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 가해 10월26일 목요일 [(녹)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수도회] 내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불꽃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로마 6,19-23
† 복음 루카 12,49-53
◈ 오늘의 묵상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점점 더 복잡해지고
무거워집니다. 당신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백성을 구원하여 한데
모으러 오셨건만, 오히려 세상에서 외면당하고 반대받는 표적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분께서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신” 당신의
직무를 회피하지 않으십니다. 이 세상의 마지막 날에 있을 하느님의
심판이 이 불을 통하여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불이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이루어질 것임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를 피해 가려고 거짓 평화를 앞세워 죽음을
피해 가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굳어
자신 안에 갇혀 버린 이 세상을 내버려 두실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님께서 직면하신 고난은 반대받는 표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그분께 무관심한 것입니다. 곧 우리가 그분을 우리의
삶에서 밀어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고, 예수님의 삶을
묵상하지만, 이를 통해서 우리가 그분을 영화에 나오는 감상적이거나
비극적인 주인공처럼 만나고, 우리의 기도가 일상의 갈등과 고민들을
비껴간다면, 예수님께서는 더욱 우리의 삶에서 고립되고, 신앙은 우리의
삶과 유리될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통하여 삶의 모든 고통에서 도피하여 마음의 평화만을
찾기를 추구한다면, 우리는 ‘복음의 예수님’이 아닌 ‘환상의 예수님’을
찾는 것입니다. 복음의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신
분이십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2017년 가해 10월26일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제1독서
<이제 여러분은 죄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6,19-23
복음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49-53
베트남 전쟁 때 미군이 사용했던 고엽제를 아십니까? 우리나라에서도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셨던 분들의 심각한 고엽제 피해가 있다고 방송에
자주 나와서 아마 잘 아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고엽제가 나무를
고사하기 위해 살포했던 제초제이지만, 사람에게 있어도 아주
치명적이라고 하지요. 심각한 피부질환을 앓게 됨은 물론 임신 여성의
경우는 기형아를 출산하게 하고, 10년이 넘은 이후에도 증상이 쉽게
가시지 않고 그대로 정신적인 고통과 후유증을 앓게 합니다. 그 이유가
바로 고엽제 안에 있는 ‘다이옥신’ 때문입니다.
다이옥신은 내분비 교란 물질 중의 하나로 소량만 섭취해도 아주
치명적인 무색의 발암물질입니다. 1g만으로도 몸무게 50Kg인 사람
2만 명을 죽일 수 있으며, 청산가리보다 1만 배 강한 독성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인류가 만들어 낸 독 중에서 가장 강력한 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가장 큰 치명적인 이유는 이 다이옥신이
체내에 들어오면 인체에 축적되어서 신체의 대사나 배설로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독성이 계속 쌓여지면 각종 질병을 이겨내지 못해
결국 죽음으로 이끕니다.
이 다이옥신이라는 물질을 생각하면서 문득 우리가 행하는 죄 역시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내 마음과 정신에 ‘죄’라는 것이 계속
축적되면 어떻게 될까요? 어느 순간 죄에 대한 죄책감 자체가
사라지면서 점점 더 인간의 길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즉, 영적 죽음에
이르는 단계가 되는 것이지요.
그래도 참으로 다행인 것은 인체에서 절대 빠져나가지 못하는
다이옥신과 달리 우리의 의지와 노력을 통해서 죄의 굴레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주님의 뜻에 철저하게 따르려는 의지와
노력이 있다면 분명히 영적 죽음으로 이끄는 ‘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세상과는 거리를 둘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주님의 뜻보다는 세상의 뜻을 따르는데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라고 말씀으로
시작하시면서, 평화가 아닌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하십니다.
부활하신 후에도 첫 번째 하신 말씀이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하실
정도로 평화의 주님이 아니십니까? 그러한 분이 평화가 아닌
분열이라니 이해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죄의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영적 죽음에서 우리를 끌어내시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세상 사람들과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점을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 주님의 뜻을 따르려는 의지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남들과 다르게 산다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세상과 분명히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 주님의 뜻을
철저하게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양심이 자신을 고발하게 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압바 아가톤).
인천 신학교의 가을입니다.
울기는 쉽지(루이스 휘른베르크)
울기는 쉽지, 눈물을 흘리기야 날아서 달아나는 시간처럼 쉽지
그러나 웃기는 어려운 것
찌어지는 가슴속에 웃음을 짓고 이를 꽉 악물고
돌과 먼지와 벽돌 조각과 끝없이 넘쳐 나는 눈물의 바다 속에서
웃음 짓고 믿으며 우리가 짓는 집에 방을 만들어 나가면
그리고 남을 믿으면 주위에서 지옥은 사라진다.
웃음은 어려운 것
그러나 웃음은 삶
그리고 우리의 삶은 그처럼 위대한 것.
너무나 어려운 것이지만 오늘 하루 많이 웃기 위해 노력하시길
바랍니다.
제가 사용하는 연필들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내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불꽃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10월26일 연중 재29주간 목요일 루카 12,49-53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
내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불꽃
‘때’가 다가오자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때에 겪으실 고난의 사건 앞에서
괴로움을 감추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모두가 당신의 사랑을
받아들이지는 않았기 때문에 고통스러워하셨지요.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덮치는 심판을 언급하면서 당신 자신에게도 영향을 줄 심판을
말씀하십니다(12,50).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12,49. 51)
분열을 일으키는 불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불은 하느님의
다스리심이 결정적으로 드러나기 전에 세상이 겪을 세말 심판을
뜻합니다(12,49).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12,50)란 그분의 고난을
말하며, 고난의 잔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을 위해 불세례(12,49)를
받는 것을 말할 것입니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12,51)는 말은
가족의 조화를 많이 강조하는 유다인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을
것입니다(12,51-53).
아무튼 불을 질러 분열을 일으키시겠다는 예수님의 마음과 뜻은 오직
하나 우리를 향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불은 예수님의
사랑의 열정을 말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 좋은 계절에 우리도
하느님을 향한 열정을 다시 불태워야겠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하느님 자비가 온 세상에 퍼지기를 열망하시기 때문입니다(12,49).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뜻을 따라 하느님과 복음을 선택하는 열정이
필요합니다. 사랑의 불은 영혼의 어둠을 밝히고, 불필요한 것을 태워
없애고 빛을 밝힘으로써 우리가 주님 편에 서도록 해줍니다. 하느님의
사랑의 불은 모든 것을 태워 사랑으로 변화시키지요. 우리에게 이런
사랑의 열정과 책임있는 선택이 없음이 바로 죽음의 표지임을
알아차려야겠습니다.
우리 삶에 있어서 지펴야 할 불은 무엇이며, 불에 태워버려야 할 것은
무엇일지 숙고해봐야겠습니다. 지펴야 할 불은 사랑의 불, 평화의 불,
선과 의로움의 불, 성령의 불, 분별과 지혜의 불일 것입니다. 또
태워버려야 할 것은 하느님과 나를 갈라놓는 생각, 이기심과 탐욕,
잘못된 습성, 죄로 기우는 경향 등이겠지요.
나아가 우리는 주님 사랑의 불과 성령의 불로 이 사회에 불의와 부정,
불공평, 기만, 가난, 구조적 모순, 빈부격차 등을 조장하는 악의
실체들을 태워버려야겠습니다. 너와 나 안에 있는 옳지 못하고 좋지
않은 것들을 태워버릴 때 우리 자신이 바로 사랑의 불꽃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영혼에 하느님의 말씀의 불을 지펴 선악을 가르는
표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겐 구원을 위한 사랑의 불이
필요합니다. 정의의 불씨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주님의 불을 온 세상에
지펴 사람들 마음속에 구원을 향한 불길이 타오르도록 해야겠습니다.
오늘도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끌 수 없는 사랑의 불을 우리 모두의 가슴
깊숙이에 지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주님, 당신 사랑의 불로 우리
마음속의 애착과 편견과 악습을 한 줌 재로 바꿔주소서. 당신께로 가는
길목을 가로막는 자만심과 위선과 세속적인 야망을 성령의 불꽃으로
정화시켜 주소서. 그리하여 아름다움에 묻어있는 한자락 당신을 향한
사랑과 평화의 불꽃을 보게 하소서!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오늘 우리에게는 주님의 불이 필요합니다!
2017년 가해 10월26일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루카 12,49-53
오늘 우리에게는 주님의 불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매일 건네시는 예수님 말씀은 참으로 풍요롭고 다채롭습니다.
마치 각 나라별 산해진미가 다 갖춰진 최고급 뷔페 식당과도
비슷합니다.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은 매일 예수님께서 차려주시는 풍성하고
영양가 있는 말씀의 식탁에서, 그저 이것 저것 골고루 섭취하면 되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접할 때 마다 느끼는 바지만 예수님의 한 말씀 한 말씀은 정말이지
신비스럽습니다. 한 분의 입에서 나온 말씀들인데도 불구하고, 어찌
그리도 다채롭고 깊이가 있는지? 어떻게 그렇게 극과 극을 오가는지?
이천년 세월이 흐른 오늘날에도 어찌 그리도 생생하고 감동적인지?
예수님의 말씀은 때로 산들바람처럼 부드러운가하면, 때로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때로 꿀처럼 감미로운가
하면, 때로 천둥소리 보다 더 충격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며 제자들에게 남기신 말씀은
용광로 처럼 뜨겁습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루카복음 12장 49절)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왔다! 이 뜻밖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까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습니다만, 다른 무엇에
앞서 예수님은 사랑의 불을 지르러 오셨습니다. 이 차갑고 냉담한 세상,
이 비정하고 사랑없는 세상에 사랑의 불을 지르러 오신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예수님의 그 불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의 불길이
될 것입니다. 시대가 바뀐지가 언제인데, 끝까지 주제 파악하지 못하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이땅의 사악한 무리들을 향한 뜨거운 불길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들의 하늘을 찌르는 안하무인과 몰상식함과
위선을 활활 불살라버리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주님의 불이 필요합니다. 극단적 물질만능주의에
함몰되어 이 땅위의 약자들, 장애우들, 뒤쳐진 이들을 철저히 무시하는
저 야수같은 무리들의 비인간성을 활활 불살라버릴 주님의 불이
필요합니다.
우리 각자 안에도 주님의 불이 필요합니다. 내 안의 권위주의와
폭력성, 미성숙과 몰상식, 반복음적 증거들을 모조리 불살라버릴
뜨거운 주님의 불이 필요합니다.
- 살레시오회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 루카 12,49-53
꼭 1년 전입니다. 사람들은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왔습니다. 작은
촛불이 모이니 커다란 폭풍이 되었습니다. 지난 1년 동안 참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국회는 대통령의 탄핵안을 가결시켰습니다. 헌법
재판소는 국회의 탄핵 결의안을 받아들였습니다. 대통령은 탄핵되었고,
지난 5월에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되었습니다. 언론을 통해서
‘국정농단, 적폐청산’이라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국민은 물과 같다.’
고 합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국민을 위해 권력을 사용하면 잔잔한
물이 되어서 권력이라는 배를 띄우지만, 권력을 가진 사람이 국민을
기만하고, 사리사욕을 채우려한다면 거센 풍랑이 되어서 권력이라는
배를 침몰시키기도 합니다. 새로운 정부도 국민을 위한 정책을 세우지
않는다면, 국민을 무시한다면 국민은 또다시 촛불을 들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죄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종이 되어 얻는 소득은 성화로 이끌어 줍니다. 또
그 끝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이지만, 하느님의
은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오늘의 화답송은 ‘선택’을 이야기합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 마다 모두 잘 되리라.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바람에 흩날리는 검불 같아라. 의인의 길은
주님이 아시고, 악인의 길은 멸망에 이르리라.”
지금부터 38년 전에 저는 고등학생이었습니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그때는 석간이었던 동아일보를 배달하려고 보급소엘 갔습니다. 신문
150부를 들고 배달을 하고 나면 배도 고프고 그래서 신당동 떡볶이
집엘 자주 갔습니다. 요즘은 신문도 다들 오토바이로 배달하지만
그때만 해도 오토바이 배달은 없었습니다. 신당동의 떡볶이 집에는
음악이 있었고, 맛있는 떡볶이가 있었고 우리들만의 세상이
있었습니다. 그때 들었던 음악은 레이프 가렛의 "다함께 춤을 춰여"
라는 신나는 댄스 음악이었습니다. 그리고 남진, 나훈아와는 전혀 다른
음악을 보여준 산울림의 음악이 있었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산울림의
음악을 좋아했고, 저도 물론 좋아했습니다.
그런 어느 날 신문을 배달하려는데 '호외'가 나왔습니다. 대통령이
유고라고 했다가, 서거라고 했다가 결국은 대통령이 죽었다는 내용의
신문기사였습니다. 대통령이 죽었다는 사실은 저에게는
충격이었습니다. 그분은 새마을 운동을 주도하셨고, 민족의 근대화를
위해서 산업현장을 뛰어다니셨고, 수출 100억불, 국민소득 1000불을
위해서 불철주야 땀을 흘리셨던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저는
그분의 앞모습만 보았습니다. 신문과 방송도 그분의 앞모습만 저에게
보여주었으니까요.
그 뒤 저는 그분의 뒷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무리하게
삼선개헌을 하였습니다. 긴급조치를 남용했습니다. 노동자들과
학생들의 저항을 잔인하게 진압하도록 했습니다. 자신의 권력을
무리하게 유지하려다가 가장 가까이 있는 측근에게 그렇게 허무하게
죽음을 당했습니다. 오늘이 바로 그분이 세상을 떠난 지 38년이 되는
날입니다.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그가 세운 업적이나 그의 앞모습만으로는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진정한 평가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결국은 드러날 뒷모습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살아있는 사람은 결코 성인품에 올리지 않습니다. 그가
많은 기적을 행했어도, 그가 모든 사람에게 존경을 받았어도
그렇습니다. 그가 아무리 높은 직책에 있었어도 그렇습니다. 죽은
다음에도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성인품에 올릴 수 있는지
조사를 합니다. 저 자신을 돌아봅니다. 내가 하는 일과 내가 하는 말과
내가 하는 행동이 비록 정당하다고 할지라도 사실은 어느덧 나는 나의
욕심과 나의 이기심을 뒤에 감추고 있을 때가 많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진실한 사람,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 이웃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없기에 세상에
평화가 없고, 분열과 불신이 가득한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만이 희망’이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들의 따뜻함이, 우리들의 진실함이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된다면, 참된 평화와 자유가 이 땅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평화를 갈망하라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7년 가해 10월26일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루가 12,49-53)
평화를 갈망하라.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는 광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순간의 선택이 영원한 생명, 구원을 좌우합니다.
성경을 보면 “인간을 제 의지의 손에 내맡기셨다.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있다.
그분께서 네 앞에 물과 불을 놓으셨으니 손을 뻗어 원하는 것을
선택하여라.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있으니 어는 것이나 바라는
대로 받으리라”(집회15,15-17).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수아서
24절 15절에는“만일 주님을 섬기는 것이 너희 눈에 거슬리면,...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여호24,15).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순간순간이 선택의 삶입니다. 물론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에 대한
책임은 본인이 져야 합니다.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소명에 따라 응답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따라서 가족들이 예수님으로 인해 갈라진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지만
그것이 현실입니다. 예수님에 관한 입장을 다른 사람이 대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영원한 생명의 선물이 눈앞에 주어졌지만 선택은 자기 고유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지만 아무나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평화를 주시고자 하지만 그분의 뜻을 따르는 것은 각자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으니 아버지와 아들이, 어머니와 딸이,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제각각 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죽음이 오고,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생명과 평화가
옵니다’(로마8,6). 그리고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로마8,8). 그럼에도 누구는 생명을, 누구는
죽음을 선택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하십니다. "괜히 시끄럽게
만들지 마!"라는 말이 예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예', '아니오'의 선택은 참으로 큰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에페2,14). 그러나 그 평화를
얻기까지 일상의 삶 안에서 끊임없는 결단이 요구됩니다. 그래서 성
아우구스띠노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해 만물을 창조하셨으니, 우리
마음이 하느님 안에 평안히 쉴 때까지는 그 어디에서도 평안치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평화를 원하십니까? 평화를 구하십시오. 다른 사람이 나의 평화를
깬다고 생각하지 말고 참 평화를 위해 일하십시오.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미워하기에 앞서 내 마음 속에 있는 욕망과
무질서를 미워하고, 다른 사람의 불의를 미워하고 폭군을 미워하기에
앞서 내 마음 안에 있는 그것들을 미워해야 합니다’(토마스 머튼).
그리고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참 평화를 얻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는“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 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14,27).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줄 것입니다”
(필리4,6-7).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시오”(콜로3,15). 아멘.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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