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은 성취했나요?
오늘 범어사에서 봉행하는 법회는 ‘백일 지장기도’ 입니다.
여러분은 지장보살, 관세음보살, 또 약사보살, 석가모니 부처님,
이렇게 이름이 다르다 보니까 법당을 여기저기 오가며 발원하고 기도하고 염불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부지런히 신심을 발하며 지극정성으로 기도, 염불, 독경했다고 한다면,
그리고 지금 당장도 아니고 작년, 재작년에도 했었다면,
제가 여러분들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소원성취하셨습니까?
이런 말씀을 드리면,
아! 기도하면 부처님이 우리에게 현몽이라도 나타내고
현실에 무엇인가가 나타나는 것처럼 잘못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런 뜻이 절대 아닙니다.
금강경(金剛經) 보셨지요?
부처님께서는 모양도 아니고, 소리도 아니고, 냄새도 아닙니다.
모양이 아니기 때문에 육안(肉眼)으로 볼 수 없을 것이고,
소리가 아니기 때문에 귀로 부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없을 것이고,
또 부처님은 냄새가 아니기 때문에 냄새를 맡을 수가 없을 것 아닙니까.
제가 “소원성취하셨습니까?”라고 묻는 것은
소리도 아니고 형체도 아니고 냄새도 아닌 부처를 만나 보셨느냐는 겁니다.
이치적(理致的)으로 볼 때
부처님이 바다의 가장 깊은 밑바닥에 계신다면
우리는 파도에만 머물고 있습니다.
소리가 아래까지 도달하는 것은 보통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내려오다가 다른 욕심이 일어나고 망상이 일어나고, 내려오다가 잠이 옵니다.
그러나 반응이 있는 것이 있습니다. 지극정성, 일념입니다.
지극정성의 힘이 강하다 보면 전에 한번 염불할 때
열 번 일어나던 망상이 다섯 번, 세 번, 두 번, 나중에는 한 번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부지런히 밑바닥으로 내려오다 보면
온갖 산란한 생각이 맑아지고 그토록 잠이 왔던 눈이 맑아집니다.
그래서 눈을 딱 떴을 때 밑바닥에 도달해서 소원대로 가져갈 수 있습니다.
소리를 보고 싶으면 소리를 가지고, 형체를 보고 싶으면 형체를 가지고,
냄새가 좋다면 냄새를 가지고.
그런데 여기까지 내려와서 가져가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옛날 조선시대 때, 무학 대사가 성불하고자 관음 기도를 하셨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산신각에서 하루에 삼천 배씩 지극정성으로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서,
“나는 산신령이지 부처가 아니다.
그대가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법당에 가서 부처님께 기도해야지.” 하는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관음전에 가서 아침에 천배, 낮에 천배, 저녁에 천배 해서 하루에 삼천 배를 했습니다.
그렇게 삼천 배를 하면 아침부터 시작해서 마칠 때는 해가 지고 깜깜합니다.
얼마나 지극정성으로 했는지 나중에는 이마에 혹이 생기고 무릎이 찢어질 정도였다고 합니다.
부처도 결국은 내 그림자
그런데 3년 만에 절하다가 홀연히 깨달았어요.
깨치고 보니 아하, 내가 불상을 향해서 절을 하고 있었는데
깨닫고 보니까 내가 나를 보고 절하고 있었구나.
결국 따져보면 내 그림자라는 겁니다.
산도 따져보면 나의 그림자요, 소리도, 모든 불상도 나의 그림자라는 겁니다.
자기 그림자라고 한다면 바깥에 쫓아다닐 필요가 없잖아요.
여러분은 부처님이 되라고 하면 다 자기 나름대로,
보고 들은 대로, 배운 대로, 백 사람이 모이면 아마 백사람 생각이 다 다를 겁니다.
그러나 깨달은 사람은 과거의 부처님, 지금의 부처님,
앞으로 어떤 부처님이든 똑같은 얘기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맨 처음 깨치고 나서 모든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니까
부처님과 똑같은 불심을 갖추고 있어요. 심지어 미물 곤충까지도,
바늘로 찔러서, 발로 밟아서, 느낄 수 있고 감각이 있는 자는 다 불심이 있다고 했어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자기 가장 깊은 속에 불심을 갖추고 있는데도
자신도 모르게 이러쿵저러쿵 온갖 생각을 하다 보니
망상과 집착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잊어버리고 헐떡거리고 있다고 합니다.
제일 가까운 자기 속에 있기 때문에 남의 힘을 빌릴 필요가 없잖아요.
시간이 걸릴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 정말 영리한 사람은 말 한마디를 듣고 깨달아 버린다는 겁니다.
하지만 말 한마디를 듣고 깨닫기가 참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보통으로는 그것이 어렵다 보니 욕심이라는 나쁜 병을 고치기 위해서 약을 먹어야 합니다.
욕심이 나게 되면 아, 내가 또 쓸데없는 욕심을 내고 있구나.
부지런히 남에게 주는 버릇을 하고 남을 도와주는 행을 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무학 대사처럼 3년 동안 지극정성으로 하다가 깨닫고 보니 자기가 바로 부처님입니다.
그 깨달은 지혜를 발견한 것을 문수보살이라고 합니다.
깨달은 지혜대로 행하는 것이 보현보살 아닙니까?
그리고 깨닫지 못해서 괴로움에 시달리는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자비한 마음을 일으킨 것을 관세음보살이라고 합니다.
자기 혼자서의 성불에 만족하지 않고 한 사람도 남김없이
다 구제하고야 말겠다는 원력을 세운 그 행이 지장보살입니다.
내 마음속 전체에 관음보살, 보현보살, 지장보살, 문수보살이 있습니다.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앉아 있는 곳이 도량
그래서 지장보살을 부르든, 관세음보살을 부르든,
보현보살을 부르든, 문수보살을 부르든 그것은 관계없습니다.
무엇을 불렀든 자기가 자기 마음속의 불심을 먼저 찾아보아야 할 것 아닙니까.
불심이라는 것은 결코 관음 도량, 문수도량이라고 해서
남해나 오대산이나 특별한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앉아 있는 이곳, 서 있는 이곳, 밥 먹는 이곳, 일하는 이곳,
울고 있는 이 자리, 화내는 이 자리에 불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제가 제일 처음 말씀드린
“그렇게 기도를 많이 하시는데 소원성취하셨습니까?” 하는 이것이 뜻이 있는 말입니다.
불심은 이미 드러나 있다
부처님이 바라고 있는 소원은 너희들이 나와 같이 불심을 찾아봤느냐.
왜 바깥으로 돌아다니며 헐떡거리고 있느냐.
불심만 찾았다면 권리고 명예고 재물이고 아무 관계 없이 그것을 초월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옛날에 어떤 사람은 안으로 10년 동안 열심히 찾았는데 못 찾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선지식을 찾아가서 깨치는 방법을 알려 달라고 물었습니다.
선지식이 “너는 절에서 무엇을 했느냐”고 되물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전에는 바깥으로 향해서 구했는데
그것은 틀렸다 하고 지금은 안으로 향해서 구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선지식이 빙긋이 웃습니다.
“그렇게 하면 깨닫지 못하지.” 구하고 있기 때문에 얻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구하려고 하는 마음을 내 버리라.” 그 소리에 홀연히 깨쳤다고 합니다.
불심은 이미 드러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생각이 복잡할 뿐입니다.
이 마음(불심)을 여러분들이 보게 된다면 기도 성취한 것입니다.
* 이 법문은 범어사 조실 지유 스님이 ’06년 6월 13일 범어사 설법전에서 봉행 된
‘범어사 100일 지장 기도 고승초청대법회’ 입재 법회에서 설한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