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시집가던 날/시인 김 연숙
눈이 많이 왔었다.
시베리아 벌판처럼 엄동이고 강추위다
겨울밤은 깊어 가는데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세상은 잠이 들어도 결혼 날을 앞두고 몇 수십 날을 근심 걱정에
가슴앓이를 한 나였다
내생에 최고의 기쁜 날이기 전에 슬픈 날이기도 했다.
남들은 좋은 환경에서 자라 고국 땅에서 부모 형제와 지인들 친구들의
축하를 받으며 혼례를 치루 는데 나는 혼자였다.
이국인과 결혼한다는 마음의 결정을 하기까지 자신과의 싸움은 치 열적
이었다
아팠다! 몸살을 했다! 입술이 불어 트고 애간장이 다 타는 나였다.
여지 것 혼자서 잘 살아왔지만 내 인생을 내가 혼자서 결정하기엔 너무나
힘들은 나였다
사랑은 국경선을 넘는다는 말이 오늘날은 아무렇지 않게 들리지만
70년 중반만 해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나 같은 입장에서는 너무 가난해서 독일 땅으로 고용살이를
하러 왔지만 결혼을 외국인과 할 줄은 나 자신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정들면 고향이라는 말이 있듯이 나는 이국인 현 남편과 대학시절 연애를
4년간 하면서 서로 믿고 의지하면서 믿음과 신뢰로 알아가며 심사숙고
한 결과 결혼을 하기로 마음먹었던 나였다.
하나도 험 잡을 곳이라곤 없는 사람이고 인성이 착하고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 이사람이라면 나에게 과분할 정도의 사람이라고 생각한
나였다
단지 험이라면 외국인이라는 그 하나가 마음에 걸렸을 뿐이다.
처녀가 시집을 가는데 그것도 외국 땅에서 외국인과 일생에 단 한 번의
혼례를 치루 는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 어디 있으랴!
결혼을 한다는 자체가 겁이 났고 독일인과 낯 서른 이국땅에서 과연 잘
살 수 있을까 하는 고뇌로 결혼 날자가 다가올수록 잠은 잘 수가 없었고
몸은 여위어만 갔다.
많은 생각을 하고 또 하고 생각 끝에 결혼을 하려고 마음의 결정을 한
나지만 막상 코앞에 결혼 날자가 가까워 오니 나도 모르게 겁이 덜컥 났다.
이럴 때 엄니라도 곁에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절박한 상태에서 마음을 나눌 사람은 한사람도 없고 속은 새까맣게 타 들어갔다
어려서 자립으로 고국에서 타향살이를 한 시절이 있었지만 이국이라는
그 자체가 내 가슴을 압박으로 짓눌렀다.
더구나 그 당시만 해도 외국인과 결혼하면 색안경을 쓰고 보는 사람들도
없지 않아 있었으며 눈길도 곱지 않았고 생각하는 자체부터가 인식이 좋지
않았던 시절 이었다
물론 사사건건 우리 부모들의 반대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나에겐 내 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부모가 내 행복을 보장해줄 아무것도 없기에 나는 호랑이 아버지를
설득 시켰다.
4년이나 교제하고 착한 사람이고 괜찮은 사람이라고~~
덫 부쳐 아버지가 제 행복을 보장할 수 있다면 한국으로 나갈 것이라고
나는 말씀 드렸다.
쥐꼬리만큼 되는 봉급 받아 기숙사 비용내고 내 자신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박봉에 그나마 남은 돈은 매달 집으로 다 부치고 고국으로
돌아가려고 해도 돌아가지 못할 형편의 나였다.
한마디로 빈손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4년간 교제 끝에 결혼 프로 포즈를 받고 이 사람이면 내 생에
동반자로 적합하다고 생각했기에 고심 끝에 결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결혼을 하게 되면 어머님을 모시고 결혼식을 올리려고 했지만 신원조회
관계로 어머니 오시는 날자가 지연되어 결혼 날 자를 3번이나 변경했지만
결국엔 손꼽아 기다리는 어머니는 못 오시고 부모와 형제도 없는 결혼식을
나 혼자 치러야만 했다.
수백 번 마음의 각오를 핸 나지만 임박해오는 결혼 날 자에 어머니는 오시지
않고 까만 밤을 눈물로 지새 며 보낸 날들이 어디 하루 이틀이던가!
부유한 가정은 아니었지만 정이 많으신 시어른들은 내가 외국인인데도 거리낌
없이 대환영으로 받아 드렸고 독자인 아들이 치과대학을 다닌다고 해서 내가
동양인 여자라고 해서 차별하는 것도 전혀 없었다.
아무것도 가지고 지닌 것이라고 없는 나를 받아드려 신발 결혼 드레스
선물로 일체 모두 부담하셨다
결혼 비용 일체도~~
친정 부모님에게 받지 못한 심과 육정인 사랑을 이국인 시어른께 많은
사랑을 받은 나였다.
나에겐 너무나 고마운 시어른들이시다.
친정 부모로 부터는 양발 한 짝 선물도 못 받고 나는 맨몸 맨손으로 시집을
가는 것이다.
결혼식 날 하얀 드레스를 입고 엷은 분홍색 립스틱하나 바른 것이 다였다.
신부화장도 하지 않고 미용실도 가지 않고 엉덩이까지 긴 검은 삼단 머리를
말아 올리고 면사포를 쓰고 쏟아지는 눈물은 막을 수가 없었다.
성당에 도착하자 성가대원 합창단의 노래가 울려 퍼지고 신랑신부 입장
신부님에게로 걸어가는데 마음도 떨리고 다리도 떨리고 휘청거렸다.
신부님의 주례, 기도소리도 귀 기울여 들리지 않았고 나에겐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
아들이 독자라 단출하게 조촐히 결혼식을 한 게 아니라 정식으로 점심식사
오후엔 다과만찬 저녁엔 뷔페로 음식도 많이 하고 남편 벤드들이 음악도 하고
빠지는 것 없이 시댁의 대가족들과 초대한 손님들과 성당 손님들과 결혼
축제에 춤도 추고 아침 3시가 되어서야 손님들이 다 가고 결혼식도 막을
내렸다.
나는 점심도 못 먹고 오후 커피도 다과도 저녁도 먹을 수가 없었다.
하루 종일 물만 마시고 어떻게 하루를 보냈는지 잘 버티어 견뎌냈다.
독일 음식이 적응이 되지 않은데다 혼자서 살아갈 생각하니 이런 저런
생각에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둔탁한 독일 땅에서 철판 같은 독일의 국민성에 과연 내가 발을 맞추어
잘 적응하고 잘 살아갈 수 있을까 미치도록 생각을 해도 끝이 안 보이는
무서움이 자꾸만 나를 괴롭혔다.
눈감으면 떠오르는 나의 결혼식 날이다
그런 세월이 엊그제 같은데 오늘이 벌써 결혼 39년 기념일이다.
다사다난했던 39년 동안 무탈 히 잘 버티어 살 수 있었음은 나 혼자만의
힘이 아닌 내 주위의 가까운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하고 싶다.
외식이라도 하자는 남편의 말에 거절하고 나는 독일 음식을 간단히 해서
촛불 켜고 성탄장식이 두루두루 방마다 장식이 되어 있어 집에서
결혼기념일을 보내며 살 짝이 마음이 젖어온다.
옛 시절 그리며~~
창밖엔 흰 눈이 하나 둘 풀풀 날리고!~~
나의 허락도 없이 세월은 이리도 잘도 간다.
말없이 소리 없이~~
오늘의 기쁨으로 결혼기념일 하루를 보내며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이다.
2015, 1, 3.
첫댓글 참 잘 살아 오셔서 표창장을 드리고 싶은데 ....... 그냥 축복의 박수를 보냅니다
영신님!
표창장 아니더라도
잘 살아온
축복의 말씀만으로도 감지덕지입니다
고맙습니다.
결혼이란,
내 인생을 좌우하는 선택이기에
혼자서
결정하기엔 쉽지가 않은 결정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제 마음은
전선줄에 앉은 새가슴이었습니다.
그때의
그 심정은 말로도 글로도 표현할 수 없답니다.
순 토종인 제가 가난의 죄로 모든 것을 버리고
제가 선택한 제 몫이라는 것만 알고
그래서 열심히 살았고요
지나간 세월이기에 마음 터놓고 쓴 글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힘들었던 시절
그래도 잘 견디어 왔음이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장문의 글 읽노라 고생 하셨습니다.
고운 발걸음 감사드리며~~~~.
꽃비시인님 ...
머나먼 타극 땅에서 ...결혼을 결정하시기까지...
얼마나 힘드셨을까를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리우네요 ..
어린 마음에 얼마나 우셨을까?...그리고 고국에 가족을 얼마나 그리워 하셨을까? ..
아 ... 뭐라 댓글을 써야 할런지? 멍... 합니다 ..
꽃비시인님 자랑스러워요 아주 멋지게 인생에 홈런을 치셨어요 ㅎㅎ
앞으로 좋은 글 많이 쓰시고 지금처럼 위풍당당하시게 사셔요 힘찬 박수 갈채를 보냅니다
꽃비시인님~아자아자 홧팅!!
어느 누구나 힘든 삶을 안살은 사람은
이 세상에 한사람도 없을 것 입니다.
여유로운 시간을 갖고 보니 지난일이기에
틈틈이 글을 씁니다.
홈런을 치셨다고 좋게 생각해 주시니
오늘의 기쁨입니다.
고은님은 제 책과 시를 읽어서 저라는
사람을 사사건건 말하지 않아도
저의 마음을 이해하기가 조금은 쉬울 것입니다.
가을이 기다려집니다.
그땐 단풍잎처럼 고운 시를 쓰려고 하는데~~ㅎㅎ
마음 꽃이 피면
자연 꽃은 따라 피리라고 믿습니다.
사뿐히 오신 발걸음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