽어 갈 수 있는 이들이 너무 적기 때문이다.
죽음의 자리에 생명이 탄생한다.
시끄러운 저잣거리에선 잘난 맛에 사는 이들의 치기만 득실댈 뿐이다.
잘나지 못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이들 사이에서 예수는 메시아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생활 속의 복음] 하느님이 죽었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루카 22,14-23,56)
‘신은 죽었다!’
2000년 동안 교회는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침내 숨을 거두셨습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
인간 예수님의 죽음은 곧 하느님의 죽음입니다.
교회에 모인 사람들,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제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이 죽음을 항상 마음에 새기고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냅니다.
1. 고통 속에 헐떡거리다 숨이 잦아들어가는 소리
십자가 위에서 꽤 오랫동안 극심한 고통 속에서 헐떡이던 숨소리도 이제는 많이 잦아들었습니다.
이제 곧 숨을 거두시려나 봅니다.
아무리 봐도 정치범이 아닌데 십자가의 사형수가 된 예수님이 어제 저녁 식사 후 붙들려 와서,
한밤중에 로마제국의 총독으로부터 사형 언도를 받고 이렇게 삽시간에 사형이 집행되고 있습니다.
아무도 변호해 주는 사람이 없는 가운데 말입니다.
더구나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고, 군인들이 예수님께 침을 뱉기도 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던 길에서 여러 번 쓰러지셨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우연히 같이 십자가를 거들어 지고 오기도 하였습니다.
못이 손바닥에 박혔는지, 손목에 박혔는지 모르지만 얼마나 아픕니까?
사람을 한 자리에 오랫동안 가만히 세워둬도 힘들 텐데,
못을 박아 십자가에 몸을 고정하고 죽기를 기다리니 얼마나 잔혹한 사형 방법입니까?
이제는 무지막지한 고통 속에 울부짖던 울음소리도 사라지고,
헐떡이던 숨소리도 잦아들고 있습니다.
숨을 거둘 때가 됐습니다.
하느님이 죽어가는 장면입니다.
2.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왜 정치적 활동도 하지 않은 예수께서 이런 죽임을 당하게 되었을까?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가?
자살은 아니지 않은가?
과연 하느님을 모독하였는가?
모독한 적은 없다.
왜냐하면 나자렛 사람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니까?
그럼 왜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가?
많은 환자를 고쳐 주시고 마귀를 내쫓으시고 배고픈 사람들에게 빵의 기적을 이루시고
죽은 사람도 살리신 예수님이 아니신가?
그분이 하신 활동은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 그대로 하신 것이 아닌가? ‘
성령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셨다.’
어찌 된 영문인지 활동 초기부터 사람들은 이런 예수님을 자꾸 죽이려고 합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박해를 받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의 복음화를 위해 전적으로 투신한 결과로
이런 몹쓸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사회와 교회에서 자발적인 섬김으로 좋은 일을 많이 하지만 흔히 되돌아오는 결과는
때로는 혹독한 시련일 때가 있습니다.
우리 스승님께서 먼저 이런 험한 꼴을 당하셨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3.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다
아담과 하와가 그 원죄의 나무 아래에서
‘하느님처럼 되려는 유혹’에 빠져 하느님과 함께 살던 그 행복한 낙원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제 하느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셔서 죽음까지 겪으셨기에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이방인을 통해서도 인정을 받으셨습니다.
하느님이 죽으시면서 완전히 인간이 되심으로써 인간이 하느님 자녀가 되고,
하느님 본성에 참여하는 은총의 선물을 받을 수 있게 됐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이 겸손은 인간을 구원하는 겸손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 겸손하려고 할 때,
고통이 뒤따르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신자의 이 겸손은 인간을 구원하는 도구가 됩니다.
4. 오늘도
오늘도 세상 도처에서 가난하고 힘없는 많은 사람이 극도의 고통을 겪으면서 죽어갑니다.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하고 억울하게 죽어갑니다.
의로운 사람들의 죽음도 이어집니다.
하느님은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하느님은 그들의 운명에 동참하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최선의 방법, 완전한 방법을 사용하셔서 그들과 함께하십니다.
매일 제대 위에서 예수님께서는 피 흘림 없는 십자가의 제사를 바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죽음의 현장에서 함께 죽어가면서 십자가 제사를 바치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구세주 예수님을 믿습니다.
미사에서 예수님의 거룩한 몸을 받아 모시고 주님과 하나가 된 우리도
그 십자가 죽음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스승님을 뒤따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르심을 듣고 응답하는 우리는 이 하느님 죽음에 동참하도록 사명을 받았습니다.
-주수욱 베드로 신부님
주님수난 성지주일 루카 23,1-49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기나이다.”(루카 23,46)
Palm Sunday - Jesus' Triumphal Entry into Jerusalem
사랑을 위해 감수하는 고통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고난 받는 주님의 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온갖 모욕과 박해를 받아들이시고(이사 50,5-6), 자신을 낮추시어,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8-9). |
2016년 3월 20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루카19,28-40 이사50,4-7 필리2,6-11 루카22,14-23,56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요한19,5)"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오늘 ‘주님 수난 성지 주일’부터 ‘성토요일’까지 한 주간을
‘성주간’이라 일컬으며 교회의 전례주년 가운데 정점을 이루는 주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비추어 우리 자신을 깊이 묵상하며
주님의 부활은 물론 우리의 부활을 준비하는 은혜로운 시간입니다.
오늘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의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복음 이야기는
인생고해人生苦海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깊은 위로를 주며
자신에 대해 깊이 들여다 보게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과연 ‘어떻게 살아야 보람있는 삶을 살 수 있겠는가?’에 앞선 근원적 물음입니다.
이런 생각 중 떠오른 말씀이 요한복음 19장 5절 말씀 ‘이 사람을 보라!’ 였습니다.
이 말은 본시오 빌라도가 예수를 채찍질하고 머리에 가시관을 씌운 뒤
성난 무리 앞에서 예수를 가리키면서 말한 대사입니다.
‘이 사람을 보라!’ 대신 라틴어 원문 ‘에케 호모(ecce homo)’역시
마음에 강렬히 와 닿습니다.
십가가의 예수님을 바라볼 때마다 꼭 이 구절을 되뇌시기 바랍니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마지막 저작의 이름도
‘에케 호모(1988년에 쓰여져 1908년 출판됨)’입니다.
사람 하나 만나고 싶은 세상에 우리는 오늘 인류의 유일한 참 사람이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참 사람 예수님의 거울에 환히 드러나는 나의 실상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오늘 수난 복음의 모두를 환히 비추어주는 예수님이 온 세상을 심판합니다.
심판 받는 예수님이 역설적으로 모두의 진실을 폭로하며 심판합니다.
예수님의 평소 삶의 진면목이 환히 드러납니다.
첫째, 예수님은 ‘기도의 사람(man of prayer)’이었습니다.
삶이 혼란하고 복잡한 것은 기도하지 않은 탓입니다.
기도해야 삶의 중심과 질서를 잡고 참 나를 발견하여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기를 읽으며 마음에 와닿은 것이 예수님의 깊은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 아버지와 깊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셨기에
수난과 죽음에 여정에 항구할 수 있으셨습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여라.’는 말씀이 특히 마음에 와닿습니다.
이어 다음 감동적인 기도문들을 통해 예수님의 내면이 환히 드러납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슬픔에 지쳐 잠들어 있는 제자들을 향한 권고 역시 감동입니다.
“왜 자고 있느냐?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일어나 기도하여라.”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무지의 죄이자 병이 이토록 무섭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고
악에 가담하여 자기를 죽이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큰 소리로 기도하시며 숨을 거두십니다.
그 광경을 보고 백인대장은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 고백하며,
군중도 모두 그 광경을 바라보고 가슴을 치며 돌아갑니다.
기도해야 살고 살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무지의 눈이 열려 참 사람 예수님을 봅니다.
점차 예수님을 닮아가 우리도 비로소 참 사람이 됩니다.
둘째, 예수님은 ‘비움의 사람(man of kenosis)’이었습니다.
비움의 여정은 겸손의 여정, 순종의 여정입니다.
끊임없이 자기를 비워갈 때 텅 빈 충만의 행복입니다.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당신을 따르라는 말씀은
날마다 자기를 비우는 여정에 항구하라는 말씀입니다.
삶의 모든 병고나 시련의 어려움에 좌절할 것이 아니라
이 모두를 비움의 계기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이래야 전화위복이요 모든 유혹에서 벗어나 주님께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바로 오늘의 2독서 필리비서의 찬미가를 통해
비움의 사람 예수님의 면모가 환히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비움, 낮춤, 순종의 자리에서 겸손하시고 온유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셋째, 예수님은 ‘침묵의 사람(man of silence)’이었습니다.
침묵 역시 기도입니다.
말한다고 다 소통이 아닙니다.
때로는 침묵이 깊은 소통에 이르게 합니다.
말로 인해 파생되는 오해는 얼마나 많은지요.
예수님은 말과 침묵에 있어 분별의 대가였습니다.
헤로데의 심문시 이것 저것 캐물어도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대답도 않으시고
침묵으로 대신하십니다.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에 나오는 이사야서 말씀이
침묵의 사람, 예수님의 고백같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주님의 말씀을 귀기울여 들으라 침묵입니다.
이런 침묵의 기도를 통해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 주시니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는 확신도 생깁니다.
하느님은 늘 나와 함께하시고 나를 아신다는 전적 신뢰가 이런 침묵을 가능하게 합니다.
넷째, 예수님은 ‘섬김의 사람(man of service)’이었습니다.
오늘 수난 복음은 최후만찬으로 시작됩니다.
미사의 원형인 최후만찬을 통해 섬김의 사람 예수님의 진면목이 환히 계시됩니다.
영원히 성체성사 미사를 통해 믿는 모든이들을 섬기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최후 만찬 후 누가 제일 높으냐로 다툼이 일어난
동상이몽의 오합지졸 당신 제자공동체에 섬김의 삶을 살 것을 당부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는
결코 소수 정예의 엘리트 공동체가 아니었음을 깊이 인식하시기 바랍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
예수님은 모든 믿는 이들의 공동체의 중심에 섬기는 사람으로 있다는 고백입니다.
우리에게 직무가 있다면 섬김의 직무 하나뿐이요
리더십이 있다면 섬김의 리더십 하나뿐임을 깨닫습니다.
다섯째, 예수님은 ‘연민의 사람(man of compassion)’이었습니다.
비움의 자리에 가득한 연민의 마음입니다.
불쌍히, 측은히, 가엾이 여기는 연민의 마음 자비심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연민의 바다같은 마음입니다.
오늘 수난기에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하는지요.
참으로 약하고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악의 유혹에 빠져 휘둘리는 사람들 한복판에 연민의 사람 예수님은
일체의 판단 없이 모두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예루살렘 입성시 환영하던 군중은 돌변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 광분하였으며
철부지 제자들은 당신 수난예고에도 자리를 다퉜습니다.
유다는 배신했고 베드로은 세 번 당신을 부인했습니다.
이런 와중에도 주님 때문에 울었던 예루살렘의 딸들도 있었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짐을 잠시 덜어준 키레네 사람 시몬도 있었습니다.
십자가 상에서의 주님을 유혹하는 사람들 그대로 사탄의 모습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옆의 한 죄수는 예수님을 비아냥 댔지만
회개한 죄수는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청했고
즉시 응답을 받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24,43).
선인과 악인이 공존하는 세상입니다.
예수님은 이들 모두를 판단 분류함이 없이 연민의 품에 안으십니다.
세상이 예수님을 심판하는 것 같지만 예수님 한 사람이 온 세상을 심판합니다.
예수님 앞에 모두가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과연 나는 예수님의 수난현장 어디쯤 자리하고 있을까요?
오늘 수난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화두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을 닮은 참 사람의 길로 이끌어 주십니다.
-성 요셉 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 수난 성지주일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복음: 루카 19,28-40
십자가와 계약
신앙심 깊은 슬로바키아 민족들은 공산주의 박해 아래 수십 년 동안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14살 양카도 수없이 많은 순교자들 중 한 명입니다.
1977년 늦가을 슬로바키아에서였습니다.
간호사가 되기 위해 준비하던 마리아는 어린 환자들과 놀기 위해 병원의 소아병동을 방문했습니다.
그녀는 이 병상에서 저 병상을 다니며 어린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이름이 무엇인지, 어디 사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녀는 14살 소녀의 병상으로 갔는데, 그 때 만난 아이가 바로 양카였습니다.
대화를 시작하자마자 양카가 물었습니다.
“가톨릭 신자세요?”
“그래.”
“성당도 다녀요?”
“그럼. 규칙적으로 다니지.”
“그럼 좋아요.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걸 당신에게 말해줄게요.”
“5년 전에 나는 첫 영성체를 했어요. 그러나 비밀이에요!
할머니께서 나를 준비시켜 주셨어요.
우리 부모님은 공산당원이기 때문이에요.
엄마는 선생님이고 아빠는 당 서기관 대리예요.
나는 부모님과 하느님이나 신앙에 대해 한 번도 얘기해본 적이 없어요.
첫 영성체 후 나는 특별한 꿈을 꿨어요.
나는 예수님을 보았는데, 하나는 흰색이고 하나는 붉은색인 두 개의 관을 손에 들고 계셨어요.
그리고 말씀하셨어요.
‘양카, 너는 어떤 걸 원하니?’
‘둘 다요.’
‘그러나 붉은 관을 받으면 너는 고통을 받을 거야!’
‘상관없어요. 저는 둘 다 가질래요.’
이렇게 대답한 후에 나는 오른쪽과 왼쪽에 많은 사람이 있을 것을 보았어요.
그들이 내게 소리쳤어요.
‘양카, 우리를 도와줘! 우리를 구해줘!’ 그게 내가 꾼 꿈이었어요.
부모님은 곧 내가 첫 영성체를 한 것을 알게 되셨어요.
그들은 할머니에게 소리를 지르고 마침내 할머니를 집에서 내쫓았어요.
나는 몹시 울었어요.
엄마는 내 방을 뒤져 내 눈앞에서 상본과 교리서를 모두 태웠어요.
그리고 레닌의 책을 책상 위에 놓고 소리쳤어요.
‘우린 이제 이걸 공부할 거다!’
나는 흥분해서 그 불온한 책에 침을 뱉었어요.
그러자 아빠가 나를 몹시 때렸어요.
그리고 부모님은 나가셨고 나는 혼자 집에 있었어요.
나는 할머니가 과연 어디 계실까 곰곰 생각했어요.
‘분명 성당에 계실 거야.’ 역시 그곳에 할머니께서 계셨어요.
나는 계획을 세웠어요.
‘오세요, 할머니. ‘제 방에서 주무시면 돼요.
부모님은 하루 종일 밖에 계실 테니까 할머니는 제 방에서 지내시면 돼요.
제가 학교에서 급식 받은 빵을 가져오고, 학교 가는 길에 필요한 걸 사면 돼요.’
할머니는 나를 따라와 내 방에 숨었어요.
바로 성탄 시기였는데 열흘 동안은 잘 지나갔어요.
그런데 부모님이 내 방에서 할머니를 발견했어요.
우리 부모님은 처음보다 더 무자비하게 할머니를 쫓아냈어요.
나는 몹시 울면서 소리 질렀지요.
아빠는 화가 나서 펄펄 뛰면서 나를 책상에 묶어놓고 거의 죽을 만큼 때렸어요.
보세요. 여기 무릎 아래 아직도 상처가 있지요.
지금은 그렇게 심하진 않지만...
마음은 몸보다 훨씬 더 아파요. 왜냐하면 할머니가 성당 뒤에서 얼어 죽어있는 걸
사람들이 발견했거든요.
나는 그 후에 병원으로 보내졌어요.
내 친척들 중 누구도 나한테 일어난 일을 알아채지 못했어요.
그 후 나는 집보다 병원에 있는 날이 더 많아요.
나는 완전히 혼자예요.”
마리아가 물었습니다.
“근데 지금은 왜 여기 있지?”
“보세요. 여기, 이 옆구리에 종기가 났는데 그게 점점 커져요.
아빠가 나를 때렸던 곳에 그게 생겨났어요.
그때부터 점점 자라면서 진물 같은 게 흘러요. 사람들이 나를 수술할 거래요.”
마리아는 그 종양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건 어려운 수술이야. 너는 사제에게 병자성사를 청해야 해.”
“바로 그 때문에 처음부터 당신이 가톨릭 신자냐고 물었고, 당신께 모든 걸 얘기한 거예요.”
얼마 후 담당 간호사가 마리아에게 그 소녀가 수술 후에 죽었다며 편지를 한 통 전해 주었습니다.
“마리아, 내게 마지막으로 성체를 모실 수 있게 해주어서 고마워요.
나는 첫 영성체와 마지막 영성체만을 했군요.
이제 나는 수술이 끝났어요. 어떻게 될지 당신은 아나요?
나는 수술 후에 귀가 안 들려요.
부모님은 그것을 아주 속상해 하세요.
그분들이 말씀하시는 것을 나는 전혀 듣지 못해요.
아빠가 지갑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상본을 꺼내시더니
거기 몇 마디 써서 내게 읽으라고 주셨어요.
‘양카, 우리에게 너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다!
너는 우리를 다시 하느님께로 인도해주었다.
나는 더 이상 공산당 서기가 아니다.
나는 창고 관리인이고 엄마는 더 이상 선생님이 아니라 상점 점원이다.
우리는 네게 고맙구나. 우린 공산당에서 탈퇴했단다.’”
양카는 1977년 12월 8일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죽었습니다.
12월 8일은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대축일입니다.
정광태씨가 부른 ‘도요새의 비밀’이란 노래를 아십니까?
“너희들은 모르지, 우리가 얼마만큼 높이 오르는지...
너희들은 모르지, 우리가 얼마만큼 멀리 날으는지...
너희들은 모르지 우리가 얼마만큼 빨리 날으는지...
도요새, 몸은 비록 작지만 가장 멀리 나는 새, 가장 높이 꿈꾸는 새”
도요새들은 해변가에 거주하게 되는 동안 작은 게나 벌레들을 잡아먹고
암컷의 경우 몸무게가 약 600g이 되게 살이 찐 후
점보제트 여객기로도 12시간가량 걸리는 거리까지 한번에,
쉬지 않고 잠도 안자고 먹지도 않고 하늘을 날아 이동하는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멀리 날고 높이 나는 새입니다.
한 조사에 따르면 [E7] 이라고 하는 위성 꼬리표를 부착한 이 도요새는
뉴질랜드 북섬 테임스강 하구 피아코 에서 3월17일 밤 자정 출발해서
곧장 타스만해를 가로질러 뉴칼레도니아 파푸아뉴기니아 괌 서부를 건너
한반도의 서해(황해) 갯벌까지 1만 205km를 날아갔다고 합니다.
장거리 논스톱 비행으로 몸무게가 반절 가 되게 줄어든 이 새들은
한반도 서해안 지역 갯벌 에서 약 5주가량 쉬며 기력을 회복한 후
또 다시 약 5000km 더 떨어지는 알라스카 까지 머나먼 여정 길에 오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도요새가 왜 이런 멀고도 험한 비행을 하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알려진 바가 없더라도 도요새가 그렇게 먼 여행을 한다면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모든 동물들은 생존본능이 있습니다.
그렇게 고생하는 것이 그만한 가치를 내게 가져다주지 않는다면
그런 고생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십자가는 계약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온전히 이해될 수 없는 신비입니다.
이제 우리는 모든 관계를 계약으로 이해해야 할 때입니다.
계약이 체결되려면 먼저 내가 가지고 싶은 상품이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그 상품의 값은 내가 지불하려는 한계 내에 있어야합니다.
만약 내가 그 값을 지불하고 그보다 더 큰 이득을 얻게 된다면 우리는 가차 없이
그 값을 지불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비유 ‘밭에 묻힌 보물’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밭만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전 재산을 팔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보물이 있으니 가차 없이 전 재산을 팔아 땅을 산 것입니다.
모든 관계는 이득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서는 지불해야 하는 것도 있는 것입니다.
그 관계에서 얻는 이득을 위해 지불해야 하는 의무가 십자가입니다.
이는 양카의 꿈에서 예수님께서 흰 관과 붉은 관을 두 개 보여준 것과 같습니다.
양카는 계약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아이였습니다.
흰 관은 붉은 관 없이 얻을 수 없는 영광입니다.
어떤 사람이 결혼할 때 배우자의 좋은 면하고만 결혼할 수 있겠습니까?
배우자가 가지고 있는 좋은 면, 나쁜 면을 모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자녀를 낳으면 예쁜 것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자녀를 위해 해 주어야 하는 희생까지 함께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이 그런 고생을 해서 그만한 이득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결코 당신의 에너지를 소비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얻으려고 했던 상품?은 무엇일까요?
바로 아버지와의 관계입니다.
아버지가 아드님과의 관계를 조건으로 원하신 것이 십자가의 죽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와의 관계가 십자가의 죽음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기에
예수님은 그 값을 지불하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노력하는 것과 돌아오는 것이 정확히 같은 가치라면
굳이 계약을 체결하고 무언가를 지불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나에게 좀 ‘더’ 이익이 되기 때문에, ‘플러스알파’가 있기 때문에
계약을 맺고 값을 지불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목숨을 내어놓으셔서 다시 아버지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되돌려 받는다면
사실 십자가의 순종은 이득이 되는 계약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와의 관계를 위해 지불한 십자가의 희생은
아버지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새로이 탄생한 교회와의 관계도 플러스알파로 주어집니다.
마치 부부가 혼인하여 부부간의 사랑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플러스알파인 자녀의 선물까지 얻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관계는 나를 완성시켜줄 뿐만 아니라 더 큰 것을 얻게 해 주기 때문에
항상 이익이 남는 장사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과 맺는 계약은 우리의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맺어야 하는 강요받은 계약입니다.
도요새나 철새들이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먼 이동을 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존재적으로 하느님과의 계약이 아니면 생명을 얻을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 남자와 여자가 태어나기 시작하면서부터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생각하게 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결혼은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니 해 보고 후회하는 것이 낫다고들 합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결혼을 하지 않으면 남자로서의 혹은 여자로서의 완성도 이룰 수 없으며
부모가 된다는 것도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나는 관계로 완성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위해서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어쩔 수 없이 십자가의 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것이 싫다면 하느님과의 관계도 끝이고 나의 생명도 끝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십자가가 가벼워지기 위한 유일한 길은
내가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 얻게 되는 것이 훨씬 크고 이익이 많이 남는 장사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길뿐입니다.
양카가 자신이 붉은 관도 받아들였을 때
많은 이들을 구원하게 될 것이라는 환시를 본 것과 같습니다.
십자가의 희생은 자기만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이들이 구원됩니다.
그리고 그 영광과 기쁨은 십자가의 희생보다 훨씬 크고 가치 있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지 않겠습니까?
자신들의 희생으로 얻는 것이 희생보다 작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믿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익이 남는 것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이신 그리스도께도 십자가를 비켜갈 수 없는 것처럼 공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값을 치르고 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이 얼마나 큰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돈 몇 푼 벌기 위해 그렇게 노력하는데,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을 주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까지도 구원해준다는데
그분과 계약을 맺지 않는 것 자체가, 그래서 십자가를 지지 않는 것 자체가
얼마나 바보스런 것이겠습니까?
십자가는 바로 이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는 내가 목숨을 내어놓고라도 맺어야 하는 가치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가치를 올바로 인식만 한다면
내가 지불해야 하는 것은 아주 작은 비용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희생을 하는 성인들은 그 희생의 가치를 알았기에
항상 더 많은 고통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하늘나라 영원한 보물에 조금 더 투자해 보려는 결심을 해 보는 것을 어떨까요?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아! 어쩌나] 355. 교회는 기도하는 곳이 아닌가요?
문: 저를 보고 성당에 가면 밥이 나오느냐 돈이 나오느냐고 빈정대던 남편이 세례를 받은 후
백팔십도 바뀌어서 성당에 가면 집에 올 생각을 안 합니다.
처음에는 외롭게 자란 사람이라 그러겠지 하며 이해했는데 회합이 끝나면 2차를 하고
밤늦게 들어오니 이제는 짜증이 납니다.
교회는 원래 기도만 하는 곳이 아닌가요?
주님보다도 사람들이 좋아서 이제는 나보다 성당 형님들을 더 좋아하는 남편이 밉기만 합니다.
답: 가정은 아주 중요합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뒤집어 버릴 수 있는 존재도,
진흙탕에 처박힌 나를 끌어올려 줄 수 있는 존재도 가족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가족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정서적 지지자들’입니다.
정서적 지지자들이란 가족 이외에 나를 지지해 주고 이해해 주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일부 종교인들은 세상을 버려야 한다면서 사람들과의 관계도 세속적이라고 비난합니다.
성당은 기도하는 곳이지 사람들을 만나는 곳이 아니라고 하기도 합니다.
일견 맞는 말인데 그렇다고 전적으로 동의하기도 어려운 말입니다.
주님의 경우 모든 것을 다 멀리하시고 독불장군처럼 사셨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도 당신이 쉬고 싶어 하신 곳이 있었습니다.
바로 나자로의 집입니다.
여기에는 나자로뿐만 아니라 주님을 반가이 맞는 마르타, 마리아 두 자매가 있었습니다.
또한 마리아 막달레나도 늘 주님의 곁을 지킨 사람입니다.
정서적 지지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삶의 증인이신 프란치스코 성인도 예외가 아닙니다.
당신의 영적 대화 상대로 클라라 성녀가 계셨습니다.
가진 것은 없었지만 정서적 지지자들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에게 정서적 지지자들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친밀감 때문입니다.
정서적 지지자들이 주는 친밀감은 사람에게 아주 많은 선물을 줍니다.
친밀감은 인간이 고립되지 않도록 해 주는 아주 중요한 감정입니다.
친밀감은 견해 차이가 발생하였을 때 해결하는 능력을 배양하게 해 줍니다. 갈
등을 창조적으로 푸는 대처 기술을 향상시켜서 공감적 경청을 가능하게 합니다.
말뿐만 아니라 감정까지 나누게 해 주는 것입니다.
갈등과 스트레스를 인간 관계의 정상적인 부분으로 여기는 여유를 가지게 합니다.
갈등을 해결할 때 친구, 친척, 전문가들과 상의하거나 도움을 청하는 넉넉한 마음을 가지게 합니다.
서로 만족스럽게 일하고 노는 정도 수준을 높여 줍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좀생이 같은 사람을 넉넉하고 여유로운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는 것이
친밀감이란 감정이고 그 친밀감을 제공해 주는 것이 바로 정서적 지지자들이란 것입니다.
교회는 물론 주님을 뵈러 가는 곳이 맞습니다.
한 주간 세상살이하느라 소홀히 한 기도를 채우는 자리라고 하는 주장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교회는 사람들의 상처 받고 지친 마음을
치유해 주는 자리란 것입니다.
나의 정서적 지지자들을 만나서 푸념도 하고 하소연도 하고 위로도 받는 자리가 교회란 것입니다.
만약 자매님께서 남편이 성당에서 갖는 관계를 다 끊고 자매님만 바라보고 살라고 한다면
남편분의 정서적 지지자들을 없애는 우매한 짓을 하는 것이란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가족, 중요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성장하고 살기 위해서는 가족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관계가 필요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나를 이끌어 주는 사람들과의 관계
그리고 정서적 지지자들과의 관계도 아주 중요합니다.
관계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서 심리적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혈관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인 차원에서 부연해 설명하자면 남편분이 성당 단체원들과 함께 어울리시는 것은
여러모로 득이 많습니다.
우선 남편분의 소재가 분명합니다.
가봐야 성당이고, 신자 집이니 말입니다.
두 번째는 경제적으로도 득이 있습니다.
성당의 단체원들은 대체로 저렴한 곳을 찾습니다.
자주 만나야 하니 흥청망청할 수가 없지요. 잘 생각해 보시길.
-홍성남 마태오 신부님 (가톨릭영성심리상담소장, 상담전화: 02-727-2516)
[교황생태회칙 <찬미받으소서> 해설] 제6장 - 생태 교육과 영성
④그리스도교 영성, 사회·정치적 사랑
“우리는 [그동안] 충분히 부도덕했고, 윤리와 미덕과 신앙과 정직을 충분히 조롱했습니다.
경박한 피상성이 우리에게 결코 좋은 일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때가 왔습니다”(229항).
‘사랑’만큼 흔한 말도 없을 것이다.
마치 물과 공기가 모든 생명체의 유지와 성장에 필수적이면서도 가장 흔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지난 세기 인간의 행위에 의해 그 공기와 물이 심각하게 오염되어
자연 생태계가 재앙을 맞고 있듯이,
사랑 역시 왜곡되거나 그 가치가 축소되어 사회 생태계가 위협을 받고 있다.
“사랑을 친밀한 육체적 관계로 국한하거나 단순히 타인을 위한 [개별적]
행동의 주관적 측면에 한정시킨” 탓이라 할 수도 있다(「간추린 사회교리」 204항).
혹은 교종의 회칙이 극복해야 할 오늘날의 문화로 꼽은,
‘건전한 윤리와 도덕’을 동반하지 않은 ‘개인주의’와
‘실용주의’와 ‘공리주의’가 낳은 결과라 할 수도 있다.
생태 전환을 도모하려는 대화에서,
회칙은 ‘사회·정치적 사랑’이라는 교회의 영성으로 기여하고자 한다.
교회는 진리와 자유와 정의와 함께 사랑을 사회생활의 근본 가치로 제시하는데,
특히 사랑이 “사회 윤리 전체의 가장 높고 보편적인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간추린 사회교리」 204항 참조).
사랑을 “개별적 행동을 재촉”하는 것쯤으로 여기는 우리의 태도와는 너무 다르다.
첫째, 교회의 영성에서 사랑이 사회적인 차원을 갖는 근거는 ‘우주적 형제 관계’에 대한 확신과
‘우주적 형제애’에의 소명(부르심) 때문이다.
우리 공동의 가정은 공동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무상의 호의로 창조하셔서,
인류에게 가꾸고 돌보라는 책임을 맡긴 ‘하느님의 위대한 업적’이다.
그 가정에서 인류는 서로 형제이며 누이다.
게다가 뭇 생명과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바람과 태양과 구름”조차도
이 가정에서 한 가족을 이룬다(228항 참조).
이 가정에서는 그 누구도 또 그 무엇도 ‘나’의 이기적 욕망에 따른
‘소유와 지배와 오남용과 착취’의 대상이 아니라,
존중하고 조건 없이 사랑하고 돌봐야 할 책임이 있는 가족이다.
우주적 형제애는 “보다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하려는 모든 행동”으로,
곧 “사회에 대한 사랑과 공동선에의 헌신으로” 드러난다.
때문에 이는 “개인들 사이의 관계들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계들과 경제적 관계들과
정치적 관계들이라는 거시적 관계들에도” 영향을 주며,
“더욱 큰 규모의 전략들을,
곧 환경의 타락을 중단시킬 전략들을 그리고 사회 전 영역에 스며들게 할
‘배려(돌봄)의 문화’를 촉진할 전략들을 마련하도록” 우리를 이끌어준다(230항).
둘째, 그리스도교 영성에서 사랑이 정치적인 차원을 갖는 근거는 ‘공동체 차원의 행동’,
곧 ‘연대’에의 소명 때문이다.
사회는 “공동선을 증진하고,
[자연과 사회] 환경을 수호하는 일을 수행하는” 수많은 시민사회 ‘단체의(공동체의)
활동’을 통해서도 풍요로워진다.
이 공동체 차원의 활동은 사회관계를 회복하고 발전시키며,
공유의 정체성과 기억되고 전승될 수 있는 이야기와 함께 연대의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한다.
이 연대를 의식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하나의 공동 가정에서
함께 살고 있음을 자각한다는 것”이다.
공동체 차원의 행동들이 공동선에 ‘헌신하는 사랑’을 곧 연대의 의식을 드러낼 때,
‘강렬한 영적 경험들’이 될 수 있다(231항 참조).
우리의 교회 생활을 성찰한다.
우리도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며 “궁핍하고 곤궁한 이웃을 도와주라”고 한다.
그렇지만 “사회의 중개를 활용해 이웃의 삶을 개선하고 이웃의 가난을 초래하는
사회적 요인들을 제거하며” “이웃이 가난에 빠지지 않도록 사회를 구성하고
조직하고자 애쓰는” 행위는 그 사랑의 계명에서 의도적으로 배제시킨다.
그런 일은 세상에서 알아서 할 일이지,
교회가 할 일이 아니라고 하면서 말이다.
우리에게는 대안의 관점과 예언자적이며 관상적인 삶을 드러낸 공동체의 활동이 있었다.
이 땅의 초대 교회의 생활이 그것이다.
우리 교회의 정체성을 드러낸 삶이기도 하며,
언제나 기억하고 전승할 이야기라 할 수 있으며 거울과도 같다.
그 거울 앞에 섰을 때,
오늘의 우리 교회와 교회 생활은 어떤 모습일까?
‘사회·정치적 사랑’은 그 용어조차 우리 교회와 교우에게는 매우 낯설다.
“사람들은 내가 가난한 이에게 먹을 것을 주니 성자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내가 왜 이들이 먹을 것을 갖지 못 했느냐고?
물으니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부릅니다”(헬더 카마라 대주교).
-박동호 안드레아 신부님
너희가 말했다.
내가 왕이라고
너희가 말할 것이다.
내가 죽을 것이라고
너희는 말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무 소용없다고
“내가 그러하다고 너희가 말하고 있다.”(루카 22,70)
-임의준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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