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 18: 27.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29. 참아 주소서
마 18: 27. 탕감하여 주었더니 -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
주인은 그 종을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해 주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 모두에게 주신 구원이다.
구원은 우리의 행위로 얻거나 행위로 이루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주신 선물이다. 그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으므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구원의 원인은 하나님의 긍휼에 있다.
하나님께서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용서해주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며 은혜의 구원이다.
1]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종에 대한 임금의 첫 번째 시혜(施惠)로서 그 근본 동인(動因)은 임금의 측은지심(惻隱地心)이었다.
종이 취한 겸손한 자세나 애절한 간구, 자신의 허물에 대한 진솔한 실토도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직접적이고 원초적인 원인은 바로 임금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었다.
* 눅 15: 20 -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죄인의 구원과 해방은 자신의 선행 여하에 달려 있기 보다는 전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측은히 여기는 마음, 곧 긍휼의 은혜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 롬 11: 30-32 – 30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31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2]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임금이 베푼 두 번째 시혜이다.
임금은 종이 간구한 것 (시간적인 여유, 조절) 이상의 것(완전한 탕감)을 약속했다.
'빚'(*, 다네이온)이란 횡령한 금액이 아니라 형편이 나빠서 생겨진 부채라는 의미를 다분히 내포하고 있다. 이는 임금이 그 종에 대해 상당히 자비로운 자세로 대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탕감하다', '용납하다'의 뜻인 '아피에미'(*)는 주인의 자비나 지불 기한의 연장에 대한 채무자의 간청의 정도를 훨씬 넘는 것임을 나타내 주는 말이다.
'아피에미'는 보통 '용서하다'(forgive)로 번역되는 말이다. 문자적인 의미는 '...을 퇴거시켜 멀리 보낸다.'고 하는 것으로 이는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시고'(시 103: 12) 그것을 멀리 쫓아 보내 버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완벽한 사죄의 은총을 예시해 주고 있다.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탕감해 주는' 임금의 행위는 석방과 사죄의 두 법적 행위를 동시에 의미하고 있다.
이처럼 자신이 지은 엄청난 죄악을 인정하고 용서를 간청하는 죄인에 대해 하나님은 그로 하여금 죄에 대한 양심의 가책에서 해방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죄에 대한 아무런 보상 없이도 그를 의롭다고 선언하신다.
이러한 칭의는
(1)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판단
즉 '불쌍히 여김'에 의해서 행해진 것이지 죄인의 간청에 의해서 행해진 것은 결코 아니다.
(2) 한 번의 선언
우리의 모든 죄는 단번에 탕감 받은 것이다.
(3) 우리의 의인(義認)됨에 있어서는
대속 제물로서의 그리스도의 희생이 있었다.
이 의인(義認) 자격은 우리의 지불 능력의 가부에 의해, 죄의 크고 작음에 따라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죄에의 선언으로 가능하다.
* 롬 8: 33 -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 값에 의하여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일정한 죄악을 용서받음으로써 의롭게 되었는데 그리스도의 대속 또한 하나님의 진적인 은혜와 사랑에 의한 것이다.
* 요일 4: 10 -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그 종의 주인은 그를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 모두에게 주신 구원이다.
구원은 우리의 행위로 얻거나 행위로 이루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주신 선물이다.
그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으므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구원의 원인은 하나님의 긍휼에 있다.
하나님께서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용서해주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며 은혜의 구원이다.
3] 탕감받은 자
성도의 신앙 생활의 종착지은 천국이다. 그런데 이 천국은 어떤 임금이 종들과 결산하여 합격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으로 여기서 어떤 임금은 삼위일체 되시는 하나님을 가리킨다.
하나님과 성도 사이에서 본다면 성도는 엄연히 그의 종 된 처지에서 결산을 받아야 할 사람이요 결산은 곧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한다.
우리 인생들은 하나님 앞에 무한한 빚을 지고 사는 사람들로서 마치 일만 달란트 빚을 지고도 갚을 길이 없이 딱한 처지인 빚진 자와 같다.
그러면 이런 처지에 있는 인생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인지 본문을 살펴봄으로 그 은혜를 찾도록 하겠다.
(1) 우리는 하나님 앞에 빚진 사람이다.
큰 재물을 소유한 부자이신 하나님이 있으셨다. 사람이 인정하건 부인하건 간에 하나님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빚진 자다.
본문에 나타난 일만 달란트의 빚은 수치로 보아서 엄청나게 많은 액수의 빚이지만,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오히려 이보다도 더 많은 액수의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천지 만물을 지으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께 우리가 날마다 들이마시는 공기의 값을 지불해야 한다면, 또 자연적인 모든 혜택에 대한 값을 하나님께서 요구하신다면 우리는 그것을 한 푼 일이라도 갚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허락하셨다. 그중에서도 우리가 가장 귀하게 여겨야 할 귀중한 은혜는 우리의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을 살리시기 위해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신 일이다.
(2) 그 빚은 우리가 갚을 수가 없는 빚이다.
본문의 일만 달란트 빚을 진 종은 그 빚을 갚을 길이 없었다. 그래서 그 주인은 명하기를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으라고 했다. (25절) 이것은 어찌보면 가혹한 처사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빚은 반드시 갚을 것이나 갚을 것이 없으면 그 몸을 팔아서라도 갚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 출 22: 3 - 해 돋은 후에는 피 흘린 죄가 있으리라. 도둑은 반드시 배상할 것이나 배상할 것이 없으면 그 몸을 팔아 그 도둑질한 것을 배상할 것이요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보여주는 말씀이다. 빚은 결국 갚아야 하듯이 죄는 분명히 그 대가를 치루게 되어 있다.
빚진 자가 빚을 갚지 아니한다거나 죄인이 벌을 받지 아니하는 것은 사랑도 용서도 관용도 아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죄의 대가를 치르기 위하여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셨던 것이다.
(3) 그러나 한 가지 길은 있다.
큰 빚을 진 자가 갚을 능력이 없으므로 그는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26절)하며 애원하였다.
엎드린다고 하는 것은 자기를 겸비하게 낮춘다는 뜻으로 교만하지 아니하고 겸손한 태도를 취한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큰 빚을 진 죄인들이다. 하나님께서 칭찬하셨던 신앙의 위인 다윗 왕도 고백하기를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시 51: 3)라고 고백하였다.
우리도 일만 달란트의 빚을 진 자와 같이 하나님 앞에 엎드려 애원해야 할 것이며, 다윗 왕과 같이 우리의 죄를 고백하여야 한다. 그러면 통회하는 자와 함께 거하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축복해 주실 것이다.
* 사 57: 15 -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4) 주인에 의해 탕감받을 수 있다.
측은한 마음으로 종을 바라본 주인은 그 종의 빚을 탕감해 주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자백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 요일 1: 8-10 – 8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5) 탕감받은 자는 이제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주인은 자기 앞에 엎드려 절하며 애원하는 사람을 불쌍히 여겨 놓아 보냈다. (27절) 놓아 보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긍휼하심을 베풀어 주심으로 자유가 부여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유를 부여받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것을 얻는 사람이다. 이처럼 큰 은혜와 긍휼을 입는 자는 타인에게 긍휼을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한다.
* 마 5: 7 -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그러므로 빚을 탕감받은 자로서 자기에게 작은 빚을 진 이웃을 감싸주는 온전한 성도들이 되는 것이다.
주님께서도 주기도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가르쳐 주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빚을 탕감받은 우리들이 이제는 새로운 빚을 더 져서는 안 되며 우리에게 빚진 자가 있다면 주저말고 탕감해 주어야 한다는 성도의 바른 생활에 관한 교훈이다.
마 18: 28. 그 종이 나가서 -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
그 종은 나가서 그에게 100데나리온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100데나리온은 노동자의 100일 품삯에 해당한다. 그것은 물론 적은 금액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1만 달란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 종은 그 동료를 붙들어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라고 말했다.
1] 그 종이 나가서
시간적으로 그리 오래지 않은 때를 암시하고 있다.
이때는 임금으로부터의 빚을 탕감받은 후, 즉 은혜를 받은 그 감격의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의 시간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 종은 바로 그러한 시간에 자신이 용서받은 감격을 적절히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
그 받은바 은혜를 적절히 나누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요, 그분이 설정한 기회가 아닐까.
2]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1데나리온은 보병이나 일반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화폐 단위로서, 6000분의 1 달란트에 해당한다.
1백 데나리온은 1만 달란트에 60만분의 1에 불과한, 참으로 계산할 가치조차 없는 미미한 소액이었다.
24절의 1만 달란트가 인간의 하나님을 향해 지은 죄의 정도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일백 데나리온은 인간이 그 이웃이며 동료인 인간에게 범한 죄의 정도를 상징하는 금액이다.
본문의 '동료'란 문자적으로는 같은 신분의 종이라는 뜻으로 채권자와 채무자가 서로 동료 관계에 있음을 시사한다.
3]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목을 잡고'에 해당하는 원어 '에프니겐'(*)은 미완료 과거 능동형으로서 '그의 목을 조르기 사작했다'는 의미이다.
이는 대수롭지 않은 금액을 빚진 동료를 대하는 탕감 받은 종의 난폭하고도 매정한 성격과 거만한 태도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이 태도는 26절의 엎드려 절하면서 자비를 구하던 자세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강한 자에게는 약하고 약한 자에게는 강한 인간의 일반적인 속성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당시의 로마법에 의하면 채권자는 법정에서 채무자의 목을 잡고 끌고 갈 수 있었다고 한다(F. R, Fay).
따라서 목을 잡는다고 하는 것은 그 당시의 사회적 배경으로 볼 때 상대에게 극한 모욕을 주는 무자비한 폭행(暴行)의 하나로 이해될 수 있다.
빚을 갚으라(*, 아포도스 에이 티 오페일레어스) - 문자적으로는 '만약 빚진 것이 있다면 갚으라.'고 하는 의미로서, 프릿취(Fritzsch)와 올스하우젠(Olshgausen)은 헬라어의 정중한 표현에 속하는 '에이 티(*)가 사용되었다고 하여 이 말이 그 요구를 부드럽게 요청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본문의 문맥 속에서의 이 말은 '네가 가진 것이 있으니 갚으라' 혹은 '빚진 것을 모두 갚으라'는 칼날 같은 강요로 보는 것이 좋다.
이것은 임금이 그 자신에게 베풀었던 결산의 기회를 그는 자신의 채무자에게 전혀 부여하고 있지 않음을 뜻하는 말이다. 그는 채무자와 계산도 해보지 않은 채 그를 만나자 마자 무조건적으로 빚을 갚을 것을 요구하였다.
마 18: 29. 참아 주소서 -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
그 동료가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라고 말하며 엎드려 간청하였다.
1]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파레카레이) 이르되
이는 미완료 과거 시제로서 그 동작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그런데 본문의 의미는26절의 존엄한 부복(府伏)하는 것과는 다른 것으로 단순히 허리가 굽어지도록 간청하는 모습을 뜻하는 것이다.
2]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이 말은 조금 전 그 종이 임금에게 했던 말보다(26절) 좀 더 현실적인 간청이다.
왜냐하면 그 종은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무지 해결될 수 없는 부채였지만 이 동료의 부채는 100여일의 노동으로 갚을 수 있는 소액의 부채였기 때문이다.
동료의 이 호소는 그 종으로 하여금 조금 전의 자신의 처지를 기억시키는 데에는 충분했을 것이다.
|
첫댓글 좋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속 제물로서의 그리스도의 희생이 있었다.
💖사랑의 향기는 만리를 가고도 남습니다. 오늘도 건강과 함께
좋은 사람들과 좋은 향기로 좋은 인연 이어가는 날 되시기 기원 합니다.💖
대속 제물로서의 그리스도의 희생이 있었다.
설교 감사합니다.
대속 제물로서의 그리스도의 희생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