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재란이 한창이던 1597년 음력12월23일부터 1598년 음력1월04일까지 벌어졌던 1차 울산왜성 전투
정유재란 발발 이후 왜군의 별탈 없이 진행되던 침공 계획은 1597년 음력 9월16일 명량해전으로 인해 차질을 빚게 되었다.
결국 진격을 멈춘 왜 수군에게서 보급을 받을 수 없게된 왜 육군은 전면적으로 후퇴를 감행하였다.
원정군의 장수들은 너무 길어진 전쟁기간에 질려 본국으로 철수하고 싶어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철수불가 명령에 해안가 인근 지역에서 왜성들을 쌓고 전투를 피하며 농성 준비에 들어갔다.
이렇듯 왜군의 기세가 꺾여 전쟁의지를 모두 잃은 상태였지만 아직 조선에 남아있는 왜군은 상당한 숫자였으며, 이것은 매우 위협적이었다.
따라서 조명연합군은 이를 모두 제거하여 전쟁을 끝내기로 결심하였다.
조명연합군이 최우선 함락 목표로 삼은 곳은 가토 기요마사가 주둔 중인 울산왜성이었다.
부산에서 가까운 울산왜성은 아군이 점령시엔 왜군의 본거지인 부산을 직접적으로 압박할 수 있었고 반대로 계속해서 울산을 왜군이 점령하고 있게 된다면 부산으로 상륙한 왜 원군이 쉽게 북상할 수도 있었다.
이러한 전략적인 목적 이외에도.순천에 주둔하여 조,명과의 화친협상에 적극적인 고니시 유키나가와는 달리 가토 기요마사는 호전적인데다가 임진년에 조선의 왕자 둘을 사로 잡는등 조선에 굴욕을 준 인물이었기때문에 가토를 제거하여 상징적인 이득도 보자는 생각이었다.
조명연합군은 이 작전에 심혈을 기울였다.
명군 부총병 양호가 이끄는 정예군단 3만6천, 조선도 도원수 권율이 이끄는 정예병 1만이 넘는 병력을 투입하였다. 총합 4만 7천에 가까운 병력
조명연합군이 단일 전투에 이 정도 대규모 병력을 투입한 것은 1593년 4차 평양성 전투 이후 처음이었다.
연합군 본영은 경주에 설치되었고, 각지에서 화포와 병장기를 비롯한 군수품과 정예병들이 경주로 모여들었다.
동시에 명군은 경상도 주요 육로를 차단하여 혹시 모를 적의 구원시도를 차단하려 하였고, 순천을 비롯한 전라도와 경상도 각 지의 왜성을 동시에 공격하며 연합군의 주요목표를 헷갈리게 하는 양동작전을 펼쳤다.
가토 기요마사 역시 연합군의 움직임에 잔뜩 경계하며 전투를 대비하는 한편 인근 지역의 왜군과 연계를 강화하려 하였다.
하지만 왜장들은 모두 자신들이 연합군의 목표가 될까 우려하여 연계에 소극적이었고, 결국 가토는 자신의 직속부대 1만 6천으로 수비하기로 하였다.
음력 12월23일 연합군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울산왜성의 외곽방어를 맡은 병산성과 언양성은 순식간에 울산과의 연락이 끊겼고 가장 가까운 왜성인 서생포왜성 역시 울산과의 연락이 두절되었다.
자신의 부대를 도울 수 있는 왜군병력과 모두 연락이 두절되자 당황한 가토가 상황파악을 하기도 전에 이미 연합군은 울산왜성을 빽빽하게 포위하였다.
하지만 이번 전투는 연합군에게도 쉬운 전투가 아니었다.
개전이후부터 그때까지의 대부분의 공성전은 왜군이 점령한 조선성을 다시 탈환하는 전투였었다. 때문에 조선군은 그나마 수월하게 성을 공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전투는 왜군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축조된 왜성에서 벌어졌으며, 연합군이 생소한 왜성의 축조 형식에 당황한 반면 왜군은 익숙하게 공격에 대응할 수 있었다.
연합군 역시 화포로 울산왜성에 포격을 가하여 왜군의 피해도 급증하였으나, 당시 화포의 화력은 성벽을 무너뜨리기엔 역부족이었으며 화약 보급 역시 차질을 빚어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진 못하였다.
결국 예상치 못한 피해에 명군 부총병 양호는 잠시 병력을 뒤로 물렸다.
그리고 직접적인 공성은 포기하고 울산왜성 인근의 모든 우물을 메우고 강줄기를 틀어막았다. 울산왜성의 병력을 고사시키려는 계획이었다.
이는 울산왜성의 왜군에게 치명적으로 다가왔다.
성이 축조된지 얼마 되지도 않았었기 때문에 당시 울산왜성에는 식량과 식수가 비축되지 않았었고, 성내에 우물 하나 없었으며, 설상가상으로 성 축조에 동원된 인부들마저 성안에서 빠져나가지 못해 식량을 축내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왜군은 식량과 식수가 떨여저 피와 오줌을 먹는 등 처참하게 버텼으며 가토 역시 천에 고인 물을 짜마시는 등 상황이 좋지 못하였다.
참다못한 가토가 병력을 이끌고 식수를 구하기 위해 태화강 방면으로 돌파를 시도했으나 연합군의 반격에 큰 피해를 입고 포위망 돌파를 포기하였다.
하지만 연합군 역시 시간이 없는건 마찬가지였다.
각지의 왜군이 전의가 없다지만 그 수는 연합군을 압도하였었고, 결국 양호는 다시 공세를 가하기 시작했다.
음력12월28일 울산왜성의 외성이 함락당했다.
가토가 이끄는 왜군은 내성으로 들어가 결사항전을 다짐하였으며 가토는 함락을 대비하여 할복을 준비하였다.
사실 왜군의 울산왜성 구원시도는 전투 초기부터 꾸준히 이어졌었다.
제일 먼저 서생포왜성에서 출발한 왜군은 진격로를 차단하고 있던 연합군에게 전멸당했으며 다른 곳에서 소규모로 출발했던 병력들 역시 육로를 차단한 조명연합군에 의해 피해를 입으며 발이 묶인 상태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연합군의 목표가 울산왜성인게 확실해지자 각지의 왜군이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울산왜성의 구원에 나섰다.
나베시마 나오시게, 모리 카츠노부, 다치바나 무네시게, 히치스카 이에마사 등이 각자 병력을 이끌고 울산으로 향했고, 가토와 사이가 좋지 않던 고니시 유키나가도 순천에서 병력을 이끌고 구원에 나섰다.
그 병력이 모두 합해서 8만에 육박했다
연합군 역시 공성병력을 상당수 뒤로 돌려 진격로를 차단하고 있던 부대들을 보강하였지만, 결국 왜의 지원부대들에게 경로를 차단한 부대들이 큰 피해를 입어 더 이상 원군의 진격을 막을 수 없었던 조명연합군은 공성을 포기하고 철수를 개시했다.
조명연합군은 퇴각을 하면서도 퇴로에 복병을 배치하고 함청을 설치하는 등 왜군에게 피해를 안겨주며 퇴각하였지만, 결국 조명연합군은 1만이 넘는 전사자를 내는 패배를 하고 말았다.
가토 기요마사의 병력 1만 6천 역시 전투가 끝난 이후에는 500여명만 남는 큰 피해를 입었으나, 울산왜성은 지켜내는데 성공하였고, 조명연합군의 회심의 일격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며 전쟁이 조금 더 길어지게 되었다.
종전 후에 귀국한 가토 기요마사는 이때의 경험이 영혼까지 박혔는지, 구마모토 성에 방의 다다미는 토란줄기로, 우물은 120개, 성 곳곳에 조롱박을 두는 기행을 펼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