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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
요 11:38-44
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요 11:38-44 / [다시 살아난 나사로] 예수께서는 침통한 마음으로 무덤으로 가셨다. 무덤은 동굴이었으며 입구는 돌로 막혀 있었다. 39) `돌을 옆으로 옮겨 놓으라' 하고 예수께서 말씀하시자 죽은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가 말하였다. `지금은 냄새가 지독할 겁니다. 죽은 지가 벌써 나흘이나 되었으니까요' 40)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41) 사람들이 돌을 옆으로 굴려 놓자 예수께서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제 청을 들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42) 언제나 제 청을 들어주시는 아버지께 새삼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여기 서 있는 사람들에게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43) 그러고나서 예수께서는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고 큰소리로 부르셨다. 44) 그러자 나사로가 수의를 입고 붕대로 얼굴과 머리를 싸맨 채 나왔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그를 풀어 주어 가게 하라' 하고 말씀하셨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않았느냐”(40) 예수께서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고 하셨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그 영광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38-40)예수께서는 그 곳에 모인 무리들에게 무덤에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명하셨습니다. 영혼을 가둔 캄캄한 사망의 동굴을 활짝 여시고 죽은 영혼에 새 생명의 발걸음을 옮기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죽은 지 나흘이 되었고 냄새까지 났습니다. 나사로가 기절했거나 잠자고 있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모든 유대인도 다 그가 죽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부활은 기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삶도 나사로의 무덤처럼 절망적인 한계 상황에 처해있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이 그 돌을 제거하라고 명령하시는 음성을 들으십시오. 반드시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41-42) 예수께서는 무덤을 열어 놓으신 후 먼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아버지께서 항상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신 사실에 감사하며, 나사로를 살리는 사건을 통해 많은 사람이 아버지를 믿게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주님은 자신의 기도가 아버지의 뜻과 일치한다는 확신 속에 감사하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를 이미 들으셨다는 확신 속에 감사할 수 있습니까?
나사로야 나오라(43-44)기도를 마치신 후에 큰 소리로 나사로를 불러 죽음에서 살리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만일 예수께서 "나사로야"라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면 모든 죽은 사람들이 다 무덤에서 나왔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나사로가 '베로 동인 채로 나왔다'는 기록은 그가 정말 죽었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증명해줍니다. 주님은 나사로를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습니다.
적용: 나사로의 부활은 장차 "나오라"고 명하시는 예수의 음성을 듣고 죽음에서 걸어 나올 모든 믿는 자들의 예표입니다. 먼저 우리 곁을 떠난 사람들이 죽음에서 걸어 나올 때가 있습니다. 우리도 죽음을 뚫고 걸어 나올 것입니다. 부활의 소망을 붙들며 삽시다.
주님은 우리의 삶을 허락하시는 생명의 근원입니다. 그분 말씀대로 죽음 뒤에 부활과 영생이 있는 것을 믿으면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세상으로부터 오는 위험과 고통에 쓰러지지 않기 위해서는 부활을 이루실 주님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고 죽음이 끝이라는 세계관 속에서 살아가는 자들에게 부활과 생명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영생을 확신하며 살아야 합니다.
< 설 교 >
무덤을 넘어서
요 11:33-44 / 이종윤 목사
오늘은 즐거운 명절 추석입니다. 해 마다 추석이라는 명절이 오면 사람들은 죽은 조상의 무덤을 찾아갑니다. 그러면 조상의 무덤을 찾아가는 것이 죄가 됩니까? 아닙니다. 무덤을 찾아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조상의 시체가 있는 무덤 앞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문제입니다.
Ⅰ. 죽은 조상을 숭배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인가?
①조상숭배는 민족고유의 미풍양식이 아니라 분명한 우상숭배입니다. 조상숭배는 중국의 주희(주자, 1130-1200년경)가 유교철학을 만든 후 성리학이라고 불리는 Neo-Conbucianism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유교를 국교를 삼은 조선왕조가 백성들의 충성을 끌어내기 위해 부모에게 효도를 강조하면서 제사제도가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②부모공경법이라기 보다는 기복신앙에 근거한 것입니다. ③죽은 자와 산 자의 영적교통은 불가능합니다(부자와 거지 나사로). ④조상숭배는 자연숭배사상에서 유래됩니다. ⑤조상을 기념하기 보다는 종교적 행위입니다. 따라서 조상숭배는 성경적으로는 우상숭배요, 역사적으로는 중국유교철학의 유산이며, 철학적으로는 과거 지향적이며 자연주의적 세계관에 기초한 정치적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Ⅱ. 우리도 영적으로 죽음의 잠을 자던 자다.
오늘 본문을 보면 나사로는 죽은지가 이미 나흘이나 지나 냄새가 났다(요11:39)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덤에서 다시 살아 나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①성경은 죽은 자의 부활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영혼불멸설과는 다릅니다(고전15:43). ②우리는 영적으로 죽음의 잠을 자던 자들입니다(엡2:1).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 믿음도 회개도 기도도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할 수 있습니다.
Ⅲ. 생명의 음성.
①나사로에게 주님으로부터 생명이 순간적으로 주어졌습니다. ②제자들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미 부패된 것보다 더 능력이 많으신 주님이 “나오라”고 부르셨을 때 손과 발이 묶여있고 어둠의 웅덩이에 빠져있던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즉 나는 할 수 없어도 주님은 할 수 없는 것이 없으심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Ⅳ. 부분적 속박.
①생명이 주어졌으나 얼마동안은 죽은 자가 입는 수의를 입고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옛 습관과 옛 혈기 등은 모두 수의와 같은 것들입니다. 우리 성도는 이것을 벗어던져야 합니다. ②“---풀어놓아 다니게 하라”(요11:44) 우리는 나를 묶고 있는 옛 죄악을 용서받고 천국에 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③심판대 앞에서 죽은 자가 입은 수의를 입은 채 설 수 없습니다.
맺는말.
①우리는 모두 죽었던 자들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생명과 복을 주실 수 있습니다. ②무덤너머의 세계는 영원히 건널 수 없는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어집니다(롬6:23). ③우리는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분명한 사실은 죽은 조상을 숭배해서는 절대로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행16:31). ④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하거나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닙니다(고전10:23). 오늘 말, 행동, 음식물, 취미생활 등을 통해 이웃들에게 늘 영적 유익과 덕을 세우기 위해 최선을 다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다 받고 누리시는 우리 서울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요 11:34-44 / 변한규 목사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때 하늘도 울고 땅도 울었습니다. 하늘은 천둥으로 울었고 땅은 핏방울로 울었습니다. 그때 기독교가 막을 내렸나보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를 위해서 사망권세를 깨뜨리시고 무덤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 이 시간 사랑하는, 너무도 사랑하는 성도님들 모두에게 예수 부활, 나의 부활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학자 W. M. 스미스 박사가 말했습니다. “지상에서 일어난 이적 중 가장 큰 이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예수의 부활은 인류 역사 가운데 가장 큰 소망이다.” 기독교는 이적의 종교요, 부활의 종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가 증언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나팔을 불고 있습니다. 환희, 감격 가운데 새소식처럼 전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선교자들이, 그리고 사도들이 이를 증거 했고, 사도 요한은 요한 1서 1장에서 증언했습니다.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그리고 요한은 예수님이 무덤에서 다시 살아난 것처럼 무덤 속의 성도들이 다 일어날 것을 예언했습니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요 5:28). 지금까지 제가 수백의 성도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눈물 흘린 적도 많았습니다. 그때의 그 모든 성도들이 무덤에서 나오게 될 것입니다. 앞서가신 우리 교회 장로님들도 부활하실 것이고 권사님들도 무덤에서 부활할 것이고 집사님들도, 모든 성도들도 무덤에서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사회의 부조리, 국가의 정세, 교회의 각성들을 고려할 때 부활주일을 지키는 현대 교회를 향하여 외치고 싶은 유일한 메시지 주제가 있다면 나사로야 나오라는 주제라고 여겨 봅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이 시간 메시지의 주제입니다. 영적의미가 무엇입니까?
첫째 슬퍼한 자여, 무덤에서 나오라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33절). 오라비가 죽었을 때에 그 누이들은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습니다. 인생이 무엇입니까? 어쩔 수 없는 죽음 앞에서 애통하는 인생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찬송이 무엇입니까? ♫ 마음속에 근심 있는 사람 주 예수 앞에 다 아뢰어라 ♬ 슬픈 마음 있을 때라도 주 예수께 아뢰라, 슬픔을 당한 성도가 있습니까? 예수님께로 나와야 합니다. 애통하는 성도가 있습니까? 주님 말씀하십니다. “애통하는 자여, 나오라.” 나올 때에 ♫ 애통하며 회개한 맘 충만하게 합소서 ♬ 찬송하면서 빈손 들고 나와야 할 것입니다. 슬픈 자가 무덤 가운데 머물러 있으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모든 것들이 끝장이 아닙니까? 그러나 기독교는 피리어드가 없습니다. 새 출발만 있습니다. 애통하는 자여, 나와라. 내가 너희에게 기쁨을 주리라. 그리고 주님이 우리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 부활절의 깊은 의미가 여기 있는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절망한 자여, 무덤에서 나오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39절). 무엇이 인생을 절망의 무덤에 가두었습니까? 죄, 죄, 그것 때문입니다. 도대체 인생의 모습이 무엇입니까? 로마서 3장이 설명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어요,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습니다.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됐다 했습니다.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다 했습니다. 그 목구멍은 어찌 된 것입니까? 열린 무덤이라 했습니다.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있다 하지 않았습니까? 때문에 저마다 절망합니다. 따라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절망한 자여, 그 무덤에서 나오라고 말입니다.
셋째, 잠자는 자여, 무덤에서 나오라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43절). 여기 잠자는 자여, 무덤에서 나오라, 말을 바꾸면 죽은 자여, 무덤에서 나오라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신학자 벵겔에 의하면 하늘나라 방언으로 잠들음이기 때문입니다. 나사로가 죽었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을 때 예수님께서 어찌 하셨습니까?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11절). 그리고 예수님은 깊은 잠에 빠진 자를 깨우듯이 무덤 침대에 누워있는 나사로를 향해서 큰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하셨습니다. 그때 나사로가 어찌했습니까? 잠결에, 정신 못 차리고, 수족을 동인채로, 얼굴을 가리고, 수건을 덮은 채로, 무덤에서 뚜벅 뚜벅 나오지 않았습니까? 왜 예수님께서 나오라 하셔도 되었을 텐데, 나사로야, 나오라 하셨습니까? 그냥 나오라 하셨다면 주변에 있는 모든 무덤속의 송장들이 다 나오기 때문입니다. 왜 나사로야 나오라 했습니까? 나사로가 무덤에 머물러 있으면 송장냄새만 풍기기 때문입니다. 그 일을 막고 나사로야 무덤에서 이제 나오라는 뜻입니다. 인생이 무엇입니까? 회칠한 무덤 인생들입니다. 무덤을 공원처럼 아름답게 꾸밀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냄새나는 송장뿐이요, 마른 뼈들뿐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선지자 에스겔을 불러 골짜기로 인도하셨습니다. 가보니까 수많은 뼈들이 이곳, 저곳에 널려 있었습니다. 보니까 흉측하기만 합니다. 지독한 냄새만 있습니다. 에스겔 골짜기위에 소망이라고는 늦가을 낙엽처럼 다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향하여 불으십니다.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생각하면 너무 황당한 질문이 아닙니까? 혹시 그들이 산소 호흡기를 꼽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에스겔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나이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비록 마른 뼈들이지만 능히 살아날 수가 있습니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방법으로는 살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으로는 능히 살 수가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방법이 무슨 방법입니까? 생기야 들어가라 방법입니다. 여기에 죽은 영혼이 살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지옥갈 인생이 사정을 바꾸어 천국갈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또 여기에 민족의 소망이 있고, 우리 교회의 비전이 있습니다. 우선 나의 믿음이 생기를 만나야 합니다. 내 죽은 믿음이 생기가 들어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나의 믿음이 마른 뼈처럼 되지는 아니했습니까? 믿음이 생기를 만나야 합니다. 죽은 믿음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죽은 믿음 가지고 어찌 홍해를 건너며, 죽은 믿음 가지고 어찌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수가 있습니까? 또 나의 기도가 생기를 만나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심령이 부흥되고 교회가 부흥되기 원합니까? 마른 뼈 같은 우리의 기도에 혁신의 봄바람이 불어와야 합니다. 기도 없는 믿음 생활은 마치 기름 없는 등잔과도 같습니다. 기도가 살아야 합니다. 기도가 살아야 신앙인격이 살고 신앙인격이 살아야 그 생활이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나의 사고방식에 생기가 들어가야 합니다. 나의 사고방식이 마른 뼈처럼 되지는 아니했습니까? 너무 옹졸하고 너무 편협적이고 너무 이기적이고 너무 숨통이 막히는 것 같은 나의 옹졸한 사고방식이 생기를 만나야 합니다. 그리곤 무덤에서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시간 우리 모두를 향하여 다시 말씀하십니다.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무슨 뜻입니까? 죽은 자가 살아날 방도가 있느냐? 철학이, 정치가, 과학이 영혼을 살릴 수 있더냐? 뼈처럼 마른 너의 믿음이, 너의 기도가, 너의 사고가, 너의 생활이 능히 살 수 있느냐는 뜻입니다. 우리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것이 진실한 대답이어야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할 수가 있나이다. 이러한 의미입니다. 사람의 생각, 사람의 방법, 사람의 경험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으시면 할 수 있나이다는 뜻입니다. 국회의원 총선거일 4월 15일을 앞두고 국운이 흔들이고 있습니다. 우리의 경제가 밑바닥에서부터 뒤틀 거립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까지 오염되어 가고 있습니다. 니느웨 백성들처럼 우리 모두가 함께 우리가 어찌할꼬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파스칼이 말했습니다. “종교인 가운데 위선자가 가장 많다.” 교회의 지도자 한 사람, 나 같은 죄인, 죄인들을 두고 주신 말씀인가 싶어집니다. 나도 회개합니다. 우리 함께 어찌할꼬 회개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까지 제가 들은 중 가장 긴 설교 제목 하나 떠오릅니다. 상의군인 출신 이천석목사의 설교제목입니다. “강아지야 짖어라 기차는 달린다”는 주제입니다. 세상을 살다가 보면 강아지 인생들 많습니다. 그래서 마구 짖어댑니다. 함부로 짖어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예수님이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 말씀했습니다. “내가 사니 너희도 살리라.” 제 남은 날도 같습니다. 강아지야 짖어라 기차는 달린다, 이것이 남은 날의 나의 기백이요, 믿음입니다. ♫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도와주실 것을 믿고 온 성도님들을 또한 도와주실 것을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오. 아멘.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요 11:34-44 / 지태일 목사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까? 2005년 새해를 맞이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꿈과 비젼을 가지고 살아 갈 것을 새해 첫주일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사람들입니다.
롬14:8절의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우리는 주의 것이기 때문에 주의 것이 된 이상, 우리는 살아도 주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의 영광을 위하여 죽는 것입니다”
♬ 찬양/ 이제 내가 살아도 주 위해 살고 이제 내가 죽어도 주 위해 죽네 하늘 영광 보여주며 날 오라하네 할렐루야 찬송하며 주께 갑니다. 그러므로 나는 사나 죽으나 주님 것이요 사나 죽으나 사나 죽으나 날 위해 피 흘리신 내 주님의 것이요.(찬양집 407장)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먼저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가를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면 우리의 삶의 기준이 뚜렷해집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힘들어도 열심히 해야할지 말아야 할지를 분명히 보여 줍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이야말로! 우리의 삶의 내용이요, 방향이요, 목표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 성도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의 고민이요, 숙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결론부터 말씀을 드린다면 "믿음으로 행할 때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으면 주님의 영광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롬14:23절 말씀처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죄짓는 자리에서는 주님의 영광은 없습니다.
오늘 본문 40절 말씀이 잘 말씀해 주심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본문 말씀은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가 병들어 죽었을 때에 예수님은 그 소식을 들은지 이틀 후에 오심니다. 그 때 마리아는 예수님이 조금만 일찍 오셨더라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텐데, 이제는 죽었으니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끝장났습니다. 예수님은 왜 요청을 받으시고도 그 즉시로 오시지 않았습니까? 왜 예수님은 오라비 나사로와 그의 자매들을 그토록 사랑했고, 그 분을 위해 그토록 많이 행했는데 왜 그냥 죽게 내버려 두셨습니까? 마리아는 불평 섞인 말로, 낙심되는 말로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 마디 말씀하십니다. 그 말슴은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 너희들이 내 말을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40절)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는 것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는 기적을 본다는 것입니다. 죽은 자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하나님께는 큰 영광입니다. 나사로 한 사람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기 때문입니다.(12:11절)
더 나아가 나사로나 그의 가족들이나 사람들에게는 무한한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원래 나사로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을 얻을 자”라는 뜻으로 그는 참으로 주님의 도우심으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다시 살아나는 영광의 기적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십니까? 우리가 이 시대속에서도 하나님의 영광(기적)을 보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마땅합니까?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당시의 사람들은 믿지를 못했습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죽은 나사로가 살아날 것도 이미 말씀했지만 믿지 못하고 두려워 하며, 오히려 낙심하며, 포기하며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하는 것을 봅니다. 이에 대해 주님은,
1. 통분히 여기셨습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통분히 여기셨다 라는 표현이 두 번에 걸쳐 나옵니다. 33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여기서 통분히 여기셨다는 말씀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슬픔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무엇 때문에 통분히 여기셨는가? 마음에 기뻐하시지 않으시고 비통한 심정으로 아파하셨는가? 사랑하는 나사로의 죽음을 보시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느끼셨기 때문이었습니까? 아님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으면 우리 주님의 통분하심은 다른 데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먼저 누가 울고 있었습니까? 마리아가 울고 있었습니다.
32절에 보면 마리아가 예수님을 뵈옵자 마자 땅에 엎드리어 안타까워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울음 섞인 목소리로 예수님에 대한 아쉬움을 토해 냄니다. 계속하여 엉엉 웁니다. 슬픔의 눈물이요 통곡의 눈물입니다. 죽은 오라비 나사로에 대한 슬픔의 울음입니다.
마리아는 오라비 나사로가 죽지 않았다면 울 필요가 없었습니다. 지금 마리아에게는 죽은 나사로만이 있습니다. 이 울음은 이미 다 끝난 상황에 대한 체념과 절규의 울음입니다.
그리고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웁니다.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나사로가 죽지 않았다면 유대인들의 눈물 역시 눈물을 흘릴 필요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돌이킬 수 없는 안타까운 현실에 대한 눈물입니다.
1) 그런데 마리아와 함께 울고있는 유대인들에 대해서도 주님은 통분하심니다.
마리아가 울고, 그녀와 함께 있는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우리 주님이 심령으로 통분히 여기심니다. 왜 통분히 여기심니까? 믿지 않는 그들의 불신앙의 모습에 대한 주님의 비통한 심정입니다. 여기 오시기 전에 나사로가 중병에 들었다 라는 전갈을 받고 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요11:4).
나사로의 병에 대해, 그가 어떻게 다시 살아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늦게 오셨고, 사랑하는 친구 나사로가 죽어 가는데 이틀씩이나 지체하심에 대한 아쉬움, 불신, 낙심하는 모습을 보시고 주님은 통분히 여기셨습니다.
왜 부활의 주님을, 능력의 주님을, 병든 나사로가할지라도 다시 살릴 수 있는 주님을 믿지 못한데 대한 안타까움을 볼 수 있습니다.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 영광을 위한 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못믿을 때 통분히 여기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신지, 그 하시는 말씀에 대한 능력에 대해 이해 못하는 그들을 향해 마음 아파하십니다. 통분히 여기심니다. 예수님은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나사로의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음을 아셨습니다. 인간의 무지함, 거기서 나오는 조급함과 불평과 하고 한 숨을 쉼니다.
우리는 주님의 지체하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의 지체하심을 정녕 이해하고 깨닫고 고통속에서도 묵묵히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더 좋은 하나님의 영광, 기적은 나타납니다. 능력을 깨달아야 합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심한 병이나 죽음에 직면할 때 기다리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도 주님이 오시기를, 행하시기를 기다시기 바랍니다.
지체될 때마다 주님이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 더 큰 역사를 보여주시기 위해 늦추시는 줄 믿고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기다림이 길면 길수록, 인내가 크면 클 수록 기쁨도 더 할 것입니다. 인내하고 기다리는 자들에게 영광을 보여 주심니다. 그 영광은 기쁨입니다. 불신앙의 모습을 버리시기 바람니다.
2) 믿음이 없는 사람들을 향한 통분입니다.
38절에도 우리 주님의 통분한 심정이 표현됩니다.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엇으로 인하여 우리 주님이 또 다시 비통해 하심니까?
37절을 보면,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을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소경의 눈을 떠서 보게 하신 능력이 어디 있느냐 하는 비꼬는 말입니다. 왜 죽도록 내 버려 두었느냐 하며 비아냥거리는 사람들로 인해 우리 주님의 마음이 몹시 상하셨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에 대한 우리 주님께서 크게 분개하심니다. 믿음이 없는 곳에서는 우리 주님께서는 마음이 편치 않으심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바람니다. 믿음이 있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 영광이 나타납니다. 우리 주님은 믿음이 있는 곳에서 역사하심니다. 우리 주님은 믿는 자와 함께 하시며 능력을 보이심니다.
그런데 무덤에 가서도 여전히 믿지 않으려는 마르다의 모습을 보시는 주님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39절을 봅니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무슨 말입니까? 죽어서 썩은 냄새가 진동하고 있으니 더 이상 부질없는 시도는 그만 두시지요. 이미 다 끝난 일인데 이제 와서 무덤 문을 연다고 무슨 의미가 있단 말입니까? 썩고 있는 시체를 놓고 주님 어쩌자는 것인가요?
믿음이 없습니다. 무덤에 오기 전 예수님을 만나 자신의 불신앙에 대하여 강력하게 점검을 받은(요11:21-27) 마르다였는데도 믿음이 없습니다.
정신이 번쩍나는 말씀을 이미 받앗음에도 불구하고 무덤앞에서, 썩어 냄새나고 나흘이 지난 무덤앞에서도 믿음이 없습니다. 믿음이 없으니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 라는 소망도 없습니다. 믿지 않으려는 불신앙으로 가득한 자들 앞에서 우리 주님은 능력을 행하실 수 없습니다.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원하셨던 우리 주님의 길에 장애물이 계속 놓여져 있습니다.
2. 그래도 주님은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말씀하심니다.
이미 우리 주님은 오셔서 마르다에게 죽은 나사로는 살아난다 라고 11:23절에 선언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나사로의 죽음만을 받아들일 뿐이지 다시 살아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확신(믿음)을 가졌다면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애곡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불신앙의 애곡을 보시고 주님은 슬퍼하셧습니다. 마음이 상하셨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 영광이, 기적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에 떨어져 있는 연약한 자들을 볼 때에 우리 주님의 마음이 안타까워하시며 또한 마음이 상해 하심니다.
이에 우리 주님께서 다시 한번 강력하게 말씀하심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40절)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을 통해서 주님이 역사하심니다. 우리 주님이 권능으로 역사하신 곳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남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입버릇처럼 말합니다만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겠다고 수없이 다짐하기도 합니다.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위하여 기도도 합니다. 주님의 영광을 보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기 위한 필수는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행할 때 주님의 크신 영광이 아름답게 드러납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그토록 보고 싶고 경험하고 싶은 주님의 영광을 두 눈으로 목격할 수 있습니다. 기적을 봅니다.
사실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볼 때는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미 죽은지 나흘이나 지났고, 장사 지냈으며, 썩어서 냄새가 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개념으로 하면 3일 안에는 혹 죽은 영혼이 다시 돌아 올 수도 있다고 생각하여 나흘을 기다리지만 3일장을 치르지만 3일이 지나갔고 육신은 썩어서 냄새가 나니 아무리 생각을 해도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무슨 믿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러나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기적)을 보리라는 약속입니다. 상황보다 주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믿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믿는 다면 살리는 문제는 쉽게 해결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냐에서 믿음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제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분임을 믿으니까 구체적인 행동이 나옵니다. 11:41절을 보면 “돌을 옮겨 놓으라” 믿음의 행동이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믿음은 말이나 생각으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이 요구됩니다.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돌문을 열라는 말씀에 대해 마르다는 약간 반발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돌문을 열면 썩는 시체 냄새가 날 것이고 죽은 오라비 나사로의 썩은 흉한 모습이 보일 것이고 예수님께는 누가 될 것을 생각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보입니다만 주님은 돌을 옮겨 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 말씀에 순종할 때 영광을 나타내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에 따른 순종의 행동이 있은 다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나사로야 일어나라” 그 때 무덤에서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 나오는 역사를 봅니다. 믿음앞에 있어 가로막는 돌, 불신을 제거해야 합니다. 주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돌, 불신앙이 제거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주님의 능력을 믿고 돌을 제거하는 행동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오늘도 영광의 기적은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지막 42절에 이 기적의 목적이 나옵니다. “이는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무엇을 믿게 한다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부활이요 생명이신 것을 믿게 한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요12:11절에 보면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나사로가 죽어 있는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는 커녕 오히려 가리워졌습니다. 모든 사람이 슬퍼했습니다. 왜 저런 사람이 죽을 병에 걸려 죽는냐, 거참 안됐다는 것입니다. 병들어 죽은 상태는 자신이나 다른 사람 모두에게 불행이요, 슬픔입니다.
그러나 나사로가 다시 살아남으로 많은 사람이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나사로가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이 퍼지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도 보고 다시 살아난 나사로도 보기 위해 몰려 왔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가서 예수를 믿었다” 말씀하십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나사로 한 사람으로 인하여 부정적이었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은 대단히 귀한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나 한사람의 영향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사람 때문에 많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한 사람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살기도 합니다. 한 사람으로 인해 교회를, 예수님을 찾아오기도 하고 한 사람으로 인해 교회, 예수님 찾아오는 길을 막을 수도 있습니다. 찾아오게, 못 오게 하는 것만 아니라,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얻게도 하고, 못 얻게도 합니다.
먼저 한 사람이 예수님을 바로 믿고, 거듭나 새로운 삶을 살아갈 때 많은 사람을 예수님께로 인도하여 구원을 얻게 할 수 있습니다.
영국의 웨슬레 한 사람이 영적으로 다시 살아날 때 멸망에 직면하였던 영국을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미국의 무디 한 사람이 은혜받고 다시 살아남으로서 미국의 신앙이 잠에서 깨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먼저 믿은 신자들이 예수님을 바로 믿지 못하고 믿음으로 올바르게 살지 못할 때 사람들의 구원의 길에 장애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가 많은 변화와 기쁨을 안겨 주었던 것처럼 우리도 그와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살아있는 신앙으로 살아갈 때 믿음의 좋은 소문이 납니다. 소문이 퍼지면 그것이 사실인가 하여 호기심을 가지고, 보고 싶은 사람들이 몰려 올 것입니다. 다시 살아난 나사로도 보고, 다시 살리신 예수님도 보고 싶어 찾아오게 됩니다.
이것은 나 하나가 바르게 신앙으로 살 때, 전도가 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었던 사람이 살아날 때 많은 기쁨과 영광을 돌립니다. 영적으로 병든 영혼이 다시 강건해질 때, 이 세상이나 환경과 주변 조건을 따라 이리저리 방황하던 영혼이 요동하지 아니하고 신앙으로 바로 서서 나아가는 모습을 볼 때, 어렵고 슬픈 일을 만나도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사람이 될 때 가정의 기쁨이요, 교회의 기쁨이요, 하나님 나라의 확장입니다. 살아있는 신앙, 살아있는 찬양, 기도가 있을 때 많은 사람을 기쁘게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나사로 하나 살리기 위해서 영광을 보여주심만이 아님니다. 기적을 베푸신 것이 아닙니다. 나사로가 살아남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 자신이 어떤 분인가를 알게 하여 믿게 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이 시간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 세상 사는 동안 하나님의 영광(기적)을 크게 많이 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모든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시고 행하시기 바람니다. 주님의 영광은 우리의 믿음과 함께 합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오직 믿고 행할 때 주님의 영광은 찬란하게 우리네 삶 가운데 비쳐집니다.
히11:6절 말씀처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늘 기도하시기 바람니다. 늘 외치시길 바람니다.
주님! 나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주님!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오 주님! 믿음으로 주님의 영광을 보기를 원합니다.
믿음으로 주님의 영광의 그 풍성함을 날마다 경험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우리가 해야 합니다
요11:33-44 / 정성섭 목사
한 사람의 죽음을 당한 가정에 문상을 가면 마음이 아플 때도 있는 집이 있고, 그저 덤덤하게 느껴지는 집이 있습니다. 돌아가신 분이 누구인가에 따라서 슬픔의 정도가 차이가 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세상에서 천수를 다하시고 편안한 죽음을 맞이한 집에서는 어쩌면 슬픔보다는 운명을 거스릴 수 없는 인간의 한계에 대하여 생각하면서 숙연해 지기까지 합니다.
상을 당한 가족들도 역시 덤덤합니다. 그래서 위로하는 말은 그저 "호상 입니다"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할 수명이 아직 많은 사람이 안타까운 질병으로, 사고로 불의에 목숨을 잃어버린 집에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느끼게 됩니다. 이럴 때 유가족들의 울부짖음은 더욱 애절합니다. 위로하는 문상객들도 매우 큰 슬픔을 느끼면서 하는 말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하는 말을 할 뿐입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게 되는 집도 한 사람의 가장의 죽음을 맞이한 가정입니다. 온 집안이 슬픔에 차있는 가운데 나사로의 시신은 점점 더 썩어져 가기 시작하면서 냄새가 나기 시작할 정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이 집에 우리의 사랑하시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어찌 보면 예수님이 이 곳에 계시다는 것 그 자체가 새로운 이적이 일어나려고 하는 시작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서는 소경이 눈을 뜨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서는 중풍병자가 낳음을 입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주님이 계신 곳은 소경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 주님이 계신 곳은 중풍병자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 주님이 계신 이곳은 이 세상에서 삶을 마감한 한 사람의 시체가 있는 곳입니다.
지금 우리 주님이 계신 이곳은 주님이 사랑하는 마리아, 마르다의 슬픔의 울음소리만 들릴 뿐입니다. 그들이 사랑하는 친구 나사로의 죽음에 웅성웅성하면서 소경을 고치셨다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람이 왜 이 사람을 죽도록 방관했느냐 하면서 주님을 조롱하는 사람들의 비웃음이 있는 곳에 주님이 계십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울고 있는 곳에 바로 주님이 계십니다.
그 곳에 서 계신 주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리고 그곳에 계신 우리 주님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 의 마음은 안타까움 바로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에 격동이 일어납니다. 소용돌이의 파도가 몰아칩니다.
주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우리 주님의 두 눈을 보십시오. 우리 주님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주님이 흘리신 눈물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하는 눈물일 것입니다.
오라비를 먼저 보낸 두 자매의 마음을 이해하는 눈물일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 부활이요 생명이 되시는 주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동정의 눈물.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의 눈물일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는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정말로 나사로 죽었는가 에 대한 의심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의 말씀을 보면 나사로가 정말로 죽었다는 사실에 대해 강조합니다.
나사로는 진짜 무덤 속에 있었습니다. 때문에 주님이 친히 그 무덤가로 가셔야 했습니다.
무덤 앞으로 다가선 그들에게 생각나는 것은 나사로의 죽은 시체에서 풍기는 썩은 냄새였습니다. 그것이 걱정되었습니다. 때문에 마르다는 무덤입구의 돌을 치우라는 주님의 말씀에 당황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이 말은 무엇을 말합니까?
돌을 옮기라는 주님의 말씀 앞에 서 있는 마르다의 모습을 보십시오.
마르다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죽은 지 나흘이 지나 이미 시체가 썩기 시작하여 냄새가 날 터인데 돌을 옮기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돌을 옮겨서 무엇을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는 무덤에 있습니다. 그 무덤은 돌로 막아 놓았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돌을 옮기는 수고를 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마르다는 썩어 가는 냄새를 맡아야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나사로가 지금처럼 영원한 죽음의 노예가 되어 누워있는 상태로 만족하려고 합니다. 이제 그녀는 체념 그 자체였습니다.,,그러나 우리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
네가 나의 말을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했지 않았느냐.
네가 나의 말대로 순종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돌을 옮겨 놓으라.
천지를 창조하신 그 분이 돌을 옮겨 놓을 능력이 없어서 사람들의 힘을 빌어 돌을 옮기려는 것입니까?
말씀 한마디로 바다의 광풍을 잔잔케 하실 능력이 있으신 그 분이 능력이 없어서 사람들의 힘을 빌어 돌을 옮기려는 것입니까?
주님의 말씀을 믿으며 순종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죽은 자의 무덤으로 가기만 하면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죽은 자를 가로막고 있는 저 돌을 옮겨 놓기만 하면 죽은 자가 다시 사는 모습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라는 음성을 듣기를 원하십니까?
살아난 나사로의 몸을 감싸고 있던 수의들을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라는 말씀을 듣기를 원하십니까?
이러한 말씀들을 듣기 이전에 우리는 주님의 먼저 나온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바로 그 말씀은 이것입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옮기라는 이 말씀을 먼저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들었으면 그 말씀대로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여기에 보인 마르다의 모습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핑계에 불과합니다. 이런 핑계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아직도 주님 앞에 나아오기를 주저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향해 성경 에베소서 2장 1절에서는 이렇게 진단합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다"
영적으로 죽어있는 그들을 향해 우리는 그들이 거주하는 무덤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 길은 주님이 앞장서십니다.
주님을 거부하는 우리의 이웃들을 향해 가는 길은 우리만이 가는 길은 아닙니다.
우리와 늘 함께 동행하시는 성령님께서 우리들의 길을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인도하는 그 길을 통해서 가기만 하면 하나님 앞에 죽어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인도하는 그 길을 통해서 가기만 하면 영적인 죽음의 무덤인 저 세상에서 허덕이며 공허한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 우리의 주님의 부르심을 들을 수 도 없는, 반응할 수 도 없는 무덤에 갇힌 자들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가기만 하면 그들에게서 나는 썩어져 가는 냄새를 맡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냄새나는 곳에서 그들이 나오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는 돌들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머뭇거리게 됩니다. 더 이상 우리의 힘으로 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체념하기도 합니다.
저 사람은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다.
저 사람은 도저히 예수 믿을 사람이 아니다.
우리가 저 사람을 위해 기도하거나 정성을 들이는 노력 모두가 쓸모 없는 것이다.
저 사람은 너무나 악한 사람이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럴 때 주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돌을 옮겨라.
우리는 자꾸 뒷걸음치려고 하지만 주님의 음성이 우리들의 마음을 갈등하게 합니다.
돌을 옮겨라.
예수님에 대해서 이제는 어느 정도의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라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 잘 알기에 주님 앞에 나오지 못하는 그들 역시 우리의 구세주이신 주님에 대해서 알고 있을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무지의 돌에 가로 막혀있다는 사실입니다.
교회에 대해서 얘기만 하면 그들은 교회를 향해 비판하는데 열을 올립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에 대해서는 그들은 알지 못합니다.
예수 믿으라고 우리가 다가서지만 그들은 예수 믿는 우리들의 약점을 잡아 우리를 코너로 몰아갑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에 대해서는 그들은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없어 지옥에 가는 이들이 있게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복음을 말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가로막고 있는 무지의 돌을 옮겨야 합니다.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만나는데 방해가 되는 수많은 돌들을 우리는 발견해 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돌을 옮기는 해결책을 제시해야 합니다.
교회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의 돌.
돈이 있어야 교회에 나갈 수 있다는 허황된 논리의 돌.
세상을 바라보는 잘못된 사고판단의 돌.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받은 백성으로 살도록 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이런 일에 관하여 예수님께서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는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먼 여행을 하셨습니다.
그는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들과 함께 우셨습니다.
그는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들도 영혼을 찾아서 여행을 떠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의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우리의 편안한 쉼의 여유도 포기해야 하기도 합니다.
그들이 파멸된 상태로 살아가는 그 상태를 바라보고 우리는 울어야 합니다.
그들을 위해 애통해하며 신음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입술을 열어 그들을 위해 중보 기도해야 합니다.
갈 길을 다간 후에 우리 주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그리하면 우리가 도저히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을 사람이라고 제쳐놓았던 사람이 변화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을 죽인 사형수도 주님을 영접함으로 회개의 눈물을 흘리면서 변화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이 더욱 굳세어질 것입니다
돌을 옮겨졌습니다.
무덤의 문이 열렸습니다. 무덤으로 들어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무덤 안에는 자신의 힘으로 는 어찌할 수 없는 죽은 자가 누워있습니다.
그 죽은 자의 몸에서는 썩어져 가는 냄새가 납니다,.
그를 향해 주님이 일하십니다. 주님의 시선이 모아집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선포하십니다.
조금도 주저함이 없습니다. 조금도 머뭇거림이 없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이 놀라운 광경을 보십시오. 죽은 사람이 살아났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신적인 능력이 펼쳐집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던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냄새를 풍기던 죽은 나사로가 걸어나오기 시작합니다. 할렐루야.
이 광경을 우리가 직접 보았더라면 우리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이 광경을 우리가 직접 보았더라면 우리의 표정은 어떠했을까요.
무덤에서 걸어나오는 나사로의 모습을 보십시오.
수의를 입은 채로 걸어나오는 나사로의 모습을 보십시오.
자신의 발과 손을 휘감은 베와 얼굴을 둘러싼 수건으로 인해 그의 걷는 모습은 매우 불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살아났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놀라 당황하고 있을 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그가 다시 이 땅에서 살아가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우리의 관심을 요구하십니다.
그 관심은 우리의 구체적인 행동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발을 감싸고 있는 것들을 풀어 주어야 합니다.
손을 감싸고 있는 것들을 풀어 주어야 합니다.
얼굴을 감싸고 있는 수건을 풀어 주어야 합니다.
바로 이 것이 우리가 해야할 일입니다.
영적인 죽음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새로운 믿음의 식구들의 모습도 바로 이런 모습일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자녀가 되어 교회의 한 지체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오지만 모든 것이 낯설어 모든 것이 불편할 것입니다.
설교를 들어도 무엇을 말하는지 귀에 들어오지를 않습니다.
찬양을 부르는 옆 사람의 모습을 보니 너무 자연스런 모습에 당황합니다.
원고를 보지 않고도 유창하게, 막힘 없이 기도하는 사람을 보니 자신과는 너무나 다른 사람처럼 보입니다. 결국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모든 것이 불편합니다.
교회생활에서 외로움도 느낍니다. 교회생활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벽도 느낍니다.
혼자 고민하며 갈등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모습을 주님은 아시고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그들이 교회의 일원으로 적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새롭게 변화를 받은 사람들에게도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갖고 다가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영적인 어린아이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시 살아난 나사로가 수건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어서 말을 할 수 없듯이
영적인 어린아이로 새롭게 거듭난 사람들은 말을 할 수 없습니다.
다시 살아난 나사로가 온몸을 베옷으로 묶여졌기에 마음대로 걸을 수 없듯이
영적인 어린아이로 새롭게 거듭난 사람들은 마음대로 교제를 나눌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생활에 참여하는 것을 꺼려합니다.
교회의 성도들과 교제를 나누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고 자신을 생각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 이외에 또 다른 자격이 더 있는 것처럼 그들은 생각합니다.
혹시 이런 모습이 우리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나는 아직 믿음이 어려서, 교회에 나온 지 얼마 안되어 조용히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시는 분은 안 계십니까?
주님은 원하십니다. 당신이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닌 또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 풀어놓아 다니게 하는 역할을 하는 당신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주님의 음성은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을 인도하셔서 우리의 발걸음을 불신자들로 향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인도하셔서 우리의 시선이 불신자들을 바라볼 수 있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냄새나는 죽은 자의 모습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들의 힘으로는 아무런 소망도 없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들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절망의 모습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요구하십니다.
그들이 새로 거듭나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돌들을 옮기는 일을 요구하십니다.
그들이 잘못 알고있는 예수님에 대해서
그들이 잘못 알고있는 교회에 대한 편견에 대해서
그들이 잘못 알고있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편견에 대해서
바로 이런 것들이 그들을 영적인 무덤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는 돌이 된다면
우리가 그 돌을 옮기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후에 주님의 능력이 그들에게 임할 것입니다.
새롭게 변화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도 우리의 할 일이 있습니다.
교회에 올바로 적응할 수 있도록 우리가 그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얼굴을 수건에 감싸인 채로 살아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발이 베옷에 감싸인채로 살아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손이 베옷에 감싸인채로 살아서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먼저 이 모든 것들에서 풀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자유스러움으로 새롭게 주님의 품으로 돌아온 하나님의 백성들을
풀어놓아 다니게 하는 그 일을 우리가 감당해 합니다.
그것이 오늘 이 아침에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귀한 말씀으로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풀어놓으면 다닐 수 있습니다
요 11:34-44 / 조상호 목사
오래전 금요집회에서 소개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한 아가씨가 다이어트를 하기로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방법, 저런 방법을 다 써보았지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포도가 몸에 에너지를 주는 동시에 다이어트도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포도 다이어트>를 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음식은 전혀 먹지 않고 하루 세끼 포도만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가씨는 포도만 먹기 시작한 지 3일만에 의식을 잃고 갑자기 쓰러져 버렸습니다. 가족들은 놀라서 병원으로 데려갔습니다. 의사의 진찰이 끝나자, 가족들은 그 아가씨가 쓰러진 이유를 물었습니다. “혹시 영양실조 아닙니까? 저 애가 3일 동안 포도만 먹었거든요.” 그러자 의사가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아닙니다. 농약중독입니다.” 그러니까 포도 다이어트를 하면서 날씬한 몸매를 기대했는데, 기대와 달리 그 아가씨는 포도 껍질에 붙어있는 농약에 중독되어 쓰러져 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그 아가씨처럼 기대와 달리 전혀 예상치 못한 일들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한국에서 가져온 돈을 투자회사에 예치해놓으면 이자가 많이 붙을 줄 알았지만, 기대와 달리 투자회사가 망해서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번 돈으로 주식을 샀는데, 기대와 달리 그 주식이 오르기는커녕 오히려 원금을 다 날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땅을 사면 부동산 가격이 뛰어 한몫 챙길 줄 알았는데, 기대와 달리 부동산 시장이 침체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기대대로 일이 진행될 때도 있지만, 반대로 기대와 다르게 일이 진행될 때도 많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바로 그러한 경우에 해당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기대가 무너져 절망하고 있는 마르다와 마리아를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요한복음 11장 1절부터 전개되는 내용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본문 앞부분에는 갑자기 어려움을 만난 나사로 가정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 동안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부모님처럼 여기고 있던 오빠 나사로가 어느 날 갑자기 병이 들어 자리에 누워버렸습니다. 점점 병세가 깊어져 위독하게 되었습니다. 동생 마르다와 마리아는 주님께 급하게 사람을 보내, 빨리 오셔서 오빠의 병을 고쳐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두 자매는 자신들의 요청대로 주님께서 곧바로 오셔서 위독한 상태에 있는 오빠를 즉시 고쳐주실 줄 알았습니다. 요한복음 10장 40절에 의하면 지금 주님께서는 요단강 근처에 계십니다. 그리고 나사로의 집은 예루살렘보다 약간 요단강에 가까운 베다니마을에 있습니다. 지난 미션 2008 때 가보았지만, 요단강에서 예루살렘까지의 거리는 그렇게 멀지 않습니다. 요단강에서부터 걸어서 베다니까지 온다 할지라도 하룻길이면 충분합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주님께서 이틀을 더 지체하시는 바람에 오빠는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주님은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 후에야 비로소 나사로의 집에 도착하셨습니다. 그 때 마르다가 뒤늦게 도착하신 주님을 만나자마자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21절)라고 말합니다. 동생인 마리아도 주님을 만나자마자 언니 마르다처럼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32절)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쉽게 말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 빨리 오시지 않고 왜 이렇게 늦게 오셨습니까? 저희들이 사람을 보냈을 때, 곧바로 오셨으면 우리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 아닙니까?” 때때로 우리도 마르다와 마리아처럼 응답이 늦어진다고 주님께 원망하고 불평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늦는 것과 거절하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미국에 존이라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존이 열 살 되던 해 할머니로부터 크리스마스 선물로 우표 앨범을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크리스마스가 다가 왔지만, 우표앨범은커녕 할머니로부터 아무런 소식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다 놀러온 친구들은 존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구경하길 원했습니다. 존은 선물들을 하나씩 하나씩 올려놓으면서 설명해주었습니다. "이것은 엄마로부터 받은 선물이고, 이것은 아빠로부터 받은 선물이야....그리고 이것은 할머니에게 받은 우표 앨범이야." 존은 아직 할머니로부터 우표 앨범을 받지 않았음에도 친구들에게 할머니로부터 받은 우표 앨범이라고 말했습니다. 나중에 친구들이 돌아가고 나서 엄마가 존에게 말했습니다. "존, 아직까지 할머니에게서 우표 앨범이 오지 않았는데, 왜 그런 말을 했니?" 존은 어머니의 얼굴을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할머니가 나에게 우표 앨범을 주신다고 하셨기 때문에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에요." 존의 어머니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할머니에 대한 존의 믿음을 방해하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로부터 1개월이 지났으나, 할머니에게는 여전히 아무 연락이 없었습니다. 존의 어머니는 왜 할머니가 우표 앨범을 보내지 않는지 마음에 강한 의심을 가지고 아들에게도 이렇게 떠봤습니다. "존! 할머니께서는 너에게 약속한 것을 잊으셨나보다." 그러자 존은 단호하게 "엄마, 결코 그렇지 않아요. 할머니께서 잊어버리시다니요."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할머니께 앨범 고맙다고 하는 편지를 보내면 어떨까요?" "그래, 그거 참 좋은 생각이구나. 자, 한번 써 볼까?" 존은 편지를 쓴 후 우체통에 넣었는데, 며칠 안 되어 답장이 날아왔습니다. "존에게... 존! 할머니는 너에게 우표 앨범을 사 준다고 한 약속을 잊은 게 아니란다. 너의 마음에 드는 앨범을 구하려고 찾아보았으나 좀처럼 없더구나. 그래서 나는 뉴욕에 주문편지를 보냈단다. 그런데 뉴욕에서 보내온 앨범은 크리스마스가 지나서 도착한 데다 너무 좋지가 않아서 다른 것을 보내달라고 했는데 아직 도착하지 않았구나. 그래서 여기 3달러를 보내니까 네가 마음에 드는 것을 그곳에서 사가지렴. 할머니로부터." 편지를 읽은 존의 얼굴은 승리의 기쁨으로 가득 찼습니다. "엄마, 제가 말한 대로지요?" 존은 할머니가 자기와의 약속을 지켜주실 것이라는 것을 결코 의심하지 않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믿고 기다리는 동안 할머니는 노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혹시 이 자리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고 침묵하신다고 낙심하고 있는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기도를 하는데도 다른 사람들처럼 응답을 받지 못해서 실망하고 있는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에게 인내와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오펠리아 아담스는 다음과 같은 시를 썼습니다. "응답이 없으신가요? 응답해 주시지 않는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마땅히 할 일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 기도하기 시작했을 때, 하나님도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시작한 일을 결코 중단하시지 않습니다. 설사 기도를 시작한 지 몇 년이 지났다고 하더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날 이 반드시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30장 18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야훼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하나님은 기다리십니다. 왜, 무엇 때문에 기다리십니까?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실 가장 적절한 때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는 분이신 줄로 믿습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신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위하여 일하고 계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가장 선한 때에 가장 선한 방법으로 역사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응답이 늦는 것과 응답을 거절하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지나서 도착하셨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와 동네 사람들이 우는 것을 보셨습니다. 다같이 33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시지만, 우리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슬퍼하는 자들과 함께 슬퍼하시고 고통당하는 자들과 함께 고통당하시고, 마음 아파하는 자들과 함께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주님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슬퍼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35절에 보면, 예수님도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여기 ‘눈물을 흘리셨다’는 원어로 ‘에다크뤼센’인데, 이 말은 막연히 눈물을 흘리셨다는 것이 아니라, ‘눈물이 와락 쏟아졌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은 무덤 앞에서 슬퍼하는 유족들과 함께 슬퍼해주는 동네사람들을 보시고 가만히 계실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슬픔을 함께 느끼셨습니다. 그리고 나사로의 무덤을 가로막고 있는 ’돌을 옮겨 놓으라‘고 명하십니다. 그 때 마르다가 주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39절) 무슨 말입니까? 혹시 주님께서 오빠가 죽기 전에 오셨으면 죽을 병이 고침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이미 오빠는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기 때문에 죽은 오빠가 다시 살아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상식적으로 볼 때 틀린 말이 아닙니다. 마르다의 이 말은 이성적으로 볼 때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인간의 상식과 이성이 하나님의 역사를 막을 때가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홍해바다는 절대로 갈라질 수 없고, 요단강은 멈출 수 없습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보면, 5병2어로 5,000명을 먹인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의 이성과 상식을 뛰어넘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르다를 꾸짖으셨습니다. 다같이 40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많은 사람들이 보여주면 믿겠다고 말합니다. 대학에 합격하면 열심히 믿겠다고 하고, OO 문제만 해결해주면 열심히 믿겠다고 하고, 영주권만 나오면 신앙생활 잘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생각과 정반대로 말씀하십니다. "네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 믿을 것이다“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우리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상식에 맞지 않아도 믿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라고 마르다를 책망하시자, 주위에 있는 동네사람들은 더 이상 머뭇거릴 수가 없어서,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무덤을 막고 있는 돌문을 옮겨놓았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41절)라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하신 후, 죽은 지 나흘이나 되는 나사로를 살리시는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42절을 읽겠습니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나사로의 무덤 주위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을 믿도록 하기 위해서 나사로를 살리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인 것을 믿도록 하기 위해서 나사로를 살리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려는 이유를 밝히신 후, 무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43절) 어떻게 보면 주님의 행동은 정신 나간 행동인 것인 것처럼 보입니다. 누가 공동묘지에 가서 이미 죽어서 땅속에 묻힌 친구의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른다면, 여러분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그 사람을 향해 정신 나갔다고, 미쳤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시체 썩는 냄새가 나는 무덤 앞에서 “나사로야 나오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생명의 주인 되신 주님께서 “나사로야 나오라”고 선포하시는 그 순간, 나사로는 새로운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는 죽음에서 자유하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생명이요 부활이신 주님께서 나사로를 살려주신 줄로 믿습니다. 나흘 전에 이미 죽어 시체 썩는 냄새가 나던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다같이 44절을 보겠습니다.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이 말씀에 의하면 무덤에서 나오고 있는 나사로의 모습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던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서 동굴 무덤 밖으로 나올 때, 어떠한 모습으로 나왔습니까? 아직도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또 얼굴에는 수건이 싸 매여진 상태로 나왔습니다. 장례식을 할 때 각종 천으로 온 몸을 꽁꽁 묶었던 그대로 였습니다. 그러니까 나사로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기는 했지만, 아직도 결박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유를 얻었지만 아직도 자유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말씀하셨고, 그를 얽매고 있던 것들을 풀어주고 그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 보면, 이미 자유를 얻었지만 나사로처럼 아직도 자유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말미암아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살아났지만, 여전히 사단에게 묶인 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은 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복과 이 땅에서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는 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러 가지 것들에 묶여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러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신 주님께서는 우리가 묶이지 않고 자유를 누리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묶이지 않고 자유를 누릴 수 있을까요?
첫째로 ‘생각을 풀어 놓아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이 저주와 절망으로 가득 차 있으면, 우리가 구원을 받았어도 절대로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아무리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할지라도, 교회에서 안수집사, 권사, 장로, 전도사, 목사 직분을 받았다 할지라도, 불안과 걱정이 생기면 절대로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요한복음 8장 32절에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영적 원리를 따라 살아야 행복할 수 있고 성공할 수 있고 승리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이미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했을 때 우리의 모든 죄는 용서받았고 저주에서 해방되었고 마귀의 사슬에서 놓여났다는 말씀을 기억할 때 우리는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주님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으로 사단에게 묶여있는 생각을 풀어놓아야 합니다.
둘째로 ‘말을 풀어놓아야’ 합니다.
우리는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말에서 놓여나야 합니다. ‘못 한다, 안 된다, 죽겠다, 힘들다, 할 수 없다’라는 부정적인 말을 하다보면, 우리는 절대로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부정적인 말을 하면 폐쇄적인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잠언 18장 21절에서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말에 따라 우리의 인생이 달라질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부정적인 말 대신에 긍정적인 말을 하시기 바랍니다. 비판적인 말 대신에 생산적인 말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불안과 공포가 생길 때마다, 불안과 공포를 가져오는 원수마귀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단호하게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행동을 풀어놓아야’ 합니다.
아직도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얼굴에는 수건이 싸 매여진 상태로 무덤 밖으로 나오고 있는 나사로를 보신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냥 묶인 채로 돌아다니게 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묶여 있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지 말고, 손으로 풀어주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믿는다고 말한 것을 실제적인 행동으로 나타내야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행할 때 우리는 사단의 억압으로부터 놓임을 받을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믿음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서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주의 영이신 성령께서 거하시는 곳에는 결코 사단이 역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살리는 영이요 생명의 영이요 부요케 하시는 영이신 성령님을 날마다 삶 속에서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 들이고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끝으로 어느 인디안 부락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한 인디언 부락에 장이 열려 사람들이 사고 팔 물건들을 가지고 왔습니다. 한 농부가 많은 메추라기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긴 줄의 한쪽 끝은 메추라기의 발목에 매고, 다른 한쪽 끝은 둥그런 막대기에 묶었습니다. 그러자 메추라기들은 그 막대기를 계속 돌면서 걸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이 너무 재미가 있어서 그 주위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습을 구경만 할 뿐 메추라기를 사려고 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모든 생명을 귀중하게 여긴다고 하는 힌두교를 믿는 한 힌두교 신자가 이 조그마한 메추라기들이 불쌍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는 상인에게 메추라기의 가격을 묻고 난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이것들을 다 사겠소." 그 상인은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돈을 지불한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자, 이제 그 새들을 다 놓아 주시요." "뭐라고요, 선생님?" "내가 말하지 않았소. 저 새들의 발목을 묶고 있는 줄을 끊어 새들을 놓아주란 말이요. 그 새들을 모두 자유케 해 주시오." "아, 네. 선생님, 그렇게 하지요. 선생님이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 농부는 칼로 메추라기 다리를 묶고 있는 줄을 끊어서 자유를 주었습니다. 여러분, 그 때 무슨 일이 벌어진 줄 아십니까? 그 메추라기들이 계속적으로 원형에서 돌더랍니다. 이미 자기들의 발목을 묶고 있는 줄이 끊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전에 묶여 있었을 때처럼 둥그런 막대기 주위를 빙글빙글 돌더랍니다. 결국 그 힌두교 신자는 메추라기들을 억지로 날려 보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혹시 이 자리에 이 메추라기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분들이 계시지 않습니까? 우리 주위에 보면 인디언 부락의 메추라기들처럼, 묶여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내의 말에 묶인 남편이 있고, 남편의 말에 묶인 아내가 있고, 부모의 말에 묶인 자녀들이 있습니다. 학교에서 선생님의 내신평가에 묶인 학생들이 있고, 직장에서 직장 상사의 눈치에 묶인 직원들이 있습니다. 돈에 묶여서 돈의 노예가 된 사람이 있고, 명예에 묶여 명예의 노예가 된 사람도 있습니다. 요즘은 공부에 묶인 6살짜리 아이들도 있습니다. 유치원 갔다 와서 밤늦게까지 피아노와 영어와 여러 개의 학습지에 시달리는 등, 공부에 묶인 아이들도 있습니다. 교회 안에도 인디언 부락의 메추라기들처럼, 묶여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미 예수 믿고 구원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죄로부터 자유케 되었지만, 여전히 자유를 누리지 못한 채 묶여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을 얽매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이 여러분을 얽매이게 합니까? 가난입니까? 염려입니까? 질병입니까?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불안과 공포가 생길 때마다, 불안과 공포를 가져오는 원수마귀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단호하게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18장 18절에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땅에서 믿음으로 구해야 하늘에서 풀립니다. 그러므로 뭔가에 매여서 답답할 때마다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이미 예수 믿고 자유자가 되었다, 예수께서 이미 나의 모든 결박을 푸셨다,. 이제 어느 누구도 나를 묶을 수 없다. 나는 이미 자유자다”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선포함으로, 사단에 묶이지 않고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자유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인생을 묶고 있는 수많은 매듭들을 기도로 풀어, 영적인 생명 뿐 아니라 이 땅에서 풍성한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