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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치바영광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김성섭
어떻게 광풍에서 구원받았나?
□ 사도행전 27장 21-26, 33-37절
지난주에는 바울이 탄 배가 왜 광풍을 만났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날 때 풍랑을 만납니다. 인생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세상의 편안함을 찾아 항해할 때 풍랑을 만납니다. 바울이 탄 배는 풍랑으로 인하여 물건 뿐 아니라 배도 잃어버립니다. 그나마 생명을 잃어버리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입니다. 만약 바울이 없었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을 것입니다. 광풍 속에서도 276명 모든 사람이 머리카락 하나 잃지 않고 구원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276명이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배에 바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이 광풍을 만났을 때, 우리 가정이, 기업이, 내가 속한 믿음의 공동체가 광풍을 만났을 때, 어떻게 그 광풍에서 구원받을 수 있을지 오늘 말씀을 통해 배워야 합니다. 지금 풍랑 가운데 있는 분들이 있다면 오늘 말씀이 힘이 되고 소망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이 광풍 속에서 살 소망을 잃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향해 말합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22) 바울이 살 소망을 잃고 두려워하는 자들을 단지 위로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했을까요? 아닙니다. 바울은 ‘모든 게 잘 될 거예요. 설마 죽기야 하겠어요? 이럴수록 긍정적인 생각을 해야지요. 힘내세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죽음의 두려움으로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안심하라고 말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23절, 24절입니다.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바울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것입니다. 광풍 속에서 두려워했던 것은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이기에 광풍을 만나면 두렵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거센 풍랑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처음부터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기에 두려움이 사라지고 두려움을 이기는 것입니다. 바울이 두려움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아덴에서 고린도에 온 바울의 마음은 두려움으로 가득했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전2:3) 아덴에서 십자가의 복음을 온전히 전하지 못했다는 자책감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자신이 과연 고린도에서 복음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약해져 있었습니다. 고린도에서도 다른 곳에서처럼 유대인들이 바울을 대적하고 비방했습니다. 그렇다고 고린도가 다른 도시들보다 더 심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마음이 약해져 있었기 때문에 그런 핍박들로 인해 더 큰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때 바울이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행18:9,10) 주님의 음성을 듣고 바울은 두려움을 물리칩니다. 승리합니다. 이로 인하여 우상숭배가 만연하고 성적 타락의 극치를 달리던 고린도에 주님의 교회가 세워집니다.
선교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돌아온 바울은 유대인에게 붙잡혀 죽음의 위기를 만납니다. 로마군대가 출동하지 않았다면 유대인들에게 맞아 죽었을 것입니다. 로마 군인들에게 붙잡힌 바울은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밤에 바울이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행23:11) 바울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다시 힘을 냅니다.
풍랑을 만났을 때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위로도 사람들의 권면도 필요합니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안에 있는 두려움을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광풍이 일어 살 소망까지 끊어졌는데 사람의 어떤 말이 우리에게 희망이 될 수 있겠습니까? 천지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주님의 음성,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주님의 음성만이 우리의 모든 두려움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풍랑을 만났을 때에는 반드시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까? 기도해야 합니다. 고린도에 도착한 바울이, 로마 군인들에게 붙잡혀 있는 바울이, 광풍을 만난 바울이 무엇을 하고 있었겠습니까? 의심할 것도 없습니다. 바울은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던 바울이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간절하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광풍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체험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가 기도입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로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 어떤 광풍 속에서도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안심할 수 있습니다.
지난주 말씀 중에 요나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결과 풍랑을 만났고, 결국 요나는 바다에 던져졌습니다.(욘1:15) 그리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큰 물고기가 요나를 삼켰습니다. 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요나가 무엇을 했을까요? 기도했습니다.(욘2:1) 요나가 기도를 마치고 나자 하나님께서 물고기에게 명령해서 요나를 육지에 토하게 하셨습니다.(욘2:10)
하나님께서 우리를 연단하시기 위해 허락하시는 풍랑이든, 요나처럼 불순종해서 만난 풍랑이든, 풍랑을 만났을 때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많은 분들이 풍랑을 만나서 힘들다고 말합니다. 정말 눈앞이 캄캄해 질 정도의 풍랑을 만난 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 풍랑 앞에서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땅이 꺼질 것처럼 한탄하면서도, 망한다고 죽는다고 두려워하면서도 정작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풍랑을 만났을 때 제일 먼저 기도하십니까? 지금도 풍랑 속에서 두려워하고 있는 분들이 있다면, 안타까운 마음으로 묻습니다. 간절하게 기도하고 계십니까?
※ 열흘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사무실에서 말씀을 준비하고 있는데 신 권사님께서 전화를 하셨습니다. 목소리가 다급했습니다. 얼마 전에 남편 되시는 다무라 상 회사에 세무조사가 나온다고 속장기도모임 시간에 기도를 부탁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이틀에 걸쳐 세무조사를 마친 세무서 사람이, 세금이 많이 나오지는 않을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해서 그 말을 믿고 안심했습니다.
월말이라 권사님이 직원들 월급을 주려고 은행에 갔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회사 통장에 있었던 700만 엔 가까이 되는 돈이 모두 없어진 것입니다. 직원들 월급을 주지 못하면 새로 시작된 공사가 진행될 수 없고, 그렇게 되면 회사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순간에 광풍을 만난 것입니다. 은행에 확인해 보니 세무서에서 세금으로 회사 돈을 모두 빼내어 간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 말도 없이 말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려고 다무라 상이 세무서로 출발했을 때, 권사님이 저에게 전화를 하셨던 것입니다. 기도해 달라고 말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저도 얼마나 황당했는지 모릅니다. 아무리 세무서라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한 마디 말도 없이 이럴 수가 있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권사님께 물었습니다. ‘권사님, 세무서에서 빼간 돈 중에, 얼마를 돌려받으면 좋겠습니까?’ 세무서에서 다 돌려줄 일은 없을 것이고, 하다못해 얼마라도 돌려받아야 하는데, 구체적으로 기도하기 위해 그렇게 물었던 것입니다. ‘목사님, 그 돈은 직원들 월급이에요. 다 필요한 돈이에요. 직원들이 월급을 받지 않으면 일을 하지 않을 텐데, 그러면 정말 큰일이에요.’ ‘권사님, 함께 기도합시다. 정말 기도밖에 없습니다.’
잠시 후에 권사님께 전화가 왔는데 세무서에서 한 푼도 돌려줄 수 없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순간 제 눈앞이 깜깜해 지더라구요. 풍랑도 보통 풍랑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낙심하고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그래서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기도하자고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세무서에서는 한 푼도 돌려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 상황을 알게 된 거래처에서 중앙기업이 망하면 안 된다고 하면서 700만 엔이라는 큰돈을 빌려준 것입니다. 천천히 갚으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연말에, 지금처럼 경기가 어려울 때에 선뜻 그렇게 큰돈을 빌려줄 회사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다무라 상도 권사님도 저도 정말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입니다. 주님이 하셨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저는 권사님 기업에 일어난 일을 보면서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했습니다. 어떤 풍랑을 만났다 할지라도, 사람의 힘과 지혜와 방법으로 도무지 빠져나갈 수 없는 풍랑이라 할지라도,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구원해 주시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풍랑을 만났습니까? 두려우십니까?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고 있습니까? 살 소망까지 잃어버리고 표류하고 있습니까? 낙심하지 마십시오. 포기하지 마십시오. 기도하십시오. 간절하게 기도하십시오. 광풍에서 바울을 구원하신 주님께서 우리도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면 끝난 것입니다. 거기서 어떻게 살아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요나처럼 기도하십시오. 사람은 못해도 하나님은 하십니다. 하나님은 물고기 뱃속에서라도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19:26)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면 의심하지 말고 믿어야 합니다. 바울은 풍랑으로 인하여 살 소망까지 잃고 두려워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전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25)
간절히 기도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면 그대로 되리라고 믿어야 합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의심하면 안 됩니다. 의심하면 주님이 역사하실 수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1:6-8)
두 마음이라는 것은 믿음과 의심이 함께 있는 마음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에는 믿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믿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마음속에 의심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정말 그게 가능할까 하고 말입니다. 마귀가 우리 마음에 가라지를 심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심는 대표적인 가라지중의 하나가 바로 의심입니다.
마귀가 의심의 가라지를 심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의심을 물리쳐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의심이 들어올 때 ‘의심하면 안 돼, 절대로 의심하면 안 돼’ 하면 할수록 의심이 점점 더 강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의심을 물리칠 수 없습니다. 의심은 영적 전쟁입니다. 의심을 가져다주는 것이 마귀인데, 마귀와 싸울 때 우리의 의지나 결단만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의지와 결단은 모두 육에 속한 것입니다. 의지와 결단도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마귀를 물리칠 수 없습니다. 영적 전쟁은 영적으로 싸워야 합니다. 우리의 힘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 싸워야 합니다. 그래야 이깁니다. 의심을 이기는 것은 믿음이고, 그 믿음의 근원은 우리가 아니라 주님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12:2)
한 밤 중에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제자들이 유령인 줄 알고 무서워서 소리 지를 때, 예수님께서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마14:27)고 말씀하십니다. 유령인 줄 알았는데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가 말합니다.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28)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오라’고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렸습니다. 그리고 물 위를 걸어서 예수님께로 나아갔습니다. 그렇게 계속해서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하는데, 베드로가 불어오는 바람을 보고 말았습니다. 바람을 보는 순간 베드로 안에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두려움이 임하자 베드로가 물에 빠져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에 빠져 들어가는 베드로를 붙잡아 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31)
베드로가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았을 때에는 물 위를 걸었습니다.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은 베드로 안에서 생겨난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얻어지는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자에게 주시는 믿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분명 ‘오라’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고, 그 음성에 순종하여 배에서 내렸습니다. 그리고 물 위를 걸어갔습니다. 만약 베드로가 계속해서 예수님의 음성을 믿었다면 절대로 바다에 빠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예수님에게서 눈을 돌려 바람을 바라보는 순간, 그 믿음 안에 의심이 들어왔고, 그래서 바다에 빠져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바람을 보면 안 됩니다. 환경을 보면 안 됩니다. 사람을 보면 안 됩니다. 연약한 자신을 보아서도 안 됩니다. 그러면 광풍을 뚫고 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자신과 사라에게 자식을 주시겠다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음성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사라에게 자식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사라의 경수가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상식으로 보면, 의학으로 보면, 과학으로 보면, 경수가 끊어졌으니 절대로 임신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그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경수가 끊어진 아내를 바라보았다면, 결코 믿음을 지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의심에 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이삭은 태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백 살이 된 자신이나 경수가 끊어진 사라를 보지 않았습니다. 말씀하신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의심을 물리치고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롬4:18-21)
바울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주님의 말씀대로 될 것을 믿었습니다.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주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광풍에서 구원받기 위해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믿음의 말입니다. 광풍을 만난 사람들에게는 믿음의 격려가 필요합니다. 풍랑 속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은 것은 바울 혼자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은 사람도 바울 혼자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276명의 목숨이 구원받은 것은 아닙니다. 276명이 광풍 속에서 무사히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은 바울의 믿음의 말, 격려의 말 때문이었습니다.
풍랑을 만나고 두 주가 지났습니다. 배 안에 있던 사람들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을지 보지 않아도 뻔합니다. ‘이제는 끝났어. 우리는 이렇게 바다에서 죽는 거야. 이 풍랑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가 있겠어?’ 살기를 포기하는 말들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죽기에는 너무 억울해. 왜 내가 이런 저주를 받아야 해? 이렇게 죽게 된 것은 선장 때문이야, 선주 때문이야. 백부장 때문이야.’ 불평과 원망의 말들이었을 것입니다. ‘죽기 전에 사랑하는 가족들 얼굴이라도 한 번 봤으면 좋겠다. 죽기 전에 딱 한번 ○○○ 라도 했으면 좋겠다.’ 죽음을 이미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말들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말들이 오고 가는 상황에서 살고자 하는 소망을 어떻게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이라는 사람이 일어나서 외치는 것입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머리카락 하나 상하지 않고 구원받을 것입니다.’ 확신에 찬 바울의 말을 들으면서 죽었던 소망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바울의 말을 듣고 사람들이 다시금 구원의 소망을 붙잡는 것을 보면서 잠언 11장11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성읍은 정직한 자의 축복으로 인하여 진흥하고 악한 자의 입으로 말미암아 무너지느니라.”
276명이 탄 배에는 죽음의 그늘이 깊게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실재로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 한 사람의 말이 276명의 운명을 바꾸기 시작합니다. 바울의 믿음의 말이, 바울의 격려의 말이 죽었던 그들의 마음을 살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음이 살아나고 소망이 살아난 276명은 구원받았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말이 가진 힘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의 말로 인하여 성읍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잠언 18장 21절 말씀 그대로입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광풍을 만났을 때 끝났다고, 소망이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런 말은 자기 혼자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를 힘들게 합니다. 지중해를 잘 아는 선장과 선주가 ‘여러분, 이런 광풍에서 살아남는 것은 기적입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런 광풍에서 살아남은 사람을 나는 본적이 없습니다.’ 틀린 말입니까? 아닙니다. 맞는 말입니다. 선장의 경험과 지식과 그동안에 지켜보았던 수많은 사건들을 근거로 한다면 분명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님이 없는 경우입니다. 주님이 없다면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함께 하신다면 상황은 전혀 달라집니다.
우리는 빌립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빌립은 오천 명을 먹이기 위해서는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요6:7) 그런데 지금 자신들에게는 이백 데나리온이 없고, 그래서 오천 명에게 떡을 먹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틀린 말입니까? 아닙니다. 맞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없다면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빌립의 말은 틀렸습니다. 그 자리에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빌립은 예수님 어떤 분이신지를 몰랐습니다. 우주만물의 주인이신 예수님께 오천 명을 먹이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빌립의 말을 듣고 있던 안드레가 답답했습니다. ‘아니 지금 빌립이 뭐라고 말하고 있는 거야? 예수님 앞에서, 이백 데나리온이 없어서 사람들을 먹일 수 없다고 말하다니 완전 예수님을 무시하고 있네?’ 그리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께 가지고 와서 말합니다. ‘예수님, 이 많은 사람에게 이건 정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저도 압니다. 그러나 예수님이라면 이것을 가지고 어떻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잖아요.’ 안드레의 이 믿음의 고백을 통해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십니다.
오천 명 앞에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밖에 없다 할지라도, 빌립처럼 말해서는 안 됩니다. 빌립의 말은 우리 안에 있는 소망을 죽입니다. 믿음을 죽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역사를 가로막습니다. 안드레처럼 말해야 합니다. 바울처럼 말해야 합니다. ‘이 풍랑이 여러분을 절대로 해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머리카락 하나 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여러분을 구원하십니다.’
바울은 사람들 앞에서 떡을 가지고 축사합니다. 감사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먼저 자신이 떡을 떼어 먹습니다. 바울의 믿음의 말 격려의 말을 듣고, 바울의 감사기도를 들은 사람들이 안심하고 떡을 받아먹습니다.(36) 안심했다는 말은 담대해졌다는 말입니다. 죽음의 두려움으로 떨고 있던 사람들, 살 소망을 잃어버리고 낙심하고 있던 사람들의 마음이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살아나자 음식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음식을 먹고 힘을 얻은 276명은 바울의 선포대로 모두 구원을 받았습니다.
광풍을 만났습니까? 상황을 보면 도무지 소망이 보이질 않습니까? 선장과 선주도 불가능하다고 말합니까? 그럴수록 믿음으로 말하십시오. 그럴수록 감사기도를 드리십시오. 바울처럼 소망을 잃고 낙심과 두려움 속에 있는 사람들을 믿음으로 격려하십시오. 내 인생이, 내 가정이, 내가 속한 믿음의 공동체가, 내 입에서 나오는 말로 인하여 살아날 수도 있고 반대로 내 입에서 나오는 말로 인하여 더 큰 어려움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빌립처럼 말하면 주님께서 역사하실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바울처럼 말할 때 276명의 생명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 또 명심하십시오. 우리의 믿음은 나 혼자만을 살리는 믿음이 아니라 내가 속한 가정과 교회와 세상을 살리는 믿음입니다.
광풍에서 구원받아 상륙한 곳은 멜리데라는 섬이었습니다. 멜리데섬은 미항에서 800km나 떨어져 있는 이탈리아 반도 남쪽에 있는 섬입니다. 원래 바울 일행이 겨울을 지내고자 했던 그레데 섬의 뵈닉스보다 훨씬 더 로마에 가까운 섬이었습니다. 바울이 탄 배는 광풍을 만났지만, 그 광풍으로 인해 계획보다 빨리 로마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백부장의 잘못된 선택으로 광풍을 만났지만, 그 광풍이 로마로 가는 바울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광풍이 바울의 비전을 무너뜨릴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 광풍을 통해 바울은 더 빨리 로마에 갈 수 있었습니다. 그 광풍은 바울의 소망을 더 빨리 이루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광풍을 만났다고 불평하거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광풍 때문에 주님이 주신 소망이 물거품이 되면 어떻게 하나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어떤 광풍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바울처럼 주님께 기도하면, 바울처럼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나아가면, 바울처럼 믿음의 말을 하고 믿음의 말로 사람들을 격려한다면, 그 광풍으로 인하여 더 빨리 소망의 항구에 도착할 것입니다. 2012년의 광풍으로 인하여 2013년에 우리는 더 빨리 소망의 항구에 도착할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승리합시다. 주께 영광!
치바에서 김성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