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성지 순례 후기(2) - 믿음은 죽음을 넘어
비행기에서 내려다보이는 프랑스 농천 풍경부터가 참 인상적이었다. 잘 정리된 드넓은
경작지와 마을 그리고 가늘게 이어진 길들, 유럽 최대의 농업국임을 짐작케 했다.
사진으로만 보았던 에펠탑을 푸른 창공을 배경으로 직접 바라볼 수 있다는 게 꿈만 같
았다. 파리 시내의 건물들, 센강 주변의 건물들은 중세풍의 고딕식 예술 작품만 같았고
섬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고층의 아파트 숲속에 살고 있는 내겐 현재가 아닌 먼 과거의
도시로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기적의 메달 성당, 파리외방전교회, 노트르담 성당, 몽마르트 언덕의 베드로 성당과
예수성심성당은 우리나라 성당과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크고 아름다운 규모에 오랜 동안
내려온 역사와 유물, 종교 예술 작품을 가득히 간직한 성전이었다.
1825년 불모지와 다름없었던 조선의 신자들이 사제를 보내주기를 갈망하는 편지를
썼고, 이를 당시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이 눈물을 흘리며 읽으신 후 파리외방전교회
(1658년 설립)에 조선 선교사 파견을 요청해 브뤼기에르 주교를 조선 초대 교구장으로
파견했으나 조선 입국 직전 세상을 떠나셨고, 뒤이어 조선 선교사를 자청한 피에르 모방
(베드로) 신부가 삼엄한 국경 경비를 피해 삿갓에 상복 차람으로 압록강을 건너 최초로
조선 땅을 밟았다.
그후 모방신부는 방인 사제 양성을 위해 3명의 젊은 조선인을 중국 신학교로 보내 공부
하게 해 조선 최초의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탄생케 되고, 모방 신부는 기해박해(1939년) 때 조선 2대 교구장인 앵베르 주교, 샤스탕
신부와 함께 한강변 새남터에서 순교하셨는데 그때 나이 35세였다고 한다.
사제를 목메어 기다렸던 조선인 신자들로 인해 파리외방전교회와 인연을 맺게 된 조선의
교회, 그로 인해 모방 신부를 포함 조선에 파견 된 9명의 선교사들이 8,000명이 넘는 조선
신자들과 함께 순교를 하셨다고 하니.... 그 순교의 역사와 함께 '믿음'이란 과연 무엇이기
에 이토록 목숨까지 내려놓을 수 있었을까?
그것도 외국 선교사들의 경우 전교도 중요하지만 생판 낯설고, 가난하고, 몽매한 타국 땅
에서의 선교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자신의 생명까지 내놓게 될 수 있을 거란 사실을
사전에 뻔히 알면서도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 길을 자청해 걸을 수 있었을까하
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파리 외방전교회 정원 한 쪽에는 작은 규모의 '성모당'이 있으며 근처에 우리 풍의 '한국
순교성인현양비'가 세워져 있다.
성모님을 모신 성모당 뒤 벽면에는 순교자들의 명단이 있는데, 과거 그 분들의 순교 소식
을 접하게 되면 이곳에 모여 오히려 감사의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그 중 누군가는
또 성모님께 안위와 은총을 빌고 선교의 길을 떠났을 터이다.
성모당에서 기도를 올리고 선교의 길을 떠나면 다시 살아 돌아온다는 걸 보장할 수 없기에
성모당 옆으로 난 길을 '죽음의 길'이라 불렀다고 한다(아래 사진 참조).
노틀담 대성당 3개의 문 중 맨 왼쪽에 있는 출입구 위에는 잘린 자신의 목을 들고 서 있는
조각상이 있다. 이분이 프랑스의 수호성인인 프랑스 최초의 순교자 '생 드니' 주교이다.
몽마르뜨르(순교자의 언덕)에서 참수를 당한 드니 주교는 흰 피를 흘리며 자신의 잘린
목을 들고 북쪽으로 한참을 걷다가 다시 쓰러졌다고 하며 이를 기념하여 만든 조각상이라
고 한다.
글쎄 그게 사실인지를 따진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리라. 여하튼 생 드니는 서기 261년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두 동료 사제들과 함께 몽마르뜨르에서 참수 되어 센강에
던져졌으나 다시 찾아 파리 북동쪽 마을로 가져갔고, 6세기 초 성녀 제노베따가 생 드니
(성 디오니시오) 무덤 위에 대성당을 건축했는데 이곳이 유명한 '성 디오니시오 대수도원
성당(생 드니의 베네딕토 수도원)'이라고 한다.
노틀담 대성당 생 드니의 조각상, 두 천사의 호위 속에 잘린 자신의 머리를 오른 손으로
가슴에 받쳐 들고 서 있는 모습은 죽음을 초월한 확고한 '믿음'을 적나라하게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하느님은 순수한 사랑의 무한이시다.
방편을 계획하는 분이 아니니
생겨나고, 살고, 멸하는 것 모두가
그 무한 속에 사랑이며 자비이고
그러하니
그 자체가 무한 속에 아름다움이다.
나 스스로는 직접 그러한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고
나 스스로 알아가며 확고한 관을 갖고
나 스스로 엄히 행하여 그 길을 걸으니
아, 광명이 보이는구나.
오, 하느님,
이 육신이 잘려도
감사할 뿐입니다.
라고 읊조리고 싶다.
목이 잘렸지만 서 있음은 죽임을 당했지만 살아 있음을,
잘린 머리를 오른 손으로 가슴에 받쳐 들었음은 그 확고한 믿음을 고귀하게 받들어
흩어짐이 없음을 의미하리라.
이 땅에서 잔인하게 희생되신 모든 순교자들도 생 드니의 조각상처럼 그렇게 살아서
가슴에 자신의 머리를 받쳐들고 계실 것만 같다.
오늘날 이 땅에 번성한 가톨릭교회를 생각하고, 세계 각처에서 모여든 다양한 인종의
순례자들로 분비는 유럽 성지들을 순례하면서 '믿음'에 대해 성찰할 수 있었음에 감사
하고, 그 믿음으로 순교하신 분들께 머리를 조아린다.
믿음은 분명 죽음을 넘어 빛을 보게 하며, 그 빛은 세상을 밝혀 더 강한 믿음을 일깨운다.
2017. 7. 9. /최멜라니오
프랑스 드골공항에 가까와지면서 내려다 보이는 농천 풍경
파리 에펠탑을 배경으로 ........
이렇게 맑고 좋은 날 파리 여행을 할 수 있게 될 줄은 몰랐다.
감사할 뿐이다.
파리 외방전교회
외방전교회 성당
성당 내부
외방전교회 정원 한 쪽에 있는 '성모당'
성모당에 모신 성모님 좌우로 순교 성인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성모당 부근에 있는 한국순교성인 현양비. 담을 따라 난 길을 '죽음의 길'이라
한다. 성모당에서 기도를 올리고 이 길을 걸어 선교의 길을 떠났던 선교사들은
이 길을 걸어 다시 돌아올 수 없었다.
외방전교회 선교사로 조선 제 5대 천주교 교구장을 역임한 마리 다블뤼 주교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하였는데 친구인 구노는 이를 슬퍼하며 그 유명한 곡
'아베마리아'를 작곡하였다고 한다.
파리 외방전교회와 우리 가톨릭 교회는 이렇게 피로 맺어진 끈끈한 역사를 갖고
있었다.
파리 노틀담 대성당. 노틀담은 '우리의 연인'이란 뜻으로 '성모마리아'를
의미한다.
노틀담 대성당 내부
노틀담 대성당 3개의 출입구 중 맨 왼쪽 문 위에 잘린 자신의 목을
들고 서 있는 조각상이 있다. 프랑스 최초의 순교자 '생 드니' 주교
이시다.
파리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오래된 건축물들은
그 자체가 예술 작품이었다. 전봇대가 없으며, 각종
간판들로 뒤덮힌 우리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센강에서 본 풍경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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