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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말 갑작스러운 폭설로 국립공원 빗장이 잠기는 바람에 미뤘던 육십령~남덕유~백암봉~신풍령(빼재) 구간을 지난 3일과 4일 다녀왔다. 승용차를 몰아 3일 오전 8시 18분쯤 육십령 휴게소에 차를 댔다. 휴게소 화장실에서 큰일을 보고 30분쯤 들머리에 들어섰다. 육십령~삿갓재 대피소는 11km 안팎이라 그리 긴 구간이라 할 수 없는데 할미봉~서봉~남덕유 구간이 힘들다고 해 살짝 겁을 먹었다.
서울 서초동 남부터미널을 오전 7시 40분 출발하는 고속버스 타면 무주에서 택시를 불러 육십령에 이르면 11시를 훌쩍 넘길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10시간 산행을 각오한다면 밤 9시쯤 대피소에 들어갈 것이 뻔해 민폐도 이만저만 아닐 것이라 판단해 어쩔 수 없이 승용차로 육십령까지 달려야 했다.
아니나 다를까, 육십령 들머리에서 소개 글을 읽고 있는데 대피소에서 언제 어느 곳으로 들머리를 잡느냐고 문자로 물어온다. 그들 나름대로 예상 도착시간을 미리 파악하고 너무 늦을 경우 다른 대책을 강구하려는 것 같다. 늘 덕유산 대피소를 예약하면 있는 일이라 낯설지 않았다.
앞서 소개했던 '백두대간을 그리다' 저자인 김태연 선생 일행은 이곳을 대간 종주 첫 코스로 잡아 무척 힘들었다고 돌아봤다. 김 선생은 서봉과 남덕유의 악명은 익히 알고 있었는데 그 앞에 할미봉이 간단치 않다는 점을 간과했다고 털어놓았다. 해서 주로 영각사 쪽에서 남덕유로 바로 올라서는 길을 자주 이용했던 나도 할미봉 초행이 상당히 부담스럽게 다가왔다.
사실 힘들긴 했는데 그렇다고 김태연 선생이 털어놓듯 온몸의 기력을 쏙 빼놓을 정도는 아니었다. 출발한 지 30분쯤 되자 걸어온 대간 길의 윤곽이 조망되기 시작했다. 오늘 걸은 길을 부드럽게 물결치듯 했다. 온통 연두색 잔치다. 중간중간 대간을 파고든 채석장 흔적이 안타까움을 주긴 하지만 부드러운 능선의 아름다움마저 지우는 것은 아니었다.
할미봉(1026m)까지 2.1km다. 한 시간 만에 정상석을 만났다. 시커먼 돌에 붉은 색 글씨로 '할미봉'이라 적어넣은 것이 인상적이었다. 정상을 뒤로 하고 계단이 시작되는데 멀리 서봉~남덕유 능선이 좍 펼쳐진다. 산새들이 우짖는다. 잘 왔다! 덕유!
서봉(1492m)까지 4.6km는 안온한 능선이 물결치듯 해 한달음에 내달릴 것 같았는데 상당히 힘들었다. 경남 덕유교육원 삼거리가 나올 때까지는 평온했는데 그 뒤로는 고개를 하나 넘으면 그 다음에 뭔가 긴 것이 펼쳐졌다. 할미봉 가까운 곳에서는 보이지 않던 지리 연봉이 서봉 가까이 갈수록 조망되기 시작한 것이 위안이었다. 지리와 덕유를 잇는 백운산 자락들이 상당한 위용으로 다가온다. 서봉의 조망감은 남덕유 못지 않다.
남덕유 정상 오르는 길과 월성재로 직행하는 갈림길이 나온다. 배낭을 내려놓고 갈까 하다 그냥 메고 정상에 올랐다. 첫 번째 갈림길에서 10분쯤, 두 번째 갈림길에서 100m 오르면 정상이다. 늘 영각사에서 큰힘 들이지 않고 올랐던(3.4km 밖에 안 된다_ 남덕유를 할미봉부터 서봉 거쳐 오르니 감회가 또다르다. 지나온 대간 길과 앞으로 대간 길을 한번에 휙 돌아보니 감개 무량하다. 걸어온 길이 마치 물결치듯 일렁이며 다가온다. 저 많은 길을 내가 걸었다니, 믿기지가 않는다. 또 멀리 백암봉에서 향적봉으로 이어지는 주능선과 그 앞 백암봉에서 갈라지는, 앞으로의 대간 길이 얼마간은 낯익다. 이곳 덕유 구간을 빼놓고 신풍령~큰재까지 걸어봤기 때문이다.
월성재까지 내려섰다가 삿갓봉(1419m)까지 올라간다. 여기도 부드러워 보이지만 막상 발을 들이면 간단치 않다. 아무리 힘들어 보이는 능선도 한걸음 한걸음 내디디면 아니 닿을 수 없고, 아무리 쉬워 보이는 능선도 한걸음 내딛기가 힘들다는 진리를 되새긴다. 삿갓봉 오르는 일이 여간 힘들지 않다. 300m 앞두고 갈림길이 나오길래 배낭을 내려놓고 올랐다. 파리 지옥이다. 일분 일초도 머무를 수 없을 정도로 들끓는다. 얼른 인증샷 찍고 내려왔다.
삿갓재 대피소에 도착하니 오후 5시 시보가 울린다. 오전 8시 30분 출발했으니 8시간 반 이 걸렸다. 만약 고속버스와 택시를 이용해 오전 11시 30분 출발했다면 정말로 밤 8시쯤 대피소에 도착, 한 시간 만에 저녁을 해치우고 밤 9시쯤 잠자리에 들어야 했을 것이다. 옳은 판단을 내린 것 같아 뿌듯했다.
저녁 먹을 벤치를 정해두고 아래 삿갓샘에 내려갔다. 지난해 7월 희용, 정형, 영수 형님들과 올랐을 때 이곳에서 바가지로 물을 퍼 시원하게 냉수욕을 했던 기억이 있는데 삿갓샘은 식수를 받는 곳으로 바뀌어 있었다. 쫄쫄 나오는 물을 수건에 적셔 땀으로 얼룩진 상체를 씻고, 발에 차가운 물을 갖다대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5시 반쯤 식사를 시작해 햇반에 게눈 감추듯 해치웠다. 오르는 길에 자주 마주쳤던 내 연배보다 조금 위쪽의 아저씨와 벤치를 나눠 썼는데 어떤 70대 중반쯤 보이는 아자씨가 그런다. "세상에나, 옛날 화장실 있던 자리에서 밥 먹는 사람들이 다 있구나야!" 뭐래? 왜 저래? 산에도 별 희한한 사람이 다 있다. 그 할배는 저녁 내내 주위의 등산객들에게 자신이 얼마나 풍부한 산행 경험이 있는지 으스대고, 다음날 새벽에 보니 남들 곤히 잠든 틈에 문 하나 사이로 온갖 잡동사니 펼쳐놓고(남들이 방문 열고 나오기도 민망하게!) 배낭을 꾸리고 새벽 3시에 취사장에서 라면 끓여 면발을 후루룩 집어넣고 있었다.
대피소는 많은 것이 개선돼 있었다. 화장실이 무척 깨끗해졌고 사용하기 편리했다. 슬리퍼로 갈아 신고 샘에 세수하러 가는 것도 용인했다. 해서 저녁을 먹은 뒤 노을도 구경하고 샘에 양치질하는 것도, 뒤쪽 언덕에 올라 산울림의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를 흥겹게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정말로 잠을 한숨도 못 잤다. 밤 9시 소등해 잠이 얼핏 들었는데 11시 몇분인가에 잠이 깼다. 누군가 뒤척이는 소리, 바스락 거리는 소리, 화장실 다녀오는 소리, 잠결에 뭔가를 마찰시키고 떨어뜨리는 소리 등등이 몰려왔다. 눈만 감고 누워 있었다. 얼핏설핏 잠이 들었다가 깨곤 했는데 나는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는데 남들은 전혀 그러지 않는 것 같다. 새벽 1시쯤 화장실 다녀오는데 도심 유흥지에 있을 법한 '야간산행 금지' 네온 사인이 새롭다. 별이 많다. 오늘 날씨 괜찮겠다 싶었다.
4일 새벽 4시 출발했다. 무룡산 일출을 놓칠 수가 없어서였다. 전날 서울에서 내려올 때 보니 6시도 안돼 태양이 중천에 올랐던 터라 마음이 바빠졌다. 실은 새벽 3시 조금 넘어 출발할 수 있었는데 대피소 직원들이 시간을 지켜달라고 했던 것을 어기고 싶지 않았다. 헤드랜턴 충전량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웬걸, 방전됐는지 금방 나가 버린다. 하는 수 없이 핸드폰 손전등을 켰다.
무룡산 오르는 길은 조금만 오르면 동쪽으로 여명이 터올라 30분만 손전등에 의존하고 금방 꺼버렸다. 상현 달인데 사진에는 마치 보름달처럼 나온다. 늘 보는 바위 모양이지만 사람 옆얼굴이 더욱 또렷하다. 무룡산(1491.9m) 오르는 길은 나 혼자다. 뒤를 돌아보면 남덕유 등에 불빛이 번쩍이는 것 같은데 무룡산 일대에서는 나 혼자였다.
새벽 5시 15분 무룡산 정상에 올랐다. 지난해는 상당히 힘들었던 기억이 있는데 이날은 홀가분하게 올랐다. 사과 한 알에 단팥빵, 약과를 먹고 물을 끓여 커피를 탔는데 뒤쪽 기운이 심상찮아 고개를 돌렸는데 해가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있다.
사실 정상에 오른 뒤 일출에 대한 기대가 크지 않았다. 동쪽 하늘이 흐릿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난해 아슬아슬하게 일출과 거의 동시에 정상에 도착해 탄복한 것과 달리 이날은 도착한 지 15분쯤 뒤 안락하게 일출을 기다렸는데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제대로 일출을 감상했다. 산그리메가 아름답다. 그래 이 맛에 덕유 자락을 찾는 거지.
부드러운 능선을 한 시간쯤 내려오니 칠이남쪽때기봉(1433m)을 만난다. 무룡산과 동엽령의 딱 절반 지점이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이곳의 조망미도 대단하다. 칠연폭포 남쪽에 있는 봉우리란 뜻에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는데 이곳에서 내려오면서 정말 믿기지 않는 일을 겪었다.
지난해 7월 동엽령 데크에서 만났던 귀인을 다시 만난 것 같다. 희용, 정형, 영수 형과 동엽령 데크에서 쉴 때 대간 종주꾼들을 위한 배낭 등의 장비를 만드는 황산이란 분을 만났다. 그런데 10개월 만에 나 혼자, 그 분 혼자 다시 만난 것 같다. 칠이남쪽때기봉에서 내려오는데 누군가 바지런히 올라온다. 서너 걸음 앞에서야 아, 그분이구나 싶었는데 워낙 고개를 푹 숙이며 올라오셔서 아는 척을 하지 못했다. 옆으로 스치며 확신이 들었다. 물론 내 착각일 수도 있지만 몸집이나 얼굴, 장딴지 아래 근육 모양 등이 그분이었다. 하지만 확신할 수 는 없다. 10월 산티아고 순례길에 그분이 만든 '버닝 칸' 배낭을 매고 갈 생각인데 그분을 또다시 이곳에서 만나다니, 대단한 인연이라고 나혼자 생각했다.
백암봉(1503m)에 이르니 오전 8시 25분이었다. 무룡산에서 이곳에 오기까지 도중에 20명 정도를 만났다. 동엽령 도착해 알게 됐는데 송계사 쪽에서 올라온 듯했다. 향적봉 대피소에서 출발한 이들인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 같다. 5분 넘게 정상에서 호젓하게 촬영할 기회를 기다렸다가 촬영하고 횡경재 쪽으로 내려섰다. 오른쪽으로 가야산, 왼쪽으로 속리산이 단연 우뚝하다. 이곳의 산그리메 조망은 대단했다.
귀봉(1455m)까지는 편안했다. 그 뒤 횡경재, 싸리등(덤)재에서 송계사 내려가는 길을 택하지 않고, 못봉(1302m)까지 내달았다. 오전 10시 30분쯤 시장끼가 몰려와 맨발로 퍼질러 길가에 앉아 대피소에서 데워온 햇반으로 이른 점심을 들었다. 가벼운 배낭 차림의 산행객이 지나길래 사과의 뜻을 전했더니 괜찮다고 했다. 한눈에 봐도 지역의 등산 고수였다. 우리는 매년 기념하듯 이곳을 찾는데 저이는 그저 마실가듯 덕유 자락을 누비는 것이리라.
월음령 지나 구천동 계곡으로 뻗은 자락들을 옆으로 쳐다보며 대봉(1263m)으로 올랐다. 대봉은 정상이구나 싶으면 또하나의 무명봉이었다. 그러길 서너 차례 했던 것 같다. 이곳에서 상당히 힘들었다.
그 뒤 갈미봉(1211m)에서 다시 귀인을 만났다. 10시 30분쯤 택시를 불렀는데 두 시간 뒤면 신풍령에 내려설 줄 알았는데 여의치 않아 고민했다. 만만찮은 택시 비용 때문이었다. 다음지도에서 육십령으로 돌아가려면 6만 2000원을 지불해야 한다고 안내돼 있었다. 혼자서 이만한 비용을 치르기는 아까웠다. 갈미봉 내려오면서 뒤에서 계속 인기척이 느껴졌다. 돌아보면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나중에 보니 그이는 나를 앞지르지 않으려 조심했던 것 같다. 나이는 나보다 스무 살은 적어 보였고, 무엇보다 배낭이 단촐했다. 말을 건넸다. "이동 교통편 어떻게 하려고 하세요?" "영각사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택시 부르는 방법을 몰라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잘 됐군요. 같이 택시 탑시다. 난 육십령까지 가야 하는데 같은 방향이라 괜찮을 것 같군요." "그렇게 하시죠."
기사님에게 전화했더니 약간 망설이는 듯하더니 7만원을 달라고 했다. 신풍령까지 1.6km쯤 남아 30분 뒤 뵙자고 기사님에게 말씀드렸다. 그런데 쉽지 않았다. 여기도 요앞의 모든 산행 종착지 근처처럼 끝날 것 같으면서도 끝나지 않았다. 이제 마지막 오르막이겠지 생각하면 또 하나가 나타난다.
오후 1시 20분쯤 택시 기사와 통화했으니 2시쯤 도착해야 했는데 택시가 막 도착해 돌리고 있었다. 그런데 택시를 함께 타기로 했던 일행은 오늘 산행이 무려 27km라고 말했다. 흠칫 놀랐다. 영각사에 차 대놓고 새벽 3시 40분 출발해 남덕유와 삿갓재 거쳐 무룡산~동엽령~백암봉~횡경재~신풍령을 걸어 나를 추월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막바지 신풍령에 이를 때는 내 발걸음에 맞춰주는 여유까지 부렸다.
택시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 대단한 산행 능력이라고 칭찬했다. 그는 내가 2만 5000원 내라고 했더니 3만원을 내겠다며, 그래도 인터넷에 안내된 5만원보다 절약했다고 했다. 나로서도 6만 2000원 이상을 각오했던 것을 4만원만 냈으니 상당한 절약을 한 셈이었다.
무주 무풍면에서 농사를 짓는 틈틈이 개인택시를 운행하는 이제수 기사님(010-3689-6660)이다. 그동안 백두대간을 하면서 이름을 익히 들었던 기사님이다. 새벽 3시 30분에 우두령이나 부항령 등에 데려다 달라고 전화를 해서 잠을 깨워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는 분이었다. 우리 두 사람을 태우는 일도 어찌 보면 괘씸해 할 수 있는데 너그러이 받아주셨다. 이 기회를 빌어 다시 감사의 말씀 드린다.
기사님에 따르면 무주에서 올라 경남 거창군 북상면으로 넘어가는 도로는 2년 전 산사태로 무너져 폐쇄됐다고 했다. 중앙정부의 도움 없이 지자체 재정만으로 도로를 복구할 여력이 없어 그냥 놔두는데 네비게이션 어플리케이션(앱)들도 정상적으로 드나들 수 있는 것으로 안내돼 있어 산행객 중에 차를 대놓고 무려 2km를 산길로 걸어 이곳 신풍령까지 올라오는 고생을 한다고 했다.
이틀 동안 30.7km를 걸은 뒤 경북 상주 큰재로 넘어가 속리산 아래 일정을 이어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출발할 때 날씨 예보와 달리 5일 오전부터 상당한 비가 예상된다고 바뀌었다. 해서 신풍령에서 택시로 한 시간 걸려 도착한 육십령에서 곧바로 서울로 돌아오게 됐다. 연휴 첫날이라 고속도로 곳곳이 정체를 이뤄 4시간 30분 가까이 걸려 귀경했다.
어버이날을 앞당겨 다음날 딸 부부와 점심을 들었는데, 딸은 숫기 없는 아빠가 산행 도중 낯선 이를 붙잡고 함께 택시 타자고 했다는 것을 영 믿지 못하는 눈치다. 나 역시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