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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선교사들의 신앙과 사상
한국에 파송된 대부분의 선교사들(장로교, 감리교, 대한기독교선교회, 동양선교회 등)은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도 손색이 없는 실력을 갖춘 인물들이었으며, 신학적으로는 건전하고 보수적인 성향의 소유자들이었다.
1934년 미국 북장로교는 한국 선교 50주년을 맞이하여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가지면서 선교 조직의 원칙과 실제에 관한 주제 발표를 했다. 이 발표에서 찰스 클락(Charles A.Clark)은 북장로교가 한국에서 성공한 열세 가지‘비결’가운데 제일 첫째로 꼽을 수 있는 비결은 “처음부터 선교부의 일
꾼들이 신학적으로 분명한 보수주의적 견해를 견지했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클라크가 예로 든 신학적 보수주의는 인간의 죄인됨, 그리스도의 피흘림을 통한 구원, 성경에 기록된 초자연적 사실에 대한 믿음, 유일하고 최종적인 종교로서의 기독교에 대한 믿음 등이었다.
이것은 장로교 선교사들에게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었다. 19세기 근대 부흥운동과 웨슬리안 복음주의 전통 속에서 신학 교육을 받고 입국한 남북감리교 선교사들, 나이아가라 사경회와 같은 19세기 근대 복음주의 해외선교 운동의 영향을 받고 입국한 대한기독교의 말콤 펜윅, 근대 부흥운동과 해외
선교의 아버지 무디와 미국 성결운동의 영향을 깊숙이 받은 동양선교회의 카우만과 킬보른 등 모두 다 근대 복음주의운동의 영향을 깊게 받은 이들이었다.
이와 같은 배경 속에서 신앙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기 때문에 초기 한국 선교사들은 교파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기는 했지만 본국의 목회자들보다는 덜 교파적이었고, 선교열과 복음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
1. 장로교 선교사들의 신앙과 사상
초기 한국에 파송된 대부분의 장로교 선교사들은 청교도 전통의 보수적 복음주의 노선에서 신앙훈련을 받고 또 그와같은 입장의 신학교에서 신학 교육을 받고 파송된 자들이었다. 미국 북장로교 해외 선교부 총무 브라운(Arthur J.Brown) 선교사는“한국이 문호를 개방한 이후 25년에 걸쳐 입국한 장로교 선교사들의 전형적인 모습은 청교도 풍이었다. 잉글랜드 선조들이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에 안식일을 지켰던 것처럼 그들도 엄격하게 안식일을 지켰다. 댄스, 흡연, 카드놀이는 그리스도의 참된 추종자들이 빠져서는 안 되는 죄악이라고 생각했다. 성경 비평학에 있어서는 강한 보수주의였으며 또한 고등비평과 자유주의 신학은 아주 위험한 이단으로 생각했다.”라고 지적했다.
1) 개혁파 복음주의 전통의 계승
초기 장로교 선교사들은 성경의 초자연적 계시와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존중하였다.
마포삼열 선교사는 1934년 한국 선교 50주년 기념식에서 한국 교회의 가장 큰 특징이 바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신하고 가르친 데 있음을 재천명하였다.
“한국 선교의 복음주의 메시지에 관해서는 확실하다. 선교부 산하 선교사들 대부분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령의 검이라는 강한 확신을 지니고 있으며, 죄를 사하기 위해 자신의 피를 흘리시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사시고 하늘에 오르사 다시 오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강한 확신을 지녔다. 이 신앙 속에서 성경은 우리의 선교 사역에 있어서 현저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본인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가르치는 교훈을 유일하고도 가장 뛰어난 것으로 여기는 태도가 지난 50년간의 한국 복음화에 중요한 요인이었다는 것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고 하였다.
한국 선교의 개척자라 불릴 만큼 한국 선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호레이스 언더우드는 전형적인 복음주의 장로교 선교사였다.
오랫동안 개혁파 경건주의 영향을 받아 개혁주의 전통을 소중하게 간직하면서도, 타 전통을 존중하며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서는 전혀 주저하지 않고 복음주의 연대를 꾀했던 화란개혁교회와 뉴 브룬스윅신학교의 개혁파 복음주의 정신은 언더우드에게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해서 언더우드는 장로교인이면서도 교파를 초월하여 복음주의 연합전선을 형성하며, 영·미 복음주의 운동을 주도한 아더 피어선과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언더우드의 개혁파 복음주의 정신은 맥코믹과 프린스톤신학교 출신 북장로교 선교사들과 리치몬드의 유니온신학교 출신 남장로교 선교사들 그리고 당시 영국령이었던 캐나다 장로교와 호주 장로교 출신 선교사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또한 한국 장로교 형성과 발전을 주도해 왔을 뿐 아니라, 한국 장로교 신학을 형성하는 데도 큰 기여를 하여 한국 교회를 칼빈주의 전통에 확고하게 선 개혁파 복음주의 교회로 든든히 서게 하였다. 특히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선교 활동, 신학 교육 그리고 기독교 학교 교육에 이르기까지 첫 선교 25년간은‘개혁파 복음주의’정신에 철저했던 맥코믹 출신 선교사들이 한국 장로교 신학을 주도했다. 19세기 인디애나주 개척민들이 설립한 하노버대학 신학부로 출발한 맥코믹신학교는 교수와 학생이 하나 되어 매일 수업을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읽고, 기도함으로 시작했으며, 주일 오전에는 교수들이 주일학교에서 가르치고, 주일 오후에는 학장이 예배를 인도할 정도로 학문과 경건을 조화시켰던 학교였다.
2) 영미 복음주의 부흥운동과 학생자원운동의 영향
한국 선교가 가장 중요한 선교적 토대를 구축한 것은 1888년부터 1902년까지 맥코믹신학교 출신 선교사들 14명이 한국에 입국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대부분 평양을 비롯한 한국의 북부지역을 선교 거점으로 삼았다. 이렇게 많은 맥코믹신학교 졸업생들이 한국을 선교지로 택할 수 있었
던 데는 다음의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 하나는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언더우드 선교사의 역할이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선교지 한국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크레이그(Craig) 박사가 한국 선교에 대한 비전을 학생들에게 심어 주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하나는 당시 미국에서 일고 있던 복음주의 학생자원운동(The Evangelical Student Volunteer Movement)의 강력한 활동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무디의 영향 하에 형성된 학생자원운동은 19세기 말부터 세계 선교를 주도하는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했다. 특히 무디의 영향력이 짙게 드리워진 시카고에 위치한 맥코믹신학교는 학생자원운동의 영향을 어느 학교보다도 더 강하게 받고 있었다. 적어도 한국선교 첫 25년 동안 복음 전도, 신학 교육 그리고 문서 선교에 이르기까지 평양, 선천, 대구 선교부를 중심으로 선교 초기 한국 장로교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한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맥코믹신학교 출신들이었다. 특히 평양신학교는 설립, 운영, 교수, 건물 건축에 이르기까지 맥코믹신학교와 매우 밀접한 연계성을 지니며 발전해 왔다. 학교 설립 후 20여 년이 넘게 교장직을 수행한 사무엘 마펫, 두 차례 임시 교장직을 지낸 번하이셀, 신사참배 문제로 진통을 겪고 있을 때 교장대행을 지낸 곽안련, 이들 모두 맥코믹신학교 출신들이었다. 맥코믹출신 선교사들이 평양신학교의 신학 교육을 주도하였으며, 그들의 신학사상이 평양신학교를 통해 한국인들에게 계승되었던 것이다.
맥코믹 출신에 이어 한국 장로교 선교에 지대한 공헌을 한 프린스톤 출신 선교사들 역시 미국의 구학파 복음주의 전통에서 있었다. 프린스톤 출신 선교사들이 한국 선교지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한 것은 1924년 로버트(Stacy L.Robert)가 제2대 평양신학교 교장에 오르면서부터이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평양신학교 교수에 합류한 어드만과 해밀톤 모두 프린스톤의 전통을 따라 성경이 오류 없는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이라는 확신을 가졌으며, 이와같은 성경관은 평양신학교를 통해 학생들에게 그대로 계승되었다. 특히 기독교 신앙의 기초, 천년왕국 신앙의 기초, 진화론의 기초, 세
계 개혁주의 신앙의 저술을 통해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해밀톤은 한국에 구 프린스톤의 전통를 심어 주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구 프린스톤의 입장을 따라 성경의 영감과 권위를 철저히 변호했다. 그는 기독교 신앙의 기초에서 “만일 성경이 역사적으로 부정확한 것으로 보여진다면 그것은 결코 신앙과 행위의 정확무오한 안내자가 될 수 없으며 성령의 인도와 통제 아래 기록된 책으로 고려될 수도 없다.”고 말하였다.
남장로교 선교사들 역시 구학파 복음주의 전통에 충실한자들이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리치몬드 유니온신학교 출신으로 1892년에 파송된 레이놀즈(William David Reynolds) 선교사이다. 그는 신학적으로는 구학파 전통에 있으면서도 1905년 부흥운동으로 장·감 연합운동이 무르익을때 장로교와 감리교가 하나의 민족교회를 설립할 것을 강하게 주장한 복음주의자였고, 후에「신학지남」에 나이아가라 사경회를 자세히 소개할 만큼 19세기 미국 부흥운동의 영향을 크게 받은 인물이었다.
이처럼 대부분의 남·북장로교 출신 선교사들은 구학파 전통에서 신학 교육을 받으면서도 당시 영국과 북미를 휩쓸고 있던 전천년운동, 학생자원운동, 복음주의 연합운동, 부흥운동과 사회개혁운동으로 특징되는 19세기 복음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것이다. 당시 복음주의라는 말은 전통적인 개신교 전체를 의미하는 용어였다. 역사적으로 볼 때, 배타적인 의미에서 스스로를 ‘복음주의자’라고(따라서 반대되는 사람들은 복음주의자가 아니라고) 정의하는 경향은 주로 1940년대 이후에 대두된 비교적 새로운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분위기는 캐나다 장로교 및 호주 장로교 출신 선교사들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는 특징이었다. 캐나다 출신 게일(James S. Gale), 하디(R. A. Hardie), 펜윅(M. C. Fenwick), 에비슨(O. R. Avison) 모두 YMCA와 학생자원운동의 신학적 영향을 받아 복음주의 노선에 철저하게 서 있었다.
또한 첫 호주 선교사 조셉 데이비스(Joseph Henry Davies)가 보여 주듯 스코틀랜드 영향을 강하게 받은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 선교회 역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전통에 서 있으면서도 영·미 부흥운동과 복음주의운동에 깊은 영향을 받은 이들이었다.
그러므로 초기 장로교 선교사들의 신앙과 신학의 영향을 받은 한국 교회는“역사적 칼빈주의의 배경을 지니고, 웨스트민스터 신앙 표준서를 수납하며, 장로정치를 채용한 (한국)장로교인들은 구 프린스톤처럼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의심치 않고 받아들였다.”라고 한 허버트 블레어(Herbert E. Blair)의 말 그대로였다
2. 감리교 선교사들의 신앙과 사상
한국에 파송된 대부분의 초기 감리교 선교사들은 전형적인 웨슬리안 복음주의자들이었다. 아펜젤러는 이미 한국에 파송되기 전부터 전국 신학생 선교 연맹(Inter-seminary Alliance for Foreign Missions)에 참석하면서 해외선교에 대한 열의를 다졌고, 1876년 10월 1일에 뚜렷한 변화를 거쳐 장로교에서 감리교로 적을 옮긴 경험의 소유자였다. 경건주의와 경험주의를 강조하는 감리교 전통의 영향을 받은 아펜젤러는 알렌이 지적한 것처럼 한국에서 사역하는 동안 마지막까지 매우 열렬한 요한 웨슬리의 감리교인으로 활동했다.
전형적인 웨슬리안 복음주의 후예들
한국 초기 선교사들은 장로교와 감리교라는 교파의식과 함께 복음주의라는 정체성을 선명하게 가지고 있었다.
성경, 이성, 전통, 경험 등 네 가지의 균형을 통해 감리교 신학을 구축한 웨슬리의 전통을 따라 한국에 파송된 남·북 두 감리교 선교회 선교사들은 학교 배경은 달랐지만, 성경과 전통위에 확고하게 서 있으면서도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중시하는 전형적인 웨슬리의 후예들이었다.
감리교 선교사들의 출신 학교는 드루신학교, 스카릿 성경학교, 컬럼비아대학, 오하이오 웨슬리안대학, 마운트유니언대학, 에즈베리대학, 밴더빌드대학, 윌리스대학, 케렛신학교, 유니온신학교, 무디 성경학교 그리고 예일대학이나 미시간대학 같은 일반대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그 가운데 드루신학교는 웨슬리안 복음주의 감리교 교단의 교역자들을 양성할 목적으로 세워진 학교로서 감리교의 사관학교라고 불릴 만큼 엄격하게 신앙훈련을 시키는 신학교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아펜젤러가 이곳에서 신학 훈련을 받고 있던 1880년대에, 이 학교에는 당시 미국의 저명한 감리교 복음주의 신학자 버츠(H. A. Buttz), 스트롱(J. Strong), 마일리(J. Miley), 쿡스(G. R. Cooks), 어펌(S. F. Upham)이 교수하고 있었다. 이들은 “미국과 해외에서 일할 사역자들을 훈련시킴에 있어‘교육받은 목회자’를 양성한다는 감리교의 신학 교육 원칙”에 충실하여“능력 있게 말씀을 전하고 경건한 삶을 살면서도 합리주의, 물질주의, 회의론, 진화론, 고등비평 등 현대사상의 도전에도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유능한 목회자를 길러내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아펜젤러는 이 학교에 재학하면서 이 같은 드루의 전통을 마음껏 만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와 같은 신학과 경건, 신앙과 체험, 학문과 실천을 조화시키려는 분위기는 드루신학교만의 것은 아니었다. 스카릿 성경학교, 컬럼비아 대학, 오하이오 웨슬리안대학, 에즈베리대학, 밴더빌드대학도 신학 사상의 주류는 전통적인 웨슬리안 복음주의였다.
이와 같이 감리교 선교사들은 웨슬리안 복음주의 전통 위에 굳건히 서서 감리교인이라는 자의식을 투철하게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국 교회의 복음화를 위해서는 기꺼이 장로교와의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것은 1887년 장·감이 발족한 성경번역위원회, 1890년의 예수성교서회, 1903년 이후 진행된 부흥운동을 경험하면서 장로교 선교사들과 장·감연합공회를 결성하여 공동으로 선교를 추진한 일, 그리고 숭실대학과 연희전문학교의 공동 운영 등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저들은 웨슬리를 따라 성경의 권위를 높이고 존중했다. 장로교 선교사들과 마찬가지로 감리교 선교사들도 처음부터 성경 중심의 선교를 추구했다. 아펜젤러는 자신이 한국에서해야 할 위대하고 유일한 사업은‘말씀, 생명의 말씀’을 충성스럽게 전해‘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라고 확신했다. 이때문에 아펜젤러와 스크랜톤은 일찍이 성서번역에 참여하여 한글 성경 번역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고, 한국감리교를 성경의 토대위에 구축하려고 노력하였다.
더 나아가 한국감리교회는 성경의 권위만 존중한 것이 아니라 전통적이고 선명한 복음주의 신앙을 그대로 수용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미이미교회 강례(美以美敎會綱例)인데, 이것은 1850년 미국 교회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중국, 일본에서 번역 사용하고 있었고, 한국에서는 1890년 아펜젤러가 번역하여 한국의 북감리교 미이미교회에서 한국감리교 교리로 사용했다. 여기에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신앙,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십자가의 구속, 부활, 승천, 재림, 고등성경관, 원죄로 인한 인간의 타락, 교인의 도리에 이르기까지 칼빈주의 가르침에 가까울 정도로 아주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이같은 전통적인 웨슬리안 복음주의는 1910년에 작성된 ‘감리교 대 강령과 규칙’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여기에는 성경의 권위, 동정녀 탄생, 대속의 죽음,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에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 성경의 완전성과 충족성,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과 인성, 십자가를 통해 사람의 원죄만 속하실 뿐 아니라 사람의 스스로 지은 죄도 속하신다는 대속의 죽음,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진실로 죽은 자 중에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육체적 부활을 분명히 규정하고 있다.
또한 감리교는 신앙생활 면에서 청교도 전통의 장로교 선교사들이 요구했던 것과 같은 생활규범(주일 준수, 음주, 결혼, 도박, 노예 소유 등)을 요구했다.
장·감 선교사들은 처음부터 한국교회를 하나님의 말씀의 토대 위에 세우려는 이상을 가졌고, 그것을 훌륭하게 성취시켰다. 장로교 선교사들이 개혁파 복음주의 전통에 충실했다면 감리교 선교사들은 웨슬리안 복음주의 전통에 충실한 전형적인 웨슬리안 후예들이었다. 확실히 이들의 신앙과 신학은 1930년대 감리교가 신학적 변천을 맞기까지 성경을 존중하고, 그 말씀을 따라 신앙의 삶을 살도록 지도하며, 그 말씀에 나타난 대로의 성령의 역사로 인한 부흥운동을 함께 주도하여 한국교회의 훌륭한 기초를 든든히 세운 훌륭한 동반자의 역할을 감당했다
3. 동양선교회 선교사들의 신앙과 사상
동양선교회는 18세기 감리교 요한 웨슬리의 신학과 19세기 미국에서 형성된 성결운동(Holiness Movement)의 결과로 생긴 교회이다.
동양선교회는 1901년 미국인 카우만과 일본인 나까다 쥬지가 일본에서 만든 단체이다. 이들은 일본 동경에서 선교 사역자를 훈련하기 위해서 성서학원을 만들었다. 여기에 한국인 김상준과 정빈이 입학하여 공부하였고, 이들은 1907년 동양선교회 선교사인 카우만 부부와 킬보른과 함께 한국에 와서
복음 전도관을 만들었으며, 이것이 한국에 세워진 첫 번째 성결교회가 되었다.
1) 웨슬리의 영향
동양선교회는 처음부터 웨슬리가 주창했던 ‘성결의 복음전파’를 생명으로 여겼다. 19세기 부흥운동이 발흥하게 되었을 때, 미국 감리교 내의 일부 지도자들은 웨슬리의 성결을 강조하면서 기성의 감리교에서 이탈하여 자신들의 교단을 형성하게 되었다.
당시 미국의 대부분의 감리교회들은 자유주의 신학에 물들어 침체되고 있었으며, 교회는 극심한 형식주의에 빠졌고, 원래 감리교회에서 가장 중심적이었던 성결의 도리는 거의 망각되고, 그저 교리로만 남아 있는 정도였다.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몇몇 감리교회와 성도들을 통하여 강한 부흥과 전도운동을 일으키셨다. 이는 요한 웨슬리가 외친 성결의 부흥운동이었다. 이것이 교파를 초월하여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었던 것이다.
2) 4중 복음의 영향
이들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할 뿐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모든 신자는 성령의 불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는 사도행전에 있는 오순절 사건이며, 모든 신자와 교회가 다 이 은혜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종교 개혁자들이 구원에 있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
는 칭의를 강조하였다면, 이들은 그 후에 두 번째로 받은 은혜를 함께 주장함으로 온전한 구원과 순복음을 제창하였다.
이런 성령운동은 기사와 이적을 동반했다. 따라서 이들은 성령의 신령한 은혜와 은사를 증거하며 신유의 복음을 말하게 되었다. 또한 이런 운동은 당시 교회가 말하고 있는 지상천국은 사람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확신케 되었다. 성경이 약속하고 있는 천년왕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비로소 이루어진다고 믿어 예수님의 전 천년왕국 재림을 강조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구원, 성령 세례, 신유, 재림의 네가지 테마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포함된 것으로 이해하여 순복음의 제하에 이 사대표제를 고조하기에 이르렀다.
3) 만국 성결교회의 영향
이 순복음을 고조하는 사람들은 세월이 지나면서 그들 나름대로 복음, 특히 성령 충만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 달라짐에 따라 각각 이름을 달리하는 교파를 조직하여 갈라지게 되었는데, 1880년부터 1925년 사이에 무려 25개나 되는 성결교단들이 생겨났다.
그런 가운데 1897년에 넵(Knapp)과 리스(Rees)의 지도하에 만국성결회(The International Apostolic Holiness Union and Prayer League)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웨슬리가 가르친 중생과 성결의 도리를 강조하지만, 동시에 당시에 고조하고 있는 순복음도 보존하기를 원하였다.
이 단체는 1913년에 확장, 재조직되면서 그 이름을 만국 성결교회(The International Apostolic Holiness Church)라고 불렀다. 또 그 후 1922년에 여러 성결 단체들이 합류하여 필그림 성결교회(The Pilgrim Holiness Church)로 발전했다. 동양선교회의 창설자인 카우만과 킬보른은 바로 이 만국성결교회에 의하여 선교사로 안수를 받았을 뿐 아니라 그들의 재정적 후원으로 동양에 나와 이 만국 성결교회와 맥을 같이 하는 선교단체를 설립한 것이다.
엄밀히 말해 동양선교회가 모토로 내걸었던 중생, 성결, 신유, 재림 가운데 중생과 성결은 웨슬리 전통에 뿌리를 두고있고, 그들이 갖고 있는 세대주의 재림신앙은 북미 성결운동과 무디 성경학교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신유는 오순절 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동양선교회는 웨슬리안 복음주의 전통과 19세기 말 미국에서 발흥한 복음주의 성결운동, 무디 부흥운동, 세대주의의 전통 모두를 계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4) 동양선교회� 신앙적인 전통
장로교와 감리교와는 달리 동양선교회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자신들의 신학적 입장을 분명히 정리하고 선교를 진행했던 것은 아니다.
동양선교회가 미국의 성결 운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은것은 사실이지만, 무디의 영향도 간과할 수는 없다. 일본 동양선교회 창설자 카우만과 킬보른, 나카다 쥬지 모두 무디 성경학교 출신이었다. 당시 무디 성경학교는 철저한 성경의 무오성 교리를 견지하고 있었으며, 종말론에 있어서는 무디의
영향을 받아 전천년설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전천년설은 오늘날 세대주의 종말론으로 평가받고 있는 종말론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믿었으며, 그리스도가 재림하시기 전 이교의 신앙 가운데 있는 죽어 가는 영혼들을 구원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는 것이
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무디의 학생자원운동의 중요한 구심점이었던 무디성경학교에는 당시 어느 학교보다도 선교열이 강하게 일고 있었다. 1899년 각 대륙의 저명한 선교지도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무디신학교에서 진행된 대규모 선교대회를 통해 해외선교를 결심한 카우만의 경우가 보여주듯 당시 무디 성경학교
는 해외 선교사 양성의 요람이었다. 특별히 특정 교파의 배경을 가지고 있지 않은 무디 성경학교는 졸업생들이 다양한 교단 지원 속에 해외 선교사로 파송되거나 독립 선교사로 입국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특히 카우만은 무디 성경학교에서 열린 선교대회에서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4중 복음을 제시한 선교연맹(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 창설자 심슨(A. B. Simpson)의 영향을 받아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이와 같은 동양선교회의 4중 복음은 카우만과 킬보른, 나카다 쥬지를 통해 동경성서학원에서도 가르치게 되었고, 여기에서 교육받은 정빈, 김상준에 의해 한국교회에 그대로 전이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동양선교회 사상은 웨슬리안 전통, 19세기 성결 운동과 오순절 전통, 무디 성경학교 전통이 어우
러져 형성된 웨슬리안 - 알미니안 - 홀리니스 복음주의 신앙이었다.
4. 대한기독교(침례교)선교회의 신앙과 사상
한국 침례교의 전신인 대한기독교의 토대를 구축한 펜윅은 근대 복음주의 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어린 시절 펜윅의 담임 목사였던 도날드 매킨토쉬(Donald M.McIntosh)는 전형적인 스코틀랜드 출신 복음주의자로서 그의 신앙과 영성은 펜윅에게 의미심장한 영향을 미쳤다. 엄격한 주일 성수,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성경에 대한 사랑, 성경의 권위는 이들로부터 물려받은 소중한 유산이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펜윅의 복음주의 신앙이 해외 선교열로 이어진 것은 나이아가라 사경회와 학생자원운동을 통해서였다. 1887년 7월 19일부터 28일까지 피어선(A. T. Pierson)을 주강사로 하여 나이아가라 호수에서 열린 나이아가라 사경회는 성서주의, 세대주의 전천년설, 성결, 플리머스 형제단, 부
흥운동 그리고 케직 운동의 영향으로 세계 복음화에 대한 열정을 고취시켰다. 조지 말스던이 지적한 것처럼 비록 웨슬리안 성결운동의 전통과 경건주의가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기는 했지만 나이아가라 사경회는 대체로 칼빈주의를 고수하고 있었다.
비록 그가 정확한 날짜를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펜윅은 1887년 7월 나이아가라 사경회에서 선교사로의 헌신을 결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펜윅은 한국에 파송된 여타 다른 초기 캐나다 개척 선교사들인 게일, 하디, 에비슨처럼 19세기 근대 영미 복음주의운동을 특징짓는 학생자원운동의 영향을 결정적으로 받았다. 펜윅은 고든, 와일더, 브룩스 그리고 피어선과 같은 지도자들과의 교제를 통해 학생자원운동에 친숙해진 것으로 보인다. 19세기 근대 복음주의 운동과 해외선교운동을 특징짓는 나이아가라 사경회와 학생자원운동은 펜윅에게 해외 선교열, 전천년설 종말론, 근대 복음주의 정신을 강하게 심어 주었다.
그는 교파를 초월해 현대주의에 대항하며 선교열을 고취하기 위한 복음주의 연대,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 구령의 열정과 해외 선교열, 거듭남의 체험 등 당시 북미 전역에 일고 있던 해외 선교열을 동반한 복음주의운동의 정신을 그대로 계승한 채 한국 순회 선교회를 설립하여 선교를 감당했다.
펜윅은 한국 순회 선교회의 원리와 목적 선언서에서‘이 선교회의 성격은 초 교파적이며, 정신은 복음적이고, 방법은 진취적이고, 어떤 경우든 다른 사람의 터 위에 세우지 않으며, 오지 선교를 강조하며 모든 인간에게 복음 전파를 목적으로한다. …본 선교회의 교리적 표준은 배타적으로 어느 한 선교단체의 것을 고집하지 않고 오히려 모든 개혁교회들이 포용하고 있는 위대한 기본적 진리 바로 그것이며, 소위 복음주의 연맹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것들이다.’라고 하였다.
5. 선교사들의 신앙과 사상에 대한 평가
한국에 파송된 장로교, 감리교, 동양선교회(성결교), 대한 기독교(침례교) 등 개신교 선교사들은 학생자원운동과 무디 부흥운동 같은 근대부흥운동의 영향을 직·간접으로 받은 개혁파 복음주의자들이거나 웨슬리안 복음주의자들이었다. 개혁파 복음주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장로교 선교사들은 물론이고, 웨슬리안 복음주의 전통에서 교육받은 남·북감리교 선교사들 그리고 동양선교회의 카우만이나 킬보른, 대한기독교의 펜윅 모두 성경의 권위를 철저하게 확신하면서도 복음의 열정에 불타는 투철한 복음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19세기 복음주의 전통 속에서 교육을 받았고, 당시 영·미를 지배했
던 복음주의 이상을 공유했으며, 부흥운동의 영향을 받아 영혼 구령에 대한 뜨거운 선교 열정으로 한국선교를 이끌었다.
이들은 교파별 특성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신학 사상 면에서 복음주의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1905년 복음주의 연합공의회를 조직할 수 있었고, 교파를 초월해 한국개신교 복음주의 연대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교회 초기 선교사들이 가지고 있던 이런 신학적 토양은 그대로 한국교회에 스며들어 한국교회의 신학적 토양을 결정짓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4) 캐나다 장로교 선교회
캐나다 장로교의 한국 선교가 시작된 것은 1898년이지만 캐나다 출신 선교사들이 한국에 입국한 것은 그보다 10여 년 전인 1889년이었다. 캐나다에서 가장 먼저 한국 선교에 관심을 표명한 곳은 당시 영국과 북미 전역에 일고 있던 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의 영향을 받고 있던 토론토대학이었다. 1887년 5월 토론토대학교 낙스 칼리지 먼쓰리(The Knox College Monthly)는 중국에서 활동하던 조나단 고포드(Jonathan Goforth)의 말을 인용해, “복음에 문을 연 마지막 나라, 한국이 소리 높여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1,500만의 영혼들이 주님의 메시지를 기다리고 있다.”며
한국 선교를 촉구했다.
그로부터 2년 6개월 후, 1889년 12월 15일 한국어를 한국사람보다도 더 유창하게 구사하는 선교사로 알려진 게일(James Scarth Gale, 1863-1937, 奇一)이 명문 토론토대학을 졸업하고, 그 대학 YMCA로부터 8년간 연 500달러의 지원을 약속 받고 한국에 입국했다. 이듬해 3월까지 서울에 체류하던 게일은 선교지를 답사한 후 황해도 송천(松川)으로 옮겨 3개월간 그곳에 머물렀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선교가 여의치 않자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가 부산으로 내려갔다. 1892년 봄까지 부산에서 복음을 전하던 게일은 토론토대학
YMCA와 관계를 끊고, 1891년부터 북장로교 선교회로 이적하고, 부산에서 원산으로 선교 거점을 옮겨 새롭게 활동을 시작했다. 이어 게일은 마펫과 함께 1891년 2월 27일부터 5월 말까지 3개월 동안 압록강 봉천에 이르는 1,400마일의 역사적인 전도여행을 하였다.
그러나 캐나다 장로교의 선교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을 통해 시작되었는데, 그 동기를 제공한 사람은 바로 매켄지(William John McKenzie,
1861-1895) 목사였다. 그는 선교회의 공식 파견 선교사가 아니고, 개인 자격으로 내한했던 열정의 청년이었다. 그는 캐나다 동해안의 라브라도(Labrador)에서 개척 전도를 하다가, 졸지에 한국 선교를 착상하여, 친구들에게 기여받은 제한된 선교비를 가지고, 1893년 12월에 한국에 입국했다.“ 그는 조선을 제2의 고향으로 삼아서 그들과 같이 살다가 마지막 나팔 소리를 들을 때까지 그들과 같이 일하리라.”는 결의를 가지고 한국 선교에 임했다.
그는 서울에서 몇 달을 지낸 뒤 벽촌 황해도 장연의 솔내(松川)에 가서, 한복을 입고 한식을 먹으며, 이 겨레와 함께 생활을 했다. 이곳에서의 그의 삶은 희생과 봉사와 헌신의 삶 그대로였다. 그러나 갑작스런 건강 악화로 인해 이듬해 1895년 6월 23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익숙하지 아니한 기후, 고독, 극단의 조식(組食), 열병, 이런 것들이 그의 의지를 꺾고, 그의 신체를 병들게 하여”마침내 낯선 솔내 초가집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그의 죽음은 캐나다 장로교 선교회가 한국 선교를 하기로 결정하는 동기를 제공하였다. 그의 외로운 죽음은 숱한 사람들의 가슴을 뜨겁게 했는데, 그 가운데 솔내 교회의 한 늙은 신자였던 서경조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그는 캐나다에 매켄지에 대한 소래 교인들의 존경과 애정, 그와 같은 목
사를 파송해 달라는 내용을 담은 편지 한 장을 띄웠다. 마침내 캐나다의 장로회 총회는 1897년 한국 선교를 의결하고, 1898년 9월 8일에 푸트(W. R. Foote) 목사, 맥레(D. M.McRae) 목사, 그리고 그리어슨(R. G. Grierson) 박사 등 세사람을 파송하게 되었다. 이것이 함경도를 중심으로 선교하게 된 캐나다 장로회의 선교의 시작이었다.
1898년 캐나다 장로회가 한국 선교를 시작하였을 때, 캐나다 토론토대학에서는 이때까지 도와주던 한 사람의 재한 선교사에 대한 후원을 중지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제임스 게일이었다. 게일은 1892년 북장로교 선교부로 적을 옮겼다. 그럼에도 토론토의 후원은 1898년까지 계속되었는데, 자체 선교사를 파송함으로써 그 후원을 중지했던 것이다.
캐나다 출신의 또 한 명의 선교사는 후에 1903년 원산부흥운동의 주역으로 널리 알려진 로버트 하디(Robert Alexander Hardie, 하리영, 1890)이다. 토론토 의대 YMCA는 1890년 봄 하디가 의대를 졸업할 때 그를 한국 의료 선교
사로 임명했다. 하디는 1890년 9월 30일 최소한 8년간의 복무보장을 받고 한국에 입국했다. 본래 하디는 게일과 함께 부산을 거점으로 선교 활동을 수행할 예정이어서 1891년 4월 14일 도착하여 한국인 집 하나를 세내어 사역을 시작했고, 8월에 그의 아내와 자녀들이 합류했다. 1892년 북장로교 선교회와 호주 장로교 선교회가 부산에 선교사역을 착수하자 서울로 올라와 토론토 의과대학 스승이었던 에비슨(O. R.Avison)을 도와 잠시 제중원에서 함께 사역하였다. 그러다 하디는 게일과 펜윅 두 캐나다 출신 선교사들이 활동하는 원산으로 선교지를 옮겨 그곳을 선교 거점으로 삼았고, YMCA와 맺은 8년간의 복무 약속이 끝난 1898년에 남감리교 선교회로 적을 옮겨 사역하였다.
이렇게 해서 1898년까지 한국에는 미 북장로교, 미 남장로교, 호주 장로교, 캐나다 장로교 등 네 개의 장로교 선교회가 입국해 한국장로교 선교를 가속화시켰던 것이다. 한국에 입국한 각 장로교회 선교회는 1893년에 결성된 장로교공의회의 구성원이 되어 교단별로 한국 선교를 추진하기보다 범 장로교연합을 통해 선교의 효율을 증대시킬 수 있었다.
5) 미 남감리교 선교회
1885년 아펜젤러와 스크랜톤의 입국으로 시작된 북감리교 선교에 이어 1896년 남감리교도 한국 선교를 시작했다. 남감리교 선교가 시작되기까지는 중국 주재 남감리교 선교사 리드(Clarence Frederick Reid)와 밴더빌드대학 출신 윤치호의 노력이 컸다. 리드 선교사는 1892년 2월 입국해 중국 북부지역에서 활동하기 위해 그곳 사정을 시찰하던 중 이미 “다른 여러 선교회에서 벌써 점거”한 것을 확인하고 새로운 개척지를 찾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마침 남감리교 교인이자 남감리교가 운영하는 중서학원 교수를 지낸 윤치호로부터 간곡한 요청을 받고 한국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896년 5월에 열린 남감리교 해외 선교부는 헨드릭스 감독이 제출한 남감리교회 상해선교연회의 한국선교구 설치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1896년 8월 14일 한국의 첫 남감리교 선교사로 임명받은 리드와 그의 가족이 상해에서 서울에 도착했다. 중국 선교구역의 한 지방으로 한국 선교를 시작했던 남감리교는 1897년 5월 중국연회에서 분리하여 한국선교부를 조직하고 리드 목사가 초대 감리사가 되어 송도에 선교 거점을 마련했다.
6) 대한(동아) 기독교(침례교) 선교회
침례교의 전신 대한(동아)기독교의 한국 선교는 두 개의 역사적 기원을 가진다. 하나는 캐나다 출신 말콤 펜윅(Malcolm C. Fenwick, 1863-1935)에 의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엘라 씽 선교회(Ella Thing Memorial Mission)에 의한 것이다. 하지만 이 둘은 하나의 뿌리, 즉 영미 복음주의운동의 선구자 고든(Adoniram J. Gordon)이 담임하고 있던 보스톤의 클라렌돈 가(街) 침례교회에서 유래되었다.
근대 복음주의운동과 해외선교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나이아가라 사경회에서 은혜를 받은 펜윅은 그 사경회의 지도자들과 말씀을 공부하면서 선교사로의 소명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1887년 학생자원운동의 지도자로 북미에서 해외선교열을 고취시키는데 기여를 한 로버트 와일더(Robert P.Wilder)의 토론토 방문과 그의 강연을 통해 한국 선교를 결심했다. 펜윅은 몇몇 YMCA 회원 기독교 사업가들에 의해 조직된 한국 연합 선교회(Corean Union Mission)의 지원을 받는 독립 선교사로 1889년 12월 한국에 입국하였다.
펜윅은 소래를 거쳐 원산에 정착했는데, 이는 장로교와 감리교에서 선교를 시작하지 않아 새로운 선교지로 전망이 밝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펜윅은 매켄지가 그랬던 것처럼 한국 문화, 예절, 전통, 풍습 전반을 대단히 존중했다. 그는 선교사는 언어, 관습, 사람에 관한 실제적인 지식을 터득한 뒤에야 비로소 전도할 자격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펜윅은 한국인에 의한 복음 전도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선교 방법이라고 확신하여 이를 직접 실행한 선교사이기도 했다.
펜윅이 침례교와 유대관계를 갖기 시작한 것은 1893년 안식년 차 귀국해 캐나다에 머물고 있는 동안 고든이 목회하고있는 보스톤의 클라렌돈 가 침례교회를 방문하면서부터이다. 펜윅은 1889년 고든이 설립한 보스톤 선교사 훈련원에서 교육을 받은 바 있었다. 펜윅은 1894년 한국순회선교회를 조직
하고 한국 연합 선교회와 결별하였으며, 같은 해 고든과 피어선(Arthur T. Pierson)으로부터 안수를 받은 후, 본국 친구들의 협조를 얻어 중국내지선교회의 강령과 비슷한 원칙 하에 한국순회선교회를 조직하고 1896년에 그 선교단체의 책임자로 한국에 돌아와 원산을 거점으로 활동을 재개했다.
펜윅과 별도로 클라렌돈 가 침례교회는 한국 선교를 위해 사업가였던 씽(S. D. Thing)이 자기의 외동딸 엘라 씽을 기념하여 엘라 씽 선교회를 설립하고, 1895년 폴링(E. C.Pauling) 목사 부부, 아만다 가들린(Amanda Gardeline) 양을 파송하고, 이어 스테드맨(F. W. Steadman) 목사 부부, 사디 액클(Sadie Ackles), 아마 엘머(Arma Ellmer) 양을 추가로 파송했다. 이들은 부산을 거처 충청도 공주, 강계, 홍성등에서 복음을 증거했다. 그러나 애쓴 보람도 없이 재정난으로 존속이 어렵게 되어 결국 철수하게 되었고, 1900년 스테드맨은 펜윅에게 선교지 교회와 그 전 소유권을 이양하게 되었다. 따라서 펜윅은 1889년 12월에 독립 선교를 시작하였다가 1895년 시작된 침례교회를 1900년에 흡수해서 침례교 선교로 전환하여 한국에 뿌리를 내리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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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동양선교회(聖潔敎)의 한국선교
동양선교회는 성결교의 전신으로 1907년에 한국선교를 시작했다. 성결교는 단일한 하나의 교파로 시작한 교회는 아니었다. 초교파적인 동양 선교를 위한 단체에서 출발해 자리잡은 교회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감리교 신자였던 카우만(Charles E. Cowman,1867-1924) 목사와 친구 킬보른(E. A. Kilbourne) 목사는 하나님의 은혜를 뜨겁게 체험하고 성서적인 순복음을 동양 여러 나라에 전도하겠다는 단심 하나만으로 후원의 약속과 그 전망이 전혀 없는 소명의 길을 떠났다. 일본 동경에서 이들은 미 북감리교 전도사로 활동하다 무디 성경학교를 졸업한 후 뚜렷한 중생의 은혜를 체험하고 귀국한 나카다 쥬지(中田重治, 1870-1939)를 만나 1901년 4월에 도쿄 간다(神田)에 중앙복음 전도관을 열면서 시작되었다. 일본에서 시작한 그들의 선교사역은 그들 자신도 놀랄 만큼 날마다 신장되었다. 이들은 본래 교파 형성의 의도 없이 출발하여 감리교 본래의 방향인 성결의 복음을 만인에게 선포할 생각이었으나 기구의 조직이 불가피할 정도로 신도수가 확장되어, 결국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라는 교단을 세워 출범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1905년 11월 일본인, 한국인, 중국인이 참석한 가운데 동양선교회를 조직하고 동양 각 지역의 선교를 시작했다. 성결운동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말미암는 중생, 성경의 은혜로 말미암는 성화, 믿음에 의한 신유, 그리고 그리스도의 천년왕국 사상에 근거한 재림 등 사중복음을 자신들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가르침으로 표방했다.
동양선교회 한국선교는 1907년에 시작되었지만 한국에서의 복음의 접촉은 그 이전부터 있었다. 나카다 쥬지는 혼다 요이치와 함께 일본 복음동맹회의 파송으로 1904년 5월 11일 동경을 출발하여 부산, 목포를 거쳐 제물포에 도착했다. 서울, 송도, 평양, 선천, 의주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 만주에까지 순회하면서 주로 일본병사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였지만, 여러 곳의 한국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할 수 있는 기회도 가질 수 있었다. 서북지역은 러일전쟁을 전후하여 영적 각성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던 지역들이었기 때문에 나카다는 살아 움직이는 한국교회의 현장을 직접 목도할 수 있었다. 제물포를 거쳐 서울에 돌아온 나카다는 수원, 공주, 충청도와 경기도 일대에서도 복음을 전하고 약 2개월 반의 한국 전도여행을 마치고 7월 말에 제물포를 출발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돌아갔다. 킬보른의 장남 E. I. 킬보른에 의하면 동경성서학원 최초의 한국인 유학생 정빈(鄭彬)은 나카다의 한국전도여행의 결과였다. 그렇다면 비록 2개월의 짧은 한국전도여행이지만 이 기간 동안 나카다는 후에 한국선교를 개시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한 셈이다. 그로부터 3년 후 동양선교회 한국선교가 개시되었다.
동양선교회 한국선교는 한때 연동교회 청년 신자였던 정빈이 김상준의 협력을 얻어 시작했다. 정빈은 1904년 일본으로 건너가 1907년 3월 동경백목성서학원을 졸업한 후 그 해 5월 2일 가우만, 킬보른과 함께 일본에서 귀국해 같은 학교 출신 김상준의 협력을 얻어 1907년 5월 30일 한국의 최초 성결교회인 염곡복음 전도관을 설립했다. 1908년 이장하가 동경성서학원을 졸업하고 이들과 합류해 이들 세 명은 동양선교회 한국선교를 태동시킨 개척자들이 되었다. 평양대부흥운동이 전국을 휩쓸고 있던 5월 2일 입국한 이들은 부산에서 평양까지 여행하는 동안 부흥운동의 현장을 몸소 체험하며 선교 후보지를 물색하던 중 현재의 종로 1가인 경성 염곡에 오륙십명을 수용할 수 있는 작은 집 한 채를 세 얻어 임시 전도관을 차린 후 카우만 일행이 2주간 집회를 개최했다. 카우만 일행이 돌아간 후 정빈과 김상준이 5월 30일 이곳에 복음 전도관의 효시인 ‘동양선교회 예수교 복음 전도관’을 설립하였다.
정빈과 김상준은 창립집회 때 그리스도를 알기 원하는 구도자가 5명이나 생겨나 힘을 얻고 일주일에 8번의 집회를 열면서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부흥을 가져왔다. 이러한 성장은 평양대부흥운동으로 인한 놀라운 성령의 역사로, 다른 한편으로는 정빈과 김상준을 비롯한 초기 개척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의 결과가 현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駭�.
헌신적인 전도열에 힘입어 6개월 만에 272명이 그리스도를 발견했다. 비록 이 숫자는 평양대부흥운동이 한창 일고있던 경성에서 당시 장로교와 감리교가 얻은 수확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교단 배경도 없고 선교사가 상주하는 것도 아닌 데도 소수의 한국인 지도자에 의해 한 전도관에서 그 같은 결실을 얻었다는 것은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부흥운동의 열기, 카우만과 킬보른의 헌신적인 지원 그리고 김상준, 정빈과 같은 일본백목성서학원에서 훈련받은 이장하의 합류로 동양선교회 한국선교는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동양선교회는 처음 시작할 때 특정한 교파의식을 갖지 않고 문자 그대로 노방에서 복음을 전해 구주를 영접하게 한 후 이들을 인근의 기존의 다른 교파 교회로 인도했다. 그러다 노방전도가 비난이 일자 정빈은 카우만의 도움을 얻어 1908년 9월 현 을지로 입구인 동현(銅峴, 구리개)에 염곡보다 더 큰 150석의 중국인 소유 기와집 한 채를 월 20불, 6개월 기한으로 임대하고 오전에는 성서학원을 개교하고 오후에는 전도집회를 개최했다. 그 해 11월 카우만과 킬보른이 다시 내한하여 집회를 개최하면서 동양선교회는 날로 성장을 거듭했다. 정빈, 김상준, 이장하는 전도관이 협소하여 고민하던 중 이듬해 1909년 5월에 온 카우만 일행이 다시 경성을 방문하자 이들과 함께 장소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고, 장로교인 이씨의 도움으로 무교정에‘신 성결장막’이라 부르는 경성중앙복음 전도관을 설립했다. 당시 이들이 자리를 잡은 무교정은 모교동 또는 모전이라 불린 상가 지역으로 여인네들의 머리 장식과 갓을 파는 장사치들로 붐비는 곳으로서 가까이 인접한 다
정은 경성에서는 기생촌으로 유명한 환락지대였다. 때문에 지극히 세속에 물든 서민들과 민중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이 교회가 정식으로‘조선예수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라고 부르게 된 것은 1921년의 일이었다.
8) 기타 교단의 한국 선교
① 플리머스 형제단
1896년 12월 플리머스 형제단 노리마츠(乘松雅休, 1863-1921)가 입국해 수원을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해 기독동신회를 조직, 플리머스 형제단을 한국에 전파했다. 그는 일본의 신민화 정책의 시녀역할을 했던 조합교회 와다세와는 달리 정치적 권력과 무관한 입장에서 순수하게 한국선교를 시작했다.
② 구세군
구세군은 1907년 10월 허가트(R. Hoggart)가 내한 한국선교를 착수했다. 본래 사회복지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전통을 따라 구세군의 한국선교 역시 이 방면에서 진행되어 초기 한국선교가 직접 선교와 간접 선교의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③ 러시아 정교회
명성황후의 시해 사건 이후 정치적 불안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던 이른바 아관파천 후 한국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이 확대되던 1899년 혹은 1900년 한로(韓露) 해빙무드를 타고 러시아 정교회 선교회가 한국 선교를 시작했다.
④ 안식교
1904년 이단으로 평가받고 있는 안식교가 한국선교를 시작했다. 선홍조와 유은현이 하와이 이민 길에 일본에 들렸다가 재림교회 전도사 구니야로부터 침례를 받고 이민을 포기하고 6월에 국내에 들어와 선교했다. 귀국 도중 하와이 개발공사 계몽원 임기반에게 전도하고, 8월 10일과 9월 13일에는
구니야와 일본주재 재림교회 선교사 필드(F. E. Field)를 초청하여 한국선교를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그러다 1905년 11월 안식교 선교사 스미스(W. R. Smith) 목사가 내한 1906년 선교본부를 평남 순안에 두고 전도, 교육, 의료, 문서를 통해 전국적으로 선교를 확장해 나갔다. 타 개신교단에 비해 안식교는 처음부터 토요 안식일 준수와 재림신앙으로 인해 기성 교회, 정부, 일반 사람들 모두로부터 적극적인 호응을 받지못했다.
⑤ 여호와의 증인
역시 이단으로 평가받고 있는 일명 여호와의 증인, 만국성경연구회도 1912년 헐리스트 선교사가 내한 서울 계동 147번지에 사무소를 차린 후 하나님의 거문고, 정부(政府)라는 책자를 발행하면서 한국 선교를 시작했다. 뉴욕에 본부를 둔 이들은 한국에 경성 우체국 사서함 21호를 개설하여 일본 요
코하마 복음인쇄소를 통해 1913년부터 월간 만인보를 발행해 국내에 반포하기 시작했다.
5. 선교사들의 입국과 복음 전래에 대한 평가
1884년 알렌의 입국으로 선교가 시작된 이래 다양한 각 교파의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활발한 선교 활동이 펼쳐졌는데, 이를 종합 평가해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다양한 개신교 선교회가 거의 동시에 입국하여 한국선교를 시작했다. 둘째, 그럼에도 장로교와 감리교가 한국개신교 선교를 주도했다. 셋째, 대부분의 초기 선교사들은 교파를 막론하고 정통적인 신학과 아울러 복음의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칼빈주의 전통에 기초한 장로교회 출신 선교사들은 영미의 청교도 전통과 화란의 개혁주의 전통 속에서 성장하고 교육받은 이들이었지만 무디를 비롯한 당시의 부흥운동의 영향을 받은 선교사들이 대부분이었다. 또한 감리교 출신 선교사들도 본국의 신학적 분위기보다는 성경의 객관적 권위와 구원의 주관적 체험을 동시에 강조하는 전통적인 신앙의 소유자들이었기 때문에 장로교와 감리교가 교파를 초월하여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 협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비록 교파와 교단은 달랐지만, 복음주의 기독교를 이상적인 모토로 삼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다양성 속에 통일성이 있었다. 그렇다고해서 교파 개념이나 교파 의식이 없었다는 의미는 아니며, 자신들의 신학적 관점을 포기했다는 의미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개신교 선교사들이 복음주의 신앙과 정신을 공유하고 선교 지향적이고 복음 전도 지향적이었다는 점에서 교파의 벽을 넘어 통일된 복음화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복음 전파는 기대 이상의 결실로 이어져 1897년 세례교인이 777명으로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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