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고원(高原)에서
대홍수 이후 인간은 높은 곳에 안전한 거처를 정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파미르고원이 인류문명의 발상지라는 환단고기(桓檀古記)의 주장도 있다. 어찌하든 고지대가 외부의 적으로부터 방어하기가 편해서인지, 도시나 성읍도 구릉이나 언덕에 자리 잡았다. 독일의 함부르크(Hamburg, ‘습지 Ham 위에 지은 성 burg), 하이델베르크(Heidelberg, 월귤나무 Heidel 언덕 berg), 이스라엘의 텔아비브(Tel Aviv, 봄 Aviv의 언덕 Tell) 등이 그러하다.
우리의 옛 부여(夫餘)나 고구려의 선조들은 추수가 끝난 10월 상(上)달 좋은 날, 높은 언덕에 올라 하늘에 감사의 제례(祭禮)를 올린 후, 축제(祝祭)로 즐거워했던, ‘축제하는 인간’(Homo Festivus)이었다.
이제 산수(傘壽)의 연수에 다다르는 우리는, 오늘 더할 수 없는 청명한 가을날, ‘노을 언덕’에 올랐다. ‘하늘 언덕’보다 ‘노을’이 우리에게 더 어울리는지, 저토록 평안하게 이어지는 들판에서 강 넘어, 지는 해를 바라보기에는 더 이상 좋을 수가 없다.
손에 손에 일용할 양식과 즐길 음료가 가득한 비닐봉지를 들고 늙은 이무기 같은 맹꽁이 열차를 타고 느릿느릿 가을 들판의 풍광을 감상하며 언덕으로 오르는 모습은 참으로 느리게 산다는 즐거운 의미를 하늬바람으로 확인하는 소풍 풍경이었다.
그 노을공원 가는 길, 쓰레기 소각장 입구 현수막이 슬펐다. 아마 지하로 소각시설을 옮길 계획이 있는지,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게 됨을 반대하는 노무자들의 절규가 들리는 듯했다. 문득 수메르 신화에 나오는 하급 신들의 폭동이 생각났다. 환단고기에 의하면 환국(桓國)이 경영하던 12개 국가 중 서쪽 끝인 메소포타미아지역에 우루국(虞婁國)과 수밀이(須密爾)국이 있었다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수메르이다.
신화에 의하면 지구에 처음 착륙한 신(神)들 중, 하급 신인 아눈나키들은 컴컴한 지하 광산에서 금을 캐는 중노동을 하게 되자, 이 고통을 이기지 못해 폭동을 일으키게 된다. 이에 상급 신들은, ‘원시적 노동자’를 창조하여 그들로 하여금 아눈나키의 일을 대신하게 하자는, 지혜의 신인 안키의 제안을 받아들여, ‘원시적 노동자’를 창조하기로 한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인간(Man)’이라고 부르게 한다는 수메르 신화 이야기이다.
이처럼 인간이란 노동의 목적으로 이 땅에 나온 신의 선물인지도 모른다. 이제 그 과중한 일의 책무를 끝낸 우리는 이제 자유인이다. 어쩌면 우리가 이 땅에서의 모든 면에서 마지막 세대인지도 모른다. 가치 있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엇을 하든, 거리낌이 없는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