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宗和會(종교간 화합을 위한 모임) 會報
푸른 들 소리 [제 13권 18호](통권 233호)(2011년 10월 15일)
독일의 초등학생
유리나
자세히 보면 여기 초등들도 바쁘기는 하다. 단지 문제는 서로 다른 항목으로 바쁘다는 것이다. 속셈, 컴퓨터, 피아노, 영어로 바쁘다기 보단 대개 스포츠로 바쁘다: 축구, 테니스 ... 그리고 스포츠 스쿨에 가입하면 매번 다양한 활동 (축구, ... 수영, 암벽 타기 등 ) 을 제공받을 수 있다. 수영을 중요시 하는 듯 하다. 올 가을 3학년에 (8살) 올라간 아들이 학기 초에 받아온 쪽지에는 무슨 무슨 '병'이 있는지 없는지 첵크 표시하는 항목이 있고, 마지막엔 아이가 - 다른 운동은 전혀 언급 없이 - 이미 수영을 완전히 할 줄 아는지도 첵크하는 칸이 있었다. 그 후에 보니 아니나 다를까 첵크만이 아니라 국민학교 3 - 4학년 내내 화요일은 오후 마지막 2시간 (90분)을 수영으로 보낸다는 것이다. 김나지움에서도 수영은 이어진다고 한다.
'너희 반 애들이 그럼 모두 다 이미 수영할 줄 알던?' 했더니, '응' 하는 것이 아닌가. (필자는 수영을 성인이 되어서야, 그것도 배우다가 중도하차 하여 반밖에? 못함) 그래도 한 두명은 못하는 애가 있겠지 했더니, 예의 그 러시아 부모를 둔 '산수만점' 아이만이 어둔하고 (그 어머니께서 아이를 올해서야 매 주 토요일 수영반에 가게 한다고 하시더니, 아마 이미 좀 늦게 시작한 것이 되어 아직 완전히는 못 배운 모양이다) 나머지 아이들은 다 수영을 한단다. 아들은 벌써 애기 때부터 수영장에 데리고 갔고, 시부모님의 주도로 3살때 정식 수영 (유료)강습 을 받았는데 - 8살, 3학년이 되자 이렇게나 학교에서 수영을 강조할 줄은 필자는 몰랐던 것이다.
독일에선 알파벳 쓰기나 숫자, 셈하기등의 선재학습을 '보통은' 안하는 걸로 알고있었기로 모든 것이 학교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었는데, 산수, 영어가 아니라, 이건 - 수영을 이미 모두들 선재학습을 했다는 말과 같지 않은가. '다른 애들이 모두 이미 ABC 는 물론이고 그보다 더, 다 배워서 오는데 우리 아이만 도저히 멍하니 앉아있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 울며 겨자 먹기로 취학전에 다 배워가야 한다면, 이 경우 ABC 대신에 '수영'을 대치하면, 똑같은 이곳의 상황이 될 것이다.
지구 양쪽을 우리 -저쪽으로 대충 가르면, 초등에서 어쩌면 이렇게 서로가 반대되는 과목에 치중할까 잠시 생각하게 된다. 재미있는 대조가 이루어진다:
산수, 영어 vs. 스포츠
이 곳 애들은 유치원부터, 또 방과 후 축구단이다 (가장 많은 수), 테니스다, 합창단, 음악 조기 교육
하면서 엄마들과 자전거로 이리저리 씽씽 이동하기 바쁘다 (좋아하는 악기를 고를 수 있는 기회는 누구
에게나 주어진다. 단지 계속하느냐 아니냐는 개인 선택이다). 겨울 방학이 되면 스키 강습부터 스노우
보드까지 또 운동이 기다리고 있다. 청소년이 되면 윈드 써핑 같은 좀 더 강도높은 운동이 얼마든지 기
다리고 있다. 외국 원정이 시작된다. 여기 부모들은 '운동에서 만난 친구가 단짝 친구'가 된다는 신념으
-----------------------------------------------------------------------------
발행인 : 장기홍 연락처 : 711-862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대일 2리 709
편집인 : 강병조 장 기 홍 ☏ 010-5558-4208
E-mail : changkhong@hanmail.net
로 아이를 좋은 운동 환경에 노출시키려고 한다.
초등 과외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촛점이 동양과 정 반대쪽으로 향해있다는 것이다. 때론 서양 장기등 좀 특이한 것을 배우기도 하지만 대개는 운동 종목 하나, 둘을 하면 그로써 만족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산수, 영어 선생님이 아니라 체육 선생님이 아이들의 과외 선생님이다. 일주일에 축구 2번, 음악 1번, 언어교정(Speech correction, 을 하는 아이들이 눈에 띈다) 1번, 하루는 휴식으로, 이미 일주일치 바쁜 프로그램이 되는 것이다. 휴일은 당연히 휴일로. 이렇게 되면 운동 2가지 시키는 것도 힘든 편이다. 독일은 더 활발하게 움직인다. 프랑스에서도 이토록 아이들과 부모들이 평소에 운동, 운동, 또 운동에 노력을 기울이는 것을 보지는 못했다.
당연히 이것은 그 사회 사고방식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각 진영 부모들의 '나중에 커서 남는 것이 무엇이더냐'에 대한 대답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1- 머리 좋은 놈 (좋게 말해 지능) 이 최고더라
2- 건장하고 힘센 놈 (외적인 위풍으로 상황 장악력, 건강)이 최고더라
아들은 '방학엔 재미있게 뛰어다니고 '놀아야' 한다고 선생님이 말씀하셨어'
'(이번) 주말엔 숙제가 없어'
'숙제 학교에서 다 하고 왔음!'
'산수 또 더하라고? 엄마는 너무해!'
이런 것이 아들이 매번 하는 말이다. 숙제는 거의 한시간 정도의 공부거리를 주는 걸로 알고 있다.
*****
주장1:
천재가 따로 없다, 노력이 최고다
아이의 노력과 부모의 희생정신엔 당할 자 없다
없는 재능도 노력하면 생길 수 있다
주장2:
모든 이가 수재가 될 필요는 없다.
그 나머지는 무엇보다 건강이 최고다
'천재'가 언제나 긍정적이지는 않다
타고난 (진정한) 재능(만)이 인공적인 가감없이 피어나게 하라
행복이란 무엇인가
대체로 이런 사고를 대표하는 것이 아닐까.
*****
어린이 성장 시기엔 무엇보다 육체적으로 무리없이 잘 자라도록 하는 것을 급선무로 하는 듯하다. 앞서 블로그 글에서도 말했지만 이런 '운동'분위기가 일생동안 계속만 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피사 스터디, Pisa Syudy'의 저조한 결과 이후 독일 초등도 1학년부터 시험을 (김나지움 입학에 적용되는 시험성적은 그러나 4학년 성적뿐이다) 쳐 점수를 매겨, 이제 조금씩은 압력을 가한다. 그러니, 이전같이 계속 '잘 놀고 잘 커라'하는 모토가 계속 유효한 동시에, 또 다른 한 편으론 소프트한 '점수 압력'이 더해지는 것이다.
아이들이 학년 말에 받는 작은 기록부엔 두 페이지 가득 빽빽이 선생님의 관찰 사항이 타이프 돼 적혀있고. 단지 두과목 점수: 독어, 산수 점수만이 맨 마지막에 적혀 있는데, 모두들 거기에 그리 연연해 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점수라기보단 'good)' 'very good' 등으로 적혀 나온다. 그러나 모두들 Very good 은 점수 1을, Good 은 점수 2 등을 나타낸다는 걸 안다).
아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성적표 받고 다들 조용했었는데, 단지 위에 수영에서 말한 그 두 부모가 모두 러시아인인 아이 하나가 성적표에 '통탄의 눈물'을 흘리더라는 것이었다. 우리 아들도 그 애와 잘 놀러 다니기 때문에 그 부모들을 다 아는데, 두 분이 다 교수급 수학 전공자다. 그래서 그 아이는 수학을 언제나 만점 맞았었는데, 그만 독어에서 1이 아닌 2를 받았음을 알곤 (부모님의 '올 백' 계획이 무산되자?) 그 자리에서 아이가 울음을 터트렸다는 것이다. 가정에서 평소 러시아어를 쓰면서 독어에도 1을 받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희망인데도 말이다. 그 외 아이들은 모두 다소간 덤덤했던가 보다.
초등 '자유분방 운동'시절이 지나갈 때, 이미 4학년 (9살) 때부턴 나사가 점점 쪼이기 시작한다. 김나지움이냐, 직업 학교냐, 그 중간이냐로 결정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선 직업학교를 나와도 노력하면 얼마든지 (잘) 살 수 있기 때문에 부모들은 아이의 '비 정규대학'적 장래에 대해서도 '이성적'으로 대처할 역량은 준비돼 있다. 바로 부모 자신이 대학을 가지 않고 결혼 이 때까지 '잘해온' 그룹의 한 명일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인생의 험한 길이 시간이 갈수록 앞에 얼마든지 놓여있음을 부모 자신이 잘 알고 있으니, 어린 시절만은 '파라다이스, 무풍지대'로 만들어, 잘 놀고 잘 자라게 (인생을 짊어질 어깨를 튼튼히) 하는 것일까. 김나지움과 대학으로 올라가면서 점 점 더 가파른 언덕이 되기 시작하며, 드디어 직장에선 그야말로 만만치 않다. 남편 동료 소프트 웨어 전문가들이 가끔 모여서 같이 일하는 경우가 있는데, 아침부터 점심시간 오후 1시까지 너뎃시간을 커피고 뭐고 마시지도 먹지도 않고 다들 일에만 매달리는 것이었다. 외국인인 나에게 과시적? 행동이었는지는 모르나 ㅎ ㅎ , '커피 ?' 했더니 '일할 땐 안(마시고 안)먹어' 하는 것이었다.
관광객들이 볼 땐, 저녁 7, 8시만 되면 거리가 한산하고 열린 가게가 없다'고 한다. 하루종일 그야말로 치열하게 일한 후에는 거리를 친구하기보단 모두들 가정의 따뜻함에서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기를 원할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내일, 또 하루, 꽉 찬 날을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동북공정’, 우리가 알아야 한다.
강병조
금년 추석 때 연변과 백두산을 다녀왔다. 며칠 뒤 신문에서 중국의 동북공정이 날로 심해지고 있다는 기사를 읽었다. 피가 거꾸로 치솟았다. 필자는 동북공정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 보아서 짐작은 하고 있었으나, 정확한 내용은 잘 몰랐다. <중국 ‘동북공정’ 고구려사 연구논저 분석>이라는 책을 샀다.
조선일보 보도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2011.9.19).
중국이 2004년 8월 한·중 외교부 합의를 통해 고구려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는 왜곡된 주장을 중단·시정키로 약속한 뒤에도 각종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왜곡된 주장을 계속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중국은 외국인들이 자주 찾는 재외 공관의 홈페이지에 버젓이 고구려사를 자신들의 역사로 소개해놨다. 주(駐)프랑스·호주·우크라이나 대사관은 “고구려는 중국 고대 변방의 소수민족 정권”이라고 기술했다. 이 가운데 주호주 대사관은 “고구려는 중국 역사상 중원왕조 관할 범위 내에서 주로 활동했으며, 역대 왕조와 종속관계를 유지하며 중원 왕조의 제약과 관할을 받았던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했다.
중국관영 CCTV는 홈페이지에 ‘중국 고구려 왕성’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고구려의 첫 도읍지 졸본성(卒本城)을 “중국 고구려 왕성”이라고 소개하고 “고구려는 중국 고대 변경의 소수민족 정권”이라고 주장했다.
지방정부는 그 표현이 더 노골적이며, 발해까지도 자신들의 역사로 부장하고 있다.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단둥시위원회 웹사이트 ‘단둥정협망’은 “압록강 유역의 산수는 한족이외 많은 소수민족을 양육했다. 고구려·발해국 같은 이러한 소수 민족들이 지방정권을 수립했는데, 그들은 줄곧 중원 역대 왕조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적고 있다.
고구려사 왜곡은 중국이 2002년부터 중국 국경 안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를 중국사로 편입시키기 위해 추진해 온 ‘동북공정’의 핵심 내용이다. 중국정부가 국가기관 홈페이지에 동북공정을 홍보하면서 왜곡된 우리나라 역사를 기술하는 것은 2004년 8월 한·중 양국 간에 맺은 ‘구두양해사항’합의에 어긋난다. 양국은 당시 외교차관 간에 ⑴ 중국 정부 차원의 고구려사 왜곡 중지·시정 추진 ⑵ 양국은 고구려사 문제의 해결 및 문제의 정치화 방지 노력 등에 합의했었다.
중국의 중·고등 역사교과서로까지 왜곡 주장 번질 조짐
중국 정부가 학술비를 지원해 만든 동북공정 연구물들도 2007년 이후 8종이 발간된 것으로 확인됐다. 교과부 산하 동북아역사재단은 “2007년 이후 동북공정 과제로 발간된 결과물은 모두 8종에 이른다”며 “이전엔 주로 중국사회과학출판사에서 발간됐으나, 2007년 이후 다른 출판사나 지방 출판사에서 발간되고 있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중국이 은밀히 동북공정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정부기관 전문가는 “중국이 2000년대 초반처럼 공식적으로 동북공정을 추진하지 않아도 될 만큼 이미 중국인들 사이에선 고구려·발해를 자신들의 역사로 인식하고 있다”며 “기정사실화하고 있다는 점이 더 심각한 것”이라고 했다. 국립민속박물관 하도겸 학예 연구사는 “중국이 다음 달쯤 고구려·발해뿐 아니라 고조선까지 자신들의 역사로 편입하는 내용의 중·고교 역사교과서를 발간할 가능성이 크다”며 “동북공정은 현재진행형”이라고 했다.
동북공정(東北工程)은 동북변강역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東北邊疆歷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의 준말이다. 동북지역이 역사ㆍ문화적으로 중국의 영역이었음을 주장하기 위해 시작된 국책 학술사업이며 역사 재해석 프로젝트이다. 공식적으로는 2002년 2월 28일 중국 사회과학원이 주축이 되어 시작했다. 중국정부 직속 최대 연구기관인 중국사회과학원 산하의 ‘변강사지연구중심(邊疆史地硏究中心)’을 주축으로 랴오닝(遼寧)ㆍ지린(吉林)ㆍ헤이룽장(黑龍江) 등 동북 3성이 공동으로 연구를 담당하고 있다. 소요 예산만 5년간 200억 위안(약 2조4000억 원)에 달하는 대규모 사업이다.
중국은 58개 소수민족문제는 중국 분열의 도화선이 될 수 있는 최고의 화약고이다. 중국은 이를 용해시켜 제련하자면 통일된 역사가 있어야, 중화사상으로서 구심점과 단합된 목표를 지향할 수 있다는 공산당식 국가 정체성 확립이 목적이다. 최근 진시황제의 재평가는 중국공산당이 산업화로 발전된 단위민족들의 독립의지를 사전에 제재하려는 의도로 나온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여기에는 중국 정부의 정치적 전략이 깔려 있다. 안으로는 사회 안정을 꾀하면서 밖으로는 ‘중화시대(팍스시니카 PaxSinica)’의 초석을 놓으려는 것이다.
동북공정은 고대 한국사의 무대이자 현대 조선족의 거주지인 중국 동북 3성의 역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키려는 것이 목적이다. 북한의 붕괴나 남북통일 등 상황변화에 대응하고 중국에 유리하게 상황을 끌고 가려는 것이다. 중국은 통일 한국의 만주지역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미리 차단하려는 의도를 깔고 있다. 한반도 통일 후 만주지역은 동요할 수밖에 없고, 지역분쟁 또는 지역 불안정의 원인이자 무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은 과도기 한반도에 대한 개입 여지를 동북공정을 통해 사전 포석을 하려는 의지도 있다고 분석된다.
동북공정이 다루고 있는 내용 중 고조선, 고구려, 발해 등 한국 고대사 관련 연구들이 한국사를 왜곡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중국의 의도대로라면 한국사는 시간적으로는 5000년 이상에서 2000년으로, 공간적으로는 중국 동북 3성+한반도에서 한강 이남으로 국한되게 된다. 이는 한국사의 근간을 무시하는 것이며, 중국 제국주의적 중화주의적 역사왜곡의 횡포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은 요나라, 원나라, 청나라의 역사도 중화의 역사로 짜깁기 하여 만들어버렸다.
동북공정은 고대 중국의 강역이론 연구, 동북지방사 연구, 동북민족사 연구, 고조선ㆍ고구려ㆍ발해사 연구, 중조(中朝) 관계사 연구, 중국동북변경과 러시아 극동지역의 정치 경제 관계사 연구, 동북변경의 사회안정 전략 연구, 조선반도의 형세 변화와 그것이 중국 동북변경지역의 안정에 미치는 영향 연구 등으로 나뉘어 있다.
시대적으로는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망라하며, 지역적으로는 중국의 동북지역 뿐 아니라 한반도 일부까지 포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V. <중국 ‘동북공정’ 고구려사 연구논저 분석> 조인성 외 지음. 동북아역사재단 기획연구 40. 동북아역사재단 출판. 2010년 11월 29일 출간.
이 책은 중국 동북공정의 대표적인 5권의 저술 내용을 기술하고 그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있다.
이 책은 2008년 9월에 손옥랑ㆍ손문범이 저술한 책으로서, 2002년부터 5개년 계획으로 추진된 ‘동북공정’이 마무리된 시점에 출간된 연구서로서 중국 측의 고구려 관계 연구의 정리된 시각이 반영된 결과물이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고구려 민족의 기원: 고구려는 중국의 군현에서 탄생한 소수민족으로서 그 주류는 고이(高夷)이며, 고구려 민족의 기원은 신석기시대부터 중화민족과 관련된다.
② 고구려와 중원과의 관계: 고구려가 존속한 705년간 중국은 양한ㆍ삼국ㆍ양진ㆍ남북조ㆍ수ㆍ당 왕조를 거쳤으나, 중원정권이 어떻게 바뀌었든 간에 고구려는 처음부터 끝까지 중원정권과 예속 관계를 유지하였다.
③ 고구려 문화의 기원: 고구려사에서 전개된 대부분의 문화는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
④ 고구려의 멸망: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 민족은 해체되어 역사의 무대에서 완전히 소멸되었고, 고구려 유민의 대다수는 중원에 흡수되었다.
『간명고구려사』의 문제점
① 연구방법에서 보면 최근에 발굴조사된 자료가 반영되지 않았으며, 문헌 자료의 이용은 사실의 나열에 치중해 있어 그에 대한 국내외 학계의 다양한 해석이 반영되지 않았다. 또한 사료비판 없이 해당 사료를 그대로 전재하여 자의적으로 해석하였다.
② 연구내용면에서 보면 각 장의 대부분에서 중원문화의 영향을 강조하는 것이 지나치다. 모든 면에서 고구려 고유의 특징을 최소화하거나 비하하고, 중원문화의 선진성과 영향을 강조하고 있다. 그 결과 고구려사의 실상을 제대로 복원하지 못하고 오히려 왜곡하였다. 또한 불완전하고 자의적으로 추산한 호구자료를 이용하여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 민족은 소멸되었으며, 고구려 역사는 그 유민의 대부분을 수용한 중국에 귀속되었음을 강조하여 사실을 왜곡하였다.
이 책은 2007년도에 손인걸ㆍ지용 공저로 발간하였다. 이 책의 주요 내용은 3가지로 구분되는데, 우선 신 자료로서 최근까지 현지조사가 미진하였던 분묘군들을 대상으로 자세하고 구체적인 규모 및 개별 무덤의 형식ㆍ크기 등을 학계에 보고하고 있다. 그리고 지안 지역에서 조사된 내용을 토대로 왕릉급 무덤을 추출하고 구체적인 피장자를 비정하였는데, 그 내용은 기왕에 학계에 공표된 중국ㆍ일본ㆍ한국 등의 여러 연구자들의 관점과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 있을 뿐 아니라 논증 과정의 근거 제시나 선행 연구에 대한 극복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아 학술적인 검토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지안 지역 벽화묘에 대한 편년관 역시 그와 같은 수준이다.
3. 양군(楊軍)의 『고구려 민족 및 국가의 형성과 변천』에 대한 비판적 검토:
양군은 중국학계의 고구려사 연구를 주도하고 있는 지린 대학 역사계(歷史系)와 고적연구소(古籍硏究所)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했을 뿐 아니라 30대 후반에 지린 대학 역사계 박사과정생 지도교수에 임명될 정도로 촉망 받는 학자이다.
더욱 양군은 중국정부 성립 이후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귀속시키는 견해를 본격적으로 제기했던 장박천(張博泉) 교수의 제자이기도 하다. 장박천은 이미 1985년에 “고구려는 한대(漢代)의 군현(郡縣) 구역에서 흥기하였고, 시종일관 중원(中原)이나 중원북방 정권에 번부(藩附)했고, 수ㆍ당의 고구려 원정도 침략전쟁이 아니라 통일적 다민족국가의 통일전쟁이었다”면서 고구려를 중국 왕조의 지방정권으로 설정한 바 있다.
양군은 이 책의 서두에서 고구려 전성기의 판도부터 설정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훈 강(훈 江)-압록강 중류 유역에서 발원한 고구려는 북쪽으로는 백두산-북류 쑹화강(第2松花江), 서쪽으로는 랴오둥(遼東) 반도, 남쪽으로는 용흥강과 한강, 동쪽으로는 동해안까지 판도를 확장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고구려 전성기의 판도를 훈 강-압록강 유역, 대동강 유역, 북류 쑹화 강 유역, 랴오둥 반도 지역 등 네 개의 권역으로 나누었다. 이러한 양군의 견해는 고구려 전성기의 실제 판도 가운데 남쪽의 한강 유역과 동해안의 영동지역, 그리고 동쪽의 두만강 유역 등을 제외한 것이다.
그런데 양군은 위 네 개의 권역 가운데 랴오둥 반도 지역은 중국 전국시대에 이미 중국화(華夏化)되었고, 대동강 유역도 진(秦) 말 이후에 중국화 되었다고 파악했다. 또한 발상지인 압록강 중류 유역이나 북류 쑹화 강 지역도 전설시대인 요(堯)ㆍ순(舜)ㆍ우(禹) 시기에 이미 동이인(東夷人)-황염계(黃炎系)의 대연맹에 예속되어 중원지역과 연락망을 취했고, 전국시대 중기에는 서주(西周)의 지방정권인 기자조선에 예속되었다고 파악했다. 고구려의 발상지뿐 아니라 전성기의 판도 전체가 한사군 설치 이전 곧 고조선 시기부터 이미 중국화되었거나 중국 왕조에 예속된 지역이었다는 것이다.
이로 보아 양군은 고구려 전성기의 판도 전체를 고조선 시기부터 중국영토였던 것처럼 설정하기 위해 한강 유역이나 두만강 유역을 고구려 영역에서 고의적으로 제외한 것으로 추정된다. 즉 양군은 자신의 논리상 고구려 이전부터 중국사의 범주로 편입할 수 있는 지역만 고구려 전성기의 판도로 상정하고, 그 이외 지역은 의도적으로 제외한 것이다. 그러므로 양군이 고구려보다 고조선-한사군 시기를 더 높은 비중으로 다룬 것도 고구려 전성기의 판도 곧 고구려사 전체를 중국사로 편입하기 위한 의도와 관련될 것으로 생각된다. 그럼 먼저 고조선사에 대한 양군의 인식체계부터 검토해보도록 하자.
고조선사와 관련하여 양군은 건국신화인 단군신화를 후대에 꾸며진 것이라며 취신하지 않고, 마치 고조선의 역사가 기자(箕子)로부터 시작된 것처럼 상정했다. 그런 다음 기자의 동래(東來)를 계기로 중국대륙의 선진문화가 한반도로 이식되고, 만주와 한반도 지역의 족속도 분화했다고 파악했다. 물론 양군이 단군신화를 부정하고 기자동래설을 취신할 만한 명확한 논거를 제시한 것은 아니다. 양군은 단군신화에 고구려 건국 이후 형성된 일부일처제나 천손족(天孫族) 관념이 포함되어 있고 불교나 도교적 용어가 등장한다는 사실을 근거로 4세기 이후에 탄생했다고 파악하면서 기자동래설의 사실성 여부에 대해서는 추호도 의심하자 않고 있다.
그렇지만 단군신화가 청동기문화를 기반으로 건국된 고조선의 정치체제와 지배이념을 반영한다는 사실은 이미 여러 논자에 의해 다각도로 검토된 바 있다. 오히려 은(殷) 말~주(周) 초에 활동했다는 기자의 동래설은 선진문헌에는 보이지 않으며, 전한(前漢) 초의 저작에 처음 등장한다. 더욱 『사기(史記)』에도 은본기(殷本紀) 등 기자와 관련된 거의 모든 기사에는 주 무왕(武王)이 은을 평정했을 때 기자는 은에 있었다고 나오며, 오직 송세가(宋世家)에만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에 많은 연구자들이 기자동래설은 실제 사실이 아니라 전한 초에 고조선 정벌 등과 관련해 꾸며진 이야기로 파악하고 있다.
이처럼 기자동래설은 단군신화보다 오히려 사실성 여부와 관련하여 많은 의심을 받고 있지만, 양군은 고조선사 나아가 만주-한반도 지역의 역사 전개와 관련하여 기자 동래를 가장 중요한 분기점으로 상정하고 있다. 가령 양군은 기자 동래 이전에 발해만 주변의 산둥 반도(山東半島)를 포함하여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 동이(東夷, 九夷)가 분포했는데, 이들은 여러 부족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풍속과 문화면에서도 공통점을 간직한 것으로 파악했다. 더욱이 랴오허(遼河) 이서(以西)의 동이가 기자 동래 이전인 하(夏) 초기나 중기, 은 후기에 중국대륙 방면으로 남하했지만, 랴오허 이동(以東)의 동이는 남하하지 않고 원거주지에 계속 머물렀다고 보았다.
이에 따라 랴오허 동쪽의 동이는 외부와의 접촉이 거의 차단된 채 원시적인 수렵채집 경제에 머물렀고, 민족이나 정치적 발전도 부족 내지 부락연맹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파악했다. 기자 동래 이전에는 한반도와 만주지역에 본격적인 농경사회나 정치체의 발전을 상정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반도 북부나 만주지역이 일찍부터 중국 왕조의 판도였던 것처럼 설정하기 위해 요(堯)ㆍ순(舜)ㆍ우(禹) 부락연맹시기부터 군사대연맹의 일부였고 하ㆍ은의 통치구역이었다고 보았는데, 이는 사료적 근거도 없을 뿐 아니라 기자 동래 이전에는 외부와의 접촉이 거의 없었다는 자신의 견해와도 상충된다.
이처럼 기자 동래 이전에는 한반도나 만주지역이 수렵채집 경제 단계의 부족사회로 상정되었기 때문에 ‘조선(朝鮮)’이라는 명칭도 처음에는 국명이나 족명이 아니라 단순한 지명으로 설정될 수밖에 없었다. 즉 ‘조선’이라는 명칭은 기자 동래 이전에는 현재의 대동강 유역을 지칭하는 지명에 불과했고, 기자 동래 이후 이 지역이 정치적 발전과 족속 분화와 더불어 비로소 국명이나 족명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다만 고조선의 중심지, 실제로는 기자의 동래 지역을 처음부터 한반도 내부로 설정하기 위해 대동강 유역이 일찍부터 다른 동이지역과 구별되어 새 토템을 가진 ‘조이(鳥夷)’로 불렸던 것처럼 상정했다.
양군은 기자의 동래를 만주와 한반도 역사의 출발점으로 설정한 것이다. 이에 양군은 기자 동래를 계기로 동이의 족속 분화가 본격화된 것으로 파악했다. 가령 기자는 은의 유민 5,000여 명을 거느리고 대동강 유역으로 이주했는데, 이들이 ‘조이’라 불리던 대동강 유역의 동이와 융합하여 조선만이(朝鮮蠻夷) 곧 양이(良夷, 樂浪夷)라는 새로운 민족공동체를 형성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대동강 유역 이동과 이북 즉 후대의 옥저-고구려-부여 지역의 동이는 예인(穢人), 한반도 남부의 동이는 한인(韓人)으로 각기 분화된 것으로 설정했다.
더욱 은 유민과의 융합으로 형성된 대동강 유역의 양이 뿐 아니라 북부의 예인도 중국대륙이나 기자조선의 영향으로 중원지역과의 공통성이 증대된 반면, 한반도 남부의 한인은 원래의 풍속을 많이 간직한 것으로 상정했다. 또한 중국대륙 방면 이주민의 이주는 기자 동래 이후에도 계속 진행되어 중원 이주민의 비중에 따라 각 지역의 차이는 더욱 심화되었고, 만주와 한반도는 하나의 민족을 형성하지 못했다고 파악했다.
양군의 논리에 따른다면 기자 동래를 계기로 한반도 북부와 만주지역은 중원지역과의 민족적 공통성이 증대된 반면, 한반도 남부는 이들과 구별되는 별도의 민족으로 분리된 것으로 설정된다. 이는 고구려사 전체를 중국사로 편입하기 위해 고구려 전성기의 판도에서 한강 유역을 제외한 것과 동일한 논리이다. 즉 고조선사나 고구려사를 한국사에서 분리해 한국사의 범주를 한반도 남부로 국한시키고, 한반도 북부와 만주지역의 역사 전체를 중국사로 편입하기 위한 논리에 불과한 것이다.
2) 이동론(移動論)과 다원설(多元設)이 결합된 고구려 ‘민족’형성론
중국학계는 1990년대 전반까지만 하더라도 고구려의 족원에 대해 종래의 논의를 계승하여 예맥족(濊貃族)이나 부여족(扶餘族)으로 설정할 경우 고유성을 강조할 수밖에 없고, 한국사와의 연관성도 완전히 단절할 수 없게 된다. 이에 중국학자들은 이동론적 시각을 토대로 고구려족이 화하족(華夏族)에서 유래했다는 화하족기원설이나 현재의 중화민족처럼 여러 족속의 융합으로 형성되었다는 다원설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화하족기원설로는 상인기원설(商人起源說)과 염제족기원설(炎帝族起源說)이 있다.
한편 다원설은 고구려가 통일적 다민족국가의 구성원으로서 그 자체도 다민족국가로 출발했음을 강조하기 위해 제게되었다. 가령 연노부는 고이, 계루부와 절노부는 졸본부여(卒本扶餘) 및 북부여, 순노부는 예인, 관노부는 한인(漢人) 등에서 기원했다고 설정하고, 이들이 부락연맹을 거쳐 고구려 소민족을 형성한 다음 대외확장에 의해 편입된 여러 족속을 융합시켜 고구려 대민족이 형성되었다고 파악하였다.
이러한 화하족기원설과 다원설 가운데 화하족기원설은 중국학계에서조차 비판을 받을 정도로 충분한 논거를 갖추지 못했다.
이상의 검토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양군은 고구려 전성기 판도에서 한강 유역을 제외한 다음, 고구려 판도 전체가 마치 고조선 시기부터 중국영토였던 것처럼 상정했다. 이를 위해 고조선사가 마치 기자 동래, 곧 기후국의 이주로부터 시작된 것처럼 설정했다. 그러고는 기자 동래를 계기로 이 지역의 족속이 분화되어 한반도 북부나 만주지역은 중국대륙과의 민족적 공통성이 증대된 반면, 한반도 남부의 한인(韓人)은 점차 별개 민족을 형성했다고 파악했다. 더욱이 기자 동래 이후에도 중원이주민이 계속 이주하여 고조선 지역은 더욱 중국화되었고, 마침내 전한대(前漢代)에는 중국대륙과 동일 언어권을 형성했다고 파악했다. 결국 고조선사는 출발점부터 중국사였고, 한사군은 이러한 고조선사와 고구려사를 이어주는 징검다리였다는 것이다.
이처럼 양군은 고조선사를 중국사로 귀속시키며, 만주와 한반도 북부 일대가 요순대부터 중국 판도였다고 강변했는데, 이는 ‘과거 불특정한 시기의 판도’를 근거로 고구려사 전체를 중국사로 편입하던 『속론』의 논리를 더욱 발전시킨 것이다. 결국 양군은 『총론』에서 『속론』으로 이어지는 중국학계의 연구경향을 계승하여 고조선-고구려사 전체를 중국사로 편입하고, 한국고대사를 한반도 남부로 국한시키기 위해 이 책을 집필했던 것이다.
양군은 고구려 ‘민족’형성과 관련하여 먼저 이동론적 시각을 바탕으로 중원계나 몽골초원계 이주민의 이주 및 이에 따른 만주-한반도 주민집단의 끊임없는 분화와 융합을 상정했다. 이를 통해 양군은 고구려 ‘민족’형성의 다원설을 확립하고, 중원계 이주민이나 한인(漢人)이 고구려 ‘민족’형성을 주도한 것으로 파악했다.
물론 양군의 논리는 사료를 자의적으로 해석했고, 최근 연구성과를 거의 반영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이 책은 『속론』의 내용을 소개하고, 『총론』과 관련하여 그 의미를 생각하여보았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정도의 특징을 찾을 수 있었다.
첫째, 고대 중국의 강역이론을 정리하고 이를 바탕으로 고구려사의 귀속을 논하였다는 점이다. 번속관계와 그에 따른 번속이론을 일반 이론으로 설정하고 다른 변경민족 정권이 그러했던 것처럼 고구려도 중국 역대 왕조의 번속국이었다고 규정하였다. 번속관계에 따라 문화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변경민족정권이 번속제도의 의미를 인정하게 되었다고 전제하고, 고구려가 중국 여러 왕조를 정통으로 인정하는 한편 주동적으로 번신이 되기를 원하였다고 하였던 것이다.
동북공정의 고구려사 연구에서는 번속관계-이론에 대한 연구가 중요시되었다.
둘째, 중국의 경제와 문화가 고구려의 그것에 미친 영향이 심대하였음을 강조하였다. 특히 고구려는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고, 그 위에 나름대로의 문화를 창조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고구려 문화는 주변 여러 민족과 국가들에 영향을 주었으며, 이러한 문화적 동질성 내지는 친연성이 고구려와 기타 다른 민족이 중국민족으로 융합되는 데 기여하였다는 의의가 있다고 하였다. 정치ㆍ외교ㆍ영토의 면뿐 아니라 경제적 면이나 정신세계를 포함한 문화적인 면에서도 고구려가 중국의 일부였다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건국설화를 통해 은 왕조와 혈연적 관련성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된다.
셋째, 기원전 37년 서한 현도군 고구려현에서 고구려가 건국되었다는 현재 중국학계의 통설을 사실로 전제하고, 현도군이 설치되었던 지역의 귀속이 고구려의 귀속을 확정하는 전제이며, 이 지역의 귀속을 역사적으로 인정할 수 있도록 하는 전제는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의 귀속 문제라고 전제하고서 한사군에 앞서는 고조선의 귀속 문제에 대한 연구를 촉구하였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는 기자조선(주 왕조의 제후국)-위만조선(한 왕조의 지방왕국)-한사군(한 왕조의 직접지배)-고구려(부여 등)-발해의 역사를 중국 고대사의 일부로 체계화하려는 시도로 파악되는 것이다.
이 책은 장유복ㆍ손인걸ㆍ지용 등 3인이 함께 저술한 『왕릉통고』의 내용을 비판적인 시각에서 검토해본 것이다. 이 책에서는 고구려 28대 왕릉을 모두 지안시 퉁거우 고분군에 비정하고 있는데, 이는 고구려의 영역이 중국내에 있었으므로 고구려사는 중국사라는 논리를 증명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된다.
『왕릉통고』에 대한 분석 결과는 한마디로 이 책은 학술적인 연구서로 보기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 내용을 들여다 보면 이미 선험적 지식으로 왕릉을 결정해놓고 이를 바탕으로 도출된 왕릉의 기준을 나열하고 있다. 즉 나열된 왕릉의 기준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설정된 것인지, 왕릉급 고분으로 제시된 고분이 어떤 기준으로 추출된 것인지 등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이 당연한 사실로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장지명의 비정과 대상이 되는 고분의 편년 과정에 있어서도 기존 연구자들의 연구성과에 대한 검토가 전혀 없으며, 구체적이고 논리적인 근거도 없이 자신들의 주장만 나열하고 있다.
6. ‘동북공정’의 핵심 내용 요약과 우리의 반박
①중국의 왜곡→ 종족문제: 고구려 종족은 중국 소수 민족의 하나.
우리의 반박→ 종족문제: 우리민족은 한족(漢族) 문화권과는 구별되는 동방 문화권을 이룩한 별개의 민족임. 중국 정사에서도 고구려 건국 주체 세력을 예맥족으로 기술하고 있으며, 예맥족은 한(韓)민족의 구성 종족이다.
②중국의 왜곡→건국과 영역: 고구려는 중국 영토 내에서 건국됐고 시종일관 중국 영역에서 존재했다. 고구려 건국지는 고구려의 성장으로 한군현(漢郡縣)에 속한다.
우리의 반박→건국과 영역: 고구려의 성장으로 한군현이 퇴출됐을 뿐만 아니라 군현과의 전쟁을 통해 성장했다.
③ 중국의 왜곡→조공문제: 고구려는 중국에 조공을 바치던 속국이다.
우리의 반박→조공문제: 조공은 외교 형식에 불과하다. 광개토대왕비에 나타난 천하관은 고구려의 독자성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백제, 신라, 왜도 조공 관계였음에도 고구려만 중국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다.
④ 중국의 왜곡→수, 당과의 전쟁: 수, 당과의 전쟁은 중국 국내의 통일 전쟁이다.
우리의 반박→ 수, 당과의 전쟁: 고구려의 수, 당과의 전쟁은 대외 전쟁이다.
⑤ 중국의 왜곡→계승문제: 고구려 유민은 중국에 귀속됐다.
우리의 반박→ 계승문제: 자진해 신라로 내려온 고구려 유민을 주목해야 한다. 신라의 일통 삼한 의식이나, 발해의 고구려 의식이나, 고려라는 국호에서도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식을 표방하고 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 보듯이 고구려에 대한 역사의식은 고려만 가지고 있다.
중국인은 거짓말 잘하고 가짜 만들어내는 데는 뛰어난 솜씨를 가지고 있다. 달걀도 가짜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다. 하물며 증명하기 어려운 수천 년 전의 고대사를 가짜로 만들어 내는 것은 쉬운 일이다. 우리들이 여기서 생각해야 될 것은 중국의 ‘동북공정’이 진짜냐 가짜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것을 빌미로 중국의 힘이 앞으로 어떻게 작용할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일치단결하여 중국이 허튼 수작을 부리지 못하도록 사전에 단속하는 것이 중요하며, 하루 빨리 남북통일을 이룩하여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
공 지 시 항 : 2011년 11월 모임
1木 모임 -- 2011년 11월 3일 (목) 19 시
3木 모임 -- 2011년 11월 17일 (목) 19 시
장소: 경북대학교병원 606병동 7층 회의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