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206
4월27일[부활 제2주일 곧, 하느님의 자비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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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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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신앙도 성장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후, 그동안 떠도는 소문에 대해 긴가민가했었는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빵도 드시고 물고기도 드시는 모습을 뵌 사도들의 마음은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간 지니고 있었던 의혹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을 것입니다.
반대로 잠깐 다른 볼일 보러 나갔다가 그 자리에 함께하지 못했던 토마스 사도는 얼마나 아쉽고 답답하고 억울했겠습니까? 토마스 사도는 그 답답함과 억울함을 이렇게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25)
신앙의 성장에 있어서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아있던 토마스 사도였습니다. 제가 예수님 같았으면 불같이 화를 내며 ‘왜 그리 믿음이 약하냐? 언제까지 그 따위로 살거냐?’며 호통을 칠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발현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나 자상하고 따뜻합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
복음서 내에 토마스 사도가 자신의 손가락을 구멍 뚫린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에 넣어봤다는 표현은 없지만, 그의 성격상 끝까지 세심하게 확인해봤을 것입니다. 자신의 손가락을 구멍 뚫린 예수님의 옆구리에 직접 넣어봤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이런 신앙 고백을 하게 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토마스 사도의 늦었지만 장엄한 신앙 고백 앞에 예수님께서는 각별한 말씀 한마디를 덧붙이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사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옛날 토마스 사도를 위한 말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오늘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 가운데 단 한 명도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직접 자신의 눈으로 목격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그분께서 주신 믿음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믿음 하나 단단히 붙들고 우리 앞에 펼쳐지는 희미한 안갯속 같은 신앙 여정을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목격한 사도들의 기쁨은 지극히 제한적이고 일시적인 것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의 눈으로 확인한 주님 부활의 그 기쁨을 가슴에 안고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의 삶으로 나아갔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신앙 여정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나가면서 종종 체험하는 강렬한 신비 체험이나 은총 체험들은 평생 지속되지 않습니다. 일생에 단 한 번 혹은 두세 번뿐입니다. 그 은혜로운 체험을 가슴에 안고 믿음의 삶,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의 삶으로 나아가야겠습니다.
연못이 하나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폭우가 와서 진흙들이 많이 밀려 들어왔습니다. 당연히 연못이 흐려졌습니다. 원래 연못 안에는 크고 예쁜 비단잉어들이 살고 있었는데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잉어의 멋진 자태를 우리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면 방법은 무엇입니까? 진흙탕 물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일입니다.
예수님 부활에 대한 확신과 믿음이 부족한 우리 영혼의 상태도 마찬가지입니다. 진흙으로 흐려진 연못 같은 우리들의 눈이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뚜렷이 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세상의 잡다한 걱정거리들, 유혹 거리들로 우리의 영혼이 흐린 상태라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뵙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진흙탕물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작업입니다. 그 작업이 바로 침묵이요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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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lk7plSP_D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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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 탄력성에 이르는 방법과 부활에 이르는 방법은 같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토마스 사도에게 부활에 대한 믿음을 확신시켜 주시는 내용이 복음으로
나옵니다. 왜 예수님은 토마스에게 따로 나타나시지 않고 여드레나 기다리셔서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을까요? 예수님의 부활을 보지 못한 토마스가 모두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진 공동체 안에 머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머물 줄 알았고 보상을 받았습니다.
토마스 사도가 믿음이 부족한 사도라는 오해를 받지만, 실제로 우리가 그만큼 부활에 대한 갈망을 가질 수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에서부터도 부활에 대한 희망을 키우는 방법이 있고, 이 방법은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는 방법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부활을 체험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김주한 교수가 말하는 ‘회복탄력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김주환 교수의 『회복탄력성』 서두에는 전신마비라는 극심한 시련을 겪었지만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삶을 이어간 한인 지질학자 이상묵 교수의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상묵 교수는 45세의 나이에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과 공동으로 야외 지질조사를 수행하던 중 차량 전복 사고를 당해 전신마비라는 중대한 장애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6개월 만에 일상생활에 복귀하는 놀라운 회복탄력성을 보였습니다. 회복탄력성이란 마치 고무공처럼 튀어 올라 회복되는 사람의 특성입니다. 이 회복탄력성을 모두가 가진 것은 아닙니다. 마치 유리공처럼 바닥에서 부서져 버리는 일도 있습니다. 이상묵 교수는 어떻게 스스로 이 비극적인 상황에서 일어설 수 있었을까요?
과연 혼자 힘으로 가능했을까요?
김주환 교수의 책에는 회복탄력성 이론이 나오게 된 가장 중요한 실험이 소개됩니다. 바로 1955년 하와이 카우아이섬에서 태어난 모든 아기들(약 700명)을 대상으로 40년 가까이 추적한 종단 연구입니다. 이들 중 약 1/3(약 200명)은 출생 시 합병증, 극심한 가난, 부모의 불화나 정신 질환 등 심각한 어려움 속에서 자라는 '고위험군'으로 분류되었습니다.
연구자들은 이 고위험군 아이들이 대부분 문제아로 성장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놀랍게도 이들 중 약 1/3(고위험군 전체 중, 즉 약 70명)은 역경을 딛고 유능하고 안정적인 성인으로 성장했습니다.
에미 워너는 이 아이들을 '회복탄력성이 높은 아이들'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이 연구 결과 중에서도 특히 회복탄력성이 높은 아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에 주목하며 다음과 같은 점을 강조합니다. 회복탄력성이 높았던 아이들에게는 공통적으로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믿고 받아주며 사랑해주는 어른이 적어도 한 명 이상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람이 아이에게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관심과 지지를 보내주었다는 점입니다.
이상묵 교수에겐 그를 믿어주는 공동체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것을 행운이라고 말합니다. 사고 직후부터 병간호, 재활 과정, 그리고 일상생활 적응까지 아내의 헌신적인 돌봄과 정서적 지지가 없었다면 회복이 매우 어려웠을 것이라고 자주 언급됩니다.
서울대학교 측에서는 교수님의 복귀를 위해 연구실 및 강의실 환경 개선(휠체어 접근성 확보 등), 보조 공학 기기 지원 등 실질적인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교수직을 유지하고 연구 및 강의 활동을 이어갈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뒷받침했습니다. 이상묵 교수님이 연구와 강의를 재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입으로 조작하는 특수 마우스와 같은 보조 공학 기기입니다.
이러한 기술의 개발과 적용, 그리고 교수님에게 맞게 기기를 설정하고 사용하는 방법을 지원한
전문가들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이 밖에도 의료진과 재활 전문가들, 그리고 제자 및 학생들의 격려와 도움이 컸습니다. 이 안에서 그는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믿음을 회복할 수 있었고, 그 믿음대로 부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들의 믿음 안에 머무는 일은 얼마나 힘이 듭니까? 전에 ‘이승복’ 박사에 대해서도 언급한 적이 있었습니다. 미국 체조 국가대표로 올림픽 출전까지 할 수 있었지만, 연습 중에 손가락 하나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이상묵 교수와 같은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선교사가 “당신에게 하느님께서 계획하시는 것이 있습니다.”라는 말을 듣고는, 그 믿음에 머물려고 합니다. 손가락을 움직여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고 결국 존스 홉킨스 병원의 재활의학과 교수가 되었습니다.
믿음은 공동체를 통해 전수됩니다. 아주 천천히. 그래서 어떤 믿음을 가지려면 그 공동체에 머물 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절망에 늪에 빠지고 싶지 않다면 자신을 믿어주는 이들 가운데 머물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 토마스 사도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믿지 않았지만, 희망하고 있었습니다. 믿고 싶어서 머물 줄 알았고 일주일 동안 다른 사도들의 믿음이 그에게 스며들어 결국엔 부활한 예수님을 뵙고 믿음을 고백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믿는 대로 됩니다. 예수님께서 왜 여인들이나 제자들에게 당신의 부활을 당신 사도들에게 가서 알리라고 하셨을까요? 믿음이 교회의 성직자들 안에 모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그 성직자들 안에 머물면 그 믿음이 전수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조금은 빛에 눈이 익숙해져, 완전한 빛이신 분을 만날 수 있는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많은 순교자들이 있지만, ‘마리아 고레티’ 성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녀는 죽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수십 번 찌른 알렉산드로를 용서하고 그와 함께 하느님 나라에서 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3년 뒤 감옥에서 분노와 증오에 싸여 있는 알렉산드로에게 나타나 그를 회개시켰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천국에서 온 마리아 고레티를 보았고 그 부활의 믿음 안에서 평생을 살았습니다. 수도원에서 궂은 일을 하며 평생을 보속하며 홀로 살았습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갖지 않았으면 불가능했을 일입니다.
우리 부활에 대한 확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교회 안에 머무는 게 힘이 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부활하는 존재들이니까, 굳이 생존을 위해 돈과 명예나 육체적 욕망을 채울 필요가 없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회복탄력성이 그렇듯이, 믿으면 믿는 대로 됩니다. 부활도 부활을 믿는 공동체에서 견디며 머물면 믿는 대로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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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덴버 한인 성당에 사순 특강 갈 때입니다. 공항에서 커피를 한잔 샀습니다. 계산하려고 하니 주인이 돈을 받지 않았습니다. 커피 한 잔의 가격이 높지는 않았지만, 기분 좋았습니다. 제가 사제복을 입었기에 그랬던 것 같았습니다. 옷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언제부터인가 사제복을 입게 되었습니다. 사제복이 편하기도 하고, 익숙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니 사제복 때문에 도움받은 적이 많습니다. 공항에서 입국심사 받을 때였습니다. 직원이 저를 보면서 환하게 웃었습니다. 자기의 어머니도 가톨릭 신자라고 하면서 입국하는데 편의를 봐주었습니다. 식당에서 음식을 먹을 때였습니다. 나중에 계산하려고 하니, 주인이 옆에 있던 테이블의 손님이 미리 계산했다고 말했습니다. 옆의 테이블에 계신 분이 누군지는 몰랐지만 고마웠습니다. 베네치아에는 성 마르코 성당이 있습니다. 그곳에 입장하려면 길게 줄을 서야 합니다. 그런데 여행 안내자가 성직자는 줄을 서지 않고 입장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안내자를 따라가니 성직자들이 들어가는 문이 따로 있었습니다. 같이 갔던 형제님은 저의 비서라고 이야기하면서 성당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사제복’이 이렇게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세례를 받아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인호’가 새겨진 신앙인은 하느님 나라에서 더 큰 도움을 받을 것 같습니다. 지난 부활 성야 미사 때, 8명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를 받으면서 두 가지의 은총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하나는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사제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면서, 이마에 축성 성유를 바르면서 지난날의 모든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겁니다.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은 미국의 시민권이 주어지듯이, 교회에서 세례받은 사람은 이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겁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교회에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고백성사, 성체성사, 병자성사, 혼인성사, 신품성사, 견진성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는 세례받은 신자에게 주어지는 ‘은총’입니다. 사제복을 입어서 도움을 받고, 세례를 받아서 은총을 받았다면 주님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은 삶의 가치가 바뀌었습니다. 두려움은 담대함으로, 어둠은 빛으로, 절망은 희망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제 제자들의 삶은 명예, 권력, 재물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가난도, 고통도, 죽음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을 체험한 후에 복음을 선포하고, 어떤 고통과 두려움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이제 그들이 모든 것을 던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생명도, 재산도, 명예도, 욕심도 다 버렸을 때,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느끼고, 만날 수 있었습니다. 10개월 동안 엄마의 몸속에 있는 아이에게 탄생은 어쩌면 죽음과 같은 두려움과 고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탯줄에 연결되어 매일 아무 수고 없이 양식을 받아먹고, 엄마의 몸 안에서 아무런 걱정 없이 지내는 아이에게 세상은 그렇게 자유롭고 편안한 곳이 아닐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이는 엄마의 몸에서 나와야 하고, 나오지 못하면 결국 아이도 엄마도 위험해질 수 있는 밖에 없습니다. 자신을 먹여주고 지켜주던 탯줄을 끊어야만, 엄마의 몸에서 나와야만 또 다른 세상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아이에게는 죽음과 같은 체험일 수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탄생’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의 이야기입니다. 사도들은 이제 두려움과 근심이 사라졌습니다. 박해와 시련에 대한 공포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닫았던 문을 열었고 거리로 나가서 주님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체험하기 전에 사도들의 모습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렇게 내세울 것도 없었고, 주님의 수난 현장에서는 모두 무서워 도망갔었고, 베드로 사도는 주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은 변했습니다. 그래서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하셨던 그런 일들은 하기 시작합니다. 많은 병자를 고쳐 주기도 하고,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힘이 있고, 확실한 호소력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도 하지 않았던 일들도 하게 됩니다. 한 번의 연설로 수천 명을 세례 시키게 됩니다. 정말 변해도 너무 변해버린 사도들입니다. 사도들은 놀라운 약속을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사도들이 나약한 모습에서, 배반자의 모습에서, 무서워 숨던 모습에서 그렇게 담대하게 주님을 증거할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주님의 전폭적인 신뢰와 지지였습니다. 비록 사도들이 주님을 배반했고, 무서워 숨어 지냈지만, 부활하신 주님은 그들을 사랑으로 감싸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시며 사랑의 성령을 주십니다. 그런 주님의 사랑은 그들 안에 있는 하느님께 대한 열망을 깨웠습니다. 그들 안에 있던 가능성을 깨웠습니다. 사도들은 이제 예전의 나약하고, 무서움에 떨던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변화시킨 것은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고, 못 자국을 만져보아야만 믿겠다고 했던 토마의 불신앙까지도 감싸안아 주시는 주님의 사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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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안동훈 안드레아 신부님]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간 첫날 저녁, 최후의 만찬을 나누었던 큰 이 층 방에 모여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사실을 전합니다(루카 22,12 참조). 해가 이미 저물어 버린 그때는 진정한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께서 돌아가시어 두려움에 싸인 제자들의 마음이 어두운 시간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 하고 인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상적인 인사말을 건네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1,2) 계신 말씀으로, 말씀하시는 그대로 이루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제자들에게 평화를, 십자가의 희생 제사와 부활로 이루신 구원과 화해를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셨을 때 제자들은 모두 도망갔고, 베드로는 그분을 모른다고 맹세까지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꾸짖으시지도, 그들에게 서운해하시지도 않고 그저 평화를 주십니다. 그들이 믿을 수 있도록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여 주시어 그들을 향한 당신의 사랑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제야 제자들은 “기뻐[합니]다.”(20,20)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어 살게 하신 것처럼(창세 2,7 참조)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복음 선포의 사명을 수행하는 빛의 자녀로 살아가는 생명을 다시 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기쁨을 그리고 새로운 생명을 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 뵌 제자들은 이 모든 은총의 선물을 누리게 됩니다. 주님 부활은 우리에게도 가장 고귀하고 최고로 좋은 선물입니다. 예수님을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으로 고백하는 믿음은 부활의 기쁨과 평화 그리고 생명을 누리는 열쇠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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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20,19-31: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오늘 복음은 두 장면으로 되어있다. 첫째는 선교사명에 관한 것으로 성령의 선물을 통해 사죄권이 부여되는 장면과(19-23절) 둘째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신앙고백을 하는 토마스의 불신앙이다.(24-29절) 여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 사건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으나 현재에도 영원히 사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이 부활은 항상 계속되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 안에서 생명을 얻게 됨을 알려주고 있다.
오늘 복음은 모두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통치에 대한 표징과 증거로 가득 차 있다. 예수께서는 잠겨있는데도 드나드심으로써 시공을 초월하시는 분임을 확인시키신다. 이것은 예수께서 이미 새로운 창조적 세계에서 활동하고 계심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이 통치에 대한 것은 우선 제자들에게 주시는 평화, 그들에게 맡기시는 선교사명, 그리고 사죄권이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19.21.26절)이라는 표현은 고별사에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행하시는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이 평화는 자기 자신과 타인의 두려움에서, 그리고 생명과 죽음의 모든 두려움에서의 해방이다. 부활에 대한 신앙은 온갖 불안에 대한 절대적 보증이 된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21절) 라는 선교사명이다. 이 파견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과 같이 제자들이 파견되어 예수께서 하신 것과 같이 하느님의 구원 말씀을 세상에 전할 것이며 구원의 행위를 채워갈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선교사명은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없이 교회 안에 하느님의 말씀 선포와 구원에 대한 권한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다음의 증거는 성령의 선물이다. 이 선물은 죄를 사하거나 사하지 않는 권한을 통해 드러난다.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22-23절). 숨을 내쉬는 행위는 창조적이고 새롭게 일으켜 세우는 힘(참조: 창세 2,7; 에제 37,9)을 의미한다. 생명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완전히 충만케 된다. 이제 사도들은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성령을 통해 새로이 창조되었고, 죄를 사하는 권한을 부여받는다. 그것은 죄를 정복하기 위해서이다. 만일 죄가 정복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통치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토마스 사도가 고백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28절)은 토마스 개인의 신앙고백을 의미하며 그리스도의 절대주권을 개별적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은 모든 개개인의 주님이시다. 이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모든 개개인의 마음과 생명의 주님이 되시지 못하면 결코 교회의 주님이 되지 못하실 것이다. 그분은 신앙 안에서 우리의 주님이 되신다.
그리고 보지 않고 믿는 것은 부활하신 주님만이 우리 안에 이루어주실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예수께서는 토마스의 정신자세를 더 높은 차원으로 이끌어주신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9절)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면에서 우리의 생명의 절대적 주님이 되신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바로 우리의 주님이시다. 그 주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맡길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이때 진정 그분의 증인으로 사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신자들 가운데 활동하심으로써 그들을 하나로 결속하시어 더욱 커지게 하시고 다른 사람들과 구분되는 공동체가 되게 하신다고 사도행전은 전하고 있다.(참조: 사도 5,12-15)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머리로 하는 공동체를 통하여 많은 기적과 놀라운 일들을(사도 5,12) 이루심으로써 그들에게 약속하신 바를 이루고 계심을 보여주신다. 그러므로 교회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세상에 증거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부활로써 영원한 주님이 되셨다.(사도 2,36 참조) 우리의 주님이 되셨다는 것은 그분께서 우리를 다스리시고 이끌어주시는 분이 될 수 있도록 우리가 그분을 맞아들이고 현존하시게끔 하여야 하는 삶이 남아있는 것이다. 이때 주님께서는 참으로 우리의 주님이 되실 수 있다.
묵시록에서는 부활하신 주님을 일곱 등경 가운데 서 계신 분(묵시 1,13)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돌아가셨기 때문에 영원무궁토록 사시며 죽음의 열쇠를 손에 쥐고 계시다.(묵시 1,18). 그분은 이제 살아있는 존재로서 사람들과 모든 피조물의 운명을 손에 쥐고 계시다. 부활이 그분에게 모든 만물에 대한 지배권을 부여했다. 그분은 처음과 마지막이다. 그래서 모든 만물은 그분과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 그래서 교회는 선교사명을 실행함으로써 이 세상에서 그분을 증거해야 한다. 부활한 자들이 없이 어떻게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지 않고서 어떻게 그분을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겠는가?
오늘은 부활 후 필부축제가 끝나는 날로 부활의 기쁨을 다시 한번 확인해주는 날이다. 부활은 이제 단순히 지내는 어떤 기념이 아니라 매일 반복되고 연장되며 새로운 의미를 주고 선포되는 그런 날이어야 한다. 주님께서 살아 계셔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영광스러운 부활로 영원한 임마누엘이 되신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기 위하여 매일 매 순간 부활을 체험하며 그 부활의 신비를 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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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 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예수님께서는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24-31)
1) 토마스 사도는, 예수님을 만났다는 다른 사도들의 말 자체는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정말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유령이나 환시를 본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몸에 있는 상처 자국을 직접 보아야겠다는 토마스 사도의 말은, 다른 사도들이 만났다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바로 그분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결코 믿지 못하겠소.”라는 말은, 토마스 사도 자신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싶어 했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믿을 수 없다.”가 아니라, “나도 믿고 싶다.”입니다.>
2)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신 것은 토마스 사도를 위해서, 또 당신의 부활을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토마스 사도에게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시면서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라고 말씀하신 것은, 당신이 정말로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 것, 유령이 아니라는 것,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신 바로 그분이라는 것 등을 직접 확인시켜 주신 일입니다.
요한복음에는 토마스 사도만을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루카복음에는 사도들 모두를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그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셨다. 그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리자,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루카 24,38-43)
3) 안 믿는 사람들은, 사도들이 거짓말을 한 것으로 생각하거나, 예수님의 유령을 보았을 것이라고 의심하거나, 아니면 무슨 환시나 환각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안 믿는 사람들을 믿게 만들 수 있는 물증 같은 것은 없습니다. 또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어떻든 사도들은 자신들의 믿음이 진리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들의 증언을 믿고 있고, 예수님의 부활도 믿고 있습니다.
4)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라는 말씀과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우리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보지 않고도 믿어야 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뿐만 아니라 교리 전체가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믿음이란 ‘믿을 수 없는 일을 믿는 것’이고,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신앙고백은, 복음서의 핵심이고, 최종 결론입니다. 토마스 사도는 이 신앙을 최초로 고백한 신앙인으로 높이 평가되어야 할 사도입니다.
5) 30절-31절은 ‘복음서를 쓴 목적’이기도 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메시아, 하느님의 아드님, 하느님’으로 믿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 생명은 ‘죽음을 이기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 그러나 각각 차례가 있습니다. 맏물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다음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그분께 속한 이들입니다."(1코린 15,22-23)
예수님처럼 부활해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예수님께 속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온 삶으로 실천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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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성령을 받으시게나>
요한 20,19-31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다, 예수님과 토마스, 복음서를 쓴 목적)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 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성령을 받으시게나>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
닫은 벗이여
활짝 여시는
성령을 받으시게나
어두운 벗이여
환히 밝히시는
성령을 받으시게나
숨죽인 벗이여
힘껏 북돋우시는
성령을 받으시게나
움츠린 벗이여
훨훨 드높이시는
성령을 받으시게나
웅크린 벗이여
가벼이 일으키시는
성령을 받으시게나
멈춰선 벗이여
기꺼이 이끄시는
성령을 받으시게나
머뭇거리는 벗이여
선뜻 앞서가시는
성령을 받으시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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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권혁준 바오로(하계동성당 주임) 신부님]
<하느님께서 계신 동네>
가족이 함께 모여 아침저녁으로 기도하는 시간을 보내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하느님의 자비 주일인 오늘, 그분의 자비를 통해 우리가 변화될 수 있음을 기억하며 독서와 복음 말씀을 묵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영원무궁토록 살아‘(묵시 1,18) 계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무서워 문을 잠가 놓고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제자들이 '아하 체험'(부활 체험. 곧 깨달음)을 하게 된 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 동안 행하셨던 말씀과 기적, 수난과 십자가 죽음으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비로소 그들은 깨닫게 됩니다. 깨달음은 자신들의 힘이 아니라 '에수님께서 숨을 불어넣어 주신 사랑'으로 성령을 받아(요한 20,22 참조)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러자 그들의 삶은 180도 변화합니다. 그래서 더 이상 두려워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처럼 죽음을 넘어서는 사랑을 보여주며 '많은 표징과 이적'(사도 5,1)을 백성들에게 전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제자들의 번화, '아하 체험'은 한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늘 예수님과 함께했기 때문에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부활의 신비를 깨닫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동행은 아침·저녁기도 시간을 보내는 데서 시작합니다. 기도는 나를 변화시키고, 함께하는 기도는 공동체를 변화시킵니다. 그렇게 기도 안에서 우리도 제자들이 했던 '아하 체힘'을 할 수 있게 됩니다.
특별히 가정의 평화는 함께 기도하고 대화할 때 가능합니다. 가정이 함께 모일 시간이 없어지는 현시대에 가정이 함께 모여 아침·저녁기도를 하면서 가정 공동체를 먼저 성화시킵시다. 가정이 성화 되면 이웃과 관계 안에서도 변화가 생깁니다. 이러한 변화가 점점 퍼져 나가면 예수님께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2)라는 말씀이 우리 안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사는 공동체는 하느님께서 만들어주신 공동체입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 공동체 안에서 퍼져나가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공동체의 시작은 가정입니다. 가정 공동체가 함께 앉아 기도하고 대화하며 지냅시다. 부활의 신비(아하 체험)는 기도의 은총 안에서 시작되고 완성됩니다. 그러기에 하루를 시작하며 아침기도를 하고, 하루를 마무리하면서 저녁기도를 하면서 가정부터 성화시켜 봅시다. 그러한 가정이 많이 모인 곳, 바로 그곳이 하느님께서 계시는 동네가 아닐까요? 그곳에는 사랑과 평화, 나눔과 이해 속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퍼져 나갈 것입니다. (《서울주보》 생명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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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손민호 요셉(사회사목국 부국장) 신부님]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요한 20,27)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못자국을 보여주십니다. 토마스의 믿음을 위해 당신의 십자가 상처를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토마스는 그제서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이라 고백하며 예수님께서 진정 주님이심을 믿게 됩니다.
저는 올해 3월부터 교정사목을 시작했습니다. 교도소에 있는 수용자들의 신앙생활을 돕고, 그들이 건강하게 사회에 복귀할 수 있도록 돕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이기에 수용자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아직 잘 모릅니다. 우리 사회에 가장 그늘진 곳에 있는 이들에게 어떻게 주님의 자비를 나누어야 할지 고민이 많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 말씀 안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중요한 교훈을 얻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당신의 못 자국을 보주시듯, 저도 진실한 마음으로 나의 아픔과 상처를 과감히 보여주며 주님의 자비를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수용자들에게 갖추어야 할 저의 모습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비록 수용자들에 비해 제 인생의 아픔과 상처가 크고 깊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려는 자세로 저의 아픔과 상처를 진실하게 보여주고, 나아가 저의 부끄러운 죄들도 솔직하게 나누는 자세가 저에게 필요함을 느끼게 됩니다.
요한 23세 교황님께서는 교도소에 방문하여 수용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들킨 죄인이고, 저는 들키지 않은 죄인입니다." 교황님께서도 수용자들 앞에서 진실한 모습으로 당신 자신을 '들키지 않은 죄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같이 저도 진실하게 죄의 아픔과 상처를 나누는 것이 바로 수용자들과 함께 고통과 아픔을 나누는 것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는 교도소 안의 수용자들뿐만 아니라 밖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도 필요한 점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스스로 죄를 입으신 것과 같이, 우리 역시 각자가 참으로 허물 많은 죄인임을 마음 깊이 인식하며 같은 죄인으로서 동반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당신 손의 구멍 난 못자국을 토마스에게 보여주시듯, 우리 역시도 스스로의 죄로 인해 생겨난 구멍 자국들을 진실하게 보여주며 똑같은 죄인으로서 주님 안에서 함께 치유해 나가려는 태도를 겸비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진실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 보다 진실하게 형제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주일을 맞아 보다 진실한 모습으로 다가가 주님의 자비를 나눌 수 있길 희망합니다. (《빛고을》 빛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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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여영환 오또(선남성당 주임) 신부님]
<하느님의 자비 : 상처를 기쁨으로!>
오늘은 부활 제2주일이자 '하느님의 자비 주일'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의 부족함과 의심까지도 감싸 안으십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는 이를 가르쳐 주시고, 기다려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상처를 보여주셨듯이, 우리도 상처 난 그곳을 주님께 보여드릴 때 '하느님의 자비'를 입게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두려움에 갇혀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제자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습니다. 스승을 잃은 슬픔, 미래에 대한 불안, 그리고 자신의 비겁함에 대한 후회가 그들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먼저 다가가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십니다. 제자들은 그제야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을 깨닫고 기쁨에 넘칩니다. 주님의 상처는 제자들의 나약함과 배신, 고통을 그대로 끌어안고 아문 흔적이었습니다. 상흔은 남아 있었으나, 그 아픔은 기쁨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 영혼의 상처를 아물게 하는 특효약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없었던 토마스는 제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그에게도 다가가셔서 당신의 상처를 보여주십니다. 그러자 토마스는 고백하게 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우리의 연약함과 의심마저도 주님께서는 자비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우리는 때때로 상처를 감추고, 연약함을 숨기려 합니다. 하지만 감추고 싶은 그곳을 보여드릴 때, 그분께서는 우리의 상처를 아물게 하시고 새 생명을 주시는 자비로우신 아버지이십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부활의 기쁨이 충만하시길 빕니다. 아멘. (《대구주보》 주일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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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박성준 세례자요한(서천성당 주임) 신부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면>
부활 제2주일 복음을 통해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단 한 가지의 모습으로만이 아니라 만나는 상대의 상태와 상황을 배려하여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첫 번째 모습은 '평화'를 건네시는 모습입니다.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자신들을 잡아 처형할까 봐 문을 모두 닫아걸고 두려움과 비탄에 잠겨 있었습니다. '캄캄한 골방'이라는 장소가 상징하듯이 그토록 믿었던 분이 무력하게 세상을 떠나셨기에 그들에게는 희망이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두려움과 희망 없음을 극복할 수 있는 '평화'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예수님의 두 번째 모습은 '불신'을 '믿음'으로 바꾸어 주시는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평화를 건네시며 제
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토마스는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라는 제자들의 말을 믿지 못하고, 불신의 마음을 갖습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토마스의 생각은 인간적으로 볼 때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필요한 모습으로 다시 오시어 그들 가운데 서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이에 토마스는 믿음을 고백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불신이 믿음으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이처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모습으로 만나주십니다. 즉, 두려움이 있는 곳에는 '평화'를, 불신이 있는 곳에는 '믿음'을 주시는 모습으로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은 오늘 복음에서만이 아니라 부활 팔일 축제 복음을 통해서도 다양하게 만날 수 있습니다. 빈무덤 앞에서 슬피 울고 있던 마리아에게 '위로'를, 예수님의 돌아가심 앞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엠마오로 귀향하는 제자들에게 '열정'을, 모든 것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가 고기를 잡던 베드로에게 '해방'과 '용기'를 주시는 모습으로 만나주십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주님을 만나고 싶다는 간절함이 있다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습으로 당신을 드러내시어 평화와 믿음, 위로와 열정을 건네실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당신을 뵙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간청해 보십시오. 그 순간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습으로 찾아오십니다. (《대전주보》 말씀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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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채동호 루도비코(수산성당 주임) 신부님]
<하느님 자비의 호소 : 의탁하라!>
우리 교회는 부활 팔일 축제의 마지막 날인 오늘 부활 제2주일을 맞아 주님 부활의 기쁨을 경축하고 있습니다. 또한 오늘은 하느님의 자비 주일입니다. 성너 파우스티나를 통하여 전해진 하느님 자비의 메시지를 확인하고 받아들인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뜻을 따라 부활 제2주일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지내게 된 것입니다. 자비의 사도, 성녀 파우스티나의 일기를 잠시 보면, "나는 이 초상화가 부활 대축일 후 첫 주일에 성대하게 축성되기를 바란다. 그 주일은 자비의 축일이 되어야 한다"일기 49). "내 자비의 축일이 모든 영혼들, 특히 불쌍한 죄인들의 피난처, 은신처가 되기를 바란다"일기 699).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에 의탁하는 마
음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는 5단 기도를 매일 드릴 줄 알아야 합니다.
이처럼 부활 후 첫 주일을 자비의 축일로 지내는 것은 구원의 신비와 하느님 자비의 신비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 자비의 가장 위대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이 날의 전례는 하느님 자비의 신비 안에서 가장 완전하게 주님을 찬양합니다. 자비 축일은 하느님의 자비에 대하여 홈숭을 드러내는 날이며 하느님의 자비에 의탁하는 모든 사람, 특별히 죄인들을 위한 은총의 날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축일에 하신 위대한 약속들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이날 영성체할 때 얻게 되는 은총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이미 성경 말씀을 통하여, 특히 복음 말씀을 봉하여 선포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전체가 바로 하느님 사랑과 자비에 관한 책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을 통해서도 그것이 증명됩니다. 죄인인 우리 모든 인간을 살리시고자 헤아릴 길 없는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분, 곧 우리 모든 인간의 죄값을 치르시기 위하여 죽음을 당하신 후 3일만에 부할하신 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건네시는 말씀을 통해서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만약 위의 말씀처럼 부활하신 주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교회에 보내주셔서 교회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죄의 용서를 베풀지 못한다면, 늘 죄를 짓고 사는 우리 신앙인들은 무슨 희망으로 살아가고 어떻게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갈 수 있으며 죄의 용서를 받지 못한 상태로 어떻게 거룩하신 주님께로 향해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너무나 다행스럽고 감사롭계도 성령님을 봉하여 늘 새롭게 용서의 은총을 베푸시는 자비로우신 주님 덕분에 우리 신앙인들은 다시 일어나서 희망을 갖고 주님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는 성녀 파우스티나를 봉하여 더욱 하느님의 자비에 의탁하라고 호소합니다.
끝으로 오늘 복음에 보면, 부할하신 주님을 직접 뵙고 그것을 전하는 동료 사도들의 증언을 믿지 않아 불신앙의 표본이 되어버린 토마스 사도에게 그분께서 나타나십니다. 믿지 않던 토마스 사도뿐만 아니라 주님 부활에 대한 의심을 갖게 될 미래의 세대 사람들, 바로 우리의 불신앙과 의심을 치유하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직접 사도들 앞에 다시 나타나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뵙고 손가락으로 못 자국을 만져 봄으로써 확인하지 않고서도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부할하신 주님을 믿는 사람들을 향하여 분명히 선언하십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바로 우리 모두를 향한 선언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오늘 복음의 토마스 사도처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을 늘 간절히 부르고 고백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아멘 (《가톨릭마산》 주일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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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창신 이냐시오(우정성당 주임) 신부님]
<토마스 사도 덕분에>
주님 부활의 기쁨 잘 배우고 체험하고, 즐기고 계십니까? 오늘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스승의 죽음과 자신들의 배신, 유대인들의 위협으로 두렵고 불안한 제자들 앞에 부활하신 그분이 서 계십니다. 예수님은 평화, 성령, 용서를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을 위로하고 다시 새로운 힘을 북돋아 주십니다.
근데 이 자리에 토마스 사도는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토마스는 다른 제자들의 말을 듣고, 보아야 믿겠다고 합니다. 다시 나타나신 예수님은 토마스에게 당신의 상처들을 보여주시고 만져보게 해주십니다. 토마스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하며 신앙고백을 합니다. 보고서 믿은 토마스는 의심 많은, 믿지 못하는 불신앙의 사도라는 이미지를 얻게 되었습니다.
보는 것은 믿음을 주기 위해 결정적인 것입니다. 한 번 보고 경험한 것이 평생 기억되고 자신의 가치관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파리에 가서 에펠탑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후로 사진이나 티비에서 에펠탑을 볼 때마다 직접 보았던 감흥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보는 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컴퓨터 그래픽이 발전한 요즘은 가짜 화면이 많습니다. 중요한 장면도 마음을 모아 보지 않으면 보았는지 기억조차 못합니다. 주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 사건도 그냥 본다고 그 의미를 깨우치는 것은 아닙니다. 박해자, 방관자, 구경꾼 등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보았지만 모두 믿음으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사람은 몇 사람 되지 않습니다. 부활은 오랜 세월 수많은 신앙인들이 하느님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그런 마음으로 받아들여 성령의 도움으로 체험하는 것이고, 그 체험이 전수되어 이어져 내려온 것입니다. 오늘 토마스 사도는 "보고서야 믿느냐?" 하시는 말씀을 들으셨지만, 토마스 사도 덕에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더 귀한 말씀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우리는 직접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하지 못했지만, 그분을 직접 보고 체험한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며 성령을 노래할 수 있고, 성경의 말씀에서 하느님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고, 미사 전례에 참여하며 강론과 성가와 침묵의 기도로 예수님을 만나고 있음을 믿으며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 고백할 수 있으니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가톨릭부산》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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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구 이희정 요셉(울진성당 주임) 신부님]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1. 오늘 복음 말씀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락방에 숨어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평화의 인사'를 나누시고, 당신이 참으로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셨음을 제자들이 믿도록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토마스가 없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뵈었다."는 다른 제자들의 말에 토마스는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라고 말했습니다.
2. 여드레 뒤에 주님께서는 토마스도 함께 있는 자리에 다시 나타나셔서 토마스에게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셨습니다. 그제야 토마스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 토마스가 믿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예수님께서 발현하셨을 때,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너무나도 믿기지 않는 사실이기에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직접 눈으로 확인한 토마스는 그제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지만,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듣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4. 어느 책에서 본, 수도자의 말이 떠오릅니다. "수도자의 삶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는 삶이기에 행복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는 삶이기에 행복합니다." 삶에 있어 참으로 중요한 것들은 정작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사랑, 행복, 평화, 믿음, 희망, 구원, 영원한 생명, 하느님 나라……. 이 가치들은 '하느님 나라의 가치'라고 할 수 있는데, 신앙의 여정 안에 신앙인들이 추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들이며, 이 가치들을 추구하는 삶 안에는 하느님 나라의 참된 행복과 평화가 깃들게 되는 것입니다.
5. 우리는 하느님과 예수님을 보지 못했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도 목격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하느님께 대한 믿음 안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성령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 보지 않고도 믿으며 살아가고 있으니, 진정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6. "자신을 낮추고 또 낮춰 저 평지와 같은 마음이 되면, 거기엔 더 이상 울타리가 없으며, 벽도 없을 것입니다."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자연 생명은 서로가 달라도 주어진 자리에서 다른 생명들과 조화롭게 살아갑니다. 싸우려고 들지 않으며 갈등 없이 살아갑니다.
우리도 믿음 안에 자신을 낮추어 저 평지와 같은 마음이 된다면, 일상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이루어 참된 행복과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아멘. (《가톨릭 안동》 말씀의 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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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종교구 홍석진 요한보스코(탐라대성당 주임) 신부님]
<믿기를 바라시는 주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숨어 있던 다락방에 깜짝 등장하셨을 때 토마스는 거기에 없었습니다. 그가 돌아와, 흥분에 가득 차 있는 다른 제자들의 모습을 보고서는 '드디어 이자들이 미쳤군.' 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한편으로는 자신에게 당신 모습을 드러내 보여주시지 않는 예수님께 속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굳건한 신앙을 가진 분들을 보면 부럽습니다. 저도 때로 의심하거나 믿음이 흔들릴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도 다른 신부님들이나 교우분들처럼 큰 신앙 체험을 하면 좋을 텐데 …….’ 하고 혼자 고민하며, '제 기도에도 적극 응답해 달라'고, 보다 확실한 메시지를 달라고 기도한 적도 있었습니다.
다른 한편에서 볼 때, 토마스는 소위 말하는 '대문자 T'일지도 모르겠습니다. MBTI 과몰입 시대가 비로소 지나는 모양입니다만, 감히 토마스의 MBTI를 추측해 보자면, ESTJ인 것 같습니다.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 11,16) 하고 호기롭게 나서서 말하는 것을 보면 E 같고요. 예수님의 구멍난 손과 발, 옆구리를 만져보고서야 믿겠다는 걸 보니, 직접 자신의 감각과 경험에 의거(S), 논리와 분석(T)을 통해 판단(J)하는 것이 보입니다.(저는 전문가가 아님을 말씀드립니다.) 정확히 경험하지 않고서는 믿지 않겠다는 것이죠.
여드레 뒤에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토마스에게 당신의 오상(五傷)을 만져보라 말씀하십니다. 스승님께 대한 속상한 감정, 그분께 품었던 의심은 이제 모두 내려놓고 토마스는 성경 제일의 신앙고백으로 나아갑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시면서도 토마스에게 눈높이를 맞춰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보고서야 믿을 수밖에 없는 우리 눈높이에 맞춰 또다시 우리에게 내려오시는 강생(降生)과 육화(肉化)의 순간입니다.
어쩌면 토마스에겐 이런 방법이 더 필요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인생의 여러 순간 도저히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기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가 당신을 믿기를 바라십니다. 당신을 믿고 따르기를 바라십니다. 여전히 당신께 대한 불신과 의심이 가득한 우리이지만, 그런 우리도 당신을 믿기를 바라십니다.
현대의 위대한 신학자 칼 라너는 신앙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앙이란 하느님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생동안 견뎌 내는 일이다." 비록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막막한 순간에서도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을 믿읍시다. 의심하더라도 의심을 가지고 불신으로 나아가지 말고, 의심을 가지고 확신으로 나아갑시다. 우리가 믿기를 바라시는 주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내려오시어 도와주시고 알려주시고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군종주보》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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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김민규 요한 세례자(원동성당 주임) 신부님]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오늘 복음의 이야기는 불신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 현대인들은 보고, 만지고, 경험한 것만 믿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의 경험 속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닫혀 있는 벽을 넘어 제자들 한가운데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제자들의 닫혀 있는 마음을 열어주시는 분이십니다. 불신 속에 갇혀버린 토마스의 마음까지도 변화시켜주시는 분이십니다.
부활한 주님을 만나 직접 뵙고 나서야 신앙을 고백한 토마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토마스에게 하신 이 말씀은, 불신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바로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부활을 체험한 이들이 삶으로 전하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구나. 불신의 시대를 살아가며 보고, 만지고, 경험한 것만을 인정하는구나. 어리석은 고집을 버리고 부활을 체험한 이들의 삶을 통해 나를 믿어라! 나를 직접 보지 않더라도 그들의 삶의 증언을 통해 나를 믿을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느냐!"
우리에게 전해진 신앙은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의 삶을 통해 전해 내려온 것입니다. 우리 앞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이들의 삶이 놓여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삶에서 삶으로 전해진 부활 신앙입니다. 그러니 아직 믿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우리가 삶으로 부할을 증거 해 주어야 합니다.
오늘날, 수많은 종교들이 이상한 기적들을 신앙의 증표로 이야기합니다. 우리 천주교회도 예외가 아니어서, 가끔식 사적 계시를 주장하고 그런 것을 보고 믿으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꼭 그런 것을 봐야 나를 믿느냐? 증거하는 이들의 삶을 통해서 나를 믿을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느냐?"
증거가 아니라 증거 된 이들의 삶으로 부활한 주님을 신앙하는 우리들입니다. 토마스가 감격에 겨워 고백했던 부활한 주님에 대해 그 신앙, 이제는 우리가 증거하고 선포하는 삶을 살아갈 차례입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아멘. (《들빛》 복음묵상의 향기 ”말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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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김현신 요셉(이동성당 주임) 신부님]
<부활 효과>
부활 8부 축일 마지막 날인 오늘을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 주일' 로 지낸다. 예수 성탄이 하느님 사랑의 징표라면, 부활은 하느님 자비의 징표가 아닐까 싶다. 부족한 우리에게 영원한 삶의 문을 열어주신 주님 부활이야말로 하느님 자비의 극치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활 8부 축일 중 미사 전례 말씀에서는 한결같이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이 등장한다. 당신을 믿고 따르던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나셨고, 특히 사도이신 당신 제자들에게는 여러 차례 나타나셨다. 그때마다 예수님께서 자주 하신 인사 말씀이 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우리도 미사 때마다 매번 그렇게 인사한다. 특히 오늘은 당신의 숨을 불어 넣으시며 말씀하신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이제 제자들은 우왕좌왕 산란했던 마음을 가다듬고 주님이 맡기신 임무를 수행하러 떠나야 한다. 그들에게는 무엇보다 "마음의 평화" 가 필요하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평화를 간직하고 주님께서 알려주시는 길, 맡겨주시는 일을 지니고 떠나야 한다. 수천 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씀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이 모든 일을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 오늘 복음을 기억할 때 '토마스 사도의 불신앙'을 떠올리곤 하지만, 어찌 보면 토마스 사도 덕분에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팩트체크를 제대로 한 거다. 오늘 복음에 이어지는 말씀을 엊그제 평일에 봉독했다. 오늘 복음을 이어서 묵상한다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어떻게 제자들에게 당신 모습을 보여주셨는지 더 잘 알 수 있다. 잠시나마 제자들과 꿈같은 일상의 모습도 보여주셨지만, 무엇보다 제자들의 헛된 그물질이 부활하신 주님의 한마디로 그물이 찢어질 듯 고기가 잡힌 기적은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 때 아무런 부족함이 없게 됨을 알려주시는 듯하다.
'부활 효과'라는 말을 떠올려본다. "평화롭다. 근심 걱정이 없다. 행복하다" 등등의 표현이 함께 떠오른다. '두려움 없는 믿음, 흔들림 없는 확고한 믿음, 기쁨과 평화가 충만한 삶……!' 이것이 부활이 주는 신앙, 즉 부활 신앙이고 부활의 삶이다. 어정쩡한 믿음은 도움이 안 된다. '아무리 성당에 다녀도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겠다'라는 생각이 든다면 아마도 부활 신앙이 부족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부활 신앙이 없는 자들은 오로지 눈에 보이는 세상만이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부디 주님의 부활을 항상 마음속에 간직한 채,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믿고, 기쁨과 평화 넘치는 삶을 살아가자! (《춘천주보》 말씀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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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김진규 도날드(십정동성당 주임) 신부님]
<사람들은 선함을 악용합니다>
제목은 파우스티나 성녀께서 발현하신 예수님을 만나면서 당신과 자신의 선함을 악용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토로한 것이다. 사제로서, 선배로서, 상사로서, 국민으로서 등등 한 번쯤은 느껴봤음직한 마음일 테다.
주님 부활 팔일 축제인 오늘, 듣는 복음은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당신을 드러내신 대목이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어머니 마리아처럼 행복하다고 하셨는데, 순교자들께는 당연할 테지만, 세상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뒤뚱거리면서 믿음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과분한 복됨이 아닐까?
부활의 주님께서 평화의 인사를, 그것도 세 번씩이나 하신다. 단순한 인사말은 아니리라. 죽음의 두려움과 함께 배반의 죄책감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는 용서에서 오는 평화라 한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주면 그가 용서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 용서가 당신의 영을 불어넣으시어 새롭게 창조하신 제자 공동체에 주시는 위탁과 사명의 말씀이요, 나에게 부어진 주님의 영을 꺼버리지 않는 일일까?
그런데 참 쉽지 않다.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작은 것은 그렇다 쳐도, 치유되지 못한 깊은 상처들, 이념과 색깔 공세로 사람들과 국가로부터 받은 여전한 상처들이 그 얼마인가? 시간이 약이라고, 그저 덮어두고 참는 것만이 용서일까? 힘없고 선한, 그래서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만을 자책해야 할까? 어렵게끔 용서의 마음을 안고 찾아갔으나, 자신은 "이미 하느님께 용서받아" 마음이 편하고 이제 누구의 용서는 필요 없다는 어느 영화 장면의 상황이라면 환장할 노릇이다. 상처받은 이들은 많은데, 정작 잘못했다고 용서를 청하는 이들이 없으니 더 속이 뒤집힌다. 너무 인간적인 생각일까?
선함이 악용되고, 악은 쉽게 무너뜨리면서도 선을 다시 세우고 살아가기란 왜 이리 어려울까? 예수님 시대에도 무조건 참고 덮어두는 것이 능사였을까? 혹시 놓치고 있는 것은 없을까? 잘못을 깨닫거나 몇 번이고 잘못임을 가르쳐, 그래서 돌아와 용서를 청하는 일이 우선이요, 이것이 끝없이 용서함의 전제이다. 그러니 사죄하는 이 없이, 용서하지 못함을 자책하는 것도, 용서함을 함부로 강요해서도 안 될 일일 터. 무엇보다도 먼저 용서를 청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하며, 이것이 용기이며 성령의 이끄심이다. 나와 공동체, 우리 사회는 어떤가? 내가 청하지 못한 허물은 얼마나 될는지 …. 이러한 용서와 평화를 통한 부활의 기쁨이, 갈라지고 뭉개진 우리 사회와 내 안에는 언제쯤 자리하려나?
그래도 십자가에서 용서를 청하신 예수님께서 도, 스테파노도, 순교자들도, 자식을 향한 부모님의 삶도 그러하다고 따진다면 할 말은 없다. 세상은 이치로만 따질 수 없는 일들도 일어나기 마련이니. 그저 위탁과 사명의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송구함만 크다. (《인천주보》 오늘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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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이상훈 율리아노(서신동성당 주임) 신부님]
<부족한 우리에게 드러난 하느님의 자비>
오늘은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깊이 묵상하게 되는 '하느님 자비 주일'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느님의 자비를 가장 깊이 드러낸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죄로 인해 십자가에 달리신 아들을 죽음에서 일으키심으로써, 우리를 죄에서 자유롭게 하시고 구원의 문을 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잠가 놓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실 제자들은 마리아막달레나의 증언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게 되었지만, 그의 증언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두려움에 휩싸인 모습을 드러냅니다. 나아가 제자들은 뒤늦게 도착한 토마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증언합니다.
그러나 토마스 또한 그분의 못 자국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그 상처에 손가락과 손을 넣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다는 불신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부족한 제자들과 토마스를 찾아가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21.26)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두려움과 의심 가운데 있는 제자들에게 찾아가시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의 모습을 드러내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용서와 평화의 모습을 보여주시고, 새로운 사명으로 초대하시어 새롭게 변화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십니다.
제자들의 모습은 우리 신앙인의 모습을 되돌아보도록 이끌어줍니다. 제자들이 예수님 부활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는 세상 안에서 찾아오는 두려움으로 인해 절망과 불안으로 가득 찼기 때문입니다. 우리 또한 세상 안에서 찾아오는 유혹들로 인해 부활의 기쁨보다 두려움과 불확실함에 머무를 때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뿐 아니라 우리는 세상의 기준으로 하느님의 존재를 의심하며, 불신하고 있지는 않은가 되돌아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을 세상의 기준으로 바라보며 불신하는 의심에서 벗어나는 믿음을 요청하십니다.
그리고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라고 말씀하시며, 우리가 부족한 믿음으로 발생하는 죄를 피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부족한 믿음에서 발생하는 죄를 인정하고,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느님의 자비에 의탁해야 합니다. 그리고 삶 안에서 자비의 열매를 맺으며 구원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숲정이》 오늘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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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리치현 다비드(동문성당 주임) 신부님]
<하느님 당신은 나의 모든 것>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요한 20,19) 예수님의 부활을 팔일 동안 경축하고 난 오늘, 여러분의 마음에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평화가 찾아왔는지요? 믿고 싶지 않은 넉 달의 시간은 너무나 깊은 생채기를 우리 공동체에 남겼고, 그것을 감당해야 하는 일은 우리와 같은 평범한 백성들의 몫인 것 같습니다. 해소되지 않는 불확실성이 우리의 먹고 사는 문제까지 위협하는 이 순간, 과연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게 무슨 소용이 있는지 묻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 나타나신 사건을 전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 제자들의 상황은 어떠했는지요?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요한 20,19) 예수님을 잃고 모든 희망이 사라진듯 외부와 통하는 모든 문을 잠가 놓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입니다. 토마스는 어떤가요?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25) 믿음을 져버린 것 같습니다. 마치 다시는 믿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는 듯합니다. 이 같은 처참한 현실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분의 등장, 그분과의 만남은 제자들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요? 두려움에 떨며 문을 잠가 놓고 있었던 제자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느낍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요한 20,20) 토마스는 어떤지요? 마치 믿음을 져버린 듯 주님의 부활을 가장 강력하게 부정한 인물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가장 위대한 신앙 고백을 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일, 믿음의 가장 궁극적인 목적일 것입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고, 믿음을 새롭게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믿음이 가져다주는 것은 무엇이었는지요?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1) 복음서 집필의 목적을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이시며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믿음, 그리고 그 믿음을 통해 생명을 얻는 일입니다. 그 생명은 무엇일까요? 내 삶의 역사 안에서 하느님께서 나를 차지하고 있는 정도가 얼마나 되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 안의 하느님을 위한 공간이 얼마나 되는지 살펴보는 일입니다. 혹시 그분께서 나의 모든 것이라는 사실을 체험했거나 믿게 될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요? 사실 저도 잘 모르겠지만 복음서는 제자들의 변화를 통해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두려움은 기쁨으로 바뀌고 의심은 굳건한 믿음으로 변화된다는 사실입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기도처럼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는 것, 하느님 당신은 나의 모든 것이라고 고백하는 것, 바로 이것이 믿음으로부터 얻게 되는 생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나아질 것이 없어 보이는 내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일이 부질 없는 일처럼 느껴지시는지요? 물론 믿음이 도깨비방망이처럼 '짠!' 하고 내게 필요한 것을 가져다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이 지니고 있는 충만함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이 세상에서 그 사람을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게 하는지는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 당신은 나의 모든 것!'이라고 고백하는 이의 삶이 얼마나 생기 넘치는 기쁨으로 가득 차 있을지 우리는 이미 알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려운 현실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나를 살게 하는 참된 고백을 외칠 수 있는 순간이 되시면 좋겠습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가톨릭제주》 오늘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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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이동식 발다살 신부님]
<하느님의 자비로우심>
‘하느님은 못된 사람에게 즉시즉시 벌주시는 분이셨으면! 웬만한 뉘우침으로는 절대 용서하지 않는 분이셨으면!
누군가로부터 속상한 일을 경험할 때 드는 생각입니다. 그러다가도 어느 날은 다급히 기도합니다. “하느님, 도와주십시오. 소중한 이가 아픕니다.”, “제가 말 못할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덮어주십시오.”
남에게는 혹독하신 하느님이 되어달라고 하고, 나에게는 한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이 되어달라고 비는 내 이중적인 모습 앞에 어이없는 웃음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나에게 자비로우신 하느님은 다른 누군가에게도 자비로우신 하느님이신데 그렇게 바라니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먼저 이르신 말씀 한 대목이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마태 5,7) 이는 남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비를 입을 것이고, 그분의 자비를 입고자 하는 사람은 남에게 자비를 베풀어야한다는 말씀입니다.
자비는 세 가지로, 즉 행동으로, 말로, 기도로 베풀어집니다. 행동으로서의 자비는, 불쌍한 처지의 사람에게 지갑을 열어주고 시간을 내어주고 재능 등을 나눠주는 것입니다. 말로서의 자비는, 이로운 말을 하고 깎아내리는 말이나 험담 등을 참아주는 것입니다. 기도로서의 자비는, 말 그대로 기도해 주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중에서 어느 하나 수월한 것이 없습니다. 맘 아프게 하는 사람을 위해서도 그리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비로운 마음은 하느님에게서 시작되며, 하느님을 기억할 때 시련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계속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토마스를 찾아오시어, 그 사도가 바라는 대로 해주십니다. 당신의 상처를 만져보게 하시어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난 바로 ‘그 주님, 그 하느님’임을 믿고 고백하도록 이끄십니다.
예수님의 이 모습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봅니다. 특히 토마스가 예수님과 동료들에게 어떻게 했는지를 생각하면 더 그렇습니다. 이 사도는 예수님과 함께 죽자고 동료들을 부추겼지만 십자가 앞에서는 어느새 도망쳤습니다. 그로 인한 죄책감이 컸던 것인지 사도들이 모인 자리에 종종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혼자만 보지 못했습니다. 또 동료들이 주님 부활 소식을 전해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 토마스였습니다.
토마스의 행동이 우리에게는 많이 못마땅해 보일 수 있는데, 예수님께는 그렇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찾아오시어 너그럽게 대해주시고 그의 부족한 믿음을 채워주셨습니다. 이렇게 토마스는 주님의 자비를 입고 다른 사도들처럼 주님께 신앙을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믿음이나 희망이나 사랑에서 부족함이 많지만 그분의 자비를 입고 오늘을 삽니다. 그러기에 마음 한편에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도 챙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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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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