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 가해 10월27일 금요일 [(녹)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수도회] 지금이 바로 하느님의 자비를 실행할 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로마 7,18-25ㄱ
† 복음 루카 12,54-59
◈ 오늘의 묵상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등 우리의 감각 기관을 통해서
세상을 파악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눈이나 귀를 통해 얻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그 이면에 더 깊은 배경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더 나아가
때로는 눈이나 귀가 우리를 속일 수도 있고, 반대로 우리가 온전히
우리의 선입견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착각하고 있음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사람들이 눈앞에 다가오는
하느님의 나라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십니다. 그들은
하느님 나라의 징표로 마치 불가사의한 기적과 같은 일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는 기적 가운데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지극히 일상적인 삶이 정상적으로 자리를 잡을 때
다가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대접받고 존중받는 세상, 저마다
열심히 일하면서 자신의 인격과 소명을 완성시킬 수 있는 세상,
사랑으로 서로의 부족한 면을 채워 주며 그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찾을 수 있는 소박한 세상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우리가 시대의 징표를 잘 읽어 내고 이를
복음의 빛으로 해석하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점점 발전해
가는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만들려면, 우리 세대가 가진 과제가
무엇인지를 알아내고 노력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의
표징은 멀리 있지 않고 바로 우리의 오늘 안에 있습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내 중심이 아니라 주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017년 가해 10월27일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제1독서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7,18-25ㄱ
복음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54-59
세상은 누구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을까요? 혹시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질문을 던지면, “제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저를 중심으로 돌아가겠습니까?”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맞습니다. 우리 하나하나는 그리 대단하지 않지요. 따라서 분명히
‘나’ 중심이 아닙니다. 대신 우리를 모두 사랑하시는 주님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고 있으며, 또한 그 사랑의 대상인 ‘우리 모두’를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우리이면서도 자기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착각 속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반대하거나 또는 제지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 하나 떠올려집니다. 며칠 전에 후배 신부와
만나기로 약속을 했었지요. 그런데 약속장소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고요. 그러면서 이러한
생각이 듭니다.
‘내가 선배인데 나를 기다리게 해? 나를 무시하는 것 아냐? 바쁜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어렵게 시간 내서 왔는데....’
제가 이러한 생각을 왜 했을까요? 바로 제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후배 신부는 급한 사정이 있어서
조금 늦게 약속 장소에 도착했고, 마침 나오면서 휴대전화를 가져오지
않아서 연락도 할 수 없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제 중심으로
생각하다보니 그 후배를 쉽게 판단하고 단죄까지 해버렸던 것입니다.
이때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누군가를 판단하고 단죄하는 모든 것들은
‘나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교만과 이기심에서 나오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주님께서는 땅과 하늘의 징조에 대해서는 올바르게 판단하고
행동하면서, 하느님의 뜻에 대해서는 왜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는지를
꾸짖으십니다. 하느님의 뜻이 담겨 있는 사랑의 실천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있다고 하면서 재판관 앞으로 가기 전까지 어떻게든 합의를
하고 화해해야 하다고 하시지요. 그렇지 못하면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까지 결코 나올 수 없다고 하십니다. 내 중심으로 살아가려는
마음 때문에 용서할 수 없다고 쉽게 말합니다. 내 중심이기 때문에
사랑할 수 없는 이유를 계속해서 말하면서, 주님의 길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내 중심의 마음이 바로 올바른 판단과 행동을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초대교회 시대의 사막의 교부인 압바 아가톤은
이러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판단하는 것은 네 일이 아니다.”
제대로 판단하고 바르게 행동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내 중심이 아니라 주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삶의 준말이다. 우리의 삶은 사람과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아픈 상처도 사람이 남기고 가장 큰 기쁨도 사람으로부터 온다
(신영복).
갑곶성지의 모과. 가을입니다.
듣는다는 것.
만약 듣지 못하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 중에 딱 한 가지만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듣지 못하는 것을 선택하시겠어요?
아니면 보지 못하는 것을 선택하시겠어요? 많은 분들이 듣지 못하는
것을 선택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듣지 못하면 조금 불편할 수는
있어도 보지 못하는 것보다는 덜 불편할 것 같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실제로 행복도는 보지 못하는 사람이 듣지 못하는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고 합니다. 헬렌 켈러가 이런 말씀을 남기셨지요.
“보지 못하는 것은 사물로부터 우리를 고립시키지만, 듣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로부터 우리를 고립시킨다.”
한 번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상대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차라리
보지 말지. 뭐’라면서 안 보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보지 않는다고 행복하셨습니까?
듣는다는 것은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상대방과의 고립이
아닌 일치를 가져올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의 말씀을 침묵 속에, 그리고 기도 안에서 들어보십시오. 진정한
행복을 얻게 해 줄 것입니다.
강화 나들길이 있습니다. 정말로 좋아요.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지금이 바로 하느님의 자비를 실행할 때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10월27일 연중 재29주간 금요일 루카 12,54-59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루카12,57)
지금이 바로 하느님의 자비를 실행할 때
예수께서 군중들에게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12,56-57)
하시며 탄식하십니다. 이는 현세에 대해서는 잘 알면서 왜 하느님의
진리와 자비와 선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하느냐는
지적이십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구원의 때가 가까이 다가옴에도 생명이요 구원으로
온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알려고 하지 않는 군중들에게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12,57) 하고 그들에게 물으십니다.
군중들은 사랑의 질서를 따라 서로 일치를 이루고, 하느님의 생명을
받아들여 모두를 살리는 ‘올바른 일’을 식별하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또 이르십니다.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그러지 않으면 그가 너를
재판관에게 끌고 가, 재판관은 너를 옥리에게 넘기고 옥리는 너를
감옥에 가둘 것이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12,58-59)
법적 분쟁에 휘말렸을지라도 ‘마지막 한 닢’ 곧 마음에 묻어있는 먼지와
같은 미미한 미움이나 분노까지도 털어버리고 화해하라는 권고입니다.
나아가 돈을 건네는 것 이상으로 하느님의 선과 사랑으로부터 멀어진
마음의 희미한 그림자마저도 되돌림으로써 완전한 일치를 이루라는
것이지요.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돌아봅니다. 자신의 건강을 돌보고,
재산을 불리고, 권력을 키우고, 다른 이들보다 더 앞서기 위한 정보나
지식들에 대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쏟고 있습니까. 세상 처세와 생존을
위한 지식들을 찾고 좇아가는 데는 얼마나 빠릅니까? 그러다보니
세상 사정에는 날로 밝아지나 영혼은 어두워집니다.
그렇게 무디어져서 하느님의 눈을 잃어버린 채 아무렇지 않게 효율과
성과, 경제논리와 힘의 논리로 세상을 보고 받아들입니다. 눈과 마음이
현세의 것들에 더 많이 머무르면 머무를수록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지요. 나 또한 세상 이치에는 밝으면서도 하느님
말씀과 사랑에 무지한 위선자가 아닌지 돌아봐야겠습니다.
진정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갈망이 있다면, 그것을 위해 먼저 알고 챙겨야
할 ‘올바른 일’이 무엇인지 스스로 분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아닌 다른 것을 찾는 것보다 더 허망한 것은 없으며,
하느님을 찾아야 할 때 찾지 않고, 사랑해야 할 때 사랑하지 않은 채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보다 더 불행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화해하지 않는 이는 그리스도인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며,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1요한 3,15) 따라서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을 때, 목숨을 다해 사랑해야겠습니다. 지금이 바로
현세의 허상에서 눈길을 돌려 영원한 생명을 위한 하느님의 올바른
일을 할 때이며, 서둘러 사랑하고 화해할 때임을 기억하는 오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서울]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2017년 가해 10월27일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 루카 12,54-59
매일 아침에 규칙적으로 하는 일이 있습니다. 아침 기도를 마치면
컴퓨터를 통해서 뉴스를 검색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세상에 사는
분들에게 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간편하고, 빠르게 세상의
소식을 아는 방법으로 ‘각 신문사의 만평’을 봅니다. 만평은 한 컷의
그림으로 세상의 일을 선명하게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굳이 긴 설명을
하지 않아도 그림을 보면서 세상의 흐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좀 더
깊이 있는 세상의 일을 보기 위해서는 각 신문사의 사설과 논평을
봅니다. 사설과 논평은 만평에서는 알 수 없는 사건의 원인과 대책을
전해주기 때문입니다.
제게 오는 전화나 우편물은 상대방과 보낸 쪽을 보면 대충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지, 어떤 내용이 있을지 알 수 있습니다. 엠이에서
전화가 오면 엠이 주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꾸르실료에서 전화가
오면 봉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성당에서 전화가 오면 강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세무서에서 우편물이 오면 주택세를 낼 때가 된
것입니다. 자동차 보험에서 우편물이 오면 보험료를 낼 때가 된
것입니다. 남대문 경찰서에서 우편물이 오면 교통법규 위반에 대한
범칙금을 내야 합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난다.’는
말처럼 드러나는 현상을 보면 결과를 대충은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알기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열길 물속은 알
수 있지만 한 길 사람 속은 알기 어렵다.’는 속담이 있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을 아는 것은 무척 어려운 것 같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도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내 안에, 곧 내 육 안에 선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음을 나는 압니다.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그래서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하면, 그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은 죄입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깊은 영성을 지닌 분도 자신의 마음을 잘 모르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매일 만평으로 볼 수 있다면, 우리의 마음도 매일 논평과
사설을 쓸 수 있다면, 우리의 마음도 일기예보처럼 미리 알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교통법규를 어기는 사람이 교통법규가 잘못된 것이라고
말 할 수는 없습니다. 교통법규는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서, 모든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과속으로 사고를 낸
사람이 자동차 회사에 불만을 이야기 할 수는 없습니다. 자동차는
속도를 내면 빨리 달리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쁘신 중에도 늘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내면의 소리, 참된
자아의 소리를 들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하고 말합니다. 과연 그대로 됩니다. 또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라고 말합니다. 과연 그대로 됩니다. 여러분은 하늘과
땅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릅니까? 여러분은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합니까?”
믿음, 소망, 사랑이 우리를 참된 식별에로 인도해줄 것입니다. 세상의
뜻을 헤아리는 만큼, 하느님의 뜻을 찾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외모를
가꾸려는 마음만큼, 내면의 정신을 키우라고 하십니다.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는 만큼, 어떻게 살아야 될까를 고민하라고 하십니다. 재산을
늘리려고 노력하는 만큼, 하늘에 보화를 쌓도록 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자연과 환경을 생각하고, 가난한 이들과 연대하며, 모두가 건강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소중한
일들입니다. 매일의 삶에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 중에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아야 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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