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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는 공회
요 11:45-57
45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그를 믿었으나
46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알리니라
47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48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49 그 중의 한 사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50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51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52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53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54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거기를 떠나 빈 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머무르시니라
55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우매 많은 사람이 자기를 성결하게 하기 위하여 유월절 전에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더니
56 그들이 예수를 찾으며 성전에 서서 서로 말하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그가 명절에 오지 아니하겠느냐 하니
57 이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신고하여 잡게 하라 명령하였음이러라
요 11:45-57 / [예수를 죽이려는 음모;마 26:1-5, 막14:1-2, 눅 22:1-2] 마리아와 함께 그 일이 일어난 것을 본 많은 유대인들이 마침내 예수를 믿게 되었다. 46) 그러나 그 중에는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고해 바친 사람도 있었다. 47) 그래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 일을 논의하기 위해 의회를 소집하였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가 별별 이적들을 다 보이고 있으니 말입니다. 48) 만일 우리가 그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온 백성이 그를 따르게 되고 그렇게 되면 로마 정부가 우리 유대 정부의 자치권을 빼앗을 게 아닙니까?' 하고 떠들어댔다. 49) 그때 그들 중에 있던 그해의 대제사장 가야바가 말하였다. `당신들은 어리석기도 하구려. 50) 이 한 사람을 온 백성을 대신해 죽게 하면 되지 않소? 왜 온 민족이 망해야 하오?' 51) 이 말은 가야바가 대제사장의 위치에서 예수께서 온 백성을 위해 죽으셔야 한다는 예언을 한 것으로 자기 생각대로가 아니라 영감을 받아서 한 말이었다. 52) 곧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해서도 죽으실 것이라는 사실을 예언한 것이다. 53) 그때부터 유대인 지도자들은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였다. 54) 그래서 예수께서는 공식적인 일을 중단하고 예루살렘을 떠나 광야가 인접해 있는 에브라임으로 가서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머물러 계셨다. 55)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워 오자 많은 사람들이 정결 예식에 참여하려고 유월절이 시작되기 전에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왔다. 56) 그들은 혹시 예수를 만날 수 있을까하여 찾아다니다가 성전 안에서 `어떻게들 생각하십니까? 그분이 유월절 축제에 참석하실까요?' 하고 서로 물었다. 57) 한편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를 붙잡으려고 누구든지 예수를 보거든 즉시 보고하라는 공고를 내었다.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예수를 죽이기로 작정합니다. 예수가 부활의 주님이심이 분명하게 드러났으나 오히려 유대인들은 그분을 죽이려고 모의한 것입니다.
많은 유대인이 그를 믿었으나(45-46)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는 표적을 보고 많은 유대인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이 기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드러내는 사건이었습니다. 나흘이나 되어 썩어 가는 자를 그 무덤에서 불러낼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 일부는 분명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메시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리새인들에게 찾아가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을 이야기했으며,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을 선동해서 주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47-53) 나사로가 살아나는 사건에 유대인들은 깊은 위기감을 느끼며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합니다. 예수께서 자신들의 권위와 기득권을 해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가야바는 예수 때문에 유대인들이 죽어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48). 오히려 예수께서 유대민족을 위해 죽어야 할 것을 말했습니다(50). 가야바는 유대 사회의 안정을 위해 예수 한 사람을 희생시키자는 제안을 한 것이지만, 실은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뤄가고 계셨습니다(51-52). 가야바를 통해 예수의 대속적인 죽음을 예언케 하신 것입니다.
유월절이 가까우매(54-57)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웠다는 말은 이제 주님의 공적 사역의 끝이 임박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이 유월절에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유월절 전에 예루살렘에 올라가 자기를 성결케 했습니다. 예를 들어 시체를 만졌으면 그는 여러 번 씻는 것과 제사를 통하여 그 자신을 성결케 해야 했습니다. 슬픈 사실은 그들이 유월절의 양이신 주님을 죽일 계획을 세우면서 그 자신에 대한 성결을 추구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적용: 유월절 의식을 치르면서도 많은 유대인은 유월절의 주인공인 예수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에도 정작 중요한 주님과의 교제가 빠져 있지는 않은지 돌아봅시다.
기적을 목격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반면에 부인할 수 없는 기적을 목격하고도 여전히 불신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기적을 경험한다고 모두가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기적을 체험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를 온전히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신앙의 본질입니다.
< 설 교 >
한 사람이 죽어서
이동휘 목사
1. 유대 종교 최고 지도자들인, 대제사장, 바리새인, 산헤드린 공회 의원 등이 예수께서 행하신 여러 표적(기적)들에 대해 듣거나 직접 보기도 했습니다.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가 되게 하신 기적, 오병이어의 기적(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2만 여명을 배불리 먹이시고 12광주리가 남은 기적), 태어날 때부터 소경되었던 사람을 고치신 표적, 그리고 가까이는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난 나사로를 무덤에 찾아가서 다시 살리신 기적 등 이러한 많은 기적과 권세있는 가르치심에 수많은 백성들이 따르게 되었습니다. 상당수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의 기적과 가르치심을 보고 들으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로마의 식민지에서 구원할 정치적 메시야로 삼고자 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그 많은 무리들을 정치세력화해서 로마 당국에 저항운동을 한다면 엄청난 파장을 불러올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저항운동이나 독립운동이 식민지 유대에서 일어나게 될 경우, 로마 당국에서 이를 제압할 병력을 파병할 것은 당연하고, 그간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주어진 일말의 자율 통치권과 기득권을 상실하게 될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렇게 될 경우에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그간 누리게 된 정치, 경제적 특권과 종교적 제반 특권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은 물론 종교 지도자들이 누리고 있는 여러 분야에 걸친 경제적 특권과 이권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던 것입니다.
(눅 16:14)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그래서 예수께서 행하신 일들로 인해 유대 종교 지도자들 무리가 한결같이 초긴장 상태에 들어간 것입니다. 특히 죽은 나사로의 부활 사건은 여러 가지 면에서 막강한 파괴력을 가진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400여년 동안 나라 잃고 여기 저기 흩어져 로마의 식민지 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이 학수고대하던 메시야가 바로 그 죽은 나사로를 살려낸 예수가 아닌가 했던 것입니다. 죽은 사람을 살려냈다면 얼마든지 ‘죽은 나라 민족’도 살려 낼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추종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예수를 그대로 방치해 이 사건을 비화로 해서 민중 봉기가 일어나게 되면, 로마 당국이 이스라엘 민족을 완전히 멸망시키는 것이 아닌가 해서 산헤드린이 긴급 의회를 열고 그 대책을 숙의하게 되었습니다. 산헤드린에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양파가 있었습니다. 바리새파는 전혀 정치적인 당파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은 율법의 모든 세칙을 규정하고 백성들이 그에 따라 생활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율법을 간섭하지 않는 한 누가 정권을 장악하든지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편 사두개파들은 극히 정치적인 당파였습니다. 사두개는 부유하고 귀족적인 당파였습니다. 또한 그들은 로마 정부에 협력적인 당파였습니다. 자기들의 부귀와 안일과 권력자로서의 지위를 향수하고 유지할 수만 있다면 그들은 기꺼이 로마에 협력하는 것을 양심에 조금도 거리낌없이 만족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은 모두가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산헤드린에서 지배적인 지위에 있었던 것은 분명히 그 제사장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발언권을 갖고 있었던 것은 그 모두가 사두개인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 사두개인들은 제사장들의 무리들로 조직된 종교 단체이면서도 정치적인 관심이 대단한 사람들로 세속적이고 타협적인 무리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정치와 잘 타협하여 자기들의 권력을 유지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이 사두개인들이 목표로 삼고 있던 유일한 것은 자기들의 정치적, 사회적 권력과 명망을 어떻게 유지하느냐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우려했던 것은 예수와 그 추종자들이 일으키는 소요사태였습니다. 당시 로마는 식민지에 대해서 관대한 정책을 펴나갔지만 시민 폭동에 대해서는 항상 확고하고도 무자비한 방법으로 시민 폭동을 진압했던 것입니다. 만일 예수가 주도하여 소요사태가 발생한다면 로마당국의 폭압은 뻔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의심할 여지도 없이 사두개파는 부귀와 권력, 그리고 영광을 누리고 있던 그 권위있는 지위에서 추방되고 말 것입니다. 그들은 분명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제사장들의 무리이면서 아직까지도 예수가 옳으냐 아니냐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전혀 관심 밖이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이것이 나의 안일과 권위에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 하는 것에만 촉각을 곤두세웠을 뿐이었습니다. 오직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로마 당국에 협력하여 모든 정책을 세우고 추진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보다도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에 우선 순위에 두었던 것입니다. 그와 같은 것이 마치 나라 민족을 위한 것인 양 서슴없이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요11:48)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더군다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산헤드린 의회에서 서로 권력 다툼을 일삼는 무리들로, 바리새인들은 육체의 부활과 천사를 믿는데 비해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전혀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죽은 나사로의 다시 살아난 사건은 바로 바리새파의 교리가 옳고 사두개파의 교리는 틀렸다는 중대한 증거가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바리새파는 이 사건을 빌미로 국민 대중의 지지 기반을 더 한층 확고히 하여 사두개파의 기세를 꺾고 의회의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했고, 사두개파는 그 사건을 빌미로 나라와 민족을 위하는 척 하면서 정치적 문제로 삼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 때 대제사장 가야바가 한 마디 합니다.
(요11:49-50) 그 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이 말은 소위 대제사장이라고 하는 사람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한 사람을 죽여서 나라가 무사하다면 죽이자는 말입니다. 유대 종교의 최고 지도자인 대제사장이라면 죽은 자의 부활을 놓고 하나님의 뜻을 묻고 행동했어야함에도 그런 것에 전혀 마음이 없이, 한 사람을 죽여서 나라가 무사하다면 죽이자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으로서 먼저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정치적 수완을 부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이 죽여서 나라가 조용하고 자신의 권력이 유지된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자는 것입니다. 적은 수의 희생으로 많은 이익을 보자는 공리주의(功利主義) 발상입니다. 이같은 공리주의는 분명히 죄악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당한 것은 한 사람의 의인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리 다수가 원하는 바일지라도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면 그것을 추종해서는 안됩니다. 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원칙입니다. 소수의 의견이 분명히 옳은 것이라 할지라도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부결되면, 그 옳은 것이 폐기되고 그릇된 것이 옳은 것이 되고 마는 우매한 것이 바로 민주주의입니다. 하나님은 다수를 싫어하십니다. 진리는 다수결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리란 한 사람이 주장해도 어디까지나 진리입니다. 대제사장 가야바는 다수 백성들을 위하는 길로 공리주의를 택하여 한 사람, 의인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자는 것입니다. 나라 민족이 사는 길은 그 나라에 의인이 많아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나마 하나 있는 의인을 죽여서 여러 사람이 기득권을 지키고 속 편하게 지내자는 것입니다.
(잠28:2) 나라는 죄가 있으면 주관자가 많아져도 명철과 지식 있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장구하게 되느니라. (잠29:2)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
간디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내가 한 마디의 거짓말을 해서 평생 원하는 이 나라가 독립된다 해도 나는 거짓말을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거짓말 위에 세워지는 나라는 곧 무너질 것이니까.” 그가 평생을 나라 독립을 위해 바친 몸이지만 자기 한 마디의 거짓으로 나라가 독립된다 해도 거짓말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가야바는 유대 종교의 최고 지도자인 대제사장으로서 의냐 불의냐를 묻지 않고, 나라가 안정 속에 무사할 것이라면 얼마든지 불의를 행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2. 대제사장은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고 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어린 양을 찾으러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눅 19: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첫 사람 아담의 죄로 인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사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둘째 사람, 즉 하늘에서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 한 사람이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희생되시므로 온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희생되셨습니다.
(고전15:45-47) (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 (47)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요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예수께서는 기적을 행하는 능력과 권능으로 민중들을 세력화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로마 식민지에서 해방하고자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죽어야만 하는 인간을 구원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기 위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그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희생하시므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나라 민족의 안정을 위한다는 구실로 예수를 죽이고자 했지만, 그것은 순전히 자신들의 기득권 보호와 당리당략을 위한 술책으로 결국 이스라엘 나라는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자기 나라를 구하고자 취했던 바로 그 수단이 나라 민족을 멸망케 했던 것입니다. 예수를 잡아 죽이는데 합작한 로마와 이스라엘은 결국 다 망하고 말았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살리는 길은 예수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살리는 길입니다. 나라와 민족이 사는 길은 예수 믿는 의인들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정치가가 없어 망한 나라가 없습니다. 대기업이 없어 망한 나라가 없습니다. 학교 교육이 없어 망한 나라가 없습니다. 오직 의인이 없어 나라와 민족이 망했다는 것이 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역사의 산 교훈입니다. 하나님은 이 나라 역사의 관심을 핵무기나 어떤 정부, 정책에 두지 않습니다. 오직 의인의 존재 여부에 두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 시편33:8-22을 보겠습니다.
(시33:8-22) (8)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상의 모든 거민들은 그를 경외할지어다 (9) 그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으며 명령하시매 견고히 섰도다 (10) 여호와께서 나라들의 계획을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하게 하시도다 (11) 여호와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의 생각은 대대에 이르리로다 (12)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13)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굽어보사 모든 인생을 살피심이여 (14) 곧 그가 거하시는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들을 굽어살피시는도다 (15) 그는 그들 모두의 마음을 지으시며 그들이 하는 일을 굽어살피시는 이로다 (16)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세어도 스스로 구원하지 못하는도다 (17) 구원하는 데에 군마는 헛되며 군대가 많다 하여도 능히 구하지 못하는도다 (18) 여호와는 그를 경외하는 자 곧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19) 그들의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그들이 굶주릴 때에 그들을 살리시는도다 (20) 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그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 (21) 우리 마음이 그를 즐거워함이여 우리가 그의 성호를 의지하였기 때문이로다 (22) 여호와여 우리가 주께 바라는 대로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베푸소서
예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마18:12)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전체를 위해서는 사람 하나쯤 희생시키는 것을 파리 죽이는 것보다 더 쉽게 하는 것이 현대인입니다. 모든 것을 숫자로 옮겨서 풀이하는 현대인에게 다수가 선이고 소수가 악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에 반기를 들고 계십니다.
(마18:14)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아흔 아홉의 중요한 것은 그 구성분자인 하나 하나가 값어치가 있기 때문이지 99이라는 많은 숫자 때문에 가치가 부여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께서 만일 오늘 이 땅에 오신다면 이렇게 외치실 겁니다. “어린 딸 한 명의 인격을 존중하십시오. 어린이 하나도 집안 체면이나 가문의 명예나 부모의 얼굴을 세우는 희생물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나라의 번영을 위한다는 구실로 작은 한 개인이나 힘없는 민중이 희생되어서는 안됩니다.” “대자본 축적을 위하여 작은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악마적인 경제론을 철회하십시오. 대자본이 흘리는 공해로 한 인간도 생명을 잃을 수는 없습니다.” “비겁한 99명보다 바른 말 할 수 있는 한 명의 인간이 천국 건설에 더 필요합니다.” “모두가 손을 드니 나도 손을 드는 눈치꾼 숫자의 노예보다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하는 인간을 나는 기다립니다.” “소수의 신체 장애자, 적은 수의 정신 박약자들도 하나의 인간으로 대접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똑똑하고 건장한 자들만의 주님은 아닙니다.” 나라 민족이 잘 되는 길은 의인들이 대접받는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나라 민족이 잘 되고자 하면 한국 종교의 정치가 사라져야만 합니다. 교회가 만민의 기도하는 집,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이 되지 못하고 강도의 소굴이 되어갈 때,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어왔습니다. 교회가 교회로서 책임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그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심판은 먼저 교회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교회가 나라 민족의 파숫군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할 때 삼킴을 받지 아니 합니다. 교회가 나라 민족의 파숫군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게 될 때, 나라 민족은 위기를 당하게 되고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56:9-12을 보겠습니다.
(사56:9-12) (9) 들의 모든 짐승들아 숲 가운데의 모든 짐승들아 와서 먹으라 (10) 이스라엘의 파수꾼들은 맹인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들이라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들이요 누워 있는 자들이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니 (11)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요 그들은 몰지각한 목자들이라 다 제 길로 돌아가며 사람마다 자기 이익만 추구하며 (12)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를 잔뜩 마시자 내일도 오늘 같이 크게 넘치리라 하느니라
나라와 민족을 위하는 길은 예수가 살고 내가 죽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먼저 죽어야 나라 민족이 삽니다. 미국의 34대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그의 취임식 때, “(잠14:34)의는 나라로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는 성구 위에 손을 얹고 선서를 했다고 합니다. 나라 민족이 잘 되는 길은 나라의 지도자들이 의로워지는 것입니다. 미국 역사에서 새 나라 헌법을 제정하기 위하여 헌법 제정 회의가 필라델피아에서 소집되었을 때였습니다. 그들은 한가지로 의견일치를 못보고 서로 분열하여 퇴장하려고 할 때에 벤자민 프랭크린이 말했습니다. “여러분, 잠깐만 기다립시오. 이 나라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 가운데 탄생한 국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모두 기도의 응답을 믿습니다. 우리 다같이 무릎을 꿇어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 드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이 어려운 궁지와 문제에 해답을 주시기를 기다립시다.” 그러자, 그들은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고, 드디어 불후의 문서인 미합중국 헌법을 제정하였던 것입니다. 기도로 세운 헌법은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고, 기도로 세운 나라는 번영합니다. 미국 의사당에는 기도실이 있다고 합니다. 예레미야 5:1말씀처럼 이 땅에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렘5:1)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헬라의 철인 디오게네스는 대낮에 등불을 켜고 아테네 거리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조국의 위기를 막아 낼 인물을 찾는다.”고 했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의인이 요구되는 시대에 처해 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하는 길은 우리 예수 믿는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발견되는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살고 가정이 살고 나라 민족이 사는 길은 예수를 죽이는 길이 아니라 내가 죽고 예수를 살리는 길뿐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정황이 어떠할지라도 진리를 사수하며 사명을 감당하는 가정과 교회, 그리고 나라 민족의 의인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를 죽이려고 모함하는 사람들
하용조 목사
우리는 주변에서 두 부류의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 부류는 무슨 일을 만나든지 항상 밝고 긍정적이며 미래 지향적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다른 한 부류는 어떤 일에서든지 항상 어둡고 부정적이며 과거 지향적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긍정적인 사람은 어떤 어려움이나 슬픔을 당해도 좋은 방향으로 해석하고 희망적으로 받아들입니다. 반면 부정적인 사람은 어떤 기쁨이나 행복이 와도 나쁜 방향으로 해석하고 절망적으로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전자에 속합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아 성령 안에 거한다면 언제나 희망입니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생각합니다. 적극적인 생각은 믿음을 낳지 않지만, 믿음은 적극적인 생각을 낳고 죽음마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세 가지 명령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삼일 동안 죽어 있던 시신이 벌떡 일어났습니다. 나사로가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세 가지를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에 도착하셔서 ‘무덤을 막고 있는 무겁고 큰 돌문을 옮겨 놓아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실 때 언제나 먼저 장애물을 제거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에서 기적을 베푸시려 할 때 돌문이 막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돌문을 옮기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무덤에 함께 온 사람들은 이 말씀을 잘 듣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항상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기적을 베푸시고 복을 주시길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장애물이 있습니다. 즉시 우리는 그 장애물들을 치워야 합니다.
주님의 축복을 받는 사람들의 집을 방문해 보면 언제나 깨끗합니다. 자신이 축복을 받을 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고 힘들게 살아도 항상 자세와 자부심을 흩뜨리지 않습니다. 자신이 주님의 축복을 받을 사람이란 것을 아는 영적 자세가 중요합니다. 우리의 영적 자세는 항상 밝고 긍정적이며 미래 지향적이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무덤의 돌문을 옮겨 놓자, 예수님께서 무덤을 향해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너라”하고 두 번째로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향해 큰 소리로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기적은 하나님께서 만드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도록 믿음으로 장애물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야 나오너라”하고 외쳤을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어둠의 세력들에게 명령하십니다. ‘더러운 귀신들아, 어둠의 세력들아, 물러가라!’ 예수님께서 명령하실 때 모든 저주들은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드디어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그는 걸어서 무덤 밖으로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명령하셨습니다. ‘나사로의 얼굴에 감겨 있는 수건을 벗겨서 자유롭게 다니게 하라’.
우리는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도 세상의 습관, 문화, 가치관에 얽매여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끊어 버리고 믿음의 사람이 돼 당당하게 세상으로 나아가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부활을 본 사람들의 반응
죽어서 삼일 동안 무덤에 갇혀 있던 나사로가 살아나 무덤 밖으로 걸어 나왔을 때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만약 우리가 현장에 있었다면 크게 비명을 질렀을지도 모릅니다.
나사로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와! 예수님은 특별하신 분이구나.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시는 분이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 말씀을 보면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나사로의 부활에 세 가지로 반응했습니다.
첫째는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는 현장을 목격하고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며 놀라운 은혜에 동참하는 무리들입니다. 45절 말씀입니다.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의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저를 믿었으나.”
나사로의 무덤 앞에 있던 유대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 눈앞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볼 때 죽은 사람이 살아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나 얼굴에 수건을 감은 채 무덤 밖으로 나온 것입니다.
신앙에는 이성의 요소와 믿음의 요소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성적으로 진실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이성이 믿음의 전부는 아닙니다. 이성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이성으로 사람이 변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성의 문을 통과하면 하나님의 영이 사로잡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사람의 이성이나 상식으로 나사로의 부활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직접 기적의 현장을 보았고,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현장에 있었던 모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46절 말씀을 봅니다.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의 하신 일을 고하니라.”
나사로의 부활을 본 사람들 중에 마리아에게 간 사람들도 있었고, 바리새인들에게 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과 능력에 몹시 불편해 했습니다. 그런데 나사로가 살아난 것이 사실이지만, 유대인들이 바리새인들을 찾아간 이유는 아직도 그들에게 부정적인 생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유대인들은 바리새인들의 눈치를 보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을 찾아간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보고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대로 말하지 않고 아마 축소했을 것입니다. 아니면 바리새인들의 비유를 맞추려고 빈정대듯 말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두 번째 무리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부정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믿겠다고 말하지도 못하는 회의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사람들
세 번째 무리들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그들의 태도를 47절과 48절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가로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이 구절을 자세히 살펴보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회의를 소집해 ‘예수라는 사람이 기적과 표적을 많이 행하니 아주 골치 아프구나. 기적을 많이 행하면 사람들이 그를 따르고 믿게 될 터인데, 이는 종교적으로 큰 위기를 초래할 것이다’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라는 사람이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며 죽은 사람을 살리는 바람에 종교적 질서를 망가뜨리고 우리의 기득권을 뿌리째 흔들어 놓고 있다’고 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진리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진짜 기적을 행하셨는지도 아주 무관심했습니다. 오로지 그들의 관심은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에만 있었습니다.
그들의 또 다른 관심은 정치적인 것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로마 사람들로부터 분할 통치권을 위임받아 백성들을 통치하고 있었는데, 만약 이것이 뒤집혀지는 날에는 자신들의 입지가 궁색해지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님에 대한 회의적이고 부정적인 생각과 다른 차원입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입장은 예수라는 사람을 잡아다 죽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 부류의 사람들 중에 어디에 속해 있습니까? 물론 세 번째 부류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미 우리는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삶의 의미와 목적이 되어 주신 주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어야 복 받은 사람입니다.
부정적이고 회의적인 생각으로 가득 찬 유대인들은 기적을 목격하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교회에 나오지만 구원이 확실하지 않는 사람들과 별반 다름이 없습니다. 한 발은 세상에, 한 발은 교회에 두고 있습니다. 예배에 참석하지만 이중적인 삶의 자세로 언제나 괴로워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구원이 필요합니다.
저는 온누리교회의 교인이라고 100% 성령 충만하고 구원의 확신을 가졌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 모든 분들에게 성령 세례가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대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처럼 진리에 대해 관심이 없고, 오직 정치적 경제적 목적으로 예수님을 저울질하는 사람들은 회개해야 합니다.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를 시작하다
이런 상황에서 돌발적인 사태가 발생합니다. 49절과 50절 말씀입니다.
“그 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 하는도다 하였으니.”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는 예상 밖의 예언을 했습니다. 그 예언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불리한 것이었지만, 예수님에겐 유익한 것이었습니다. 51절과 52절 말씀에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위의 두 구절을 조심해서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 말은 가야바가 스스로 한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한 것이다’라는 사실입니다. 두 구절은 예언적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악한 자를 통해서도 예언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의 아내는 밤에 꿈을 꾸고 그 내용을 남편에게 전달했습니다. 불신자나 반기독교인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예언이 역설적으로 전달되는 것입니다. 사탄이 역사하고 유대인들의 요구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했지만, 그로 인해 온 인류가 구원받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오묘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이런 돌발적인 예언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로 하여금 예수님를 잡아 죽이려는 음모에 동기를 부여해 주는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53절 말씀입니다.
“이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모든 사건의 이면에는 음모가 있습니다. 정말 우연히 이뤄진 사건도 있지만, 대부분은 우연을 가장한 음모가 숨어 있습니다. 기막힌 음모일수록 더욱 우연을 가장합니다. 예수님의 처형 뒤에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조직적인 음모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예수님을 죽일 것인가 하고 여러 각도로 고심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대중을 선동하고 총독 빌라도에게 협박까지 했습니다.
요즘 인터넷에서 음란물 사이트가 독버섯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안티 기독교 사이트들도 많아지고 있습니다. 더욱이 교회를 비판하는 소리가 갑자기 많이 들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안티 기독교 사이트가 부단히 작업한 결과입니다. ‘기독교를 파멸시키자, 이 땅에서 교회를 몰아내자, 교회는 민족의 적이다’며 무서운 기세로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가 말살될 때까지 투쟁하겠다고 나서고 있습니다. 안티 기독교 사이트들은 연대해서 성경의 진리에 정면으로 대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요, 온 인류의 구원자요, 이 시대에 기적을 베푸시는 유일한 희망이라는 진리를 전면 부인하고 있습니다.
위기를 이겨내는 신앙
예수님께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영적 도전을 어떻게 받아들이셨는지 살펴보겠습니다. 54절 말씀을 읽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여기를 떠나 빈 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유하시니라.”
예수님께서 험악한 분위기에서 한 발 물러나셨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강하게 대응하실 것을 기대하겠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방법을 택하신 것은 ‘십자가’라는 중요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목표는 대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투쟁하거나 혁명을 일으키지 않으셨습니다. 가장 위대한 투쟁, 혁명은 십자가를 지는 것임을 아셨습니다. 십자가로 사랑, 용서, 복음의 혁명이 일어날 것을 아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어디로 갔는지 찾기 시작했습니다. 55절 말씀을 봅니다.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우매 많은 사람이 자기를 성결케 하기 위하여 유월절 전에 시골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더니.”
유대인들은 유월절에 성결 의식을 치르려고 각처에서 예루살렘으로 몰려듭니다. 56절에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가 예수를 찾으며 성전에 서서 서로 말하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저가 명절에 오지 아니하겠느냐 하니.”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싶어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57절 말씀입니다.
“이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고하여 잡게 하라 명령하였음이러라.”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행방을 찾기 시작한 것은 예수님에게 체포 명령이 내려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는 세력들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흐름은 오늘 우리에게도 적용되고 있습니다. 2000년대에 들어서 한국 교회는 여러 위기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안티 기독교 세력에게 공격을 받고 있는 교회는 어떻게 이런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본문 말씀으로 세 가지를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 교회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부활 신앙입니다. 부활 신앙을 회복한다면 어떤 압력, 위기, 고통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둘째, 체험 신앙입니다. 도덕이나 윤리로 세상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복음의 진리를 체험하는 신앙만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이성과 지식과 정보로 세상을 구원할 수 없지만, 복음과 부활의 능력을 체험한 신앙은 능히 세상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셋째, 순교 신앙입니다. 이제 우리는 순교를 결심할 때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우리 시대는 순교자를 필요로 합니다. 그만큼 영적으로 예민하게 물질 문명과 싸우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적당히 예수님을 믿는다면, 결코 이 시대를 헤쳐 나가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생명을 걸고 헌신할 때 세상은 변화될 것입니다. 온누리교회 모든 성도는 부활 신앙, 체험 신앙, 순교 신앙을 소유하길 축원합니다.
민족을 살리는 그리스도인
요 11:50-52 / 이중표 목사
역사적으로 위대한 사람들은 거의가 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희생하고 목숨을 바쳐 살아간 사람들입니다.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공동체를 위해서 희생한 사람들의 정신은 위대한 삶으로 승화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민족 역사를 보더라도 이 민족을 지키고 역사를 살리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바쳤습니다. 특별히 우리 민족 역사에서 세계사에 자랑할만한 사건으로 남아있는 것이 기미년 삼일절 독립만세입니다.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이 민족이 자유와 평화를 갈구하면서 외쳤던 독립만세는 삼천리 방방곡곡에 메아리쳤던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일본은 창과, 무기와, 총칼로 우리를 진압했지만 우리는 끝까지 평화와 무저항주의로 저들에게 민족의 독립을 호소했습니다. 여기에서 희생된 애국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애국자들의 희생 정신이 이 민족 역사를 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애국자는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나라와 민족을 사랑해서 목숨을 바친 위대한 순국 선열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이순신, 유관순, 안중근입니다.
성경은 이 민족의 가장 큰 애국자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한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이스라엘 민족의 애국자일 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의 애국자이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 민족의 애국자이십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50절)
‘한 사람이 죽어야 이스라엘 민족이 망하지 않는다’ 이것은 당시에 이스라엘의 제사장이었던 가야바가 한 말입니다.
당시에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로서 로마의 학대를 받으며 가난과 굶주림과 헐벗음의 천대속에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고 수많은 표적으로 굶주린 백성들에게 떡을 먹이고, 병든 자들을 고치고, 심지어 죽은 자까지 살려내자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당시에 교권주의자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그리고 공회원들은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로마와 결탁해서 자신들의 이권을 유지하면서 살아왔는데 만약에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민중봉기를 일으킨다면 로마의 권력자들이 이 모든 책임을 자신들에게 전가하면서 자기들의 지배체제를 위협할까봐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민중들의 봉기를 예방하고 자신들의 지배체제를 지키려고 모여서 회의를 하는 중에 가야바가 이 말을 합니다. “한 사람이 죽어서 민족이 망하지 않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 되는 것을 어찌 알지 못하느냐 이 한 사람을 죽여야 한다.”
참으로 무서운 말입니다. 가야바는 한 사람을 죽여야 민족이 산다는 말을 하고 있지만 그 내면에는 한 사람이 죽어야 자신들이 산다는 매국적 사상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가야바가 한 말에 대하여 요한 사도는 이렇게 해석을 했습니다.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가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그 민족 뿐만 아니라 흩어진 전 세계의 하나님의 자녀들을 모아서 하나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라”
다시 말하면 가야바는 자기 욕심으로 예수를 죽여야 된다고 말했지만 하나님은 그의 입을 통해서 그 민족 뿐만 아니라 전 세계 민족을 위하여 예수가 죽어야 된다는 것을 미리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또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구원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예수님은 그 예언대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이스라엘을 살리시고 온 세계 민족을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서 죽으실 뿐만 아니라 한국 민족을 위해서도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한국 민족의 최대의 애국자를 말한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라고 말해야 합니다.
이 민족을 사랑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창세 전부터 ‘내가 죽으므로 이 민족이 산다’는 생각을 가지고 죽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어떤 사람도 애국 운동을 하면서 죽었지 ‘내가 죽으므로 이 민족이 산다.’ 그 말을 한 사람은 없습니다. 이순신도 임진왜란 때 남해 바다에서 왜구들이 침략한 배를 격침시키고 왜놈이 쏜 총에 맞아 죽었지만 그가 이 민족을 구한 것은 아닙니다. 조금 희생했을 뿐입니다. 유관순도 민족을 위해서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죽었지만 그가 민족을 살리지는 못했습니다. 안중근은 하얼빈에서 이등박문을 저격해서 죽였지만 이등박문 하나 죽였을 뿐이지 민족을 살린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께서 유대인뿐만 아니라 전 세계 민족을 위하여 죽으실 것을 예언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민족을 살리는 위대한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예수와 함께 살기 때문에 나 자신도 이 민족을 살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분명한 비전과 의식을 갖고 있어야 됩니다.
민족을 살리는 믿음
이 민족을 살리는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나 한 사람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세계 인류가 산다는 생각을 가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나라가 어지러울 때마다 각 분야에서 저마다 목소리를 냅니다. 정치가들은 정치가들이 나라를 살린다고 열변합니다. 사업가는 경제발전만이 나라를 번영시킨다고 말합니다. 군사 전문가들은 국방력을 강화하는 것이 나라 안보의 최우선이라고 주장합니다. 교육자들은 새로운 지식, 조기 교육을 통해서 새로운 조국을 건설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진보적인 사상가들은 사회를 개혁해야 나라가 산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만 나라가 바로 선다’
이것은 기독교 2천년 역사뿐만 아니라 수천년에 걸친 세계 역사에서 분명히 말합니다. “나라가 망한 것은 정치, 경제 때문도 아니요, 군사력 때문이 아니라 죄 때문에 망했다.” 나라의 흥망성쇠가 어떤 군사력이나 정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의가 강물처럼 흘러야 됩니다.
“의인은 나라를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잠 14:36)
오늘 이 민족을 살리는 믿음이 뭡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를 죽여서 우리를 살려주셨다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똑바른 믿음을 가져야 됩니다. 미군철수를 반대하는 기도나 북한 핵을 제거해 달라는 기도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기도는 민족 양심을 회복하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빈약할 때 미국을 의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미국은 우리의 좋은 우방입니다. 이 나라에 선교사를 파송해서 복음을 전해준 나라입니다.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독립할 때 가장 좋은 연합국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가 해방후 가난할 때 식량을 원조해 주었습니다. 경제 협력을 통해서 우리나라가 오늘의 경제의 부를 이루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미국의 도움을 입고 여기까지 왔다 할지라도 미국을 의존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의존해야 합니다.
오늘 이 민족 역사를 보십시오. 이 민족을 살리는 것이 뭡니까? 기독교의 복음이 이 민족을 살리고 있습니다. 누가 뭐라고 말하든간에 복음이 이 민족을 살렸습니다. 복음이 이 민족에 들어올 때부터 이 민족은 미신을 타파했습니다. 우상을 철거했습니다. 우매한 지식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리고 위대한 지도자들을 수없이 배출했습니다. 민주주의 정신도 기독교에서 싹튼 것입니다.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 대부분이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이것이 다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이 민족을 살리는 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무슨 믿음입니까? 자기를 죽이는 믿음입니다. 예수 한 사람이 죽어서 민족을 살리고 전 세계를 살린 것처럼 그 정신이 우리 속에 들어와야 민족을 살릴 수 있습니다.
민족을 살리는 사랑
민족을 살려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국민의 가슴속에 사랑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언제부턴가 우리 속에 독이 들어왔습니다. 외국의 침략을 통해서 들어온 독, 남북 분단으로 말미암아 동족을 원수 삼은 독, 군사독재자들로부터 학대받으면서 응어리진 독, 이 독들이 우리 속에 있습니다. 이 독을 뭘로 치유하겠습니까? 이 민족을 치유할 수 있는 처방이 뭡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몸을 희생해서 사랑하신 그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들어가야 이 민족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나라를 사랑한다는 말속에는 국토를 사랑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좁은 땅덩이에 살면서 무덤을 수백평씩 깔고 누워있는 사람들은 애국자가 아닙니다. 자기 땅이라고 자손만대가 함께 살아야 할 땅을 마음대로 깎아서 수백평씩 깔고 누워있는 것이 옳은 일입니까 옳은 일 아닙니다. 국립 묘지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통령을 했다고 하더라도 무덤 만들어 거기 누워있는 것은 애국자가 아닙니다. 중국의 등소평은 죽을 때 자신을 화장시키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애국적인 정신입니까?
도산 안창호 선생이 중국 남경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을 때 어느날 밤 선생을 열렬히 사모하던 애국 동지중 한 여인이 선생에 대한 불같은 정욕을 억제하지 못하고 선생의 침실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때 도산은 아버지와 같은 위엄있고 인자한 음성으로 그 여인의 이름을 부르면서 “무엇을 찾으러 왔오. 책상 위에 양초와 성냥이 있으니 불을 켜고 찾아보시오.”라고 했습니다.
이 위엄있는 한마디에 그 여인은 꿈에서 깨어난 듯 말없이 나가버렸습니다. 그 후 도산은 그 여인을 만나 이렇게 충고했습니다. “나는 그대가 조국을 애인으로 삼고 조국을 남편으로 삼고 섬기기를 바라오.” 이런 도산의 숭고한 정신에 감동을 받고 이 여인은 그 정신을 본받아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생을 바쳤다고 합니다.
애국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직장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일한다면 그것이 바로 애국입니다. 주부가 가정에서 설거지 할 때나 옷을 세탁할 때 세제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애국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7-8)
‘사랑하는 자들아’라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아’ 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서 그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그 사랑을 받아야 이웃도 사랑하고 나라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회에 큰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을 조사해 보면 대개 성장 과정에서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나라를 살리는 길이 됩니다. 부부가 불화하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는 자라서 어떤 사람이 될지 우리는 모릅니다. 한 가정이 파괴되는 것은 우리만의 불행이 아닙니다. 사회 전체의 불행이 됩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한다는 것을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서로 웃어주는 것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서로 칭찬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서로 격려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서로 마음을 주고받는 것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가 죽기 얼마 전 남을 위해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슬퍼하는 사람에게 미소를 보여주십시오. 아주 잠시라도 좋습니다. 외로운 사람을 찾아가십시오. 비를 맞고 있는 사람에게 우산을 건네십시오. 눈먼 사라에게 책을 읽어주십시오. 잠시 시간을 내어 아이들을 돌봐주십시오. 당신의 작은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길 건너편에, 당신의 집 옆에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세상은 그렇게 단순한 일로 좋아지고 아름다워진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자기 목숨을 내놓고 죽어야만 애국이 아닙니다. 자기 목숨을 죽여서 민족을 살린 예수의 정신을 담아서 자기를 부정하고 살아가는 것이 애국입니다.
민족을 살리는 소망
지금 이 나라의 소망이 어디에 있습니까 지성인들은 너도나도 이 역사의 부정적인 것만을 들춰서 나라가 금방이라도 망할 것처럼 떠들어댑니다. 조금만 경제가 어려워도 나라가 거덜날 것처럼 떠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끝까지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십니다. 이 나라를 지키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이 백성을 살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일을 열심히 하던 어느 집사님이 교회에서 상처를 받았습니다. 낙심이 되어 집으로 가다가 졸업하는 조카에게 꽃을 선물하려고 꽃 가게에 들렀습니다. 꽃집 주인인듯한 할머니는 뭐가 그리도 기분이 좋은지 환한 얼굴로 찬송을 부르면서 꽃을 팔고 있었습니다. “할머니, 할머니는 늘 그렇게 기분이 좋으세요. 괴롭고 걱정되는 일이 없으세요” 그러자 할머니는 “내 나이만큼 살아봐요. 왜 걱정이 없고 괴로움이 없겠오. 그럴 때 나는 예수님을 생각한다오. 양손과 양발에 못박히시고 옆구리에 창 찔리시며 돌아가셨지요. 그러나 사흘째 되는 날 부활하셔서 우리의 소망이 되셨지요. 그래서 나는 고통스럽고 앞이 캄캄할 때마다 ‘사흘만 참자 어두움은 사흘 뿐이다. 사흘만 소망을 잃지 말자’라고 다짐한다오.”라고 말했습니다. 그 집사님은 할머니의 고백에 은혜를 받고 ‘아무리 가슴 아프고 힘들어도 사흘만 참자 사흘만 참자’ 하면서 모든 어려움을 이겨냈습니다. 결국 사흘만 참자고 한 것이 수십년을 살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으로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소망을 주셨습니다. 소망을 심는 자만이 애국자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다 망하는 것처럼 떠들어댈 때 분명한 소망을 가지십시오. 아무리 사업이 안된다고 해도 옛날 흉년에 굶주리던 때보다는 낫습니다. 경제가 어렵다고 말해도 6.25전쟁을 겪던 시대보다는 낫습니다. 전세방을 산다고 탄식해도 옛날 우리 조상들에 비하면 우리는 잘살고 있는 것입니다. 희망을 가지십시오. 만나는 사람마다 희망을 주십시오. 자녀들에게 희망을 주는 아버지가 바로 애국자입니다.
빌리그레함 목사님이 여의도 광장에서 외쳤던 한마디는 지금도 이 민족의 희망이 되고 있습니다. “나는 카나다에 갔다. 아침 새 소리에 잠을 깼다. 나는 일본 동경에 갔다. 자동차 엔진 소리에 잠을 깼다. 나는 한국 서울에 왔다. 새벽 종소리에 잠을 깼다. 세계의 희망은 한국에 있다. 새벽에 깨어 기도하는 나라, 새벽을 하나님 앞에 바치는 나라 이 코리아가 세계의 희망이다”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기도할 수 있는 한가지만 있다면 절망하지 않습니다.
링컨의 대통령 취임사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가 당면한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할 때 우리의 지혜와 열심만으로는 안됩니다.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의지해야 하며 하나님을 굳게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이 나라를 돌보셨으매 결국 우리나라를 어려운 위기에서 건져주실 것입니다. 기도는 민족을 살립니다. 예수님은 소망이십니다.”
예수 한 사람이 죽어서 유대인뿐만 아니라 전 세계 민족을 살려낸 것처럼 애국자이신 그리스도를 본받는 믿음을 가져야 됩니다. 사랑을 가져야 됩니다. 그리고 소망 위에 이 민족을 세울 때 이 민족은 영원히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제사장의 나라, 번영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