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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기쁨과 진정한 회개(고후7:9-16)
1.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과 회개 (9)
사도바울은 마게도니아에 머무는 동안 육신적으로 심한 환난과 고통을 당했지만 심령으로는 진정한 기쁨을 소유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잘못과 악행을 지적한 사실 때문이 아니라 그것으로 말미암아 저들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의 편지를 받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처음에는 심한 근심에 빠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 근심으로 인해 그들은 도리어 진정한 회개에 이르는 은혜를 누렸다. 이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기본적인 신앙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일 저들에게 올바른 신앙의 기초가 형성되어 있지 않았더라면 상심에 빠졌을 때 회개가 아니라 다른 인간적인 방편을 마련하려 했을 것이다.
인간들은 대개 ‘근심거리’를 만나게 되면 정반대의 상이한 반응을 보이게 된다. 하나는 자신을 돌이켜보아 반성적 자세를 취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문제를 감추려 하고 그 근심이 발생하게 된 원인을 원망하며 회피하고자 애쓰는 것이다. 종교적인 양심에 연관되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사도행전에는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정반대의 반응을 보였던 사람들에 관한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 베드로가 백성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을 때, 그것을 듣고 마음에 찔려 하나님께 돌아온 자들이 있었던가 하면 도리어 더욱 악해진 자들이 있었다. 동일한 하나님의 복음을 듣게 되었지만 듣는 사람에 따라 반응이 전혀 달랐던 것이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행2: 37,38); “저희가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 쌔......”(행5: 33)
베드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했을 때(행2:36;5:30), 하나님을 경외하던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양심에 찔려 순종의 방법을 알고자 하여 어떻게 해야 할지 저들에게 질문했다. 그 때 베드로는 상심에 빠진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했다.
그러나 종교적으로 교만한 유대인들은 베드로의 설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그의 말을 듣고 도리어 분노에 빠져 소요를 일으키며 사도들에게 강하게 저항했다. 나아가 자기들을 훌륭한 종교인으로 치켜세워주지 않고 불리한 말을 쏟아내는 사도들을 죽이려는 자들 마저 많이 있었다.
심판의 개념이 내포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모든 인간들이 나름대로 선악간의 다양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다. 그들 가운데는 그 말씀에 순종하려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그에 무관심하거나 배척하는 자들도 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들은 자신의 악한 모습을 돌아보며 하나님 앞에 뉘우치며 회개하게 된다.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은 바울의 첫 번째 편지를 받은 후 깨달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게 되었다. 그들이 회개할 수 있었던 것은 저들의 악한 모습을 보고 진심으로 부끄러워하며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근심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베푸신 놀라운 은혜였다.
따라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바울의 질책과 권면을 통해 진정한 유익을 얻게 되었으며 저들로 하여금 근심에 빠지도록 한 바울의 말이 저들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근심함으로 인해 회개 하게 된 것을 보며 진정으로 기뻐하게 되었던 것이다.
교회의 지도자인 교사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성도들을 책망했는데 그것으로 인해 지나친 상처를 입거나 시험에 빠지는 자가 있다면 말씀을 전달한 형제에게도 매우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성도들이 성숙하게 자라야 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자신의 잘못을 지적당하여 책망 받게 되었을 때 그에 대한 하나님의 뜻 안에서의 올바른 근심을 하고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가장 아름다운 일일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야 할 바는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적절한 근심의 필요성이다. 인간이 타락한 세상에 살면서 항상 만족스럽게 즐거움을 누리며 살고자 하는 것은 자신의 욕망에 근거하는 것일 뿐이다. 나아가 이 세상에 살아가는 하나님의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는 일이 전혀 없다면 진정한 회개에 도달할 수 없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말씀을 통해 자신의 더러운 모습을 보며 근심할 수 있다는 사실은 감사한 일이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세를 가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고린도교회 성도들도 바울의 편지를 받고 그런 과정을 밟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울의 편지로 말미암아 심각한 상처를 입거나 해를 받은 것이 아니라 도리어 커다란 유익이 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2. 참된 근심과 진정한 회개 (10, 11)
모든 인간들은 타락한 세상에 살아가면서 나름대로 다양한 형태의 근심거리를 가지게 된다. 상식을 가진 보통 사람들이라면 결코 그것을 피할 수 없다. 신앙적인 삶에 연관되는 문제들 역시 그와 마찬가지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신앙의 본질에 연관된 근심을 받아들이고 처리하는 방법에 따라서는 그것이 이로운 역할을 하게 되는가 하면 경우에 따라서는 해롭게 될 수도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올바르게 근심한다면 성도들에게 이로움을 끼치게 된다. 그것은 영원한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동반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적인 근심에 빠져 하나님의 뜻에 저항하면서 몸부림친다면 해로울 뿐 아니라 매우 위험한 지경에 이를 수 있다. 그런 근심은 사망에 이르게 할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하나님 뜻 안에서 올바르게 근심할 수 있어야 한다. 그 근심은 곧 갈등양상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갈등관계의 형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그 갈등은 이 세상에서의 인생살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과 같지 않다. 여기서 말하는 갈등이란 죄에 대한 본질적인 인식에 근거하는 성도들의 신앙내면의 현상이다. 사도바울은 로마교회에 편지하면서 그에 대한 고백적인 기술을 하고 있다.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7:21-25)
바울은 자기가 깨닫게 된 죄로 말미암아 심한 갈등을 겪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물론 그것은 이성과 경험적인 판단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참된 갈등과 더불어 근심할 수 있는 것은 성도들이 마땅히 소유해야만 할 지혜이다. 올바르고 성숙한 방법으로 그 갈등에 대한 근심을 할 때 구원에 이르는 회개의 마음이 생성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적인 잘못된 근심에 빠져 인간적인 목적추구에 급급하게 되면 사망에 갇히게 된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바울의 권면과 충고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반성적으로 근심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진지하고 간절한 신앙의 마음을 회복하게 되었으며 저들의 무고함을 증명하기도 했다. 또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거룩한 분노를 느끼게 되어 깊은 경각심을 갖게 되기도 했다.
그리고 어떤 사안에 대해서는 복음에 대한 간절한 관심과 거룩한 열망을 가졌으며 악행을 저지른 자들에 대해서는 엄한 징계를 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저들의 정결한 삶의 자세를 드러내 보여주었다. 이 모든 것들은 올바른 근심과 더불어 있게 된 참된 회개에 기초하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건전한 갈등과 근심에 따른 올바른 회개에 대한 이해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참된 회개란 과연 무엇인가?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야 할 바는, 죄에 빠진 인간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올바른 회개를 할 수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신앙이 어린 인간들은 자신이 죄 또는 잘못이라 인정하는 범위 안에서만 회개하고자 한다. 즉 아무리 악하고 위험한 죄라고 할지라도 자신이 악으로 판단하여 승인하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는 결코 회개하지 않는다.
이 문제는 특히 종교적인 열성을 동반하는 문제에 있어서 더욱 크게 두드러져 나타난다. 타락한 인간들에게는 자기의 열성적인 종교 행위가 악한 것인지 선한 것인지 제대로 분간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한 자들이 인간적인 능력과 재물로서 교회에서 크게 봉사하는 것을 더 기뻐하시지 않는다. 따라서 하나님은 많은 액수의 연보를 하는 것을 무조건 좋아하는 분이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성경에 분명히 증거 되고 있는 바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자신은 제사와 번제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씀하셨다. 신약성경의 히브리서 기자도 그와 동일한 교훈을 주고 있다. 어리석은 인간들은 자신의 재능과 함께 많은 돈을 들여 정성을 다해 제물을 마련해 바치면 그것을 하나님이 무조건 좋아할 것이라 믿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그것들 자체를 좋아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6:6);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느니라”(히10:5-7)
신앙이 어린 교인들과 어리석은 자들은 자신의 능력과 종교적인 판단에 따라 정성껏 준비한 예물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자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마련한 제사와 제물 자체를 기쁨으로 여기시지 않는다. 그것은 본질을 벗어난 제사 행위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 지닌 진정한 의미가 아니라 인간들의 목적을 성공적으로 이루기 위한 일종의 뇌물의 성격을 지니고 있을 따름이다. 즉 그것을 통해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이득이 될 만한 것을 얻어내고자 하는 욕망에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위에 언급된 히브리서 기자의 기록은 그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되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드리는 제사와 제물을 원하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친히 예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원하시는 분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제사와 제물을 통해 앞으로 보내실 메시아를 예표해 보여주셨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오늘날 우리 역시 그와 동일한 원리를 소유하고 있다. 타락한 인간이 자신의 재능과 능력을 동원해 열심히 연보를 하고 최선을 다해 봉사한다고 해도 그것 자체로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 다수의 어리석은 인간들은 그런 것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잘 보여 세상에서 복을 받아 잘 살고자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대에는 그런 미숙한 생각을 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야 할 바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연관되지 않는 상태에서의 모든 종교적 행위들은 결코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 목적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의 종교적인 행위들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이 아니라면, 저들의 모든 종교 활동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욕되게 하는 행위일 수 있다. 이는 마치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그것이 마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인 양 착각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가 여기서 유념해야 할 바는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하지 않은 악한 행위를 하면서도 절대로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나아가 타락한 인간들은 죄 된 본성상 그것을 정확하게 간파하여 회개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종교적인 행위를 하면서도 스스로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난 종교 활동을 하면서도 그것을 통해 도리어 하나님으로부터 상을 받을 것으로 착각하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일들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항상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현대의 많은 종교인들은 교회에 열심히 충성하고 많은 액수의 연보를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할 것이라 막연히 확신하고 있다. 그들은 교회에서 열심히 노래 부르고 열성적인 종교 생활을 하면 하나님이 좋아할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잘못된 교회에서 이기적인 충성심으로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가 역겹게 여기신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죄에 빠져 오염된 세상에 살고 있는 인간들은 올바른 회개조차 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그 깨달음을 통해 성도들의 신앙이 점차 자라나게 된다. 그것이 성숙한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더욱 겸손한 자세를 가지도록 한다.
은혜의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그런 나약성을 잘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며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 당연히 빌 바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는 우리를 위해 대신 간구해 주시는 것이다. 거기에는 우리의 회개의 마음도 포함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면서 그 점을 언급하고 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8:26,27)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참된 성도들은 거듭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연약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인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 가운데 우리가 특별히 깨달아야 할 바는 죄에 물들어 있는 인간들은 하나님께 마땅히 기도해야 할 내용조차 올바르게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 스스로는 전적으로 무능하고 부패한 존재일 따름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에 의해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며 올바른 기도를 하게 된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일에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인간들 스스로는 죄라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것들 가운데 반드시 회개해야 할 무서운 죄악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성령 하나님께서 세상에 살아가는 연약한 자기 자녀들을 위해 탄식하며 간구하시는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숙한 성도들은 회개할 때 자기의 이성적이며 경험적인 판단에 따라 회개하는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자신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내용들 가운데 실상은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종교적인 욕망행위가 있지 않은지 민감하게 살피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 것들을 스스로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기에 성령 하나님께 모든 것을 온전히 맡기고 겸손한 마음으로 그에게 의존하는 지혜를 소유해야만 하는 것이다.
3. 바울의 편지와 위로 (12, 13)
고린도교회 내부에는 그 동안 하나님의 뜻을 경시한 채 불의를 행한 자들이 상당수 있었다. 이는 또한 그들의 악행으로 말미암아 불의를 당한 성도들이 많이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지금에 와서 저들의 과거를 들추어냄으로써 불의를 행한 자나 불의를 당한 자를 어떻게 하기 위해 편지를 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는 과거에 교회 가운데서 불의를 행했던 자들을 꾸짖고 문책하려는 것이 주된 목적이 아니며, 부당하게 불의를 당한 자들의 편이 되어 저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한 것도 아니라는 의미이다. 또한 바울은 악한 불의를 보면서 윤리적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 그 편지를 쓴 것이 아니었다.
바울이 그 편지를 쓴 근본적인 목적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간절한 신앙자세가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드러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바울의 관심은 이 땅에 살아가는 교인들의 일반적인 형편을 넘어 하나님을 경배하며 섬기는 주님의 몸 된 교회에 있었다. 그의 심중에는 항상 하나님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거룩한 교회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린도교회는 첫 번째 편지를 받고 나서, 바울이 원했던 대로 하나님의 뜻이 순조롭게 이루어져 갔다. 성도들이 바울의 책망과 권면을 들은 후 잠시 동안 근심에 빠졌으나 저들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회개함으로써 하나님께로 돌아설 수 있었다. 그에 대한 소식을 들은 바울과 그의 일행은 커다란 위로를 받게 되었다.
바울은 자기에게 그 반가운 소식을 전해준 디도가 고린도교회에 대해 안심하는 것을 보고 더욱 기쁜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교회에 대해 안심한다는 것은 수준 높은 신뢰를 의미한다. 오늘날 지상의 교회들도 항상 그런 신뢰의 자세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도 우리는 바울을 비롯한 여러 사도들의 편지를 교회 가운데 두고 있다. 우리는 그 내용을 읽으면서 지식만 얻을 것이 아니라 우리의 부족하고 나태한 모습을 직시하며 하나님의 뜻 안에서 근심하고 회개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날로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4. 참된 자랑과 바울의 기쁨 (14-16)
사도바울은 디도에게 고린도교회 성도들에 대해 자랑했음을 밝히고 있다. 그들이 바울의 첫 번째 서신을 받고 진정으로 회개함으로써 신앙적인 삶을 드러내는 실천이 있었다는 것이다. 바울은 사실이 아닌 내용을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디도에게 말했던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일들을 사실 그대로 말했다.
바울이 디도에게 그런 말을 했을 때 고린도교회의 삶이 그것을 분명하게 드러내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과장하는 표현이 되어 부끄러운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고린도 지역의 성도들은 바울이 디도에게 말했던 것처럼 신앙적인 삶을 잘 보여주었다.
그 전에 고린도교회에 전한 바울의 모든 말들은 진실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바울이 디도에게 저들에 대해 자랑한 내용들도 참된 것이었다. 그 모든 것들이 이제 사실로 드러나게 되었다. 바울은 그 점을 칭찬하며 저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졌던 것이다.
하나님의 몸 된 교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성도들의 참된 신뢰를 기본적인 요소로 하고 있다. 만일 성도들 간에 서로 신뢰하지 못한다면 모든 것이 위선과 거짓으로 가득 찰 수밖에 없다.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교회를 향해 하나님의 진리를 그대로 전했듯이 자신의 편지를 진리로 수용한 고린도교회를 신뢰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 역시 이와 동일한 원리 가운데서 신앙생활을 하며 살아가야 한다. 우리가 바울을 비롯한 여러 사도들을 완전히 신뢰하듯이, 의미상 그들 또한 우리를 신뢰하고 저들의 자랑거리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성숙한 교회란 겉보기에 그럴듯한 모습을 띤 자들이 모인 종교집단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신뢰와 인정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이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맨 처음 디도가 고린도 지역에 도착했을 때 그를 두려워하며 떨리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단순한 공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사도의 요청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온 사실을 깨달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디도는 그들이 자기를 영접하여 순종했던 사실을 기억하고 그들에 대한 더욱 깊은 관심과 사랑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그에 관련된 모든 내용들을 디도를 통해 듣게 된 바울은 이제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온전히 신뢰할 수 있게 되어 더욱 기뻐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진리로 말미암은 온전한 신뢰가 없는 상태에서는 결코 교회 가운데 진정한 감사와 평강이 존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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