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宗和會(종교간 화합을 위한 모임) 會報
푸른 들 소리 [제 13권 19호](통권 234호)(2011년 11월 7일)
賢賢易色
장 기 홍
요즘 EBS에서 도올선생이 중용을 강의 중이다. 그의 강의를 방송국에서 중계를 하는 것인데, 중계를 중도에서 그만 두게 되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도올은 피켓을 들고 이럴 수가 있느냐 하면서 혼자 데모를 했다. 그는 한 때 정부 시책인 4대강 공사를 반대했는데 그 보복으로 강의 중계를 중지당할 처지라고 해서 데모를 했던 것이다.
공자의 제자 한 사람이 '현현역색'이라고 주장한 것이 논어에 나와 있다. 그 문구의 뜻은 '현자를 현자로 모실 때에는 정색을 하고(색을 바꾸어서, 즉 색과 상관 없이) 선입견 없이 대해야 한다는 뜻이다. (흔히 '현자를 여자 좋아하듯이 좋아해야 한다'고 해석 하나 잘못이다.) 도올이 현자라 해서 그의 강의를 중계하기 시작했으면 그가 과거 어떤 정치적 견해를 가졌든지 상관 말고 대중을 위해 널리 보급시켜야 할 것이다. 현현역색의 예이다.
현현역색은 색을 돌보지 말라는 뜻이다. 색은 현상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나이를 의식하는 것도 색이다. 현자라 생각되면 혹은 현명한 말을 하고 있다고 판단되면 청년이거나 자식이거나 제자거나 그런 차별에 구애받지 말고 현자로 모셔야 옳다는 뜻이다.
우리가 논어를 읽는 것도 공자가 중국인인지 한국인인지 그런 것은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이다. 현명한 말씀이면 흑인이건 백인이건 상관없다. 오직 현자이므로 해서 그에게 배우는 것이다.
다시 도올 이야기로 돌아가자. 그의 중용강의는 어렵다. 그러나 내가 아는 중용은 간단하다. 어머니 노릇, 며누리 노릇 잘하면 그것이 중용이다. 며느리가 돈을 너무 아끼면 인심을 얻지 못하여 형제간 친척간에 틈이 생겨서 안 된다. 그렇다고 돈을 아끼지 않으면 노후에 곤란하다. 그러므로 중간 쯤을 택해야 한다. 그것이 중용이다. 어머니나 대통령 노릇도 마찬가지다. 적당 적절히 잘 해야 한다. 어머니는 때로는 거짓말도 해 가면서 아이를 키우고 다스린다. 중용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미묘한 것이기 때문에
어려우나, 실상 알고 보면 옛날부터 현자가 다 실천하던 것이다. 그래서 고대 서양에서 이미 중용이 논의되었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장황하게 논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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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여행기
홍 국 주
우리 인류는 누구나 淸淨自性에 萬德을 갖추고 있건만 스스로 미혹하여 八苦를 위주한 三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구나. 그 근원을 따지면 탐진치(貪瞋癡) 삼독이니 왜 毒이라고 이름 하느냐 하면 청정자성이 발로하여 만덕이 널리 비추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역사를 살펴보면 탐욕의 구름이 덮은 제국주의, 진에가 치성하던 세계대전과 종교전쟁이 있었다. 또 인류를 神에 예속시키고, 신분으로 억누르며, 탐구의 정신과 사상의 자유를 금지한 중세암흑의 시대도 있었다.
나그네는 그 문화에 길들어 지지 않은 갓 시집간 며느리 같다. 따라서 그 문화의 태생과 깊은 가치는 알 수 없어도 보편성을 가지고 문화적 중압감에서 벗어나서 자유롭게 보고 느낄 수 있는 이가 아니겠는가. 오가는 날 빼고 12일간(2011.9.27~10.10) 인도와 네팔을 둘려본 느낌을 적어본다.
첫째, 인도 민중은 가난이 깊어 소금에 절여진 새우 같다. 나그네는 통상 현실에 초연하건만 가난으로 찌든 이들의 삶을 보니 내 마음이 저려온다. 길거리에 거지가 득실거린다. 아이들은 떼거지가 되어 있다. 우리의 6.25 전쟁 이후 극빈의 생활상 같다. 끝없이 펼쳐진 평원은 무엇에 쓸 것인가. 아열대의 기후와 넓은 평원으로 의식주는 큰 불편 없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너무나 다른 현상에 머리가 멎는 듯하다. 마치 거지양성소 같다.
우리나라의 박정희 혁명정부가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새 세상을 연 새마을운동을 이 땅에서 기대할 수는 없을까. 사회주의자인 네루 일가의 영국으로부터 광복 후 60여 년간 치적이 너무 참담하지 않는가. 김일성 일가와 너무 닮았다. 겉으로는 법치주의와 개방경제체제인지 모르지만 그 결과는 가난과 구습과 네루一家의 독재정치가 아닌가.
둘째, 주거와 생활환경이 더럽다. 온 국토가 똥구덩이다. 각 가정에 빨래줄이 보이지 않는다. 소똥은 생활 깊이 들어와 있다. 방바닥과 벽에 바름으로써 해충을 방지한단다. 이를 말려 빵떡 모양으로 만든 후 취사연료로 사용한다니 그 유용성을 논외로 하더라도 생활주변과 도로 어느 곳 소똥과 사람똥으로 마음 놓고 발 디딜 곳이 없다. 동 트기 전 시내,외를 막론하고 일명 자연화장실로 향하는 모습은 마치 가가호호에서 학생들이 등교하는 모습 같다. 책가방 대신 물병 하나씩 잡은 것이 다를 뿐이다. 동트기 전 길가 곳곳에는 노숙자로 길을 함부로 걸을 수 없다. 전국 방방곡곡에 쓰레기 더미가 집체같이 쌓여 있다. 아예 쓰레기를 처리하는 공공의 서비스가 없다. 옛날처럼 자연적으로 없어져 자연 순환에 맡긴다는 생각이지만 이미 그 내용물은 산업화의 물질이라 없어지지 않는다. 전국토가 늪과 하천이 많은 데 이미 오염되어 육안으로 검게 보이며 온갖 쓰레기로 범벅이 되어 있다. 아우랑가바드, 보팔, 아그라의 기차역에는 피난민들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이 모두가 합창곡을 연주하니 나그네는 인류애로 인한 치받는 감정으로 몰래 애를 삭인다.
셋째, 도로에서의 混沌이다. 莊子 책머리에 천지가 열리기 전에 혼돈이 있었다는 바로 그런 상태다. 소, 돼지, 양, 개, 말, 낙타, 코끼리, 사람, 자전거, 바이크릭샤, 오토릭샤, 경운기, 트랙터, 오토바이, 승용차, 버스, 타타트럭 등이 불량하고 좁은 도로를 거들먹거리며 질주하고 상대를 배려 않는 걸음들이 공존하고 있다. 마치 절대승자 없는 자연생태계 같다. 광풍노도처럼 치킨게임*의 경쟁자처럼 달린다. 폭우 때 협곡의 물 소용돌이처럼 달린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사고현장이 예상처럼 목격되지 않았다. 해가 지면 만물이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가듯 물고기가 유영하듯 아무 일 없이 내일을 맞이할 채비를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속에 숨겨진 이치가 보이는 듯하였다.
길 위에서는 누구나 주인이지만 어느 누구도 우선할 수 없고 깊은 생명에 대한 경외감이 지배하는 것 같았다. 이 점은 나그네에게 생명의 존귀함을 실천하도록 일깨워 주었다. 길에서 절대 어른은 소神이고 소는 항시 여유와 권위로서 길 안팎을 유유히 거닐다가 누어서 쉰다. 고속도로 위에서도 그와 같다. 신속함과 경제성, 합리성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이러한 인간의 분별심이 생겨나기 前 말과 논리가 생기기 전의 혼돈시대를 생각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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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킨게임(chicken game): 어느 한 쪽이 양보하지 않을 경우 양쪽이 모두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 극단적인 게임이론. 국제정치학에서 사용하는 게임이론 가운데 하나임.
넷째, 힌두교의 나라이다. 넓은 평원과 늪으로 이루어진 인도 땅은 힌두사원으로 덮혀 있으며 그 위의 모든 생명체는 힌두사상에 길들여져 있었다. 우주만물 가운데 가장 존귀한 사람으로 태어났으나 그 虛虛로운 자율성을 박탈당하고 소보다 못한 신분을 가진 자가 무수히 많다. 영혼불멸과 업 사상에 근거한 카스트제도의 올가미에 얽혀 21세기의 문명사회에서 자신들의 종교요 전통이라는 명분으로 그리고 민중의 무지와 지도자의 방관과 승자의 안주로 하층민들은 짐승보다 못한 삶을 연명하고 있다.
이번 여행기간이 힌두교 최대 행사인 따사라 축제기간과 중복되어 走馬看山格이지만 힌두교의 단면을 볼 수 있었다. 10일간 행사 주제는 최대神인 라마신이 5천여 년 전에 스리랑카의 라왕신을 죽이고 승전함을 축하하고 기쁨을 함께 하는 것이라고 한다. 조그만 시가지만 지나려 하여도 축제인파로 통과에 어려움을 겪고, 심지어 길을 막아버리면 멀리 둘러서 가야했다. 모든 종교의식이 그러하듯 나그네의 마음을 여미게는 하지 못하였다. 앞으로는 어디를 가든 사람이 많다는 말은 하지 않을 것 같다.
축제가 끝난 다음 날에는 모든 힌두인들이 춤추고 노래하며 술을 마신다. 광란의 하루가 허용된단다. 이 날은 1 년간 쌓인 카타르시스와 나쁜 감정을 발산시키는 것이란다. 그나마 좋은 제도인 것 같다. 이 날이 저물 쯤 행사를 위하여 만든 神像들을 성스러운 강가강(겐지스강)에 띄운다. 10월9일 아침 성스러운 강가강의 해돋이와 화장터를 관광하기 위해 바라나시의 동쪽 강변으로 가서 쪽배에 몸을 실었다. 꽤 센 물결을 거슬러 상류 쪽으로 뱃사공이 노를 젓고 있었다. 이 때 어제 행사 후 버린 神像들이 강물에 둥둥 떠내려가고 있었다. 성스러운 강물은 마치 80년대 금호강물처럼 검은 탁류였다. 여기에 아침 일찍부터 멀리서 온 순례객들이 목욕하고 있었다. 힌두인의 일생에서 가장 성스러운 의식이란다. 동행자들은 모두 괴이하다고 야단이다. 노 젓는 일 멈추니 배는 물살에 하류로 떠내려갔다. 그 때 해가 힘차게 연무를 뚫고 하늘로 솟아올랐다. 저 건너 시신을 메고 와서 강물에 씻긴 후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대렴(大斂) 없이 나무로 된 들 것에 운구하였다. 애기 시신이 배 옆을 둥둥 떠내려간다. 모두 놀라며 한마디씩 한다.
전날 저녘 바라나시 강변에서 열리는 힌두교 저녁예배에 가 보았다. 강변을 가득 메운 예배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브라만 세 사람이 제단 위에서 행사를 집전하였다. 마치 우리의 굿당을 확대한 것 같았다. 저토록 대중들은 매일 저녁 성스러운 강에 운집하여 3억3천의 神에게 예배하니 어느 세월에 미몽에서 깨어날 것인가. 배에서 바라 본 강변 언덕에는 고대 왕조의 왕궁들로 가득 차 있다. 마치 성벽같이 빈틈없이 꽉 차있다. 중세유럽의 미몽을 깨는 종교개혁, 르네상스, 합리론과 경험론에 바탕하여 자연과학을 탄생시킨 위대한 인간의 역사가 여기서는 왜 태동하지 않는가.
다섯째, 인류를 감동시키는 타지마할이 있다. 타지란 왕관의 뜻이며 마할은 궁전을 의미한다. 무굴제국의 3대왕 사자한(1592~1666)은 3째 왕비 몽따즈를 너무 사랑하였다. 그녀가 첫아이를 출산하다가 산고로 죽자 왕은 그만 넋을 잃고 국정을 놓았다. 마치 노국공주를 잃은 공민왕과 매우 닮았다. 임종 시 몽타즈는 부군 사자한에게 새로운 여자를 사랑하지 말 것이며 이 세상에 하나 뿐인 진귀한 보물을 나에게 선물할 것을 유언으로 남긴다. 그 후 왕은 그리스와 중동 여러 나라에 사신을 보내 당대 최고의 기술자를 데려와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간다. 사랑과 기쁨 등 좋은 것을 상징하는 흰색 대리석으로 웅장한 규모, 아름다운 모습 그리고 과학적 균형미를 갖춘 영혼의 궁전을 성스러운 야므나강 가에 세워 사랑하는 그녀, 몽따즈의 영혼에 바친다. 2만 명의 기술자들은 준비기간을 포함하여 25년의 세월을 보냈다. 국력손실이 컸는데 설상가상 슬픔과 우수를 상징하는 검은색 타지마할을 또 지으려다가 그는 아들에 의해 권좌에서 축출된다. 지금은 그 아름다움과 과학적 건축물로서 세계 7대 불가사의가 되고 올해는 그 중 최고라는 평판을 얻었다고 인도인은 열광한다. 이제 이로 인하여 세계 관광객이 몰려드니 사자한의 위업도 자연히 높아지고 그 사랑의 이야기를 담은 오페라도 제작되어 매년 관광철에는 공연이 되고 있다. 우리 순례단도 R석에서 관람하였다. 통역 이어폰 키번호가 영어 다음 2번(3번 일어, 4번 중국어 등)이라서 모두 놀라는 기색이었다. 한국의 국력이 새삼 느껴졌다.
사자한은 효성스러운 아들이 있어 실각 후에도 타지마할이 바라보이는 궁궐에서 천수를 누렸고 죽어서도 사랑하는 사람의 옆에 누웠으며 나라도 지켜나갔지만 공민왕은 타지마할도 짓지 못하고 천수도 누리지 못하고 나라도 지키지 못하였다. 사랑의 애절함이야 사자한에 짝할 수 있어도 그 사후의 명성은 천양지간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어김없이 우리 인감의 탐욕과 진에와 어리석음의 아픔이 있다. 이 불멸의 작품을 지은 기술자 2만 명은 공사완공 후 손가락과 혀가 절단되는 고통을 안았다. 이들이 제2의 타지마할을 지을 것을 염려하여 생긴 참극이란다. 사자한의 유치함과 자아집착증이 역사의 거울에 훤히 드러났다.
여섯째, 아잔타石窟과 엘로라석굴이 인도 중부 아우랑가바드에서 북동과 북서에 위치한다. 아잔타석굴은 낮은 산속 계곡에 있다. 에스字로 구비치는 와고라강이 음푹 파인 계곡을 흐르고 있다. 병풍처럼 생긴 암벽 중턱, 3백 m 가량의 길이에 28개의 석굴을 만들고 그 속에 佛像과 붓다의 일생을 石像과 그림으로 조성하였다. 2천2백년 전부터 8백년 세월에 걸쳐서 만들었다니 선조들의 세월을 잊은 인고의 노력이 깊이 사무친다. 왕족과 재력가들의 施主金으로 그 재원을 마련하였단다. 天頂畵와 壁畵가 천연안료를 사용하여 화려하게 그려졌고, 석굴 공간의 기온과 습도, 採光과 통풍이 적절하여 2천년이 넘어도 그림의 내용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잘 보존되어 있다. 이 아잔타석굴이 완성될 무렵 동쪽 100여리 큰 언덕에 엘로라석굴이 착공되어 4백년에 걸쳐 34개의 석굴이 완성된다. 현존하는 석굴 건축물로서는 세계 최대 규모란다.
아잔타석굴이 모두 불교사원인 것과 달리 엘로라석굴은 1-12번까지는 불교사원이고 13-29번까지는 힌두교사원이고 나머지 5개는 자이나교 사원이다. 무슨 연유로 하나의 언덕에 불교, 힌두교, 자이나교 사원을 차례로 세웠는지 알 수 없으나 종교 세계의 의좋은 三兄弟 같았다. 규모와 아름다움 그리고 조각의 난해성으로 보면 힌두교 16번 사원이 단연 으뜸이었다. 불교사원에는 승방도 여럿 있어 그 안에 가부좌 하고 앞을 보니 숲으로 덮힌 고원이 煙霧 속에서 끝없이 펼쳐졌다. 그 옛적 수행승들과 신도들이 이 평원을 얼마나 행복에 겨운 걸음으로 오갔을까! 지금은 관광객과 순례자들을 안내하고 유적을 지키는 관리인 수 명 뿐이다. 아잔타석굴은 한때 이슬람의 탄압으로 불교가 쇠퇴하여 세상에서 잊혀졌다. 1819년 영국인이 사냥을 하다가 우연히 저 계곡 건너 석굴을 발견하고 탐사한 인연으로 우리가 지금 순례할 수 있단다. 석굴암이 일본인에 의하여 발견된 역사가 불현듯 생각났다. 인간사의 무상함과 生住離滅 하는 세상사가 순례자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언젠가 여기에 正法의 깃발이 휘날리어 세상의 어둠을 밝혀주는 성지가 되리라!
일곱째, 싯달타 태자와 석가모니불께서 삶을 오롯이 이루신 땅이다. 후사가 없는 카필라국에 왕자로 태어나서 세상의 학문에 두루 통달한 훤훤장부가 되었을 때 求道沙門이 되었다. 진리탐구를 위하여 6년을 고국 떠나 먼 나라에서 명상과 고행을 위주한 당시 모든 수행법을 섭렵하셨다. 마침내 가야의 큰 나무 아래에서 위 없는 깨달음을 이루시니 땅 이름은 부다가야가 되고 큰 나무는 보리樹(깨달음을 이룬 나무라는 뜻)가 되었으며 싯달타 태자는 붓다 석가모니가 되었고 시대는 末法時代(진리가 가려져 구현되지 않는 암흑시대)가 正法시대가 되었다.
正覺을 이루기 전은 싯달타의 삶이요 자기구원인 생사해탈의 길이다. 정각을 이룬 후는 일체중생을 구원하고 제도하는 붓다 석가모니의 길이다. 정각을 이루신 후 6주간 보리수 근처를 떠나지 않으셨다. 나를 윤회케 하는 자를 찾아낸 후 항복시켜 생사윤해로부터 벗어났다.
형성되지 않은 불생불멸하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진성을 깨닫고 게송을 지으셨다. 인류가 직면한 가장 절실한 현실 문제를 푸는 一聲이였다.
부다가야의 보리수 아래 앉기 전에 고행으로 피골이 상접하여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갔다고 나중에 술회하셨다. 사문 싯달타가 수자타 여인의 유미죽을 드시는 것을 함께 고행하던 다섯 도반이 보고, 싯달타를 파계자로 지칭하며 왕따 시켰다. 홀로 되셨다. 가까이에 있는 니란지나강에 목욕 하고는 힘이 부쳐서 강뚝을 오르지 못하였다. 한 거사의 부축으로 뚝 위에 오르고 잠시 앉을 자리를 도움 받는다. 유미죽을 올린 수자타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수자타집터에 진신사리탑이 크게 조성되어있고 공양을 올린 자리에 수자타 사당이 잘 조성되어 있는 것에 견주어, 초라하지만 기념하는 정자가 있어 그분의 공덕을 회상할 수 있었다. 여기서 강을 바라보니 저 건너 부다가야 보리대탑이 숲속에 우뚝 솟아있다. 강을 건너 저기까지 갈 수 있는 기력회복을 위하여 여기서 며칠 머문 것 같다. 그리고 처녀 젖무덤같은 곳에 서있는 가장 크고 잎이 무성한 나무를 골라서 그 아래 목숨을 건 결연한 용기로 자리에 앉으신 후 7일 만에 온갖 유혹과 위협을 이겨내고 위없는 깨달음을 이루셨다.
부다가야에서 350 km 떨어진 바라나시 근교인 사르나드의 녹야원에서 한 때 도반이였던 다섯 사문을 제자로 받아들여 인류사에 처음으로 붓다의 법을 토하셨다. 영원불멸하는 자아(atman)가 있어서 윤회를 거듭한다는 브라만교의 교리를 연기법으로 혁파하셨다. 우리의 청정자성은 본래 ‘나,' 라고 내세울 그 무엇도 텅 비어있는 空임을 선언하셨다. 따라서 카스트제도에 따른 4계급의 실체도 空 하므로 누구나 자신의 삶의 방식으로써 최상의 계급에 이를 수 있고 나아가서 윤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설하셨다. 이후 45년의 중생 교화를 하신 후 세수 80세가 되어 인연 깊은 바이살리에서 천리 밖 쿠시나가라로 석달 간의 열반 행진곡을 장엄하게 울린다.
마지막으로, 佛塔의 나라이다. 世尊께서 불가촉천민을 교화하여 제자로 삼은 일이 있다. 불가촉천민(마하트마 간디가 천사라는 뜻의 하리잔으로 이름함)들이 이 사실을 알고 1970년대부터 불교개종운동을 한 결과 전체 인구의 1% 정도가 불교도라니 그 교단이 초라하기가 그지없다. 그러나 부처님의 80년 삶의 발자취는 불타고 파괴되고 무너져 내렸어도 그 웅대한 위용을 가늠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세존 열반 후 200여년 지나서 불교사에 전륜성왕으로 알려진 아쇼카 대왕(BC 273~207)이 있었다. 이 분은 왕자 시절 왕성에서 멀리 떨어진 중인도 지방의 산치에 지방장관으로 있었다. 부왕의 위독 소식을 듣고 바로 군사를 일으켜 99명의 형제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다. 이후 정복전쟁까지 하여 대제국을 건설한다. 이 때 승리와 정복의 기쁨에 대한 회의가 일어난다. ‘분노한 군인들의 창과 칼 끝에 죽어간 백성에게 전쟁이란 무엇인가?’ 하는 고뇌 끝에 자이나교에서 불교에 귀의하였다. 불교성지를 순례하고 절과 탑을 건립하고 경전결집에 여생을 바친다. 가는 곳마다 4獅子像 石柱를 세움으로써 이 후 이슬람에 의한 잔학한 불교탄압으로 불탑이 파괴되었어도 부처님의 8대 성지의 위치를 알리는 2,500년의 나침반이 되었다. 왕자시절 사랑한 여인과 그 아들을 위하여 산치에 진신사리대탑을 세웠다. 높이가 40 여m요 둘레가 150 m에 이르는 붉은 벽돌과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원뿔모양의 대탑이 고원의 봉우리에 서 있으니 멀리서 보거나 탑에서 사방을 둘러보거나 그 장쾌하고 늠름한 모습은 가히 말이 미치지 못하였다. 또한 아쇼카 대왕은 부처님 진신사리탑 8개중 7개를 해체하여, 봉안되어 있던 진신사리를 나누어 인도 전역에 84,000개의 진신사리탑을 건립하였다. 산치대탑은 불교 중흥의 시원지라고 한다. 사랑했던 여인과 그 아들은 나중에 시리아로 가서 홍법을 하였다고 전하여진다. 순례자의 마음을 저미게 한다.
부처님께서 열반을 앞두고 탄생지 룸비니, 위없는 깨달음을 이루신 부다가야, 처음으로 법을 설하신 녹야원과 곧 열반에 드실 쿠시나가라를 4대성지로 삼아, 후에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이 순례를 하도록 당부하셨다. 요즘은 후세에 정하여진 8대 성지를 귀중하게 여기고 있으며 우리 순례단도 이곳들을 빠짐없이 답사하였다.
불타고 부서지고 비바람과 세월에 씻기고 무너진 모습이지만 이 또한 시절인연의 탓 아니겠는가! 正法시대, 像法시대, 末法시대로 나누어 불법의 흥망성쇠를 이르신 세존의 뜻이 여기에까지 이를 줄이야! ‘慧命은 不滅이라’ 하셨으니 이를 유념하며 새 시대가 동트기를 기다려 본다.
형성된 것은 언제나 부서지는 것이요, 형성되지 않은 청정자성만이 不生不滅이요 不增不減이며 不垢不淨이라고 반야심경에서 이르지 않으셨던가. 청정자성을 깨닫지 못한 이는 언제나 형상을 따르고 의지한다. 저 또한 이러하여 붓다의 일생을 걸으며 같은 공기 마시며, 같은 흙을 밟으며, 같은 숲을 거닐고, 고요히 생각하는 데, 인도와 네팔 땅은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오히려 불법은 쇠퇴하였고, 파괴와 천시와 무관심으로, 한 때는 찬란하였지만 지금은 초라하게 변한 寺塔 앞에 아픔을 되새기며 五體投地로 예배하는 이의 이마에 구걸과 때를 쓰는 이 참담한 현실이, 들뜬 순례자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었다.
2,500여 년 전의 一大人의 삶을 경전으로만 만났는데 이번에 세존의 족적을 따라 가보니 지금까지 알 수 없었고 느낄 수 없었던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척박한 수행 공간과 고달픈 고행에서 감내하셨던 땀과 고뇌와 어묵동정(語黙動靜) 행주좌와(行住坐臥)에 심사숙고하는 모습이 눈에 선연히 보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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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 지 시 항 : 2011년 11월 모임
3木 모임 -- 2011년 11월 17일 (목) 19시
장기홍 교수님 자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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