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15(수요새벽설교)“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성경: 고린도후서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1: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 이 있기를 원하노라 1: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오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1: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1: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한교연(CCIK) 가입 교단 대한예수교장로회 영성반석 총회 직영 영성반석신학교 (토요일만 운영) 3개월 한 학기, 한 학기에 9번 또는 10번 강의. 남여학력나이 불문 용인 죽전역에서 도보로 12분. 주차장 완비. 1년 4학기제. 1년뒤 목사안수. (신학교 및 일반대학 졸업자) 아니면 학부과정 2년 8학기.(학비저렴, 장학급 지급) 졸업 후 1년 뒤 목사안수. 죽전역, 저렴한 학비, 문의 01023769966
할렐루야~! 오늘은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라는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이제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아버지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자비의 아버지이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단순히 하나님께서 자비로우신 분이라는 뜻 외에 ‘자비’가 하나님게로부터 유래되며 하나님께서 자비의 창조자시고, 근원이심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속성 중에서 특별히 자비를 언급한 것은 본 서신에서 자신과 고린도 교인들이 겨r은 환난에 대한 하나님의 이루를 말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환난 가운데서 붙드시고,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위로를 직접 체험한 바울은 하나님을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내적 속성인 하나님의 자비가 외적 형태고 구체화된 것이 바로 위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위로에느 격려가 포함됩니다. 단순한 안정이나 긴장 이완이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환난으로부터 실제적으로 구해 주시는 것을 포함해서, 삶의 문제들을 견뎌낼 수 있는 방법도 알려 주시고, 필요한 훈련도 시키시고, 인도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성령을 가리키실 때 이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성령은 격려하시는 분이신 것입니ᅟᅡᆮ. 파라클레세오스(헬, 위로)는 파라클레시스(헬, 성령)이란 말과 같습니다. 성령의 사역이 위로의 사역입니다. 파라클레시시는 성령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입니다. 요한복음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보혜사의 헬라어가 파라클레토스인데 곁에라는 뜻의 파라와 부름 받은이라는 뜻의 클레토서의 합성어로서 곁에서ㅓ 돕기 위해 부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상담자, 위로자, 조력자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보혜사로서 오실 성령께서 우리 곁에서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찰하셔서 모든 우리의 말할 바와 행할 바를 지도 하시고 가르치시며 돕고 권면하실 것이라는 말슴입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또 다른 보혜사’라고 말씀하시믕로 자신이 이 땅에 있을 동안에도 ‘보혜사’로서 계셨음을 알려주십니다. 요한은 실제로 그의 서신 요한 1서 2장 1절에서 예수님을 파라클레토스로 묘사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에 계시면서 제자들을 자싱히 가르치시며 그들의 고난과 어려움에 대해 위로하시고 그들의 세말한 부분까지 도와주시고, 제자들 편에 서서 변호하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파라클레토스 직분은 그의 독특한 사역인 중보 사역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예수님은 중보자이시기에 죄인 된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변호하시며 고난 가운데서 위로를 주시며 어려운 문제의 상담자가 되기도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의 본이 되셨기 때문에 고난 받는 자를 능히 도우십니다. 고난이 넘친 것같이 위로가 넘친다는 것은 바울이 비록 많은 고난들을 받았지만, 그러한 고난에 비할 수 없는 위로를 받았기 때문에 고난에 비례해서 더욱 크게 받는 위로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성도가 극심한 고난을 받을 때 위로가 그보다 작다면 고난을 견디기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이 큰 만큼 하나님의 위로는 더욱 크시기 때문에 고난을 이기고 오히려 기뻐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이러한 고난은 믿음을 더욱 성숙하도록 하는 목적도 있고, 오히려 더 중요한 목적은 성도가 그리스도와 완전한 연합을 이루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에만 참여하는 것은 완전한 연합이 아닙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에도 참여함으로써 비로소 그리스도와 완전한 연합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당연히 받는 고난보다 더 큰 위로를 주시며, 고난을 통해 우리를 성숙시키시고, 고난을 통해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시는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며 기쁨이 가득한 하루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408장] 나 어느 곳에 있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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