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은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3남(경상, 전라, 충청도)에서 생산된 물건들의 집합소였습니다.
물길로 한양에 올라오는 물건은 제물포, 마포, 송파로 모였지만 육로는 필히 안성을 경유해야 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중심은 바로 안성이라해도 과언이 아니었지요.
안성?
왜 안성일까요?
3남에서 올라온 물건, 3북(함경, 평안, 황해도)에서 내려온 물건이 안성에 도착하면 비로서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입니다.
거래관계가 끝나니까요.
경제의 중심지가 안성입니다.
한양은 경제의 소비처라면 안성은 경제의 공급처였습니다.
지금은 아주 초라한, 겨우 군에서 시로 승격된 보잘것 없는 도시지만 예전의 안성은 어느 지역보다 매우 활동적인 곳이었습니다.
온갖 물건과 여러부류의 사람이 모이다 보니 시끌법적은 했겠지요.
그래서 태동한게 남사당패 이구요.
하지만 안성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전통이 없습니다.
뭐 내놓을게 없어요.
겨우 한다는 소리가 안성맞춤(혹은 마춤), 유기를 내세울뿐이죠.
사실 안성맞춤에 대한 의미도 엉뚱하게 변질되었지요.
방짜유기가 아닌 깍아서 만드는 유기고 보니 한 벌(밥 그릇, 국 그릇)이 짜 마춘듯 맞을수 밖에요.
그걸 가지고 안성맞춤이라고 생각을 하지요.
천만에요.
3남의 상인들이 3북 생산 물건을, 3북 상인들이 3남의 생산 물건을 미리 마추는곳이 안성 상인에게 였습니다.
안성에다 주문하면 못 구할 물건이 없을 정도였지요.
그러니 안성에다 미리 주문(맞춤) 할 수 밖에요.
안성맞춤은 안성 유기와 별 관계가 없습니다.
바우덕이 축제는 운동장이나 안성천 고수부지가 아닌 장터이어야합니다.
8도 풍물이 모여지는 장터가 바로 바우덕이가 놀던 곳이거든요.
바우덕이 축제 진행을 누가 하고 있나요?
그거요? 용역입니다.
그래서 겉치레 이벤트에 불과한게 바우덕이 축제죠.
시기도 적절치 못합니다.
농번기 추수기에 바우덕이 축제를 합니다.
11월로 미루어야 합니다.
그래야 장 다운 장이 서지요.
축제가 이름은 그럴듯 한데 눈요기꺼리도 없고, 입을 즐겁게 하는것도 없고, 아름다운 상상, 즐거운 상상꺼리를 주지 못해요.
차라리 용인 민속촌에 가는게 훨씬 좋지요.
낙안 읍성에 절반 아닌 절반에 절반 정도만이라도 기획 했으면 좋겠어요.
첫댓글 정말 그럴듯한 지적이시네요~! 정말 안성에 대하여 새롭게 보고 생각하게 되네요.
우선 매주 토요일 하는 남사당(?)공연부터 시내로 장소를 옮겨야 해요. 풍물패가 옛날에는 어디에서 했습니까? 바로 장날, 장터에서 이루어 졌습니다. 시장에 와서 필요한 물건도 사고, 농사일로 힘던 하루를 신나는 풍물놀이를 보면서, 함께 하면서 쉬원한 막걸리를 한잔하면서 고단함을 풀지 않았겠습니까? 남사당은 우리 서민들의 애환과 즐거움과 함께 했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공연 장소는 장터가 되어야겠지요. 지금은 장소도 마땅하지 않겠지만 우리가 문화재를 복원하듯이 복원을 해야지요. 우리가 외국를 가면 늘 구시가지에서 전통 음식과 공연을 즐기지 않습니까? 자고로 축제는 즐기면서 먹자판입니다.
일본에는 축제가 너무 많아요. 우리나라는 전통적인 날(단오, 칠월칠석, 보름 등등)이 많지만 다 얫날 이야기예요. 그렇지만 이곳에서는 지금까지도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어요. 불꽃놀이도 왜 그렇게 많은지, 축제(마쯔리)를 위한 예산은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지만, 우리나라 같으면 예산 낭비니 기타 등등으로 시비 거는 사람도 많을 거예요. 그런데 자세히 보면 모두 서민들을 위한 축제이고 자율적으로 이루어 지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날은 한잔하고, 음식을 즐기는 날이기도 하고요. 외국인들은 그것을 관광하러 오거든요. 그리고 행사장으로 이어지는 거리에는 일본 전통 간이음식점으로 가득차지요. 바로 공연과 음식을 즐기는 거지요.
만약 남사당 공연을 시내의 옛날 장터(재현해서)로 옮긴다면 외지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해서도 쉽게 올 수도 있고, 주변의 상권은 자연스럽게 활성화 될 것입니다. 그래도 많은 세월이 필요하겠지요. 안성보다 더 열악한 진천장은 새로운 볼거리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옛날에 안성이 어떠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살려, 어떻게 안성의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느냐가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저도 남사당 공연을 몇 번 보았는데, 정말 이것은 아니다는 생각이 듭니다(교통, 먹거리, 접근성 등). 전통 공연은 현대식의 화려한 무대가 아니라 옛날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그런 곳이 재격이 아닌가요?
바보? 바보? 바보? 바보가 아닙니다. 아!~ 이건 닉이었네요. 실례. ^^ 남사당패의 본질을 찾아야 합니다. 남사당패는 장날, 장마당에만 등장하는 요즘과 같은 연예인이 아니었습니다. 부잣집 잔치날에도 흥을 돋구던 말 그대로 풍물패입니다. 시 예산으로 운영되니 상설 공연은 당연한 것이고 면, 리에서 초청하면 거의 무상으로 공연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안성의 시민과 함께 언제든 어울리는 풍물꾼이 되어야 합니다. 대신 급료는 그 분들이 생활 할 수 있는 어느정도의 예산이 지원 되어야 하겠지요.
그분들에 그분들의 능력 맞는 등급의 급여가 지급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외지에서 초정하는 공연에는 대가를 받아야 되겠지만, 안성에서 사적이 아니라 공적인 행사에는 다른 스케줄이 없으면 언제라도 공연을 해야 되겠지요. 시의 조례가 어떻게 만들어져 있는지 확인은 못했지만, 시의 예산이 많이 투자되는 만큼, 지역의 경제 활성화에 많은 보탬이 되어야 하고요?
3북 물건의 목적지는 한양인데 왜 한양을 거쳐 안성까지 왔을까요?
내가 잘못 알고 있는지 모르나 북쪽의 개성이 한양 남쪽의 안성 역할을 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안성맞춤의 유래가 유기만은 아니라는 말에는 공감하지만 유기도 안성맞춤에 기여한 것은 틀림 없습니다.
안성유기는 방짜유기가 아닌 주물유기이기 때문에 대량생산할 수 있어서 산업 발전에 따른 수요 증가를 충족시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유기뿐 아니라 안성에서는 종이가 많이 생산되고 목판 인쇄가 발달되어
서울에서 나오는 "경판", 전주(완산)에서 나오는 "완판"과 더불어 "안셩판"이 유명 했고
소설책과 달력은 주로 안성에서 전국에 공급되었습니다.
모든 물목의 목적지가 한양은 아니지요. 예를 들어 직물하면 안동포, 한산모시가 떠오르듯 남쪽의 특산물은 북쪽으로, 북쪽의 특산물은 남쪽으로 교역되었지요. 그 중심에 안성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유기가 안성마춤에 기여 하였지요. 하지만 유기 때문에 안성마춤이란 말이 생긴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안성에서 종이가 생산된 사실은 잘 모르겠습니다.안성에서 목판을 만들만한 목재가 생산 되었는지요?
지금 축제가 열리고 있는 안성천변은 옛날부터 여름이면 난장판이 열려 전국에서 장삿군들은 물론 각종 놀이패들이 모여 놀던 유서 깊은 곳입니다.
영동, 옥천동. 해서 안성천변에 대해선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곳에서 멱감고 놀았으니까요. 우시장도 기억이 생생하구요. 그 뒷쪽으로 전답이있어 늘 다니던 곳이기도 하구요. 바우덕이 축제장이 공설운동장에서 천변으로 옮겨진 이유도 좀 알구요. 그 유서 깊은 곳이란 곳이 지금은 어떻습니까? 뭐 볼게있고 뭔 느낌이 있는지요?
안성천을 원래의 모습으로 살려야 되지요. 물론 제방은 필요하겠지만 안성에 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옛날에는 안성천이 지금보다 많이 넓을 것으로 생각이 듭니다. 직선이 아닌 굴곡 그대로, 그리고 모래톱이 있는 그런 천으로 복원을 해야죠. 본래의 모습은 찾기 힘들어도 엣날의 맛을 느낄 수 있도록, 옛날 어른들의 고증을 받아서, 그래서 그곳이 삶의 일부분이 되도록, 그러면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여 들 것입니다.
종이는 지금의 보개면 기좌리 적재울에서 많이 생산해서 지금도 원료인 닥나무가 야생으로 많이 남아 있습니다.
목판본에 사용한 나무가 생산되었는지는 모르나 그렇게 많은 나무가 사용되지 않기 때문에 그리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안성천변은 그때는 지금보다 자갈이 더 많았고 물이 맑고 고기가 많아서 낚시로 뱀장어도 잡아본 일이 있을뿐 지금보다 볼게 더 없었지요.
다만 그 곳에서 1년에 한번 난장이 열리고 가끔 써커스가 천막을 치기도 하고 씨름판을 벌리기도 했던 추억의 장소일뿐입니다.
전 낚시로 뱀장어를 잡아본 기억은 없습니다. 다만 쌀가마니를 싣고, 혹은 막걸리 통을 열 두어통 실어 나르던 자전거를 열심히 공회전 시키고 그에 따라 발생하는 전기로 개울에서 뱀장어를 잡아본 기억은 있습니다. 옥천교 위로 보를 만들어 물을 가두었었지요. 보개천과 마둔 저수지, 그러니까 그곳이 개산리쪽이죠? 합수되는 지점이죠. 그곳에서 수영도 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볼게 없었나요? 전 볼게 너무 많았었다고 기억 하는데요. 돌, 자갈, 낚시하는 어른들... 둑방길 따라 피어나던 꽃들... 어려서 안성을 떠나서 지명은 잘 모릅니다.
읍사무소 앞으로 해서 그곳이 낙원동인가요? 공원이 있었지요. 개천이 흘렀지요. 지금은 복개되어 사라진것 같은데... 하연간 안성은 수리 안전답. 물길을 사람 사는 동네로 끌어 들여던 낭만의 도시 였습니다. 대림동산! 부유층 별장지로 유명했고 그래서 박살 났지만 풀장이 있었습니다. 예전엔 서울에도 풀장이 몇 군데 없었으니 여름 방학 시즌엔 서울에서 풀장 찾아 오기도 했어던 그런 기억이 납니다.
얼마나 간만에 보는 담론이요 즐거운 문답의 글들인지요....이런 글들이 많이 올라오면 좋겠습니다. 서로간에 관심있는 분야를 펼쳐보이는 즐거움...두 분 모두 고맙습니다. 에거 세분이시네요...즐거운 한마당을 보는 것 같은 유쾌함이 글 속에 들어있네요.
제 기억에는 없는 하지만 즐겁게 상상해 보면서 두분의 이야기를 읽는 재미가 남다르네요~! 그런 추억과 이야기가 담겨 있군요. 저도 여의도하면 어릴적 아버지와 함께 물놀이 하고 땅콩밭을 본 기억과 미군들의 비행장으로 씌이던 기억이 나듯이 말이죠~! ㅎㅎ
여의도 출신 이세요?
ㅎㅎㅎ 여의도 가까이 살았습죠. 핑크님이나 쥔장이나. 쥔장 기억으로는 국민학교 시절에 여의도 샛강에서 스케이트 타던 기억과 친정엄마가 김장배추를 2백포기나 사서 수레꾼과 함께 들려오던 기억이 그리고 동네 사람 모두 모여 김장을 하고 온 동네 사람들에게 그 가족이 먹을 만큼 나눠주던 김장배추와 점심때 김장을 하던 동네 아줌마들 모두 모여 동태국과 웃음으로 포만감으로 들썩이던 기억...아, 언제적 이야긴감요.
저는 여의도 근처 신길1동에서 유년때부터 24살까지 살았네요. 물론 중간에 그러니까 국민 1학년~4학년 1학기까지만 삼각지에서 살았구요. 나머지 결혼전 2년간은 대림동에서 살았구요. 주로 영등포 근처에서 살았네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