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코룸은 함경도 홍원(洪原)이다.
1.
미국(美國) 예일대학 역사학과(歷史學科) 교수인 조너던 스펜스(Jonathan D. Spence)는 미국 중국사 학계를 대표하는 역사학자이다.
그는 2000년 <칸의 제국>이란 책을 출판해 우리에게 다가옴으로써 몽고의 카라코룸 위치가 어디였는지를 정확히 알려주고 있다.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을 정밀히 분석하면서, 그는 1253년 프랑스국왕 루이9세의 특명으로 몽골의 수도 카라코룸에 간 프란체스코회 수사인 뤼스브루크의 빌렘(Willem van Ruybroeck)을 인용하면서 그가 도착한 카라코룸이 중국 북서쪽 국경지역에 위치해 있었다고 명확히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우리에게 알려진 몽고의 카라코룸의 위치는 아래 지도와 같다
몽고의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서남쪽으로 320km정도 떨어진 항애산맥의 기슭아래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물론 이는 1924년 울란바토르가 형성되면서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임은 부언의 설명이 필요없다.
2.
다음으로 카라코룸(Kharakorum)에 대한 백과사전의 설명은 어떤지 검토해보면 다음과 같다.
<몽골제국의 태종(太宗) ·정종(定宗) ·헌종(憲宗) 시대의 수도.
중국의 문헌에서는 '각라화림(喀喇和林)', '화림(和林)', '화령(和寧)' 등으로 쓰인다. 1235년 몽골제국의 제2대 황제 오고타이가 몽골고원의 중앙부에 해당하는 오르강(江) 상류 우안에 건설한 지역이다. 이후 정종(귀위크)과 헌종(몽케)까지 3대, 약 20년에 걸쳐 몽골제국의 수도로 번성했으며, 유라시아 각지에서 많은 사절·전도사·상인 등이 모여들었다. 5대 쿠빌라이가 수도를 중국 내부에 있는 대도(大都: 北京)로 옮긴 후 몽골의 옛 도읍지 또는 화림행성(和林行省)의 소재지에 불과한 지방 도시가 되었다.
원나라가 멸망하고 북원(北元)이 일어났을 때 다시 수도가 되었으나, 이후 역사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1889년에 유적이 발견되고 1948∼49년 러시아 고고학자의 조사로 전모가 밝혀졌다. '에르데니 주(Erdeni Dzu)'라는 라마교 대사원 북쪽에 위치하며 거의 사각형의 조그만 지역으로서 남쪽은 약간 막혀 있고 동서 약 2,000∼2,500m 남북은 1,600m 정도의 규모이다. 서쪽으로는 '만안궁(萬安宮)'이라고 불리는 중국식 궁전과 귀족의 저택이 늘어서 있었다.
또 성곽의 동서남북에는 각각 문이 있었고 곡물 ·소 ·말 ·양 등을 파는 시장이 있었다. 거리는 동서남북으로 뻗어 있어 동문에서 서문에 이르는 큰 길 양편에 집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한쪽은 상인, 다른 한쪽은 직인(職人)의 주거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곳에서 대량의 도기(陶器) ·유리그릇 ·금속기(金屬器) 및 송(宋) ·금(金) ·원(元) 시대의 중국 화폐가 출토된 바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두산백과)
위 기록에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화림(和林)', '화령(和寧)' 이라는 단어다.
3.
화림(和林) 또는 화령(和寧)애 대해 성호사설(星湖僿說)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화령은 원(元) 나라의 옛땅이다. 원 나라의 위소(危素)는 “원 태조(元太祖)가 창업한 땅이라 하여 《화령지(和寧誌)》를 지었으니, 족히 그 증거를 삼을 수 있다.” 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오랑캐의 지명으로 국호를 주청할 리는 없을 듯하다.《동사(東史)》를 상고하건대, 고려 우왕(禑王) 9년에 이태조(李太祖)가 변방을 안정시킬 계책을 올린 가운데, “동쪽 경계에 있는 화령의 땅은 도내(道內)에서 가장 땅이 넓고 풍요합니다.” 한 말이 있다. 그 다음해에 원 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화령부(和寧府)에 오매, 임언충(任彥忠)을 파견하여 간곡히 효유하여 보냈는데, 길이 막혀 반 년을 머물렀으니, 대개 화령은 쌍성(雙城)에서 요동(遼東)의 개원부(開原府)로 직통하는 요충지이다. 그러니 그 땅은 실로 성조(聖祖)가 창업한 땅으로서 이른바 적전(赤田)이 이곳이니, 국호를 화령으로 주청한 것은 혹 이 연유가 아니겠는가?또 《高麗史》를 상고하건대, 恭讓王 3년에 화령 판관(和寧判官)을 제수했다는 말이 있고, 또 恭愍王 18년에 동쪽 경계에 있는 和州를 和寧府로 승격했는데, 이는 지금 永興땅이니, 선원전(璿源殿)이 이곳에 있다.--고전번역원
[적전(赤田) : 익조(翼祖) 이행리(李行里)가 고려 충렬왕 16년(1290)에 의주(宜州) 곧 덕원(德原)에 돌아와 거주하였는데, 이 거주하던 의주 땅을 적전이라 함. 적도(赤島 : 붉은 섬)에서 옮겨와 살기 때문임.]-한국고전용어사전
결국 화림, 또는 화령으로 불리는 카라코룸이 바로 함경도(咸鏡道) 영흥(永興)이라는 말이다.
4.
다음으로, 東亞日報 창간호 1920년 04.01. 애류 권덕규 선생의 사설 동아해(東亞解)를 보면 위의 내용을 부연해 주고 있다.
通古斯族을 古에 倍達族이라 하니 그 始祖檀君의 檀의 我語을 취함이요, 次에 肅愼族이라 하니 주신 곧 朝鮮을 표방함이며 一에 디대族 이라 하니 디대 곳 韃靼族이 蒙古라는 이름으로 세계에 웅비할 때의 稱인데 이에 대하여 異人族이 아닌가 회의할 이 있을지라. 잠간 설명할진대 龍飛御天歌 註에 디대는 靺鞨의 後, 女眞別種이니 陰山南北에 移居하야 塾生二部가 되었다 하고, 宋의 孟琪(맹기)가 元太祖 成吉思汗을 평하여 다대인 가운데에 특별히 생긴 이라 하였고, 洪原의 디대골(韃靼洞)은 女眞 곧 金人의 居生한던 洞名이며,
즉, 몽고의 칭기스칸이 함경도 홍원(洪原)의 달단동 즉 다대골 사람이라는 말이며, 따라서 곧 우리 조선민족의 일파일 따름이라는 것을 권덕규 선생이 증언해주고 있는 것이다.
몽고(蒙古)가 고려인(高麗人)가운데에서도 황비(皇妃)를 간택한 이유가 명확히 설명이 되는 것이다.
역사상 몽고(蒙古)라는 나라는 바로 삼한조선(三韓朝鮮)의 달단(韃靼)이라고 불리우던 일족(一族)이 창업해 만든 나라였던 것이다.
5.
그렇다면 역사상의 카라코룸 위치를 고증할 수 있다면, 이는 곧 조선조 함경도 영흥(永興)과 홍원(洪原)의 위치를 찾게 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의 대체적인 위치도 아울러 알수 있게 되는 것이다.
위쪽 지도는 아래쪽지도의 카라코룸 부분을 확대한 것이다.
1876년 , 뉴욕 H.W. Burgett and Company에서 발행된 지도로, 주요 제작자는 Beers, J.B. and Company 이다.
첫 번째 지도의 중간 위쪽에 명확히 Karakorum 이 보인다.
카라코룸이 현 몽고의 바이칼호의 좌측하단의 아래쪽에 위치한 것이 아니라, 일전에 고증한 장백산의 갈래가 서남쪽과 동남쪽 갈래로 나누어지는 중에서 강줄기(청천강-살수)를 따라 우측에 위치한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를 구글 지도를 통해 그 위치를 나타내 보면 아래와 같다.
6.
위의 지도들과 지명을 분석해 보면, 결국 시대에 따라 지명의 이동과 강역의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또한 평안도(平安道)와 함경도(咸鏡道)의 경계가 정확히 어디로 정했을지는 조금 더 연구를 해 보아야 할 것으로 보이며, 지금 현 상황에서는 위 지도에서 표시된 지역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서도 다대골 즉 달단동은 홍원현(洪原縣) 남쪽 30리에 위치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결국 칭기스칸이래로 몽고(蒙古)의 수도로 기능했던 카라코룸(함경도 영흥)이 5대 쿠빌라이가 등극하면서 서북쪽으로 500km 이상 떨어진 칸발리크로 천도(遷都)를 하게 되었던 것이며, 칭기스칸이라는 영웅은 고려(高麗)의 강역내에서 성장하여, 지방의 세력을 규합하고 군대(軍隊)를 형성해 고려에 반기를 든 지방의 제후정도가 된다고 분석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거대한 영토의 강군(强軍)을 보유한 고려(高麗)와의 갈등을 우려해 백두산의 좌측 즉 압록강 주위의 초원지대로 그 세력의 중심지로 옮기고, 세계정복을 달성하고 고려(高麗)도 굴복시켰던 것이다.
7.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대륙조선(大陸朝鮮)이 1918년부터 현 반도로 강제이주가 시작되고, 이후 조선사편수회에 의해 역사가 교열되고 조작되면서 까맣게 잊혀져 갔던 것이다.
위에서 인용한 기록들을 반도(半島)에 맞춘다면 결국 칭기스칸은 한반도 동북쪽 바닷가의 영흥(永興)에다 몽고(蒙古)의 수도를 세우고 세계(世界)를 통치했다는 이른바 지나가던 개도 웃을 황당한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물론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이나 중국역사지도집은 이러한 카라코룸에 대해 현 몽고(蒙古)에 모든 초점을 맞추고 교열하여 화림(和林)이라는 지명을 현 몽고의 한복판에 집어넣은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역사(歷史)를 감추려 해도 결국은 드러나게 마련인 것이다.
헐버트 선생의 말대로 “비난과 비방이 극에 달했던” 구한말, 세계열강이 합작해 조선(朝鮮)을 멸망시켜, 왜소한 반도(半島)로 그 역사의 강역을 강제로 규정하는 비운을 겪은 우리의 자화상이지만, 결국 악(惡)은 멸망하고 정의(正義)는 살아나는 것이 인류발전의 정당한 이치(理致)임을 우리가 믿는다면, 우리는 대륙조선(大陸朝鮮)의 부활을 꿈꾸며, 그 실천을 위해 열사람의 한걸음을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다.
2019.07.29. 松溪
첫댓글 안녕하세요. <송계>님!
좋은 글, 감사합니다.
대도(大都)는 자이산 호 북쪽에 있다는 말은 곧 발해의 북쪽에 있다는 말과 상통된다고 보아지네요.
고려 때 북경(대도)으로 향했던 옛 선인들이 노래했던 구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감사드리며, 늘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여름철 무더위에 건강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