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의 3대 별서 정원인 백운동 서원과 월남사지 3층석탑
무위사에서 조금 나오면 백운동 가는 마을 입구가 나온다. 우선 차밭을 지나 안쪽으로 깊숙히 들어간다. 월출산과 녹차밭이 마구 유혹했지만 애써 외면하고 백운동 속내로 들어갔다.
담양 소쇄원, 보길도 세연정과 더불어 호남의 3대 별서정원으로 손꼽힌다. 다산 정양용이 1812년 초의 선사를 비롯한 제자들과 함께 월출산을 등반하고 백운동에 들러 하룻밤을 유숙한 뒤 백운동의 풍광을 시로 쓰고, 그림으로 그린 시첩이 바로 백운첩니다. 백운동의 풍광을 잊지 못한 다산이 그림 잘 그리는 초의에게 맥운동도를 그리고 하고 서시와 발문 등 백운동 12경 중 8수의 시를 직접 짓고 초의 3수, 제자 윤동 1수를 쓰게 하여 총 14수의 시를 완성한 후, 백운동과 다산초당 중 어느 것이 아름다운지 겨뤄 보고 싶은 맘으로 다산초당도를 마지막으로 그려 넣고나서 백운동 4대 동주 이덕에게 선물했다고 한다.
세월이 흘렀어도 백운동 12경의 풍경은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숲으로 들어가면 하늘 한 점 볼 수 없을 정도로 나무가 빼곡한데 윤기나는 동백이 눈에 들어온다. 백운동 정원은 외담을 기준으로 외원과 내원으로 구분된다.
白雲洞. 3자를 새긴 표지석과 풍류를 즐길 수 있는 정선대가 있다. 골기가 없고 단아한 글씨체다.
월출산애서 흘러내리는 계곡물이 흘러내려야 하는데 가뭄 때문에 걱정이다. 이 물을 정원으로 끌어 들였다.
내원에는 2개의 연못이 있는데, 계곡물을 끌어 들여와 내부 정원에 연결한 유상곡수가 볼 만하다. 둥근 형태가아니라 각이 진 형태라 이채로웠다.
백운동 선비는 이렇게 안빈 낙도를 꿈구었을 것이다. 무위사에서 청빈을 배우고 월출산에서 도를 깨우친 것 같다.
정원을 빠져 나오면 울창한 숲이 이어진다.부엽토로 다져진 땅이 땅이 푹신하다. 아리랑 음률마냥 덩실거리며 길을 크게 휘감아 돌면 탁트인 차밭 경관이 펼쳐진다.
산 허리를 감아 돌면서 펼쳐진 푸른 녹차밭은 마치 융단을 늘어 뜨린 것 같다.
산골짜기에 펼쳐진보성차밭보다 깊고 웅장한 맛은 없지만 월출산을 뒷 배경을 둔 녹차밭은 한 폭의 그림이다. 달빛이 비출 때 월출산이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그 달빛이 차 잎을 비출 때 얼마나 윤이 나겠는가?
서리 어는 것을 막기 위해 바람개비가 돌고 있다.태평양 티백녹차가 이곳에서 만들어진다고 하니 다음에 차를 음미할 때는 이 월출산의 감동도 목구멍에 넘겨야겠다.
파도처럼 일렁이는 부드러움에서 절집의 처마선을 그려본다.
차밭을 지나면 '경포대' 가 나온다. 강원도 강릉의 경포대란 지명을 남도에서 만나니 오랜 친구를 만나는 것처럼 반갑다. 그 아래에 월남사지가 자리잡고 있다. 혹시 월남사람이 만든 절이 아닐까? 아니면 월남에서 온 김 상사가 돈 많이 벌어서 만든 절이 아닐까? 아이의 상상력을 뛰어 넘는 유치함에 허우적거리다보니 어느덧 월남사지에 도착해 있었다. 차에서 내리는 순간 '억' 하는 단발마가 튀어 나왔다.
‘세상에나 이렇게 멋진 탑이!’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과 흡사하다. 우선 힘이 넘치는 탑의 규모에 놀란다. 높이 7.4 미터로 거대함이 하늘을 찌른다. 1층의 몸돌이 유난히 길어 백제탑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같은 시대 신라의 삼층석탑과 왜 이리도 차이가 날까? 지붕돌 아래 3단의 받침돌 중 가운데만 유일하게 각이 져있다. 왜 그랬을까? 그런 의문을 가지고 1천년 전 고려석공과 대화를 나눈다. 안내판에 고려시대에 만들었지만 백제의 양식을 이어받은 탑이고 전탑이라고 소개가 되어 있다.
이곳은 월출산을 가장 아름답게 바라 볼 수 있는 자리로 유명하다. 탑 뒷편에 월출산이 만들어낸 기암괴석이 보인다. 그런 좋은 위치라면 절 집의 규모는 상당히 컸을 것이다. 예전에는 탑을 중심으로 민가가 있어 석재는 마을사람들의 집에 사용되었다. 담벼락에도 댓돌이 달여 있었다.
언젠가는 달빛이 훤히 비추는 날, 월남사지 탑을 다시 보고 싶다.
나무 사이 월남사 탑도 볼만합니다
첫댓글 덕택에 앉아서 감상 잘 하였습니다.
예~반갑습니다 선생님~
때이른 더위에 건강하세요...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