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오래된 엽서(葉書)의 시학(詩學)에 붙여
‘당신은 시를 어떻게 쓰는지 알지만, 나는 왜 쓰는지 안다.’ 랭보가 베를렌느에게, 시 논쟁 중, 거칠게 뱉어버린 말이다.
사람들이 잘 읽지도 않는 시를, 시인들은 언제, 그리고 왜 쓰는 것일까? 흔히 ‘외로우니깐 쓰는 것이다.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쓰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이백, 두보, 소동파 등 중국의 유명한 시인들이나, 우리의 윤선도나 정철의 시가를 보면, 권좌에 밀려나 유배지의 외로움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은, 명징(明澄)한 관조의 모습으로, 자연을 노래한 것이 대부분 임을 알 수 있다. 혼자가 되어 외로울 때이면, 정신과 영혼이 맑아져 그동안 찾지 못했던, 자기 성찰의 시간이 오기 때문이다.
이를 슬픔의 미학, 또는 비극이라고도 하는데, 이러한 비극은 우리의 감정에 특정한 쾌감을 제공해 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는 이를 ‘카타르시스’라고 한다. 다른 사람에게 불행과 고통을 주지 않고도, 비극이라는 안전판 위에서 독자들은 이런 감정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것이다.
가령 여기에 사랑을 잃은 화자(話者)의 비애를 노래한 시가 있다고 하자. 그는 그 잃어버린 사랑을 찾기 위한 마지막 방법으로, 그들의 소통 통로가 되었던 우체국을 기억해 낸다. 이수익 시인의 ‘우울한 샹송’이란 시가 그러한데, 이렇게 시작된다.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그곳에서 발견한 내 사랑의/ 풀잎 되어 젖어 있는 비애(悲哀)를/ 지금은 혼미하여 내가 찾는다면/ 사랑은 또 처음의 의상(衣裳)으로 돌아올까.’ 이 시를 읽으면, 어느 순간 슬프도록 아름다운 화자(話者)의 순수가 감정이입이 되어, 그가 나로 치환이 되고, 마침내 나의 잃어버린 사랑 찾기가 된다. 이런 것이 시가 아닐까?
젊은 시절, 엽서를 즐겨 쓴 때가 있었다. 긴 문장을 쓰지 않아도 의사가 전달되는 편리함이 있어 좋았다. 후배가 보내온 엽서에는 이런 시가 있었다. ‘오늘 눈이 내린다/눈은 정(靜)이다/ 눈은 슬픔을 산출(産出)한다/ 눈처럼 눈부시게 다가왔다가/ 말없이 녹는 소녀여/ 넌 나를 끝없이/ 방황케 한다.’ 엽서란 공개되는 서신이기 때문에 글씨가 예쁘면 좋다. 그 엽서를 가까운 우체통에 넣었을 때 ‘땡그랑’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멀리 수신인에게도 들려지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이제 엽서도 편지도 쓰지 않는, 인정의 기미(幾微)를 전해줄 수 없는 메마른, 불행한 시대가 되었다.
누구에게나 이런 기억이 한 번쯤 있었을 것이다. 썼다가는 지우고 다시 생각하다, 끝내는 부치지 못한 엽서가 그러하다. 책갈피에 넣어 두었다가 어느 날 문득, 그 오래된 엽서를 보았을 때의 씁쓸한 기분은 어떠했을까? 안상학 시인의 ‘오래된 엽서’가 바로 그 증인으로, 그 첫 연은 이러하다. ‘오래된 어제 나는 섬으로 걸어 들어간 적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엽서를 썼다/걸어 들어갈 수 없는 그 사람의 마음을 생각하며/ 뭍으로 걸어 나간 우체부를 생각했다.’ 그리고 마지막 연 가까이 와서는, ‘아주 오래된 오늘/ 오래된 책 속에서/ 그때 뭍으로 걸어갔던 그 엽서를 다시 만났다/ 울고 있다/ 오래된 어제 그 섬에서 눈물도 함께 보냈던가.’ 이처럼 우연히 만나, 알고, 서로 사랑하다, 끝내 헤어짐은 이 땅을 사는 우리들의 슬픈 이야기이다.
시와 엽서, 그리고 우체국이란 언어는 조금 뜬금없이 들리나, 며칠 전 집사람과 함께 시골 선산에 성묘를 다녀오던 중 들른 풍경에서 나온 이야기이다. 나이가 들어도 고향에 가는 길은 역시 설렌다. 시골 들녘은 이미 황금바다가 되었고, 산소로 가는 길 양옆엔 코스모스가 가을바람에 하늘거리며, 왜 이제 왔느냐고 묻는 듯하다. 길가에 늘어선 가로수는 치렁치렁 열린 감들의 무게로 견디기 힘든 모습인데, 아무도 따가는 사람이 없다. 그곳에서 우리가 묻힐 가묘(假墓)를 볼 때마다 마음이 예사롭지 않다. 잠깐의 외출과도 같은, 이 땅에서의 소풍이 언젠가 끝나가기 때문이다.
돌아오는 길엔 제천 호반에 있는 청풍리조트를 들렀다. 모처럼의 가을 여행을 한 셈이다. 그곳 레이크호텔은 청풍호수에 둘려있다. 10월 중순이라서 아직 단풍은 이른 편이나, 가끔 양지바른 곳은, 빨갛게 성급히 물든 나무들이 보였다. 늦은 오후에 도착하여, 어둡기 전에 호텔 부근 자드락 호수길을 걸었다. 자드락이란 나지막한 산기슭의 비탈진 땅에 난 좁은 길을 일컫는다. 이튿날 아침에도 그 길을 따라 산책했다. 이른 아침이라 호수는 안개로 덮여 있고, 물오리들이 여유롭게 헤엄치기도 하고, 더러는 푸드덕 날갯짓하며 날았다가 물 위로 내려오며 물살을 기다랗게 가르는 모습이 평화롭다.
문득, 호수가 보이는 그곳 호텔 정원 가장자리에, 빨간색으로 칠한 ‘청풍호숫가 우체국’ 표시판과 우체통이 보였다. 잠겨진 우체통에 여행자들이 엽서를 써넣으면, 무료로 수신인에게 배달이 될 수 있도록 배려를 한 것이다. 물론 엽서도 호텔에서 준비해 두었다. 이런 예쁜 생각을 누가 과연 한 것인가? 그는 우리가 하마 오래전에 잊어버렸던 아름다운 추억을 되돌려 놓고 싶었을 것이다.
불행한 것은 막상 엽서를 써 보낼 수신인이 없다는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메마른 사막을 너무 편리하게 걸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스마트 폰만 있으면 그만이다. 그때 떠오른 것이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로 시작되는 ‘우울한 샹송’이었다. 우체국이란 말은 매우 정겨운 이름이다. 어릴 때, 시골 생활에서의 즐거움 중의 하나는 누렇게 해어진 배달 가방에서 우체부 아저씨가 꺼내주는 편지를 받을 때이다. 그것이 기쁜 소식이면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우체국 로고에 까치들을 상징으로 하지 않았을까?
‘인생은 살기가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부끄러운 일이다.’라는 윤동주 시인의 시가 말해주듯, 복잡한 세상을 험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시와 엽서나 우체국 이야기는 한가한 복고풍 낭만에 지나지 않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느리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산소와 같은 풍미의 커피 한잔의 추억이 될 수 있을 것이며, 누구에게는 치유가 될지도 모른다.
엽서 한 장에 예쁜 글씨로 시를 써 보낼 수도, 받을 수신인도 없지만, 그래도 다행한 일은 자연이 우리에게 보내는 엽서를 이 가을에 매일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산동네 숱한 나무들이 초연히 떨구어내는 잎새들이 하늬바람에 날릴 때마다 자연이 보내는 그 신호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조금씩 깨달아 가고 있다.
언젠가 우리도, 스치는 바람에 흩날리어, 자연 속으로 되돌아가는 한 장의 엽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바라기는 그 엽서가 슬픔보다는 기쁨과 감사의 시어(詩語)로 가득 찼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