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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완 윌리엄스 신앙의 기초 3부작’ 시리즈
1.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 2. 제자가 된다는 것 │ 3. 인간이 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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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인간이 된다는 것, 로완 월리엄스
책은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는 인간됨을 의식,
인격, 몸과 마음, 의존성, 침묵과 성숙으로 정리하고
있다.
1.의식
저자는 의식을 기계로 보는 관점을 거부한다. 의식을
기계의 처리 과정으로 이해하는 일은 의식의 유기체
적 속성을 간과한다. 기계는 외부 문제 해결을 위해서
작동하며 반복적으로 기능하는 반면, 두뇌는 외부의
문제와 더불어 자체의 행동을 수정하면서 여러 환경
에서 다르게 적응한다. 기계가 입력과 출력으로 작동
되는 것과 다르다
인간 의식은 '자리가 있다'. 하나의 의식으로서 나의 자리는 내 주변의 세계를 정리하는 능력만 말하지 않 는다. 그것은 의사소통의 세계를 정리하고, 교환되는 정보 네트워크 속에 나 자신을 두는 능력을 말한다. 기호와 부딪치는 세계 속에 있는 것이다. 의식이 '이 곳'에 자리잡았다면, 그 위치는 다른 행위자와 상징적 과정. 형성된 관계 선을 정리해야 파악된다. 다시 말해, '여기 있음'을 인식하려면 저기에 다른 존재를 인식해야 한다.
여기서 의식의 첫 번째 특징이 도출된다. 의식은 관계적이다
내가 기호를 해독하고 정리하려면, 다른 사람의 위치 (관점)에서 상상하는 일이 필요하다. 가령, 저자는 독자를 상상해 글이 이해되도록 작성한다. 어떤 사물을 인식하는 것은 다수의 관점을 전제하는 것이다. 이처 럼 타인을 고려하지 않고 사고할 수 없기에 의식은 관 계적이다. 이 의미는 의식이 유동적이고, 가변적이며,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무언가 의식하려면 또 다른 관점을 상상하는 능력이 있어야 하기에, 의식 자체가 협력적이며 공감적이다
또, 의식은 연속적 내러티브를 갖는다. 과거의 인식과 지금의 인식 사이에 동일성이 있다고 가정한다. 시간이 흘러도 1인칭의 일관된 실체를 전제한다. 의식하는 것은 말하는 화자인 나를 인식하는 것이자, 내가 타인에게 말의 대상이 되는 것을 인식하는 일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의식은 항상 언어와 관련을 맺는다. 의식에는 내 안에 진행되는 기본적 정보 교환에 반응하고 발전시키거나 정교화하는 능력이 있다. 관계성과 자리, 스토리텔링으로 깊이 뿌리내린 의식은 언어와 상징의 생성, 해석과 교환 속에서 작동한다.
의식에는 자리가 있고, 의식은 관계적이며, 의식은 내러티브다
2.인격
인격이란 일련의 사실들이 아니다. 나를 다른 인격이 아니라 이 인격으로 만드는 건 나를 이루는 사실들로 환원되지 않는다. 나를 한 인격으로 만드는 건 내가 다른 곳이 아닌 여기에 있고, 다른 관계가 아닌 이 관계 속에 있고, 이 부모의 자녀이고, 이 자녀들의 부모이고, x의 친구이자, y와 친하지 않다는 것에 놓여 있다 즉, 나는 관계의 그물망에서 이해된다. 내가 관여하는 관계 때문에, 그 속에서 나는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고 응답함으로 새로운 사실을 창조한다. 이것은 기능이나 사실으로는 축소되지 않는 나라는 인격을 드러낸다
다시말해 인격은 관계가 교차하고 차이가 만들어지며, 새 관계가 창조되는 지점이다. 따라서 모든 개인은 동일한 신비가 드리워져 있고, 관계 속에서 동일한 존중과 관심이 마땅히 주어져야 한다. 한 개인은 한 장의 검사 보고서나 점수 도표로 환원되지 않는다. 우리가 사람에게 인격적 존엄과 가치를 부여하는 이유는 우리 모두가 관계를 맺는 가운데 다른 사람의 실존 안에서 현존하거나 의미를 갖는다고 인식해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삶 속에서 살고 있다. 관계의 선이 교차하는 지점에 '내'가 있다는 것은, 인격이라는 요소를 관계를 빼고 정의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다른 사람의 삶 속에서 살아가는 능력은 인격이라는 실재 에 대한 신비의 일부이다. 우리는 관계 속 인간으로서 다른 인격과 맺은 관계에 의해 창조되고, 교환과 상호 성안에서 인격의 의미를 발견한다
나아가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물이든 사람이든 관계에 있기 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음을 가정한다. 자신을 이해하고자 더 깊이 파고들수록, 나는 이미 파악되고 호명되어 있음을 더 깊이 깨닫는다. 내가 속을 아무리 깊이 파고들어도 관계에서 완전히 분리된 추상적 자아를 발견할 수 없다. 우리를 만들었고, 우리 존재를 지탱하는 그 능력과 맺은 관계가 우리의 첫 관계다. 이 말은 타인 역시 그렇다는 뜻이며, 따라서 나와 관련된 사람들이라 해서 내게 속한 게 아니며 전부가 될수 없음을 가리킨다. 다른 사람에게는 내가 볼수 없 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이 항상 존재함을 의미한다.
•두 가지 의식 모델: 개인주의와 인격주의
근대적 자아 인식은, 자신을 세계의 원자로 인식하게 한다. 우리 안의 요소에 의존하는 것을 자기 확신이라고 말한다. 개인주의적 관점에서 자기 자신은 하나의 세계이며, 우리의 독립된 본질을 지탱해주는 단단한 핵심이 우리 안에 있다고 가정한다. 이런 관점은 다른 사람의 운명으로부터 소외되는 결과를 낳는다. 토크 빌은 '자기 자신 안으로 퇴행한 사람은, 마치 자신이 다른 모든 사람의 운명에 대해 나그네인 것처럼 행동 한다'고 말한다
만일 개인주의 모델을 택한다면, 견고한 핵심이 내 안에 자리하기에 세상과의 최선의 관계는 끝없는 통제로 귀결된다. 우리가 있을 최선의 장소는 우리가 절대 놀라지 않을 곳이다. 우리는 낯선 것을 통제하고자 하고, 넘어서는 한계에 불편을 느낀다. 이는 완벽한 결혼, 몸, 가정, 직업에 대한 열망으로 나타난다. 만일 우리가 환경을 대하는 관계가 통제이고, 우리가 잃을 것과 두려워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완벽한 정적 상태를 지향하는 것이라 할때 개인주의적 인식은 변화의 요소 전체를 부정한다. 따라서 시간과 몸을 원망하고, 미완성과 한계를 원망한다
우리는 개인주의가 우세한 문화와 노동환경 속에 있다. 통제를 지향하고, 우리가 문을 닫을 수 있는 사적 영역이 항상 있다고 가정한다.
한편, 인격주의적 접근은 우리는 언제나 관계의 네트워크 한가운데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누구의 운명이나 실재가 우리에게 영향을 줄지, 주지 않을지를 결코 알지 못한다. 이곳은 위험이 따르는 장소다. 저자는 내부에서 끌어내는 자기 생각을 강행하는 원자화된 인위적 자아 개념에서 벗어나, 개입된 관계 속에서 나누는 유연하고 위험한 동시에 인간다운 교환 담론으로 시선을 돌려 우리에게 먼저 말하고, 호명하고, 관여한다는 통찰 위에 자아 개념을 세울 것을 제안한다
3.몸과 마음
배움은 습관을 익히는 것과 연관된다. 자전거 타기, 노래 부르기 등은 복잡한 자극에 몸이 적응하는 법을 배우는 활동이다. 기술을 배울 때는 시간이 걸리는데, 과정에서 찾아오는 불안을 잊어야 한다. 계속 불안해 한다면 그 일을 몸에 익힐 수 없다. 몸이 긴장하기 때문이다. 몸은 느끼고 감지하고 참여하는 습관을 통해 익히며, 지적 성장의 핵심이 여기에 자리한다
배움은 몸으로 찾아오는 자극이라는 파장에 주목하고 조율해서 연합하는 일련의 과정을 말한다. 단순히 머리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몸이 우리에게 오는 자극에 공명하고 순응하는 것이다. 몸의 지적 작동 과정은 체화된 마음을 만든다. 정신은 도피와 통제 모델에 치우치는 경향을 보이지만, 영적 영역을 배우려면 유한성과 육체성에 대한 인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4. 의존하는 마음
근대 이후 자율성은 인간 최고의 이상이었다. 그러나 의존성은 사람의 삶의 어느 국면에 반드시 나타나는 한 형태로, 피해갈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 사람은 예수와 의존 관계를 맺는다. 인정해주는 근원에 순종함으로서, 우리는 자기 자신의 기원이 될 필요를 버린다. 자아를 창조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조건 없이 인정해주는 근원에 의존해 있음을 시인함으로써 변혁의 능력을 갖게 된다. 한편, 욕망 앞에서 구속된 사람은 주변의 것을 사적 목적에 봉사하게 만들려 애쓰지 않는다. 그 자체의 권리와 존엄성 속에서 다룬다. 한편, 악마적 반응은 소유하고 지배해서 자아의 목적을 맞춰 변환하는데만 애쓴다
자율성을 향한 몸부림과, 무비판적인 욕망의 유혹, 시간에 대한 절박감은 우리의 유한성과 관계가 깊다. 우리가 유한하다는 사실은 우리가 계획한 모든 일에 한계가 있음을 말한다.절대적 한계와 관해 타협 불가한 요소가 있고, 전능한 자아가 불가능한 이유이기도 하다. 유한성을 인식하길 거부하는 것은 파괴적인 거짓 권력 모델로 가게 한다
저자는 성숙한 인간의 길로서 네 가지를 제시한다.
1) 자성의 신화 대신 의존성과 그로 인한 자유를 수용하고,
2) 충동적인 삶에서 정직과 훈련의 필요성을 받아들이며, 3) 시간의 경과를 상징적이고 복합적인 것으로(시간이 습득의 궤적이 아니라, 상징의 근원으로 돌아가 거주하는 우주의 특징과 자신의 특징을 재발견하고 현재의 구체적 경험과 종교공동체의 언어와 관습 속의 규칙적인 패턴과 연결시키는 과정) 봄으로써,
4) 유한성이 부여한 궁극적 한계를 인식함으로서 성숙해진다고 말한다
무기력하지 않은 의존, 자기비판에 일조하는 자유, 제의에서의 인내와 해석력, 죽음 앞에서의 불안의 제거가 충족해야 한다.
역기능의 모습은 이렇다.
1) 모든 형태의 의존에 맞서 반항하거나,
2) 자신에 대한 의문이나 자기 비판을 견딜 수 없거나,
3) 시간을 채워져야만 하는 어떤 것으로 대하거나,
4) 유한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단, 의존은 오인될 경우 종교 제도와 권위에 기댄 고도의 공동체 유아기로의 퇴행을 만들 수 있다. 정서적 퇴행 으로 도피하는 것이다. 또, 시간 제의의 활용에서 의식 주와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생길 수 있다. 또, 죽음 이후를 위해 현재를 등한시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인간 성숙을 위한 모든 측면은 이렇게 왜곡될 가능성이 있다. 여기서 중요한 하나님에 대한 의존이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하는 의존과 근본적으로 얼마나 다른지를 성찰하는 데 있다. 하나님께 의존하는 것은 우리의 통제력 상실이나 자율성 상실과 극히 다르다 다른 인간에게 의존할 때 우리는 억압적이고 비인간적인 관계 패턴에 휘말리는 것을 경험한다. 반면 하나님은 탐욕스럽게 통제하는 자아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욕망에서 벗어나는 자유란 자기 자신에 대한 관점 을 배우고, 이 과정에서 정당한 의지의 활동과 잘못된 행동을 배우며, 우리 시야가 정화되어 행동과 관계의 가능성이 변화되고 확장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5. 침묵과 성숙
침묵은 상황을 감당하고 통제하려는 충동에 도전한다. 우리는 상황을 감당하려 할 때, 이야기한다. 반면, 침묵은 능력 부족을 인정하는 것이다. 허공에 매달린 상태, 내 안에서 그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고 낯섦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을 때 침묵한다. 침묵은 그리스도인의 인간성을 위해 대단히 중요하다. 우리의 인간성은 익숙해짐과 통제를 좋아할수록 덜 인간다워진다. 인간성이 끊임없이 성장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것과 통제 가능한 것을 넘어서는 순간이 있어야 함을 말한다
성장하는 인간, 성숙하는 인간은 이것을 감당할 수 없어라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어서 침묵할 준비를 갖춘 사람이다. 우리가 성장하려면, 일상을 벗어난 것에 대 처하는 법을 익히고 계속 움직일 준비를 갖춰야 한다
하나님이야말로 근원을 알 수 없고, 통제하지 못하며 다 헤아리지 못한 환경이자 만남이다. 침묵은 현존과 개방성을 가리킨다
+ 변화된 인간성
예수께서는 인간의 본성을 하나님의 심장으로 가져가 시고, 하나님께 인간의 목소리로 말씀하신다. 시편은 거칠고 분노하고 맹렬하고 증오하는 발언으로 가득하다. 시편에는 하나님을 향한 항변과 사람을 향한 극심한 악의가 담겨있다. 즉, 시편은 인간적이다
하나님은 적극적으로 우리 언어를 하나님 자신의 언어로 삼으신다. 이 말은 예수께서 모든 인간의 부르짖음을 선하다고 말씀하신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이 말은 예수께서 우리의 감정과 혼란스러운 성품을 진실한 것으로 다루신다는 의미이다. 그분은 우리를 진지하게 대하신다. 우리가 하는 모든 말, 고통과 저항 분노와 폭력의 말을 전부 들으시고, 그 말을 취하셔서 성부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 말씀하신다. "이것이 내가 취한 인간성입니다. 매력적인 모습은 아니지만 진실한 것입니다. 볼품없고 혼란스러운 실재이지만, 여기 하나님의 불타는 심장 속에 떨어뜨립니다"
예수는 까다롭고 완고하고 비루한 인간성의 조각을 받아들여, 그것이 치유되고 변화될 수 있는 유일한 곳인 사랑의 심장 속으로 가져간다. 그리고 성령이 오실 때 우리는 인간을 새롭게 보고 다르게 들을 수 있게 된다. 비루하고 유익하지 않은 인간의 조각들을 걸러내지 않는 용기를 준다. 성령은 우리의 눈과 귀와 마음을 열어 인간다움의 총체적 의미를 알게 하신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가 되는 대신, 저 방대한 인간 경험에 더 많이 열리고 더 많이 개방된다.
그리스도인은 인간 목소리의 고통과 분노, 폭력의 소리를 검열하는 사람이 아니다. 목소리를 듣는 것은 인간의 분노와 고통 속에 강렬한 아픔을 느끼는 일이며 우리는 이 아픔을 그리스도 안으로, 또한 성부의 심장 속으로 가져갈 수 있음을 깨닫는다. 예수는 우리보다 먼저 인간 실재의 가장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셨다. 잊혀진 자들의 울음을 들어 올리신다. 그분은 누구도 듣지 않는 인간의 목소리를 들으신다. 그리고 우리에게 너희도 들으라고 요청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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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완 윌리엄스는 성공회 대주교로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는 자들에게 의미 있는 메시지를 주었다. 이 책은 본래 일반대중을 위해 진행되었던 공개강좌를 책으로 만든 것이기에 지나치게 학문적인 책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대충 읽을 만한 글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라는 주제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인 부분이기 때문에 그의 신학적 관점들이 글에 자연스레 녹아져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의 메시지를 들으며, 그리스도인에 대한 자신의 고백을 성찰해보며 신앙의 여정을 걸어가게 된다면 좋겠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로 르완 윌리엄스는
1) 세례,
2) 성경,
3) 성만찬,
4) 기도
라는 그리스도 인이 되면서 행하는 기본적인 행위들을 바탕으로 그리스 도인 됨에 대해 설명한다. 여기서 공통적으로 이야기하 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긴밀한 연관성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어떤 식으로든 연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로완 윌리엄스는 4가지 행위들이 어떻게 그리스도와 연관되는지 설명한다. 세례는 예수의 삶에 휘말려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을 읽는 것은 성경 이야기의 중심인 예수의 이야기에 사로잡혀 전체를 바라보는 일이다.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예수의 환영을 받고, 예수를 환영하고, 예수와 같이 사람들을 환영하는 삶에 참여하는 것이다. 기도는 예수의 자리에 서서 예수의 기도가 우리 안에서 일어나도록 하는 일이다 사례와 성경, 성만찬과 기도라는 그리스도인의 4가지 핵심적인 행위들은 다 그리스도와 연결되고, 연합되는 행위들임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